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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5 (화) 20:15
분 류 사전3
ㆍ조회: 1383      
[현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정해구)
미군정기 인민정권 수립운동

정해구 (정치학, 경희대 강사)

1. 건국준비위원회의 수립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게 되자 총독부의 엔도(遠藤柳作) 정무총감은 여운형에게 치안유지를 부탁했고, 이에 여운형은 치안유지뿐만 아니라 건국준비까지 포괄하는 다음의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다.

① 전국적으로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② 8, 9, 10월 3개월간의 식량을 보전할 것.
③ 치안유지와 건국운동을 위한 모든 정치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④ 학생과 청년을 훈련·조직하는 일에 절대 간여하지 말 것.
⑤ 노동자들을 건국사업에 동원·조직하는 데 간여하지 말 것.

이를 바탕으로 여운형은 중앙에서 건준발족준비에 착수하였고 8월 16일에는 안재홍이 방송을 통해 지방건준의 결성을 촉구했다. 8월 17일에는 건준의 제1차 조직부서가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여운형 중심의 건국동맹 계열, 안재홍 중심의 신간회 계열, 그리고 장안파 공산당의 일부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여운형이 같이 참여하기를 원했던 송진우 계열은 연합국의 입국과 중경 임시정부의 추대를 내세워 참여를 거부했다. 처음부터 우익세력은 중도적인 좌우합작적 성격의 건준 참여조차 거부했던 것이다. 이후 건준은 8월 22일에 11부1국제로 조직을 확대·강화시켰으며, 그 기조는 대체적으로 제1차 조직의 성격이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건준에 조선공산당 계열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미군 진주가 분명해진 8월 말∼9월 초, 안재홍 등 신간회 계열이 임정 추대를 주장하며 건준에서 빠져나갔다. 1946년 좌우합작시 다시 반복되었지만, 온건 좌익 여운형세력은 중도우익과 연대할 것인가 아니면 범좌익연대를 추구할 것인가를 강요받고 있었다.

9월 3일에 이루어진 제3차 조직개편은 건국동맹 계열과 조공 계열의 양대 세력의 연합을 반영하고 있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8월 말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준지부가 결성되었다. 이는 건준이 비록 단일적인 전국 조직체계를 완전하게 갖춘 것은 아니지만, 여타 단체와 비교해볼 때 점차 전국적인 대중적 기반과 결합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한편 건준은 8월 28일 강령을 통해 "우리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으로 조직하기 위한 새 국가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민주주의적 제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에 완전히 개방된 통일기관"임을 밝혔다. 또한 반동세력과 싸워 민주주의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 정권이 구성되어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의 수립에 건준이 산파 역할을 할 것을 자임하고 있었다.

이 강령을 볼 때, 건준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제세력이 연대한 민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통일전선적 준비기관임을 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회변혁적인 내용을 과도하게 강조하지는 않았다.

건준의 의미는 첫째로, 자주적인 정부수립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의 부탁이 치안유지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이미 건준은 그 수준을 넘어 정부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현실적으로 미·소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 할지라도, 해방정국에서 정부수립의 자주적인 시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제지배와 미·소 영향의 짧은 막간 사이에서 자주적인 정부수립운동이 건준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둘째, 건국준비기관으로서 국내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통일전선의 의미에서 본다면 건준은 중도적 또는 온건좌익적 기준에서 최대한 많은 정치세력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건준은 한민당에 참여했던 송진우 계열까지 끌어들이고자 했으나 송진우 계열을 비롯한 우익세력에게는 사회·정치적 대표성을 갖는 연합적 건국준비조직보다 자신들의 이해가 우선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헤게모니가 불확실한 건준에 참여하기보다는 자신의 이해를 연합국, 곧 미국에 걸고 있었다. 신간회 계열의 중도우익 역시 조공 계열이 참여하자 건준에서 이탈했다.

결국 건준은 건국동맹과 조공만이 주축이 되는 좌익연합적 조직이 되었다. 안재홍 계열의 이탈은 건준의 좌경화가 그 직접적인 이유라 할 수 있지만, 우익 전체에 보다 영향을 미친 것은 이제 분명해진 미군 진주였다. 미군이 진주한다는 것 자체가 건준 반대세력의 힘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셋째, 건준의 또 다른 의미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했다는 점과 아래로부터 민중에 바탕하는 권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건준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건국준비기관으로서 보다 많은 정치세력들의 참여를 고려하여 포괄적으로 표현되고 있었으나 반동적 기득세력의 헤게모니는 반대했다. 또한 한민당의 활동이 지방적·민중적 기반을 전혀 갖지 못한 것이라면 건준은 전국적으로 아래로부터 민중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최초의 계기를 제공했고 그것은 건준 지부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2.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

남한에 미군 진주가 분명해지자 국내의 정치세력은 이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미 좌파연합적 성격으로 기울고 있던 건준은 급히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이제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했던 우익세력은 한민당 결성에 나섰다. 급작스러운 인공결성은 미군 진주에 대한 사전대응이었다. 인공수립 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9월 4일 허헌이 입원한 경성의전 병실에서 여운형·박헌영·허헌·정백 등 4인이 이를 협의했고, 이어 9월 6일에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개최되어 인공을 수립했다. 같은 날 한국민주당 발기대회도 열렸다.

9월 6일의 인민대표자대회에서는 1천 수백 명이 모여 정부수립을 결의하고 인공임시조직법안을 통과시키고 55명의 중앙인민위원, 20명의 후보위원, 12명의 고문을 선출했다. 또한 이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인민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부서를 결정했다.

주석 : 이승만
부주석 : 여운형(건)
국무총리 : 허헌(공)
내정부장 : 김구(임)(임시대리 허헌)
대리 : 조동호(건, 공)·김계림(공)
외교부장 : 김규식(임)
대리 : 최근우(건)·강진(공)
재정부장 : 조만식
대리 : 박문규(건, 공)·강병도(공)
군사부장 : 김원봉(임)(임시대리 김세용)
대리 : 김세용(건, 공)·장기욱(공)
경제부장 : 하필원(공)
대리 : 김형선(공)·정태식(공)
농림부장 : 강기덕
대리 : 유축운(공)·이광(공)
보건부장 : 이만규(건)
대리 : 이정윤(공)·김점권(공)
교통부장 : 홍남표(공)
대리 : 이순근(공)·정종근(공)
보안부장 : 최용달(건, 공)
대리 : 무정(공)·이기석(공)
사법부장 : 김병로(한)(임시대리 허헌)
대리 : 이승엽(공)·정진태(공)
문교부장 : 김성수(한)
대리 : 김태준(공)·김기전
선전부장 : 이관술(공)
대리 : 이여성(건)·서중석(공)
체신부장 : 신익희(임)(임시대리 이강국)
대리 : 김철수(공)·조동호(공)
노동부장 : 이주상(공)
대리 : 김상혁(공)·이순금(공)
서 기 장 : 이강국(건, 공)
대리 : 최성환(공)
법제국장 : 최익환(공)
대리 : 김용암(공)
기획부장 : 정백(공)
대리 : 안기성(공)
[건 : 건국동맹 계열, 공 : 조선공산당 계열, 한 : 한민당 계열, 임 : 중경 임시정부 계열]

이상에서 볼 때 인공부서에는 조공 및 건국동맹 계열이 약 80퍼센트에 달하고 한민당도 2명, 중경 임시정부 계열도 4명이나 차지하고 있다. 이는 중앙위원 중 공산 계열이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건준에서와는 달리 건국동맹 계열보다 조공 계열이 훨씬 더 많아졌다.

특이하게도 박헌영은 중앙위원에도 인공부서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인공이 좌경화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주요 부서인 주석·내무부장·외교부장·군사부장·재정부장 등을 다른 세력에 양보하고 특히 주석에 이승만을 내세웠다. 이는 좌익의 확고한 헤게모니하에 민족통일전선적인 연합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의도를 시사했다.

그러나 인공의 수립과정은 정당한 절차를 밟지 못함으로써 인공의 정통성을 약화시켰다. 우선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대표성이 문제가 되었다. 정당한 선거절차도 없었고 사회·정치적 대표성을 지닐 수 있는 확실한 근거도 제시되지 않았다. 단지 "국내외의 각계각층을 망라한 혁명투사 1천 수백 명이 참집하였고, 비상한 때는 비상한 인물들이 비상한 일을 수행한다"는 여운형의 말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절차상의 하자를 보완해주는 것은 건준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과 이후 전국적으로 구축된 인민위원회를 바탕으로 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인공은 이러한 절차상의 하자를 인식한 듯 1946년 3월 1일을 기해,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인민위원들로 제2차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한편, 인공의 정강에는 완전한 자주적 독립국가의 건설,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의 일소 및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 대중생활의 급속한 향상, 세계민주주의 제국과 상호제휴 등을 규정하였다.

시정방침에서는 일제 법률제도의 즉시 철폐, 일제·민족반역자의 토지 몰수 및 국유화와 농민에 대한 토지의 무상분배, 비몰수토지의 소작료 3·7제, 일제·민족반역자의 일체 시설 국유화 등을 규정하였다. 이같은 인공의 정강 및 시정방침은 건준에 비해 토지문제와 국유화문제 등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시키고 있었지만, 예컨대 「8월테제」에서 이미 언급된 대지주의 토지몰수와 같은 강경한 주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좌익진영의 조급한 헤게모니 장악시도와 인공수립의 졸속적인 절차로 인해 인공의 정당성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할지라도 인공의 수립은, 북한에서 인민위원회가 소련군에 의해 치안 및 행정조직으로 인정되었듯이, 미군에 대해 적어도 이를 기정사실로 인정하도록 요구하거나 아니면 미군에 대해 정부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조직체를 만들어냈음을 의미했다.

또한 더욱 중요하게는 중앙 건준이 전국적인 건준지부 결성의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인공 역시 미군정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이전에 민중적 바탕 위에 각지에서 인민위원회가 구축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건준 좌경화와 급속한 인공수립 등은 건준에 참여한 중도우익의 이탈을 가져왔던 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미 우익세력은 민중적 요구나 좌우연대보다는 자신의 이해를 생각했고 미군 진주와 더불어 인공타도를 외치면서 한민당을 급속히 결성해나갔다.

따라서 미군 진주를 앞두고 자주적인 정부수립을 모색하는 건준-인공세력과, 미군의 후원을 기대하면서 건준-인공의 반대명분으로 임정봉대(臨政奉戴)를 주장하는 한민당 세력은 분명하게 분화·대립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3. 미군정과 조선인민공화국의 갈등

9월 8일 미 제24군단이 점령군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상륙에 앞서 이미 하지 중장은 서울에 있는 일본군으로부터 혁명세력의 활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38선 이북의 소련군의 위협뿐만 아니라 내부 혁명세력의 위협에 대해서도 대비하고자 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하기로 했고, 군정은 기존의 총독부체제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는 일제의 관료체제를 배제하고 대신 자주적인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한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나아가 그러한 조치는 대부분의 한국민들이 바라는 친일관료들의 제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들을 유지·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일제관료로서 친일파·민족반역자라 비난받던 세력들은 미군정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었고, 그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반대세력들을 탄압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가장 주요한 세력이 경찰이었다.

우선 미군정은 좌익 주도의 남한 상황을 우려했다. 서울에 막 부임한 미 국무성 정치고문 베닝호프는 9월 16일, "남한은 점화되기만 하면 즉각 폭발할 화약통이며, 남한의 정치정세 중 가장 고무적인 유일한 요소는 연로하고도 보다 교육받은 한국인들 가운데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서울에 존재하고 이러한 인사들은 임시정부의 환국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곧 혁명세력에 대한 우려 속에서 미군정은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한민당을 주목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미군정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좌익 주도의 인공에 대항할 수 있는 우익세력을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한민당과의 결탁과 이를 통한 군정 주요인사의 충원, 인공에 대항하기 위한 이승만과 중경 임정의 귀국추진 등으로 나타났다.

10월 5일 미군정은 대부분이 한민당 인사들인 11인의 고문관들을 임명했고, 김성수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한민당이 아닌 인사로서는 여운형과 조만식 두 사람이었고 여운형은 나중에 사퇴했다. 군정청의 각 주요 지위에도 주로 한민당 계열의 인사들이 임명되었다. 특히 경무부장에는 조병옥, 수도경찰청장에는 장택상이 임명되었다. 뒤이어 미군정은 이승만의 귀국을 추진했다.

맥아더·하지·굿펠로 등의 주선으로 10월 16일 미군용기편으로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했고,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제거하자는 좌익의 주장에 "무조건 뭉치자"고 주장함으로써 친일파들의 보호막이 되었다. 11월 23일과 12월 3일에는 중경 임시정부 인사들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임정은 미군정의 예상과는 달리 그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았고, 친미적이기보다 민족적이었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미군정은 정부로서의 인공을 부인했다.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든가 자칭 조선공화국내각은 권위와 실재가 전연 없으며, 만일 이러한 고관대직을 참칭하는 자들이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연출하는 배우라면 그동안 즉시 그 극을 폐막하여야 마땅할 것"이라며,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임을 주장했다.

이어 10월 27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국(國)자를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미군정은 11월에 이미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계획을 작성하고 있었다. 커밍스에 따르면 점령당국은 정무위원회(GOVERNING COMMISSION)안을 구상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계획을 마련했고, 약간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의 실제과정은 이와 일치하였다. 여하튼 미군정은 인공에 반대하여 한민당·임정 등을 중심으로 하는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이미 1945년 말에 모색하고 있었고, 따라서 인공 부인정책은 명백한 것이었다.

인민위원회의 전국적인 구축과 각종 대중단체의 전국적인 결성을 통해 대중적 기반을 강화하고 있던 좌익세력에게 미군정의 이러한 인공 부인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나 북한지도부도 그들과 협의없이 이루어진 인공에 대해 분명한 지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인공은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할 수도 없고 미군정의 요구를 수락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이러한 곤경에서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좌익세력은 11월 20∼22일에 걸쳐 650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는 전국적인 인민위원회의 세를 과시하면서 군정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인공은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의 근거로서는 국제법상 군정하에 정부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인공은 민족통일전선의 주장 아래 이승만, 임정과의 협조도 모색했다.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좌익은 이승만의 인공 주석 취임수락을 요청하는 한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도 참여했으나, 친일파·민족반역자를 막론하고 무조건 단결하자는 이승만과 친일파·민족반역자를 배제하자는 좌익세력이 연대하기는 어려웠다.

좌익세력은 이승만과 접촉하자마자 헤어졌다. 또한 좌익은 임정과의 연대 모색에서 정부로서의 법통을 주장하는 임정에 대해 임정과 인공의 동시해체까지 고려했으나 찬반탁문제의 등장으로 무산되었다. 결국 좌익 주도하의 민족통일전선은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우익과 협조할 것을 명백히 하였고, 임정은 일단 독자적으로 행동하고자 했다.

비록 좌익 중심으로 조급하게 만들어졌지만 자주적인 정부로 활동하고 이를 인정받고자 했던 인공은 식민관료체제와 우익세력의 강화를 통해 반인공정책을 전개했던 미군정의 부인에 의해 제대로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인공 중심의 좌익세력과 미군정 및 이에 결탁한 우익세력 사이의 대결은 점차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대립적 양상의 발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미군정의 정책이었고, 거기에다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세력의 미군정과의 결탁 및 임정봉대, 그리고 좌익세력의 조급성 등이 이러한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 지방에서도 미군정의 중앙통제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이미 전극적으로 구축된 인민위원회는 이에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4. 지방인민위원회

중앙에서 이상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는 동안 지방에서는 새로운 지방통치조직이 자생적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이들의 성격은 일제의 지방관료기구에 대체하는 민중권력적 조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미 8월 말에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준지부가 만들어졌고, 이 건준지부들은 중앙에서 인공이 들어섬에 따라 인민위원회로 바뀌어갔다.

대체적으로 건준지부에서 인민위원회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좌경적 경향이 강화되었지만, 민중적 기반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인민위원회들은 중앙에서의 인공수립 영향으로 조직되었지만, 위로부터 직접 지도된 조직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중앙과 관계를 맺는 양상을 띠었다. 아마도 실질적으로 중앙의 인공과 지방의 인민위원회가 제대로 연결된 것은 11월 20∼22일의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라 생각된다.

우선 지방인민위원회의 조직상황을 살펴보자. 좌익측 자료에 따르면 1945년 10월 현재 남한에서는 7도, 12시, 131군에서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또한 1945년 11월 20∼22일에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서 보고된 조직현황은 표 1과 같다.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완전히 조직되었고, 남한에서도 거의 대부분의 군에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한지역에서 미군정은 지방 정부조직으로서 인민위원회를 인정치 않았다. 그 결과 1945년 말 이후 미군정의 이러한 정책에 저항하는 인민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통치기능을 부인하는 미군정 사이의 갈등은 점차 가시화되었다.

1945년 후반경 인민위원회 활동의 전체상을 볼 수 있는 자료는 부족하지만, 단편적으로 보이는 실상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경남 : 인민위원회가 20군 3시 가운데 20군의 행정기관을 접수했으나 군정 탄압에 의해 7군에서 약 50명이 검속되고 양산·김해의 인민위원회는 해산되었다. 통영에서는 주민 1명이 미군과 충돌하여 사망하였고, 약 3백 명이 검속되었다. 아마도 경남의 상황은 통치기능을 수행하는 인민위원회를 전복하려는 미군정의 시도에 대해 인민위원회가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많은 갈등이 발생한 듯하다.

② 경북 : 경북에서는 인민위원회가 확고하게 지배하지 못하고 좌우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예컨대 대구에서는 좌우 사이의 합작과 분열이 1946년 8월경까지 반복되었다. 따라서 미군정과 인민위원회 사이의 초기 갈등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듯하다.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는 예천·상주·영주에서의 부분적인 갈등만이 보고되었다. 경북의 좌우공존적 특징은 이후 좌익이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③ 전남 : 전남에서의 인민위원회는 비교적 강력했다. 특히 광주·나주·화순 등 전남 중앙지역과 목포·해남·진도·완도 등 서남지역의 인민위원회가 강력했다. 그러나 69군정중대가 지배하던 여수·순천·광양·구례 등 동부지역의 인민위원회는 비교적 약했고 미군정과의 갈등도 적었다. 당시에는 전남에 속해 있던 제주 역시 인민위원회가 강력했으나 온건하게 행동함으로써 미군정과 마찰은 없었다.

④ 전북 : 전북에서 인민위원회는 동남쪽의 남원과 순창지역, 서북부의 군산·옥구·익산지역이 강력했다. 그러나 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 지주들의 세력이 강력했던 고창·정읍·부안 등에서는 인민위원회 세력이 약했다. 전북에서 미군정과 인민위원회 사이의 주요 갈등은 남원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민위원회와 미군정의 충돌로 11월 15일 발생한 남원사건은 미군의 발포로 3명이 즉사하고 50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고 수십 명이 체포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계기로 미군정은 국방경비대의 창설을 시작했다.

⑤ 충남북 : 충남에서 인민위원회는 서산·당진·예산·홍성 등 서북 4개 군에서 강력했고, 미군정과의 마찰도 주로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한편 충북은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었고, 몇 군은 식민지 관료체제가 그대로 유지됐고 인민위원회 역시 약했다. 그러나 북부지역은 비교적 인민위원회 활동이 활발했고, 특히 충북 남부 영동군의 인민위원회는 강력했다.

⑥ 경기도·강원도 : 경기도에서는 포천·양평·이천·여주·안성·가평·인천 등에서 인민위원회가 세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경기도 인민위원회는 강력하지 못하였다. 강원도에서는 강릉·삼척·울진 등의 동해안지역에서 인민위원회 세력이 강력했다. 특히 삼척지역은 탄광 광부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남한의 거의 전역에서 인민위원회가 등장하였고, 지역에 따라서는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중앙으로부터 다시 일제 관료기구를 부활시키면서 인민위원회의 통치기능을 부인하고 이를 접수하고자 함으로써 미군정과 인민위원회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민위원회의 통치기능을 부인하는 첫 갈등이 1945년 말을 전후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양자의 갈등은 10월민중항쟁, 제주4·3민중항쟁, 여순반란 등의 민중항쟁으로 이어졌다.

출전 : KRpia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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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2 사전3 [현대] 박정희 (전재호) 이창호 2003-12-03 1375
2671 사전3 [조선] 독립협회 (브리) 이창호 2003-03-18 1374
2670 사전3 [근대] 문학사조 (민족) 이창호 2003-11-16 1373
2669 사전3 [현대] 박두진 (한미르) 이창호 2004-01-02 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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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