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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01 (월) 12:46
분 류 사전3
ㆍ조회: 1299      
[현대] 육이오-휴전의 성립 (민족)
육이오(휴전의 성립)

세부항목

육이오
육이오(전쟁의 진전과 남한의 공산통치)
육이오(웨이크회담과 중공군의 개입)
육이오(휴전의 성립)
육이오(전쟁의 영향)
육이오(참고문헌)

[판문점 회담]

간헐적으로 논의되던 휴전문제는 쌍방의 필요에 따라 다시 구체화되었다. 이번에는 소련 유엔대표인 말리크(Malik,J.)가 6월 23일 총회연설에서 제기하였다.

유엔군 내의 동맹국들 사이에서는 제한전쟁으로 휴전 기운이 일고 있었던 한편, 공산측은 유엔군의 제공권 때문에 막심한 피해를 입어 승산이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담을 감내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러한 쌍방의 분위기 속에서 말리크는 교전제국이 휴전을 위한 토의를 시작하자고 제의하였다. 1주일 후에 릿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북한의 김일성과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에게 휴전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공산측이 수락함으로써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다.

회담은 처음에는 비교적 원활히 진행되어 7월 26일에는 의제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이후 일차적인 어려움은 양군의 경계선의 책정문제였다.

이미 38도선을 넘어서 진출하고 있던 미국은 양군의 접촉선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주장한 반면에, 공산측은 38도선의 원상회복을 고집함으로써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8월 22일에 공산측이 회담의 중단성명을 냄으로써 회담은 정지되었다.

회담이 중단되자 전투는 다시 격렬해지고 ‘단장의 능선’ 탈환 등 제한전쟁중에도 전과는 컸다. 약 2개월간의 회담정지 후 유엔군사령관 릿지웨이의 제안에 따라 10월 25일부터 휴전회담이 판문점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공산측은 접촉선을 군사경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측의 주장에 양보하고, 11월 27일에는 중립국 감시위원회 설치에도 동의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어려움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포로 송환문제였다. 즉, 포로의 강제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에 대한 의견대립이었다.

유엔군측은 많은 북한군 포로가 전쟁중 강제징집된 뒤에 투항하였고, 또한 많은 한국군 포로가 공산군에 강제 편입된 사실과 중공군 포로 가운데 중공에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들을 이유로 포로의 송환은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공과 대만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송환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공산측은 모든 포로는 당연히 원래 소속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의견대립 때문에 포로교환문제소위원회는 1952년 2월 27일부터 2개월 가까이 중단되었다.

이 기간 동안 북한에는 유행병이 만연하였고, 북한은 이를 유엔측의 세균전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사실 조사를 위한 국제적십자 조사위원회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4월 9일에 포로교환문제위원회는 비밀 회의로 재개되었고, 여기에서 공산측은 포로 전원을 귀환 후에 처벌하지 않겠으며, 각각 면접을 통해 자유의사를 확인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유엔측이 귀국 희망자가 약 8만3000명(북한에 7만6600, 중공에 6,400)이라고 통고하자, 공산측이 다시 강제송환을 주장하면서 소위원회는 결렬되었다.

4월 28일과 5월 2일에 쌍방에서 다른 문제와 일괄타결을 놓고 의견을 교환했으나, 포로문제 때문에 회담은 결렬된 채 한국의 휴전문제는 이제 국제사회의 정치선전으로 발전되었다.

[지도자 교체와 회담재개]

포로교환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졌던 휴전회담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1952년 5월 7일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반란사건과 수용소 사령관인 돗드(Dodd,F.T.) 장군 감금사건이었다. 그곳의 공산군 포로들은 비밀통제조직을 결성하여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위협하고 테러를 가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엔군사령관 릿지웨이 장군은 미국 대통령에 입후보하기 위하여 사임하는 아이젠하워(Eisenhower,D.D.) 장군의 후임으로 나토사령관으로 전보되고, 클라크(Clark,M.W.) 장군이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클라크 장군이 부임하자 회담 재개전략의 일환으로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고, 6월 22일에는 거의 성역으로 되어 있던 수풍댐까지도 폭격하는 강경책을 택하였다. 또한, 유엔 공군기와 새로이 등장한 공산측의 미그 15기의 공중전이 빈번해졌고 전투는 다시 격화되었다.

한반도에서 일진일퇴의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1952년 11월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있었으며, 그 결과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당선되었는데, 그는 당선되면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었다.

한국전쟁의 정치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인에게는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른 불만과 권태로 정전을 약속한 공화당 후보에게 20년 만에 처음으로 정권을 맡긴 것이다.

약속대로 아이젠하워는 당선 직후 한국전선을 방문하고 귀국 기자회견에서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을 것을 명백히 함으로써 공산측에 군사적인 압력을 가하여 휴전회담에 응하게 하려는 클라크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2차대전의 영웅인 아이젠하워와 강경 정책의 대표인 덜레스(Dulles,J.K.)의 국무장관 취임은 공산측에게 심리적인 압력으로 작용했다.

휴전회담이 교착된 상태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두 가지의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첫째로는 1952년 12월 3일 제7차 유엔총회에서는 인도가 제안한 포로송환에 관한 결의안을 압도적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즉, 체코·폴란드·스웨덴·스위스 등 4개국으로 송환위원회를 구성하여 포로를 120일간 그 위원회에서 설득하여 가고 싶은 곳으로 송환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포로의 자유송환이라는 이유로 소련과 중공이 반대하였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1953년 3월 5일에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였고, 이로 인하여 전기를 맞은 것이다. 3월 28일에 공산측은 휴전회담의 재개를 제의하였고, 소련의 새 지도자들과 협의를 마친 중국의 주언라이 수상은 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포로를 중립국에 맡겨 그들의 귀국문제를 정당하게 해결하자는 새로운 제의를 하였다.

4월 11일에 이르러 상병포로교환협정이 성립되어 20일부터 교환이 시작되었다. 또한, 4월 26일에는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중립국 감시위원단 구성에 대하여 양쪽은 인도안에 동의하여, 즉시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를 관리하는 중립국으로 인도를 지정하는 데까지 합의하였다.

[반공포로의 석방]

1953년 3월 이래 휴전회담이 급속히 진전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저항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 온 북한의 침략전쟁을 분단상태로 마감하려는 데서 한국의 통일정책이 좌절을 겪게 된 것이다.

더구나, 공산군의 점령치하에서 강제로 의용군에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되거나 또 국군 포로로 공산군에 강제 편입되었다가 다시 포로가 된 반공 포로를 공산측에 양도한다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승만은 휴전은 일종의 자살행위이며 필요하다면 한국군만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공언하였다.

클라크 장군과 브릭스(Briggs,E.O.) 주한 미국대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휴전회담이 재개되기 이틀 전인 4월 24일에 아이젠하워에게 중공군이 북한에 주둔한 상태에서 휴전이 성립된다면 한국을 유엔군사령관의 지휘권에서 빼내겠다고 통고하였다.

한국민들도 통일정책을 지지하여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5월 12일에는 포로 관리를 위한 인도 군인의 입국마저도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미국은 협상의 주역인 클라크로 하여금 공산측을 설득할 것과 그것이 안될 때 확전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또한 인도정부를 통해 중공을 설득하도록 하였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한국 정부를 휴전에 동의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 조건으로는 한국에 대한 경제·군사 원조에 관한 아이젠하워의 친서를 이승만에게 보내 휴전에 동의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승만의 태도는 완강하여 한국 대표로 하여금 휴전협상을 거부할 것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5월 30일에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모든 외국군의 동시철수를 제안하였다.

6월 4일에 공산측은 유엔측의 최종안에 원칙적 동의를 보내 왔고, 6일에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휴전성립 후에 한미방위조약을 교섭할 용의가 있으며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계속할 것을 약속하였다.

드디어 6월 8일에는 한국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양측은 포로송환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반공 포로’의 송환을 놓고 한국 정부의 태도가 가장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였다.

한국 정부를 무마하기 위하여 이승만의 미국방문을 청하였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한 채 6월 18일 새벽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사전예고도 없이 한국포로 감시원에게 명하여 2만7000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를 석방시켜 버렸다.

이승만은 이것이 자기의 명령임을 명백히 하고 군경에 대하여 석방된 반공포로를 보호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돌발사태 속에서 공산측은 미국을 이승만의 공범자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한편, 미국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해명하기에 바빴고 단지 휴전교섭을 파기시키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새로운 한미관계와 제네바협정]

미국은 이승만을 설득하기 위해서 더욱 구체적인 교섭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자, 1953년 6월 25일 국무차관보 로버트슨(Robertson,W.S.)을 대통령특사로 파견하였다. 16일 간이나 서울에 머물면서 이승만의 동의를 얻기 위해 교섭을 했으나 이승만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전투는 계속 진행되었고, 특히 한국군의 방어선에 대한 집중 공격이 행하여졌다. 경계선을 확정하려는 마당에 오히려 상황이 불리하게 진전되었으므로 7월 11일 마침내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하였다.

이때 미국이 제시한 조건은 크게 네 가지이다.

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시작한다.
② 장기간 대한 경제원조를 제공한다.
③ 휴전협정 성립 후에 개최될 한국의 정치적 통일에 대하여 90일 간 아무런 구체적인 성과가 없을 때 미국은 그 회의에서 탈퇴한다.
④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미국의 원조 약속 등이다.

이로써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이루어짐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친 승리 없는 전쟁은 막을 내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협정이 서명되던 바로 그 날 미국 의회에 대하여 대한 경제원조의 확대계획을 제출하여 승인을 받고, 그 날 유엔군으로 파병된 16개국은 장래에도 한국에 대한 침략에 대하여는 공동으로 대처하겠다는 공동선언을 하였다.

또한 휴전성립 10일 후인 8월 7일에는 덜레스가 서울에 와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기에 이르렀다. 가조인 서명 때의 공동선언에서 고위 정치회담에서는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구할 것과 90일 이후에도 성과가 없을 때 양국은 동시에 회담에서 탈퇴할 것에 합의하였다.

8월 28일의 유엔총회는 한반도문제를 둘러싼 정치회담의 개최를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10월 26일부터 다시 판문점에서 정치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소련의 참가여부를 둘러싼 문제였고, 공산측은 인도처럼 중립국의 자격으로 참가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2월 13일에 유엔대표인 딘(Dean,A.)이 회담의 결렬을 선언함으로써 무기휴회로 들어가 버렸다. 그 동안 유엔측은 1954년 1월 23일에 설득기간이 지난 송환거부 포로 2만3000명을 석방하였다.

그 뒤 4월 26일부터 4대 강국과 중공, 남북한 그리고 유엔 파병국들을 포함한 외상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렸다. 7월 21일까지 약 3개월에 걸친 제네바회의는 인도지나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하는 남북 월남을 분할하여 휴전을 성립시켰을 뿐, 한국의 통일문제는 예상했던 대로 어떠한 실마리도 풀지 못하였다.

한반도문제는 6월 15일에 유엔 파병 16개국이 토의 종결 선언을 남긴 채 끝남으로써 분단상태가 지속되고 휴전협정만이 유일한 공식문서로 남게 되었다.

<오기평>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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