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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13 (화) 09:37
분 류 사전3
ㆍ조회: 1332      
[현대] 광복이후의 교육 (민족)
교육(광복 이후의 교육)

세부항목

교육
교육(선사시대의 교육)
교육(고대의 교육)
교육(고려시대의 교육)
교육(조선시대의 교육)
교육(개화기의 교육)
교육(민족항일기의 교육)
교육(광복 이후의 교육)
교육(참고문헌)

[미군정기의 교육]

8·15광복과 함께 일제의 통치하에서 벗어난 우리 나라의 교육은 새로운 민주국가의 교육정책과 이념을 설립하기 위하여 많은 연구와 협의를 거듭하였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교육이념 수립의 염원에 따라 부각된 것이 민주교육 사상이었다.

이 새로운 민주교육의 이념을 기초로 하여 미군정에 의해 실시된 교육정책은, 교육제도의 민주화로서 종래의 복선형 학제를 단선형으로 바꾸고 교육행정의 자치화를 꾀하였다. 교사 재교육, 성인교육을 통한 문맹퇴치 운동, 교수 용어에 있어서 국어의 회복, 각급 교육기관의 확충 등 새로운 교육체제의 정비에 주력하였다.

미군정기의 문교행정은 1946년 3월에 학무행정권을 분리하여 도에 학무국을 두고 군에 학무과를 두어 교육행정의 자치화를 꾀하였다. 교육심의회(敎育審議會)는 1946년 6월에 학제를 6·6·4제로 개혁하고, 학교 교육을 학령전교육·초등교육·중등교육·고등교육·특종교육의 5단계로 설정하였다.

초등교육으로는 국민학교의 수업연한을 6년으로 하고 전면적인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1948년 3월에 국민학교의 수업료를 폐지하였다. 국민학교의 취학 연령은 만 6세에서 11세로 정하였다.
중등교육은 중학교·고등중학교·사범학교 기타 실업계 학교 등으로 이루어졌다. 중학교는 수업연한을 3년으로 하였으며, 고등중학교는 6년으로 하여 전기 3년을 중등과, 후기 3년을 고등과라고 하였다.

사범학교는 3년제로서 15∼17세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1946년 11월에 8개의 사범학교를 신설하였다. 실업·기술교육은 각 3년제의 실업초급중학교와 실업고급중학교 및 단기양성소 등을 통하여 실시되었다.

고등교육은 대학의 수업연한을 4년제로 함과 동시에 취학 연령을 만 18세에서 21세까지로 정하였다. 1946년에는 사범대학을 신설하였으며, 국립종합대학교인 서울대학교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참고로 군정기간 동안의 각급 학교의 성장은 〔표 4〕와 같다.

[정부수립 이후∼1950년대의 교육]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우리 나라의 당면과제는 국내적으로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대외적으로는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분단된 국토와 분열된 사상을 통일하는 데 있었다. 군정시대의 교육이 교육재건을 위하여 선진국가의 교육을 모방하였던 시대라 한다면, 정부수립 이후부터 6·25전쟁 전까지의 교육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나라에 맞는 교육을 모색하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25전쟁으로 인한 피난 당시의 교육은 수난기로 볼 수 있으며, 수복 이후의 시기를 우리 나라 교육의 발전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부 수립 후의 교육, 즉 모색기의 교육에 있어서는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국애족할 수 있는 민주적 국민을 양성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 수립 당시에 강조된 교육의 표어는 민족적 민주주의교육이었다.

한편으로는 〈헌법〉이 제정되고 이에 근거하여 〈교육법〉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신생 국가의 교육기반이 확립되었다. 교육의 근본이념을 홍익인간으로 결정하고 평등사상에 입각한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추진되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전시교육이 노천에서 교과서 없이 생활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을 때, 문교부는 교과서 문제를 해결하고 전시 생활을 지도하기 위해 ≪전시독본≫을 발간하여 국민학교와 중학교에 제공하였다.

전시 교육의 목표는 멸공통일과 전후 재건에 있었으며, 교재는 전시 생활지도에 중점을 두었음은 물론, 중학교 이상에서는 1인 1기 교육을 실시하였다. 1951년 6월에 문교부는 〈일인일기교육실시요강〉을 발표하여, 체험과 근로를 통해 개인의 개성에 적합한 기술을 습득시켜 자주적 생활능력을 배양하는 동시에 전후 복구건설 사업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교육제도의 자치화를 의미하는 구체적인 형태로서, 1952년 5월에 시·군 교육위원회의 위원이 선거되었다. 다시 이듬해 6월에는 그들의 손에 의해서 교육감이 추천되었으며 교육자치제는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교육자치제는 제도로서 불비한 점이 적지 않고 실제 운영에 있어서 여러 가지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었으나, 지방 자치제의 제일보를 내디디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전시하의 교육은 다른 제반 실정이 그러했던 것처럼 문자 그대로의 수난 교육이었다. 모든 곤란과 애로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정신으로써 교육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국민의 교육에 대한 정열을 보여 주는 좋은 증언이었으며 우리 교육사를 장식하는 찬연한 장이라고 하겠다.

수복 후 교육계가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과제는 새로운 교육관의 확립이었다. 여기서 우리 교육사상에 가장 큰 혼미를 가져온 것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조화에 관한 문제였다. 그리고 광복 후 한국교육의 고심은 서구의 새로운 교육사조를 과감히 받아들여 구교육을 혁신함으로써 새 사회질서를 만드는 개척자적 구실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서구사상의 맹목적 모방에서 벗어나 민족교육의 향방을 찾으려는 두 가지 흐름의 공존이었다.

이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공통점을 기본 입장으로 하면서도 교육을 보는 입장이나 관점을 달리한 것으로서, 여러 가지 갈등을 겪으면서 교육사상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교육의 생활화와 과학화를 위해 교육과정을 실생활과 밀접하게 개편하여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는 동시에 지식 및 기술교육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의 학교 교육은 1949년 〈교육법〉 제정에 따라 중등학교를 각각 3년제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하였으며, 학령을 초과하였거나 정규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동을 위하여 공민학교(公民學校)와 고등공민학교를 설치하였고, 초급 기술교육을 위한 기술학교와 고등기술학교제도를 두었다.

1950년에는 전국에 16개의 초급대학을 인가하였고, 1도 1교(一道一校)의 국·공립대학을 설치하여 대학의 수도 집중을 억제하였다.

광복 후의 교육성장을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1945년 광복 당시에 초등학교가 2,800여개 교에 수용학생 약 136만이었던 것이 15년 뒤인 1960년에는 학교수 4,600여개 교에 학생수 약 360만으로 되어 학생수로 보면 약 2배 반이 늘었으며, 의무교육 연령 아동 총수의 95%가 취학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는 97개 교에서 1,000여개 교, 학생수는 5만여 명에서 53만여 명으로 증가하여 각각 10배의 격증률이 나타나게 되었고, 인문고등학교는 1960년 357개 교에 약 15만 명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각종 실업학교는 학교수 58개 교와 학생수 2만5천여 명에서 학교수 283개 교, 학생수 10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고등교육기관은 대학·전문학교가 19개 교에 학생 약 8천 명이었던 것이, 초급대학·대학 및 대학교 63개 교에 학생 약 1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밖에 사범학교와 각종 학교를 합하여 1960년에 419개 교에 약 470만 명의 학생이 있었다.

[1960년∼1970년대의 교육]

1960년대 초기의 혁명정부는 ‘조국근대화’라는 기치 아래 재건 국민운동을 추진하였다. 교육에 있어서도 1961년 9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제정, 공포하여 교육자치제가 폐지되고, 교육감 및 국·공립 대학교 또는 대학의 총장·학장을 내각수반이 임명하게 되었다. 1962년에는 각 도에 1개씩의 교육대학을 설치하였고 1963년에 5년제 실업고등전문학교가 발족되었다.

1964년 1월에는 과도 정부에서 일시로 폐지되었던 교육자치제가 도 단위로 부활되었으며, 1968년에는 잇따른 교육정책상의 개혁이 실시되었다. 즉 대학의 권위와 질적 향상을 꾀하고 지역간의 격차 해소를 위해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실시되었고, 중학교평준화시책에 따른 중학교무시험제 등 입시제도에 있어서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또한 1968년 12월에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하여 국민교육의 기본이념을 제시하는 동시에, 새로운 국민상 또는 교육에서 지향할 바 국민의 이상상을 나타내었다. 〈국민교육헌장〉은 교육의 가치관 정비를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여, ‘홍익인간’의 교육이념과 함께 교육의 기본이념으로 활성화되었다.

학교 교육에 있어서는 1962년 사범학교를 폐지하고 2년제 교육대학을 설치하였으며, 2년제 사범대학을 폐지하고 중등교원 양성을 위한 4년제 사범대학을 운영하였다. 1970년에는 전문학교를 설치하고, 1968년부터 채택된 통신교육제에 따라 고등교육의 기회확대의 일환으로 1972년에 방송통신대학을 신설하였다.

제4공화국이 출범한 1973∼1979년까지의 교육은 ‘국적 있는 교육’이라는 기치 아래 반공안보교육·주체성교육 등에 역점을 두었으며, 과학기술과 산학협동교육이 강화되어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이 실시되었다.

특히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개발하기 위한 새마을교육이 전개되었다. 학교 교육에 있어서도 1974년 전국에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설치하였으며, 고등교육의 저변확대를 위한 기능대학을 신설하고 방송통신대학을 활성화하였다.

또한 실험대학을 실시하여 계열별 또는 단과대학별 모집으로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조절하였으며, 부전공 내지 복수전공제를 채택할 수 있게 하였다. 입시제도에 있어서는 고등학교의 평준화와 지방학교의 발전을 목적으로 고등학교추첨입학제도의 확대와 함께 대학입시에 고등학교 성적을 반영하게 되었다.

그 밖에 교원 표준인사 내규규정의 제정, 사립학교교원연금제도의 신설, 대학교원임용제도의 개정, 〈특수교육진흥법〉 제정,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등이 실시되었다.

[1980년대의 교육]

1980년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7·30교육개혁조치를 통하여 과외수업의 근절, 고교내신제와 국가학력고사에 의한 대학입시제도, 교육대학 및 방송통신대학의 4년제 승격, 졸업정원제 시행 등 일련의 중요한 교육정책이 결정되었다.

문교부에서는 1981년에 문교정책으로서 국민정신 교육의 강화, 취학전 어린이 교육의 확대, 초·중등교육의 충실, 대학교육 개혁의 정착 및 질적 향상, 과학기술 및 직업교육의 강화, 사회교육의 확산, 국민체육의 진흥, 국제교육의 강화, 교육풍토의 쇄신 등을 주요 과제로 삼았으며, 장학방침으로 국민정신 교육의 강화, 기초교육의 내실, 과학기술 교육의 진흥, 전인교육 충실 등을 채택하였다.

이어서 1982년에는 민주정의사회 건설을 위한 국민정신 교육의 강화, 고도산업사회에 부응하는 과학기술 교육의 진흥, 복지사회 구현을 위한 평생교육 확충, 창조·개혁·발전을 위한 전인교육 확충을 문교시책으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문교정책 및 장학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취해진 제5공화국의 주요한 교육정책은 다음과 같다.

① 국민정신 교육의 강화로서, 반공교육에 근거를 둔 이념비판 교육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인식시키고 애국정신과 공동체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다.

② 평생교육 및 전인교육의 진흥으로서, 세계 최초로 국가의 평생교육 진흥정책을 〈헌법〉에 명시하여 개인의 소질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함과 동시에 자주적인 생활능력과 민주국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도록 하였다.

③ 고등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졸업정원제의 실시로, 초기에는 모든 대학이 일률적으로 30%(전문대학은 15%)를 증원, 모집하여 졸업할 때까지 초과 모집된 학생을 탈락시키는 것이었으나, 문제점이 뒤따르게 되어 1984년부터는 일부대학(의치대 및 여자대학과 여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학과)의 경우는 졸업정원의 30% 이내에서의 자율적인 조절로 귀착되었으며, 이는 1985년부터 모든 대학에 확대 적용되었다.

④ 대학입시 제도에 있어 종전의 본고사를 폐지하고 1981년부터 국가학력고사와 고교내신제를 적용하게 되었다.

⑤ 조기 유아교육을 확대실시하여 취학 전 어린이에게 두뇌와 신체의 조기발달을 꾀하고, 개인의 적성과 소질 등을 최대한으로 계발시키고자 한 취학 전 아동교육과 영재교육의 확대이다.

유아교육은 유치원뿐만 아니라 유아원 등을 통하여 이원적인 확충이 추진되었으며, 영재교육은 특수 교육의 일부로서 점차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 이후에는 과학고등학교의 신설, 기초과학교육의 진흥, 한국과학기술원 산하에서의 과학영재교육 강화 등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⑥ 학원자율화정책의 일환으로서 중고등학교 학생의 교복 및 머리모양을 자율화하였다.

⑦ 해외유학에 관한 규정이 대폭 완화되어 해외유학을 개방, 국제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⑧ 과외수업금지 정책으로, 광복 후 국민들의 교육열과 교육기회 균등의 확대에 따라 치열한 입시경쟁에 대비하기 위한 과외수업이 점차 과열되어 각종 부작용이 속출하게 되자, 1980년 7월에 전면 금지령을 발표하였다.

⑨ 1982년부터 실시한 〈교육세법〉은 교육기반의 확충을 위하여 학교 시설과 교원 처우개선에 소요되는 재원 확보를 목적으로 제정되어, 교육재정에 커다란 변화를 안겨주었다.

학교 교육에 있어서는 1983년에 과학고등학교가 신설되었고 고등 교육기관에서 1984년에 평생교육의 일환으로 개방대학이 신설되었으며, 교사의 자질향상을 위하여 2년제 교육대학이 4년제로 연장되고, 방송통신대학이 4년제로 승격되었다. 또한 1984년 3월에는 초·중등교원의 종합양성기관인 한국교원대학교를 창설하였다.

광복 이후 우리 나라는 정부의 교육진흥 정책과 국민의 교육열 고조로 교육의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의 양적 증가는 1983년 현재의 학생수를 1945년의 숫자와 비교해 볼 때 초등교육에서는 약 4배, 중등교육에서는 56배, 고등교육에서는 137배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가운데 광복 이후 현재까지 정부에서 가장 역점을 둔 부문은 초등교육 분야로, 의무교육완성6개년계획(1954∼1959)의 추진과 의무교육 1차(1962∼1966)와 2차(1967∼1971) 5개년계획의 추진 등으로 초등교육은 명실상부한 무상의무교육으로 거의 정착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학급의 과밀화, 학교 규모의 과대화와 교직원 수의 부족, 교육 시설의 노후 등 교육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추진되어야 할 과제가 산재해 있다.

한편 중등교육은 광복 후 현저한 양적 성장을 이룩한 부문이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중등교육의 기회는 크게 확대되었는데, 중등교육의 보편화 현상은 1968년에 시행된 중학교무시험 진학제도와 1973년부터 추진되어 온 고등학교 평준화시책에 힘입은 바 크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중학교의 의무교육화를 위한 교육정책에 따라 일부 도서벽지와 접적지역의 중학교에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정규학교 이 외에는 산업체 부설 중·고등학급이나 학교 등이 있고 고등공민학교·고등기술학교·방송통신고등학교 및 중등학교 수준의 특수학교도 설치되어 있어 중등교육의 기회는 널리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중등학교 역시 국민학교와 마찬가지로 다수인 과밀 학급과 과대 규모 학교의 문제점이 주요 과제로 남아 있으며, 그 밖에 무시험 진학으로 인한 이질적 학습집단의 학습 및 생활지도상의 문제, 지나친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 사학의 자율성 보장 및 정부의 재정지원 부족, 취업 부진으로 인한 실업계 학교의 기피현상 등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

광복 이후 다른 어떤 수준의 교육보다도 학생수 및 학교의 증가율이 급격한 부문은 고등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등교육의 급성장은 중등교육의 보편화와 상향적 계층 이동에 대한 기대 내지 가치관에 기인한 바 크다.

특히 1980년대에 와서는 고등교육의 대중화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이러한 고등교육의 확충과 기회균등의 확대는 국민의 교육수준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대학의 자율성 및 창의성 통제, 우수교원의 확보 문제, 현대적인 시설과 설비 부족 등 정상적인 대학운영에 지장을 주는 요소들이 남아 있다.

[1990년대 이후의 교육]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전반기는 제5공화국 군사정권의 통치와 제6공화국 아래 처해있던 암울한 교육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1986년 9월 사학민주화·교육민주화를 표방하면서 전교협(민주교육추진교사협의회)이 결성되어,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결성되는 1989년 초반까지 교육악법의 폐지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의 영향은 교육계에도 미쳐 1989년 5월 28일 전술한 전교조가 결성되었고, 일부 대학들에서는 사회의 민주화와 등록금 동결과 학사 및 재정문제 등을 이슈로 학내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제6공화국 정부당국은 일부 사립대 총장들을 해임하고 전교조 교사들에게 중징계를 가하는 등 교육계의 각종 민주화운동에 제재를 가하였다.

1990년 3월에는 국회에서 개정된 사립학교법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총학장이 갖고 있던 교직원 임면권(任免權)을 학교법인에 넘겨주는 등 재단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해 준 내용으로서 교수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89년부터 초·중등교원의 해외연수의 기회가 부여되었으며 대학생들의 해외연수와 해외유학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1990년 10월 8일 헌법재판소가 국립사범대학교 및 교육대학교 졸업생을 국·공립 초·중·고 교사로 우선 임용하도록 한 〈교육공무원법〉 제11조 1항을 위헌으로 판결함에 따라 1991년 1월부터 교사공개채용시험이 실시되었다.

1990년 3월 국회에서 독학에 의한 학위취득법이 의결되어 1990년 10월 20일 제1회 독학사시험을 시작으로 이 제도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90년 12월부터 TV와 FM라디오 등 채널 2개를 가진 교육방송국이 개국하여 학교교육의 보완, 방송통신고등학교 및 방송대학 강의, 비진학청소년을 위한 직업기술교육, TV과외, 진로교육, 성인교육 등을 위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기 시작하였다.

1991년 1월부터 과거의 문교부는 교육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한편 1991년 9월 2일에는 전국 15개 시도에 교육위원회를 개원함으로써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중단되었던 지방교육자치제가 부활되었다.

1993년 문민정부라는 제7공화국인 김영삼(金永三)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육정책은 새롭게 진행되었다. 이미 1992년 1월 5일 유치원과 각급학교에 적용되는 〈제6차 교육과정 개정안〉이 확정·발표된 것을 그대로 받아 1995년부터 이를 실시하였다.

개정안에 따르면, 교육대상이 만 3∼5세로 확대되는 유치원 교육과정에는 전일제 교육과정을 새로 도입함으로써, 각 유치원은 시교육청의 허가를 받아 전일제 수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초등학교의 새 교육과정(1995학년도 1∼2학년, 1996학년도 1∼4학년, 1997학년도 전학년)은 실생활과의 연계 및 도덕심 함양, 전통예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개편되고 ‘산수’가 ‘수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 3학년 이상에서 한시간씩 신설되는 학교재량시간에는 한자·영어·컴퓨터 등을 배우도록 하였다.

또한 1995학년도부터 적용되는 중학교교육과정은 수학과 과학과목이 현행보다 쉬워지고, 국어는 현재의 읽기 중심에서 말하기 듣기 중심으로, 영어는 문법과 독해 중심에서 회화 및 생활영어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고교교육과정은 현행 문과·이과 직업과정 외에 지역과 학교특성,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예능계나 외국어 등 별도의 교육과정 설치가 가능해졌다.

또 학생들의 다양한 학습능력에 맞추어 교육할 수 있도록 수학·과학·외국어·한문 등은 지금보다 훨씬 세분화된 수준별 교과서를 만들어 학교측이 이를 자율적으로 선택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우열반 편성이나 능력별 이동수업의 가능성이 열렸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는 고교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을 교육부가 지정했으나 1996학년도부터는 공통필수과목만 교육부가 지정하고 나머지는 시도교육청과 학교측이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등 교육청과 일선학교의 교육과정 편성권 및 과목선택권이 대폭 확대되었다.

한편 서울지역 중고생에 대한 학기 중 학원수강이 지난 1980년 교육개혁조치 때 금지된 이후 12년만인 2학기부터 전면 부활되었다. 이미 1992년부터 중학의무교육이 실시됨에 따라, 1995학년도부터는 중학교 내신성적만으로 고교신입생을 선발하게 되었다.

1994학년도부터 고교내신과 대학수학능력시험, 본고사(논술고사)를 골격으로 하는 새로운 대입제도가 실시되었다. 당초 대학수학능력시험(언어영역 60문항 60점, 수리탐구Ⅰ(20문항)과 수리탐구Ⅱ(60문항)을 합쳐 100점, 외국어(영어) 영역 50문항 40점 등 200점 만점)은 8월과 11월, 2회에 걸쳐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1회로 축소되어 시행되었으며, 전기대 시험에 앞서 내신성적과 대학수학능력시험 우수자를 먼저 선발할 수 있는 특차전형제도 도입되었다.

1993년 3월 교육부는 1987년 7월 11일부터 1993년 2월 24일 사이에 시국관련사건이나 학원사태 등으로 제적당한 학생들을 모두 정원외로 복적시키기로 결정하였으며, 7월에는 이들 외에도 경제적, 신체적 사정 등으로 등록을 하지 않았거나 군입대시 소정의 절차를 밟지 않아 제적된 학생들도 모두 복적시킬 것을 발표했으며, 1994년 3월에는 전교조문제로 해직되었던 일부 해직교사들이 교단으로 복귀하기도 하였다.

1994년 1월에는 국사교과서 현대사 서술부분의 용어가 수정되었다. 교육부는 근·현대사에서 4·19의거와 5·16혁명을 4월혁명과 5·16군사정변으로 수정하고 근대 이후의 역사를 민족수난사에서 탈피, 자주자강 및 독립운동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였다.

새로운 단원을 신설하여 일제치하에서 해외로 이주한 500만여 해외동포의 이민사를 기술하는 등 민족사관의 관점을 강조하였으며, 현대사에서의 역사적 사건들의 명칭을 변경하였다. 4·19의거는 최초로 독재정권을 타도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4월혁명으로 변경하면서 3·15부정선거에 항거해 일어난 마산의거를 처음으로 서술키로 하였다.

5·16군사혁명은 쿠데타라는 의미의 ‘정변’을 사용, 5·16군사정변으로 표현하고, 여수·순천반란사건은 내용 서술을 통해 반란의 주체를 밝힌다는 전제 아래 여수·순천사건으로 고쳐 기술하였다. 8·15광복, 제주도 4·3사건, 대구폭동, 6·25전쟁, 10·26사태, 12·12사태, 5·17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은 용어변경문제로 논란을 빚기도 하였다.

북한의 현대사는 6·25전쟁 이후 김일성(金日成) 유일지배체제의 구축, 국제적 고립 등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서술하였다.한편 1996년에는 국사과목이 ‘사회교과’에 포함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1996년 3월부터 전국의 초등학교들은 과거의 ‘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6년 5월 정부는 대학교육의 개혁을 위하여 각 대학들이 학과 및 학부별 정원을 자율적으로 조정하도록 하였으며, 학사운영관리는 물론 교양·전공과목 및 필수·선택과목의 지정도 대학의 자율에 맡겼다.

정부는 과거의 지원방식에서 벗어나 교육여건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개혁에 앞장서는 학교에 집중적인 재정지원을 하거나 정원결정권을 부여함으로써, 각 대학들의 경쟁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교육개혁우수대학으로 평가받은 23개 대학이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또한 정부는 1995년의 ‘국제관계 전문인력 양성방안’과 ‘외국문화에 대한 이해증진과 지역전문가 육성방안’에 따라 지역연구 국제협력 통상관계 등에 정통한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육성, 세계화·개방화 시대에 대비하자는 취지에서 국제전문인력양성 특성화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9개 대학이 특성화 대학으로 선정되어 국제관계대학원을 설립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1998년 6월 교육부는 국제대학원을 대학별로 특성화하고 예산의 지원폭도 확대할 것을 결정하였다.

1990년대 후반이 되면서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에 따른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1997년 3월부터 전국의 초등학교 3학년생을 대상으로 영어교과수업이 시작되는 등 여러 가지 교육개혁이 실시되었는데, 그 중 주목할 것은 교육의 정보화를 위한 개혁이었다.

1997년 1월 29일 교육부는 ‘교육정보화촉진시행계획’을 확정함으로써, 전국 초·중·고교에 팬티엄급 컴퓨터와 모든 초등학교에 위성방송 수신장치를 보급하였다. 1997년 국민정부인 김대중(金大中)정부가 들어서면서 IMF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교육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문민정부 때 확정된 교육정보화의 촉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급속히 발전하는 정보기술을 토대로 학생, 학부모, 교사, 성인, 학교, 대학, 산업체 등 모든 사회구성원이 열린 교육과 평생학습을 통해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기본적 정보이용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컴퓨터 교육과정을 확대 개편하고 모든 교과목에 컴퓨터를 이용한 교육내용을 반영토록 하였다.

초·중·고교의 경우 컴퓨터 교육이 가능하도록 학교마다 2개 학급이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 실습실을 확보하고 2002년까지 모든 학교를 초고속 정보통신망으로 연결,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교사의 업무부담을 줄이기 위해 성적, 도서, 재무, 설비관리 등 학교업무를 차례로 전산화하고 교사 개개인에게 1대씩 컴퓨터를 보급하였으며, 학습정보, 생활지도, 교육행정자료 등을 알려주는 교육정보 종합서비스시스템 에듀넷(EDUNET)에 이어 1997년에는 ‘국가멀티미디어 교육지원센터’ 설립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지역·계층간의 교육격차 해소를 위한 원격교육은 초등학교와 대학에서 시범운영하는데 한국방송통신대학의 경우 12개 지역학습관, 27개 시·군학습관의 화상 강의시설이 활용되었다.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교육방송 이용을 적극 권장하고 우선 초·중·고교와 특수학교 등 1만393개 학교에 위성채널로 보내는 방송을 볼 수 있도록 수신장치를 보급하였으며, 학술연구와 관련해서는 전국대학과 정부기관의 도서관·연구소·학회가 보유한 모든 학술정보를 ‘첨단학술정보센터’에서 종합해 제공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학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도서관들이 전자도서관으로 그 체제를 개혁함으로써, 도서목록과 초록, 목차는 물론 전문까지 전산화하여 학술연구자들에게 빠르고 값싸게 제공하고 있다.

국회는 1998년 12월 교원 정년 62세 단축을 골자로 한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1999년 7월부터 초·중등 및 유치원교사의 노동조합 결성과 복수노조를 수립할 수 있는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교원노조가 합법화되었으며, 1998년 4월 2일에는 국무회의에서 1999학년도부터 대학에 학부제를 전면 도입하도록 하는 〈고등교육법시행령〉이 통과되어 전국의 각 대학들에서 학부제가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학부제는 대학사회에 뜨거운 감자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울러 이와 병행하여 인문과학에 대한 위기의식은 대학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주고 있다. 1998년 1월 교육부는 2000년부터 초·중·고 교과내용을 30%가량 줄이고 ‘능력별 수업’을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제7차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개정안〉을 확정하였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더 쉽게 출제하는 등 공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을 수행 중에 있다.

또한 8월에는 1999년 고교 1학년부터 학기당 이수과목을 축소시키고 학술 및 교양강좌 등 학교 외 활동도 성적으로 평가하며 중간·기말고사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외부 모의고사는 폐지하는 내용의 초·중등교육 정상화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1998년 교육부는 지방대학의 육성을 추진하는 한편 4월에는 무자격 대학법인 58곳의 인가를 취소하고 정원을 감축하는 등 제재조치를 취하였으며, 전국 모든 대학을 연구중심대학과 교육중심대학으로 이원화 해 평가한 뒤 순위를 공개하는 새로운 평가방식을 도입하였으며, 연구실적이 좋지 않은 대학이나 교수들에게는 지원을 중단하는 등 대학의 구조조정을 통한 경영쇄신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리하여 1998년 6월 교육부는 전국 4년제 대학 가운데 국·공립대학과 수도권을 뺀 지방 사립대 그리고 수도권대 지방캠펴스에 대해 정원을 자율화(의대와 사범대 제외)하는 내용의 99학년도 대학정원 조정지침을 확정하였으며, 대학원에 대해서도 1999학년도부터 정원충원율이 낮은 대학원은 정원을 동결하고 대학원 설치기준을 신설하여 기준에 미달한 대학원은 통·폐합하는 내용의 1999학년도 대학원조정지침을 마련하였다.

[전망]

교육은 국가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로서, 교육정책 및 제도의 수립에 있어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교육정책이나 행정은 근시안적이고 개편이 잦은 형태로 일관되어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는 광복 이후 정치적·사회적 불안정, 재정의 궁핍, 급속한 인구성장 및 교육의 팽창 등 여러 가지 내·외적 요인에 따라 교육의 건전한 성장이 어려운 조건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양적 팽창, 민주적 제도의 도입, 교육 투자의 증대, 교육 프로그램의 다양화, 교육기술의 전문화 등 여러 면으로 성장해 왔으며, 이러한 성장 발전을 위하여 부단히 교육정책이 바뀌고 학제도 수정, 보완되었다.

앞으로는 이제까지의 혼란에서 벗어나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현재의 문제점을 점차 보완해 갈 수 있는 안정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따라서 세부적인 많은 문제점과 개선책에 우선하여 대전제로 이루어져야 할 것은 교육이 정치로부터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와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하나의 함수관계를 이루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체제하에서는 올바르고 안정된 교육의 진로를 찾기 어렵다. 국가 교육정책과 학제는 국민교육 제도의 근간이며 핵심을 이루는 것이므로, 우리 나라 교육의 당면 과제는 정권적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육정책이나 학제의 변경을 우선하기보다는, 수립된 기본교육 정책이나 학제를 어떻게 내실화하여 효과적으로 운영하느냐가 더 중요하며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대전제가 보장되고 이루어질 때 세부적인 각종 문제점 해결을 위한 진로가 열릴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호일>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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