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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17 (토) 14:41
분 류 사전3
ㆍ조회: 1300      
[근대] 신채호 (독립)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독립기념관-이달의 독립운동가, 1996년 2월

단재 신채호는 1880년 충남 대덕군 산내에서 신광식(申光植)과 밀양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단재,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적심(赤心)·검심(劍心)·연시몽인(燕市夢人)·한놈, 가명으로 유맹원(劉孟源)·윤인원(尹仁元)·왕국금(王國錦)·왕조숭(王兆崇),·박철(朴鐵)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8세경 부친이 요절하자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 노부가 경영하던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온 절도로 총명하였다고 한다. 18세때에는 조부의 소개로 목천(木川)에 거주하던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를 왕래하며 그의 장서를 섭렵하였고, 그이 소개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당시 신채호는 옥렵협회운동에도 참여하였고, 한때 향리로 돌아와 신규식(申圭植)과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 활동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6세이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기자와 주필로서 활약하였다. 이후 1910년 망명할 때까지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學部)」, 「한일 합병론자에게 고함」 등의 논설을 통해 항일언론운동을 펴는 한편, 『영웅과 세계』, 『을지문덕』,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 등을 발표하여 이른바 영웅사학을 펼쳤다.

또한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전통시대는 물론 당시 학부에서 편찬한 역사서를 비판하며 『참 조선사』를 강조하였다. 특히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중세적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 역사이론을 제시하고 있어 한국근대역사학의 성립기점으로 평가되는 획기적인 것이다.

한편 1907년에는 양기탁(梁起鐸) 등이 주도했던 신민회의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논설을 통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듬해에는 순한글잡지인 『가정잡지』를 발행하였고, 1909년에는 윤치호 등과 청년학우회를 발기, 그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그러나 국인이 크게 기울자, 1910년 4월 그는 이갑(李甲)·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정주의 오산학교와 안동현을 거쳐 청도(靑島)에 도착,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방략을 협의한 후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그는 이곳에서 윤세복(尹世復)·이동휘(李東輝) 등과 한인 사회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해조신문(海朝新聞)』, 『청구신문(靑丘新聞)』, 『대동공부(大東共報)』, 『권업신문(勸業新聞)』의 발행에 관여하거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3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해로 온 신채호는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는 한편, 박은식(朴殷植)·문일편(文一平)·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 한인의 민족교육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듬해에 윤세복의 초청으로 만주의 회인현으로 가서 동창학교(東唱學校)의 교사로 재직하는 한편 『조선사』의 저술에 착수하였고, 백두산과 광개토왕릉을 답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제6회 의정원 회의에서 해임될 때까지 의원과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발간에도 관여하였다. 당시 그는 국무총리 후보로 천거되기도 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국내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선발한 조사원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른바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는 등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노선 차이로 『독립신문』과 대립적인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주필이 되어 임시정부를 비판하다가 이듬해에 북경으로 돌아가 보합단(普合團)의 조직에 참여, 내임장(內任長)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임시정부가 극도로 약화되어 제기능을 하지 못하자 신채호는 1921년 4월 20일 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승만을 성토하는 글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 회에서는 난국 수습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요구한 바, 그는 김정묵(金正默) 등과 통일책진회발기취지서(統一策進發起趣旨書)를 발표하였다.

1923년 1월초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그는 여기에서 이른바 창조파(倉曹波)의 대표격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개조파(改造波)와의 대립으로 인해 5월 회의가 결렬되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는 한편,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여 지도하는 등 독립투쟁을 병행하였다. 당시 그가 작성한 의열단 선언문(조선혁명선언)은 폭력에 의한 민중의 직접혁멱을 강조한 것으로 주목되는 것이다.

한국고대사에 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신채호는 1920년대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을 저작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조선일보』·『동아일보』에 많은 글을 연재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학의 특징은 철저한 민족주의 사관에 바탕을 두고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을 뱨격하였으며,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하는 한편, 실증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사학의 정립자로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에 지나친 편향으로 역사이론과 상고사인식에 교조적(敎條的)인 부분이 있음이 지적되기도 한다.

1925년경부터 그는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보이는데, 1927년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丁部主義東邦聯盟)에 가입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북경에서 열린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1927년 신간회 결성시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과 함께 그의 다원적 독립투쟁 방법론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28년 그는 독립운동 선전기관 건립과 폭탄제조소 건립자금 마련을 위한 대만인 무정부주의자 임병문(林炳文)과 협의 외국위체권(外國爲替券) 2백여 매를 위조하여 대만의 기륭항(基陸港)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수상서원(水上署員)에 피체되어 대련(大蓮)으로 호송,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던 중 1936년 5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적으로 기리기 위하여 1962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전 : 독립기념관-이달의 독립운동가,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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