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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4 (월)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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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354      
[근대] 을사조약 (민족)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을사5조약이라고도 한다.

[체결과정]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그 사이 러일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국제관계를 주시하며 한국을 보호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자면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열강의 묵인이 필요하였으므로 일본은 열강의 승인을 받는데 총력을 집중하였다.

먼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았으며,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다. 이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한국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 한다는 설이 유포되어 한국의 조야가 경계를 하고 있는 가운데, 1905년 10월 포츠머스회담의 일본대표이며 외무대신인 고무라(小村壽太郎),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郎) 등이 보호조약을 체결할 모의를 하고, 11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伊藤博文)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特派大使)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일협약안을 한국정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다음날 고종을 배알하고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라는 내용의 일본왕 친서를 봉정하며 일차 위협을 가하였다.

이어서 15일에 고종을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들이밀었는데,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서 조정의 심각한 반대에 부닥쳤다. 17일에는 일본공사가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하였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게 되었다.

이 날 궁궐 주위 및 시내의 요소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선 가운데 쉴새없이 시내를 시위행진하고 본회의장인 궁궐 안에까지 무장한 헌병과 경찰이 거리낌없이 드나들며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어전회의에서는 일본측이 제안한 조약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이토가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을 배알하고 정부 대신들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다시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가 이토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체결에 관한 찬부를 물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못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 달려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다 중도에 쓰러졌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를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내용]

을사조약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정부 및 일본국정부는 양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의 실(實)을 인정할 수 있을 때에 이르기까지 이를 위하여 이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국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장리(掌理)한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결과]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한국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미국·청국·독일·벨기에 등의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 해인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가 초대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우리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우리 민족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다. 장지연(張志淵)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자, 국민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을사5적을 규탄하며 조약 반대투쟁에 나섰다.

고종은 조약이 불법 체결된 지 4일 뒤인 22일 미국에 체재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 B.)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라고 통보하며 이를 만방에 선포하라고 하였다.

이 사실이 세계 각국에 알려지면서 이듬해 1월 13일 ≪런던타임즈≫지가 이토의 협박과 강압으로 조약이 체결된 사정을 상세히 보도하였으며, 프랑스 공법학자 레이도 프랑스 잡지 ≪국제공법≫ 1906년 2월호에 쓴 특별 기고에서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한편, 유생과 전직 관리들은 상소투쟁을 벌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뜻있는 인사들이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하여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법부주사 송병찬(宋秉瓚), 전 참정(參政) 홍만식(洪萬植), 참찬(參贊) 이상상(李相尙), 주영공사 이한응(李漢應),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병정(兵丁) 전봉학(全奉學)·윤두병(尹斗炳)·송병선(宋秉璿)·이건석(李建奭) 등의 중신과 지사들이 그들이었다. 이밖에 청국인 반종례(潘宗禮)와 일본인 니시자카(西坂坡淵)도 투신자결로 조약 반대의사를 천명하였다.

그런 한편,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쟁에 떨쳐 나선 이들도 있었다. 충청도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전라도에서는 전 참찬 최익현(崔益鉉)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이, 강원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고, 이근택·권중현 등을 암살하려는 개인적인 테러행위도 일어났다.

그와 함께 구국계몽운동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유교와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기독교청년회·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자신회(自新會)·대한자강회·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서우학회(西友學會)·상업회의소(商業會議所) 등이 표면상으로는 문화운동을 표방하며 국민의 계몽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산하에 비밀결사를 두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駐韓日本公使館記錄(國史編纂委員會所藏本, 미공개자료), 大韓季年史, 韓國痛史(朴殷植, 大同編譯局, 1915),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1965), 朝鮮の保護と倂合(朝鮮總督府, 1917), 日韓倂合小史(山邊健太郎, 岩波書店, 1966), The Tragedy of Korea(Mckenzie, F. A., E. P. Dutton & Co., 1908), 韓末義兵의 槪況(申奭鎬, 史叢 1, 1955), 舊韓末條約彙纂 上(國會圖書館立法調査局, 立法參考資料 18, 1964), 露日戰爭以後 日帝對韓侵略의 基本方向(李瑄根, 史學硏究 18, 1964), 乙巳條約締結을 前後한 韓國民의 抗日運動(崔永禧, 史叢 12·13合輯, 1968).

<조항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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