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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21 (수) 18:16
분 류 사전3
ㆍ조회: 1430      
[근대] 창가 (브리)
창가 唱歌

개화기의 시가 양식 가운데 하나.

애국가·독립가 및 개화가사에서 분화·발전한 것으로 독립과 개화의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부르던 노래이다. 창가라는 명칭은 개항과 함께 수용된 서구의 악곡에 맞추어 제작된 노래가사라는 뜻을 지닌다. 가사(歌辭)를 단형화한 것, 민요에 의거하여 지은 것, 그리스도교 찬송가와 같은 서양노래 곡조에 얹어서 부르도록 지은 것 등 그 출처가 다양하다.

문학적 성격

국문학자간에 이견이 많지만 창가의 양식적 특성을 형식면에서 종합해보면, 전통적 곡조가 아닌 서양 악곡으로 가창하는 가창 장르라는 점, 노래로 부르기 위해 분절·후렴구·합가(合歌)·부곡(附曲) 등의 형식을 갖는다는 점, 정형률의 노랫말을 갖는다는 점, 4·4조와 7·5조를 기본으로 8·5조, 6·5조 등 다양한 율격 속에서 정형률이 지켜지고 있다는 점 등이다.

창가는 노래로 불려지는 음악양식으로 시양식인 신체시나 가사와 비교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니다. 그래서 4·4조의 창가는 가사에 귀속시켜 '창가체 가사'라고, 7·5조, 8·5조, 6·5조의 창가는 새로운 시 양식이라는 점에서 '창가체 신체시'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창가가 고전적 시가 형태에서 근대시로 넘어가는 개화기의 과도기적 시가 양식이면서, 노래에서 시가가 분리되기 이전의 과도기적 양식이라는 점이 중첩되어 생겼다.

창가의 첫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1896년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지어서 부른 〈황제탄신축가〉이다. 이 작품의 곡조는 찬송가이고, 노랫말도 종교적인 색채가 짙다. 1900년 이전에 창가를 실었던 주요한 매체는 〈독립신문〉인데, 여기에서는 애국가류의 창가를 주로 실었다.

1899년 6월 29일자에 〈무궁화노래〉라고 소개된 노랫말의 일부를 보면, "셩 신손 오년은 우리 황실이요/산고수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세/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대한 대한으로 길이 보젼셰". 애국가류의 창가는 독립협회 및 〈독립신문〉의 활동과 노선에 동조하는 학생들과 정부관리들이 지어 발표했다.

4·4조를 기본으로, 후렴이 있는 20~30행의 짧은 분량이다. 군주에 대한 충성을 근간으로 하여 백성은 본분을 지키고 밖으로의 개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나 갈등을 드러내지 않고, 이미 공인된 주장만을 내세워 단순하고 낙관적인 발상에 머물렀다. 창가가 널리 자리잡게 된 것은 1900년대 이후로 학교창가가 큰 몫을 했다.

배재학당·이화학당·계명의숙·동명학교 등에서 교가와 〈태황제폐하만수절가 太皇帝陛下萬壽節歌〉·〈권학가 勸學歌〉·〈단체보국가 團體報國歌〉·〈개교가〉·〈개국기원절경축가〉·〈농부가〉 등을 불렀다. 기본형식은 4·4조로 일종의 가사(歌辭) 형식을 취한다. 왕실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자는 의지를 고취시키고, 신문명을 배워 발전을 도모하자는 내용이다. 학생들에게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나라의 장래를 맡아 나가라고 이르는 데 그쳤을 뿐, 항일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고취하지는 않았다.

당시에 발간되던 〈황성신문〉·〈제국신보〉·〈경향신문〉에서도 창가를 실었으나, 〈대한매일신보〉의 경우는 신문사 자체 내에서 직접 지어서 발표한 것이 특징이다. 곡조보다는 읽어서 감동을 받도록 한 내용과 표현을 갖추는 데 중점을 두었고, 후렴과 분련이 발달되어 있다. 대표적 작품으로 〈상봉유사 相逢有思〉·〈구락부운동가〉·〈한반도야〉 등이 있는데, 이중 〈한반도야〉는 "아름답고 귀 의 한반도야/너 나의 랑다 바니/나의 피를 려 너를 빗내고져/한반도야"(1구절)와 같이 율격을 반복하되 변화를 주고 있다.

1908년을 기점으로 전문적인 작가에 의해 좀더 세련된 형태의 창가가 널리 제작되었는데, 최남선·이광수·안창호·윤치호 등이 주목되는 작가이다. 이들이 지은 창가는 〈경부철도가〉·〈소년대한〉·〈태백산가〉·〈세계일주가〉에서 보이듯이, 대부분 개혁의 열망이나 문명개화를 염원한 내용이다. 7·5조가 주류를 이루며, 장편으로 되어 있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기 바로 전에는 항일 창가를 모은 창가집을 필사하거나 출판하는 경향이 있었다. 1907년에 필사한 〈창가책사 唱歌冊寫〉와 1909년에 필사한 〈애국가〉, 1915년 한영서원에서 출판한 창가집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겉으로만 나타나는 개화추구가 아니라 민족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과 항일사상이 엿보이는 많은 작품이 실려 있으며, 제재와 수법도 다양하다.

또한 청년학생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애국적인 투쟁을 역설한 노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소년모험맹진가 少年冒險猛進歌〉의 한 대목에는 "이천만 동포 우리 소년아/국가의 수치 네가 아느냐/천부의 자유권은 차가 없거늘/우리 민족 무삼 죄로 욕을 받는가"라고 하여,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용기를 북돋우고 있다.

〈영웅의 모범〉이란 제목의 창가에서는 박제상·조헌·이순신·최익현·안중근 등 일본에 항거했던 역대의 인물을 하나씩 들어 의기를 찬양하고, "우리들은 모범으로 해야 되겠다"라는 후렴을 반복했다. 이와 같은 경향은 형식면에서는 창가가 장편 서사시로 발전했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일합병 이후로는 일제에 순종하는 마음을 기르는 관변(官邊) 창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0년 학부편찬의 〈보통교육창가집〉에는 모두 17편의 노래가 악보와 함께 실려 있는데, 막연하게 들뜬 문구로 자연을 예찬하거나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것이 대부분이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곡조와 일본인의 정서를 나타낸 사설이 많다.

일제의 이러한 책동으로 국내에서는 항일애국창가는 위축되고 유행가 이식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뒤에는 국외에서 독립군의 독립군가가 항일창가의 맥락을 이었다. 국내에서는 창가를 계속 불렀지만 대부분 독립의지가 약화된 학교창가이거나 일상생활의 사소한 정감을 다룬 유행 창가여서 문학작품으로의 의의는 상실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창가'라는 말이 신식노래를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어 그 성격이 모호해졌으며, 유행가와 뒤섞이기도 했다. 창가는 문학사적으로 볼 때 애국가·독립가 및 개화가사의 전통을 계승하고, 신체시의 형성과 전개에 교량적인 역할을 한 시가라고 할 수 있다.

음악적 성격

음악사적으로는 서양음악의 영향으로 가곡·가요·동요라는 장르가 생겨나기 이전에 민요를 대신한 과도기적 서양식 성악형식으로 볼 수 있다. 창가라는 말의 어원은 일본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일본 문부성에서 '신교육령'을 발포하던 1879년에 '음악 취조소(取調所)'가 설치되어 여기서 〈소학창가집〉을 발간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한국에서 창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1896년 신교육기관이었던 배재학당에서 창가라는 과목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창가는 근대식 학교에서 음악과목을 대신하여 교과목으로 정착되었다.

초창기 창가는 애국독립가류로 애국과 충군(忠君)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를 전통민요의 가락에 얹어 부르거나 외국 민요나 찬송가에 맞춰 불렀다. 음악적 특징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다만 찬송가나 외국민요를 그 음악적 내용으로 했다는 사실에서 그뒤에 새로 창작되는 창가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창가는 대개 무반주로 부르거나 교회와 근대식 학교에서만 볼 수 있었던 풍금반주에 맞춰 불렀다. 그러나 아직 서양음악에 익숙하지 못한 대중들은 외국 민요를 전통 민요조의 가락으로 변형시켜 불렀으리라 짐작된다.

최초의 창작창가는 1905년 김인식이 작곡한 〈학도가 學徒歌〉이다. 이로 인해 신분·계층·연령을 막론하고 이루어지던 창가의 창작이 문학적·음악적 면에서 전문영역으로 변했다. 그러나 〈경부철도가〉· 〈한양가〉· 〈세계일주가〉 등 계몽창가의 가사는 당시의 시대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신교육과 소년들에 대한 지나친 미화로 관념성을 벗지 못했다.

음악적 수준에 있어서도 선율과 리듬이 단순 반복되는 곡이 대부분이어서 쉽게 구전되긴 했으나 좀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문학사적으로 최남선이 계몽창가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면 음악사적으로는 김인식· 이상준 등이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면서 창가의 작곡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곡은 학교에서 쓰는 창가집에 실려 학생들을 일깨우는 데 기여했다.

소시민의 생활정서, 자연예찬, 권학(勸學)과 근면 강조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김인식은 〈학도가〉 이외에 〈표모가 漂母歌〉·〈애국가〉·〈점진가 漸進歌〉·〈국기가 國基歌〉 등을 작곡했고, 이상준은 〈중등 창가집〉·〈신유행 창가집〉 등을 발간하면서 창가를 창작하고 보급했다.

창작창가의 음악적 특징은 전통 민요적 요소에 서양 음악적 요소와 일본 음악적 요소가 혼합된 모습을 보인다. 1910년 한일합병을 전후로 창가의 양상은 크게 변했다. 1906년 발표된 ' 보통학교령 시행규칙'의 내용에 의해 애국가류의 창가를 불량한 창가라 하여 금지하고 일본 창가를 의무적으로 부르게 했다.

1910년 5월 발행된 〈보통교육 창가집〉에는 대부분 일본 창가나 일본 음계로 작곡된 곡이 실려 있었는데 보통학교를 비롯하여 사범학교, 고등학교 및 일반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했다. 학교창가는 일본 곡을 그대로 옮기거나 개작한 것이 가장 많고, 찬송가 곡조에 가사를 붙인 것도 있다.

학교창가는 전통음악의 3박자 계열의 리듬을 2박자 계열로 변화시켰고 일본식 5음음계를 보급하여 감수성의 변질을 가져왔다. 교육과정에서 일본 음악언어를 익히게 됨으로써 이후 엔카류의 대중가요가 정서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창가는 새로운 성악 장르로 분화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가곡·대중가요·동요 등에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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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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