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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26 (화)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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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590      
[조선] 선조조의 당쟁 2 (이성무)
선조조의 당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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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1589년(선조 22)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가 올라왔다.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고변(告變)은 정여립의 일당으로 안악에 사는 조구(趙球)의 밀고를 받아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이 함경(황해의 잘못?-운영자주)감사에게 보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고변은 정여립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해 겨울에 서울로 쳐들어와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죽이는 한편 교서를 위조해 지방관들을 죽이거나 파직시킴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켜 일을 성사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난폭하고 무도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자신의 악행을 고한 여종의 배를 갈라 죽였는가 하면, 아버지가 현감이었을 시절에는 고을 일을 제 마음대로 처결해 버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글 읽기에 매진하니, 그 이름이 전라도 지방에 널리 알려졌고, 세간에서는 그를 죽도(竹島) 선생이라 불렀다. 정여립은 기백이 높고 언변이 출중해 좌중을 탄복시키는 일이 많았다. 이 시기에 그는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하를 왕래하며 학문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이ㆍ성혼은 정여립이 다소 과격하고 급한 기질이 있음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박학다식에 탄복하여 조정에 천거하기까지 했다. 1584년(선조 17) 초에는 정승 노수신(盧守愼)에 의해 김우옹(金宇顒)ㆍ이발(李潑) 등과 함께 조정에 천거되었다. 또 이발(李潑)ㆍ이길(李洁) 형제의 추천으로 사헌부와 홍문관에 발탁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이이가 죽었다. 그러자 정여립은 이발에게 붙어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으로 시종 매도했다. 선조는 이런 정여립을 배은망덕한 자라고 혹평하여 시골로 좇아내 버렸다.

정여립은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났던 황대도 안악에 내려가, 그곳에서 교생 변숭복(邊崇福)ㆍ박연령(朴延齡)ㆍ지함두(池涵斗)와 승려 의연(義衍)ㆍ도잠ㆍ설청 등과 사귀면서 비밀리에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당시 세간에는 "목자(木子=李)는 망하고 전읍(奠邑=鄭)은 흥한다"는 『정감록(鄭鑑錄)』류의 동요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는 그 구절을 옥판(玉板)에 새겨 승려 의연으로 하여금 지리사 석굴 속에 숨겨 두도록 했다. 그리고는 뒤에 산 구경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엄 위장해, 변숭복ㆍ박연령 등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대를 타고난 인물로 여기게 했다.

수십 년 전에 천안 지방에서는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자가 화적질을 하고 있었는데, 용맹이 뛰어나 관군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지함두(池涵斗)를 시켜 황해도 지방으로 가서 "길삼봉(吉三峯)ㆍ길삼산(吉三山) 형재는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에 들어가고 계룡산에도 들어간다", "정팔룡(鄭八龍)이라는 신비롭고 용맹한 이가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 않아 군사를 일으킨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팔룡은 여립의 어릴 때 이름이었다. 소문은 곧 황해도 지방에 널리 퍼져 "호남ㆍ전주 지방에서 성인이 일어나서 만백성을 건져,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리라"는 유언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정여립은 잡술에도 능해 장차 나라에 변이 일어나게 된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주ㆍ금구ㆍ태인 등 이웃 고을 무사들과 노비를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놓고 있었다. 이 대동계는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했을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군사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왜구를 진압한 후 군대를 해산할 때, 정여립은 훗날 일이 발생하면 각기 군사를 이끌고 모이라고 이르고 군사 명부 한 벌을 가지고 돌아갔다.

정여립의 반역 기미는 그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엿보인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정해 놓은 주인이 있으리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함은 왕촉(王蠋)이라는 자가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지 성인의 통론이 아니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 기축정여립지옥)

의문의 죽음

그러나 1589년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은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선조는 정여립의 생질인 예문관 검열 이진길(李震吉)만을 빼고 중신회의를 열었다. 이 때는 이산해(李山海)가 영의정, 정언신(鄭彦信)이 우의정을 맡고, 이발(李潑)ㆍ백유양(白惟讓) 등의 동인들이 득세하고 있을 때였다. 정언신은 정여립을 변호했다. 또 백유양의 아들 백진민(白震民)은 황해도 수령의 절반이 서인이고 또 이이의 제자들이 많은 곳이라 그들의 무고일 지 모르는 만큼, 정여립이 상경하여 입장을 밝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재령군수 박충간의 제보에 대해서는 오히려 근거없이 발설한 것이라며 참형에 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의기양양해진 반면, 동인들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정여립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변숭복은 조구가 고변한 것을 알고 안악에서 사흘 반나절만에 금구로 달려가 정여립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정여립은 그 날 밤으로 변숭복, 아들 옥남 등과 함께 진안현 죽도로 달아났다. 금부도사 유금이 덥쳤을 때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이에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이 관군을 이끌고 정여립을 추격했다. 이들에 둘러싸인 정여립은 먼저 변숭복ㆍ옥남을 친 다음 칼자루를 땅에 꽂아 놓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정여립의 자살로 정국은 돌변했다. 그의 말을 들어 보고 결정하자던 동인들이 설 땅을 잃고 만 것이다. 그가 자살했다면, 혐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살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정여립이 누군가의 꾐에 빠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일 꾐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가 관련 문서들을 없애 버리지 않을 리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꾐에 빠진 것이라면, 유인한 자는 변숭복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정여립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타살 당한 뒤 자살로 위장되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변숭복을 죽인 것도 그에게 유인당한 사실을 알고 처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칼을 거꾸로 꽂아 놓고 자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정여립의 난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 많다. 그가 도망을 가면서 하필 자신의 연고지인 죽도를 택하고, 더욱이 그 곳으로 간다고 행방을 알린 일부터가 이상하다. 진안현감이 추적한 것도 그래서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정여립이 도망갔을 것이라고 정철이 미리 말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정여립 본인을 문초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의 집에서 나온 문서들을 근거로 동인들을 일망타진한 사건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기축옥사는 조작된 사건[誣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모사가 송익필

기축옥사를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은 살아 있는 제갈공명이라는 말을 듣던 송익필(宋翼弼)이다. 그는 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의 스승이요 이이와 성혼의 친구이며, 서인의 모사(謀士)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은 어머니 감정(甘丁, 堪貞)이 사예(司藝) 안돈후(安敦厚)의 서녀라고 하고, 안돈후가 그의 형 안관후의 여종을 첩으로 삼아 낳은 천첩녀라고도 한다. 감정은 안돈후의 미움을 사 배천(白川)으로 쫒겨갔다가 갑사 송인(宋璘)과 혼인해 송사련을 낳았다. 송사련은 재간이 있고 총명해 안돈후의 아들 안당(安瑭)의 집안일을 도맡다가, 음양과에 합격해 천문학관을 거쳐 벼슬이 판관(종5품)에 이르렀다.

좌의정을 지낸 안당은 조광조 등 사림들의 진출을 도운 이름 있는 선비였지만,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은 친구들과 한담하는 자리에서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 간신들을 제거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고 사림을 보존할 수 있다고 토로한 바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송사련은 안처겸의 처의 초상 때의 조문록과 발인할 때 역군들의 명부를 가지고 안처겸 등이 대신을 모해하는 모역을 꾸민다고 고변했다. 그러나 송사련은 그 대가로 당상관에 올랐고, 죄인들의 토지와 노비까지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송사련은 부필(富弼)ㆍ익필(翼弼)ㆍ한필(翰弼)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그 중 특히 익필은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에 들 정도로 글을 잘 했으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이이ㆍ성혼과는 너나들이를 하는 사이였는데, 이이가 평생 서얼 허통을 주장한 것도 익필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형제는 아버지인 송사련의 죄과 때문에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서자라고 해서 과거 시험도 보지 못하고,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이름을 바꿔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 무렵 경기도 교하에 있는 언전(堰田)을 놓고 곽사원과 황유경이 소유권을 다투고 있었다. 곽사원은 바로 송한필의 사위의 아버지였다. 송한필(宋翰弼)은 서인 고관들의 힘을 빌어 곽사원을 지원했지만, 동인들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안당(安瑭)의 손자 안윤(安玧)이 동인 이발(李潑)의 사주를 받아, 송사련의 어머니는 안돈후의 딸이 아니라 사노비인 전 남편의 소생이니, 그 자손 70여 명을 모두 노비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발 등은 법의 시한이 지났음에도 그들을 모두 환천시켜 송익필과 친분이 깊었던 서인 정철(鄭澈) 등과 원수가 되었다.

이러한 수모를 당하고 송익필 형제는 동인들의 천하를 뒤바꾸어 놓으려는 계책을 세웠다. 정여립의 대동계가 그 빌미가 되었다. 더욱이 정여립은 이이를 배반해 서인들의 미움을 사고 있는 터였다. 송익필은 정여립과 함께 이이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사로 친하게 지내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여립을 잘 알고 있었다. 송한필은 황해도 사람들에게 "전주에 성인이 났으니, 곧 정수찬(鄭修撰)이다. 그는 길삼봉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였는데, 삼봉은 하루 3백리 길을 걸으며 지혜와 용맹이 비랄 데가 없으니 역시 신인이다. 너희들이 만일 가서 볼 것 같으면, 벼슬이 스스로 올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교생 변숭복ㆍ박연령 등이 그 말을 믿고 정여립을 만나니, 여립도 그들을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런 만큼 변숭복 등이 송한필의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구(趙球)가 정여립의 반역을 고발한 것도 송익필 형제의 사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송익필은 동인을 공격하는 서인의 상소문을 대신 써 주고, 정철을 조종해 정여립 사건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기축옥사를 두고 송익필이 꾸미고 정철이 실행한 사건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기축옥사

10월 8일에 영의정 유전(柳琠), 좌의정 이산해(李山海), 우의정 정언신(鄭彦愼), 판의금부사 김귀영(金貴榮) 등이 재판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했다. 고향에 있던 정철(鄭澈)은 송익필ㆍ성혼의 권유를 받고 입궐해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는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철이 위관이 되어 심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송익필은 정철의 집에 묵으면서 동인 타도를 지휘했다.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죄로 이기ㆍ황언윤ㆍ방의신ㆍ신여성 등이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은 "지금 임금의 어두움이 날로 심하다"라고 쓴 편지가 발견되어 매를 맞아 죽었다. 그 와중에 11월 2일, 정언신ㆍ정언지ㆍ이발ㆍ이길ㆍ백유양 등 동인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생원 양천회(梁千會)의 상소가 올라 왔다. 그리고 정여립의 조카 정집의 공초에서도 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결국 정언신(鄭彦愼)은 강계로, 이발(李潑)은 종성으로, 이길(李洁)은 희천으로, 백유양(白惟讓)은 부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 후 12월 12일에 교생 선홍복을 문초할 때, 다시 이발ㆍ이길ㆍ이급(李汲)ㆍ백유양ㆍ이진길ㆍ유덕수 등의 이름이 나왔다. 이들은 다시 잡혀와서 곤장을 맞고 죽었다.

정철은 겉으로는 이발 등을 구하는 척했으나, 뒤로는 갖은 수법으로 이들을 옭아넣으려 했다. 그는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을 모두 역당으로 몰아 처단했다. 3년 동안 죽은 자만도 1천여 명이 넘었다. 반면에 정여립의 난을 고변한 박충간 등 22명은 평란공신(平亂功臣)이 되어 관직을 올려받았다. 이 때가 1590년(선조 23) 2월이었다.

기축옥사를 사화(士禍)로 보는 시각이 있다. 기축옥사가 정철을 위시한 서인들의 동인 제거에 이용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정개청(鄭介淸)은 정여립의 집터를 봐 준 적이 있고, 또 그의 저술 중에 절의(節義)를 배척한 내용이 있다 하여 경원으로 귀양가 죽었다. 심지어 정철은 "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요.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다"라고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 최영경(崔永慶)은 정여립의 편지 한 장을 받은 죄로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죽었다. 당시 떠돌던 말에 의하면, 길삼봉은 진주에 사는 사람으로 나이는 60이고, 낯은 쇠빛이며 수척하고, 수염은 길어서 배가지 내려가고, 키가 크다고 했다. 어이없게도 최영경의 외모가 비슷하다 하여 길삼봉으로 오인받고 죽어야 했던 것이다.

이발의 82세 된 어머니는 주리를 틀어 죽였다. 그의 11살 된 아들과 5살 된 아들도 죽였다. 좌랑 김빙(金憑)은 바람병이 있어 날이 차면 눈물이 줄줄 흐르곤 했다. 그는 정여립과 썩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 여립의 시체를 찢던 날 바람병 때문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옆에서 이를 백유함은 김빙이 여립의 죽음을 슬퍼해 울었다며 역모로 몰아 죽였다. 이렇듯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심을 역이용한 정치적인 사건으로, 실로 당쟁 중의 비극이었다.

남인과 북인의 분열

세자 책봉 논의와 서인의 실각

심의겸과 김효원이 대립하고 있을 당시에는 동ㆍ서 양당만이 존재했다.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은 세력을 잃어 동인에게 밀렸지만, 정여립의 난 이후 정국은 좌의정 정철 등 서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동인 중의 이산해ㆍ유성룡 등도 선조의 신임을 받고는 있었다. 그러나 역시 주도권은 서인이 쥐고 있었다.

그러던 1591년(선조 24) 어느 날, 유성룡은 정철에게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고 했다. 당시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이에 대신 사이에서 세작 책봉 문제가 조금씩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선조는 인빈(仁嬪) 김씨와 그녀가 낳은 신성군(信城君)에게 한창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그래서 유성룡은 서둘러 국본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정철에게 이 문제를 의논해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와 이 문제를 논의할 약속 날짜를 정했다. 그러나 이산해는 두 차례나 약속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빈 김씨의 오바인 김공량(金公諒)에게 "정철이 장차 세자 세우기를 청하고 이어서 신성군 모자를 없애 버리려 한다"고 거짓 귀띔해 주었다. 이에 김공량은 곧바로 인빈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고, 인빈은 선조에게 울면서 "정철이 우리 모자를 죽이려 한다"며 하소연했다.

처음에 선조는 뜬소문이라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정철이 경연에서 세자 세울 것을 건의하고야 말았다.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선조는 대로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데, 네가 세자 세우기를 청하니 어쩌자는 것이냐?"고 호통을 쳤다. 이산해는 선조가 신성군을 사랑하고 있음을 김공량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 이산해는 나가지 않아 없었고, 유성룡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기화로 동인들은 정철이 정권을 오로지하고 최영경 등을 억울하게 죽였다며 맹공을 퍼붓기 사작했다. 그리하여 정철은 파직되어 명천으로, 백유함은 경흥으로, 유공신은 경원으로, 이춘영은 삼수로 각기 귀양갔다. 서인들이 실세한 것이다.

반면에 영의정에는 북인의 이산해, 좌의정에는 유성룡이 임명되었다. 기축옥사에서 죽었던 최영경은 죄가 풀려 벼슬을 올려받았고, 뒤에 이발ㆍ이길ㆍ정개청 등도 사면되었다. 선조는 "간사한 성혼, 악독한 정철'(姦渾毒澈)"이라는 말까지 쓰면서 서인을 배척했다.

동인의 분열-남인과 북인

정여립 역모 사건과 기축옥사, 그리고 신묘년의 세자 책봉 논의는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는 계기가 되었다. 동인은 기축옥사를 잘못 처리한 정철을 논죄할 때, 정철분만 아니라 서인들 모두를 대거 처벌해야 한다는 이산해ㆍ정인홍 등의 강경파와 그 범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유성룡ㆍ김성일ㆍ우성전 등의 온건파로 의견이 갈렸다. 이에 강경파를 북인이라 하고 온건파를 남인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당의 조짐은 이미 그 전부터 있었다. 정여립이 이발을 통해 전랑이 되고자 할 무렵이었다. 이경중(李敬中)은 정여립이 반역하기 전부터 그 사람됨이 나브다는 것을 알고 벼슬길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정인홍이 이경중을 탄핵했는데, 바로 6년 뒤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이에 유성룡은 이경중이 선견지명이 있었음에도 그 당시 대간들에게 반박당해 체직되고 말았다며 불만을 터드렸다. 그런데 유성룡의 그 한 마디가 조정에 파문을 일으켜 이경중 탄핵 당시의 대간이었던 정인홍은 관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와 같은 정인홍과 유성룡의 불화가 남북 분열의 한 빌미가 되었다.

한편 우성전과 이발의 대립도 남북 분열에 한몫을 했다. 우성전이 부친상을 당해 이발이 문상을 갔다. 그 때 이발은 우성전이 평양에서 데려온 기생첩이 머리를 풀고 며느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원래 그 기생은 우성전의 아버지가 함종현령으로 있을 때, 평양을 왕래하다가 알게 된 여인이었다. 그 후 그가 병이 들어 사직하자 평양감사가 여인을 우성전의 집으로 보낸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이발은 아버지가 죽게 되었는데 무슨 마음으로 기생을 데려왔는지 모르겠다며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이발은 북악산 아래 살고 있어서 그의 당을 북인이라 불렀고, 우성전은 남산 아래 살아서 그들 두둔하는 이들을 남인이라 했다.

남인인 유성룡 일파에는 김성일ㆍ이성중ㆍ우성전 등 퇴계 문인이 많았고 북인인 이발의 일파에는 정여립ㆍ최영경ㆍ정인홍 등 화담ㆍ남명 문인이 많았다. 이덕형 같은 경우는 본래 남인이었다. 그러나 북인 이산해의 사위였기 때문에 남ㆍ북인을 동시에 출입했는데, 북인이 점점 성해지자 남인으로 돌아섰다.

그러면 동인이 각기 남과 북으로 갈린 원인은 무엇인가? 단지 사사로운 감정 대립이 그 이유였는가? 동인은 그 구성원이 매우 다양했다. 서인이 이이와 성혼의 문인을 중심으로 결집된 반면, 동인은 서인에서 제외된 다수의 신진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그리고 화담 서경덕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황과 조식의 사상적 차이는 제자들 단계에 이르러 표면화되었고, 급기야 중앙 정계에서 남인과 북인이라는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중앙 정계에서 남인으로 지목된 인물은 주로 퇴계 문인이거나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었다. 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우성전(禹性傳)ㆍ이경중(李敬中)ㆍ허성(許筬)ㆍ김수(金燧)ㆍ이광정(李光庭)ㆍ정경세(鄭經世)ㆍ김우옹(金宇顒)ㆍ이원익(李元翼)ㆍ이덕형(李德馨)ㆍ윤승훈(尹承勳)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 외의 다른 당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시비 분별을 엄격히 하기보다는 정국의 안정을 위해 서로 협조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남인 세력의 이러한 정치적 인식은 왜란으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어 시비 분별이 중시되던 분위기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중의 당쟁

1591년(선조 24) 조선에서는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기로 했다. 정사(正使)에는 서인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에는 동인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에는 동인 허성(許筬)이 임명되었다. 일본에 다녀온 후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눈이 반짝거리고 지략이 있는 인물인 듯하다"고 했다. 반면 김성일은 "눈이 꼭 쥐눈과 같더라"며 그의 인물됨을 하찮게 보고했다. 서인들은 황윤길의 말을 믿었고, 동인들은 김성일의 말을 믿었다. 당시는 동인 정국이었는데, 주도권을 쥔 동인들은 김성일의 말에 따라 별다른 방책을 쓰지 않았다. 후일담이지만 김성일은 민심의 동요를 우려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이듬해 4월, 왜군은 파죽지세로 쳐 올라왔다. 조선은 속수무책이었고, 급기야 선조는 의주로 피란을 가야만 했다. 서인들은 왜란의 책임을 물어 동인 이산해를 탄핵했고, 강계로 귀양간 정철과 윤두수 등 서인을 불러들이고자 했다. 피난 가는 길이 서인이 우세한 지역이었기 때분에 선조는 이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서인은 동인을 공격해 이산해를 귀양가게 했다. 그러나 유성룡만은 이항복(李恒福)의 비호로 남아서 전란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의주로 피란간 뒤에도 동인과 서인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선조가 시국이 이러한데 아직도 동ㆍ서인이 사움만 하느냐고 호통을 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1594년(선조 27) 서울에 돌아온 선조는 유성룡(柳成龍)ㆍ김응남(金應南)ㆍ정탁(鄭琢) 등 남인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선조는 서인과 남인을 적절히 기용하면서 왕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 무렵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 논의가 있었다. 유성룡과 성혼은 화의론에 찬성했지만, 대부분은 반대했다. 종묘를 불사르고 능묘를 파헤친 원수와는 화친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독자적으로 명과 일본의 화의를 막을 도리도 없었고, 화의 조건이 조선에 불리한 것이 아닌데도 대의명분만을 내세워 반대했던 것이다.

이 때 전라감사 이정엄이 화의에 찬동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에 조신들은 그를 목 베어 죽여야 한다고 들고 일어섰고, 성혼만이 이정엄을 극구 변호했다. 선조는 그런 성혼을 두고 "간사한 자의 사특한 말"이라고 소아붙이며 대궐에 방을 붙여 타도하도록 했다. 선조는 성혼에게 묵은 감정이 있었다. 선조가 피란갈 무렵이었다. 피란 행차가 성혼의 고향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성혼은 찾아와서 뵙지 않았다. 당시 성혼은 산속으로 피란가 있었기 때문에 선조가 그 곳을 지나간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동인 중에서도 김우옹은 성혼만을 공격하고, 이이첨ㆍ정인홍은 유성룡을 공격해 남인과 북인의 분열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서인들은 화의는 유성룡이 주장했는데, 그 죄를 성혼에게만 뒤집어씌운다고 비난했다.

이순신(李舜臣)은 처음에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사가 되어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이 때 이순신과 함께 전공을 세운 이로 원균(元均)이 있었다. 그는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면서 그 휘하에 들어가게 되자, 이순신과는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동인은 이순신을 지지했고, 서인은 원균을 지지했다.

이 무렵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전라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이중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몰래 보내 다음과 같이 통지했다.

"이번 강화의 일이 성립되지 않은 것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때문이므로 나는 그를 매우 미워하고 있다. 아무 날에 가토가 바다를 건너올 것인데, 조선은 수전을 잘하니 만약 바다 한가운데서 마주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권17, 「선조조고사본말」 정유왜구재출)

김응서는 이 사실을 급히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말하고 출정하지 않았다.

"바닷길이 험난한데 적군은 반드시 복병을 많이 숨겨 두고 기다릴 터이니, 배를 많이 거느리고 가면 적이 모를 리가 없고, 적게 거느리고 가면 도리어 습격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연려실기술』 권17, 「선조조고사본말」 정유왜구재출)

그러자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다시 와서는 "가토가 이미 육지에 내렸다는데, 어지해 바다 가운데에서 막지 않았는가" 라고 거짓말을 해 댔다. 이에 북인은 이순신이 어물어물하다가 기회를 놓쳤다며 그를 취조했다. 그런 다음 사형의 벌을 감해 권율의 원수부에 백의종군하게 했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추천한 인물이기 때문에 평소 유성룡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자들이 이순신을 치죄한 것이다. 당쟁으로 인해 실로 우려되는 정국이었다.

왜군을 완전히 몰아낸 후, 경의(敬義)와 실천을 중시한 남명 조식의 영향을 받아 의병장을 많이 배출한 북인 세력은 절의를 중시하고 강력한 척화를 표방하면서 정국을 장악해 나갔다.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뒤에 명나라의 정응태(鄭應泰)가 조선이 명나라를 배반했다고 무고한 일이 있었다. 조선이 왜와 통하고, 속국으로서 임금을 □祖니 □宗이니 하는 묘칭호를 썼다는 이유에서였다. 선조는 유성룡을 변무사로 명나라에 보내어 오해를 풀고자 했다. 그런데 이 때 유성룡은 노모가 있어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했다. 이에 남이공(南以恭)ㆍ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 등 북인들은 유성룡에게 신료로서 왕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극력 탄핵했다. 성균관 생원 이호신 등은 유성룡이 변무사를 기피했을 뿐 아니라 원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고 나라를 그르쳤다며[主和誤國] 비난하고 나섰다. 유성룡에 대한 북인 세력의 공격은 남인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졌다. 결국 유성룡ㆍ김성일 등 남인은 임진왜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러나 북인은 그 전신인 동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잡다한 계열의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결속력이 미약했다. 퇴계 계통의 문인들로 구성된 남인에 비해, 북인은 조식과 서경덕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그래서 서인이나 남인에 비해 학연상의 순수성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이산해가 화담 문인인 이지함(李之菡)의 조카이자 제자이고, 이발과 정개청이 화담의 학통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정인홍이 조식의 문인이고 정인홍의 문인 중 일부가 북인으로 지목될 뿐, 그 외 대부분은 이들과의 혈연ㆍ지연ㆍ인척 관계로 맺어져 있었을 뿐이다.

북인의 분열 : 대북과 소북

전란 말기에 신진 세력의 지지를 받은 북인 김신국(金藎國)ㆍ남이공(南以恭) 등은 권력 장악과 동시에 북인 내부의 기성 세력인 이산해(李山海)ㆍ홍여순(洪汝諄) 등의 정국 운영에 불만을 토로했다. 1599년(선조 32) 3월, 이조판서 이기가 홍여순을 대사헌으로 천거하려 하자 이조정랑 남이공이 청론을 앞세워 이를 막는 것에서부터 사단은 벌어졌다.

이 때부터 북인은 이산해(李山海)ㆍ홍여순(洪汝諄) 등의 대북(大北)과 남이공(南以恭)ㆍ김신국(金藎國) 등의 소북(小北)으로 갈렸다. 이이첨(李爾瞻)ㆍ정인홍(鄭仁弘)ㆍ이경전(李慶全)ㆍ김대래(金大來)ㆍ기자헌(奇自獻)ㆍ허균(許筠)ㆍ홍여순(洪汝諄) 등은 대북이었고, 유영경(柳永慶)ㆍ남이공(南以恭)ㆍ김신국(金藎國)ㆍ유희분(柳希奮)ㆍ박승종(朴承宗) 등은 소북이었다.

그리고 대북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홍여순의 세력 확대와 그에 대한 이산해의 견제로 대북 내에 또 다른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그리하여 1600년(선조 33) 4월, 대북은 이산해를 지지하는 육북(肉北)과 홍여순을 지지하는 골북(骨北)으로 다시금 분열되었다.

한편 북인의 대ㆍ소북으로의 분열은 영창대군(永昌大君) 출생 이후 광해군측과 영창대군측의 대립으로 첨예화하게 된다. 1602년(선조 35), 각 당파의 대립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선조는 정치적 경륜이 있고 정국의 소용돌이에도 휩쓸리지 않으며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유영경(柳永慶)을 중용했다. 그는 이조판서에서 우의정, 그리고 곧 영의정으로까지 올랐다. 그 후 1606년(선조 39), 선조는 김제남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이해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았다. 유영경은 세자인 광해군이 있음을에도 불구하고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4)에 급히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전란 중에 많은 공적을 쌓아 따르는 무리가 많았고, 이에 선조의 의심과 불신을 사고 있었다. 유영경은 세자에 대한 선조의 불만을 자기의 손자이며 선조의 부마인 전창위 유정량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영창대군의 출생 무렵에는 선조가 세자의 문안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갈등의 골이 깊은 상태였다.

그 때부터 유영경은 내밀히 영창대군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왕위 계승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광해군은 세자이기는 했다. 그러나 아직 명나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던 만큼, 영창대군을 새울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1607년(선조 40) 겨울, 선조는 병세가 악화되자 밀지를 내려 대신들을 불렀다. 전ㆍ현직 대신들은 이미 대궐 안에 모여 있었다. 유영경은 왕이 현직 대신들만을 들어오라고 했다면서 전직 대신들을 모두 내보내게 했다. 왕은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전교를 내렸다. 그러나 유영경은 좌의정 허욱(許頊), 좌의정 한응인(韓應寅)과 함께 세자 전위의 명을 거두라고 했다. 영창대군이 아직 두어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위를 최대한 지연시켜보자는 뜻에서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영경이 세자를 옹호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유영경은 7년 동안이나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소북이 정권을 주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에 이산해ㆍ이경전ㆍ이이첨 등의 대북은 진주에서 정인홍(鄭仁弘)을 불러들여 유영경을 공격하도록 했다. 산림 세력을 끌여들여 밖으로부터 지지 세력을 확보할 요량에서였다. 그 동안 대북 인사들을 통해 중앙 정계의 동정을 파악하고 있던 정인홍은 "유영경이 광해군을 동요시키고 좌의정ㆍ우의정 등이 이를 부추긴다"며 강경한 어조로 비판했다.

선조는 정인홍의 상소를 보고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다.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한 세자를 두둔하면서 유영경을 모함한 것이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대간에서는 정인홍이 왕과 세자를 이간질한다고 공박했다. 선조는 정인홍ㆍ이이첨ㆍ이경전 등을 유배보내 버렸다. 그러던 차에 선조가 급작스레 서거하고 말았다. 선조의 죽음과 함께 정권은 대북에게 돌아갔고, 유영경을 위시한 소북은 궁지로 몰렸다.

한편 유영경이 7년을 집권하는 동안 같은 소북 중에서도 남이공파는 실세했기 때문에, 유영경의 소북당을 탁소북(濁小北), 남이공의 소북당을 청소북(淸小北)이라 불렀다. 또한 구성원이 다양하여 고정되지 않은 당색을 띄었던 북인은 잦은 분열과 대립상을 드러내 보였다. 이러한 성향은 광해군대에도 계속되어 초기에는 육북(肉北)과 청북(淸北)의 공존 체제로, 그 후에는 대북 정권의 독점 체제로 나타났다. 뒤에 인조반정으로 북인 세력은 몰락하고, 정국은 서인ㆍ남인 세력의 공조 체제로 운영되었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12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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