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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9 (화)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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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917      
[근대] 최초의 한국철도 경인선 (인천)
최초의 한국철도 - 경인선

한국철도의 1백년 역사는 경인철도와 함께 시작된다. 우마와 배에 의존하던 우리나라의 교통이 마침내 증기에 의한 기계문명을 도입함으로써 20세기 새로운 「문명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낡은 왕조시대의 경제체제를 면치 못하고 있던 조선은 대량생산체제의 첨병구실을 하던 철도를 받아들이면서 본격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 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연기는 반공에 솟아 오르더라···"

국내 최초로 국문으로 발행되던 독립신문(1899년 9월 19일자)의 「경인철도 개업식 기사」중 일부다. 기사내용을 보면 기차를 처음 대한 당시 국민들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인천에서 노량진간 33㎞(80리)를 1시간 40분에 주파하는 경인철도 개업식을 인천역(당시 제물포역)에서 거행함으로써 비로서 1백년 한국철도 역사의 장을 연 것이다.

그 무렵 인천_서울간 육로 폭이 2m에 불과한 등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다니는 데 무려 12시간 이상씩 걸렸다. 사정이 좀 낫다는 인천_마포 용산간 수로도 8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교통여건은 아주 열악했다. 따라서 경인철도 개통은 우마와 선박에 비해 5_10배 이상의 여행시간 단축을 가져 온 셈. 가히 「교통혁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당시로선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운행된 최초의 기관차. 꾸러기세상 사진한국에서 운행된 최초의 기관차. 최초로 운행된 객차는 3백50마력 짜리 미국제 모걸탱크형(mogul)으로 무게가 35톤에 달했다. 모갈탱크기관차의 최고속도는 시속 60 km였으나 실제론 절반 정도의 속력밖에 내지 못했다고 한다.

최고속도는 60㎞/h, 실제 운행속도는 20_30㎞ 정도였다고 한다. 또 개통당시 경인철도엔 4대의 증기기관차가 객차 6량, 화차 28량을 싣고 1일 4회 운행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폐쇄적인 사회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해 객차에 타는 승객들의 신분 역시 차별화됐다. 1등 객실의 요금은 1원50전으로 외국인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2등실은 80전에 내국인, 여자들은 수준이 훨씬 떨어지는 3등실에 40전을 내고 기차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통한 경인철도는 2년전인 1897년 3월 22일 오전 9시 지금의 창영동 부근인 우각리에서 첫 시공삽을 떴다. 기공식에는 경인철도 부설의 견인차 역할을 한 미국의 알렌공사와 한성판윤 이채윤, 기술자 커알리와 타운젠트 등 50여명의 작업인부들이 참석했다. 또 미국에서 공수된 왼발 손수레와 삽, 곡괭이를 짊어지고 흰도포와 흰갓을 쓴 한국인 인부들도 함께 기공식에 있었다.

          경인철도 기공식. 꾸러기세상 사진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리에서의 경인철도 기공식

이런 한국인 인부들의 작업차림은 1895년 일본인 자객이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면서 3년동안 곡을 하고 두건을 쓰는 전통 장례예식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한국 교통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우각리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이곳에서 철이 많이 생산됐다고 해서 「쇠뿔고개」였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지형이 쇠뿔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한자표기인 우각리로 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우각리는 1936년 일본식 지명인 창영정으로 바뀌었다가 47년 해방후 다시 창영동으로 변경됐다.

          초기의 인천 역사. 꾸러기세상 사진
초기의 인천 역사(驛舍). 당시엔 여객의 운송보다는 화물운송과 철도운영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시설에 한정됐다. 인천 역사는 91평 규모였다.

경인철도 개통과 관련해 이목을 끄는 이야기중 하나는 「알렌공사의 별장」. 서리공사 이하영과 친분이 있던 알렌이 고종을 설득해서 철도 부설권을 따도록 해 주자 그 배려 차원에서 알렌공사의 별장이 있던 언덕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알렌이 열차를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1959년 발행된 「개항과 양관역정」의 저자 최성연씨는 『당시 우각리 일대는 모두 숭의동 109번지 였지만 별장의 위치만 107번지였으며 2층으로 된 벽돌식 기와지붕이 있었다』고 기술한다. 이 별장은 해방 이후 한 종교단체에서 「인천전도관」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시온교회로 이름을 바꿔 사용했다는 이 건물은 그러나 이젠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은 도원역 부근 별장터에 다른 교회가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경인철도 설계도. 꾸러기세상 사진
                  경인철도 설계도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따내기 위한 일본과 미국 등 열강의 다툼은 치열했다.당시 조선정부는 재정이 열악해 철도공사를 벌일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던 일본은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1894년 조일서정합동(朝日暫定合同)조관을 체결하고 철도부설권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미·영·독·러시아 등 4개국이 일본의 독점권에 이의를 제기하며 다툼을 벌였다. 결국엔 을미사변으로 반감을 산 일본을 배제하고 미국인 모오스에게 부설권을 넘겨 1896년 3월 최종 확정된 것으로 전해진다.

기적소리 아련한 애환의 한세기

"칙칙폭폭 빽......"

기적소리를 내며 달리던 증기기관차를 표현하던 의성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기차'는 이젠 전철과 디젤 기관차로 바뀌어 철도박물관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차'는 철도 개통후 60여년간이나 국내에서 운행됐다.

          경인선 개통 때의 화차. 꾸러기세상 사진
                  경인선 개통 때의 화차

우각리를 비롯 부평·소사·오류·영등포·노량진 등 7개역을 왕복운행했던 경인철도의 역사는 애초엔 조선인들에게 편리함을 주기 위해서보다는 외국자본의 축적 내지는 물자를 수탈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됐다. 경인철도에 애착을 갖고 있던 일본이 미국인 모오스에 부여한 경인철도 특허권을 빼앗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을미사변 이후 반일감정이 극도로 악화하면서 경인철도 부설권이 모오스에게 넘어간 후 외교·경제적 타격을 입게 된 일본은 1897년 5월 4일 모오스가 자금난으로 경인철도 공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틈을 타 결국 경인철도 부설권을 차지했다. 당시 매국노 이완용을 앞세워 경인철도 인수조합을 설립한 일본은 경인철도 개통 8개월전인 1899년 1월 30일 모오스한테 1백70만2천4백52원을 주고 부설권을 넘겨받았다. 이 때부터 일본은 인천항을 통해 우리의 농산물 등 각종 물자를 자국으로 실어 나르는 교두보를 확보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경인철도를 대륙병참기지의 첨병으로 삼기도 했다.

이렇게 경인철도가 일본에 넘어가자 국민들의 반감도 만만치 않게 일었다. 아예 경인철도를 이용하지 않는 등 국모 시해에 대한 저항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여기엔 기차삯이 마일당 2전5리로 서민들에겐 부담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낯선 서양문물에 대한 거부감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 무렵 조선인들은 불편해도 여전히 경인간 육로와 한강수로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삼았다.

사정이 이처럼 순탄하지 않자 일본은 '경인철도회사 광고문' 까지 동원해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00년에 만들어 국내 철도광고의 효시가 된 이 광고는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한문으로 표현됐다. 풀어서 옮겨보면 대강 이런 내용이다.

"경인철도는 서울과 인천사이 80리간에 부설한 철도로서 그 빠름은 비할 것이 없느니라···"  경인철도의 편리성을 강조한 이 광고문엔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달래기 위해 고심한 흔적도 엿보인다. 난해한 한문투로 적어 넣은 것도 유교사상의 뿌리가 깊은 조선인들을 자극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어쨌든 이같이 어렵게 출발한 경인철도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온갖 '오욕의 역사'와 함께 하며 1백년을 달린다. 조선을 강탈한 일제가 1910년 8월 경인철도를 조선총독부 수하에 넣고 본격적인 수탈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철도운행이 대중화되기 이전인 1900년대 초 사람이 끄는 궤도차. 꾸러기세상 사진
철도운행이 대중화되기 이전인 1900년대 초 사람이 끄는 궤도차. 이른바 '열차인력거'가 평양 부근의 한 지점을 지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조선인들도 차츰 철도의 편리함을 인식하면서 여객수가 급증하고 화물도 개통 당시보다 3_4배 늘어나는 등 철도수요는 계속 증가했다. 경인철도의 호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1910년대에는 신식 유행창가로 '경인철도가'란 노래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일제는 1937년 인천_수원_이천_여주를 잇는 수인·수여선(협궤열차)을 완공함으로써 끊임없이 내륙에서 생산되는 쌀 등 갖가지 농산물을 자국으로 실어 나르는 등 자본축적을 위해 경인철도를 최대한 이용했다. 여기에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경인철도는 화물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자연히 철도시설은 노후화를 면치 못했고 이로 말미암아 한때 복선 및 전철화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동인천 역사 낙성식. 꾸러기세상 사진
                   동인천 역사 낙성식

이어 해방이후 경인철도는 개통 60년만에 운행을 중단하는 비운을 맞는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연합군이 인천지역의 역과 철로를 집중적으로 폭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60년대 들어 본격화하기 시작한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발맞춰 경인철도도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따라 인천지역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섬으로써 경인철도는 인력과 물류수송의 핵심역할을 다시 맡게 된 것이다.

정부는 폭주하는 수송량을 감당하지 못하자 결국 1962년 5월 19일 경인 복선화 공사를 착공했다. 그리하여 65년 1월 12일엔 동인천_주안역(4.5㎞), 그해 9월 18일엔 주안_영등포간(23.3㎞) 공사를 끝내고 한국철도 65년만에 복선화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공사로 서울과 인천간에는 30분마다 열차를 운행하면서 수출을 위한 화물수요는 물론 시민들의 통근과 통학난을 덜어 주었다.

그럼에도 계속 늘어나는 수송량을 견딜 수 없게 되자 71년 4월 7일 수도권전철화 계획에 따라 전철공사에 들어갔다. 기존 철도의 효율성을 훨씬 뛰어 넘은 전철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한국철도의 장을 연 이날 기공식은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렬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74년 8월 15일 전철개통 후 경인철도는 80년대로 접어들어서 화물수요가 대폭 줄어드는 대신 여객수요가 급증하면서 도시철도로 자리잡았다. 이용객들은 그러나 한동안 여객수요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몸살을 앓는 경인전철을 가리켜 '지옥철'이라 불렀다. 아울러 출근길 객차에 한사람이라도 더 밀어넣기 위해 '푸시맨'도 등장하는 등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출전 : 꾸러기세상 내고장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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