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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30 (일) 14:54
분 류 사전3
ㆍ조회: 1460      
[현대] 북한-정치 (두산)
북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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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화

lll. 정치

1. 정치이념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 정치·외교·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유일한 지도이념이다. 당규약 전문에는 “조선노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 사회주의헌법 제3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형성배경이 김일성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주체사상의 전개 발전 과정도 김일성 1인독재 권력 강화와 관련된다.

북한에서 주체라는 용어가 정치적으로 최초로 사용된 것은 1955년 12월 28일 개최된 당(黨)선전선동원대회에서 행한 김일성의 연설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한 데 대하여”에서 비롯된다. 김일성은 당시 전후 복구건설사업을 전개하면서 6·25전쟁 패전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적들을 숙청하는 데에서 주체를 내세우다가 중·소간 이념분쟁이 격화되자 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다시 주체를 정치외교적 명분으로 활용하였다.

1970년 제5차 당대회에서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영역을 포괄하여 종합적인 사상체계로 이론화하였으며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이후에는 김정일에 의해 주체사상이 ‘김일성주의’로 정식화되어 사상체계와 원리 및 방법이 더욱 발전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주체사상이라는 뚜렷한 개념적 정의를 내리지 않고 정치권력의 필요에 따라 변용되고 추가되었다.

1950년대에는 사상과 경제에서의 주체와 자립을 의미하다가 1960년대에는 군사에서의 지위, 정치·외교에서의 자주를 구현하는 지침으로 활용되었다. 북한의 정치사전에는 “주체사상이란 한 마디로 말하여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라고 김일성이 교시하였으며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김정일은 주체사상에 대해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절대화, 구체화한 혁명적 수령관과 사회정치적 생명체 이론을 추가시켜 주체사상은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 하고 사람이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가지고 자기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혁명의 주체는 ‘수령·당·대중의 통일체’로 사회 전체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생사운명을 같이 한다고 하여 북한사회를 배타적인 이념적 혈연집단으로 결속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세습체제의 정당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1980년대 말에 생겨난 ‘우리식대로 살자’는 구호는 주체사상에 기초한다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목표로, 외부사조에 흔들리지 않고 수령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옹호할 것을 교육시키고 있다. 주체사상과 더불어 북한정치의 노선을 결정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혁명전략이다.

북한의 혁명목표는 첫째, 북한지역에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 둘째 남한지역에서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셋째, 세계 공산화 혁명을 달성하는 데 있다. 북한은 대내적으로 사회주의의 완전승리를 이룩하기까지 과도기단계의 혁명목표로 물질적 요새와 사상적 요새의 2가지 고지를 점령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질적 요새점령이란 사회주의의 물질적·기술적 토대구축을, 사상적 요새점령은 사회 전체를 혁명화·노동계급화하여 사람들의 사상을 공산주의적으로 개조함을 의미한다. 또 이러한 과도기단계에서의 2가지 혁명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을 수행하는 것을 당면과업으로 제시하였다. 이 중에서 사상혁명을 통해서는 인간개조 및 정치사업을, 기술혁명은 대중적 기술혁신운동과 생산성향상 방안 탐색을, 문화혁명은 환경위생 및 생활문화 향상 등으로 체제가 요구하는 사회주의 생활양식으로의 개조를 의미한다.

북한은 이상의 3대혁명 추진을 위해 ‘3대혁명 소조운동’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남한사회에서 1단계 혁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 내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을 건설하며 그 주위에 노동계급을 결속시켜 혁명의 주력군을 편성하고 보조역량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통일전선을 형성하되, 친북·용공세력을 토대로 상·하층 통일전선을 강화시키며 나중에는 정당, 사회단체들까지 모두 통일전선체에 흡수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북한은 세계혁명을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한 중요한 고리의 하나로 보고 모든 반제(反帝)·반미(反美) 역량의 통일전선 형성과 국제공산주의운동, 노동운동 등의 단결을 주장하고 있으나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퇴조, 이념의 변화 등으로 북한 자체의 혁명기지 보존에 전력하고 있는 실정이다.

2. 정치체제

북한 정치체제의 특징은 1당독재 체제, 수령지배체제에 있다. 모든 정권기관이나 정치조직은 수령과 당의 영도 아래 사업해야 한다. 수령·당·계급·대중이 하나의 전일체를 이루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에서 당은 최고 형태의 혁명참모부이자 향도적인 영도 역량이다.

수령은 당과 국가를 지도하고 당의 혁명전통과 사상·노선을 제시하며, 당의 최고영도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 총체를 영도하는 최고수뇌이며 당과 대중을 통일 단결시키는 유일한 중심이다. 따라서 북한에서의 정권은 수령의 혁명사상을 실현하는 정치기구로서, 노동당의 노선과 정책의 집행자로서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정권기능으로서 주요역할은 첫째, 반혁명적 요소 제거 및 독재수행 기능, 둘째, 법적 제재를 수행하는 통제적 기능, 셋째, 사상·문화 혁명을 추진하는 문화교양적 기능, 넷째, 경제건설을 추진하는 경제조직적 기능, 다섯째, 혁명의 주체적 임무를 수행하는 대외적 기능으로, 이상의 정권기관의 권리행사는 모두 법적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 권력의 심장부 역할을 하고 있는 조선노동당은 1945년 10월 13일에 창설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모체이며 북조선공산당·북조선노동당·조선노동당으로 개칭되었다. 분국 창설 초기까지도 서울의 조선공산당이 ‘당중앙’으로 인정되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8월 29일 중국 옌안[延安]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발족, 이어 1948년 8월 인민공화국 정권수립을 위하여 남조선노동당과 연합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949년 6월 30일 남북노동당은 1국1당 원칙에 따라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었다.

조선노동당의 이념과 목표는 역대 당대회를 통해 계속 수정되었다. 제1차 당대회(1946.8)와 제2차 당대회(1948.3)에서 채택한 규약은 당의 이념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규정하고 투쟁목표를 통일정부 수립에 두었으나, 제3차 당대회(1956.4) 규약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혁명전통을 접목시켰고, 당의 최종목표를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두었다.

제4차 당대회(1961.9) 규약에서는 당이 항일투쟁에서 이룩한 혁명전통의 계승자임을 강조하였으며, 제5차 당대회(1970.11) 규약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 김일성주체사상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표방하였다가 제6차 당대회(1980.10)에서는 김일성주체사상만을 유일한 당이념으로 명문화하고 최종목표를 전한반도의 공산주의사회 건설과 사회 전체의 주체사상화로 변경하였다.

당의 조직과 운영면에서도 초기에는 매년 1회 개최되는 당대회, 3개월마다 개최되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권한이 막중하였으나 정치위원회와 비서국제가 강화·신설되어 당의 운영은 당원의 합의보다는 통치자를 정점으로 한 소수집단의 하향적 지시에 따르는 운영체계로 바뀌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창설될 때 당원이 4,530명인 것이 1961년 9월 1일 북한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당원 131만 1568명, 당세포수 6만 5000개였다. 그러나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 참가한 당대표가 3,220명(결의권대표:3,062명, 발의권대표:158명)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당원수는 약 320만 명 정도로 추계된다.

이를 기준으로 1개 세포당 당원을 15명으로 추정(당규약상 5~30명)하면 21만 개 정도의 당세포가 조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북한은 당세포수를 막연히 수십만 개에 이르는 것으로 발표하였으며, 1980년 이후 지금까지 당세 확장이 상당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은 중앙집권제 원칙하에 모든 지역별·부문별로 계서적 조직을 가지고 있고 하급당조직은 상급당조직을 선거하고 상급당조직은 하급당조직의 사업을 계통적으로 지도·검열한다. 모든 당원은 당조직에, 모든 당조직은 당중앙위원회에 절대복종하도록 되어 있다.

당중앙위원회는 필요에 따라 정치·경제·군사기관에 직속으로 정치국을 두고 정치국은 해당기관에 조직된 당위원회의 집행부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당정책의 결정은 형식상 각급 당위원회 회의형식을 거쳐 이루어지나 실제로는 통치자의 교시나 명령에 좌우된다. 일단 당회의에서 채택된 제반 정책은 비서국에서 집행한다. 중앙위원회의 비서국에는 10명 내외의 비서를 두고 지방당위원회의 비서처에는 책임비서와 비서들이 있다.

북한의 당대회는 형식상으로는 조선노동당의 최고지도기관이다. 당대회는 당중앙위원회와 중앙검사위원회 활동의 총화와 선거, 당강령과 규약의 채택 및 수정 보완, 당노선과 정책 및 전략전술의 기본문제 결정 등과 같은 사업을 수행하게 되어 있으나 사실상 당중앙위원회 또는 정치국의 결정사항들을 만장일치로 가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앙위원회는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의 모든 당사업을 관장하는 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이다. 중앙위원회는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총비서와 비서를 선거하고 비서국과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 중앙위원회의 후보위원은 결의권 없이 발언권만 가지며, 준후보위원은 생산노동에 직접 참가하는 핵심당원에서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중앙위원회는 6개월에 1회 이상 전원회의를 소집하도록 되어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중앙과 지방의 당·정기관 및 경제기관 등의 책임자들이 참가하는 확대전원회의를 개최하기도 한다. 전원회의에서 취급, 토의된 안건의 대부분은 경제문제가 주류를 이룬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전원회의 사이에 중앙위원회 명의로 당의 모든 사업을 결정하고 지도하는 사실상의 최고 핵심부서이다.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직후 개최된 제1기 제1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회로 처음 조직되었으며,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으로 개칭하고 정치국 내의 옥상옥(屋上屋)의 기관으로 김일성·김정일·오진우로 구성된 상무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중앙위원회 비서국은 간부인사, 당내 문제, 기타 당면과제들을 정기적으로 토의 결정하고 그 집행을 지도하도록 되어 있다. 또 비서국은 중앙위원회의 각 부서를 일상적으로 지휘·감독하는 당의 중추기관으로서 정치체계 전반에 걸쳐 당의 지도·통제 역할을 수행한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북한군의 각급 부대에 설치된 당조직 전체를 지도·지휘하는 군사부문의 최고 당정책결정기구이다. 이 위원회는 당의 군사정책을 토의 결정하며, 군수산업과 군사력 강화를 위한 사업을 조직·지도한다.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는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를 하거나 당의 노선·정책·규약을 준수하지 않는 당원들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당원의 신소(민원)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당중앙검사위원회는 당대회에서 선거하여 구성되며 당의 재정경리사업을 검사하는 기능을 맡고 있다. 그 외의 지방조직으로 지방당대표회가 있다. 지방당대표회는 해당 지방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으로 3년에 1회 소집하기로 규정되어 있으나 규정된 기간보다 빨리, 또는 늦게 소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방당대표회에서는 해당지방당위원회와 검사위원회 및 상급 당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선거하고 당해 지방당위원회와 검사위원회의 사업을 총화하도록 되어 있다. 노동당의 외곽단체로서는 근로단체 명칭을 띠고 있는 조선직업총동맹,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조선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조선민주여성동맹 등이 있고 통일단체로 가장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이 있으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산하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조선불교도연맹·조선천도교 중앙지도위원회·조선천주교인협회 등이 명목상으로 존재한다.

북한에서는 1948년 9월 9일을 공식적인 정권수립일로 기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소련군이 점령하여 북한지역에 프롤레타리아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별도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첫 작업이 1945년 8월 27일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와 같은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그후 주둔 소련군의 양해로 독자적인 권한이 없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창설이 결정되었다. 1945년 11월 3일에는 북한 전역에 도·시·군 인민위원회 및 각 정당단체 대표 1,157명이 참석한 가운데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가 개최되어, 여기에서 선출된 대의원 237명으로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2월 21~22일 이틀간 제1차 회의를 열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22명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당시의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 탄생으로 규정하고 있다. 1948년 2월 6일부터 개최된 북조선 인민회의 4차회의에서 헌법 초안을 인민토의에 회부하고 4월 28일에는 인민회의 특별회의를 소집, 여기에서 헌법 수정 초안을 심의하여 인민공화국헌법 초안으로 정식채택하였다. 1948년 9월 2~10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 인민공화국 헌법을 심의 채택한 데 이어,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출범시켰다.

북한은 1948년 인민공화국 헌법(11장 104조)을 채택한 이래 5차례에 걸쳐 부분적으로 수정해오다 1972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에서 인민민주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전문 11장 149조로 된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였다. 사회주의 헌법의 특징은 사회주의제도를 법적으로 정착시키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한다는 명문으로 국가 기관 체계를 주석 중심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주석과 국가주권의 최고지도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를 신설하고 종래의 내각을 단순한 행정집행기관인 정무원으로 격하시켰다. 1990년대에 들어와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는 등 국제정세와 안보환경이 급변하자 1992년 4월 9일 제9기 제3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종전의 헌법을 대폭 개정한 전문 7장 171조의 새로운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였다.

개정헌법은 이념과 지도노선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침으로 명시함으로써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를 부각하는 한편, 국방이라는 별도의 장을 신설, 군의 사명을 사회주의 제도의 보위에 두고 4대군사노선의 관철을 명시함으로써 사회주의체제의 고무를 위한 군의 역할과 성격을 헌법에 구체화하였고, 당이 국가를 영도한다는 조항을 신설하여 당우위노선을 재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국방위원회를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분리하고 국가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군사 관련 제반 기능과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이관함으로써 군사정책의 수행 일원화와 김정일의 군부장악을 법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주석·최고인민회의·중앙인민위원회 등 주요기관의 임기도 종전 4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국방위원회 위원장·정무원 총리·중앙재판소 소장 등은 5년 임기조항을 신설하였다. 새 헌법은 “전국적 범위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통일”이라는 부분을 삭제하였으나 “계급노선을 관철하고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실시하는” “조선인민 전체이익을 대표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국가” 등을 신설함으로써 기존 대남전략에 본질적 변화는 없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외국인의 합법적인 권리와 이익보장 관련 조항과 외국과의 합영 및 합작조항 등을 신설하여 당면한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대외경제 개방정책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헌법상 주석의 지위는 국가주권을 대표하고 중앙인민위원회의 수위 등으로 사실상의 모든 국가기관을 지도·감독하는 절대권력자의 지위에 있다.

헌법에 명시된 주요 권한은 중앙인민위원회에 대한 지도, 정무원회의의 소집·지도, 최고인민회의 법령 및 상설회의 결정, 특사권의 행사, 조약 비준·폐기의 공포 등이 있다. 최고인민회의는 입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주권기관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명목상의 권한을 가지는 형식적인 추인기관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헌법에서는 최고인민회의 권한을 헌법 및 법령의 채택·수정, 대내외 정책의 기본원칙 수립, 주석·국방위원회 위원장·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및 위원들의 선거와 소환, 전쟁과 평화에 관한 문제의 결정 등으로 강화하였다. 최고인민회의는 대의원자격심사위원회를 비롯하여 법제위원회·예산위원회·외교위원회·통일정책위원회 등 5개 위원회를 두고 있다.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 군사지도기관으로 전반적인 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의 지도, 중요 군사간부의 임명 및 해임, 군사칭호 제정 및 장령 이상의 군사칭호 수여, 유사시 전시상태와 동원령의 선포 등의 임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 1992년 개정헌법에서 종전 헌법상 국가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일체의 군사관련 기능과 권한을 이양받았다.

중앙인민위원회는 형식상 국가주권의 최고지도기관으로 수위인 주석이 직접 지휘·감독·통제한다. 국가의 대내외 정책수립, 사법·검찰기관의 지도, 헌법, 최고인민회의 법령, 주석명령, 국방위원회 결정·명령 등의 집행상황과 감독 및 위반된 국가기관의 결정·지시 폐기, 정무원의 위원회·부 설치 및 폐지, 조약의 비준 및 폐기, 행정구역의 개편 등의 권한과 임무가 있다. 정무원은 최고주권기관의 행정적 집행기관으로 국가의 인민경제계획 작성 및 집행대책 수립, 국가예산편성, 농업·공업·건설·운수·보건사업 등의 조직 지도, 화폐 및 은행제도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책 수립 등의 임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

1982년 4월 5일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7기 1차회의는 인민무력부와 사회안전부 등 정권보위기관을 정무원에서 분리하였으나 제8기 1차회의(86.12.29)에서는 사회안전부를 정무원 기구로 다시 환원시켰다. 사법기관과 검찰기관은 중앙에서 시(구역), 군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각급 재판소가 해당 지방인민회의에서 선출되는 판사 및 인민참심원으로 구성됨에 비해 검사의 경우는 중앙검찰소가 임명 및 해임을 한다.

재판은 3급2심제를 원칙으로 판사 1명(특별한 경우 3명), 인민참심원 2명이 수행하나 통상 단심으로 끝난다. 이 밖에 사회안전부의 기능 중 정치보위 부문을 독립시킨 국가보위부는 정치사찰만이 주임무이며, 각급 생산단위현장에 파견되는 3대혁명소조는 당원·대학생·기술자 등 미혼남녀로 구성되어 김일성 부자(父子)의 세습체제 구축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 내용 중 가장 큰 특징은 주석제와 중앙인민위원회를 폐지하고 그 기능을 국방위원회와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 각각 분산시킨 것이다. 대외 국가대표기관 기응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 넘겼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기존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승격한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국정 집행기관인 정무원을 내각으로 바꾸고 그 권한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내각은 2위원회, 27성, 2국, 1원, 1은행 체제로 구성되었다. 또한 행정경제 위원회를 인민위원회에 흡수하고, 지방정책 수립 및 집행에서 인민위원회와 행정경제위원회로 이원화되어 있던 것을 통일적으로 수행하도록 했다.

3. 정치권력

북한정치사는 김일성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권력갈등과 숙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일성은 북한지역 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지만 소련군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6·25전쟁 이후 남로당계에 대한 숙청에서부터 1950년대 후반에 연안파·소련파에 대한 숙청, 1960년 후반의 갑산파와 군부에 대한 숙청으로 이어졌으며 1970년대 초반에는 세습체제에 장애가 되는 세력들까지 제거하였다.

1970년 11월에 개최된 5차 당대회 이후부터 북한의 지도층은 완전히 김일성 일파로 일색화되었다.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는 그를 항일혁명투사, 조선의 해방자로서 이미지를 심어주는 노력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위해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라는 조작책자를 발간하고 주민들에 대한 정치학습의 기본교재로 활용하였다. 이 책에는 김일성의 부대가 15년간 10만여 회의 전투를 통해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 정치 지도층의 핵심인 당정치국위원(후보위원 포함)과 비서를 역임한 인물은 1946년 1차 당대회부터 1992년 8월까지 46년간 82명, 당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인물은 355명이다. 정권기관의 경우도 이 기간에 주석·부주석·중앙인민위원회 위원·총리(수상)·부총리(부수상)를 역임한 인물은 54명, 부장(상)·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은 203명에 지나지 않는다.

8·15광복 후 북한을 통치해온 정치지도층의 변화는 실제 이들 300명 내외의 인물들의 교체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 후계문제가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 11월의 5차 당대회 이후로, 이는 혁명1세대의 고령화에 따른 전후세대의 등장과 김일성 사후 김일성 격하운동의 미연방지, 김일성 생전과 같은 전체주의 체제유지 희망 등에서 비롯되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한 시점은 1973년 9월에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비공개회의에서 비서국의 조직 및 선전선동 담당 비서로 선출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75년 10월부터 당중앙이라고 부르던 김정일은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공개적으로 등장하였다.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는 국방위원회 제1기부위원장, 그리고 1991년 12월 24일에는 군 최고사령관, 1992년 4월 24일에는 원수, 1993년 4월 9일에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이후 1999년 현재까지는 김정일이 국가주석과 당총비서에 취임하지 않은 채 과도기적 위기관리체제를 이끌고 있다. 북한의 정치권력은 당의 총비서와, 국가주석과 같은 제도적 지위만을 김정일이 김일성으로부터 인계받는 것이 아니라 신격화된 수령의 권위와 주체혁명노선까지 인계받는 데에 특징이 있다. 1998년 제10기 1차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하여 정치기구의 틀을 새로이 짰다.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가 폐지되고 그 권한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국방위원회로 이관됐다. 또 내각이 이전의 정무원을 대체했고, 행정경제위원회도 인민위원회로 흡수되었다.

4. 외교

(1) 외교정책

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와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해체되고 새로운 데탕트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국제정치를 해방과 혁명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노동당 규약을 보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서 사회주의 나라들과 단결하고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세계 모든 나라 인민들과 단결하여 그들의 민족해방투쟁과 혁명투쟁을 적극 지원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북한의 모든 정책활동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라는 궁극목표를 위해 추진되고 있으며, 외교정책도 이 범주에서 추진되어 왔다. 북한 외교 정책의 1차적 목표는 정통성 및 안보 추구, 경제협력 등이라고 할 수 있으나 최종목표는 “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한 국제혁명역량과의 연대성 강화”에 두고 있다.

1980년 10월에 개최된 노동당 제6차대회 총화보고 때 김일성은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을 ‘자주·친선·평화’라고 표방하고 이에 따른 대외활동의 방향으로 ① 자주성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기초한 사회주의 제국과의 단결강화 및 친선협조관계 발전, ② 비동맹 제3세계 국가와의 관계 발전 및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분야에서의 단결과 협조의 강화, ③ 우호적으로 대하는 자본주의 국가와의 우호관계 형성 및 경제·문화교류의 발전, ④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아시아 국가와의 선린관계 발전을 위한 내왕과 접촉의 강화 및 경제·문화교류와 협조의 발전 등을 주장하였다.

이상의 외교목표와 원칙에 따르는 북한 외교활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이들 국가들을 혁명지원역량으로 간주하고 관계유지와 유대강화에 극력 주력하여 왔다.

둘째, 비동맹국가, 제3세계 국가에 대해서는 간접적이고 보조적인 혁명지원 역량으로 간주하고 이들 국가들과는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의 형성과 유대강화를 위해 초청·방문외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셋째,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미국·일본·서유럽 기타 자본주의 국가를 우회적·예비적 혁명지원 역량으로 간주하고 이들 국가 내의 좌익단체와 인사 등 친북세력을 이용하여 문화적·경제적 관계를 형성하고 그 토대 위에 정치적 관계개선을 모색하고자 한다.

북한 외교정책의 기저에는 한국의 고립화와 북한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하나의 조선 정책을 추구하여 왔으나 동서 냉전구조가 붕괴되고 한국의 북방정책이 추진되는 등 국제환경이 변화하고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자 UN가입, 미·일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과의 관계개선 노력 등 현실주의적인 외교노선으로 다소 선회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 외교정책의 변천과정은 6·25전쟁 이전과 이후 각 10년 동안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북한정권수립부터 1953년 휴전이 성립할 때까지는 ‘진영외교기’로 외교대상국들이 모두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공산국가들로 수교국도 소련·중국·동유럽 국가 등 12개국에 불과하였다. 전쟁 도발로 UN에서 침략자로 규탄된 북한은 전적으로 소련에 의존하면서 중·소로부터 전쟁수행을 위한 군사적·경제적 지원과 외교적 지원 획득에 주력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반둥회의(1955.4:신생 29개국 참가)에서 평화5원칙이 발표되고 흐루시초프가 평화공존정책을 거론하자 북한은 공산국가에 국한한 진영외교를 탈피하고 다변외교로 전환, 1960년에 접어들면서 대중립외교를 더욱 강화하였다.

1960년 중·소 국경분쟁과 쿠바사태 이후의 중·소분쟁으로 북한은 내정불간섭과 상호평등을 표방하는 자주노선을 선언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실리적인 외교정책노선을 채택하였는데 북한이 실리외교를 채택한 배경에는 닉슨 미국대통령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한 미국과 중국의 관계개선, 일본·중국의 국교정상화 등 화해분위기 성숙, UN 및 국제기구에서의 남북한 대결에 대비한 지지국 확보 경쟁의 필요성이 작용했으며,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6개년 계획의 추진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 도입을 위해 서방국들과의 경제협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1975년 8월에는 비동맹회의에 가입하고 제30차 UN총회에서 처음으로 한반도문제에 관한 서방측 안과 공산측 안이 동시에 통과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는 북한의 호전적인 대남전략, 외채상환문제, 외교관 밀수사건 등으로 국제적 위신이 크게 손상되어 별반 효과가 없었다.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는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을 자주·친선·평화로 표방하고, 우호적으로 대하는 자본주의 국가와도 친선관계를 맺을 것임을 밝히는 등의 대서방외교 강화 방침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폭파사건으로 서방권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자 평화공세 수단으로 84년 남북한, 미국의 3자회담을 제의하면서 이를 통해 미국에 대한 접근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84년 9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는 만성적인 경제난을 탈피하기 위해 합영법을 채택하고 서방국가들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 외교활동

북한 외교정책은 헌법상으로는 최고인민회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 내각 외무성, 당대회, 당중앙위원회, 당중앙위청치국, 비서국, 국제부 등에서 결정한다(1998년 개정헌법). 1998년 외무부가 외무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백남순을 외무상에 임명했다. 외교부는 외교집행의 실무부서로의 임무를 수행하고 민간외교는 당 소속의 대외문화연락위원회가 맡고 있다. 그러나 북한외교의 최고책임은 국가주석이 관장하기 때문에 북한 외교정책의 결정은 주석 1인에 의해 지휘·감독을 받는다.

북한의 주요 외교활동은 김일성의 방문외교를 통해 추진되어 왔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6·25전쟁 남침계획을 협의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이래 10회의 소련 방문, 13회의 중국 방문, 그 밖에 동유럽권을 2회, 아프리카를 1회 순방하였다. 정권수립 초기에는 소련에 치중하다가 중국의 6·25전쟁 참전을 계기로 중국에도 같은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중·소 분쟁으로 북한은 자주노선을 선언하며 중·소간을 저울질하며 실리를 추구하는 줄타기외교를 전개하였다.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한 것을 계기로 소련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으나 1961년 7월 북한이 소련, 중국과 각각 군사동맹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의 대(對)중·소관계는 다시 균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1962년 10월의 쿠바사건과 중·소국경분쟁은 중·소관계를 악화시켰고 북한은 다시 중국으로 기울었으며, 1967년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1965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북한은 소련으로 기울었다.

북한의 7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차질을 빚어 3년씩 연장되고 1965년 2월 소련의 총리 코시친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북한은 한동안 친소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1970년대 이후 북한의 대중·소관계는 안정되었고 자주노선도 점차 정착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북한은 1980년 10월 제6차대회에서 ‘사회주의 국가와의 단결강화 및 친선협조 관계의 발전’을 내세우면서 중·소와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중국으로부터는 이념적인 결속을, 소련으로부터는 경제, 군사적 실리 지원을 추구하는 등 대중·소 실리추구외교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소련이 개혁·개방노선을 채택하고 1990년 9월 한·소간에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자 북한은 소련에 대해 배신행위라고 비난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고 11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독립국가연합(CIS)이 출범하자 모든 공화국들과 수교함으로써 구소련권과의 관계 재정립에 주력하였으며, 1992년 8월 한·중수교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여전히 중국과의 기존 유대관계를 지속시키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북한의 동유럽외교도 중·소관계의 변화 속에서 대소관계와 함수관계를 가지고 변화해 왔다. 북한의 대 동유럽권 관계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참여와 협조를 명분으로 하여 전후복구를 위한 경제 및 기술원조를 획득하기 위한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중·소분쟁에서 북한은 동유럽국가와는 다른 공산대국을 추종함으로써 북한과 동유럽의 관계는 다소 소원하였으나 북한의 대중·소관계가 균형적 관계로 급진전되었고 중·소분쟁 시기에 대소 자주노선을 추구하고 있던 루마니아와의 관계도 빈번해지기 시작하였다. 1972년 2월 미국의 대통령 닉슨의 중국방문과 때를 같이하여 북한은 외교부장 허담을 단장으로 하는 정권대표단을 소련·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동독·폴란드·헝가리·불가리아에 순방시켜 동유럽국가와의 상호정책 지지를 다짐하였고, 1978년 베트남 공산화 직후 김일성이 중국·루마니아·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를 방문, 루마니아와는 장기무역협정(1976~1980)을 체결하였고 불가리아와는 10년간의 경제 및 과학기술협조의정서(1976~1985)를 조인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와는 상호경제협동위원회 설치에 합의하였다.

특히 1984년 5월 김일성은 소련 방문을 마친 뒤 곧이어 폴란드·동독·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 등 동유럽 7개국을 순방하고 동독 및 불가리아와 우호 및 협력조약을 각각 체결한 것을 비롯하여, 여타 국가와도 경제·과학·기술협조강화에 합의하였다. 김일성의 동유럽 순방을 계기로 정치면에서는 3자회담 지지확보 등으로 동유럽국가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고 경제면에서는 당면한 경제난을 타개하고 경제계획 달성을 위해 사회주의권 중에서 경제사정이 나은 동독·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 등의 동유럽국가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개혁과 민주화가 추진되고 1989년 2월 헝가리를 선두로 하여 1990년 이후에는 모든 동유럽권 국가들과 한국이 수교를 정상화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북한이 그 동안 누려온 독점적 외교무대는 사라지게 되었다.

북한의 제3세계 외교는 반제반미공동전선 형성과 북한통일방안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는 데 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제3세계국가들에 대하여 ① 평화공조노선 표방, ② 반제·반식민주의 및 민족해방투쟁지원 선전, ③ 국제공산주의 선전기구 가입, ④ 인민외교, ⑤ 문화 및 경제교류 등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북한은 1961년 9월 노동당 제4차대회 직후 제2차 반둥회의를 앞두고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 고위대표단을 파견하여 이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였다.

1966년부터는 아시아·아프리카·중동지역의 친소적인 국가들을 대상으로 친선사절단을 파견하기 시작하였으며, 1964년 11월 나세르 통일아랍공화국 대통령을 초청한 이후부터는 각국의 수뇌급 인사들을 대거 초청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이처럼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강화에 주력한 것은 이들 국가의 대부분이 비동맹회의의 구성국가들이기 때문이며, 한반도문제가 UN에 상정될 때 비동맹회의 국가들과 국제통일전선을 형성함으로써 UN대책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북한은 1975년 8월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외상회의에서 회원국으로 가입한 이래 비동맹회의에 지속적으로 한반도문제를 상정하며 북한정책에 대한 지지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1980년에 들어오면서 비동맹회의 회원국간에 노선분규가 생기자 북한은 비동맹국가들의 ‘통일단결과 경제협력 및 자주성’을 촉구하면서 투쟁의 방향을 반제자주화로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비동맹국가들이 대결보다는 협조를,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대폭 향상됨에 따라 비동맹회의에서 한반도문제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점차 설득력을 상실하였다. 1989년 9월 유고슬라비아에서 개최된 제9차 비동맹정상회의에서는 한반도문제 결의안 초안에 대해 수정안조차 제출할 수 없었고, 1992년 9월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 제10차 비동맹정상회의에서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북한이 대서방 외교를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접어들어 미국대통령 닉슨의 중국방문, 미·소화해 등 동서화해 분위기가 형성되면서부터이다. 북한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에 자극되어 71년 11월 노동당 제5기 3차전원회의에서 대(對)서방 접근을 정당화하는 ‘당면한 제문제의 전술적 전환’을 결의하였다. 북한의 대서방 외교방식은 민간 수준의 민간외교방식과 정권 차원의 외교적 접근을 병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대상국가의 저명인사나 사회단체를 개별적으로 초청하거나 민간무역대표부와 공보관 등을 설치하여 준정부차원으로 끌어올렸다가 공식적인 외교수립으로 발전시켜 가는 방식을 도모하여왔다.

최근의 대서방외교의 제1차적 비중은 대미, 대일 관계개선에 있다. 이는 북한이 한국의 중국·러시아와의 수교에 대항하면서 미·일 두 나라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 서방선진국에 접근하는 발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북한은 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외교관 접촉, 6·25전쟁 참전 실종 미군유해의 반환, 학술회의 교환방문, 쌍방 고위급인사 접촉 등 다각적인 대미 접근 노력을 경주해왔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1988년 금창리 일대 지하시설에 대한 핵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지하시설 사찰 문제가 최대의 현안이 되고 있다. 북한은 이를 통해 경제제재 해체나 원조를 원하고 있어 쉽게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지만 1999년 이를 위한 협상이 진행중이다. 2000년 10월 국방위 제1부위원장 조명록이 미국을 방문하고, 이어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북한을 방문하는 등의 교류가 있었으나, 2001년 9월 발생한 미국대폭발테러사건 이후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목하였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정책 추이를 지켜보면서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 견제와 대화재개 유도에 주력하고 있다.

일본과는 그 동안 사회당과 1971년 11월에 구성된 일·조우호촉진의원연맹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교류를 추진하는 한편, 조총련의 막후 지원에 힘입으며 일본에 대해 국교정상화를 제의하였다. 북한의 이와 같은 태도 변화는 국제적 고립 탈피와 일본의 자본과 기술, 특히 일제강점기의 피해 배상금을 받아 경제난을 해소하고자 하는 데 있다. 1997년 1차 고향 방문단의 일본방문이 이루어졌고, 1998년 2차 방문단도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행불자 문제가 외교적 현안으로 등장하면서 급속히 냉각되었다. 1999년 12월 양국 적십자회담이 개최되었고 2000년 4월 이후 국교정상화 교섭을 재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일본의 과거사 사죄·보상 우선을 주장하고 일본이 납치·미사일 문제 해결 병행을 요구하고 있는 데다가 과거청산에 관련하여 현격한 입장 차이로 별다른 성과는 없다.

북한의 대(對)UN(United Nations:국제연합)외교는 1970년을 분수령으로 하여 이전까지는 UN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해왔으나, 1973년 한국이 남북한 UN동시가입 불반대를 내용으로 하는 6·23평화통일 외교정책을 선언하자 북한도 조국통일 5대강령 발표로 맞서 단일국호에 의한 UN가입을 내세우면서 UN외교를 강화하였다.

이어 북한은 1973년 9월 5일 UN본부에 상주대표부를 개설하였고 제네바에 있는 UN사무국에도 상임옵서버대표부를 설치하였으며 이 시기부터 각종 UN산하 및 전문기구, 정부간 국제기구 등에도 가입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단일의석하의 공동가입을 주장하였으나 날로 심화되는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991년 9월 18일 제46차 총회에서 한국과 함께 UN회원국이 됨으로써 국제무대에서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였다. 2001년 12월 현재 북한은 세계 151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역별로는 아프리카가 49개국으로 가장 많고, 유럽이 다음으로 46개국이다.

5. 군사

(1) 정책기조

북한의 군사정책 기조는 국방자위 원칙을 표방하면서 대남한 우위의 군사력을 건설·유지하는 데 있다. 북한 헌법 제60조는 “국가는 군대와 인민을 정치사상적으로 무장시키는 기초 위에서 전민무장화·전국요새화·전군간부화·전군현대화를 기본내용으로 하는 자위적 군사노선을 관철한다”고 규정하여 국방자위원칙을 선언하고 있다.

중·소에 의존한 북한의 군사력 건설이 이처럼 자위원칙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조성된 정세와 관련된 국방력 강화문제’를 토의하고 인민경제의 발전에서 일부 제약을 받더라도 우선 군사력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국방에서의 자위원칙을 결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원칙은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데 의미가 있으며, 구체적인 실천방도로 체계화한 것이 4대군사노선으로 북한은 이 노선을 1963년부터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는 6·25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등 경제건설과 군사력 강화를 병진하며 전쟁을 위한 물자의 비축과 전당·전인민이 동원된 전쟁태세 확립을 목표로 총동원체제를 유지하였다.

1970년대에는 독자적인 혁명전쟁 수행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자립적인 군사공업기지를 완성하여 획기적인 자위력의 육성과 강화를 도모하였으며, 전 전선에 남침용 지하갱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는 4대군사노선을 보강하는 시기로 예비전력의 정규군 수준화, 현대전 능력 보강에 따른 민간의 군 지원을 위한 군민일치강화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기계화군단 및 지구사령부 설치, SCUD미사일 등 고도의 정밀무기 개발에도 주력하였다.

1990년대에는 김정일이 ‘전군을 주체사상화하는 데 대한 군건설노선’을 제시하고 북한의 군대를 ‘혁명의 군대, 수령의 군대, 당의 군대, 인민의 군대’로 내세우며 통일혁명무력과 1당독재체제 보호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군사전략은 김일성의 전쟁관에서 출발한다.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혁명전쟁을 전개하였으며 6·25전쟁도 조국해방전쟁, 정의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속공기동전략(速攻機動戰略)과 포위섬멸전략을 주내용으로 하는 소련군의 야외교령(野外敎領)에서 출발하였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6·25전쟁의 경험을 응용하여 현대전과 혁명전의 배합이라는 기본전략전술을 설정하였다.

1950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3차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6·25전쟁 실패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한반도 지형에 맞는 새로운 전략적 과제를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북한군사전략의 근간이 되고 있다. 당시 국제연합군의 반격으로 후퇴 중이던 김일성이 자강도 만포시 별오리에서 패퇴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북한군의 전략전술을 재검토하였다.

① 민병대와 같은 예비부대의 부족, ② 적 공군의 우세에 대한 부적절한 준비, ③ 현대전 수행에서 군사령관의 능력 있는 지도력 결핍, ④ 군장비의 낙후, ⑤ 부대의 엄격한 규율을 확립하지 못한 점, ⑥ 산지전과 야간전투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고 준비를 못한 점, ⑦ 후방공급활동과 방위를 위한 불충분한 조직, ⑧ 부대에 대한 불만족스런 정치교육 등이다.

1958년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까지는 중국군과 인민군의 연합작전을 전제로 한 군사전략을 수립하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인민군의 독자적인 전략이 확립되었다. 김일성은 1969년 1월 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연설에서 6·25전쟁의 경험을 되풀이하면서 전쟁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현대전과 유격전을 배합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고 정규부대, 유격부대의 배합작전, 소부대와 대부대의 필요성, 경보병부대의 조직과 무기의 경량화, 곡사포와 저공비행기의 증강, 산악전의 중시 등을 강조하였다.

김일성의 전략전술을 종합적으로 표현한 것이 1971년 인민군 창건 23주년 기념보고대회에서의 민족보위성 부상 한익수의 보고이다. 그는 “집중과 분산, 적극적 방어와 배후교란의 배합, 대소부대 활동의 결합, 정규전과 유격전의 배합, 즉시적 반격전과 연속적 타격전, 적 배후의 제2전선 형성, 유격전 저격수 및 유동포 활동, 비행기·탱크사냥 운동 등 김일성의 전략전술법은 현대전과 혁명전쟁의 합법칙성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고 강조하였다.

김정일 역시 야간전과 산악전으로 상대측의 수적·기술적 우세를 격파하고 전격전, 유생역량(有生力量) 말살, 전쟁사상의식의 고취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결정적 시기 도래시에는 전면전을 감행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운용으로 대량선제기습과 속전속결방식으로 전쟁주도권을 장악하여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전쟁 초기의 돌파구형성과 주도권 장악을 위해 이미 1960년대 초부터 생화학무기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최전방의 연대급까지 화학소대를 운영하고 있고 사단별로 땅굴을 굴설하도록 하였다.

(2) 군의 형성과 특징

북한의 인민군 창설작업은 해방 직후부터 평양 주둔 소련군 25군사령부의 비호 아래 ‘건당·건군·건국’이라는 3대과제 중의 하나로 추진되었다. 당시 소련군사령부는 1945년 10월 12일 “북한지역 내에 있는 모든 무장대를 해산시킬 것, 모든 무기·탄약·군용물자들을 군경무사령관에 바칠 것,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임시 도위원회들은 소련군사령부와의 협의하에 정해진 인원수의 보안대를 평민 중에서 선출하여 조직함을 허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에 따라 민족진영의 자위대 등 여타 무장단체는 해산시키고 10월 21일 소련군 출신 한인들로 구성된 적위대를 중심으로 북한 각지에 보안대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인민군의 모체이다. 보안대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어 감에 따라 1946년 8월 15일 각 지역에 조직된 보안대를 통합, 지도하기 위하여 평양에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를 창설하고 1개월 후에는 인민집단군 총사령부로 개칭하였다.

1947년부터는 소련의 군사원조로 신형무기로 무장하면서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져 1948년 2월 4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내에 민족보위국을 신설하였으며, 정권수립 7개월 전인 2월 8일 인민집단군을 조선인민군으로 개칭하고 정규군으로 창설을 선포하였다. 해군은 1946년 7월 수상보안대사령부를 원산에 창설(동해수상보안대:원산, 서해수상보안대:남포)한 데서 비롯된다. 이어 1946년 12월에는 수상보안대를 해안경비대로 개칭하였고 1947년 6월 원산에 해안경비대 간부학교를 두었는데 이것이 후에 해군군관학교가 되었다. 1948년 9월 북한공산정권의 수립으로 해안경비대는 해군총사령부로 개칭되면서 해군으로 발전하였다.

공군은 1945년 10월 25일 민간기구로 발족한 신의주항공대가 그 효시로서 1947년 8월 20일 소련 유학을 마치고 온 신의주항공대 출신 300여 명을 중심으로 비행대를 창설하고 1948년 2월 8일 인민군 창설과 함께 항공연대로 증편함으로써 정규공군으로 발전하였다. 민병조직으로는 전후 복구과정에서 1959년 1월 14일 노동적위대를 창설하였고, 1970년 9월 12일에는 붉은청년근위대를 조직하여 북한 전역이 군대화되도록 하였다.

1988년 4월에는 당에 민방위부를 설치하여 직장과 연령에 따라 별도로 편성되어 있는 민병조직을 통합지휘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창설과정을 거친 인민군은 노동당 규약에 “조선인민군은 조선노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임을 명문으로 규정한 것처럼 노동당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있는 당의 군대, 혁명의 군대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군대의 당적, 혁명적 성격은 김일성부자의 독재체제와 연결되어 김일성부자의 군대로서의 성격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1978년부터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창설했다는 1932년 4월 25일을 기념하여 인민군창건일(2월 8일)을 4월 25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는 것도 인민군의 성격을 항일빨치산투쟁 전통과 연결시키려는 의도이며, 수령의 군대라고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당의 군대, 수령의 군대로서의 인민군의 성격은 군사제도나 군사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며 1986년 이후 군병력의 민간경제 건설현장 투입이 보편화된 이래 군민일치(軍民一致)의 기풍과 애병사상(愛兵思想)을 유달리 강조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 김정일은 군창건 60돌을 맞이하여 창군 이래 최대규모의 승진인사를 단행, 김일성에게는 대원수칭호를, 자신과 오진우에게는 원수칭호를, 최광 등 빨치산 출신 원로 8명에게는 차수칭호를 수여하였으며 대장 16명을 포함하여 664명의 장령을 승진시켰고 휴전협정체결 40주년을 계기로 6·25전쟁 참전 원로군관 99명(소장 85명, 중장 14명)을 승진시키는 등 북한 전장성의 2/3에 가까운 인원을 승진시켰다.

(3) 군사제도

북한의 군사기구는 당조직을 통한 정치지도체계와 군조직을 통한 군사지휘체계로 이원화되어 있다. 인민군에 대한 당의 지도와 통제는 군간부의 당내 정치적 지위를 보면 더욱 명백하다. 국방위원회의 위원, 총참모장, 총정치국 부부장 등 주요 군사간부는 거의 노동당 정치국위원 또는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을 겸직한다. 군에 대한 당의 견제는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 그룹이 러시아군을 장악하기 위해 당원 출신의 감시장교를 배속시킨 데서 비롯되었으나 북한의 경우는 군을 당에 예속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적인 견제방법으로 군을 장악한다.

현행 북한 헌법(1992년 4월 개정)에 따르면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일체의 무력을 지휘, 통솔하도록 되어 있어 군사력의 사실상 최고책임자이다.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김정일이 1993년 4월에 추대되었으며 권한은 국방건설사업을 지도하고 인민무력부장, 총참모장, 민병조직의 책임자 등 주요 군사간부를 임명 및 해임하며 장령·군사 칭호를 수여하게 되어 있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는 당군사정책의 관철, 대책결정, 군수산업과 인민군대와 모든 무력의 강화를 위한 사업조직, 전무력의 지휘 등 실질적인 군사최고지도기구이다. 1984년 2월부터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로 개칭, 군사위원회의 임무를 군사정책결정 및 지도에서 군지휘가 가능하도록 하여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인민무력부는 주석 및 중앙인민위원회의 지도하에 군사업무를 집행하는 정무원 산하의 부서였으나 현재는 주석과 정무원의 소속에서 벗어나 국방위원회의 직속기관이 되었다. 인민군 총정치국은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통제하에 있으며, 군대 내 각 단위의 정치부 등 정치기관을 통하여 군대 내 당 정치사업을 조직·지도한다. 또 인민군 내에는 노동당조직과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약칭 사노청) 조직으로 이루어진 정치조직이 있으며, 이들 기구를 통해 당은 군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며 정치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인민군 당위원회는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직속하며 그 지도 밑에 사업을 하게 되어 있다. 군대 내 각급 노동당 조직은 유일사상체계 확립, 당대열의 확대강화, 군사사업의 당지도 강화, 당의 군사노선 관철, 사노청 조직의 지도·강화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러한 인민군 내의 노동당 조직은 여러 조직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사단의 경우 사단 당위원회 책임비서, 정치위원, 정치부장 등이 있다.

군대 내의 모든 교육계획, 명령시에는 군사간부에 이어 정치위원의 서명이 있어야 효력을 발생하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간부 동향에 대한 근무평정표를 작성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정치간부는 군대 내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군대의 정치·군사 이원화 체제는 정치간부와 군사간부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시킴으로써 조직의 비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크다.

또 인민군 내에는 사노청도 조직되어 있는데 이 조직은 각급 당조직과 정치기관의 지도하에 활동하도록 되어 있으며, 군대 내의 비당원을 노동당의 지도 아래 결속시키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이 밖에 군사적인 정식조직에 포함되지 않는 비밀정보원을 별도로 운영함으로써 조직을 통제하고 있으며, 보위부에서 정식정보원은 소대당 1명을 두고 있으나, 통상 분대당 군사지휘관이 부대를 통솔하기 위해 분대당 1명 정도를, 정치부 계통에서 사상에 관한 동태를 수집하기 위해 분대당 1명 정도, 즉 2명 정도를 심어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 최고사령관으로 있는 김정일은 당군사부·총정치부·당조직지도부를 각각 활용하는 ‘3일3선 보고’ 조직을 통해 감시체제를 빈틈없이 구사함으로써 군부를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인민군은 총참모장이 지상군·해군, 공군을 총괄지휘하는 단일통합군 체제이다. 평시에는 인민무력부가 군정권을, 총참모부가 군령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전시에는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군 최고사령부가 직접 총참모장을 통해 인민군은 물론, 노동적위대 등의 예비병력을 포함한 전무장력을 지휘하도록 되어 있다.

인민군의 편제는 총참모부 예하에 4개의 전방군단을 포함한 13개의 정규군단, 4개의 기계화군단, 2개의 포병군단, 1개의 전차군단을 포함한 총 20개의 군단과 특수전부대를 관장하는 경보교도지도국으로 편성되어 있다. 주요 전투부대는 33개 보병사단·여단, 10개 경비여단, 37개 교도사단, 1개 미사일사단 등 총 176개 사단·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군은 해군사령부 예하에 동해함대사령부에 10개 전대, 서해함대사령부에 6개 전대가 편성되어 총 16개 전대가 배치되어 있다. 소형고속정과 수륙양용정의 전진 배치로 기습공격능력을 향상시키고 있으며, 전체 함정(艦艇)의 60%가 전방기지에 배치되어 있다. 공군은 공군사령부 예하에 6개 항공전단사령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민용항공국도 직접 관장·통제하고 있다.

각 전단사령부 예하에는 전투기연대·폭격기연대·AH-2연대·헬기연대·유도탄연대 및 레이더연대 등이 임무별로 다양하게 편성되어 있어 전단별 독립작전이 가능하다. 북한은 전투기의 47%를 전방지역에 추진 배치하고 있으며 현기지에서 발진하여 전 남한지역에 대한 기습공격이 가능하다.

인민군 편제의 특징은 전시에 전쟁지도기구로서 군사위원회가 조직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시에도 총력전 개념에 따라 부대가 배치되고 병력이 운용되고 있어 병영국가(Garrison state)의 표본이 되고 있으며, 부대운용면에서 행정 및 지원 인원을 극소로 줄이고 전투인력을 최대한 늘려 활용하는 데 있다.

북한의 군사교육은 당에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정치사상교육을 가장 중시하고 있으며, 정치사상교육의 핵심을 주민교육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세계관 형성을 중심으로 ‘적개심 배양과 통일사명감 고취’에 두고 있다. 보병의 경우 신병은 통상 1개월 훈련기관을 거치나 성적이 미달될 때에는 다시 1개월을 연장하며 신병교육이 종료되면 5~6명씩 조를 편성하여 김부자의 초상화·석고상 앞에서 군인선서를 한 뒤 군인신분증(통일전사증)을 발급받는다.

하사관은 당성이 강한 현역사병이나 실무교육을 이수한 자들 중에서 하사관 차출지시에 의해 선발된다. 이론보다 실습 위주로 6개월 동안 교육받은 후 원대복귀하여 근무하다가 하사관 결원시 보직과 동시에 진급한다.

군관후보생은 3년 이상 근무한 사병이나 혁명 자녀 출신으로 1년 이상 근무한 자들 중 성분이 양호하고 당성이 강한 자를 선발하고 정치·기술·예능보유자는 민간에서도 선발한다. 우수한 하사관은 직발군관이라 하여 현지에서 선발되기도 한다. 이들은 대개 3년간의 군관양성기간을 거치나, 해·공군은 4년 교육과정을 거친다. 북한에서는 군의 입대 여부를 국가안전보위부가 결정한다.

14세가 되면 징집대상자로 등록하고 고등중학을 졸업하는 만 16세가 되면 모든 남자는 군입대를 위한 2차례의 신체검사를 받도록 되어 있으며, 17세에 사단 또는 군단에 현지 입대한다. 그러나 신체검사 불합격자, 성분불량자, 특수분야종사자(사회안전부원, 과학·기술 산업필수요원, 군사학시험 합격 대학생 등)들은 정책적 배려로 징집에서 제외하고 있다.

근무연한은 지상군은 3년 6개월, 해·공군은 4년으로 정해 있으나 실제로는 5~10년씩 근무하며, 특히 경보병부대나 저격부대 등 특수부대요원은 10~13년 근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대급식에서 주식은 보급되나 부대 자체에서 해결하여야 하기 때문에 일반병사들의 부식조달에 애로가 많다.

(4) 군사현황

북한은 1962년부터 4대군사노선을 채택하여 계속 군비를 증강시켜 현재 세계 제5위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총병력은 2001년 현재 총병력 117만 명(지상군 약 100만, 해군 6만, 공군 11만)으로 예비병력을 포함시켰을 경우 총인구 2300여만 명에서 750여만 명이 군인으로 인구 1인당 병력면에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군사화된 상태이다.

북한의 지상군은 F-54/55/59 전차 2,760여 대와 신형 T-62 및 경전차 800여 대, 구형인 T-34전차 240여 대를 포함하여 총 3,800여 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장갑차는 BTR계열 및 M1973형 등 2,300여 대를 보유하고 있다.

포병은 8,200여 문의 76.2, 100, 122, 130, 152, 160mm 등 다양한 구경의 곡사포 및 평사포와 2,600여 문의 107, 122, 132, 240mm의 방사포를 포함하여 총 1만 2500여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군의 특수부대는 약 10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해상 및 공중으로 동시 침투할 수 있는 수송능력은 약 2만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휴전선 지역에 약 20여 개의 땅굴을 굴착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어 위협적 요소로 남아 있다.

북한 해군은 동해함대사령부에 약 570여 척, 서해함대사령부에 약 420여 척 등 총 820여 척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 함정은 잠수함, 경비함, 유도탄정, 어뢰정, 화력지원정 등 전투함 480여 척과 상륙함, 공기부양정 등 지원함 340여 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40여 척의 유도탄정과 소대급 병력을 기습상륙시킬 수 있는 130여 척의 공기부양정은 위협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북한 공군은 최신예 전투기 MIG-23/29 60여 대, 주력기종인 MIG-19/21, IL-28, SU-7/25 등 470여 대, MIG-15/17계열 320여 대 등 전투기 870여 대, AN-2기를 비롯한 지원기 520여 대 및 헬기 320여 대를 포함하여 총 1,710여 대(2001)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최신예전투기인 SU-25, MIG-29 등을 다량 도입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 퓨즈의 MD-500계열 헬기도 87대를 밀반입하였다. 또 북한은 6·25전쟁 때 유엔군으로부터 대규모의 공중공격을 받은 경험을 토대로 1만 2500여 문의 고사포와 300여 기의 지대공미사일을 보유하는 등 강력한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다.

북한의 예비병력은 14~60세까지 인구의 약 30%를 동원대상으로 하며, 현재 총예비병력은 745(1998)여만 명에 이른다. 세부내용을 보면 전투동원대상인 교도대가 170여만 명, 민방위 성격의 노농적위대가 410여만 명, 고등학교 군사조직에 해당하는 붉은청년근위대가 120여만 명, 인민경비대가 10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민방위부가 직접 관장·통제하는 가운데 교도대와 인민경비대는 부대 단위로 즉각 동원하여 전투투입이 가능하다. 북한은 ‘1990년대 통일’이라는 대남혁명전략의 목표달성을 위해 휴전 40돌인 1993년 7월 27일까지 시한부 전쟁준비 완료를 목표로 전주민의 전쟁 동원 태세를 계속 유지해왔으며, 핵무기 완성을 위한 시간벌기와 생화학무기개발(생화학제 비출량 1,000t:세계 3위), SCUD계열 미사일 개발 등 군사력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북한의 경제계획 실패에 따르는 식량난·에너지난·외화난 등 3중고에서도 인민무력부의 독자적 군사비운영으로 군비투자를 증강하고 있다.

199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2차회의를 개최하여 확정한 1999년 예산안에 의하면 세출총액은 북한 '원화'로 203억 8172만 원(93억 9000만 달러 상당)이며 그중 14.5%인 29억 5535만 원(13억 6000만 달러 상당)이 군사비로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총예산의 52%인 약 47억 8000만 달러가 군사비로 투입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출혈적인 군비투자를 통해 거의 모든 재래식 군사장비는 물론 SCUD 미사일생산공장, 탱크 및 화포공장, 실탄공장 등을 아랍 및 아프리카 지역으로 플랜트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외국과 맺은 군사동맹조약은 1961년 7월 6일 모스크바에서 체결한 ‘조·소우호협력 및 호상원조조약’과 같은 해 7월 11일 베이징[北京]에서 체결한 ‘조·중우호협력 및 호상원조조약’이 있다. 이 두 조약은 전쟁상태에 놓일 때 자동개입 성격을 띠는 점은 유사하나, 조·소조약은 일방이 해약 희망을 표시하면 유효기간이 5년 이내로 단축되도록 되어 있으며, 조·중조약은 쌍방이 수정, 폐기에 합의하지 않는 한 계속 유효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북한은 이 두 조약을 통해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평시와 전시의 대(對)북한군사지원체제를 보장받고, 특히 소련을 통해서는 노후화된 군사장비의 현대화를 이룩하면서 군사력을 증강시켜 왔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도 중국과 러시아와의 군사협력관계를 지속적으로 강화해오고 있다. 조·소조약은 1995년 9월 7일 러시아측에서 조약을 연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북한측에 통보하였으며 이로써 1996년 9월 10일 이후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1998∼1999년 양국 협상에서 군사개입 조항이 삭제된 '신조약'을 1999년 3월 17일 가서명하였으며 정식 서명을 앞두고 있다.

이외에 북한은 1978년 5월 '조선·모잠비크 친선협조조약'을 체결하였고 1982년 11월 리비아 원수 카다피가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조선·리비아 우호협력동맹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986년 3월 쿠바총리 카스트로의 방북시에도 체결 20년 후 10년간씩 자동 연장되는 '조선·쿠바 친선 및 협력조약'을 체결하였다. 1986년 11월 몽골과 군사적 성격을 지닌 '조선·몽골 친선 및 협조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핵무기개발에도 주력하여 1993년 현재 평안북도 연변에 원자로 1,2호와 핵연료가공공장, 평산과 박천에 우라늄정련공장을 가동하고 있으며, 영변에 원자로 3호기와 핵연료재처리시설을 건설 중에 있다. 이에 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카드를 적절히 활용하여 체제유지기반을 대외적인 군사안보환경을 성공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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