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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26 (화)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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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조의 당쟁 1 (이성무)
선조조의 당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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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정치시대의 개막

조선시대 정치사는 정치 주체를 중심으로 사대부정치시대, 훈신정치시대, 사림정치시대, 탕평정치시대, 외척세도정치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훈신정치시대의 말기에 대부분의 연로한 훈신들이 사거(死去)하면서, 중종조부터 명종조까지 한때 외척 권신정치시대가 있었다. 선조대는 바로 이 권신정치시대의 청산과 함께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사림정치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림이란 원래 사대부의 무리를 지칭하는 용어로, 15세기 후반부터 쓰였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문관과 무관을 통틀어 사대부라고 했다. 사림이라면 문ㆍ무 양반 관료와 그 일족, 그리고 벼슬하지 않는 선비들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그런데 세조의 쿠데타[癸酉靖難] 이후 성종조에 이르는 18년 동안 250명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훈구파가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때 여기에서 소외된 부류들을 '사림파'라 부르기 시작했다. 세조는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집현전 학사들을 대신해 김종직 등 젊고 야심 있는 사림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예종이나 성종도 훈구파를 누르기 위해 신진 사류를 계속 등용했다.

이렇게 많은 사림들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자, 이는 바야흐로 역사적인 대세가 되었다. 사림들은 주로 언관ㆍ전랑ㆍ사관 직을 맡아 부패한 훈신 세력에 공격을 가했다. 이러한 추세는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치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사림들은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며 부패한 훈신을 공격한 정도가 아니라 국왕까지도 도학을 닦지 않으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흡사 도학이 국왕의 위에 올라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그러나 신진 사류의 조급한 개혁 의지는 오히려 중종으로 하여금 염증을 느끼게 했다. 결국 중종은 훈신 세력과 결탁해 조광조 등 사림 일파를 몰아냈다[己卯士禍]. 이 때부터 훈신정치시대의 말기적 현상인 외척 권신정치시대가 과도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기묘사화로 큰 타격을 받은 사림 계열은 중종 말엽에 다시 중앙으로 진출했다. 인종은 이들 사림 세력을 지지했다. 그러나 인종은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채 머무르지 못했고, 그 아우인 명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척 소윤(小尹) 사이에 권력 쟁탈이 벌어졌다. 이들 외척 세력은 사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전현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대윤의 윤임은 사림을 비호한 반면, 소윤 윤원형은 그 반대였다. 그리하여 명종 초기에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윤임 세력뿐만 아니라 사림들까지도 많은 희생을 당하게 된다. 사림은 을사사화로 다시 한 번 재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명종이 나이 20세가 됨에 따라 1553년(명종 8)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왕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천정 이후에도 척신정치의 폐단은 가시지 않았다. 이 때 명종은 윤원형의 발호를 견제하기 위해 명종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강(沈鋼)의 처남 이량(李樑)을 기용했다. 그러나 이량 또한 명종의 신임을 믿고 새로운 파벌을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순종하지 않는 사림 출신의 윤근수(尹根壽)ㆍ이문형(李文馨)ㆍ박소립(朴素立)ㆍ윤두수(尹斗壽) 등을 외직으로 추방하고, 심지어 사림들을 숙청하기 위해 사화를 일으킬 계략까지 꾸몄다. 이 때 인순왕후의 동생이며 이량에게는 생질이 되는 심의겸이 그 계획을 미리 알아차리고, 그를 제거함으로써 사림을 위기 직전에서 구하게 되었다.

심의겸은 비록 외척이었지만 권신을 내쫓고 사림의 화를 미연에 방지한 공으로 신망이 높았다. 또한 그는 평소 사림 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만큼 이전의 척신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심의겸의 조부 심연원(沈連源)은 김안국의 문인으로 사림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부친인 심강도 사림의 보호를 역설한 적이 있었다. 이준경(李浚慶)ㆍ홍섬(洪暹) 등 훗날 선배 사림으로 부려지는 이들은 바로 이 때 심의겸의 도움으로 관계에 진출한 사류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죽음은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선조 즉위 이후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기묘사화 이후에 위축되었던 사림이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는 점이다. 명종이 부를 때에는 좀처럼 상격하지 않던 이황이 선조가 즉위한 다음 달인 1567년 7월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임명되었다. 또 을사사화 당시의 명현으로, 이제 나이 71세에 이른 백인걸(白仁傑)이 교리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권신 윤원형ㆍ이량 등과 더불어 정치를 농단한 심통원(沈通源)은 관작이 삭탈되었지만,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죄인이 된 노수신(盧守愼)ㆍ유희춘(柳希春)ㆍ김난상(金鸞祥) 등 10여 명은 서용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사림은 계속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가게 된다.

반면 명종과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세력을 휘두르던 권신들은 정치적으로 참패했다. 사림 세력의 승리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묘사화의 명인 조광조의 추증과 남곤(南袞)의 관직 삭탈을 들 수 있다. 조광조의 추증과 남곤의 추죄는 모두 중종 말년부터 오랫동안 주장되어 왔던 사안이었다. 그것이 이 때에 와서야 비로소 해결을 본 것이다.

역사의 대세를 타고 성장한 사림은 이 시기에 이른바 '사림정치'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연출하며 역사의 주체로 부상했다. 그러나 훈구 세력과 권신들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더 이상 적대 세력이 없게 되자, 사림은 스스로 세포분열하기 시작했다.

선조 초년의 명종조 권신 정치 하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관계에 진출했던 선배 사림과 사림정치 하에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후배 사림들 사이에 갈등 구도가 형성되었다. 물론 심의겸은 소윤에 비견될 정도의 척신 세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척신의 입장에서 모든 정치적 결정을 취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후배들로서는 심의겸과 그를 용납하는 선배들에 대해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선배 사림에 대한 후배 사림들의 불만은 선배 사림들이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후배 사림들은 선배 사림들을 소인으로 몰아세우고 스스로를 군자라 자처했다. 양자간의 대립은 점차 심화디어 마침내 동ㆍ서인 분당으로까지 발전했다.

동서 분당

붕당의 예고

1572년(선조 5) 7월 7일, 영중추부사 이준경이 죽었다. 이준경은 윤원형을 몰아낸 뒤에 영의정이 되었고, 명종의 고명을 받들어 선조를 즉위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중종에서 선조까지 네 임금을 섬긴 명망 높은 조정의 원로였다. 그러나 사림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배 사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었다.

사림의 세상은 도래했다. 그러나 이준경을 비롯하여 명종조에 벼슬하던 선배 사림과 그 뒤에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후배 사림간의 알력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선배 사림은 이준경(李浚慶)을 필두로 심통원(沈通源)ㆍ민기(閔箕)ㆍ홍섬(洪暹)ㆍ홍담(洪曇)ㆍ송순(宋純)ㆍ김개(金鎧) 등이었고, 후배 사림으로는 이황(李滉)ㆍ노수신(盧守愼)ㆍ유희춘(柳希春)ㆍ김난상(金鸞祥)ㆍ이이(李珥)ㆍ정철(鄭澈)ㆍ기대승(奇大升)ㆍ심의겸(沈義謙)ㆍ이후백(李後白)ㆍ유성룡(柳成龍)ㆍ오건(吳健)ㆍ김우옹(金宇顒) 등이 있었다. 후배 사림들은 선배 사림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또 사사건건 대립하곤 했다.

이에 이준경은 죽기 전에 왕에게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를 올려 붕당의 조짐을 시사하고 그 타파책을 강구할 것을 극력 요청했다.

"붕당의 사사로움[私]을 깨뜨려야 합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잘못이 없고 일에 허물이 없는 이라도 자기네와 한 마디 말이라도 합하지 아니하면 배척해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행실을 닦지 않고 글 읽기에 힘쓰지 않으면서도 거리낌없이 큰소리치며 당파를 지으면서 그것이 높은 것이라고 허풍을 키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군자이면 함께 두어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이거든 버려 두어 저희끼리 흘러가게 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전하께서 공평하게 듣고 공평하게 보아 주시어 힘써 이 폐단을 없이 하기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구하기 힘들 것입니다." (『동고집』)

이 차자가 올라오자, 왕은 즉시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조정에서 누가 붕당을 짓는가? 바깥 의논이 구구한데, 만일 붕당의 징조가 있으면 조정이 반드시 문란해질 것이오." (『동고연보』)

선조의 말을 들은 대신들은 모호한 말로 변명할 뿐이었다. 이에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 등 3사에서는 이준경이 사림에게 화를 미치게 하니 관직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찬 유성룡은 이를 반박했다.

"대신이 죽을 때에 말씀 올린 것에 부당함이 있으면 변명할 것이지 죄 주자고까지 청하는 것은 조정에서 대신을 대접하는 체모가 아니니 여러분은 너무 심한 짓을 하지 마시오." (『동고연보』)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는 '붕당'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었다. 이는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에도 엄연히 명시되어 있었고, 조선 역시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또 이를 어길 때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든 조광조가 화를 당하게 돤 것도 표면적으로는 붕당을 지었다는 데 있었다. 그 때문에 이준경의 차자는 조정을 크게 긴장시켰다.

신구 세력 사이의 대립과 분열도 문제였지만, 이준경이 근본적으로 우려한 것은 특정 세력을 중심으로 붕당이 결성되는 사태였다. 그 특정 세력이란 바로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로서 척신을 대표하던 심의겸과 사림의 중망을 받고 있던 이이였다. 그러나 심의겸은 이준경이 근거도 없이 붕당이란 말을 지어내 임금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이 역시 이준경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준경이 머리를 감추고 형상을 숨겨 귀신처럼 지껄였다. 준경의 말은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음해의 표본이다."  (『연려실기술』)

"조정이 청명한 데 어찌 붕당이 있으리오? 사람이 죽으려 할 때에는 그 말이 착한 법인데, 준경은 죽을 때에도 그 말이 악하구나![人之將死 其言善 浚慶之將死 其言惡]" (『당의통략』)

후배 사림인 이이도 처음에는 이준경을 어진 정승으로 존경했다. 그러나 이준경은 도학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않았고, 현실 안주적이며 체제 유지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개혁 지향적인 후배 사림들과는 화합될 수 없었다. 이준경이 결정적으로 후배 사림들에게서 인심을 잃게 된 계기는 이황을 "산금야수(山禽野獸)"에 비한 일이었다. 말 그대로 날짐슴이나 들짐승처럼 길들이기 어렵다는 뜻으로, 퇴계 이황이 나오기 어려워하고 물러나기 잘하는 것을 풍자한 말이었다.

물론 이준경의 차자는 붕당을 타파하자는 뜻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이가 심하게 공박한 까닭은 이준경의 말로 인해 임금이 사림을 지나치게 의심하지 않을까 우려한 때문이었다. 또다시 사림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준경을 공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3사에서도 들고 일어나 이준경을 처벌하자고 청했다. 물론 이준경을 두둔하는 대신들도 있었다. 좌의정 홍섬(洪暹)은 이준경의 강직함과 식견을 칭찬하며 그의 차자가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애써 변명해 주었다. 후배 사림들이 이준경을 혹독하게 비난한 반면, 대체로 선배 사림들은 이준경을 비호하는 쪽이었다. 선조 역시 끝내 이준경을 죄주지는 않았다.

심의겸과 김효원

그러난 이준경의 유언은 이이의 말처럼 결코 저주와 음해의 표본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견지명이라 해야 옳았다. 이준경의 예견대로 사림들은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마침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이를 을해붕당(乙亥朋黨)이라고 한다. 이준경이 붕당의 조짐을 예고해 조정에 파문을 일으킨지 3년만의 일이었다.

동서 분당의 기폭제는 이조정랑 자리를 둘러싼 심의겸과 김효원의 알력에서 비롯되었다. 문무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했던 이조와 병조의 정랑ㆍ좌랑을 통칭하여 전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관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의 풍토에서는 당연히 이조정랑(정5품)ㆍ좌랑(정6품) 쪽이 더 중시되었다. 특히 이조정랑은 품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이른바 청요직 중 으뜸가는 직책이었다. 이조정랑은 문관의 인사와 관련하여 정승ㆍ판서를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또 언론 3사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청요직을 추천하고 재야 인사에 대한 추천권을 가지는 등 여러 가지 특권이 있었다. 이처럼 인사권과 언론권이 집중된 직책이기 때문에 전랑직, 특히 정랑을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결정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자리를 놓고 쟁탈전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조정랑 오건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金孝元)을 추천했다. 그런데 김효원에 대해 심의겸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왔다. 당시 재상층을 위시해 구 세력을 대표하던 인물이 심의겸이고, 김효원은 새로 부상하는 신진 세력의 구심점이었다. 심의겸이 김효원의 통청을 막은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김효원을 중심으로 신진 세력의 언관권이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심의겸은 표면적으로는 김효원이 일찍이 명종조의 권신인 문객(門客)이었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그 당시 김효원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이었으나 문장으로 이름이 꽤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러나 심의겸은 문학 하는 선비로서 권세 있는 집의 자제들과 함께 거처하는 김효원을 내심 비루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후 김효원은 과거(謁聖試)에 장우너으로 합격해 능력 있는 인물로 이름이 점점 높아졌고, 몸가짐이 청백하고 맡은 일도 잘 처리하여 신진 사류의 모범이 되었다.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 한 때 머물렀던 것은 사실이다. 또 일설에는 그의 장인 정승계(鄭承季)가 윤원형의 첩인 난정(蘭貞)의 아버지 청계군(淸溪君) 정윤겸(鄭允謙)의 조카였기 때문에, 공부를 위해 그 곳에 기숙한 것이라고도 한다. 심의겸 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림들은 김효원의 결백을 인정했다. 이조정랑 임용에 하등의 결격 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김효원은 심의겸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1574년(선조 7)에 이조정랑에 올랐다.

이조정랑이 된 김효원은 청렴한 선비들을 많이 진출시키고 일처리도 깔끔해 신진 사류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김효원은 마음속으로 심의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심의겸을 정치 일선에서 가장 먼저 배제해야 할 척신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심의겸은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의 손자이며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였고, 명종조의 권신 이량이 그의 외삼촌이었다.

그런 심의겸이 비록 이량에 맞서 사림들을 적극 보호해 신망을 얻었지만, 척신의 미미지는 결코 탈피할 수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조정랑의 자리에 오른 김효원은 심의겸을 두고 "미련하고 성질이 거치니 크게 등용할 수 없다"는 인신 공격적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그리하여 둘 사이의 반목의 골은 더욱 길어지기만 했다.

그 즈음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문과에 장원 급제를 한 이후 김효원의 후임으로 이조정랑 자리에 추천되었다. 그러자 김효원은 다음과 같은 말로 비난했다.

"전랑이 외척 집안의 물건인가? 어째서 심씨 문중에서 반드시 차지해야 한단 말인가?" (『하담파적록』)

이 말을 들은 심의겸 또한 "외척이 원흉의 문객보다는 낫지 않은가"라고 비아냥거렸다.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또다시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 김효원은 이중호(李仲虎)의 아들 이발(李潑)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해 버렸다. 이에 심의겸 일파는 김효원이 심의겸에게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 한다며 효원을 소인으로 지목했다. 반면 김효원 일파는 심의겸이 효원을 해치려 한다고 몰아붙였다.

그리하여 사림은 심의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선ㆍ후배로 갈려 당파가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 때 김효원의 집은 한양 동쪽의 건천방(乾川坊)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은 서쪽인 정릉동(貞陵洞, 구 러시아 공사관 자리)에 있었다. 이에 김효원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동인, 심의겸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서인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동인들은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로서, 나이가 젊고 학행과 절개가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동인의 영수로 추대된 허엽(許曄)은 선배 사림에 속하는 인물이었지만, 유성룡(柳成龍)ㆍ우성전(禹性傳)ㆍ김성일(金誠一)ㆍ남이공(南以恭)ㆍ김우옹(金宇顒)ㆍ이발(李潑)ㆍ이산해(李山海)ㆍ송응개(宋應漑)ㆍ허봉(許葑)ㆍ이광정(李光定)ㆍ이원익(李元翼)ㆍ홍가신(洪可臣)ㆍ이덕형(李德馨) 등 소장파 인사들이 동인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서인은 허엽과 대립하던 박순(朴淳)을 영수로 해서 결집되었다. 허엽과 박순은 원래 다같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였는데, 이 때 와서 갈라서게 되었다. 서인에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제자들이 많았다. 정철(鄭澈)ㆍ신응시(申應時)ㆍ정엽(鄭曄)ㆍ송익필(宋翼弼)ㆍ조헌(趙憲)ㆍ이귀(李貴)ㆍ황정욱(黃廷彧)ㆍ김계휘(金繼輝)ㆍ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이산보(李山甫) 등이 서인의 주축이었다.

율곡 이이의 동ㆍ서인 조정

동인과 서인으로서 분열이 가시화되자, 율곡 이이는 극단적인 대립을 막기 위해 조정책을 제시했다. 이준경의 유언을 저주와 음해의 표본으로 간주하긴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이 역시 책임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이는 우의정 노수신(盧守臣)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심ㆍ김 두 사람은 모두 학문하는 선비들이니 흑과 백, 사(邪)와 정(正)으로 구분할 수 없소. 또 틈이 벌어졌지만 정말 서로 해치려는 것도 아니오 다만 말세의 풍속이 시끄럽고 말이 많아 뜬 말로 이간질을 해 조정이 조용하지 못하므로 두 사람을 외직(外職)으로 내보내어 뜬 의견을 진정시켜야 하겠으니, 대감이 경연에서 그 사유를 말씀드려야 하겠소." (『연려실기술』 권 13, 「선조조고사본말」, 동서분당)

선조가 이를 허락해 김효원은 경흥부사로 심의겸은 개성유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김효원의 입장에서 보면, 심의겸에 비해 불리한 조처였다. 이이는 멀고 가까운 것이 차이가 있으니 김효원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주자고 했다. 노수신도 효원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있으니 멀리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김효원은 삼척부사로, 심의겸은 전주부윤으로 다시 발령받았다. 이 일로 동인은 이이가 서인을 편든다고 하고, 서인은 노수신이 동인을 편든다고 불평했다.

이이가 김효원을 외직으로 내보낸 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 세력이 성해질까 우려해서였다. 그런데 일단 김효원이 외직으로 쫓겨가자, 서인들은 그의 잘못을 추궁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이가 이를 말리고 양편을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양편에서는 도리어 이이가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다고 불평했다. 이이는 김효원은 명예를 아는 사람으로 보았고, 심의겸은 외척 중에 좀 나은 사람으로 보았다. 그런 한편으로 김효원에게는 선배들을 배척하고 억누르려 한 잘못이 있고, 심의겸은 이들을 포용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동인에는 청명한 젊은 선비들이 많았다. 반면 서인에는 나이든 선배들 몇몇 외에 인망 있는 이들이 많았다. 때문에 당시는 동인이 성하고 서인이 약한 편이었다. 동인이 우세하게 되자, 별별 사람들이 다 동인에 붙어 동인이 옳다고 떠들어댔다. 이이는 동인을 억제하려고 했다. 동인이 우세할 때에는 동인을 눌러야 서인과 세력 균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서인은 김효원을 외직으로 보내자고 한 이이를 자기네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효원을 내보낸 후 서인이 심하게 동인을 공격하자 이이가 다시 이를 말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서인이 이이를 원망했다. 이이는 더 이상 조정에 머물러 있어서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발(李潑)ㆍ송대립(宋大立)ㆍ어운해(魚雲海)ㆍ허상(許鏛)ㆍ안민학(安민學) 등과 송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정론(定論)을 말하려 하니, 제공들은 들어 보라. 권세잡은 간신들이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게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것을 꺾고 숙청하여 선비들이 공론을 펴게 한 것은 의겸 등의 공이 아닌가? 효원이 나라 일을 하려면 마땅히 거실(巨室)의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효원이 전배들을 배척ㆍ억제해 전배들로 하여금 분한 마음을 가지게 해, 사림이 날로 서로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론이 효원을 제재해 외직으로 나가게 했고, 이만하면 적당한데도 오히려 그를 심히 미워하고 공격했으니, 이것은 전배의 죄이다.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심해 간격을 두지 말고 마음을 터놓고 정리해 나간다면,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조정의 근심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석담일기』)

철저한 양비양시론(兩非兩是論)이었다. 이이는 힘 닿는 데까지 동인과 서인의 다툼을 조정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물러난 뒤에는 더 이상 조정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계미삼찬

"간사한 사람들이 벼슬 자리에 있어 조정이 편안하지 못하고 법관이 형벌을 바르게 시행하지 못해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못했다. 이에 멀리 추방하는 법을 집행해 길이 후세에 본보기로 삼으려 한다." (『연려실기술』 권13, 「선조조고사본말」 이이졸서)

이는 1583년(선조 16) 선조가 송응개(宋應漑)ㆍ박근원(朴謹元)ㆍ허봉(許葑)의 유배를 명하면서 손수 지은 교서의 일부이다. 이들 3인은 동인의 맹장으로서, 각기 희녕ㆍ강계ㆍ갑산으로 추방되었다. 이이를 맹렬하게 공격하다 도리어 간신으로 지목되어 처벌받은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했다.

1575년(선조 8)의 동서 분당 이후 조정에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1578년(선조 11)에는 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윤현(尹晛)이 동인의 공격을 받아 뇌물 수수 혐의로 파직되었다. 김성일이 경연에서 진도군수 이수(李銖)가 윤두수ㆍ윤근수 형제와 그들의 조카 윤현에게 쌀 수백 석을 뇌물로 바친 사건을 폭로했던 것이다. 3윤(尹)은 서인의 맹장이고, 이들의 파직을 주장한 김성일은 동인의 맹장이었다. 이처럼 동인ㆍ서인은 상대방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오로지 이이 한 사람만이 양자의 조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비록 서인으로 지목받았지만 논의가 공정하고 행동에 치우침이 적었다. 그러나 1579년(선조 12년) 7월, 백인걸의 상소를 계기로 그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의 상소문에는 동ㆍ서인의 화해를 요구하면서도 동인을 비난한 구절이 많았다. 그런데 이 상소문의 초고를 수정한 사람이 바로 이이였다. 이에 동인들은 이이가 백인걸을 사주한 것으로 여겨 심하게 공격했다. 당론의 조정자가 도리어 당론을 격화시켰다고 공격받게 된 것이다.

1581년(선조 14) 6월, 선조는 이이를 대사헌에 임명했다. 이 때 항간에는 모종의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다. 그 골자는 심의겸이 누이 인순대비(仁順大妃)에게 출사를 주선하게 해 권세를 잡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심의겸은 상중에 있었다. 소문이 퍼지자 정인홍(鄭仁弘)이 이를 탄핵하려고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이는 정인홍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자신이 불러 주는 대로 상소문을 작성하도록 하고 더 이상 강경한 말을 못하게 했다.

"청량군 심의겸은 일찍이 외척으로서 오래도록 국론을 잡아 권세를 탐하고 이(利)를 즐겨해 사류의 마음을 많이 잃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조정 의논이 풀어지고 흩어져서 보전ㆍ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이 사람의 소치입니다. 지금가지는 현저히 배척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지 못해 인심이 의혹하니, 청컨대 파직시켜 좋아함과 미워함을 분명히 해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석담일기』)

그러나 정인홍은 심의겸이 사류를 규합해 세력을 양성한다는 과격한 말을 추가했다. 그리고 심의겸에게 아부한 자로 윤두수ㆍ윤근수ㆍ정철 등을 지목했다. 정철은 이이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동인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선조는 내심 심의겸을 미워하고 있었다. 선조가 1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심의겸이 누이 인순왕후에게 선조에 대한 통제를 종용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이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동인과 서인을 조정하기 위해 심의겸을 두둔했다. 이것은 동인의 불만을 가중시킨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이와 동인 사이의 충돌은 빈번하게 되었다. 1583년(선조 16) 3월에는 선조에게 수시로 왕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가 동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그 해 4월에는 유성룡(柳成龍)ㆍ이발(李潑)ㆍ김효원(金孝元)ㆍ김응남(金應南)을 동인의 괴수로 비판한 경안군(慶安君) 요(瑤)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기까지 했다.

이이가 병조판서로 재직하던 그 해 여름, 니탕개(尼蕩介)가 함경도 종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병조판서 주관 하에 출전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에서는 이이가 병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임금을 업신여겼다고 공격했다. 이이는 사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고, 이이에 대한 동인의 공격은 더욱 더욱 격화되었다. 이이에 대한 공격은 박근원ㆍ송응개ㆍ허봉 등이 주도했는데, 특히 대사간 송응개의 공격이 가장 맹렬했다. 공격의 화살은 박순ㆍ성혼 등 서인의 중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동인들이 이이는 물론 박순ㆍ성혼을 심하게 공격하자, 조정에는 이이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를 두둔하는가 하면 선조도 이이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동인 김우옹도 이이를 변호했다. 1583년(선조 16) 선조는 조신과 유생들의 여론을 반영해 송응개ㆍ박근원ㆍ허봉을 각기 회령ㆍ강계ㆍ갑산으로 유배시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이를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한다.

선조는 끝까지 동ㆍ서인을 조정하려는 이이와 성혼의 편을 들었다. 다음과 같이 주자의 인군위당설(人君爲黨說)을 인용하며 이이와 성혼을 적극 지지한 것이다.

"이이에게 편당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 말로써 나의 뜻을 움직이려 하느냐? 아! 진실로 군자라면 그들끼리 당을 만드는 것이 걱정이 되기는커녕 그 당이 작은 것이 걱정이다. 나도 주희(朱熹)의 말을 본받아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기를 원한다. 지금 이후로는 나를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고 해도 좋다. 만일 이이와 성혼을 훼방하고 배척하는 자라면 반드시 죄 주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계미기사』)

계미삼찬 이후 이이는 이조판서에, 성혼은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84년(선조 17) 1월 16일에 이이는 죽었다. 이이는 동인과 서인을 조정하려고 애썼으나, 교우 관계 때문에 서인의 지지를 받은 반면에 동인의 배척을 받았다. 결국 이이는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뒤에 서인의 종장(宗長)으로 추대되었다. 이이의 이러한 처지를 이원익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두 사람이 술에 취해 언덕 아래서 싸움을 하고 있다. 그 때 한 사람이 언덕 위에서 타일러 말리다가 두 사람이 듣지 않자 언덕에서 내려와 싸우는 두 사람을 뜯어 말리려 했는데, 결국 같이 끌리고 밀리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연려실기술』 권13, 「선조조고사본말」 이이졸서)

한편 선조는 두 당파를 저울질하면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이가 죽은 이듬해인 1585년(선조 18) 2월에 박근원ㆍ송응개ㆍ허봉을 풀어준 것도 그 대문이었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10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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