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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8 (금)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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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746      
[조선]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1 (이성무)
2.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1

관련 문서

1.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1-1.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1-2.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일본 학자들의 견해
1-3.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1-4.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
2-1.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1
2-2.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3-1. 선조조의 당쟁 1
3-2. 선조조의 당쟁 2
4-1. 광해조의 당쟁 1
4-2. 광해조의 당쟁 2

당쟁은 조선 후기 사림정치에서 파생된 정치 현상의 하나이다. 조선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에는 정치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시대 구분이 필요하다. 조선의 정치를 담당한 계층은 양반으로 문반과 무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반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문ㆍ무 관료라는 의미를 가지던 양반이 뒤에는 그 가족ㆍ친족까지를 포괄하는 신분 개념으로 쓰였다. 그러나 양반 중에서도 특히 어떤 정치 세력이 정치를 주도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나는 조선의 정치사를 집권한 정치 세력을 중심으로 사대부정치기, 훈신정치기ㆍ권신정치기, 사림정치기, 탕평정치기, 외척세도정치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1) 사대부정치기

사대부정치기는 고려 말 조선 초기 유학적 소양을 지닌 문관 관료인 신흥 사대부들이 집권한 시기를 말한다. 12세기부터 원나라를 통해 주자학이 전래되었다. 이에 무신 정권 하에서 새로이 진출하기 시작한 신흥 사대부들이 예의와 염치를 숭상하는 주자학 이념을 이론 무기로 하여 구 귀족ㆍ사원의 부정ㆍ부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로운 농업 기술인 중국으 강남농법(江南農法)을 도입해 경제적 기반을 닦고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 학자 관료들이었다. 이들 사대부들은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정계에 등장한 송나라의 신흥 지주(지식인 관료 사대부 층)와 유사한 정치 세력이었다. 이로부터 사대부는 하나의 정치 세력을 가리키는 역사적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원래 사대부는 문관의 5품 이하인 사(士), 4품 이상인 대부(大夫) 등 문관 관료를 통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문관 관료뿐만 아니라 무관 관료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했다. 과전법(科田法)의 토지 분급 규정은 그 예이다. 고려 말에는 문관 관료인 신흥 사대부 이외에도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서 신흥 무장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조선 왕조의 건국 과정에서 넓은 의미의 사대부에 포괄되었으며, 그 주도 세력은 역시 문신, 즉 문관 관료들이었다. 문(文)을 높이고 무를 낮게 보는 유교적 문치주의 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신들은 무신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 것을 억제했을 뿐 아니라 왕실의 정치 참여도 철저히 제한했다. 종친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종친불임이사(宗親不任以事)]은 고려 이래의 불문률이었다. 사대부들은 행정 실무자인 서리(胥吏, 衙前)와 여자ㆍ환관들의 정치 참여도 봉쇄했다. 이것은 모두 중국의 문치주의에서 배운 것인데, 다만 환관의 경우 중국에서는 그들의 득세를 억누르지 못했으나 조선에서는 철저히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고려 500년 동안 수행해 온 과업 중의 하나인 지방의 반독립적인 향리 세력 타도의 마무리를 위해 이들을 행정 실무자인 중인으로 격하시키고, 지방사족(地方士族)의 지배적 지위를 확고히 해 주어 이들을 왕조의 정치기반으로 삼았다.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군현제의 개편도 수반되었다. 이렇게 되자 지방 사족의 정치적 진출은 장려될 수밖에 없었다. 군현마다 향교를 설치해 유교 교육을 강화하고, 여기서 길러진 인재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 관료로 불러올리는 정책이 실시되었다. 새 왕조는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도 비교적 공정하게 인재를 선발했다. 그리하여 세종조에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정치 제도가 마련되는 등 그야말로 황금 문화가 창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를 나는 사대부정치기로 명명하고자 한다.

2) 훈신정치기

사대부 정권이 확립되자, 이들의 기득권이 강화되어 사대부 독주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신흥 사대부들이 이미 새로운 귀족으로 부상한 것이다. 왕권은 철저히 제약을 받았고, 국가의 법제는 이들의 권익 보장 때문에 기형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지방 사림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1453년(단종 원년)에 수양대군(세조)의 쿠데타(癸酉靖難)가 일어났다. 비상 수단에 의해 사대부 정권을 타도한 것이다. 이 때 세조의 정란공신(靖難功臣)이 생긴 이후 성종 때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250명의 공신이 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세조는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집현전 학사들 대신에 지방으로부터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한 젊고 야심 있는 사림을 정계에 불러들였고, 이들은 공신 세력을 견제하려는 비호를 받아 사림파를 구성하게 되었다.

사대부가 문ㆍ무 관료들만을 의미하는데 비해, 사림은 유교 교양을 갖춘 독서인층(讀書人層)을 포괄하는 양반 지식인들이었다. 또 훈구파가 문장을 중시하는 사장파(詞章派)였는데 비해, 사림파는 경학을 중시하고 도덕적 수양을 내세우는 경학파(經學派)였다. 사림파는 주자학의 철학 이념을 깊이 연구해 훈구파의 부정과 부패를 공격함으로써, 두 세력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그것으로,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가 화를 당한 사건이었다. 사실 두 세력의 충돌은 이미 세조의 개혁 정치에서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인사권과 언론권이 대체로 재상이나 대신들에게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나는 세조대부터 중종대까지의 시기를 훈신정치기로 보고자 한다.

3) 권신정치기

공신 세력이 늙어 죽고 사림파의 과도한 개혁 주장에 염증을 느낀 국왕이 등을 돌림으로써 정권은 외척 권신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안로(金安老)ㆍ윤임(尹任)ㆍ윤원형(尹元衡)ㆍ이량(李樑) 등이 그들이다. 외척 권신들의 집권은 기간이 짧았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들에게는 집권의 명분도, 특별한 정치 이념도 없었다. 다만 훈구파가 무너지고 사림파가 아직 정권을 차지할 만한 세력을 갖추지 못한 과도기에 잠시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정권 장악 능력도 부족했다. 인사권과 언론권을 대신이 가진 것도 아니었고, 다만 자기 사람들을 전랑이나 언관에 배치함으로써 사림의 정치 체제를 도용한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사대부와 훈구파가 약화된 이후 사림파가 집권하기까지는 외척밖에는 정치를 주도할 세력이 없었다. 비록 왕실이 있다고는 해도 왕족은 이미 국왕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정치에 나설 수 없게 되어 있었으며, 그들도 4대가 지나면 일반 관료들과 똑같은 지위로 하락하게 되어 있었다. 이런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권신정치기는 훈신정치기의 말기적인 현상으로 보아 훈신정치기에 포함해도 별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는 대략 중종 말기부터 명종대까지이다.

4) 사림정치기

선조조에 이르러 권신들이 타도되고 사림들에 의한 정치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대적할 세력을 잃은 사림들은 분열하여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에 댕쟁이 치열해졌다.

그렇다면 사림정치의 부산물로 생긴 당쟁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16세기에 이르러 훈신 세력은 네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사림 세력의 성장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로 밀려오는 사림파의 진출을 결코 막을 수는 없었다. 이조전랑ㆍ좌랑 등의 전랑권이 강화되고 청요직 당하관의 인사권이 이들에게 돌아가는가 하면(이는 제도가 아니라 관행이었다), 언관의 언론권이 강화되어 관직 세계에 청신한 기풍이 진작될 수 있었다. 이에 외척 세력인 심의겸이 사림 세력을 지지하게 되고, 새로 국왕이 된 선조가 혼인하기 전이어서 외척이 없는 것을 기화로 사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림이 정권을 장악하자 사림파는 대적할 상대를 잃어 스스로 분열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곧 당쟁이다.

정치 권력은 투쟁 대상이 없어지면 분열하게 마련이다. 사림들의 붕당은 학연성과 지역성ㆍ혈연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잠시 모였다가 헤어지는 정치 세력을 파벌이라 하는 반면, 학연ㆍ지연ㆍ혈연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대립하는 정파를 붕당이라 하고, 붕당간의 싸움을 당쟁이라 한다.

선조조 초기의 당쟁에서는 선배 사림과 후배 사림의 대립이 있었다. 선배 사림은 심의겸 등 명종조의 권신 정치 하에서 벼슬한 사람들이요. 후배 사림은 사림정치 하에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기예 관료들이었다. 이이ㆍ김효원 등 후배 사림들은 스스로를 군자라 하고, 선배 사림을 소인이라 하여 공겼했다. 이 군자소인론은 송나라 구양수의 붕당론에 의거한 것으로, 권신정치에 물들어 도덕적 수양이 덜된 선배 사림을 소인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군자소인론의 근거가 되는 구양수의 붕당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무릇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道)를 같이 함으로써 붕(朋)을 삼으며, 소인은 소인끼리 이(利)를 같이 해 붕을 이루니, 이는 자연의 이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臣)은 소인에게는 붕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인은…… 잠시 무리를 끌어와 붕을 이루는 것 같지만, 이는 거짓된 것이라 이익을 보면 먼저 차지하려 다투고, 이익이 다해 사귐이 멀어지면 도리어 서로 해치고자 합니다. …… 그러나 군자는 그렇지 않아서 그 지키는 바가 도의(道義)이며, 행하는 바가 충신(忠信)이요, 아끼는 바가 명절(名節)이니, 몸을 닦음에는 도를 같이 해 함께 힘써 처음과 끝이 같으니, 이것이 군자의 붕입니다. 그러므로 인군(人君)은 단지 소인의 위붕(僞朋)을 물리치고, 군자의 진붕(眞朋)을 불러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천하는 다스려지게 마련입니다." (『歐陽文忠公集』 권17, 朋黨論)

진정한 붕당은 군자에게만 있고, 소인은 이익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하므로 소인의 붕당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소인을 물리치고 군자를 기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군자소인론에 바탕을 둔 군자유붕론(君子有朋論)ㆍ일붕론(一朋論)은 그 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과 사마광(司馬光)의 구법당이 싸울 때 구법당에 연결되었고, 여대방(呂大防)과 범순인(范純仁)은 붕단간의 화해와 조정을 목적으로 조정론(調停論)을 내세웠으며, 소식(蘇軾)은 소인의 붕당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무너지게 마련이니 구태여 소인을 핍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세 갈래로 갈라지게 되었다.

구양수의 군자소인론은 주자에 이르러 더욱 철저해졌다. 주자는 군자와 소인의 변별을 철저히 하되 자기 당에도 소인이 있다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주장하고, 임금까지도 군자당에 끌어넣어야 한다는 인군위당설(人君爲黨說)을 제기했다.

이러한 송나라의 붕당론이 주자를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이는 처음에 군자소인론을 들고 나와 선배 사림을 공격했다. 그러다가 선배 사림들의 세력이 약화되자, 조정론으로 돌아섰다. 이 조정론은 주자의 양비양시론과 약간 차이가 있다. 양시양비론은 군자와 소인의 변별을 철저히 하는 데 비해, 이이의 조정론은 두 붕당을 다 군자당으로 보고 두 당인을 함께 쓰자는 것이었다.

선배 사림과 후배 사림의 충돌은 1575년(선조 8년)에 일어났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추천된 것을 심의겸이 반대한 데서 사림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것이다. 김효원을 편든 사람들을 동인, 심의겸을 편든 사람들을 서인이라 했다. 당시는 동인의 세력이 강해 많은 사림들이 동인에 가담했다. 그러나 동인은 정여립의 옥사를 과도하게 다루어, 동인을 해친 서인 정철(鄭澈)의 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었다. 정철의 죄뿐만 아니라 서인들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이발(李潑)ㆍ정인홍 등 강경파를 북인, 온건파를 남인이라 했다. 그리고 남인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론에 찬동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의병을 많이 일으킨 북인이 집권해 광해군을 옹립했다. 북인은 정치적인 이해 관계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리었는데, 대체로 광해군조에는 대북이 우세했다.

대북 정권은 적자가 아니라는 광해군의 왕통상의 약점을 의식해 형인 임해군과 배다른 어린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서인의 쿠데타인 인조반정을 유발시켰다. 반정의 명분은 인륜적인 패악만은 아니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이중 외교를 벌인 것도 문제시되었다. 태조 이후 명나라를 준경하여 사대 외교를 해야 한다(尊明事大)는 명분에 저촉되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광해군은 쫓겨났고, 대북 정권도 따라서 무너지게 되었다.

인조조의 서인 정권은 비상 시국에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남인을 관제 야당으로 불러들였다. 서인들은 대북 정권이 독주를 하다가 스스로 대북ㆍ소북ㆍ골북(骨北)ㆍ육북(肉北)ㆍ청소북(淸小北)ㆍ탁소북(濁小北) 등으로 세포 분열하였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남인뿐 아니라 소북 세력도 끌여들였다(그런데 소북 세력은 뒤에 남인으로 편입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상 정권은 서인들의 수중에 있었고, 서인 중에서 공신 출신의 공서(功西, 勳西라고도 한다)와 사림 출신의 청서(淸西)의 대립이 더 기본적인 대립 구도였다. 인조반정 이후 공신들이 모여 맹세하는 자리에서 "왕실과의 혼인을 잃지 말고 산림을 우대한다[물실국혼 숭장산림(毋失國婚 崇奬山林)]"는 구호를 내걸었던 것에서 잘 나타나듯이, 당시에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서 외척이 되고 또한 사림의 종장(宗長)인 산림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공신들은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도 사림의 여론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신과 사림의 주장은 같을 수가 없었다. 병자호란 때 공신들은 후금과의 화의를 주장했지만, 사림들은 척화를 주장했다. 같은 서인이지만 공신들의 공서와 사림들의 청서가 주화파와 척화파로 갈리고 만 것이다. 공신들은 당로자로서 나라의 보존을 위해 후금에 항복했지만, 사림은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내세워 이를 극력 반대했다. 여기에는 야당인 남인이 낄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인조조에 붕당간에 공존과 협력 및 비판에 바탕을 둔 전형적인 붕당정치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

인조조의 정권은 사실상 공신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후금에게 항복한 이후로는 존명사대의 큰 명분을 잃어 사림들의 공격을 배겨낼 수가 없었다. 이에 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ㆍ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등 호서산림(湖西山林)의 영향력이 커지고, 이들의 제자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며, 여론에 밀려 현실성이 희박한 북벌 정책을 밀고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친청파인 소현세자가 죽음을 당하고 반청파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효종조에는 국왕이 송시열의 도움을 받아 북벌을 준비한 시기였다. 그러나 북벌의 뒤에 숨어 있는 효종과 송시열의 목표는 달랐다. 효종은 이를 기화로 군사를 길러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고, 송시열은 이를 이용해 사림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자는 것이었다. 북벌은 명분일뿐 현실성이 없었다. 북벌을 위해 10만 양병을 한다고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실제로 10만 군사를 일으켜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청나라는 새로 일어나는 나라로서 200만의 군사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설령 10만 양병이 가능하다고 해도 북벌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효종조에는 특별한 당쟁은 없었다. 단지 서인 내부에서 송시열 계열의 산림과 김육을 필두로 하는 청풍 김씨 외척 세력이 경쟁하는 정도였다. 효종은 외척 세력이나 자기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래서 송시열[山黨, 송시열 등 김장생의 문인으로 구성된 호서산림]과 같은 산림에 대해서는 극도의 예의를 갖추기는 하되 중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가 1658년(효종 9)에 김육[漢黨, 김육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 출신의 사림 현실론자]이 죽자, 의지할 곳이 없어진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효종은 이듬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현종조에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세력이 정권을 주도했다. 그러나 인조조 이후로 성장해 온 남인 세력도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 상호간의 권력 장악 기도는 두 차례의 예송을 통해 나타났다.

첫 번째 예송에서는 효종이 죽었을 때 인조의 후취 왕비인 조대비(趙大妃)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붙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기년복(朞年服,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윤휴ㆍ허목 등 남인들은 효종이 비록 차자이지만 이미 왕이 되었으니 그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당연히 장자와 마찬가지로 3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별것 아닌 일로 싸운 듯하지만, 사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 논쟁에서 지면 정권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서인보다 정치적 입지가 취약한 남인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왕통과 관련시킴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의 정국이었던 만큼 1659년(현종 즉위년)의 예송에서는 서인이 승리했다.

그렇다고 남인이 이 논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듬해에 윤선도(尹善道)가 송시열ㆍ송준길이 왕통과 적통을 분리해 효종을 낮추어 보았다고 공격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정국은 한층 경색되었다. 윤선도는 효종이 세자로 있을 때의 선생이었다. 이 상소로 인해 윤선도는 귀양을 갔지만, 송시열은 30년 뒤인 숙종조에 가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렇듯 정쟁은 치열하면서도 끈덕진 것이었다. 문치주의 체제 하에서 정쟁은 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붓으로, 이론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예송 논쟁은 이론을 앞세운 전형적인 권력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당쟁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두 번째의 예송은 현종이 죽기 직전인 1674년(현종 15)에 일어났다. 당시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죽어 또다시 조대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이 문제가 된 것이다. 송시열의 이론대로 한다면, 조대비는 대공복(大功服, 9개월복)만 입으면 그만이었다. 둘째아들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종은 효종의 상을 당하여 조대비가 입은 상복은 송시열의 이론대로 한 것이 아니라 『대명률』이나 『경국대전』의 예법을 따른 것인데, 그에 따르면 1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실제로 효종 상에서도 송시열의 주장이 뒷날 문제가 될 것 같아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의견을 따라 『경국대전』의 법제를 적용해 1년으로 했다. 그런데 송시열의 제자들은 이를 송시열의 주장을 따른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결국 현종은 자신의 직권으로 1년복으로 확정지은 뒤 서인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했다.

현종조의 두 차례의 예송은 실로 송시열과 윤휴의 경전에 대한 해석 싸움에서 말미암은 것이엇다. 송시열은 주자를 극도로 숭배한 나머지 주자의 해석은 한 글자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에 비해 윤휴는 경전 해석을 꼭 주자가 한 대로 좇을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윤휴는 경전 해석에 대해 족자적인 해석을 내 놓았고, 이것은 주자를 하늘 같이 받드는 송시열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송시열이 동문인 윤선거(尹宣擧, 윤증의 아버지)와 틀어진 것도 윤선거가 윤휴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는 커녕 오히려 비호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고, 그를 추종하거나 비호하는 사람은 무조건 배척했다.

윤휴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남인이 되었고, 윤휴를 비호한 윤선거는 그 아들 윤증대에 가서 소론이 되었다. 송시열이 숭배하는 율곡 이이의 친구 우계 성혼의 제자들은 인조반정에 공신으로 많이 참여해 송시열계 산당의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겉으로는 주자학을 하지만 속으로는 양명학(陽明學)을 하는 소론계 강화학파(江華學派)와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당쟁은 크게 노론ㆍ소론ㆍ남인으로 삼분되었다. 노론은 이이ㆍ송시열계이고, 소론은 성혼ㆍ윤선거계이며, 남인은 이황ㆍ조식계였으나, 영남 남인들은 이미 선조ㆍ광해군대에 떨어져 나가고, 윤휴ㆍ허목ㆍ허적(許積)계의 경기도ㆍ충청도 남인들(기호 남인)만이 살아 남았다.

숙종조에는 현종조의 예론으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의 골이 깊어진 탓에 정권 교체가 빈번하게 많아졌다.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훈척 세력으로 당파를 치거나, 이 당파로 저 당파를 치는 파행적인 방법을 썼다. 처음에는 청풍 김씨인 김석주(金錫胄)의 힘을 빌어 서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 정권을 수립했다. 김석주는 삼촌이 현종 왕비(명성왕후)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외척에 속했다. 그는 자질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척이 정치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송시열의 주장 때문에 출세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불만으로 여기던 김석주는 이 때에 와서 송시열의 서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을 끌어들여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숙종 즉위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갑인환국(甲寅換局)이라 한다.

남인은 정권을 잡게 되자 서인 인사들에 대한 처리 문제를 놓고 허적(許積)ㆍ권대운(權大運) 등의 탁남(濁南)과 윤휴ㆍ허목 등의 청남(淸南)으로 갈렸다. 청남은 이 기회에 서인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강경파였고, 탁남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온건파였다. 그러나 정권의 주도권은 허적 등 탁남이 쥐고 있었다. 허적은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다시 설치해 오도도체찰사(五道都體察使)가 되어 군권을 장악했고, 윤휴는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를 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남인은 훈련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어營廳)의 군권도 차지했다. 반면에 서인은 숙종 왕비의 아버지인 김만기(金萬基)가 총융청(摠戎廳)의 군권을, 김석주가 수어청(守禦廳)의 군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군권의 향배가 당쟁의 중요한 변수가 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숙종은 허적 등 남인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꺼려 군권의 열세를 느기고 있던 김석주를 시켜 1680년(숙종 6)에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 정권을 수립했다.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이 경신환국으로 100여명 이상의 남인 인사들이 화를 당했다. 허적은 자신의 서자인 허견(許堅)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했다. 왕대비를 조관(照觀)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던 윤휴 역시 이 때 사약을 받고 죽었다. 반면에 김석주는 병조판서로서ㆍ어영대장ㆍ훈련대장ㆍ호위대장을 도맡아 병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서인의 협력을 얻어 남인을 쫓아낸 김석주는 남인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김환(金煥)ㆍ김익훈(金益勳) 등을 시켜 역모를 조작하고 밀고하게 했다. 1682년(숙종 8)에 일어난 이 고변사건을 임술고변(壬戌告變)이라 한다. 사건을 조작한 데 대해서는 서인들 중 조지겸(趙持謙)ㆍ한태동(韓泰東) 등과 같은 젊은 관료들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 때 송시열이 주모자인 김익훈을 두둔해 훈척 계열과 야합하자, 서인은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그를 비판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사실 노론고 소론이 갈리게 된 연원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공서와 청서의 대립, 송시열과 윤증의 시비 등이 그것이었다.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김석주와 송시열이 정국을 주도했다. 1689년(숙종 15)에 숙종은 후궁 장희빈에게서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자 했다. 예상대로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들은 반기를 들었다. 속종은 가뜩이나 서인의 위세가 강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에 노론이 자기의 뜻을 거스르자 이를 서인을 타도의 기회로 이용했다. 이에 서인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 송시열이 죽음을 당했으며, 100여 명 이상의 서인 인사들이 화를 당했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한다.

윤휴가 경신환국에 죽고 송시열이 기사환국에 죽어, 남인과 서인의 종장이 모두 사라졌다. 이는 이미 사림정치의 틀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효종이 죽었을 때 "효종은 서자라고 해도 해롭지 않다"고 한 말 때문에 남인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 결국 30년 만에 남인의 손에 죽었다. 당쟁이란 이토록 끈질기고 참담한 것이다.

경신환국과 기사환국은 화를 입은 사람이 100여 명이 넘는 대형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과거의 붕당 공존과는 달리 당파와 당파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이것은 어느 면에서는 숙종이 의도적으로 빚어낸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숙종은 김석주로 하여금 금위영(禁衛營)을 창성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를 바탕으로 당파 간의 충돌을 야기시켜, 신권을 약화시키고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숙종은 경신환국 때만 하더라도 아직 어렸기 때문에 김석주가 하는 대로 따랐다. 그러나 장성해서는 신료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무슨 일이든지 자기 뜻대로 하려고 했다.

1694년(숙종 20) 3월, 서인 김춘택(金春澤,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 등이 궁중의 궁인ㆍ환관ㆍ공주들과 연결해 남인을 몰아내려 한다는 남인 함이완(咸以完)의 고발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서인 김인(金寅)은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원을 독살하려고 음모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속종은 남인의 고발은 가볍게 보고 함이완의 고발은 집권당인 남인으로 하여금 취조하게 했다.

그러나 별안간 심문하던 남인 인사들을 처벌하고 서인을 기용하는 갑술환국(甲술換局)을 단행했다. 이 사건은 미심쩍은 데가 많은데, 실상은 김춘택이 숙종의 유모를 통해 최숙원과 짜고 숙종에게 남인의 실상을 낱낱이 고해 바침으로써 일어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남인 135명이 죽거나 귀양ㆍ삭탈 관직되었고, 이미 죽은 송시열 등 서인 정객들의 관직이 다시금 회복되었다.

갑술환국 직후부터 장희재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빗발쳤다. 소론은 장희재를 처벌하면 그 영향이 세자에게 미친다 해서 반대했다. 그런데 숙종은 1701년(숙종 27)) 8월애 인현왕후가 죽자 이것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해, 결국 장희빈과 장희재를 죽였다.

숙종은 노ㆍ소론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여 정국을 이끌어 갔으나, 말년에는 노론을 기울었다. 1716년(숙종 42)에 가례원류의 간행 문제를 둘러싼 소론과 노론의 시비에 대해 노론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판정하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려 소론에게 큰 타격을 안겨 준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숙종은 1717년(숙종 43) 7월 19일에 노론 재상 이이명(李이命)과 독대하여 세자의 대리청정을 걸정하고, 연잉군(延仍君, 뒷날의 영조)과 연령군(延齡君) 두 왕자의 보호를 부탁했다. 그 당시 숙종과 세자와의 사이는 이미 벌어져 있었고, 세자에게 실수를 유발시켜 세자를 폐하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소론들은 보고 있었다. 노론은 두 왕자 중에 누구를 밀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연령군이 죽자, 노로느이 선택은 자연스럽게 연잉군으로 귀결되었다. 그 와중에서 숙종이 죽고, 경종이 왕위에 올랐다.

경종이 즉위했으나, 노론의 집권은 계속되었다. 노론은 자기들의 집권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경종을 퇴진시키려 했고, 소론은 경종을 지지해 노론의 술책을 타도하려고 했다. 두 세력의 충돌은 1721년(경종 원년)의 신축환국(辛丑換局)과 이듬해 1722년(경종 2)의 임인옥사(壬寅獄事)로 나타났다. 신축환국이란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이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과 왕세제의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행위는 경종에 대한 반역이라고 몰아세워, 노론 세력을 쫓아내고 소론 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또 임인옥사란 노론측 고관 자체들이 경종을 죽이려고 음모하다고 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발을 계기로 소론이 노론을 일망타진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을 신임옥사(辛壬獄事)라고 한다.

신임옥사는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이命)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 등 노론의 4대신이 죽임을 당한 것을 비롯해 60여 명의 노론 인사들이 참혹한 변을 당한 사건이다. 이에 당쟁은 예송과 같은 정책 대결이나 단순한 정권 교체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료가 국왕을 선택하고 거기에 충역의리를 결부시키는 치열한 정쟁으로 바귀게 되었다. 노론은 있지도 않은 왕세제라는 제도를 들고 나와 자기들의 집권욕을 채우려 했으며, 소론은 이들을 국왕에 대한 반역으로 몰아 처참한 당화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7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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