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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01 (토)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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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982      
[조선]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 (정읍)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

전라북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흐름

태인 태성리 소재의 피향정에 있는 탐학군수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이 태안현감을 지낸 치적을 기리는 선정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사진고부봉기

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전, 1893년 한양과 삼남지방에서는 온통 척왜양의 물결로 술렁거렸다. 이러한 물결은 찬바람이 불면서 잠시 수그러지는가 싶더니 1894년 1월 10일 고부에서 다시끓어 올랐다.

흔히들 말하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탄학만행이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병갑은 부임 초부터 온갖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1893년 11월 30일에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났으나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고부군수 재취임의 공작을 벌여 마침내 1894년 1월 9일에 재부임하였던 것이다.

다음날 전봉준은 오래 전부터 긴밀한 관계에 있던 동지들에게 연락하는 한편, 군민들을 말목장터로 모았다. 전봉준은 말목장터에 모인 군중을 두 패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달려갔다. 새벽공기를 가르는 함성과 함께 고부관아는 힘 안들이고 점령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조정에 알려져 김문현과 조병갑은 그 책임을 추궁당하고, 조병갑의 후임으로 용안현감이었던 박원명이 임명되고 또 장흥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임명되었다.

2월 말쯤 신임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은 농민군과 민정을 의논하고자 이들을 초대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면서, "모든 것이 고부군에서 잘못하였고,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읍폐를 시정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이런 유화책에 말려든 농민들은 하나 둘 해산하기 시작했고, 3월 초 전봉준 이하 간부들은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 고부를 표연히 떠났다.

무장에서 제1차 기병

기병 고부를 떠난 전봉준은 무장으로 달려가 손화중을 찾았다. 거기서 전봉준은 손화중과 손잡고 4천여명의 농민군을 모아 '호남창의소'라는 이름 아래 「창의문」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894년 3월에 일어난 농민전쟁의 제 1차 기병이었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3월 20일 무장을 출발하여 고부로 쳐들어갔다. 고부를 점령한 후 쌓인 민원을 처리하고 25일에는 백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이리하여 부근에서 몰려와 집결된 농민군의 수는 약 8천여 명.

정부에서는 이런 사태에 접하여 3월 29일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을 전라병사로 제수하였다가 4월 2일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장위영 병정 5대 800여 명을 3척의 전함에 분승시켜 군산항으로 출발시켰다. 김문현은 별장 이경호로 하여금 영병과 포군을 이끌게 하여 백산으로 출동시켰다.

이리하여 농민군은 감영군을 황토재로 유인하여 4월 7일 이른 새벽에 패배를 안겨주었다. 황토재에서 승리를 거둔 농민군은 해질 무렵 정읍을 들이쳤고, 8일에는 흥덕과 고창을 휩쓸었다.

9일 정오경 고창을 출발하여 4시경 무장 동헌에 돌입하였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2대로 나누어 12일 이른 아침 무장을 출발하여 영광으로 쳐들어갔다. 영광에 도착한 농민군은 터져나오는 함성과 함께 거침없이 성문을 열었다. 농민군은 영광에서 요호들의 전곡과 마필을 징발하여 군량과 무장을 확보하고 16일 오전에 함평을 향해 출발했다. 농민군은 함평의 관문도 부수어 버렸다.

4월 7일 오후 전주성에 들어간 홍계훈은 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고, 한편으로 외국군, 즉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이도록 건의하였다.

정부에서는 홍계훈의 증원 요청을 받고 16일 강화도 수비병을 강화병방 황헌주의 인솔아래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18일에는 김문현을 전라감사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외무협판 김학진을 신임 전라감사로 제수하였다.

이렇게 되자 홍계훈은 더 이상 전주성에서 머뭇거릴 수 없어 18일 아침 일찍 전주성을 출발하여 태인, 정읍, 고창을 경유하여 21일에 영광에 들어갔다. 농민군이 장성과 나주 방향으로 각각 진격해 갔음을 보고받은 홍계훈은 대관 이학승에게 병정 3백 명을 주어 장성으로 급히 보냈다.

이즈음 전봉준의 작전대로 농민군은 장성의 황룡촌에서 경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23일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황룡촌에 다다른 경군은 농민군을 공격하였고, 경군의 선제공격을 받은 농민군은 황룡촌 뒷산인 월평삼봉의 정상에 올라 대나무로 만든 장태를 굴려 경군을 짓밟았다. 이것이 장성 황룡총전투인데, 이 전투로 농민군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도 드높았다.

정부는 장성에서의 패전 보고에 깜짝 놀라 4월 27일 이원회를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로 임명하고 강화, 청주의 군사를 내어 주었고 홍계훈의 군사를 통제할 권한을 부여했다.

농민군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곧바로 갈재를 넘어 정읍을 향해 달렸다. 25일 정읍을 한 번 더 휘젓고 12시쯤 태인으로 향했다. 농민군은 금구를 거쳐 26일 전주성 턱밑인 삼천(三川)에 이르렀다. 다음날 농민군은 용머리고개로부터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4월 27일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주성 공방전과 전주화약

홍계훈은 전주성이 함락된 하루 뒤에 용머리고개에 도착하여 완산칠봉 일대에 진을 치고 포열을 폈다. 이날 오후 농민군이 선제공격을 날렸다. 농민군은 경군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큰 전과 없이 성안으로 철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4월 29일, 5월 1일, 2일에도 접전을 벌였다. 5월 3일의 전투에서 농민군은 지휘관 김순명과 어린 장사 이복용, 그리고 5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이번 싸움은 경군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지만 농민군에게도 피해가 컸다. 이즈음 조선정부가 원병을 요청하여 청군이 5월 5일과 7일 각각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또 천진조약에 따라 역시 일본군도 뒤이어 상륙하였다.

이런 안팎의 위급상황은 전봉준과 홍계훈으로 하여금 화약을 검토하게 하였고, 결국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조건으로 전주화약이 5월 7일 맺어졌다.

남원대회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 침범사건이 일어나고 청일전쟁까지 터지는 가파른 국면이 전개되자 전봉준은 통문을 날려 각 지방의 농민군을 남원으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하여 농민군 대집회가 7월 15일에 열렸는데, 이 남원대회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들뜬 농민군 내부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또 각 지방으로 흩어져 있어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농민군에게 내부결속을 강화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봉준은 일본의 동향을 신중히 지켜보면서 김학진과 손을 잡는 등 2차 기병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삼례에서 제2차 기병

전봉준은 9월 초 금구·원평에서 전주로 나아가 직속부대의 준비를 완료하고 삼례로 향했다. 삼례에 도착한 전봉준은 9월 12일 일본군을 몰아내고 봉건잔재를 척결하기 위한 본격적인 기병을 확정짓고 삼남의 농민군에게 봉기할 것과 삼례로 모이라는 통문을 띄웠다.

삼례에 모인 전봉준 직속의 농민군은 4,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스스로 의병이라 불렀다. 이는 일본의 침략으로 존망의 위기에 떨어진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났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이리하여 전주·고창·태인·남원·금구·함열·무장·영광·정읍·김제·고부 등지에서 투쟁의 횃불을 높이 쳐들고 달려온 농민군은 다시 전봉준을 대장으로 받들고 손화중과 김덕명에게 총지휘의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농민군 북상에 걸림돌이었던 동학교단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드디어 농민군은 9월 하순 진격의 나팔을 불었다.

초겨울의 날씨는 알맞게 싸늘했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농민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농민군은 가벼운 걸음으로 여산을 거쳐 은진과 강경 두 방향으로 진격하다가 10월 초에 강경포에 이르러 진을 쳤다.

이때 전라감사 김학진은 농민군의 운량관이 되어 관청의 세곡은 물론이고 가을걷이한 양곡 혹은 소·말을 징발하여 농민군 진영에 실어 날랐다. 전봉준은 불어나는 농민군을 이끌고 다시 북상하여 논산 풋개(草浦)에 진을 쳤다.

전봉준은 10월 9일 호서농민과 합류한 후 10일 충청감사에게 격문을 띄워 농민군과 함께 항일전선을 펼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정부·일본 연합군과 맞서 혈전을 벌일 공주를 향하여 농민군의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자료제공 : 우윤

충청남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흐름

       충남지역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대체로 북접계통의 영향 아래 있던 충남지역은 우금치전투로 대표되는 제2차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전장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농민들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의 집회 때도 아산, 홍주 등지에서 농민들의 술렁임이 있어서 수령들이 서울로 피해가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1894년 1차 농민전쟁시에도 호남의 영향을 받아 특히 충남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농민들의 활동이 일부 시작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1차 갑오동학농민혁명 기간에는 그렇게 활발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충남지역에서 농민군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894년 9월에 들어 북접의 무력봉기 선언이 있은 다음부터였다.

충남지역 농민전쟁의 주요 전장은 농민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던 우금치를 중심으로 한 공주 일대였지만, 공주 서북쪽으로 예산, 덕산, 유구를 비롯하여 서산, 태안, 해미 등 내포지방에서도 농민군의 활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으며, 남쪽으로 전라도 농민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서천, 한산 지역에서도 이미 1차 농민전쟁 시기부터 농민군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6월 들어 접소가 설치되면서 활동을 시작한 서천, 한산 지역의 농민군은 9월 중순에 접어들자 금강을 건너 임천 입포에 들어온 전라도 농민군과 더불어 이 일대를 석권한 이후 관군과 맞서며 11월 말까지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한편, 내포 지역에서는 박인호, 박희인의 지휘 아래 신창의 김경삼, 곽원, 정태영, 덕산의 이종호, 최병현, 당진의 박용대, 김현구, 서산의 장세화, 안면도의 주병도, 최동민, 태안의 김병두, 홍성의 김주열, 한규복, 면천의 이창구, 남포의 추용성 등이 중심이 되어 농민군을 이끌었다.

농민군은 9월 그믐 무렵부터 예산 이북 포지리와 원북 방갈리 지역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0월 1일에는 수천 명의 농민군이 서산관아를 공격하여 군수 박정기와 이방 송봉훈을 참수하고 인부를 압수했으며, 문서를 불사르고 군기와 재물과 곡식을 접수하여 한 달 동안 서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같은 날 태안에서도 수천 명의 농민군이 태안관아를 쳐들어가 점령했으며, 11일에는 홍주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태안을 공격하자 목소리에서 접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0월 5일에는 덕산포의 농민군 수천명이 방포하며 아산읍내로 들어와 관아를 파괴하고 군기고의 무기를 모조리 탈취해 가기도 했다.

이렇게 남부와 내포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될 무렵 농민군의 본류는 서울 진격을 위한 중간 관문인 공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서서히 공주성을 압박해 나가고 있었다.

9월 중순 삼례에서 일어난 호남의 농민군이 북상하여 여산, 은진을 거쳐 강경에 도착한 것은 10월 초순이었으며, 10월 9일에는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의 주력부대와 합류했다. 한편 북접계통의 다른 한 부대는 청산에 집결하였다가(10월 11일 청산대회) 공주를 향해 남하, 10월 23일에는 공주 동북쪽에 있는 대교(장기면 대교리)까지 진출하여 논산을 거쳐 북상하는 호남의 농민군과 호응하였다.

농민군의 공주성 공격은 10월 23일 이인전투에서 시작되어 24일 대교전투, 25일 효포, 능치전두, 그리고 최후의 항전인 11월 9일의 우금치전투로 이어졌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성패가 달린 공주공방전에서 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맞서는 관군과 일본군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끝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2차 기병으로 모아진 거대한 농민군의 힘이 공주성을 에워싸고 폭발하였으나, 수없이 많은 농민군을 공주전선에 묻어버린 채 호남지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그 후 남쪽으로 퇴각한 농민군들이 다시 힘을 모아 원평과 태인 등지에서 반격전을 폈으나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충남 남부와 내포지역의 농민군 역시 공주를 향한 진출을 끈질기게 시도했으나 11월부터 본격화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점차 사그라졌다.

이리하여 반침략 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충청도의 농민전쟁은 1894년이 다 갈 무렵 사실상 무너지고 말았다.

자료제공 : 배항섭

경기도, 충청도 내륙지방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흐름

          당시 경기도 죽산읍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당시 충청도 천안읍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당시 충청도 목천 세성산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남하하는 관군

일본군이 6월 21일 경복궁을 침범하여 민씨 정권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친일내각을 출범시키자 조선의 정국은 급변하였다. 농민군은 이러한 위급상황을 접하고 한 때 재기병의 물결로 술렁거렸으나 남원대회를 통해 일본의 술책임을 간파하고 급변하는 사태에 신중히 대응하기로 하였다. 정부는 9월 10일 장위영 영관 이두황을 죽산부사로, 경리청 영관 성하영을 안성군수로 삼아 먼저 내려보냈다.

이어 9월 21일 호위부장 신정희를 도순무사로 삼아 모든 군사를 지휘케 하고 양호순무영(兩湖巡撫營)을 설치하여 남쪽의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신정희는 순무영별군관 이규택를 좌선봉장으로, 이두황을 우선봉장으로 삼았다.  관군 중에서 맨 먼저 내려간 이두황은 9월 20일 1개 중대병력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용인을 거쳐 23일 죽산에 도착했다.

이두황은 죽산관아에 머무르면서 인근의 농민군 동향을 정탐하고 휘하의 병정을 보내 농민군을 잡아들였다. 진천 구만리장터와 충주 무극장터에 수만의 농민군이 모였다는 보고에 따라 이두황은 10월 9일 죽산을 출발하여 다음날 무극장터에 나가보니 이미 농민군이 괴산읍을 불지르고 보은으로 달려가 버린 뒤였다.

이두황은 농민군 뒤를 쫓아 청주를 거쳐 13일 상당산성 뒷산을 넘어 미원장터에 이르렀다. 다음날 보은 장내리에 들어가니 농민군의 본대는 이미 공주 쪽으로 떠나 버리고 텅 비어 있었다. 이두황군은 초막과 빈집을 불태우고 근처에 있던 농민군을 잡아 포살하였다. 16일 호남농민군이 노성, 논산에 엄청난 세력으로 올라와 있으니 속히 공주감영으로 오라는 전령을 받고 17일에는 부강, 18일에는 공주를 코앞에 둔 연기 봉암동으로 나왔다. 그러나 20일 목천 세성산에 비도들이 웅거해 있다는 청주병영의 연락을 받고 북쪽으로 진군방향을 돌렸다.

세성산 전투

        세성산 부근 약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세성산에는 9월 말에 이미 천안의 김화성, 목천의 김용희가 이끄는 수천의 농민군이 천안, 목천, 전의 등의 고을을 습격한 후 둔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관군의 후방을 찌르고 호남의 농민군과 호응하여 농민군의 서울진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두황이 21일 새벽에 세성산 밑에 관군을 이끌고 나타났던 것이다.

농민군은 쳐올라오는 이두황의 관군을 맞아 한나절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워낙 우세한 화력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곳에서 처음 전투다운 전투를 벌인 이두황은 승리의 여흥에 취해 늘어지게 놀다가 26일에야 공주로 출발하여 27일 금강을 건넜다.

공주로 집결하는 관군과 일본군

           중부 지역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10월 11일 서울을 출발한 이규태는 과천을 거쳐 12일 수원에 도착하여 일본군 3중대와 합류하여 17일 진위로 나아갔다. 18일 일부 병력을 안성과 평택, 아산 등지로 파견하고 성환에 들어갔다.

다음날 천안을 향해 출발한 이규태는 느릿느릿 진격하고 있다가 농민군이 공주로 육박해 온다는 급보를 듣고 24일 서둘러 공주에 도착하였다. 한편 거물정객 이노우에(井上)까지 조선주재공사로 파견할 만큼 일본은 농민군의 재기병을 주시했다. 일본군은 농민군이 재기병하자 무력을 서서히 증강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준비하였다.

일본군은 10월 15일 용산을 출발하여 동(가흥, 충주, 문경, 대구로 향함), 서(수원, 천안, 공주, 전주로 향함), 중(용인, 죽산, 청주, 성주로 향함)의 3로(路)의 분진대로 나누어 진격시켰는데, 동로의 군사를 먼저 출발시켜 농민군을 서남방으로 쫓아 중로의 군사와 연락하고 또 전라도 해안 쪽으로 해군의 상륙작전과 함께 포위 공격을 벌여 일거에 초멸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일본군은 호남과 호서의 농민군이 공주를 향해 돌진해오자 서로분진대를 10월 24일, 중로분진대를 10월 29일 공주에서 합류하도록 하였다.

자료제공 : 우윤

전라도, 경상도 해안지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흐름

           전라도 광양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경상도 하동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경상도 진주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전라도 장흥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두 흐름이 있다. 한 줄기는 순천, 여수, 광양, 하동, 진주 일대에서 전개되었고 또 한줄기는 해남, 영암, 강진, 장흥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순천에서 진주를 잇는 갑오동학농민혁명의 과정은 이러했다. 진주에서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직후 4월부터 동학도 중심의 농민들이 소규모로 봉기하여 진주병영에서는 이곳 농민군 30여 명을 잡아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하였다. 그 후 지금의 서부 경남지역은 농민집강소가 전라도, 충청도에서 시행될 무렵, 전라도 농민군을 끌어들여 이 지역에도 설치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1894년 7월 광양의 농민군이 하동세력과 힘을 합해 하동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집강의 일을 보자, 화개동 중심의 민포군(民砲軍)들이 불의에 이들을 습격하여 광양으로 쫓아냈다.

전라도 금구 출신 김인배는 농민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순천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하동을 9월 1일 공격하여 승리하고 다시 도소를 설치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진주의 농민군이 다시 움직였다. 이때 김인배는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의 이름을 내걸고 진주로 진출하면서 남해, 사천, 곤양, 고성 등지의 관아를 접수했다.

9월 14일 진주농민군이 목사를 굴복시켰고 17일 김인배의 농민군이 들이닥치자, 목사 유석과 병사 민준호가 마중을 나와 항복했다. 진주병영을 무혈점령한 것이다.  김인배는 진주병영을 점령한 지 1주일 만에 그곳 출신 정운승에게 맡기고 주변고을을 석권했다. 이때 동래의 일본군은 경상감영의 판관 지석영과 함께 통영의 포군 100명을 이끌고 10월 초이튿날부터 고성, 곤양을 거쳐 하동 금오산의 농민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일본군은 진주로 들어갔고 김인배 등이 이끄는 농민군은 진양군 수곡에 집결해 있다가 고성산으로 진을 옮겼다. 10월 13일 농민군 5천여 명은 일본군 170여 명과 관군 지원부대와 전투를 벌여 패전하고 흩어졌다.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을 추격하여 하동으로 들어갔고 김인배의 농민군은 다시 순천, 광양의 세력을 규합하여 하동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김인배는 잔여 농민세력과 승주 선암사에 근거를 두고 있던 농민군을 규합해 여수 좌수영 공격에 세 차례나 나섰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후 김인배는 광양땅에서 잡혀 죽었다. 이와 달리 해남, 장흥지역은 다른 전개를 보이고 있었다. 집강소 기간, 농민군은 광주에 대도소(大都所)를 두어 아래 해안지대를 다스렸다. 그리고 이곳의 생산품을 전봉준 농민군에게 공급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원평,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한 갈래는 북상했고 한 갈래는 나주를 공격하고 나서 바다 쪽으로 흩어졌다. 장흥 출신 이방언은 대접주로, 흘러든 농민군과 현지 농민군을 규합, 장흥을 차지하고 이어 강진을 점령했다.

다른 농민군 부대는 영암, 해남을 위협했다. 이렇게 되자 나주에 있던 이규태가 이끄는 관군은 영암에 모여 있던 2만여 명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농민군은 장흥 쪽으로 후퇴했다. 관군은 강진병영으로 향했다.

이에 농민군은 강진에서 후퇴, 장흥으로 진을 옮겼다. 12월 12일 농민군과 관군은 장흥읍네 석대(石臺)들에서 결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무수한 시체를 남기고 회진 쪽의 바다로, 또는 곰티재를 넘어 산악지대로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김인배와 이방언의 농민군은 두 지역에서 활동을 멈추었다. 김인배는 남원 등 지리산 세력과 연결되어 있던 탓으로 진주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이고 이방언은 양반 지주로 관리의 부정과 민씨세도를 타도하기 위해 봉기한 전형적 농촌 지식인이었다. 이 두 지역은 후방의 방비만이 아니라 주력농민군을 지원하는 주요 요충지였다.

해남에는 전라우수영이 있고 영암에는 월출산성이 있고 강진에는 전라우병영이 있었다. 또 여수에는 전라좌수영이 있었고 하동에는 천연의 요새로 경상, 전라를 잇는 통로임과 동시에 지리산과 직결되며 진주에는 경상우병영이 있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이 지대는 남해안 육군, 수군의 요충지대였던 것이다.

자료제공 : 이이화

갑오동학농민혁명과 지리산 일대

지리산 북부 농민군

갑오동학농민혁명과 지리산의 관계에 대해선 간과되는게 보통인데 앞으로 보겠지만 지리산이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평, 보은집회 이후 집회의 주모자들이 잠깐 은신하기도 한 지리산은 갑오동학농민혁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지리산 일대의 갑오동학농민혁명에는 두 흐름이 있었다. 한 줄기는 남원, 운봉 등 지리산 북쪽에서 전개되었고, 또 한 줄기는 순천, 하동, 진주 등 지리산 남쪽에서 전개되었다.

남원과 운봉을 잇는 농민전쟁의 과정을 살펴보자. 남원은 하동에서 띄운 배가 섬진강을 따라 구례, 곡성을 거쳐 광한루 앞의 나루터에 도착하는 뱃길 덕분에 예부터 물산이 풍부하였고, 또 육로로는 운봉, 함양을 거쳐 진주까지 쉽게 갈 수 있어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을 이용하고자 김개남이 이곳에 진출한 것은 6월 25일(음력)이었다. 이때 김개남은 막강한 농민군세를 바탕으로 다른 곳보다 강력한 농민통치를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농민통치가 수행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농민군 내부는 다시 기병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술렁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농민군의 군웅할거로 명령계통이나 일선활동이 원활하지 못했다. 전봉준은 7월 2일 남원의 김개남을 찾아가 이후 농민군이 취할 대책을 숙의하고 7월 15일 농민군 단합대회를 남원에서 열기로 하였다.

이로써 남원은 단합대회장이 되었고, 농민군 지도부는 재기병의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급변하는 정세에 차분히 대처할 방안을 논의하였다. 중앙의 정세 변화에 따른 자신의 선택을 고민하던 전라감사 김학진은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농민군을 인정하여 전봉준과 손을 잡고 농민통치에 협조하였다.

이후 김개남은 잠시 남원을 떠나 임실로 갔다가 남원으로 다시 들어가 부사 윤병관을 몰아내고 교룡산성을 수축하는 등 남원을 완전한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10월 14일까지 참서의 기록을 핑계로 전봉준의 재기병을 외면한 채 남원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김개남이 남원을 떠나 전주로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박봉양은 남원, 운봉의 민보군을 이끌고 남원을 들이쳤다. 대장이 없는 농민군은 저항 끝에 남원성을 비우고 달아났다. 박봉양은 남원에서 며칠 머문 뒤에 남원의 수성을 이곳 사민(士民)과 관속에게 맡기고 운봉으로 돌아갔다.

이에 농민군 지도자 유복만, 남응삼 등은 농민군을 이끌고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서 운봉을 넘어 영남으로 진격할 채비를 하였다. 그리하여 11월 13일 경에는 남원의 농민군이 남원 산동방 부동촌까지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운봉의 민보군 2천여 명은 관음재에서 진을 치고 맞서 싸울 준비를 서둘렀다.

11월 14일 새벽부터 싸움이 붙어 다음날 아침에야 결판이 났다. 농민군은 수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남원으로 퇴각했다. 남원의 농민군 3천여 명은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진주병영의 지원으로 군세를 강화한 박봉양은 11월 25일 운봉을 출발하여 반암방, 원촌(院村)에 진을 치고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농민군의 기습을 받게 되자 28일 남원의 네 성문을 포위하고 공격을 서둘렀다. 민보군은 남문을 주공격 목표로 삼았다.

민보군은 성 주변에 섶을 쌓아 불을 붙였고 이어 대나무 사다리를 엮어 한꺼번에 올라 방포하였다. 농민군은 밤이 깊었을 적에 동, 서, 남 세 문이 불길에 싸이자 북문을 열고 달아났다. 입성한 박봉양은 수백명을 베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리하여 순천, 하동 방면의 길이 막혀 지리산 남 북의 농민군은 서로 제휴하는 데 실패했다.

지리산 남부 농민군

순천에서 진주를 잇는 갑오동학농민혁명의 과정은 이와는 약간 달랐다. 진주에서는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직후 4월부터 동학도 중심의 농민들이 소규모로 봉기했고 진주병영에서는 이곳 농민군 30여 명을 잡아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하였다. 그 후 지금의 서부경남지역은 농민집강소가 전라도, 충청도에서 시행될 무렵, 전라도 농민군을 끌어들여 이 지역에도 설치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1894년 7월 광양의 농민군이 하동세력과 힘을 합해 하동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집강의 일을 보자, 화개동 중심의 민포군(民砲軍)들이 불시에 이들을 습격하여 광양으로 쫓아냈다. 전라도 금구 출신 김인배는 6월에 농민군을 이끌고 순천에 내려와 영남, 호남의 연계작전을 모색하면서 광양, 하동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는 순천의 농민군과 함께 하동을 9월 1일 공격하여 승리하고 도소를 재설치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진주의 농민군이 크게 고무되어 다시 움직였다.

이때 김인배는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의 이름을 내걸고 진주로 진출하면서 남해, 사천, 곤양, 고성 등지의 관아를 접수했다. 9월 14일 진주 농민군이 목사를 굴복시켰고 17일 김인배의 농민군이 들이닥치자, 목사 유석과 병사 민준호가 마중을 나와 항복했다. 진주병영을 무혈점령한 것이다.

김인배는 진주병영을 점령한 지 1주일 만에 그곳 출신 정운승에게 맡기고 주변고을을 석권했다. 이때 경상감영의 판관 지석영과 함께 일본군은 부산에서 일본상선 2척과 화륜선 1척에 배꾼, 관군 그리고 일본군이 새로이 모집한 조선병 260여 명을 나누어 태우고 마산을 거쳐 진주로 향했다. 이즈음 진주의 농민군은 진주 백목리에 모여 있었다. 김인배 등이 이끄는 농민군은 진양군 수곡에 집결해 있다가 고성당산으로 옮겼다.

10월 13일 농민군 5천여 명은 일본군 170여 명과 관군 지원부대와 전투를 벌여 패전하고 흩어졌다. 그러나 농민군의 활동은 쉽게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창궐했다. 심지어 사천, 남해, 단성, 적량의 군기를 깡그리 빼앗아 갔고 그들이 지나는 동네는 텅텅 비다시피 했다. 영남감영에서는 "저들이 믿는 것은 지리산 골짜기이다. 만약 군대를 파견치 않고 또 일본군을 하동, 진주, 단성, 곤양 등지에 주둔케 하지 않으면 반드시 저 무리들이 다시 유린할 것이다"라고 보고할 정도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을 추격하여 하동으로 들어갔고 김인배의 농민군은 다시 순천, 광양의 세력을 규합하여 하동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김인배는 잔여 농민세력과 승주 선암사에 근거를 두고 있던 농민군을 규합해 여수 좌수영 공격에 세 차례나 나섰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지리산 남북의 농민군은 두 지역에서의 활동을 멈추었다. 이 두 지역은 후방의 방비뿐만 아니라 주력 농민군을 지원하는 주요 요충지였다. 이 두 곳이 차단되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점은 지리산 일대 농민군의 힘을 반감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농민전쟁의 전개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강원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흐름

           강원도 홍천 평창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강원도 지방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갑오동학농민혁명보다 30여 년 앞서 1862년에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72개 고을에서 농민들이 치열하게 반 봉건 농민항쟁을 일으켰을 때 강원도에서는 농민항쟁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채 잠잠했다.

그런데 개항 이후 사회모순이 깊어지면서 강원도에서도 농민항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869년 3월부터는 2세 교주 최시형이 강원도에도 동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동학이 전파되고 항쟁의 전통이 쌓이면서 고립 분산되어 있던 강원도 농민들은 조직으로 묶이기 시작하였다.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에 강원도에서도 관동대접주 이원팔, 홍천대접주 차기석,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1894년 전라도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제1차 농민전쟁이 전개될 때 강원도에서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음력 9월에 접어들면서 들판에서 타오른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강원도 산골까지 치붙기 시작하였다. 강원도 갑오동학농민혁명은 크게 두 세력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나는 정선, 평창, 영월, 원주 세력이었다. 이들은 충청도 제천, 청주세력과 연계하여 강원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연합세력이다.

다른 하나는 차기석을 중심으로 홍천군 일대에서 활동한 중부내륙 세력이었다. 남부 연합 세력은 세를 모아 9월 4일 대관령(정선 삽당령?)을 넘어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때 관아는 부사가 자리를 비워 공관 상태였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가혹한 세금을 감면토록 하고 악독한 지주들의 땅문서를 빼앗았다. 수탈에 앞장 섰던 이서(吏書)들을 잡아 가두고 억울한 옥사도 스스로 해결해 나갔다.

관아의 동쪽 문에는 "삼정의 폐단을 뜯어고치고 보국안민을 이룩한다"는 방문을 내걸었다. 농민군은 관아의 일이 자리가 잡히자 2,3일 뒤 경포대 옆 선교의 이회원 집을 공격하려고 계획하였다. 강릉의 부호지주요 유림세력의 대표격이었던 이회원은 교활한 술수로 농민군을 안심시킨 뒤 민보군을 조직하여 기습으로 농민군이 점령하였던 강릉 관아를 탈취했다.

평창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다시 강릉 관아를 점령할 기회를 엿보면서 세를 모아 나갔다. 한편 중부 내륙지방 차기석의 지휘 아래 있던 농민군은 10월 1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동창(東倉)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10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보수 지배세력은 농민군에 대해 적극 반격을 가했다. 홍천과 가까이 있는 경기도 지평의 감역 맹영재는 포군을 이끌고 홍천의 농민군을 향해 진격해 왔다. 이에 맞서 농민군은 10월 21일 맹영재 부대와 장야평(장평)에서 전투를 벌였다. 서석으로 후퇴한 농민군은 풍암리 구릉 위에 진을 쳤다.

다음날 10월 22일 서석에 집결한 농민군은 횡성현감 유동근이 이끌고 온 관군과 맹영재가 이끌고 온 민보군에 맞서 800여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는 처절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강릉부 중군 이진석과 전찰방 이영찬은 150여 명의 군정을 이끌고 정선을 거쳐 평창으로 출발하였다. 봉평과 내면 일대의 농민군이 이들의 목표였다. 11월 3일에는 일본군 2개 중대가 평창의 농민군을 진압하러 기어내려왔다. 춘천의 순중군(巡中軍)도 파견되었다. 그때 농민군은 정선에 3천여 명, 평창에 1천여 명이 집결하여 강릉부로 향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1월 이후 보수지배세력과 침략외세 일본군에 맞선 농민군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은 평창, 정선 일대와 봉평, 내면 쪽에서 전개되었다.

11월 5일에는 평창, 후평에 집결한 농민군 수천명이 관군과 크게 붙었다. 접주 이문보를 비롯하여 1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평창 쪽의 농민군은 정선을 거쳐 삼척 쪽으로 후퇴하였다. 차기석 부대의 근거지인 내면 쪽 전투도 치열하였다. 11월 4일 봉평의 포군대장 강위서가 내면 창촌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산꼭대기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이 밤중에 그들을 기습하여 3명을 사살하였다. 패배한 강위서의 포군부대는 8명의 부상자를 이끌고 내면에서 후퇴했다.

11월 9일부터 14일에 걸쳐 내면 창촌, 원당, 청도, 약수포에서 강원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농민군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요새로 삼아 오대산, 계방산 기슭의 산하를 피로 물들이며 치열하게 유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연합전술을 펴면서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들어온 관군에게 강릉, 양양, 원주, 횡성, 홍천의 관동대접주 차기석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포살당함에 따라 강원도 지방의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일단 투쟁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흰 눈이 온 산하와 농민군이 흘린 핏자국을 하얗게 뒤덮던 음력 11월 중하순 무렵이었다.

그러나 반봉건 반침략이라는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강원도 농민들의 투쟁은 여기서 완전히 막을 내리고 만 것은 아니었다. 눈이 녹아 계곡의 물을 불리고 새싹이 움트듯이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핏자국 위로 다시 항일의병전쟁의 싹이 자라났다.

자료제공 : 박준성

경상도 북서부지역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흐름

           당시 영남 북서부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당시 상주 일대 지도.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지도

1894년 봄과 가을, 농민군이 사회개혁과 외세배척의 구호를 내세우고 무장 봉기함으로써 시작된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는 전라도와 충청도였다. 경상도를 비롯한 강원도와 경기도 그리고 황해도 지역은 그 중심부가 아니었지만 일부 군현의 상황은 전라, 충청도와 다르지 않았다.

동학 조직을 거점으로 결집한 농민들은 각 군현에서 지방 관아의 지나친 조세 수탈을 막고 무단 토호행위를 자행한 불량양반들을 징치하였으며, 일본군과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경상도에서 동학 교세가 급격히 증대되는 시기는 1894년 3월경이다.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전라도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감영군까지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상도 각 지역의 동학도들은 이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몰래 숨어 포교해 오던 동학도들은 이제 공공연히 드러내어 각처에 있는 근거지에 접(接)을 설치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 특히 동학교의 교세가 강력했던 곳은 소백산맥에 인접한 북서부 각 군현과 지리산에 연결되는 남서부 여러 군현이었다. 이 지역은 1860년대 초부터 2세 교주 최시형에 의해 포교가 시작되었던 근거지였다.

따라서 1894년 당시 이 지역에서 동학조직을 관장하던 핵심 교도들은 입도한 지 수십 년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래된 교도들은 탄압을 피하여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지하에 잠적해서 교세를 확대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세력을 배경으로 동학 조직은 각 군현을 연결시키는 조직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1894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경상도 지역의 동학은 그 세력을 한층 더 확대시키게 되었다. 양반지배층을 압도한 곳에선 농민군이 양반과 향리들의 잘못된 관행을 시정하기 시작했다. 공권력을 행사하는 관아와 향리에게 대항하는 과정에서 점차 무장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국가의 체제를 개혁하는 농민군대, 즉 전근대 사회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나가는 농민군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예천 양반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송사는 모두 소야(동학농민군 본부)로 돌아가고 관부는 적막할 뿐이다. 또 동도 검찰관 장복원이란 자는 각 읍을 순행하면서 폭정을 금한다고 칭하고 도리어 탐학(貪虐)이 많다. 행리와 수행원은 감사를 본떠 이르는 곳마다 호랑이 같은 풍위이고 소송자가 저자와 같이 모인다."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추진하던 기구는 도소(都所) 또는 접소(接所)로 불렸는데, 집강소라고 부르던 지역도 있었다. 김산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1894년 8월 초 김산군의 김천 장터에 도소를 설치한 이 지역의 농민군 지도자 편보언(片甫彦)은 이를 도집강이라 칭하고 입도자를 늘리며 개혁을 추진하는 데 힘썼다.

김산에서 활동한 농민군 중에는 전라도에서 폐정 개혁을 주도하던 전봉준 장군과 이념을 같이하여 활동한 사람도 있었다. 전천순(全千順)과 김원창(金元昌)이 그들이다. 경상도 지역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개혁을 수행한 것은 전라도의 남접농민군과 기맥을 통하고 협력하던 이들이 일정한 역할을 한 때문일 수 있다.

경상도의 농민군이 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장을 강화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6월 말 이후이다. 더구나 우리 땅에서 청나라 군대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크게 분격시켰다. 민족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농민군은 무력으로서 이 땅에서 일본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농민군은 무력을 강화해야 했다. 무력 강화의 방법은 더욱 많은 사람을 가담시켜서 군세를 키우고, 민간과 관아에 있는 총포, 창, 칼 등 무기를 최대한 모으며, 부농과 지주층의 돈과 재물을 헌납받아 군량과 전쟁경비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농민들 스스로 합의해서 진행해 간 대일전쟁 준비는 동학 교단의 지침 없이 말단 농민군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경상도의 농민군에게는 바로 눈앞에 공격할 목표물이 있었다. 일본군은 청나라와 전쟁하기 위해서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요충지 50리마다 병참선을 만들었다. 그 지역은 부산, 구포, 물금, 삼량, 밀양, 청도, 대구, 다부역, 해평, 낙동, 태봉, 문경, 안보, 충주, 하담, 장호원, 이천, 곤지암, 조현, 송파진, 서울 등지이다. 경상도 북서부에는 선산의 해평, 상주의 낙동, 함창의 태봉에 병참 기지가 설치되었다. 농민군은 이 기지를 축출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무력 강화를 위해 진력하던 농민군은 전과 달리 커다란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농민군은 부농과 지주에게 강요해서 혁명경비를 거두어 들였는데 그 과정에서 곤욕을 치르던 지배층이 자위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보수세력이 민보군을 결성해서 농민군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세력의 중심은 신분 면에서 볼 때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위협을 받던 양반과 향리층이었고, 경제면에서 볼 때 스스로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돈과 곡식을 동학농민군에게 빼앗겨 왔던 부농과 지주층이었다.

양반 위주의 향촌사외의 질서를 지켜야 했던 지방관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다. 안의와 거창에서는 선정을 베풀어서 민심을 얻은 현감 조원식과 부사 정관섭이 앞장 서서 결속시킨 관포군과 민보군이 경내의 농민군을 제압했다. 안동과 의성에서는 전직관리와 유생들이 민보군을 결성해서 읍내를 지켰는데, 이름높은 유생 곽종석은 이때 안동에 있으면서 민보군 조직인 도총소(都摠所)에 참여했다.

예천에서는 향리층이 주도해서 농민군이 사용하던 이름 그대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이 읍내를 침범하지 못하게 막았다. 예천군의 집강소에는 일부 양반도 참여했지만 집강 등 민보군을 지위하는 직임은 향리층이 독점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평소에 양반층을 능가하던 향리 성씨의 위력이 나타난 것이다.

서로 적대하는 군사력이 같은 지역에 형성된 결과, 각지에서는 농민군과 민보군 사이에 긴장된 대치관계가 형성되어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발생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사건이 예천과 성주에서 벌어졌다. 두 지역의 민보군이 농민군을 체포해서 화적 혐의로 처형한 것이다. 예천에서는 잡혀온 농민군 11명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집강소 두령들을 협박하여 한천 모래밭에 끌고가 생매장해 버렸다. 예천의 농민군은 대일전쟁에 민보군이 함께 나서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으나 이 같은 사건으로 인해 논의조차 하기 어려웠다.

예천의 농민군은 읍내에 압력을 가했다. 외지와 연결하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한 달 이상 길을 막아 식량과 땔감을 들여오지 못하도록 했다. 교통이 막히자 곧 읍민은 기아 상태에 들어갔고, 군수도 여러 날을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언제 동학농민군이 읍내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빨리 일전을 겨루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보수집강소는 농민군 집결지인 화지(花枝)에 300여 명의 민보군을 파견해서 도전하였다.이 계략은 성공하였다. 수접주 최맹순(崔孟淳)은 대노하여 화지와 금당실에 예천 부근에 있는 농민군 각조직의 정예군을 집결시켰다. 화지는 읍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었고, 금당실은 북쪽의 큰 마을이었다. 함양 박씨의 세거지인 금당실은 8월 초에 농민군에 점거당해서 그 근거지로 변했다.

예천의 농민군은 기세도 돋우고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8월 26일 인근 용궁현의 관아를 점거해서 무기를 탈취해 갔다. 마침내 8월 28일 화지와 금당실의 농민군이 서로 시간을 약속하고 읍내 공격에 나섬으로써 쌍방 대규모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한천의 긴 제방 밑 현산에 배치된 민보군과 유정숲에서 제방쪽으로 들어오는 화지 농민군 간의 전투는 오후 이른 시간에 시작되어 어두워질 때까지 어느 한쪽도 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러나 협공을 약속한 금당실 농민군은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았다.

금당실 농민군은 너무 늦게 도착하였다. 민보군이 화지 농민군을 물리치고 나서 쉬고 있을 때 그제서야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서북쪽에서 몰려왔다. 이들은 미리 풀숲에 숨어 있다가 기습을 가해 온 민보군에게 제대로 저항도 못해 보고 많은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기에 급급했다.

이 예천읍 공방전에 쌍방이 동원한 병력은 대규모였다. 방어군은 민보군 1천 5백여 명과 읍내 거주인 대부분이 참가했고, 조정에 보고된 공격 농민군 수는 4천~5천 명이었다. 모두 6천~7천 명이 대규모의 전투를 벌인 것이다.

성주는 9월 초 농민군에 의해 호된 보복을 받았다. 주변 여러 지역의 농민군 조직이 합세하여 관아를 점거한 다음 민가에 불을 질렀는데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큰 화재로 번져서 읍내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다. 남부지역의 하동도 농민군이 읍내를 불살라 하늘이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동학의 북접교단이 남접 농민군의 가을 봉기에 호응하여 기포를 결정한 것은 9월 18일이었다. 영남 북서부의 대읍 상주와 선산은 이 지역 농민군의 일차 공격 목표가 되었다. 대읍을 점거함으로써 북서부 각 군현의 관부와 양반층을 압도하고 동시에 낙동과 해평의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수천의 세력을 형성한 농민군은 9월 22일경 상주와 선산 읍내로 밀고 들어가 쉽게 관아를 장악했다. 상주와 선산 읍성이 점령되자 낙동과 해평의 일본군은 크나큰 위협을 받았다.

농민군의 무장봉기 목표는 일본군의 축출이었고, 이는 계획적인 침략에 나선 일본군이 잘 아는 바였다. 농민군이 교통의 요지에 세운 병참부를 축출하면 큰 손실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며칠 뒤 읍성 기습에 나서게 된다. 9월 28일 오전 10시경 일본군이 기습을 가해 왔다. 우세한 화력의 신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오르며 느닷없이 기습하자 농민군은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상주와 선산의 읍성에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에 의해 읍성이 회복된 후 상주와 선산에는 황급히 민보군이 결성되었다. 그 중심은 향리들이었다. 이들은 예천의 경우를 선례로 삼아 상주와 선산의 민보군을 만들면서 집강소라는 말을 사용했다. 농민군의 집강소와 이름은 같지만 보수 성향을 갖는 향리층의 집강소가 이 시기 예천에 이어 상주와 선산에도 만들어진 것이다.

상주와 선산의 민보군은 예천과 같이 향리층이 주도했다. 이 지역의 군권을 향리들이 장악한 것이다. 양반들은 향리들의 대두를 불안하게 지켜볼 뿐 힘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경상도에서 농민군 세력이 관과 보수지배층을 압도한 군현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북서부의 예천, 봉화, 용궁, 문경, 함창, 상주, 개령, 지례, 성주, 김산과 남서부의 함양, 하동, 곤양, 사천, 고성, 단성, 진주, 남해 등지가 농민군의 세력이 강력한 곳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충청도와 전라도 농민군의 지원도 받았다.

전라도 농민군의 가을 봉기에 호응하여 기포한 경상도 북서부의 농민군은 관군, 일본군, 민보군의 연합세력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고 특히 일본군의 신식무기 위력에 밀려 패배하고 말았다. 패산한 농민군은 충청도의 북접거점으로 들어가 합류했다. 황간과 영동 여러 마을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던 북접 농민군이 통령 손병희의 지휘 아래 논산으로 행군하여 전봉준 장군의 남접군과 힘을 합칠 때 이들도 가담하였다.

남북접 연합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공격에 나섰다가 실패하여 결국 흩어지고 만다. 북접 농민군은 추적하는 일본군과 관군을 피하기 위해 남하를 거듭하여 순창까지 후퇴하였다. 그리고 험준한 산길로 북상을 시도했다.

장수와 무주를 거쳐 영동에 들어간 농민군은 용산 장터에서 청주병대와 접전하였다. 장터의 뒷산은 암룡과 수룡 두 마리가 웅크린 형세였다. 수룡 형상의 산봉우리에는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고, 건너편 천관산 쪽에서는 관군이 공격해 들어왔다. 하지만 월등히 수가 많은 농민군에게 관군이 밀려나서 보은으로 가는 길이 뚫렸다.

종착지로 생각한 장내리의 동학 도소는 이미 경군이 내려와 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려 머물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북상하여 보은읍 인근의 북실 마을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본군과 상주 소모영의 유격병대가 기습해 왔다. 추운 겨울에 먼 길을 걸어 오느라고 극도로 피로가 쌓여 무기력해진 동학농민군은 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 골짜기 안에 숨어 있던 농민군은 산등성이에 올라와 아래를 보고 총을 쏘는 일본군과 유격병대에게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다.

유격장 김석중은 "학살된 사람이 2천2백여 명이고 야간전투에 죽은 사람이 3백93명"이라고 기록했다. 일본군은 학살한 만행을 감추고 3백여 명의 농민군 전사자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전투 현장에서 죽은 사람보다 항거하지 못하는 사람을 살육한 수가 무려 5배가 훨씬 넘었다. 모두 2천6백 명에 달하는 농민군이 자그마한 야산 곳곳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겨우 살아 남아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로 흩어진 사람들은 폭설이 내린 험준한 소백산맥 줄기를 타고 들어갔다. 이들은 험준한 속리산, 팔음산, 백화산 등지에서 한겨울 동안 모진 고생을 했다. 관군과 일본군은 계속해서 동학교도들을 뒤쫓았다. 체포된 즉시 처형된 사람도 있고,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잡힌 사람은 감영까지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각 군현에서 동학농민군을 끝까지 추적해서 철저하게 진압한 것은 보수지배층이 결성한 민보군이었다.

자료제공 : 신영우

출전 : 정읍갑오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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