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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15 (월)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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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855      
[현대] 남북대화 (한메)
남북대화 南北對話

무력대결을 지양하고 대화로써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려는 남북한간의 노력.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각종 인적·물적 교류와 협력, 나아가 남북한 양 당사자간의 자주적 노력으로 정치·군사문제까지 해결하여 자주적·평화적 통일을 달성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노력은 정부수립 이전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에 의해 추진된 남북정치협상, 1945년 8·15 이후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수립 노력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주로 1970년의 <8·15 평화통일 구상 선언>으로 촉발된 70년대 이후의 평화통일 노력을 가리킨다.

[배경]

아시아의 첨병(尖兵)을 자처하던 미국은 70년대에 들어서자 <아시아문제의 아시아화>를 추진하는 닉슨독트린에 의해 월남철군준비를 본격화하는 동시에 한국에 대해서도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철수시켰고, 또 자유중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전후 냉전체제의 벽을 서서히 허물기 시작했다.

한편 60년대 이래 군사력강화에 중점을 두어온 북한은 제1차 7개년계획을 3년 연장하면서 이른바 공산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21청와대기습사건> <울진·삼척게릴라침투사건>을 일으키는 등 남북한간 긴장은 오히려 고조되었다.

정부수립 이래 대미외교를 근간으로 국가안보를 유지해 온 한국은 이같이 격화되는 북한의 무력도발과 미국의 정책변화에 직면하여 70년대 후반으로 미루었던 통일문제를 재고하게 되었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70년 광복절기념식에서 <평화통일구상선언>을 발표, 전쟁방지·평화정착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임을 강조하고 남북한간 군사적 대결구조를 선의의 경쟁구조, 즉 <개발·건설·창조>라는 경제건설경쟁으로 전환할 것을 제창했다. 이의 실천으로서 1971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하였고 북한도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남북대화가 시작되었다.

[1970년대의 남북대화]

남북대화는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 실무자간 비밀접촉이라는 3개 통로로 이루어졌다. 한국이 제일 먼저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한 것은 인도적 문제인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적대의식을 해소하고 평화통일의 디딤돌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공법 폐지 등의 정치적 문제를 결부시키는 북한의 태도로 인해 이산가족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① 남북직통전화 가설 및 판문점 연락사무소 설치 ② 본회담 의제 5개항 합의 ③ 쌍방 대표단 서울·평양 왕래 ④ 남북공동성명 발표 및 남북조절위원회 탄생 등 부차적 성과만을 낳았다.

남북적십자회담이 초두부터 난항을 거듭하자 한국정부는 1971년 11월 20일 한국적십자사의 정홍진(鄭洪鎭)을 북한의 대표 김덕현과 접촉시킴으로써 비밀접촉을 개시했다. 이러한 접촉의 결과 1972년 4월 서울의 중앙정보부장실과 평양의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실을 잇는 직통전화가 개설되었고, 5월 2일∼5월 5일에 걸친 이후락(李厚洛)의 평양방문과 5월 29일∼6월 1일간의 박성철(朴成哲)의 서울방문이 실현되었다.

비밀접촉에서는 주로 정치적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이 한창이던 1972년 7월 4일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이라는 원칙과 남북직통전화, 남북조절위원회의 설치를 공식화한 역사적인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남북적십자회담을 원활하게 할 정치적 대화통로로서 개설된 남북조절위원회는 6차에 걸친 회담에도 불구하고 통일방안에 대한 남북간의 입장 차이로 인해 결실을 보지 못했으며, 북한측이 직통전화마저 거부하여 중단되었다.

여러 가지 접촉과 제의도 성과가 없는 가운데 북한은 1973년 8월 28일 10월유신과 김대중납치사건을 구실로 한국의 정치를 공격하고 6·23외교선언을 2개의 조선을 노린 분단고착화정책이라 비난하며 모든 대화를 중단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후 한국측의 제의로 몇 차례의 남북적십자대표회의 끝에 1974년 7월부터 토의가 이루어졌으나, 우선 대화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조성이라는 북한의 주장이 반복되었고 결국 1978년 3월 19일 북한은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이유로 제26차실무회의를 무기연기, 대화가 종결되었다.

[1980년대의 남북대화]

1978년 중단된 남북대화는 1981년 1월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의 남북한당국최고책임자회담제의, 1982년 2월 손재식(孫在植) 국토통일원장관의 20개 시범사업실시제의 등에 대한 북한측의 남북정치인연합회의제의 등 상호 정치적 공방으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 개최결정과 미얀마폭탄테러사건으로 야기된 북한의 고립화, 세계적인 신(新)데탕트조류 속에서 1984년 북한의 남한에 대한 수재구호물자 인도를 계기로 대화재개의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1973년 이래 중단되었던 남북적십자본회담이 12년 만인 1985년 재개되었고 1984년 말부터 경제회담이 처음으로 성립되었으며 국회회담·로잔체육회담 등도 잇달았다. 이같이 특히 1985년 중 빈번했던 1980년대 전반의 남북대화는 북한에 의해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이유로 1986년 초 중단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자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시작된 공산권의 개방·개혁이 가속화되고 1985년 이후 미소정상회담이 해마다 개최되어 <중거리핵전력폐기협정(INF)> 등에 합의함으로써 긴장완화의 분위기가 현저해졌다.

또 일본·서독의 부상 등 세계의 다극화가 진행중이었으며,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암시하고 소련이 아시아의 일원임을 적극 주창하고 나서고 자유시장경제원리 도입 등 개방정책을 강화함으로써 극동의 정세도 급변하기 시작했다.

한편 노태우(廬泰愚)대통령은 1988년 7월의 <7·7선언>에서 10월 유엔총회연설에 이르기까지 남북교육당국회담 제의, 전향적(前向的) 대북외교시책 시행, 대북비난방송 중지, 북한 공산권 자료개방, 대북경제개방 조치, 남북정상회담 제의 등 각 방면에서의 남북적십자 본회담 개최와 제2차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상호교환방문을 추진키 위한 실무접촉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의 남북대화는 1970년대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대화통로가 적십자사·국회·경제·체육 등으로 다양화했다는 점으로, 그 만큼 남북한의 접점이 1970년대보다 폭넓어졌음을 의미한다. 둘째로 정치·군사적 문제 해결을 앞세우던 북한이 경제·체육회담에 응할 만큼 현실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셋째로 예술공연단·고향방문단의 교환같은 민간교류가 이루어지고 참가기자 수를 늘리는 등 왕래 인원이 많아졌다. 이러한 남북대화는 그간 강대국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온 한반도의 통일환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조성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발로라 할 수 있다.

<박동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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