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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17 (수) 21:28
분 류 사전3
ㆍ조회: 865      
[근대/현대] 노동운동 (한메)
노동운동 勞動運動 labor movement

노동자계급이 노동조건이나 생활조건의 개선을 통해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는 운동의 총칭.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한다.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는 본래부터 나라에 따라 같지 않고 계급구성이나 권력구조도 다르므로 각국에서의 노동운동의 발전 역시 다르다.

영국에서는 자본주의가 조기(早期)에 성립을 보아 농민층의 분해(分解)가 철저했기 때문에 노사(勞使) 관계 역시 일찍부터 명확한 대립관계의 형태를 취했다. 또한 의회제 민주주의도 조기에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추지 못했던 유럽 여러 나라는 노동운동의 유형(類型)이 서로 다르다. 영국에서는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노동자계급의 단결이 방임(放任)되어 노동조합이 일찍이 그리고 동시에 자주적으로 형성되었으므로 노동운동에서의 볼런터리즘(voluntaryism;自發性, 任意主義)의 경향이 강하다.

미국 역시 봉건유제(封健遺制)가 없고 프런티어가 존재한 까닭에, 노동자의 자립성이 강했던 영국과 비교적 비슷하다. 이와는 반대로 대륙에서는 단결의 자유가 쉽게 인정되지 않았으며, 인정된 후에도 엄격한 제한이 여러 형태로 존속하였다.

이와 같은 조건하에서는 당연히 노동조합의 발전이 늦어져,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륙형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와 정당의 주도로 결성되었으며, 양자는 유기적인 관련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해 왔다. 똑같은 대륙형이라고 하여도, 철저하게 시민혁명을 거친 프랑스와 그렇지 못한 독일이나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당연히 노동운동의 존재양식이 다르다.

프랑스의 노동조합은 정당이나 국가기관의 일체의 역할을 부정하는 생디칼리슴(syndicalisme;혁명적 산업조합주의)이나 일체의 정치권력을 부정하면서 노동자에 의한 생산관리를 실현하려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즘(anarcho syndicalisme;노동무정부주의)의 영향이 강하여 현재까지도 이러한 전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에스파냐 등 라틴계 여러 나라에서도 엿보인다.

현재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은 프랑스노동총동맹(CGT),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 노동총동맹―노동자의 힘(CGT―FO)처럼 정치노선의 차이로 분열되어 있다. 이에 반해 독일에서는 당초 생산협동조합을 중시하는 라살주의와 뒷날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운동의 지배적인 지도이론이 되었다.

이렇듯 자본주의 성립시기의 조건이 각국 노동운동의 성격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그 후의 사태 변화에 따라 발전하였다.

[유럽과 미국의 노동운동]

<초기의 노동운동과노동조합>

자본주의의 생성과 함께 창출된 노동자계급은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한층 더 열악하고 불안정한 생활, 비인간적인 상태로 쫓겨갔다. 그들은 단결하는 일이 오랫동안 금지되었으며, 이러한 조치는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두려워하는 지배계층에 의해 한층 더 강화되었다(영국의 1799년, 1800년 단결금지법과 프랑스의 1791년 르샤플리에법 제정 등).

19세기 전반의 영국을 <혁명의 시대>라고 일컫는 것처럼 초기의 노동운동은 철저한 사회변혁을 목표로 하는 급진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편 노동자 이외의 지식인이나 정치가에게 의존하는 일이 많았으며 폭동이나 봉기(蜂起)와 같은 격렬한 투쟁형태도 흔히 취해졌다.

그것은 탄압이 강한 탓도 있었지만 항상적(恒常的)인 조직이 아니었다는 이 시기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였다. 러다이트운동이 그 좋은 예이며, R.오언이 지도한 1834년의 전국노동조합대연합도 단순히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목표로 하는 운동이었다. 그 예의 하나인 차티스트운동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최초의 대규모 정치적 운동이었다.

의회에 제출한 청원서가 부결되어 패배로 끝나긴 했지만 북부공업도시에서의 총파업은 소요상태로 발전하여 군대의 파견으로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차티스트운동의 패배 후 노동운동의 조류는 정치개혁운동으로부터 일상적인 노동조건 개선운동으로 전환되었으며 노동조합이 그 중심적인 담당자가 되었다.

1824∼25년에 단결금지법이 철폐되고 1871년에는 최초의 노동조합법이 제정되었다. 이렇게 되어 노동조합은 오랜 운동의 결과 비로소 인지(認知)되었으며 점차적으로 안정된 조직으로서 정착되었다.

그 무렵 대부분의 조합은 직종별조합(職種別組合;craft union)이었으며, 숙련노동자들만으로 구성되었다. 정치활동이나 파업이 금지되었으며 주인에게 일을 배운다는식의 제도와 공제기금을 기초로 하여 주로 노동시장에 대한 공급제한을 통해 간접적으로 노동조건의 유지·개선을 도모한 데에 이 조합의 특징이 있다.

<독점단계와 노동조합의 발전>

19세기말에 이르러 <대불황>이 계기가 된 실업의 증가, 제2차산업혁명이라고 하는 생산방법의 변화, 신조합주의(新組合主義)의 대두는 노동조합운동에 전기를 가져다 주었다. 즉, 일반조합이나 산업별조합이 결성되어 미숙련·반숙련(半熟練) 노동자의 조직화가 촉진됨과 동시에 직종별 조합의 체질개선도 서서히 진행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20세기 초에는 단체교섭을 통한 노동의 여러 조건이 기본적 방식으로서 확립되었으며, 한편 이를 보충하는 형식으로 입법에 의한 노동조건의 규제라든가 권리의 확대 요구도 주장되었다.

파업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1901년의 타프 베일 판결은 조합의 활동에 대해 근본적으로 위협을 주었다. 이를 폐기시키기 위해 노동자대표를 뽑아서, 의회로 보낼 필요성이 강하게 요청되어 마침내 1906년 노동당이 결성되었다.

이렇듯 노동당은 본질적으로 노동조합에 의해 창설된 것이었다. 조합은 단체적으로 일괄해서 노동당에 가입하였으며 유럽 북부(스칸디나비아의 일부 나라에서도 사회민주당에 대한 조합의 일괄가입방식을 볼 수 있다), 노동조합에 대한 강한 발언권은 그 뒤 약화되기는 했지만 장기간에 걸쳐 존속하였다.

이상에서 설명한 영국의 경우에 비교하면, 그 밖의 나라에서의 노동운동은 현저히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격을 급속히 좁히고 또 부분적으로 그것을 능가시킨 것은 제1차세계대전과 그 뒤 노동운동의 고양(高揚)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에 의한 혁명이 성공하여 사회주의정권이 탄생하였다. 단체교섭과 협약제도는 독일·프랑스 등에까지 보급되었으며 노동자계급은 완전한 보통선거제를 획득하였다.

유럽의 노동자정당은 연립내각의 일익(一翼)으로서 정권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까지 신장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대공황은 노동운동에도 현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하여 노동운동을 억압·파쇄(破碎)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뉴딜정책이 취해져 1935년 와그너법의 제정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가 노동조합의 조직화를 촉진하였으며 구매력의 증대를 꾀함과 동시에 재정·금융정책을 통해 불황으로부더 탈출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렇듯 미국에서는 조직화가 비약적으로 진전됨과 함께 직종별조합 성격이 강한 미국노동총동맹(AFL)에서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가 분열하였으며, CIO는 AFL과 대등한 세력이 되었다. CIO는 석탄산업을 중심으로 그 때까지 조직화되지 못했던 분야라든가 흑인노동자의 조직화를 추진했으며 산업별 조합주의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이 자유주의 진영의 맹주가 되어 CIO의 급진성이 약화되자 AFL과의 노선 차이의 의의가 감소되어, 양자는 55년에 연합하여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가 되었다.

[현대의 노동운동]

제2차세계대전 후 노동조합의 세력과 권리는 한층 더 확대되었다. 단체교섭권과 사회보장이 확충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산업의 공유화와 노동자의 경영참가 등 새로운 시도가 실시되었다. 전후 위기의 극복 후 유럽 선진공업국에서는 경제성장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완전고용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노동조합의 교섭의 힘이 강대해졌으며 임금상승이 가속화되었다.

이 때문에 이들 여러 나라에는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로부터 외국인 노동자가 다량으로 이입(移入)되어 운동의 국제화와 함께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풍요한사회에서의 <노동(생산의 질)>이 문제가 되었으며 <노동의 인간화>가 중요한 과제로서 제기되었다.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운동과 이데올로기, 즉 노동자의 자주관리, 분권형·사회주의를 목표로 한 운동, 에콜로지운동, 반핵(反核)운동과 같은 시민운동, 여성해방운동 등이 대두되어 기존 조직에 문제를 제시하였다. 1973년 석유파동을 경계로 노동운동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크게 전환하였다.

저성장과 합리화의 진전은 실업의 증대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노동내용이라든가 취업구조의 변화를 초래했으며 고용의 확보, 직장의 유지가 다시금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조합조직률은 저하 경향에 있었다.

1979년 영국의 대처와 1980년 미국의 레이건 정권의 등장이 상징하는 정치의 보수화(保守化)는 복지국가의 위기, 대(對)노동조합 강경정책의 실시를 초래했으며, 프랑스·그리스·에스파냐에서의 사회주의정권의 출현 등 약간의 예외는 있었으나, 총체적으로 노동운동은 1970년대말 이후 수세(守勢)에 몰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국제노동운동]

K.마르크스·F.엥겔스의 <공산당선언(共産黨宣言)>에서의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강령(綱領)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의 국제적 통일은 쉽지 않아 이해와 이데올로기의 차이 때문에 국제노동운동은 협조의 분열, 대립을 되풀이해 왔다.

최초의 국제적인 조직으로서는 1864년에 창립된 국제노동자협회인 제1인터내셔널이 있었으며, 여기에서는 마르크스도 특히 이론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협회는 각국의 파업 지원 등 국제적 연대활동에 기여하였지만 파리코뮌의 붕괴 후 내부대립으로 활동이 정지되었으며 마침내 1876년에는 해산되었다.

이어 제2인터내셔널이 1889년에 결성되었다. 이것은 유럽 주요 각국의 노동자정당이 가맹하는 유연한 연합체였다. 요구조건으로 1일 8시간 노동제의 실현을 내세움과 동시에 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과 전쟁 반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제l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주요 가맹국의 정당들은 자기 나라의 전쟁정책 지지 쪽으로 선회하여 제2인더내셔널은 사실상 붕괴되고 말았다(전쟁 뒤에 다시 재건되었다). 또한 이 인터내셔널의 영향으로 각국의 노동조합 중앙조직을 결집(結集)하는 국제노동조합연맹(암스테르담인터내셔널)이 조직되었다.

러시아혁명의 성공후 1919년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계보와는 별개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인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각국의 공산당을 지부(支部)로 하고 모스크바의 본부에 지도권을 집중시키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으로 그 뒤의 국제적 혁명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코민테른의 영향 아래 1921년에는 적색(赤色)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이 조직되었다. 이렇게 해서 국제노동운동은 사회민주주의계(系)와 공산주의계의 2개 조직으로 분열했으며 그와 같은 대립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후 모든 나라의 노동조합을 결집시켜 1945년에 세계노동조합연맹(WFTU)이 결성되었지만 유럽부흥계획(ERP)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대립이 격화되어 분열하고 말았다.세계노동조합연맹에서 탈퇴한 조합(서유럽 여러 나라 대부분 및 AFL, CIO)은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을 결성하였으며 반공주의(反共主義), 반세계노동조합연맹 입장에서 세계노동조합연맹과 날카롭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 뒤 국제적인 긴장완화가 진척되자 반공을 제일로 생각하는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와 서(西)유럽제국 노동조합과의 사이에 대립이 생겨 1969년 AFL―CIO는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을 탈퇴하였으며 (1982년에 복귀),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은 70년에 세계노동조합연맹 가맹조합과의 2국간 접촉금지를 해제하였다.

[한국의 노동운동]

<일제강점기>

한국의 근대적인 노동운동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외세의 침입에 의한 자본주의화 과정에 따라 근대적 임금노동자층이 형성되면서 시작되었다. 부산·원산·인천 등의 항구가 개항되고 무역량이 증가하자 인근 농촌에 잠재되어 있던 과잉인구가 개항장으로 유입되어 부두노동자를 형성하였다.

또한 자본주의적 상품유입은 조선의 자급자족적 가내수공업을 파괴하였으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농민을 토지로부터 분리시켜 노동자로 만들었다. 이러한 임금노동계급의 형성을 기반으로 이미 19세기 말부터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노동쟁의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노동운동은 비조직적·자연발생적·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1920년대 전반에는 <회사령> 철폐에 따른 일제의 적극적인 자본수출과 결부되어 식민지공업이 발전하였고 공장노동자의 수도 급증하였다.

이렇게 성장된 노동자계급은 식민지통치하의 가혹한 노동조건과 민족해방투쟁·국제노동운동 등의 영향을 배경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근대적 노동운동의 효시는 1920년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와 노동대회(勞動大會)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단체는 선진적 지식인들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노동조건 개선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계몽단체 수준인 초기적 형태의 노동운동조직이었으나 최초의 전국적 노동자조직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노동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같은 해 10월 조선노동공제회는 공제회 잔류파와 조선노동연맹회로 분열되었으나, 그 뒤 증가된 노동운동단체에 대한 통합의 필요성이 고조됨에 따라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됨으로써 총체적 단결을 이루었다. 이 단체는 전국의 노동자·농민 단체를 총망라한 통일적 조직이었으나, 점차 노동자·농민 병행투쟁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여 1927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1920년대 후반의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높아지고, 직장별 노동조합이 산업별로 개편된 기초 위에 지역별 노동조합연합체로 발전하였다. 파업발생건수나 참가인원수도 현저히 증가하였는데 이는 노동운동이 초기의 자연발생적 성격을 벗어나 보다 조직적이며 적극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1920년대 후반의 노동운동은 선진적 지식인들에 의존하기보다 점차 계몽·각성된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노동운동이 노동자들 속에서 보편화되었다. 일제는 이에 대하여 1925년 치안유지법을 공포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하였으나 노동조합의 조직과 노동쟁의는 날로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탄압에 대응하여 노동운동은 자연히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일환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불황을 맞이하여 노동자들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즉 일제는 공황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1931년 만주침공을 감행하면서 대륙침략을 계획하였고 여기에 한국을 병참기지로 이용하기 위하여 새로운 중화학공장들을 건실하였다. 그리하여 근대적인 대규모 공장들이 늘어나고 노동자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임금인하·해고·노동시간연장 등으로 더욱 심화되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 30년이후 파업은 그 발생건수나 참가인원에 있어 모두 증가되어 1932∼34년은 파업투쟁의 최고조를 이루었다.

반면 전국적 노동자조직은 1930년대초에 이미 공백상태가 되어 있었고, 지역적인 연합체들도 간부들의 검거와 집회금지 등으로 사실상 불법화되었다. 합법적 활동이 불가능해진 노동운동은 쟁의방식이 시위·공장점거·공장파괴 등으로 점차 폭력화되었고 공산주의 운동과 밀착되어 비합법 적색노동조합운동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 운동은 주로 좌익적 입장을 가진 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지나치게 정치적이거나 극좌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체제하에서 경제투쟁조차 불법화되었던 상황을 전제로 평가되어야 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노동운동은 거의 불가능해져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쟁의는 겨우 태업에 불과하였으며 일부는 국외로 탈출하여 항일무장투쟁으로 전환하였다.

<1945∼60년>

광복과 더불어 노동운동은 폭발적으로 고양되어 1945년 11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이하 전평)가 결성되었다. 이는 1930년대 노동운동으로 검거되었던 좌익계 지도자들의 출옥과 함께 그 동안 축적된 대중적 기초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노동자들이 당면한 열악한 생활조건 등이 근본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전평은 8시간노동·최저임금제 확립 등을 강령으로 하여 처음에는 과격한 투쟁을 억제하는 우익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신탁통치의 찬반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 상황이 노동운동의 영역에도 반영되어, 1946년 3월에는 좌익계노동단체인 전평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군정의 비호하에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이 결성하였다.

이에 대해 전평은 미군정 반대의 정치투쟁으로 방침을 변경하여 46년 9월 총파업과 47년 3월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47년 6월 미군정은 전평계 노동조합을 일체 인정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좌익진영 사회단체에 대한 대량검거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공식활동이 거의 중지된 전평은 점차 비합법 지하투쟁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1948년 2·7파업과 5·8파업 등 정치적 파업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대중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정부수립과정에서 선봉대가 되었던 대한 노총은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자 유일한 합법노조로 인정되었고 그 명칭을 대한노동총동맹(이하 대한노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전평 이후 유일한 노동단체가 된 대한노총으로서는 최소한이나마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당시 전기·철도·은행·광산 등 주요 사업체가 정부귀속재산이었으므로 그 투쟁대상도 정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동맹세력이었던 이승만(李承晩)징권과 대한노총의 이러한 대립은 이승만이 자신의 반대파인 당시 위원장 전진한(錢鎭漢)을 몰아내고 자신의 재선을 지지하는 세력에게 대한노총을 넘김으로써 일단락되었고, 대한노충은 자유당의 하부단체로 어용화되었다. 그러나 상층부의 어용화와는 달리 단위노동조합들은 임금인상·노동운동보장을 요구하며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953년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54년 근로기준법 등이 제정, 시행되어 노동운동의 법률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1959년에는 대한노총의 어용성 탈피와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전개를 목적으로 전국 37개 노동조합연합체 중 23개 단체 대표 32명이 모여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국노협)를 설립하였다.

<1960∼70년대>

1960년 4·19 이후의 노동운동은 먼저 기존 어용노조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으로 전개되어, 어용화된 각 노조 집행부를 개편하는 한편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의 발전적 통합에 의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하 한국노련)이 결성되었다.

또한 노조의 결성은 정부 수립 이래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고 이와 함께 쟁의 또한 급격히 분출되어 동맹파업 등의 연대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그 밖에 이승만 정권하에서 크게 제약되었던 철도·체신·전력 등의 공무원노조의 활동과 교원·기자 등 지식인들의 노조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4·19 당시 고양되었던 노동운동은, 1961년 일어난 5·16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었다. 군사정권은 노동쟁의를 일체 금지하고 기존의 노동조합 및 노동단체를 해체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으며 노조간부들을 구속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노련은 결성된 지 반년 만에 강제 해산당하였고 61년 8월에는 군사정권이 지명한 9명의 <재건조직위원회>에 의하여 하향식으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하 한국노총) 및 산업별노조가 결성되었다.

1963년 4월에는 공익 중심의 노동행정과 쟁의행위의 제한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동법 개정이 단행되면서 노동운동의 환경은 더욱 열악해졌다. 한편 1960년대에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노동자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고 빈부의 격차와 노사간의 대립 격화, 사회적 불균형 확대, 정부의 노사관계 개입 등으로 노동문제는 계속 누적되었다.

1972년 유신헌법 공포 이래 외자도입에 의한 모순, 석유가격 인상에 의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경제가 악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으며 따라서 노동쟁의는 더욱 격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의 노동운동은 <광주대단지사건>을 시작으로 한 도시빈민운동과, <청계피복노조>의 전태일(全泰壹) 분신자살을 계기로 한 민주노조운동의 양태로 나다났다. 특히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이후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의 전반적인 확산과 함께 청년지식인들의 민중 지향성을 불러일으킨 계기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운동의 일대 전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리하여 지식인의 노동 현장 참여와 함께 민주노조건설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이는 유신체제라는 물리적 압력하에서 격렬한 양상으로 분출되었다. 한편 종교단체들이 노동운동에 깊이 참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도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이다.

1979년 유신체제가 무너진 뒤 노동자들은 근로조건 개선, 노조결성 등 노동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1980년 5월 비상계엄확대로 인하여 다시 위축되었다.

<1980년대>

1980년대초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강화되었던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1983년 다소 완화되면서 전(全)산업에 걸쳐 200여 개의 노조가 결성되었다. 1985년 6월의 구로공단 노동자연대투쟁은 대우어패럴노조에 대한 탄압에 대응하여 구로공단내 6개 업체가 동조농성에 들어간 사건으로 이는 노동운동이 경제적 이익을 넘어 구속자석방·노동3권보장 등을 요구하는 정치적 성향을 나타냈다는 점과, 1970년대 기업별 노조운동의 틀을 넘어 노조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한편 이를 계기로 정치투쟁을 중요 과제로 설정한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이 결성되었으나 올바른 목표와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1년만에 해체되었다. 1986년에는 노동운동의 사상과 이론을 구체적 현실에 조응시키기 위한 사상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대중적 실천에 바탕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운동의 통일성을 저해하고 분파주의의 폐단을 초래함으로써 노동운동은 다소 정체되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과 6·29선언에 이어 7∼8월 2개월 동안 약 3000여건의 쟁의가 발생하여 그 동안 누적되었던 갖가지 노동문제가 일시에 분출되었는데, 이는 6·25가 일어난 이래 최대규모의 노동쟁의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산업혁명 →프로핀테른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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