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05 (수) 00:14
분 류 사전3
ㆍ조회: 1459      
[조선] 김윤식 (브리)
김윤식 金允植

1835(헌종 1)~1922. 한말의 관료·문장가.

사상적으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하여, 서학 수용주체로서의 조선의 도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면서 폭넓게 서학을 수용하고자 했다. 근대화 방법으로 무비강화(武備强化)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양무자강(洋務自强) 정책에 힘을 기울였으며, 외세에 의존하여 이를 수행하려 했다.

초년

본관은 청풍,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익태(益泰)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유신환(兪莘煥)과 박규수(朴珪壽)에게 배웠다. 1865년(고종 2) 음관(蔭官)으로 벼슬에 올라 건침랑(健寢郞)이 되었고, 1874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암행어사·부응교·부교리·승지·순천부사 등을 지냈다.

온건개화파로서의 활동

1881년 정부의 개화정책에 따라 영선사(領選使)로 학도 20명과 공장(工匠) 18명을 인솔하고 중국에 가서, 그들을 톈진[天津] 기기국(機器局)에 배속시켜 근대문물을 배우게 했다. 이때 비밀리에 고종으로부터 한미조약에 관해 이홍장(李鴻章)과 상담할 권한을 부여받고, 7차에 걸친 회담 끝에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수 있게 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과 상의하여 청에 파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흥선대원군 제거를 제의하여 청을 끌어들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되고 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된 뒤, 그해 9월 종사관 김명균(金明均)과 함께 다시 청으로 건너가 각종 기기를 도입하여 기기창(機器廠) 설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뒤 호군(護軍)·강화부유수가 되었으며 규장각직제학을 겸임했다.

강화부유수로 있을 때 위안스카이[遠世凱]의 도움으로 500명을 선발하여 진무영(鎭撫營)을 설치했다. 이 군대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중국식으로 훈련되었으며, 갑신정변 때는 상경하여 궁중수비를 담당하기도 했다. 통리내무아문이 설치되자 협판통리내무아문사무로 임명되었고, 그뒤 협판군국사무가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김홍집(金弘集)·김만식(金晩植)과 더불어 위안스카이에게 출병을 요청했다. 청군과 함께 창덕궁을 점거하고 있던 개화파와 일본군을 물리침으로써 정변을 진압했다. 정변 뒤 병조판서를 거쳐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대외관계를 담당했다. 재임중 민씨척족과 친일급진개화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대원군을 귀국시켰다.

1887년 5월 부산첨사 김완수(金完洙)가 일본상인의 사채(私債)에 통서(統署)의 약정서를 발급한 데 연루되어 면천(沔川)에 유배되었다. 1894년 석방되었고, 다음해 6월 강화부유수가 되었다. 그뒤 김홍집내각에 등용되어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갑오개혁에 참여하고 독판교섭통상사무에 임명되었다가, 정부기구의 개편에 따라 외무아문대신이 되었다.

1896년(건양 1)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외무대신직에서 면직되었고, 을미사변 뒤 친로(親露)내각이 들어서자 민비 학살의 음모를 알고서도 방관했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제주목(濟州牧)으로 종신 유형에 처해졌다. 1901년 6월 다시 지도(智島)로 옮겨졌다가, 1907년 7월 일진회(一進會)의 간청과 정부의 70세 이상자에 대한 석방조처에 따라 10년 만에 풀려났다.

만년

이후 황실제도국총재(皇室制度局總裁)·제실회계감사원경(帝室會計監査院卿)·중추원의장 등을 거쳤고, 1908년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았다. 한편 갑신정변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강구회(講舊會)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으며, 계몽운동 단체인 기호학회(畿湖學會) 회장, 흥사단장(興士團長), 교육구락부(敎育俱樂部) 부장, 대동교총회(大同敎總會) 총장으로도 활약했다.

일제의 강점 뒤 중추원 부의장이 되고, 자작(子爵)의 작위와 은사금(恩謝金)을 받았다. 1916년에는 경학원대제학(經學院大提學)에 임명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용직(李容稙)과 함께 독립을 청원하는〈대일본장서 對日本長書〉를 제출하여, 작위를 삭탈당하고 3년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저서로는 1915년 일본학사원 상을 받은 〈운양집〉을 비롯하여 〈임갑영고 壬甲零稿〉·〈천진담초 天津談草〉·〈음청사 陰晴史〉·〈속음청사 續陰晴史〉 등이 있다.

<이윤갑(李潤甲)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윗글 [현대] 백철 (브리)
아래글 [현대] 김수영 (한메)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728 사전3 [현대] 반민족행위처벌법 (민족) 이창호 2004-01-09 1464
2727 사전3 [종교] 개신교-한국의 개신교 (브리) 이창호 2003-05-23 1462
2726 사전3 [조선] 황토현전적지 (민족) 이창호 2003-02-10 1462
2725 사전3 [현대] 북한-정치 (두산) 이창호 2003-11-30 1459
2724 사전3 [조선] 김윤식 (브리) 이창호 2003-03-05 1459
2723 사전3 [현대] 백철 (브리) 이창호 2004-01-04 1458
2722 사전3 [현대] 김수영 (한메) 이창호 2004-01-05 1454
2721 사전3 [근대] 전화 (한메) 이창호 2003-04-26 1454
2720 사전3 [근대] 개화기의 문학 (민족) 이창호 2003-05-20 1452
2719 사전3 [근대] 조소앙 (브리) 이창호 2003-08-29 1449
1,,,31323334353637383940,,,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