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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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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110      
[현대] 대한민국7-사회 (두산)
대한민국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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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ll. 사회

1. 사회계층

농업중심의 전통적인 한국사회는 해방이후 특히 1960년대에 들어와 자본제적 생산양식을 수용하고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직업분화와 경제활동의 중심을 비농업분야로 하며,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을 자본가, 경영자, 노동자라는 근대적인 계층, 계급으로 변화를 가져온다.

또한 합리성과 효율성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사회전반에 관료제화가 확대하여 새로운 중간층과 도시자영업자들을 양산한다. 한국사회도 지난 30여년 동안 산업사회에 독특한 사회적 불평등현상인 계층, 계급의 구조화가 진행되어 왔다.

한국사회의 계층, 계급구조를 인구센서스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한국사회에 자본주의적 계급분화가 얼마나 빨리 진행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양적 구성의 변화는 농어민층의 급격한 감소와 이들의 노동계급, 비영농자영층, 신증간층으로의 변화가 골격을 이룬다.

농어민층의 급격한 감소와 노동자계급의 급격한 증가는 한편에서 한국사회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 속에 필요한 노동력의 대량창출에서 기인한다. 자본가계급도 일정한 성장을 보이는데, 일제시대 자본을 형성하지 못했던 자본가계급은 해방후 일제하의 귀속재산 불하처리 과정에서 자본가계급으로 형성되고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을 축적하여 핵심 지배계층이 된다.

한편 해방이후 한국사회의 시급한 과제였던 반봉건제의 해체는 농지개혁을 통해 이루어진다. 농지개혁은 1949년에 시작되어 지지부진하다 1957년에 일단락 되었는데, 농지개혁이 농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고 그 내용이 유상분배 원칙을 이루어져 대다수 농민들이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자작겸소작의 영세농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950년대에 이루어진 일제하 귀속재산과 농지개혁등의 반봉건제의 해소와 한국자본주의의 재편성을 통해 한국사회는 근대적 계층, 계급구조가 정착되어간다. 귀속재산으로 형성된 산업자본 형태의 자본가계급은 국가자본과 미국원조로 이루어진 대부자본 형태의 국가자본이 사적자본으로의 전화를 통해 사적 독점자본으로 되어가면서 독점자본가계급을 형성한다.

한편 1950년대말에는 노동인구가 10%선에 육박할 정도로 일정한 양적 성장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1950년대 경제구조의 취약성은 농촌과 도시에 방대한 산업예비군을 누적시켰다. 국가주도의 축척과정에서 독점자본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1970년대 초를 거치면서 국민경제에 대해 배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재벌의 틀을 갖추게 된다.

반면 빈곤과 잠재적 실업상태에 있던 대다수의 농민층은 한국사회의 공업화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도시로 이주하여 노동자계급으로 되거나 또는 구중간계급인 비영농자영층, 도시빈민으로 전화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 산업노동자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 노동인구의 24.1%를 차지한 반면, 농어민총은 1960년대의 노동인구의 2/3에서 1970년대에 1/2로 저하한다. 이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의 산업예비군들도 비율에 있어서는 일정한 저하를 보이며, 신, 구 중간제계층은 지속적인 성장을 한다. 1970년대에 고도축적을 통하여 노동자계급은 1985년에는 노동인구 45%를 점하게 되어 전체 노동인구의 가장 큰 범주가 되며, 농어민층은 1/4수준으로 축소된다. 화이트칼라층의 확대에 따른 신중간제계층도 지속적인 성장을 하여 8% 수준을 상회하고, 도시의 소브르주아적 및 반프롤레타리아적 자영업자도 꾸준히 증가하여 21.6%를 차지하는데 특히 소부르주아적 부분이 빠른 성장을 보인다. 현재의 계급구조의 기본형태는 1970년대 후반에 갖춰졌다.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의 정착과 이를 통한 계급구조의 형성은 이후 현재까지 연장된다. 그러나 1990년대에 농촌인구의 절대적 감소로 농민층의 이농현상은 감소할 것이며 이에 따른 도시 비영농자영층은 감소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성장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서비스부문의 확대팽창에 따른 서비스부문 노동자의 일정한 성장은 계급구조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1980년대 말까지 비약적으로 성장한 독점자본은 지배력을 더욱 심화시켜 한국사회의 핵심지배계층을 이루었으며, 노동자계급은 인구의 절반에 달하여 크게 성장한 민중운동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말 이후 한국사회는 정보기술의 발전과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새로운 지식산업이 창출되는 반면 기존의 직업은 퇴조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에 중간계층으로 분류되었던 사람들 중에서 테크노크라시로의 이동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비임금근로자인 신중간계층의 증대현상과 임시직과 일용직으로의 사회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정부주도의 근대화정책은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자본주의적인 근대적 계층·계급구조를 정착시켰다. 그러나 정부의 인위적인 산업화추진과 계급구조 형성은 소수 지배계층과 대다수 피지배층간의 계급간 갈등을 심화시키고 국민들간의 위화감을 조성시키기도 하였다. 앞으로의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심화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성장은 사회계급간 갈등의 심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의 제도화 장치뿐 아니라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노동계급을 비롯한 피지배계층에 대한 균형적인 사회정책적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2. 사회보장

현대국가에서 사회정책의 핵심은 방빈(防賓)의 특성이 있는 사회보장에 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이후에 사회복지의 기본적 제도인 사회보장에 관한 입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회보장은 주로 사회보험과 공적부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자의 입법으로는 공무원연금법(1960년), 군인연금법(1963년), 산업재해보험법(1964년), 의료보험법(1977년), 최저임금법(1986년), 국민복지연금법(1989년), 실업보험(1996년) 등이 있고, 후자의 입법에는 군사원호법(1961년), 생활보호법(1962년), 아동복리법(1962년), 재해구호법(1963년), 의료보호법(1977년), 노인복지법(1981년), 아동복지법(1981년), 장애자복지법(1981년), 유아교육진흥법(1982년), 생활보호법을 대체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1999) 등이 있다.

특히 1983년에는 사회복지서비스 각 분야의 전달체계를 합리화·체계화하기 위하여 사회복지사업법(1983년)이 개정되어 사회복지의 새로운 시기를 대비했다. 1960년 1월1일 사회보험방식에 의한 공적연금으로 제도화되어 공무원의 건강진단, 질병, 부상, 폐질, 분만, 퇴직 또는 사망에 대하여 적절한 급여를 실시 경제생활안정과 복리향상에의 기여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그 적용대상을 중사 이상의 범위를 직업군인에 한정하고 있는 군인연금제도가 1963년부터 실시되었으며 1974년부터는 사립학교교원연금제도가 실시되었다. 또한 산재보험의 경우, 입법 다음해인 1964년부터 실시하여 초기에는 500인 이상의 사업장에 국한하였다가 점차 그 적용범위를 확대하여 적용 사업장이 1982년에는 7만 4200개, 그리고 1988년까지는 16개업종의 5인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적용하였다.

1977년 의료보험을 시작으로 1979년부터 공무원 및 사립학교교직원의료보험이 실시되었으며, 1980년에는 직업군인과 그 가족에도 적용이 확대되었고, 1987년에는 전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했으며, 1988년에는 의료보험제도가 농어민에까지 확대되었고, 1989년에는 도시자영업자에게도 의료보험이 실시되었다. 의료보험 실시 12년 만에 전국민의료보험을 달성했다.

1998년 공무원 및 사립학교교직원의료보험관리공단과 227개 지역조합을 통합하고 2000년에 139개 직장조합을 통합하여 국민건강보험공단을 만들었다. 1998년에는 의료보험적용대상 인구는 전국민의 96.4%인 4441만 명이고 공적부조제도인 의료보험대상자는 3.6%인 170만 명이 적용을 받았으며, 2000년의 의료보험적용대상 인구는 4589만 5749명이다. 또한 30여 년 동안의 경제성장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억눌려왔던 근로자들의 권리향상을 위한 노동법이나 각종법률 등은 아직까지 사회복지의 향상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전체 사회보장비도 70% 이상이 사회보험이고 공적부조는 20%, 사회복지서비스는 3% 정도로 제도간 불균형과 함께 지나치게 수익자부담원칙을 고수하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1960년대부터 실시된 한국의 사회복지를 보면 초기에는 공무원이나 군인 등의 일부 한정된 계층을 중심으로 이들의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 선별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국민경제의 향상과 사회 각계각층의 요구증대로 그 범위와 내용이 점차 확대되었으며, 특히 1987년 사회민주화 운동을 통한 삶의 질의 향상에 대한 요구는 성장위주의 국가발전에서 국민의 복지를 확층하는 균형적인 발전을 추구토록 하여, 1980년대 후반부터 다양하고 실질적인 사회보장이 점차확대 실시되고 있는 추세이다.

국민연금제도는 노령·장애·사망 등으로 소득능력에 상실이 있는 동안 보험료를 납부했다가 급여사유가 발생했을 때 본인 또는 그 가족이 일정액의 연금을 지급받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제도로 1999년 4월부터는 도시지역 자영자에게까지 확대 시행되고 있다. 1999년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 수는 1074만 9322명이다.

지난 30년간 경제성장위주의 개발정책으로 빈부간 불균등이 심화되었고, 저임금과 인플레이션으로 근로자 및 농어민 대다수의 국민이 사회복지에서 소외되어 왔다. 현재 한국의 사회보장에 투입되는 비용은 대략 GNP의 5.2%(1995) 수준에 불과하여 서구 복지국가라고 볼 수 있는 나라들의 30~40% 수준과 비교할 때 매우 낮은 수준인 것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상대적인 빈곤과 질병 등의 생활고를 겪는 상태가 존속하기 때문에 복지사회의 건설을 위해서는 소외된 계층을 포함하는 전국민대상을 포용하는 과감한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이 요구된다.

3. 노동문제

노동이라는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 어떤 사회관계 속에서 어떤 사회적 형태로 행해지는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나, 현대사회의 시대적 형태는 자본주의하의 임금노동,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판매하여 그 댓가로 임금을 획득하고 그것에 의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의 담당자 문제가 노동문제로서 주요한 사회문제화가 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노동(賃勞動)은 노예나 농노와는 달리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가 사회적으로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 있고 자본측은 노동력을 계약에 의해 생산의 한 요소로서 고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노동문제는 임노동의 재생산과정에서 자본과 임노동 자체의 존속 전개에 대한 장애로서 발생되고 진전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노동의 재생산과정의 일환으로서 그것과의 직접적인 관련성 위에서만 성립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문제는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이윤을 둘러싼 문제가 기본이 되며, 나아가 사회,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이해의 갈등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임노동의 전체조건이라 할 수 있은 자유노동자층의 형성은 자본축척과정과 맥락을 함께 한다. 한국의 경우 그 시원은 자본주의 맹아기인 조선후기로 소급할 수 있으나. 봉건적 신분관계를 벗어난 자유노동자의 집단이 가시화된 것은 부두노동이나 철도노동 등에 임노동자가 증가한 개항기(1876~1910)무렵이라 할 수있다. 당시 자유노동자층은 전체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1910~1918)에 의한 영세농이나 소작농의 농지상실과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의한 식민지 공업화가 촉진되면서 양적인 팽창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해방 후 1950년대까지도 농지개혁을 통한 잠재적 실업상태의 광대한 농민층은 단지 일부만이 도시로 유입되어 임노동자화 했을 뿐 전체인구의 70% 이상이 잠재실업의 형태로 농촌에 잔존하여 임노동자화 되지 못하였다. 1960년대 이후 수출중심의 대외의존적인 경제개발과 공업화가 실시되면서 한국에 본격적인 노동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 이후 수출품 생산을 위한 외형적 공업화의 추진을 통한 자본주의 세계 체제로 편입된 한국은 주변부 자본주의 축척과정을 밟아가게 되며, 이로부터 임노동의 양적, 질적인 성장과 함께 노동문제의 기본율이 형성된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81만 명, 1971년부터 1980년까지 190만 명, 1981년부터 1985년까지 101만 명 등 총 380만 명 이상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어 일부는 공식부문의 임노동자로 고용되고 나머지 일부는 소생산자나 잡업중심화에 따라 노동의 사회화가 진전되었다.

노동의 사회화란 상호 고립적으로 영위되어 온 노동이 자본의 휘하에 조직되는 현상을 지칭하는데, 결국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전일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1970년대를 거치면서 뚜렷한 위치를 확보한 독점자본들은 중화학공업의 추진에 따른 외자도입과 수출증대를 축으로 규모의 경제를 강조하면서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자본의 편증과 거대화를 촉진하며 독점을 실화시켜왔다.

30대재벌의 평균 계열기업수가 1970년에 4.2개, 1982년 13.4개, 그리고 1989년에는 17.1개, 1997년 52개, 1999년 46개로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출하액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7년 43.1%에서 1987년 37.3%, 1993년 38.1%, 1995년 40.7%로, 수출은 1983년 38.5%에서 1985년 41.3%로 증가하였고, 고용면에서도 1977년의 20.5%에서 1985년 17.9%로 약간 감소하였으나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한편 임노동층의 노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 약 15%에서 1970년 30%, 1980년 46%, 그리고 1985년에는 53%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근래에는 기존의 30대그룹 가운데 절반 가량이 부도상태이거나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가 중견그룹은 집단적으로 몰락하였고 5대그룹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국의 임노동의 역사와 현황은 자본축척의 일반법칙을 기초로 하되 거기에 경제외적 주변적인 요소까지 결합된 특수성을 가지고 전개되어 왔다. 자본측은 노동과정에서 경공업이 중심을 이루던 1960년대 중엽까지는 직접통제를,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기술적 통제를 그리고 1980년대 중엽까지는 관료적 통제를 통하여 일방적인 지배력을 행사했으며, 국가의 강력한 행정력과 경찰력 또한 노동과정 외부에서 자본가들의 지배력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엽 이후 1990년대에 들어와 노동자들의 힘의 증대를 통한 조직력적인 대응은 자본가들과 국가의 일방적인 지배관철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노동자들의 요구에 일정한 양보를 하게 하여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생활향상이 진전되었고, 노동통제방식도 강제적인 통제방식보다는 동의에 기초한 이데올로기적이고 헤게모니적인 통제방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한국의 임노동과 자본 및 국가의 관계는 임노동의 절대적인 힘의 미약과 자본 및 국가의 우세 속에 잠재적인 갈등요소가 많다. 따라서 이러한 임노동과 자본간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자본-임노동관계의 실질적인 힘의 균형유지와 노동문제의 제도화가 요청된다.

임금동향을 보면 1998년 월평균 임금총액은 142만 7000원으로 전년대비 2.5% 감소하여 조사가 시작된 1970년 이후 처음으로 감소세를 나타냈다. 이처럼 임금이 감소한 것은 지속되는 경기불황으로 기업의 협약임금인상률이 2.7% 감소했고, 근로시간 단축으로 초과급여가 줄었으며, 상여금 반납 및 삭감 등으로 특별급여의 지급률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2001년 7월 현재 평균임금은 180만 2909원이다.

취업자수는 1997년 2104만 8000명에서 1998년 1992만 6000명으로 112만 5000명이 감소했고 이에 따라 실업자수는 1997년 55만 6000명에서 1998년 146만 3000명으로 실업률은 6.8%에 달하였다. 2001년 9월 현재 취업자수는 2179만 7000명이고 실업자수는 68만 4000명이며 실업률은 3%이다.

4. 노인문제

인구의 고령화에 따른 노인인구의 증가는 현대사회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노인인구의 증가는 세계적인 현상으로서 한국도 해방 이후에 3%대에 머물던 65세 이상의 인구가 1980년대에는 3.8%, 1990년대에는 5.0%, 1995년에는 5.4%, 2000년에는 7.3%로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노인인구의 증가는 출산율의 감소와 보건위생의 발달, 사망률의 감소 등과 밀접히 관련되며 2010년에는 전체 인구의 10%선에 육박할 전망이다. 한편 노인문제의 핵심은 빈곤, 질병, 고독이라 하겠는데 이는 급속한 사회변동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핵가족화, 평균수명의 연장, 도시취업인구 증가로 인한 노부모와의 별거, 정년퇴직으로 인한 생활수단의 상실 등의 생활리듬의 변화와 직결된다. 한국인의 핵가족률은 1964년의 64.7%에서 1975년 67.7%, 1985년 68.8%, 2000년 82%로 증가하였고, 평균수명은 1960년 55.3세에서 1970년 63.2세, 1980년 65.8세, 그리고 1990년에는 71.3세, 2000년에는 74.43세로 길어졌고, 또한 노인독신가구율도 1985년 8.8%에서 1988년에는 12.7%, 2000년에는 16.6%(70세 이상)로 급증하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사회변동은 도시의 문제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농촌의 경우가 더욱 심각하다. 도시는 의료, 오락 등의 문화적 환경조건이 농촌보다 양호하며, 따라서 농촌에 거주하는 노인문제가 보다 심각하다. 1988년의 노인 단독가구는 대도시의 경우 14.7%, 중소도시 17.0%임에 비해 농촌의 경우는 30.9%나 되어 노인 독거에서 볼 수 있는 외롭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 노인이 많다. 전체인구 중 65세 이상의 노인의 거주율도 2000년 11월 현재 18.3%로 시부지역 이상의 도시에 5.6%가, 군부이하의 농촌지역에는 13.5%가 거주하여 농촌에 2배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농촌지역의 노인들은 도시에 취업하고 있는 자식들과 떨어져 고통스러운 농업노동에 종사하며, 충분한 영향과 휴식 및 오락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촌노인들은 이처럼 빈곤과 건강 및 가족간의 유대단절 등의 심리적 고통을 받고 있는 반면, 도시의 노인들은 빈곤, 무력감 등을 경험하고 있다. 2000년에는 전체기구 중 65세 이상 노인의 거주율이 19.4%로 나타났다.

그런데 노인문제의 해결은 노인들의 요구에 기초하여 복지정책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전체노인들 중의 79.2%가 건강악화, 79.5%가 생활비 마련의 어려움, 81%가 배우자의 사망 등을 어려운 문제로 여기는 것을 보아서도 노인문제의 핵심인 질병, 빈곤, 소외문제의 해결이 가장 절실하다. 빈곤과 질병을 위해서 물질적 원조가 필요하고,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서적 원조가 필요하다. 노인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정년의 연장, 연금제도의 확대와 일터의 제공 등 다양한 소득보장정책과 공적부조가 절실하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의료보험의 확대 및 사회 재활 프로그램의 확층 등이 필요하고, 심리적 고독감을 해소하기 위해 노인공동체문화 등을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편, 노인문제의 책임소재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면, 1980년에는 자신 (54.7%), 가정(33.35%), 국가(15.3%)라고 하였으며 1994년의 경우 자신(40.6%), 가정(18.9%), 사회(15.9%), 국가(24.6%)로 나타나 사회 및 국가적 차원의 노인복지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 또한 자식과의 동거희망에 대해서도 1981년의 83.3%에서 1994년에는 36.7%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자녀에 대한 의존보다는 독립적인 노후생활의 영위를 선호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이에 따라 더 이상 노인문제는 가족의 문제가 아닌 국가, 사회적 차원의 문제임이며 이에 대한 국가적인 사회정책적 대처가 시급하다. 그러나 한국은 국가예산대비 노인복지예산이 1988년 0.02%에서 1990년 0.17%, 그리고 1994년에는 0.11%, 2001년에는 0.26%로 아주 미미한 실정이다.

사회변동과 함께 노인들은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사적 부양제도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고, 국가나 사회에 의한 사회적 노인 복지기구의 확충과 공공복지의 확대가 필수적인 상황에서 국가의 제도적인 대책과 재원확보가 절실히 요구된다. 복지국가의 기본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최저생활의 보장과 기회균등의 제공이 노인들에게 일차적으로 구현되도록 해야하며, 이를 통한 노후생활이 안정화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매스커뮤니케이션

단일 언어의 사용과 비교적 높은 문자 보급률 및 교육수준의 향상 등으로 한국의 언론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빠른 성장을 보였다. 한국 헌법은 건국 후 현재까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21조 1항)고 규정하는 한편, “언론·출판은 타인의 명예와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

언론·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할 때에는 피해자는 이에 대한 피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21조 4항)고 하여 언론의 자유와 함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법률에 근거한 언론단체로는 언론중재위원회(言論仲裁委員會)·방송위원회(放送委員會)·종합유선방송위원회(綜合有線放送委員會)·한국방송광고공사(韓國放送廣告公社) 등이 있다. 그 밖에 주요 언론단체는 언론연구원(言論硏究院)·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全國言論勞動組合聯盟)·신문협회(新聞協會)·편집인협회(編輯人協會)·기자협회(記者協會)·방송협회(放送協會), 출판문화협회(出版文化協會)·잡지협회(雜誌協會) 등이 있으며, 언론학회(言論學會)를 비롯하여 다양한 직능별 연구 또는 친목단체들도 있다. 서울과 지방의 각 주요대학에는 언론관련 학과가 설치되어 학부와 석·박사학위가 개설되어 있다.

(1) 신문

2001년 8월 현재 일간신문·통신등록 현황을 보면 총122종으로 일반신문 82종, 특수신문 33종, 외국어신문 6종, 통신사 1종이 있다. 일반신문 중 20사가 서울에 몰려 있으며 지방의 각 도에서 2종 이상의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다. 통신사는 전국의 신문사가 공동으로 출자하여 설립한 연합뉴스가 있다. 북한 뉴스를 전문으로 취급하던 내외통신(內外通信)은 1998년 연합뉴스에 흡수·통합되었다. 연합뉴스는 세계 각 나라의 주요 통신사와 제휴하여 외국의 뉴스를 국내에 공급하는 한편, 국내뉴스를 해외로도 송신하고 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신문이 발간된 것은 정부기관인 박문국(博文局)이 1883년에 창간한 《한성순보(漢城旬報)》였다. 그후에 창간된 여러 신문들은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국민계몽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구국(救國) 항일투쟁을, 8·15광복 후에는 반공·반독재·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정부의 언론통제정책으로 발행의 자유가 제한되고 새 신문의 창간이 봉쇄되었으며, 한국신문협회를 중심으로 지면과 가격의 카르텔을 실시하여, 증면과 가격을 신문의 자율에 맡기지 않고 일률적으로 통제하였다. 또한 전국의 언론인은 정부가 발급하는 보도증(프레스카드)을 소지하도록 하였다. 더구나 1980년 전두환정부에 의한 대규모 언론통폐합으로 신문·방송·잡지 등의 언론기관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그후 1987년의 6·29선언 이후에 1988년 노태우정부가 출범하면서 정기간행물의 등록제한을 철폐하여 여러 종류의 신문이 일시에 출현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대부분의 일간지가 조간으로 발행되는 추세이다.

전두환정부 이후의 또 다른 특징은 증면(增面) 경쟁이다. 6·29선언 당시에는 1일 12면의 발행에 머물렀는데 그후 16면(1988.4)으로 늘었다가 20면(1989.10). 24면(1990.7), 32면(1993.4)으로 계속 증가하였다. 1994년부터는 증면경쟁이 더욱 치열해져서 지면을 종합뉴스·경제·스포츠 등으로 부문별 편집하면서 2001년 현재는 1일 52면을 발행하는 신문도 있다. 언론기업이 대규모화하는 동안 전반적인 한국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한국인의 해외진출이 늘어나자 1980년대에는 일간지의 해외판 현지발행도 본격화되었다. 일간지의 해외판 발행은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1999년 3월 현재 9개 신문이 총25개를 발행하며, 가장 많은 해외판을 발행하는 《한국일보》는 7개이며, 《조선일보》가 5개, 《중앙일보》가 4개, 《동아일보》가 3개, 《카톨릭신문》이 2씩이다. 그밖에 《국민일보》, 《세계일보》, 《한국경제신문》, 《평화신문》이 1개씩 발행한다.

(2) 방송

한국의 방송은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이 병존하고 있다. 1999년 말 현재 텔레비전은 ① 공중파방송, ② 1995년에 개국한 지역민방, ③ 1995년에 개국한 유선방송(CATV), ④ 1995년에 전파를 발사하여 1996년부터 방송이 시작된 위성방송 등으로 ‘다매체 다채널’ 시대가 도래하였다. 공중파 방송은 한국방송(KBS)·문화방송(MBC) 등 네트워크 방송 2개사를 비롯하여 서울방송(SBS) 등 지역민방 10개사, 교육방송(EBS)·기독교방송(CBS) 등 특수방송 9개사로 구성되어 있다. 유선방송은 종합 유선방송국 77개사, 프로그램 공급업자 29개사, 전송망 사업자 2개사 등이 시장을 구성하고 있으며 해마다 신규방송사의 진입이 증가하고 있다. 라디오방송국은 기독교방송(서울 외에 5개 지방본부)·극동방송·아세아방송·불교방송(BBS)·평화방송(PBC) 등이 있고,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방송이 급증하고 있다. KBS는 서울본사를 중심으로 23개의 지방방송국이 있고, MBC는 중앙과 지방을 합쳐 20개의 독립된 방송사가 프로그램을 공급받는 형태로 전국 방송망을 형성하고 있다.

방송사 종사원은 1981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국언론연구원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방송사 종사인원은 1980년에 7065명이었으나 매년 증가하여 1994년에는 1만 3384명, 2001년에는 1만 4899명으로 늘었는데 이는 1995년에 개국한 부산·대구·광주·대전의 4개 지역 민간방송과 유선방송 종사자가 제외된 숫자로서 이를 포함하면 훨씬 많아진다. 방송운영의 기본적인 방향을 결정하고 방송의 공적 책임 및 공정성과 공공성을 유지하며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기구로, 각각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방송위원회와 종합유선방송위원회가 있고, 방송에 관한 연구와 인력개발 등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방송개발원(放送開發院)이 있다.

(3) 출판

2001년 6월 현재 출판사 수가 1만 6804개사(社)를 넘어섰으며, 일반도서 발행도 3만 4961종, 1억 1294만 5032부(部)에 달한다. 이 가운데 만화 분야가 9329종으로 가장 많으며 부수도 전체의 39.4%를 차지하였고 문학(13.8%), 사회과학(12.3%)의 종수도 많았다. 특히 전년도와 대비하여 아동(19.5%), 어학(6.7%), 역사(6.0%) 등의 분야가 증가하였다.

잡지는 노태우 정부 이후 크게 늘어나 사보(社報) 등 무가지(無價誌)를 포함하여 총 8,724종이 발행되었지만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의 영향으로 1998년에는 6,940종으로 줄어들었다. 2001년 8월 현재 등록된 정기간행물 현황을 보면 기타일간지 381종, 주간 2325종, 월간 2643종, 격월간 391종, 계간 707종, 연 2회 간행물이 235종 있다.

출판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차츰 나이와 직업에 따라 시장을 세분화하고 있으며, 《리더스다이제스트》를 비롯하여 《뉴스위크》, 《행복이 가득한 집》, 《지오》, 《보그》, 《엘르》, 《마리끌레르》, 《휘가로》, 《앙팡》, 《에스콰이어》, 《내셔널지오그래픽》, 《마담피가로》, 《그라모폰코리아》, 《앙앙》 등 외국의 지명도 높은 잡지사들과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하여, 국제화를 시도하는 잡지들도 늘어나고 있다.

편집은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읽는 즐거움을 더해 주고 있는 반면,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가입에 따라 1995년부터는 해외 저작권료 부담을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동안 영세한 시설을 보유하였던 인쇄계는 시디-롬(CD-ROM) 타이틀 등 전자출판이 본격화되고 다품종 소량 생산체제가 자리를 잡아가자 이에 발맞추어 첨단 인쇄기를 도입, 이제는 인쇄물을 해외에 수출할 만큼 성장하였다. 출판부문에서 유통 분야는 가장 낙후된 분야로 꼽혀왔으나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여 물류비용 절감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광고비는 식음료·서비스오락에 이어 3위를 차지할 만큼 많으나 오히려 도산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합리적인 경영이 요구된다. 2002년 완공 예정으로 경기 파주시에 추진되고 있는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조성에 발맞추어 생산과 유통의 합리화를 꾀하려는 업계의 관심과 기대가 크다.

(4) 광고

한국의 경제성장에 따라 광고산업은 1970년대 이후 매년 10%가 넘는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1993년의 국내 광고비 총액은 약 3조 2271억 원이었다. 이 가운데 신문이 1조 3326억 원, TV 8950억 원, 라디오 1372억 원, 잡지 1,239억 원, 옥외광고와 교통광고 등 기타 매체 광고가 7380억 원으로 국민총생산(GNP)의 1.2%를 차지한다. 1998년 국내 총광고비는 3조 4846억 원으로 1997년의 5조 3769억 원에 비해 무려 35.2%나 감소를 기록하였다. 이는 광고산업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이다. 이같은 광고비의 감소는 1996년부터 시작된 경제의 불황으로 역성장한 것이다. 1998년은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영향으로 인하여 3조 4845억 원을 기록하여, 1997년의 5조 3769억 원에 비해 크게 감소되었으나 1999년에는 다시 4조 6206억 원으로 늘어났다.

1980년 이후 평균 15% 전후의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의 광고시장은 규모면에서 세계 12위, 아시아 2위이다. 그러나 전세계 광고비의 90% 이상이 선진국에서 집행되고 있기 때문에 절대 규모가 큰 것은 아니다. 한국 광고시장의 규모는 아시아 1위인 일본 광고시장의 9~10%에 불과하다. 광고시장의 업종별 광고비 지출은 식품과 음료산업이 전체 광고비의 15% 전후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서비스와 오락산업, 의류산업, 전기·전자산업, 출판업 등이다. 식품과 음료는 점유율이 줄어드는 반면 의류와 섬유산업은 증가하는 경향이다. 서비스와 오락산업의 점유율도 높아지고 있어 한국의 주요 광고주의 산업이 변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뉴미디어 광고시장의 성장률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방송광고의 경우에는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대행 위탁하는 방송광고물 외에는 광고를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 방송광고공사는 방송광고를 대행하여 조성하는 공익자금(公益資金)으로 방송과 문화·예술의 진흥사업을 지원한다. 방송위원회를 비롯하여 언론중재위원회·언론연구원 등의 여러 언론단체도 이 공익자금으로 운영된다. 다만 정부의 광고는 한국언론회관(프레스센터)이 대행하고 있다.

6. 종교

한국의 종교는 불교·그리스도교·유교 및 신흥종교의 네 부류로 대별된다. 불교와 유교는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동양문화권의 유산으로 토착화가 이루어진 한국의 전통종교이다. 그리스도교는 서양문화의 산물로서 가톨릭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각각 유럽과 미국의 영향 아래 이식(移植)·성장하여 온 종교이다. 신흥종교는 불교·그리스도교·유교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제도종교에 비하여 성립시기가 오래되지 않은 종교를 말한다.

여기에는 원불교(圓佛敎)·천도교·대종교·통일교(統一敎) 등과 기타 사이비 종교가 포함된다. 한국의 종교 실태를 알기 위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① 왕조의 교체와 더불어 새로운 지배이념으로서 새 종교가 등장하였고, ② 이러한 사실 때문에 종교 간에는 알력과 갈등이 생겨났으며, ③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와 민족의 자주적 독자성 사이에 잠재된 대립적 견해가 가끔 표면화하였고, ④ 토속신앙으로서 산악·일월성신(日月星辰)·거석(巨石)·고목(古木) 등 다신교적(多神敎的)·애니미즘적 원시신앙과, 샤머니즘적 무속신앙(巫俗信仰)이 공존하여 고도의 지성이 아니고서는 불교·유교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나 철학은 물론,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논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1) 불교

한국에 들어온 공식 연대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이다. 백제는 그 후 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신라는 527년(법흥왕 14)에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 삼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이었다. 고구려나 백제 왕실에서의 불교 수용태도는 사찰을 지어 불상(佛像)을 모시고 불공을 드리면 곧 현실적인 이익이 있다는 기복적(祈福的)인 관점에서 생겼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에는 보다 탐구적·구도적 자세가 엿보인다. 고구려의 불교는 지배자들의 몰이해로 큰 구실을 하지 못하고 승려들은 신라나 백제, 또는 일본으로 가 그 뜻을 폈다.

백제의 승려들은 백제 멸망과 더불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화를 꽃피웠다. 신라에서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자기 종파적인 사상의 이해에서 탈피하여 불교사상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이론체계가 세워짐과 아울러, 대중불교의 성격이 나타나면서 그 기반이 확대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는 이러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보살도(菩薩道)로 훈련된 청년 엘리트와 국왕과 대신·장군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신라의 정치이념도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경제·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의 활동도 화엄을 비롯한 법화(法華)·열반(涅槃)·능가(楞伽)·기신(起信)·승만(勝)·유마(維摩)·반야(般若) 등 대승경론(大乘經論)의 철학이 원광(圓光)이나 자장(慈藏)·원효(元曉) 등에 의해 보급됨으로써 찬란한 개화(開花)를 하였다.

한국 민족이 세계에 자랑하는 찬란하고 존귀한 문화유산은 대개가 이때의 사상과 신심(信心)의 뒷받침 아래 이룩된 것들이다.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 상원사(上院寺)·봉덕사(奉德寺)의 종(鐘),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 기타 국보들이 모두 신라불교문화의 편모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국가의 보호 아래 불교는 번영을 누렸다. 태조는 사찰을 세워 불교를 숭상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광종 때에는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고 급제자에게 법계를 주어 그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당시의 불교는 바람직한 개혁으로 쇄신되지 못하고 도참사상(圖讖思想)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으며, 교리(敎理)의 연구를 통해 보살도의 실천을 강조하는 어려운 길을 버리고 모두가 안이한 밀교적(密敎的) 주술만을 강조하는 의식주의(儀式主義)로 일관하였을 따름이다.

그러한 가운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나타나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하고 이론과 실천 양면을 강조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하였으며, 원효정신의 재흥(再興)을 꾀하여 또 하나의 민족적 위업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완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도 당시 불교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여기에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頓悟漸修)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기에 접어들면서 불교계의 혁신운동은 단절되고, 당시 불교사찰이 권문세족의 후원 아래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는 등 세속화되어, 고려 말의 불교는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사대부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부패와 타락은 결국 조선왕조의 출현과 더불어 숭유배불(崇儒排佛)을 공식적으로 정책화하게 만든 주원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고 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으로 통합, 사찰의 건립도 억제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신봉되어 그 사회적 기반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임진왜란 때에는 결연히 궐기하여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위해 왜적을 무찌르고 난국을 극복한 것은 호국(護國)·호민(護民)·호법(護法)의 강인한 전통을 이어받은 결과였다. 개화기의 한국 불교는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에서는 벗어났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일본 불교에 예속되었다. 이에 한용운(韓龍雲) 등과 같은 인사들은 ‘조선불교유신론’을 내세워 불교의 자주성 회복과 쇄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500여 년에 걸쳐 탄압과 멸시와 푸대접으로 모든 발전과 개혁의 자유활동을 폐쇄당해 인습화된 한국 불교를 유신(維新)하고자 한 그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 광복 후 한국 불교가 맞이한 정세는 역시 그 유신을 가능하게 할 만큼 좋은 사정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8·15광복 후 1950년을 지내 오는 과정에서 한국의 불교계는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1970년대에 일대혁신운동을 일으켜 승려의 자질 향상, 교육의 쇄신, 포교의 다양화 등을 추진하였으며, 세계불교연합회를 창설하여 한국불교의 지도력과 공신력을 높였다. 현재 한국 불교 주요 종단으로 조계종(曹溪宗)과 태고종(太古宗)이 있고, 그밖에 법화종(法華宗)이 두 파, 총화종(總和宗)·천태종·진각종(眞覺宗)·일승종(一乘宗)·불입종(佛入宗)·정토종(淨土宗)·화엄종(華嚴宗)·보문종(普門宗)·법상종(法相宗)·용화종(龍華宗)·원효종(元曉宗)·진언종(眞言宗)·천화불교(天華佛敎)·미륵종(彌勒宗) 등 25개 종파가 있다. 1995년 현재 불교인 수는 1032만 1012명으로 1985년의 805만 9624명보다 28% 늘어났다.

(2) 유교

한국에 유교문화가 도입된 것은 중국과의 교류가 있은 때로부터 시작된다. 고구려의 제천의식인 동맹(東盟)은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회맹(會盟)을 방불케 하며,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비문이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유교의 음양사상(陰陽思想)을 나타낸 것들이 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이라는 유교 교육기관을 세우고, 또 전국에 경당(堂)을 두어 오경(五經)과 사·문(史文)을 가르쳐 인재를 길렀다. 백제에서도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둔 것은 일찍부터 유학(儒學)이 인간교육의 지표가 되어왔음을 말한다. 신라에서도 유교의 윤리강령을 널리 중시하여 불교 및 선도(仙道)와 함께 화랑(花郞)들의 생활지침이 되었다. 그 기본은 충(忠)·효(孝)·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에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는 유교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이 설립되고, 788년(원성왕 4)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용할 때 일정한 유학지식을 터득하도록 요청하였다.

9세기의 최치원(崔致遠)은 유·불·선(儒佛仙) 3교(敎)에 통달한 학자로서, 시무책 10여조(時務策十餘條)를 만들어 국정쇄신을 기하였으며,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도 탁월한 유학자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유교는 더욱 중시되었는데, 958년(광종 9)부터 실시된 과거제도는 정치이념 속에 유교이념이 짙게 배어 있음을 의미한다. 성종은 최승로(崔承老)의 상소에 따라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 불교행사를 중지하게 하는 한편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고, 인종은 지방에 향학을 설치하였다. 또 최충(崔沖)은 1055년(문종 9)에 사숙(私塾)을 두었는데, 이때 이래로 사숙 12개소가 생기고 그곳의 학도들은 12도(徒)라 하여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원(元)과의 교류과정에서 도입된 주자학(朱子學)은 고려 말기의 학문과 사상에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가져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는 지배이념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또 종교적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중앙에는 성균관(成均館), 지방에는 향교(鄕校)와 사립(私立)의 서원(書院)이 설치되어 인재양성과 제사가 거기서 이루어졌다. 숭유배불 정책이 정립되기까지는 원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安珦)과 그 뒤를 이어 주자학을 공부한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길재(吉再) 등의 공이 크다. 세종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집현전(集賢殿)을 만들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중요성을 고취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종교정책은 모든 종교에 관용적인 기본입장을 가진 것으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조선시대 주자학의 이론 전개는 중국 유학이 우주론적 관심을 앞세운 데 비해, 인간의 심성문제에 관심을 집중한 사실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이 그러한 이론을 발전시킴으로써 한국의 유학을 빛냈다. 유교에서는 천(天)이 인간생명의 근원이며 백성을 살피고 있는 주재자(主宰者)이다. 천은 인간에게 내면적 덕성을 부여하였으므로 따라서 인간은 천으로부터 받은 명(命)인 성(性)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곧 도(道)이고 성(誠)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인간 속에 내재된 성을 천으로까지 닿도록 성을 다해야 한다는 점에서 종교성을 지닌다. 그런데 한 인간은 그 생(生)을 부모로부터 받았고, 그 부모는 다시 조상으로부터 그 생을 받은 것이며, 그 조상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 천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으므로 조상숭배는 단순한 윤리를 넘어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하여 유교의 종교의식은 제사로 집약되었다. 유교의 제사는 천지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 및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로 구분되는데, 이를 각각 교사(郊社)·조묘(祖廟)·문묘(文廟)라 한다.

이러한 제사의례는 엄격한 규정을 낳았고, 이로 말미암은 의례의 복잡화와 논의의 형식화는 본래 유교가 중요시했어야 할 심성도야의 실천적 수행을 소홀히 하고 공리공론(空理空論)과 형식적 의례의 관습화만을 촉진시켜, 지배체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사상적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폐쇄적인 소규모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다가 광복 후에 이를 재구성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김창숙(金昌淑)을 성균관장으로 추대하여 유도회(儒道會)를 설립하고 성균관과 전국 향교를 유교교단으로 조직하는 등 혁신을 위한 노력을 하였지만, 1956년부터 1963년에 걸친 유림의 분규로 유교가 사회의 지도적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1970년대 이후  '도의선양대회' 개최와  '윤리선언문 및 실천요강'(1973) 발표 등 사회도덕운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공자학회(1980)·유교학회(1985)·예학회(1989) 등에서 전문 유교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95년의 유교인 수는 21만 명으로, 1983년 78만 6955명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3) 그리스도교

⑴ 가톨릭

조선시대에 가톨릭이 알려진 것은 해마다 몇 차례씩 베이징[北京]에 다녀오던 사신들의 손을 거쳐 수입된 가톨릭 관련 서적을 통해서이다. 실학자 이수광(李光)은 1614년(광해군 6)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가톨릭을 소개했고, 뒤이어 이익(李瀷)은 안정복(安鼎福) 등과 함께 가톨릭 서적을 연구하였다. 그 후 18세기 말엽 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이벽(李檗) 등은 교리연구의 모임을 만들어 가톨릭교리를 배웠고, 1783년(정조 7) 이승훈(李承薰)은 베이징에 가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동지들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이렇듯 외국인 성직자의 선교 없이 평신도끼리 교회를 세운 것은 가톨릭 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후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서울에 들어와 4,000여 명의 교인을 지도하게 되었으나, 한국 가톨릭은 이후 수차의 대박해(1801, 1839, 1846)를 겪는 동안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교세가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의 혼란과 민생고에 시달린 사람들이, “모든 인간은 천주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과, 현실에서 벗어나 영생할 수 있다는 내세적 교리에 공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한국가톨릭이 국가의 공인을 받은 것은 1886년 5월의 일이다.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나온 지 10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가톨릭은 선교의 자유를 얻은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치 운영하였고, 교육·언론을 통하여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 동안에 한국 가톨릭교회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 1968년 24명의 복자(福者)가 탄생하였으며, 1969년 대주교 김수환(金壽煥)이 추기경(樞機卿)이 되었고, 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은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여 103위 성인(聖人)의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였다. 한국가톨릭교회는 현재 3개의 대교구(大敎區:서울·대구·광주)와 11개의 교구(인천·수원·대전·춘천·원주·안동·청주·부산·마산·전주·제주)로 나뉘어 사목활동을 펴고 있다. 1995년 현재 가톨릭교도 수는 295만 730명으로 1985년의 186만 5397명보다 58% 늘어났다.

⑵ 개신교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오는 데에는 별다른 큰 박해는 없었다. 그것은 한국이 구미(歐美)의 여러 나라와 수교조약(修交條約)을 맺은 뒤에 선교사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에 관심을 둔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는 독일인 귀츨라프였는데, 그는 1832년(순조 32) 충청도의 고대도(古代島) 등 도서에 상륙, 전도활동을 하면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소속의 선교사인 R.J.토머스, J.로스, J.매킨타이어 등이 입국하였다. 토머스는 1866년(고종 3) 상선인 제너럴셔먼호(號)에 편승하여 평양에 왔다가 순교하였고, 로스는 1873년 만주에 와서 한국인을 찾아 전도하며 신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매킨타이어도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인으로서 개신교의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을 남긴 사람은 이수정(李樹廷)이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 뒤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일본에 가서 4년 간 그곳에 머물면서 입교하여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선교준비에 몰두하다가 1886년에 귀국한 후 붙잡혀 처형되었는데, 그가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은 후에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가지고 입국하였다. 또 서상륜(徐相崙)도 역시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동참했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목판에 새겨 인쇄하여 직접 보급하러 다니기까지 했다. 1884년 서상륜은 황해도 장연에 있는 소래[松川]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한국 개신교 교회의 요람이었다.

1885년 구미 여러 나라와의 수교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선교사 언더우드(북장로교회), 아펜젤러(감리교회)가 입국하였고, 18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에서 J.H.데이비스가, 그리고 영국 성공회(聖公會)의 C.J.코프와 벤슨 주교가 입국하였다. 뒤이어 1896년에는 미국 감리교회의 리드와 J.P.캠벨 부인이 입국하였으며, 또 같은 해에 캐나다 장로교회가, 그리고 1904년에는 미국 제7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들어왔고, 1907년 성결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듯 개국·개화의 물결을 타고 한국에 입국, 선교에 착수한 것은 주로 미국 각 교파 소속의 선교사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의 강요를 거부하여 핍박을 받았고, 6·25전쟁 중에 입은 상처는 엄청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 또는 납치당했고, 수많은 예배당이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크게 성장하여 급변하는 사회변동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대처하여 윤리적 가치관의 학립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 동안의 활발했던 분야는 한국적 신학의 수립과 토착화 논의, 신학자 배출과 행동반경의 확대, 신·구교의 성서공동번역, 다른 종교와의 대화, 평신도 신앙운동의 활성화, 선교 매스미디어의 확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가 안고 있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도 여전히 남아 있다. ① 교단의 분열현상, ② 농촌교회와 도시교회의 양극화, ③ 교회 내 청소년교육의 부진과 신자수의 상대적 감소, ④ 교회의 기복적 샤머니즘화 현상 등이다. 1995년 현재 개신교도는 876만 336명으로 1985년의 648만 9282명보다 35% 늘어났다.

(4) 신흥종교

천도교는 철종 때에 일어난 동학(東學)을 계승하고 1906년(광무 10)에 천도교라 개칭한 한국의 독특한 종교이다. 그 교리에는 유(儒)·불(佛)·선(仙) 3교는 물론, 그리스도교와 토속신앙인 한울님사상, 주술(呪術) 등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1861년(철종 12)경 교리를 완성하고 포교를 시작, 4년 뒤 붙잡혀 처형될 때까지 경상도 일대에서 교단을 형성하였다. 2대 경전인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에 의하면 의지(意志)의 신인 한울님의 가르침을 성(誠)·경(敬)·신(信)으로 실천하고, 그것을 위해 수심정기(守心正氣)하여 시천주(侍天主)할 것을 강조한다.

수도의 격식으로는 주문을 외고 영부(靈符)를 지니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긴다. 원불교(圓佛敎)는 교조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1916년 26세 때 홀연히 깨달은 바 있었는데, 그때의 심경을 “만유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生滅) 없는 도(道)와 인과응보(因果應報)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하고, 다음해부터 간척사업과 저축운동 등 사회개척사업을 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4년 불법연구회라 칭하였다가 2대 종법사 송규(宋奎) 때 8·15광복을 맞아 원불교라 개칭하였다. 교리는 1943년에 지은 《정전(正典)》에 전하는데, 그 교리를 보면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중심으로 신앙문(信仰門)과 수행문(修行門)을 내세우고 있는데, 신앙문은 마음을 닦고 천지은(天地恩)·부모은(父母恩)·동포은(同胞恩)·법률은(法律恩)의 4은에 보답하는 것을 밝힌 것이며, 수행문은 사람이 정신을 수양하고 사리를 연구하여 본래의 맑은 마음을 드러내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1951년에는 원광대학교를 세움으로써 원불교 사상을 정착시키는 발판을 만들었다. 그밖에 대종교(大倧敎)는 단군신앙을 고취하는 민족신앙적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경향을 가진 것에 한얼교가 있다. 국제도덕협회(國際道德協會)는 불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밖에도 증산교(甑山敎)의 유파 등 민간신앙에 바탕을 둔 신흥종교와 외래(外來)의 바하이·이슬람·천리교(天理敎) 등이 그 기반을 굳혀가고 있다.

7. 교육

1945년 8·15광복을 맞아 한국의 교육은 일제의 식민지교육에서 탈피하고 국가의 재건과 더불어 새로운 민주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일시 퇴보하기도 했지만, 전후(戰後) 어려운 여건 속에서 민주주의 교육이념 아래 교육제도·교육내용·교육방법 등을 단기간에 혁신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1945년 9월 교육계 대표 10명으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朝鮮敎育審議會)가 미군정의 교육자문기구로서 발족되었다. 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초창기의 대한민국 교육에 관한 중요문제를 심의·결정하였는데, 주로 교육이념·교육제도·교육행정·교과서 등에 관한 사항을 입안·결정하였다. 이 심의회에서는 1946년 3월 20일 민주교육의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주된 내용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교육이념과 6·3·3·4의 학교제도 및 4실 7국으로 편제한 문교부 직제 등으로서, 이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교육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각급 학교교육의 방향과 지표인 교육이념은 교육법(1949. 12. 31 제정) 제1조에 명시되어 있다.

즉,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인격을 완성하는 개인적 이념과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는 국가적 이념 및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세계적 이념을 제시해 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급 학교에서는 구체적인 교육목적과 교육내용을 정하고 교육에 임하도록 하였다.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제정·공포함으로써 교육이념과 교육목적이 재검토되었는데, 근년에 와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강조하고 교육의 기회균등과 복지사회를 표방하는 민주교육을 강화하고, 바람직한 인성과 도덕성 및 사회성을 중시하는 인간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교육제도는 8·15광복 직후 미군정 당시 6·6·4제를 일시 채택하였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기간학제로서 6·3·3·4제의 단선형 학제가 정립되었다. 초등교육 6년은 무상 의무교육으로서 1980년대에 와서 그 기반이 정착되었으며, 중등교육 전기 3년은 동일계열 중학교 과정으로서 2002년부터 단계적으로 무상의무교육이 실시되고 2004년부터는 전면적으로 실시된다. 후기 3년은 고등학교 과정으로, 인문계열과 실업계열로 분리하고 있다. 중등교육을 잇는 고등교육은 4년제 대학이 중심적 위치에 있다. 그밖의 고등교육으로는 2년제 전문대학이 있고, 또 4년제 대학을 수료한 후 진학할 수 있는 대학원이 설치되어 있다.

각급 학교에서 학생에게 직접 제공하는 교육내용은 교육부에서 고시하는 교육과정에 근간을 두어야 하며, 그 교육과정에 의거하여 편찬된 교과서에는 구체적인 교육내용이 포함된다. 학교교육의 기본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교육과정은 8·15광복 이후 6~8년 간격으로 7차에 거쳐 수정·보완되고 개정되면서 교과서도 함께 개편되어 왔다. 최근에 와서 교육부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까지의 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개혁하였는데, 이 새 교육과정의 기본정신으로 국민정신교육의 체계화, 과학기술교육의 강화, 전인교육의 충실 등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새 교육과정의 정신을 충실히 반영한 교과서 편찬을 추진하면서, 교육방법과 평가방법에 관한 교사의 자질을 높여 교육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많은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러나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여야 한다는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지 못해서 교육부의 교육정책은 조령모개식이라는 비판을 들어왔다. 이는 정치적 중립과 재정적 안정을 기반으로 해야 할 교육정책이 정치적 혼란과 재정적 빈곤의 제약에서 언제나 탈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15광복 이후 교육정책은 의무교육정책·교육자치정책·대학정원정책·교육계획정책·교과서정책·입시정책·실업교육정책 등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다. 교육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교육행정의 중앙기구는 교육부이며, 지방기구는 시·도 교육위원회 및 교육감, 하부조직으로 구·시·군 교육청이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의 직제는 2실 4국으로 편제되어, 학교교육·평생교육 및 학술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를 비롯한 전체 교육행정조직의 임직원은 국가교육공무원으로 임명제이며, 다만 시·도의 교육감은 당해 교육위원회에서 선출하고, 부교육감은 당해 교육감의 추천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또 하급교육행정기관인 자치구 교육청의 교육장은 장학관으로써 돕도록 하되, 그 직원은 지방공무원으로 충당하도록 되어 있다. 한국의 지방교육행정은 1952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시·군을 기초단위로 하는 교육자치제가 실시되어 군에는 법인체로 된 군교육구를 설치하고, 의결기관으로 초등교육을 심의하는 군교육위원회, 집행기관으로 군교육감을 두었다.

약 8년 동안 지속된 교육자치제는 5·16군사정변을 기해 지방행정 일원화 등의 명목으로 폐지되고, 교육행정이 내무행정의 산하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1964년 시·도의 교육위원회를 단위로 하는 변형된 교육자치제가 실시되어 1991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이 당시의 교육위원회는 7인으로 구성되는 합의제 의결기관으로, 위원 중 2인은 당해 시장·도지사와 교육감이 당연직으로 임명되고, 5인은 문교부장관에 의해 임명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에 관한 법률에 의해 실시된 교육자치제에서는 해당 시·도 의회에서 선출한 교육위원으로 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교육위원회에서 시·도 교육감을 선출하는 등 지방교육행정기구의 의결기구와 집행기관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성립되어 본격적인 교육자치제를 실현하게 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오늘날까지 정부의 교육예산 비중은 크게 증대하였으나, 교육인구의 양적 팽창에 비하여 교육재정의 증가가 따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국가예산에 대한 교육예산 비율은 건국 초년인 1948년에 8.9%, 1958년 10.8%, 1968년 17.1%, 1982년 20.8%, 1990년 20.4%, 1993년 19.8%를 차지하였고, 총예산규모는 19조 1720억 원 (2000)에 달하였다. 교육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82년부터 교육세를 신설하여 시행하고 있다. 의무교육의 연한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9년으로 2004년 전면 실시할 계획이며, 1984년부터 농촌지역에서 시작, 점차 확대 실시하고 있다. 유치원 취원율은 1970년의 1.3% 수준에서 1994년에는 38.7%, 2000년에는 43.3%로 상승하였으며, 교육부에서 유아교육정책을 강화하여 유아교육을 확대시켜가고 있다. 사회교육은 국가가 평생교육을 진흥해야 한다는 헌법 31조 5항에 힘입어 활발히 육성되고 있다. 특히 평생교육은 교양교육·통신교육·직업교육 등을 근간으로 사회교육의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교육인구의 양적 팽창과 교육의 질적 저하 문제에 당면해 있다. 이와 같은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교원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1년 현재 교육인적자원부는 교육정책의 기본 목표를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교육, 정보화 세계화를 선도하는 교육'으로 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각종 개혁과제를 추진하며 나아가 21세기 지식기반 사회에 적합한 교육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각 부문의 핵심적 개혁과제를 발굴해 추진하고 있다. 일선학교에서는 열린교육을 확대실시하여 새 학교문화 창조를 위해 노력하면 학교폭력 예방과 근절을 위해 노력한다. 또한 교원의 정년 단축으로 현재 초·중등교사의 부족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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