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15 (토) 23:47
분 류 사전3
ㆍ조회: 1299      
[근대] 윤백남의 영화예술 (한남)
비극적 상황의 긍정적 전환

-윤백남의 영화예술-

1923년 4월 9일 오후, 서울 경성호텔(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뒤쪽 회현동 부근에 위치한 당시 최고급 호텔)에서는 총독부 및 각 신문통신사 인사 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편의 영화 시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초창기 우리 문학과 연극계를 포함한 문화계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윤백남(尹白南, 1888∼1954)이 감독한 영화 「월하의 맹서」가 일반 공개에 앞서 우선 관계자들에게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감독 윤백남의 인사말에서는 우리는 이 영화의 성격과 윤곽을 쉽사리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불초 소생의 ‘팔딱사진’을 보아주시러 나오신데 대하여 우선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총독부에서 돈을 대줘 만든 이 ‘팔딱사진’의 내용은 금융조합에다 돈을 맡기는 습성을 모두 길러 오늘보다 잘사는 내일을 만들자-이런 것입니다. 그럼 부끄럽습니다만 작품을 보아 주십시오.”

당시 36세의 혈기방강한 윤백남의 이와같은 인사말은 일견 데뷔 감독으로서 또는 나이에 비해 소극이며 한발 물러선 듯한, 혹은 자조적 뉘앙스마저 풍기게 한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 극영화를 만든 감독이 표출한 이 감회는 우리 문화의 한 장을 열게된 계기가 민족 자존, 자립의 배경을 둔 것이 아니고 일제의 침략 정책으로 하여금 우회적, 묵시적 수용을 가능케 해주는 미디어를 통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암울한 상황의 일단을 극명히 드러내 준다.

영화 「월하의 맹서」. 윤백남이 각본, 감독을 맡았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총독부 제작(삼 오일(森 吾一)이라는 일본인 명의) 제작비로 약 200원 (당시 쌀 1말에 80전내외)을 투입 이월화, 권일청, 문수일, 송해천, 안연민, 김응수 등의 출연으로 3권짜리 흑백 16mm영화로서 줄거리 역시 당시 제작된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하듯 하나의 기둥 줄거리에 몇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인 권선징악의 계몽극이다.

영득과 정순은 약혼한 사이이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온 지식청년 영득은 노름과 주색에 빠진 나머지 그 방탕함으로 인하여 집은 파산되어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때 정순의 부친이 평소 저축해 놓은 돈으로 빚을 갚게 되고 영득은 심기일전하여 새 사람이 되고 정순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미게 된다는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는 그후 약 1년 동안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일대에서 무료 공개되었으며 1924년에는 지방으로 내려가 전국에 걸쳐 일반에게 저축 장려를 고취하는 소기의 목적을 수행케 된다.

기법이나 작품성 그리고 영화적 성취도 등을 차치한다면 우리 나라의 영화역사의 뿌리는 경술국치 이후 고종의 승하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강압적 무단통치에서 잠시 우회하여 문화정책을 표방하면서 한국어로 된 신문ㆍ잡지의 발간, 학교교육 등을 허용하는 일방 당시 이땅에 전혀 생소하던 ‘활동사진’을 이용하여 정책선전에 골몰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일제의 한국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즈음하여 내외여론이 비등하면서 일본의 입장이 난처해지자 그들의 침략정책에 대한 위장선전의 목적 아래 많은 자금을 투입 정책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고안해낸 불과 수십피트짜리 영사용 필름을 세계 영화의 효시로 본다면 우리 영화도 이로부터 불과 20여년 안에 이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기와 배경에 있어 일제의 교묘한 문화정책 표방의 일환으로 형성되었음에도 근본적인 상황의 비극성이 내재하고 있다.

영화가 우리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간파한 일제는 더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한민족의 대부분이 활동사진을 경이와 찬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까닭에 정책선전 및 의식개조 목적에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매체였다.

우리 나라에서 매년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제정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음을 볼 때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가 4월 9일에 최초 공개된 사실과는 일치되지 않음을 본다. 말하자면 한국 영화의 기점에 관련된 논의에 있어 우리는 또 하나의 작품 「의리적 구투」를 거론하게 된다.

1966년 1월 한국영화인협회에서 공보부에 제출한 「영화의 날」제정요청 사유서에서 당시 영협회장 윤봉춘은 김도산의 작품 「의리적 투구」가 개봉된 1919년 10월 27일을 한국 영화의 기원으로 환산하고 있다. 1966년 4월 8일 공보부에서는 이를 실사, 인정함으로써 확정된다.

1919년 10월 27일 서울 단성사에서는 「의리적 투구」라는 연쇄극(극장의 무대에서 연극이 진행되다가 산, 바다, 평원 등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이 나올 경우 무대 복판에 광목으로 만들어진 영사막이 설치된 후 영사기로 투사되는 화면으로 펼쳐지는 일종의 혼합공연방식)에 삽입된 1천피트짜리 필름이 처음 공개된다. 이 작품은 당시 단성사 경영주였던 박승필이 출자, 제작하였고 극단 「시극좌」의 리더인 김도산의 각본과 감독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발명국이 아닌 도래국으로서 최초로 일반에게 공개된 날을 기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그것은 1903년으로 더욱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의 특수한 여건 아래 1903∼1919년까지 기간동안 외국인에 의해 건너왔고 그들의 사업 목적을 위하여 상영되었던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비록 연극에 삽입된 형태를 띠고 있는, 완전한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지만 최초로 우리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을 부각하여(그럼에도 불구하고「의리적 구투」의 제작 중심스텝인 촬영기사는 일본인이라는 취약점을 발견하게 된다)여기에 우리영화의 기원을 두게 된 것이다.

연쇄극 「의리적 구투」는 비록 1초당 회전수가 16커트로 정상적 액션보다는 급하고 빨라보이는 키노 드라마임에도, 향후 이와 같은 연쇄극은 3∼4년 동안 성행한다. 「의리적 구투」이외에도 「지기」,「학생절의」등이 초기의 유치한 신파극 내용을 담고 제작된다.

전통적 가문과 미국 유학이라는 극적 모티브의 대립, 계모의 간계와 겨이게 가해지는 응보 등 신파적 국면에 당시 암울했던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활동사진과 연극의 절충 형식으로 각광받은 연쇄극을 제작한 각 극단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일본의 신파연극이나 영화에 영향을 받고, 여기에 영합한 사회적, 지적 후진성이 상승하여 신파적 연기체계의 확립을 보게 된다. 초기의 연쇄극은 그리하여 당대의 지식층에 크나큰 실망을 주고 수삼년 내에 쇠퇴하게 된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윤백남이라는 존재의 위상을 헤아리게 된다. 연쇄극의 몰락 이후 극영화 제작 움직임이 별반 보이지 않을 때 나타난 「월하의 맹서」는 한국 극영화의 첫 작품으로 윤백남은 한국최초의 전문 영화감독, 최초의 독립프로덕션 설립자 등의 역할과 함께 이 땅에 무성영화시대의 도래를 맞는다.

비록 조선총독부의 재정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월하의 맹서」로 비로소 우리 영화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본격 영화 제작의 장을 열게 된다. 이유로는

ⅰ)그때까지 성행하던 주로 신파극 배우가 출연한 연쇄극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명실상부한 ‘영화’이며 ⅱ)각본ㆍ감독ㆍ출연진(신극배우 중심으로 민중극단 단원)이 모두 한국인이었고 ⅲ)한국인에 의하여 제작된 최초의 「극영화」였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당시 동아일보의 시사평에는

“체신국에서는 저금 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여 저금활동사진을 영사하던 중 제작일 밤에 체신국에서는 시내 경성호텔에서 각 신문통신사 기자와 관계자 백여명을 초대하여 그 필름의 시범영사를 하였던바 각본은 윤백남군이 만든 월하의 맹서라는 2천척의 긴 사진으로 내용이 매우 잘 되어 크게 갈채를 받았으며 그 필름은 경성을 비롯하여 각 지방으로 가지고 다니며 저금을 선전할 터이다.”

라고 보도하고 있다. 흥행영화는 아니었지만 당시 여건을 감안할 때 「한국영화측면비사」에서 안종화가 “…일종의 희극물로서 비록 감칠 맛은 없었으나 당시로서는 그럭저럭 볼만한 작품이었던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정치성을 내포한 단편실사 및 명승고적지의 실사 등 각종 실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그때까지의 영상수준을 과감히 뛰어넘어 일정한 주제 아래 독립된 영화로서 2천척이나 되는 작품으로 특기할만하다.

「월하의 맹서」이후 윤백남은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제1회 작품으로 「심청전」을 발표한다. 기획ㅗ제작 윤백남/제작비 약 800원/35mm 7권의 무성영화/감독 이경손/촬영ㅗ편집 서천수양 (일본인)/출연 나운규, 최덕선, 이경손, 김우연/1925년 3월 28일 조선극장에서 개봉, 흥행성적은 실패.

이땅의 무성영화시대 10여년간 42개 제작사가 명멸하면서 모두 158편의 영화를 만든다. 상업적 자본구조의 취약, 실무 경험 및 기자재의 부족 등으로 인하여 대개 1개 회사가 한 작품을 끝으로 문을 닫는 부침 속에서도 우리는 1924년 6월 발족한 「조선키네마사」에 주목하게 된다.

이 회사는 일본인 실업가가 설립한 제작사로 윤백남이 설립한 「윤백남프로덕션」과 함께 초창기 영화시대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당시 김해합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윤백남은 「조선키네마」에 월봉 150원으로 초빙, 「운영전(일명 총희의 연)」의 각본-감독을 맡는다.

1925년 1월 17일 개봉된 「운영전」은 각본ㅗ감독 윤백남/제작비 약 800원/촬영ㆍ편집 서천수양/35mm 6권의 무성영화/출연 김우연, 안종화, 이채전, /단성사에서 개봉되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한 바 세종대와의 4남 안평대군의 총희 운영과 그녀를 연모하는 김진사가 급기야 도피행각 끝에 비상을 마시고 자살한다는 범용한 통속궁중물인 이 작품에서 나운규는 단역인 가마꾼으로 데뷔한다.

그후 그는 윤백남과 긴밀한 관계를 지속하면서 1920년대 후반 윤백남의 영화 「침묵」을 고비로 1926년 「아리랑」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기수로 부각된다. 나운규도 윤백남과 같이 각본-감독 이외에 직접 주연을 겸하면서 내용과 표현기법의 참신성과 탁월함으로 우리 영화의 맥을 이어간다.

1927년 나운규는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 「잘있거라」,「옥녀」,「사랑을 찾아서」,「사나이」,「벙어리 삼룡」등 다섯 편의 작품에 각본-감독-주연을 겸하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1923년부터 1929년 무성영화말기까지 데뷔한 감독은 모두 20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중 윤백남, 나운규의 존재가 괄목할 만한 까닭에 침묵, 이경손, 이필우 등 재능있는 감독들의 활약이 크게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의 설립은 여배우 김우연의 데뷔, 나운규의 등장뿐만 아니라 ‘순 조선영화의 제작과 외국사진의 수입’이라는 가히 현대적인 영화기업 취지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영화사에 한 연대기로 등재될 수 있다.

부산 소재 「조선키네마」에서 윤백남이 만든 「운영전」은 한국적 정서와 향수가 충문함에도 불구하고 템포와 기법 등에 있어 아직 구태의연함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윤백남과 「조선키네마」사원 이경손, 나운규, 주인규, 윤갑룡, 일본인 서천 등의 도움으로 세운 「윤백남프로덕션」의 제 1회 작품은 「심청전」이었다.

「운영전」에서 엑스트라인 가마꾼으로 얼굴을 내민 나운규는 이 영화에서 심봉사역을 맡음으로써 일약 주연급으로 부상한다. 동시에 윤백남은 연구생 10명을 선발, 체계적 교육과 현장실습을 통하여 후진양성을 도모한다.

이 때 선발된 전창근 등의 후일 활약과 한국 영화에의 기여 등은 「윤백남프로덕션」의 존재 자치와 선구자적 역할을 크게 기록하게 된다. 윤백남의 대부분 작품이 그러하듯이 흥행에서 여지없이 실패한(당시 극영화의 예외 없는 흥행참패의 원인 및 배경에 관한 분석은 따로 사회적, 심리적 혹은 영화기법적 전달문제라는 각도에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심청전」의 여파로 제2회 작품인 춘원 이광수의 「개척자」는 끝내 완성되지 못하고 향후 「고려키네마」명의로 공개된다. 이로써 「윤백남프로덕션」은 최초이자 마지막 작품 「심청전」에 부여된 비교적 높은 수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흥행부진과 함께 문을 닫는 불운을 겪는다.

「개척자」제작도중(감독 이경손) 윤백남은 「심청전」을 일본에 수출하기 위하여 일본에 간너갔지만 여의치 않아 부득이 장기 체류하는 동안 「윤백남프로덕션」은 해체되는 운명을 맞는다. 그러나 이 영향으로 많은 독립 프로덕션이 설립되어 영화 제작열을 고취시키게 된다.

「심청전」에 이어 「개척자」의 제작을 기도했던 윤백남의 독창적 영화관, 영화노선은 성공여부, 흥행실적을 떠나 일제하에서, 영화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통하여 선명하게 드러나는 민족자존, 자긍의 방향모색에 뿌리를 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후 윤백남의 영화 활동은 그를 중심으로 이기세, 염상섭, 김을한, 안종화, 양백화 등이 만든 조선문예영화협회(1928년 발족)으로 이어진다. 영화에 대한 학문적, 전문적 연구와 아울러 신인 배출 등을 시도한 이 단체에서 우리는 「윤백남프로덕션」시절 그가 완성해내지 못한 영화에의 정열, 우리 영화의 맥락계승이라는 초지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강한 집념을 헤아려보게 된다.

1930년 11월 20일 개봉된 「정의는 이긴다」의 감독을 끝으로 윤백남은 영화계 일선을 떠난다. 35mm 7권의 무성영화인 이 작품은 제작비 2,500원을 투입한 동아일보사 제작의 기록물로 이때 이미 우리 영화계는 지속되는 흥행부진과 강화되는 총독부의 검열 등으로 인하여 영화제작 편수는 급격히 감소일로 걷는다(1930년 10편제작…1932년 2편…).

「홍길동전」의 각본 등으로 이어지던 윤백남의 외면적인 영화활동은 종언을 맞고 식민통치하에서 겪는 우리 문화의 흑심한 수난과 때를 같이 하면서 그 불길은 안으로 타오른다. 이미 43세의 장년에 접어든 윤백남으로서 가열되는 식민지지배의 질곡, 군국주의의 용렬한 명분 속에 신음하는 예술의 빈사상태 아래에서 이미 떠난지 오래인 연극은 물론 영화에 대한 입지를 찾지 못하게 됨은 당연한 귀결일까.

1934년 만주로 건너가 귀국할때까지 그는 소설에 전념한다. 대중소설 「사변전후(1937. 1. 12∼, 매일신보연재)」, 소설 「대도전,(1935. 7, 삼천리)」, 개척민을 주제로 한 「벌통((1945. 1, 신시대)」등을 발표하고 영화에 대한 집념과 끈질긴 애착의 산물인 영화소설 「바다로 가는 사람, (1937. 1, 서해공론)」을 남기는 등 다른 환경 아래에서도 왕성한 창작열을 과시하였다.

독립프로덕션의 활성화, 조선문예영화협회육성 등 그의 의욕은 당초의 의지대로 관철되지 못하였으나 그 결실은 많은 불세출의 예술가의 전철 밟기나 하듯 동시대의 개화와 인정보다는 후대에의 영향과 공헌으로 귀결되었다.

우리 문화의 개화시대에 남보다 앞서 문화의식에 눈뜬 한 선각자의 의욕적 자기표현으로 치부할 것인가, 필경 하나의 제한된 장르에 만족할 수 없어 문학-연극-영화-매스컴 등 가능한 모든 국면에 자기의 가능성의 경주를 시도한 장인, 재인의 분방함인가, 윤백남의 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는 이런 의미에서 그가 활동한 각 분야의 개별적 분산성을 보완하여 통시적, 다원적 측면에서 종합적인 조명이 필요할 것이다.

가령 우리가 살펴본 그의 영화 예술에 있어서도, 장면설정 극적전개-연기감각의 이해를 위하여는 그의 연극활동과 그 의식을 원용하여야 할 것이며 각본의 플롯, 구성과 언어 구사력의 이해를 도모키 위해서 소설을 비롯한 문필가 윤백남의 면모를 선행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그가 영화에 담은 민족의식과 계몽적 메시지의 일단을 드러내려면, 교육계 시절의 체험과 사상, 혹은 족적을 이해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의 현실참여 의식 및 예술의 사회적 사명이 영화에 투사된 양상을 포착하려할 때 해방 후 고령의 참전, 교육 문화계의 활동을 참고할 수도 있고 영화와는 상이한 대중전달매체인 방송제작에서 그가 보여준 가치관을 대비시킨다면 윤백남 에스프리의 특징적 경향이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시도한 윤백남 예술에 대한 몇 갈래의 탐사작업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다 광범위하고 본격적인 연구를 향한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한다. 자신의 의욕에 찬 포부인 영화예술에의 입문에 즈음하여 일제 당국의 지원 아래 저축장려라는 계몽성이 부과되었을 때 그가 느낀 부담감 혹은 구조적 모순에 대한 거부감은 필경 새로운 점화로 이어져 십년도 채 못되는 그의 영화활동기간 동안 줄곧 안으로 연소하는 분화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해방 후 그가 맡았던 마지막 영화계활동이었던 조선영화건설본부 위원장시절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모순의 출발이 결국 만들어 놓은 자발적, 긍정적 전환의 좋은 예증임을 믿게 한다.

출전 : 한남대학교 유럽어문학부 홈페이지
   
윗글 [현대] 신동엽 (한메)
아래글 [근대] 찬송가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628 사전3 [현대] 조지훈 (문화) 이창호 2004-01-02 1302
2627 사전3 [근대] 신채호 (독립) 이창호 2003-05-17 1300
2626 사전3 [현대] 육이오-휴전의 성립 (민족) 이창호 2003-12-01 1299
2625 사전3 [근대] 윤백남의 영화예술 (한남) 이창호 2003-11-15 1299
2624 사전3 [근대] 김소월 (브리) 이창호 2003-11-13 1299
2623 사전3 [현대] 신동엽 (한메) 이창호 2004-01-06 1298
2622 사전3 [근대] 찬송가 (민족) 이창호 2003-05-21 1296
2621 사전3 [조선] 갑오개혁 (브리) 이창호 2003-03-02 1296
2620 사전3 [현대] 대한민국14-참고문헌 (브리) 이창호 2003-11-29 1293
2619 사전3 [조선] 단발령 (민족) 이창호 2003-03-11 1293
1,,,41424344454647484950,,,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