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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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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720      
[현대] 대한민국8-경제 산업 (한메)
대한민국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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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산업

[총론]

세계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은 브라질·멕시코·타이완 등과 함께 신흥공업국(NIC;New-ly Industrialized Country)으로 분류되고 있다. 196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불충분한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은 61년과 80년 사이에 실질소득이 3배 이상이나 증가하였으며, 세계에서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한국경제 발전은 외국자본의 도움이 컸는데, 그 중에서도 미국자본의 도움이 컸다. 따라서 외국, 즉 미국·일본·독일에 대한 한국의 채무액은 1972년까지 줄잡아 30억 달러에 달하였다. 한편 한국경제는 6·25로 인한 파괴와 남북한의 전통적인 경제적 연관의 해체로 말미암아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국경제는 1960∼70년대의 개발과정에서 적극적인 외자도입 정책과 공업화 전략의 추진으로 농·공업간의 발전 격차가 확대되었으며,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고 전반적인 투자효율은 저하되어 한국경제 체질은 약화되었다. 더욱이 외자도입이나 정책금융의 기회가 대기업에 집중됨으로써 경제력의 집중이 초래되고 높은 물가상승과 부동산투기로 인한 소득분배 구조의 악화와 함께 사회적 갈등이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전반에 정부는 고질적인 인플레이션 타성을 단절하고 물가안정과 국제수지의 흑자전환, 자력성장의 토대마련, 산업의 체질강화를 위해 특정산업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고 각종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한편 공정거래제도의 도입과 수입자유화 계획의 추진 등으로 자유시장 경쟁원리의 도입·확산에 주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용안정과 근로자 복지향상,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재정투자의 확대와 농어촌 종합대책의 추진에 의한 농어가 소득증대, 교육환경개선과 의료보장의 확대 및 주택건설의 확대로 국민생활 기본수요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였다. 또한 국민복지증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88년부터 농어촌 의료보험과 한국 실정에 맞는 사회복지제도의 기본틀을 발전시키며, 그동안 성장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저소득층의 생활향상을 뒷받침하도록 하였다.

<현황>

1992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2945억 달러(22조 9938억 원)이고, 1인당 국민총생산은 6749달러였다. 총저축률은 34.9%, 총투자율은 35.9%, 대외투자율은 1.5%를 나타냈고 조세부담률은 19.4%에 이르렀다.

연간 수출은 766억 3100만 달러, 수입은 817억 7500만 달러로 51억 4300만 달러의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였다. 일본과의 교역에서 수출액 115억 9945만 달러, 수입액 194억 5765만 달러를 기록함으로써 78억 5820달러의 적자를 나타냈으며 미국과의 교역에서는 수출액 180억 9004만 달러에 수입액 182억 8726만 달러로 적자규모는 1억 9722만 달러에 이르렀다.

한편 산업별인구는 취업자수 l892만 1000명 가운데 농림·어업분야가 302만 5000만 명, 광업 및 제조업이 482만 8000명,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이 1106만 8000명을 차지하였다. 총경제활동인구 1938만 4000명 중 취업자수는 1892만 1000명(남 1131만 2000명, 여 760만 9000명)이며, 실업자수는 46만 3000명으로서 실업률은 2.6%로 나타났다.

한국경제는 정부 주도형 대외정책에 의해 양적인 성장은 어느 정도 달성하였으나 대외여건의 변화에 민감하고 부문간의 불균형성장과 분배의 불공정 등에 의해서 경제구조는 취약한 형편이다. 1993년 한 해 동안 경제성장률은 1992년의 4.7%에서 5% 내외로 약간 높아졌다.

산업별 성장률을 보면 서비스업이 견조세(堅調勢)를 보이고 건설업도 전년의 마이너스성장에서 벗어나 4.6% 증가하였으며, 통신업을 중심으로 다소 높은 성장을 보였다. 제조업은 회복세가 계속 미약한데, 일부 중화학공업의 높은 성장에도 불구하고 내수관련 업종과 경공업이 저조하여 3.8% 성장에 그쳤으며, 농림어업 생산은 감소하였다. 대외거래에서는 경공업제품의 수출이 계속 부진한 반면, 중화학공업제품 수출은 계속 증가하였고, 수입은 수출용 수입이 증가한 반면 자본재·원자재 수입은 감소하였다.

[한국경제의 전개과정]

<8·15이전의 한국경제>

동아시아권에 뿌리를 둔 한민족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 물론 7세기경에 들어오면서 농업·목축업·어업·수공업 등이 발달하고 무역 등이 다소 발전하였다고 하지만 한민족의 경제적 토대는 토지를 근간으로 하는 농업이었다.

그러나 10세기를 넘어오면서 토지제도와 조세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부터 한민족의 경제는 이 두 제도를 운영하는 방식에 따라서 빛과 그림자가 수없이 교차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에는 면세지의 증가, 조세징수의 폐단으로 말미암아 국가재정의 고갈과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생활의 궁핍화가 초래되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이를 해결하고자 대동법 등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 본격적인 경제적 변화를 예고한 것은 이른바 실학의 발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학은 현실적인 문제에 근본을 두고 출발한 학문으로, 청나라의 고증학과 서학의 영향하에서 비롯되었다. 실학은 부국(富國)의 원천을 다각적인 경제부흥책에 의해 실증적으로 찾아보고자 했던 근대적인 경제의 실마리를 제시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활발한 기술개발과 대외교역 확대에서 경제부흥을 기하자는 중상학파라든지 농업의 진흥과 제도개혁을 주장한 중농학파 등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식민지쟁탈을 일삼던 제국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풍미하고 있었던 까닭에 조선의 개항은 곧 침략국 일본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곧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인 강화도조약(1876)이다.

이후 한국경제는 일본에 의한 하나의 식민지경제로 전락해 가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독자적인 민족자본 축적이라는 절대적인 근대경제의 토양형성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걷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자 총독부는 전국 농토의 40%를 대가없이 수탈하였으며, 한국 산림의 50%를 총독부와 일본인이 차지하였다.

일본 어민을 한국에 이주시켜 황금어장을 독점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광산의 2/3 이상을 침탈하였다. 한편 총독부는 산업 경제권·금융권을 장악하여 민족기업의 성장을 가로막았고, 나아가서는 철도·항만·통신·항공·도로 등을 독점하였으며, 담배·소금·인삼 등을 전매하였다. 초기 일본정책은 한국을 식량 및 원료공급지화하고 나중에는 일본의 하부경제로 귀속시켰다.

<자유경제체제>

1948년에 규정된 제헌헌법의 경제조항이나 정부수립을 전후하는 기간중의 경제질서는 자유경제체제를 표방하되 광범위한 국가의 규제를 제도화하였다. 또 이것을 정책으로 삼았던 것은 경제질서의 기본 이념인 경제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조화시키려 했던 노력의 산물인 동시에, 이상과 현실의 타협에서 생겨난 소산이었다.

왜냐하면 민족자본의 열악, 생산구조의 불균형과 생산위축, 기업의 비근대화 등에 집약되는 경제기반의 취약성은 남북분단으로 더욱 가중되었을 뿐더러, 해외 귀환동포나 북한으로부터의 월남동포의 증가로 인구가 격증함에 따라 실업자수도 급증하였고,

이에 더하여 8·15 직후 퇴거 일본인들의 예금뇌취(預金雷取)와 대일본청산자금(對日本淸算資金)의 방출로 통화가 급증한 데 이어 과도정부의 적자보전과 양곡수매자금을 대종으로 하는 통화의 팽창이 뒤따라,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누적과정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4년 11월 27일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에 의하여 경제조항의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즉, 헌법 제85조를 정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일정한 기간 그 채취·개발 또는 이용을 특허>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제87조를 삭제하여 모든 기업의 원칙적인 사영(私營)을 인정하였다. 또한 제88조도 개정하여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필요로 인하여 법률로서 특히 규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의 국·공유화 또는 그 경영의 통제관리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헌법의 경제조항의 대폭적인 자유화는 종래 묵시적으로 규정되었던 자유경제체제를 성문화한 것이었다. 휴전 후 경제의 2대 과제는 전재복구 및 생산수준의 조속한 회복과 악성인플레이션의 수습을 통한 대내외 통화가치의 안정에 있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헌법에 경제질서가 자유경제체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한편,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원조를 받아 본격적인 경제안정과 산업부흥에 총력을 집중하였다.

1956년경에는 전재복구사업이 거의 완료되어 경제의 안정 성장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6·25로 말미암아 한국경제는 국가의 재정, 국민의 생활, 기업의 경영에서 이른바 인플레이션 체질이 차츰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혼합경제체제>

1962년 12월 26일 국민투표에 의하여 제정된 제3공화국 헌법은 자유경제 질서를 명문화하는 한편 시장기구가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문제나 시장기구의 결함을 국가가 해결 내지 보정하여야 한다는 혼합경제하의 국가의 책무를 규정하였다.

즉, 헌법 제11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라고 경제질서의 기본원칙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헌법 제2항에서는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안에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한다>고 규정하였다.

1960년대 초기 이래 정부는 노동집약적인 제조업 상품의 수출을 증진시키는 외향적 발전을 수행해 왔다. 자본과 기술의 유입이 장려되었으며 관세와 수입허가증·수입할당량을 대체함으로써 대외무역분야의 개혁이 이루어져 왔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채택되었으며,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이 개발연대(1960∼70)의 과정에서 정부와 개인기업은 밀접하고 협력적이며 상호의존적인 관계였다. 정부는 단순히 시장거래를 관리하는 규제들을 제정하는 것보다 훨씬 직접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경제는 고도로 집중화된 정부의 지도하에서 기능하는 개인기업체제로서 특징지어진다.

한편 제4차 경제개발계획(1977∼81)은 당초 계획이 추구하였던 구조개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계획기간 중 한국경제가 경험한 시련과 시행착오를 통하여 경제개발계획의 운용에 있어서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① 경제규모의 대형화에 따라 정부주도형 경제개발이 오히려 낭비와 비능률을 초래한다는 것 ② 양적 성장추구로 대(大)·중소기업간, 조립·부품공업간, 도·농간의 이중구조가 심화된 것 ③ 적정성장이 실현되지 못하면 물가를 비롯한 경제안정을 도모할 수 없고, 연 3% 이상의 신규고용도 어려우며 외채원리금 상환도 뒷받침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 ④ 산업에 대한 각종 규제와 정책적·제도적 요인의 비용부담이 오히려 기업의 대외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재정의 사회정책적 기능이 미흡하다는 것 등이다.

<복지국가경제체제>

1980년 10월 27일에 제정된 제5공화국 헌법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행복추구권(1)과 적정임금청구권(30① ), 사회복지권(32② ), 환경권(33) 등을 추가하여 복지국가주의를 채택하였고, 특히 경제조항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규정을 두었다.

즉, 경제질서의 기본원칙(120)은 그대로 두고 3항에 <독과점의 폐단을 적절히 규제·조정한다>는 규정을 추가하였고,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하되 <다만 농업생산성의 제도와 농지의 합리적인 이용을 위한 임대차 및 위탁경영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인정된다(122)>고 규정하였다.

또 <국가는 중소기업의 사업활동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124② )>는 규정을 추가하였고, <국가는 건전한 소비행위를 제고하고 생산품의 품질향상을 촉구하기 위한 소비자보호운동을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서 보장한다(125)>는 조항을 신설하면서 한국경제는 본격적으로 복지국가경제체제로 들어섰다.

[산업구조와 산업조직]

<산업구조>

한국의 공업부문에 대한 정책은 ① 수입 → 생산(수입대체) → 수출의 유형에 의하되 ② 이러한 과정은 소비재 → 중간재 → 자본재, 나아가서는 지식 및 정보산업으로 이행(移行)되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에 따른 경제개발의 성과는 ① 수출입의 급증 ② 대규모 경제성 및 경쟁성의 향수 ③ 기술·자본의 신속한 보충 ④ 산업촉진·산업재편성·생산시설 확대 ⑤ 이를 통합한 경제규모의 지속적 확대 등의 여러 요인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1961년에는 국내총생산(경상시장가격)에서 농림·어업부문이 점하는 비중이 39.1%에 달하였고, 광공업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15.5%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79년에는 그 비중이 각각 18.5%와 28.7%로 변화하여 전근대적인 1차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광공업의 비중이 높아지는 산업구조로 바꾸어졌다.

뿐만 아니라 공업구조도 1961년에는 경공업이 73.3%, 중화학공업이 20.3%를 각각 차지하였으나 1979년에는 그 비중이 47.7%와 52.3%로 각각 변하여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61년 현재 1차산업이 전체 국민소득의 38.7%를 차지하였으나, 제4차 경제개발계획이 끝난 1982년에는 18.0%로 급격히 저하된 반면, 2차와 3차산업의 소득구성비는 61년 15.4%와 45.9%에서 1982년에는 35.4%와 46.6%로 각각 증대되었다.

⑴ 농림수산업

8·15 후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농림수산업은 국민경제를 지탱하는 기간산업이었다. 농가인구는 55년에 총인구의 62%를 차지하고 그해에 농림·수산업에서 창출한 부가가치는 국민총생산의 42%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962년 이래 수출주도형 공업화 경제개발 전략으로 인해 국가의 투자자원을 공업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등 비농업부문에 집중적으로 배분하게 되어 농림·수산업부문에 대한 비중은 상대적으로 저하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국민경제구조가 크게 변화하게 되어 국민총생산에서의 공업의 비중은 1953∼55년의 8%에서 81∼83년에는 36%로 증가한 데 반하여 농림·수산업의 비중은 51%에서 14%로 떨어졌다.

① 농업

한국은 농촌공업이 발달되지 못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타직종에 취로하여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어서 농사를 짓지 않고 완전히 이촌(離村)하든지, 자가노동과 농기로써 충분히 경작할 수 있는 일정 규모의 농지확보가 요구된다. 농업생산기반의 확대사업은 농지면적을 확대하는 개간·간척사업과 경지의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농지개량사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농지의 본원적인 확대는 개간과 간척사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도시확장과 공업화의 추진으로 주택 및 공장부지용 토지수요는 급증하고 있으므로 도시근교의 기존농지를 이러한 수요에 충당시키고 새로운 간척지를 농업용으로 이용한다면 국민경제적인 차원에서 간척의 경제적 타당성이 인정된다.

또한 농지의 생산환경을 개선해서 토지생산성을 제고시키고 농업기계화를 촉진시키는 농업생산기반의 개선사업이다. 이 사업에는 농지정리사업,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 농업용수개발사업 및 배수개선사업 등이 포함된다. 농업에 대한 연평균 보호율과 1975년의 가격을 적용할 때, 1970∼79년의 총농업투자의 농산물증가분에 대한 비율은 4.8%이었다. 이는 광공업의 2.4%, 사회간접자본의 5.5% 및 비농업부문의 4.1%와 비교된다. 그러므로 간척은 국토확대사업으로서 의의가 있고, 농업기반 조성사업은 비농업분야의 투자에 못지 않게 경제적으로도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② 임업

한국에서의 삼림은 전통적으로 재목이나 연료뿐만 아니라 전답용의 녹비나 사료로서 사용되어 왔다. 정부는 72년부터 치산녹화 10년계획을 실시하여 제1차 치산녹화계획이 1978년에 완수되었고, 1979년부터 제2차 10개년계획을 추진하였다. 1988년 산지자원화 10개년계획(1988∼97)과 임업진흥촉진지역기본계획(1988∼97)을 수립, 추진중에 있다.

이에 따라 1997년에는 인공조림면적이 1987년 29%에서 34%로, 임업생산량은 1987년의 1조 8000억원에서 3조원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1992년 현재 조림면적은 3만 4226ha이며, 93년 현재 입목축적은 ha당 42.1㎥로서, 이는 미국의 54.0%, 일본의 34.0%, 스위스의 12.6%, 독일의 15.8%에 불과하다.

③ 수산업

수산업 생산은 60년대 초기부터 꾸준히 성장해 왔으며 원양어업에서 극적인 성장을 이루어 왔다. 원양어업은 주로 태평양에서 이루어지기 시작, 점차 대서양과 인도양으로 확대되었다. 93년 현재 수산물 생산량은 333만 6000t이며 수출액은 14억 5000만 달러 수준에 이르렀다.

⑵ 광공업

① 광업

비교적 한국경제에서 중요성이 덜하다. 1961년과 79년 사이에 광물의 산출액은 3배 이상이었지만 GNP점유율은 2%에서 1%로 감소하였다. 주요 광산물은 무연탄·철광석·텅스텐·금·은·고령토·활석·아연 등이다. 철광석은 주로 일본에 수출하고 텅스텐은 미국에 수출한다.

또한 철광석과 텅스텐은 강원도에서, 금과 은은 대부분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산출되고 대규모의 제련소는 장항과 군산 부근의 남·서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무연탄의 경우 84년 말 현재 조사된 매장랑은 약 16억 6000만t이고 채탄 가능한 매장량은 6억 5000만t으로 약 30년간 채탄할 수 있는 양에 불과하다.

석탄은 1985년 총에너지 사용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중요한 국내부존자원의 하나이다. 주요탄전으로는 삼척탄전이 전체 매장량의 33.1%, 정선탄전이 27.4%, 층남탄전이 18.6%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 3개의 탄전이 전체 매장량의 79.1%에 달하고 있다.

② 공업

휴전 이후 5개년 계획이 집행되기까지는 불과 8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으나, 경제성장을 달성하게 된 것은 공업부문의 성장에 의해 주도되었다. 경제성장률은 흉년이었던 1956년과 4·19가 있었던 1960년을 제외하면, 1953∼61년 사이에 연간 4.2∼8.8%에 달하는 비교적 높은 경제성장을 달성하였고, 전기간에 걸친 공업성장률은 10% 이상으로, 공업부문이 이 기간의 경제성장을 선도하였다.

1950년대의 전후복구와 비교하여 19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과 공업화 과정이 큰 대조를 이루는 것은 대외지향적 공업화를 정부주도로 이루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풍부한 인력에 일터를 제공하기 위하여 외국으로부터 자본과 기술도입이 필요하였고,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하여 수출에 힘써야 했으며, 커다란 규모의 경제에 맞는 설비를 갖추기 위하여서는 좁은 국내시장을 보완하는 해외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공업의 비중은 5개년계획을 거듭할수록 증대하여 제2차 5개년계획을 마친 1971년에는 제조업만 21%, 1981년에는 근 30%에 이르렀다. 한국과 같이 주요 원자재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자원수입국에 대하여 1970년대의 국제경제 환경은 유사 이래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불순한 것이었다.

이러한 국제환경의 악화는 1974년의 이른바 제1차 석유파동과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으로 배럴당 3달러 미만이던 석유가격이 불과 1년 이내에 11달러로 4배 이상 급등하였고, 이에 따라 모든 원자재가격이 상승함으로써 유발되었다.

이에 따라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스태그플레이션을 겪게 되어 국제환경은 대단히 악화되었다. 또한 제2차 석유파동과, 이와 거의 때를 같이 한 국제금리의 폭등은 오랜 준비기간 끝에 완성되거나 가동률이 낮았던 중화학공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결국 한국경제는 해외원인과 투자의 저조로 1979년부터 경제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였고, 10·26으로 인한 정치적·사회적 불안과 함께 1980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편 1985년 10월 선진 5개국(G5)의 합의에 따라 엔화의 달러환율이 대폭적으로 절상됨에 따라 한국산업의 잠재적 공업생산력과 국제경쟁력이 현실화되어, 공업생산과 수출로 주도된 고도성장과 더불어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의 해소를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⑶ 에너지

한국의 에너지자원은 주로 석탄·석유와 수력전기의 잠재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연탄은 주된 채탄 에너지자원이 되고 있으며, 1960년 이래 산출량이 급신장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과 91년초 걸프사태로 인하여 국내 경제흐름은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93년 현재 에너지 해외의존도가 94.7%에 이르는 한국은 1993년도를 에너지 소비절약의 원년으로 정하고, 산업구조를 에너지 저소비형으로 유도하는 등 각종 에너지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세계환경보호운동 추세에도 대비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⑷ 운수업

한국의 운송체제는 전반적인 경제성장과 더불어서 성장해 왔으며, 현대적 고속도로와 항공수송에 힘입어 상당한 정도로 개선되어 왔다. 1993년 현재 철도의 총연장은 6466㎞이며 여객수송량은 7억 1636만 4000명, 화물은 5876만 8000t에 이른다.

한편 지하철은 서울과 부산에서 운행되고 있는데 서울지하철은 4호선까지 총연장 131.5㎞이며, 부산지하철은 l호선으로 총연장 26.1㎞이다.

도로는 1992년 현재 총연장 5만 8909㎞로, 도로포장률은 80.8%이다. 자동차등록대수는 1993년 현재 523만 894대에 이르고, 이 가운데 승용차는 346만 1057대, 버스 48만 3575대, 화물차 126만 l522대, 특수차 2만 4740대, 이륜차 76만 3575대이다. 승용차 1대당 인구수는 12.6명이다.

화물선과 유조선의 t수는 1960년대 초 이래 괄목할 만큼 성장하였고 항만의 화물취급 수용량 또한 확대되었다. 1992년 현재 화물선은 691만 502t이며 여객수송은 907만 985명, 화물수송은 233만 1265t에 이른다. 무역항은 27개, 연안항은 22개이며 전국항만의 처리능력은 2억 5800만t이다.

항공은 1990년 현재 국내선 20개 노선이 운행되고, 국제선은 51개 노선으로 21개국 32개 도시에 취항하고 있다. 1992년에는 여행수입 32억 7100만 달러, 여행지출 37억 9400만 달러로 5억 23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⑸ 통신

1987년 9월 30일 현재 한국의 전화시설은 1000만 회선을 돌파하여 세계 10위권, 아시아 2위권의 전화보유국으로 면모를 갖추었으며, <1가구 1전화>시대를 열게 되었다. 1993년말 현재 전국 전화시설수는 2014만 838회선, 전화가입자는 1663만 2593명이며 전화보급률은 인구 100명당 37.8대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국제자동전화(IDD) 이용지역은 1993년 말 현재 189개국 229지역, 수동통화국은 1개국으로, 북한을 제외한 전국가와 국제통화가 가능하다. 1990년 5월에는 태평양 해저 광케이블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이 밖에도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통신지원을 위해 금산 제 1 위성통신 지구국을 신설하였으며, 보은에 제 2 위성통신 지구국을 1988년 6월 30일 개통하였다.

한편 1987년 5월부터 국내 주요 계열기업 사이에 그룹 공동전산망 구성이 이루어졌으며, 특정통신회선의 타인 사용도 중소기업, 전산망 사업자 및 모든 비영리법인들에게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전자사서함 서비스의 일종인 PC-Serve서비스는 퍼스널컴퓨터(PC) 보유자가 공중데이터망을 통하여 타 PC 보유자와 정보 및 프로그램 등을 교환할 수 있도록 전자우편·게시판·온라인·전자회의 등의 기능을 제공하는 것으로, 1990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1990년에는 정규프로그램이 방송되는 시간에 디코더(문자해독기)가 내장된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시청할 수 있는 새로운 방송형태인 문자방송이 시작되었다. 1993년 말 현재 우체국수는 3310개국, 국제전자우편교환국은 42개국(國), 국제특급우편교환국은 94개국이다.

또한 체신금융 전산화의 일환으로 전국 우체국에 전산 단말기를 설치하여, 온라인으로 업무처리가 가능해졌고, 1991년 수립된 <우체국 종합정보서비스전산화계획>에 따라 96년까지 각종 기능이 더 편리해지고 확충되었다.

<산업조직>

1960년 노동자 200명 이하의 중소제조업은 사업체수·노동자수 및 부가가치액에서 99.1%, 84.1% 및 76.5%의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979년에는 각각 93.3%, 39.5% 및 28.5%로 저하되어 대기업의 비중이 현격히 높아졌다. 1973~78년 국내총생산(GDP)의 연평균 성장률이 17.2%에 그쳤던 데 비해 10대 재벌의 연평균 성장률은 30%, 46대 재벌은 24.4%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78년 46대 재벌의 GDP 구성비는 43.0%로 크게 높아졌다.

⑴ 기업집단과 중소기업

한국경제에서 근대적 대기업이 성장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으로, 한국경제가 고도 성장을 보인 시기였다. 이들 한국경제의 대표적 기업들은 수출로 급성장한 많은 전략적 기업을 산하에 장악함으로써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형성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내부자원은 물론 기술개발력·경영자원·인적자원 등 모든 면에서 급속한 축적을 이루어, 60년대 후반부터 이들 기업집단은 중화학공업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제조업을 비롯한 전체 기업체수의 규모별 분류에서 중소기업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현상은 한국에만 국한된 사실은 아니다. 거대기업의 나라로 알려진 미국에서도 중소기업이 97.0%라는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미국의 경우 한국과는 달리 500명 이하를 중소기업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실마저 감안한다면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높다.

이렇듯 기업체수의 구성비율에서 미국, 일본, 유럽 각국을 막론하고 중소기업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사실을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이중구조라고 한다. 경제사회의 근대화가 진전될수록 공업구조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는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⑵ 중소기업 현황

1989년 현재 한국의 중소기업이 전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기업체수에서 99%, 고용면에서 66%, 부가가치·수출면에서 38%이다. 1989년도 중소기업의 경기동향은, 대외적으로 선진제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국내시장에 대한 개방압력, 그리고 가속화된 원화절상으로 인해서 그 동안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던 수출증가율이 감소하었다.

또한 대내적으로 민주화 과정에서 분출된 각계각층의 욕구증대와 노사분규, 임금상승 등으로 중소기업도 채산성이 극도로 악화되는 등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웠다. 생산면에서 선진국의 수입규제와 원화절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섬유·의류 및 가죽업종이 생산지수상에서 감소를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1989년 1월부터 11월까지 중소기업의 수출총액은 217억 달러로, 88년 같은 기간보다 4.5% 증가하였으며, 이는 같은 기간 중 총수출증가율 3.3% 및 대기업 수출증가율 2.6% 보다 높은 것으로, 이에 따라 중소기업 수출비중도 88년의 38.4%에서 38.8%로 높아졌다.

[국제수지와 대외경제관계]

8·15 이후부터 6·25가 끝난 1953년까지 한국의 대외 거래는 민간부문의 경제적 이익추구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구호원조와 관영무역(官營貿易)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휴전 이후 1954년부터 1960년까지 7년간은 전후 복구에 주력하면서 국민생활이 점차 안정되어 국민경제가 재건되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초기에는 대(對) 유엔군 거래를 제외한 대외거래는 미미하였으나 점차 자력 대외거래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후반에는 외국원조물 도입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의 무역은 괄목할 만한 발전과 변혁을 이룩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체계화·다양화되었다. ② 국내저축재원의 부족을 무릅쓰고 급속한 공업화를 이룩하려는 왕성한 정책의욕으로 외자도입이 불가피해졌다. ③ 무역수지는 항상 적자였으며, 경상수지 역시 1965년과 1977년을 제외하고는 항상 적자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해외시장의 보호주의 장벽이 높아감에 따라 수출확대를 위한 수입자유화의 폭을 넓히는 등 국내시장을 개방하였으며, 성장 위주에서 물가안정기반 구축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폭넓은 변화가 추진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기조 변화가 실효를 거두어 대내적으로는 1982년 이래 물가안정이 정착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1980년대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국제수지가 크게 개선되어서, 드디어 1986년에는 46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1991년 96억 6000만 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고 이는 다시 1993년에 4억 5000만 달러 흑자로 반전되었다. 1997년에는 일련의 대기업 부도와 외환관리 실패로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구제 금융을 받으면서 한국경제는 크게 위축되어 마이너스 성장 속에 대외신인도 하락이라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초기의 경제원조>

1950년 6·25가 일어나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및 경제사회이사회는 각각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구호원조를 공여키로 결의 하였는데, 이 구호물자가 한국민간구호계획(CRIK) 원조였으며, 주로 식료품·의류·의료품·연료·건설자재·농업용품 등이었다. CRIK의 재원은 미국 국무부 예산에서 지출되는 SKO(Supplies for Korea;한국에 대한 세출)원조 등이었다.

휴전에 따른 사태의 변화로 1954년 6월부터 이 원조는 일단 종결되었다. 1950년 12월 유엔은 6·25로 파괴된 한국경제를 우선 전전(戰前) 수준으로 부흥시킬 것을 결의하고, 이에 의거해 유엔한국재건단(UNKRA)이 설치되었으며, 주한 유엔민사처(UNCACK;전쟁중 설립)는 휴전과 동시에 한국민사처(KCAC)로 개편되어 구호사업과 단기부흥사업을 담당하고 UNKRA는 장기재건계획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UNKRA 원조의 본격적인 활동은 휴전 이후부터 나타났다. 6·25중 대외거래는 극히 미미하였고 대부분의 수입수요가 원조물자 도입으로 충당되었기 때문에 외환보유액은 50년도의 2500만 달러에서 1953년에는 1억 700만 달러로 증가하였다.

한편 상품수출은 일정한 추세가 없었으며, 1950년도에 비로소 8·15 이후 최초로 정부미곡 수출이 행하여져 25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였다. 상품수입은 계속 증가하여, 한국 무역수지의 만성적인 적자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경제복구기>

휴전이 성립되자 미국의 대외활동본부(FOA)를 통한 2억 달러의 대한경제원조가 공표되었으며, 모든 경제정책의 주요 목표는 전재복구와 인플레이션 수습에 있었다. 이 기간에 무역수지는 항상 만성적인 적자를 보였다. 1954년과 1955년 2년간 경상거래 수지는 약 3000만 달러의 적자를 보였으며, 외환보유액도 감소 경향이었다.

이와 같이 보유외환이 감소한 것은, 휴전 이후 중석(重石) 수요가 감소하여 수출이 감소하였고, 1954년부터 실시된 유엔군 달러 경매와 55년 8월 공정환율이 1달러 대 50원으로 인상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1956년도의 국제수지는 경상거래상 2300만 달러의 흑자를 보였으며 보유 외환도 다시 증가하였다.

그 이후(1957~60)에는 수출이 감소된 반면 원조 이외의 자발적 수입이 증가하여 대(對)유엔군 외화수입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상수지는 별로 개선되지 못하였으나, 보유 외환은 계속 증가하여 1956년 말 9700만 달러가 1960년 말에는 1억 55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수출촉진기>

1960년대 대외거래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품수출은 정부의 지속적인 수출진흥책이 주효하여 64년도에는 사상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② 경제개발계획 사업추진에 따른 시설재 수입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장기자본 도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즉, 61년 이전까지는 DLF(개발차관기금)차관 및 쿨리기금에 의한 차입이 약간 있었을 뿐이었으나, 그 뒤부터는 미국·독일 등 각국으로부터 상업차관 및 직접투자와 기술도입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③ 원조자금에 의한 원자재 및 소비재 도입은 계속 감소하였으나 수출용 원자재 도입 및 국내수요 충족을 위한 소비재 도입은 증가하여 자력에 의한 수입이 계속 증가하였다. ④ 정부는 64년 5월 3일을 기하여 공정환율을 단일변동환율로 변경함과 아울러 새로이 외환증서제도를 채택하였다.

1960년대 후기 주요 상품별 수출 동향을 보면, 계속적인 수출실적 증대로 전반적으로 모든 품목이 증가추세를 보였는데, 특히 베니어합판·의류·면직물·신발류 및 합성섬유 직물 등의 수출은 증가추세가 현저하여 수출증대를 주도하였다. 수출의 지역별 추이를 보면, 1965년 이후부터는 일본을 제치고 미국이 수위를 차지였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 두 나라에 대한 수출은 전체 수출총액 가운데 평균 65.7%를 차지함으로써 수출시장의 지역별 편중경향을 보였다. 한편 주요 상품별 수입동향에서는 합판수출에 따른 목재수입이 현저한 증가추세를 보였고, 이 밖에 원면·섬유·기계 및 부분품 수입도 꾸준한 증가를 보였다.

석유 및 원유수입이 1965년 이후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이는 정부의 연료정책 전환에 따른 것이었다. 1973년 말 중동전을 계기로 시작된 제 1 차 석유파동으로 한국에 미치는 불리한 영향이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1973년 하반기에 들면서 이미 둔화 기미를 보이던 세계경기가 <오일쇼크>를 계기로 급속히 침체국면에 빠져들었으며, 동시에 물가앙등이 겹쳐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1974년 경상수지 적자는 전년도보다 6.5배 이상 늘어난 20억 22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적자를 모면하기 위하여 한국은 자본도입에 급급하였으며, 과거와는 달리 금융기관 차입을 중심으로 한 외자도입에 크게 의존하는 불리한 조건의 차입도 받아들였다. 제 1 차 석유파동 이후 차츰 개선을 보이던 한국의 국제수지는 1979년 제 2 차 석유파동에 직면하자 대내적으로는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 가속, 대외적으로는 경상수지의 전례없는 큰 적자를 나타내었다. 상품수출은 전년 대비 0.9% 감소하는 부진을 보였고, 상품수입은 35.8% 늘어났다. 따라서 무역수지에서 43억 9600만 달러 적자, 경상수지에서 41억 5100만 달러 적자가 나타났다.

<대외무역의 전환기>

1982년에도 선진국들은 성장둔화와 높은 실업률로 수입규제를 강화하였으며, 개발도상국들도 외채누증과 금융시장 경색으로 외환사정이 어려워서 역시 수입을 억제함에 따라 세계무역량은 전년보다 감소하였다. 그런 가운데 86년은 한국의 대외거래 사상 처음으로 46억 2000만 달러에 이르는 경상수지 흑자의 신기원을 이룩한 해였다.

이와 같이 국제수지가 크게 개선된 것은 대외적으로는 원유값 하락과 달러화 약세 등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대내적으로는 물가와 내수가 안정된 가운데 수출산업 설비투자가 확대되면서 소재부품의 수입대체가 진전됨에 따라 상품수출이 28.3% 늘어난 반면 수입은 12.3% 증가에 그쳐 무역수지가 42억 6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때문이었다.

수출에서 중화학공업제품의 비중은 1975년 25.1%에서 1978년에는 35.1%로 높아졌으며, 1980년에도 41.6%로 오르고 1985년에는 54.4%로 가장 높았다. 1986년에는 비중이 다소 낮아졌는데 그것은 주요 선진국의 수입규제로 금속제품·철강제품 등의 수출이 부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구성에서 최초로 미국시장 진출에 성공한 승용차 및 부품의 수출이 115.6%나 증가하였고, 제품 다양화와 품질향상에 힘입은 전기전자제품(VTR·전자레인지 등)의 수출신장이 돋보였다. 그러나 1988년부터 다시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 경향 고조, 막대한 외채부담, 국내시장 개방요구 및 원화절상 요구 등의 영향으로 인하여 무역수지 흑자 폭이 크게 둔화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옛 소련 및 중국·헝가리·유고슬라비아·폴란드·불가리아 등 공산권과 실질경제협력시대를 연 해이기도 하다. 89년 이후 해외 경제여건이 악화되고 경제블록화와 후발개도국의 경제성장으로 수출시장 입지가 좁아진 데다 대외경쟁력 약화로 91년에는 96억 6000만 달러에 이르는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금융.재정제도]

1950년 3월 4일 한국정부는 <당면한 경제 현실에 비추어 금융경제정책을 무엇보다 인플레이션 현상의 조속한 극복에 중점을 두고 재정 균형, 건전한 금융 및 생산증강을 기하기 위하여> 경제안정 15원칙을 결정하고 이를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 중에서 통화·재정·금융 부문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통화최고발행제 견지 ② 세출 긴축과 회계의 운용규제 ③ 징세체계의 근본적인 개혁 ④ 귀속재산 및 관리물자 조속불하에 의한 정부수입 및 세수 증진 도모 ⑤ 경영 합리화와 요금 적정인상에 의한 독립채산제 확립 ⑥ 지방과세의 충실로써 지방행정의 자립 운영 촉진 ⑦ 금융계획 확립, 국민저축운동, 국채의 신속한 소화 ⑧ 민간부동잠재자본력(民間浮動潛在資本力)의 생산자본화를 촉진하여 기업 자기금융력의 현실적 강화 등이다.

3개월 후 6·25가 발발하여 이 시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50년 전반기에는 8·15 이후 최초로 물가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자금동원 극대화, 자금배분 최적화, 내부경영 합리화(중개비용 최소화) 등을 위해서 금융의 자율화·대형화·국제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

또한 재정에서도 세입면에서 세제상의 불공평 요인과 각종 감면규정을 정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계층간 부담의 형평을 도모하고 정상적인 조세수입 확대를 기하며, 전체적인 국민부담을 적정수준으로 높여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세출면에서는 방위비와 교육비·사회복지비 등 기본적인 재정수요를 계속 충족시키되 경제개발사업에 대한 재정지원은 직접지원방식에서 점차 융자방식으로 전환하는 등 세출구조 조정을 통하여 재정규모 팽창을 억제하여야 한다. 아울러 사업 우선순위 재검토, 경상경비 절감 등을 통하여 비효율적인 재원배분과 낭비를 제거하고 재정능률을 지속적으로 높여야 한다.

<금융>

1953년 7월 휴전에 즈음하여 한국 경제정책의 2대 과제는 전재 복구와 인플레이션 수습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산업은행 발족, 일반 은행 민영화 및 시중은행 통합, 농협금융제도 정비, 지방은행 발족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57년 미국원조정책 전환에 따라 한국은 자립경제체제구축을 위한 대책마련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통화신용 팽창억제 노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화되었다. 1957년을 예로 들면, 금융부문에서는 일반 금융기관의 여신증가를 저축성 예금 증가범위 내로 억제하고, 동시에 대출 최고한도와 <금융기관 자금운용에 관한 임시조치>를 계속 실시하였다. 또한 곡가가 물가를 선도하는 점을 감안하여 농업부문에 대한 정부자금대출, 비료자금융자 및 양곡 담보융자를 금융부문 대출 최고한도로 취급하게 하였다.

1961년 5·16으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경제정책의 중점을 종래의 안정우선정책으로부터 성장우선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하고 62년부터 의욕적인 경제개발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저축 등 동원할 수 있는 재원이 크게 부족하였고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자금동원 극대화에 노력할 뿐만 아니라 자금운용에서는 일반자금 대출을 억제하고 상대적으로 정책금융(또는 지시금융)의 비중을 높이게 되었다.

정부는 초기에는 특수은행들을 확충하는 데에 그쳤으나, 점차로 일반은행도 정책금융 참여폭을 넓혀 가도록 하였다. 따라서 중앙은행으로서의 한국은행은 자주성을 상실하였고, 일반은행은 민영화된 지 4년 만에 다시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65년 9월 30일 단행된 금리현실화 조치에 따라 금융기관의 예금금리는 종래 연 15%에서 30%로 2배 이상 인상되어 대출금리 인상수준(연 26%)보다 높아 역금리체계가 되었다. 이는 민간의 금융저축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물가안정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은행자금 과잉수요를 억제하는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과로 금융기관의 예금증대, 수출증대와 외자도입에 따른 통화증발로 유동성이 과잉상태에 이르자 금융긴축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정책당국은 1965년 12월과 1966년 2월에 지급준비율을 대폭 인상한 것을 비롯하여 통화안정증권 발행, 금리 하향조정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1972년에는 8·3조치가 대통령긴급명령권으로 발동되었다. 이 조치의 주요내용은 ① 기업부실화의 큰 요인인 사채(私債)의 중압에서 기업을 구제하고 특별금융지원을 통하여 재무구조를 개선케 하며 ② 사채조정(私債調整)및 금리인하를 통해 생산원가를 절감하며 물가안정을 유도하고 ③ 산업합리화와 사채조정을 통해 민간투자와 고용기회를 증대시키고 ④ 금융질서를 바로잡아 건전한 기업풍토 조성에 이바지하는 것 등이다.

8·3조치는 기업경영에는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금융산업에 관한 한 금융억압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80년대에 들어서 정책기조가 민간주도형으로 바뀜에 따라 금융부문에서도 정부는 종래의 성장지원에서 체질화되어 온 인플레이션, 누적된 금융산업 부실화 등의 해결에 정책 우선순위를 두었다.

이 기간의 주요 변화로는 ① 5개 시중은행 민영화(1981~83)와 은행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제규정 및 통첩의 폐지·정비 ② 통화관리 방식에서 간접규제방식으로의 전환 등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1991년 제 1 단계 금리자유화조치를 비롯, 1993년 대통령 긴급명령에 의한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데 이어 제 2 단계 금리자유화조치가 취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E)에 가입한 한국은 1997년의 IMF사태를 맞아 1998년 부실한 은행 및 제 2 금융권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였으며, 투기자본이 횡행하는 국제금융시장에서의 경쟁력 제고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재정>

제헌헌법은 제 7 장에 특히 재정에 관한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을 규정하였다. 조세법률주의와 예산 의결, 국가의 채무부담에 대한 의결, 예비비 의결 및 예비비지출 승인, 결산 심의에 관한 헌법상의 규정으로, 재정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기초가 처음으로 마련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48년 9월 28일 세제개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다음과 같은 개혁요강에 의해 세제의 전면개혁을 추진하였다. ① 소득세 등 인세(人稅) 계통의 부담을 완화하여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모든 차익을 제거할 방침으로 부동구매력을 흡수하며, 소비억제를 위해 간접국세에서는 사치품 및 소비유통면에 중과(重課)한다. ② 일반소득세 및 영업세 등 과세방법을 특히 고려한다. ③ 최소한도의 신세(新稅)를 창설 또는 과세대상을 확장한다. ④ 저소득자에 경감, 고소득자에 중과하며 국민개납주의(國民皆納主義)를 원칙으로 한다.

한편 1948년 12월 10일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원조협정>이 체결되어 정부는 원조액에 대한 국내통화 대충자금(對充資金)을 적립하게 되었다. 전후 복구기로 접어든 1950년대에는 재정운용에서 일반예산 세출은 국방력 유지를 위한 군사비와 경제 재건비에 중점배분되었다.

한편 세입면에서는 외국원조 재원의 비중이 높아지고 조세수입이나 국채 및 산업부흥국채 수입, 차입금의 비중이 떨어져 원조의존 재정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60~70년대에는 62년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기반 구축을 목표로 하는 제 1 차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 수립·실시를 시작으로 산업구조 근대화와 자립경제 촉진, 안정적·균형적 경제성장 추진을 목표로 하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계속 추진됨에 따라 이 사업을 중점 지원하는 방향으로 국가재정이 편성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인플레이션의 구조적 개선을 통한 안정기반구축이 정책 기조가 됨에 따라 재정운용 방식도 예산개혁 사업 추진에 의해 재정의 체질을 개선하여 안정적 통화관리를 뒷받침하면서 민간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는 한편, 재정의 복지기능과 경제대응기능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1982년 말에는 <안정기조 하에서 민간자율화에 의한 시장경제 창달>이라는 시책방향에 따라 조세제도도 <경쟁추진을 통한 시장경제 체제를 확충해 나갈 수 있는 공평한 세제>를 지향하기 위해 ① 법인세·소득세율 인하 ② 무기명·가명인 금융자산 소득에 대한 차별분리 과세 실시 ③ 특정 산업에 대한 감면축소 ④ 세액공제 확대 등으로 중산층 이하의 세부담 경감 ⑤ 정상기업활동을 제약하거나 납세자에게 불편을 주는 세제상 요인을 최대한도로 줄이는 것 등 5개 세법이 개정되었다.

또한 정부가 성장제일주의 정책을 추진해 오면서 국민복지 증진과 형평제고 등을 위한 재정의 사회개발 기능을 소홀히 함으로써 여러 가지 불균형이 초래됨에 따라 1980년대 말부터 예산편성 및 재정운용은 국민복지 증진 및 민생관련 분야에 대한 중점 지원으로 나타났다.

즉, 농어촌 개발 종합대책 및 농어가 부채 경감대책 등을 통한 농어촌 소득증대 기반의 대폭 확충, 영세민·저임금근로자·저소득층 복지대책 강화, 서민의 주거 안정을 위한 집중 지원, 중소기업에 대한 재정지원 확대 등으로 지역간·계층간·부문간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지방화 시대에 대비한 지방재정 지원 확대, 과학기술 개발지도 및 산업경쟁력 배양을 통한 산업체질 강화 등에 중점을 두고 다양한 재정 수요를 적극 수용하면서 재정의 건전운용 기조를 지속해 나가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안정기조의 확고한 구축, 형평·균형을 바탕으로 한 국민복지증진, 산업구조 조정 유도, 민간의 투자의욕 고취 등을 통한 대외경쟁력 회복과 성장 잠재력 배양에 역점을 두고 있다.

1993년 발표된 <신경제 5 개년계획>의 재정운용 방향은 <경제활력회복> <국가기강 확립> <부정부패 일소> 등 개혁의지를 재정적 측면에서 구체화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나, 1997년의 경기침체와 IMF사태로 가용 보유 외화가 100억 달러대로 떨어지는 등 커다란 난관에 부닥쳤다.

[국민생활]

<행정기능 강화문제>

한국의 경제적발전과정은 정부 기능의 확대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 1 차 계획에서 제 4 차 계획에 이르는 개발연대를 통하여 한국경제는 고도성장의 지속을 가져왔지만, 불균등을 확대시키는 개발전략(행정기관 강화)이 지속되었고 경제개발 위주의 재정기능이 확대되어 소득분배의 왜곡과 이중구조의 지속, 기본수요 및 생활편익시설의 부족, 가치의 혼란과 신뢰의 저하 등의 부작용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행정력의 강화는 숱한 국민적 갈등과 마찰을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즉, 농산물 가격의 안정이 국내농산물의 적절한 수급조절을 통해서가 아니라 농정책임자와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의 임기응변적인 단견(短見)에 따라 농산물수입정책을 통해서 이룩되었기 때문에 농촌경제는 파탄의 길을 걸었고, 이에 따라 농민들의 불만은 커지게 되었다.

또한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행된 노동관계법의 정부에 의한 개정은 근로자들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어서 근로자들의 불만을 샀을 뿐만 아니라, 노사분규 해결에 있어서 정부가 공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노동운동은 단순한 노사분규의 차원을 넘어서서 정치성을 띠게 되고 정치행정체제와 근로자 집단간의 갈등으로 발전하고 있다.

한편 근로자와 사용자, 더 나아가 근로자와 정부의 갈등이 심화되는 중요한 요인으로서는 ① 근로자계층의 수적 확대(84년 기준 취업자 중 구성비율 52.9%)와 의식수준의 향상 ② 근로자계층의 소외감, 상대적 빈곤감의 심화, 생산성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임금수준을 포함한 상대적으로 나쁜 노동조건 ③ 노사분규에 대처하는 정부와 사용자측의 자세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업화·도시화문제>

1990년에 들어와서 국민생활에 큰 반향을 일으킨 도시 전세금의 상승은, 주택을 소유한 사람들과 세들어 사는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과 갈등을 심화시키고, 특히 대부분이 무주택자인 근로자들의 생활에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되고 있다.

한국의 도시가구의 가계지출 중 주거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1970년 13.2%, 1980년 18.8%, 1989년 20.3%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점차 증가추세에 있다. 이처럼 급격한 땅값 및 주택가, 전세금의 상승은 근로자를 포함한 근로대중의 주거상태를 악화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산업화·도시화는 가족제도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에 따라 한국의 가족 형태는 핵가족화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형태는 핵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적인 가족주의는 무너지지 않았다. 한국의 가족주의의 특징은 가족과 사회 사이에 단절이 있다는 데에 있다.

또, 대졸 이상 실업자수는 89년 경우 전년 대비 14.9% 늘어난 11만 6000명 수준(경제기획원 통계)이다. 여기에 불완전취업과 잠재실업을 생각한다면 그 수는 약 30만명 선으로 확대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대졸 이상 실업자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학력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구직전쟁은 더욱 치열해져 대입 재수생문제에 버금가는 사회문제로 발전하고 있어 국민생활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시급한 대책이 요청되고 있다.

<국민복지·사회보장>

제6차 경제사회발전계획(1987∼91)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지방 대도시의 중추 관리기능을 강화하여 지역경제권 형성을 촉진 ② 농어촌 생활환경개선 ③ 근로자의 고용기회 확대, 취업능력 제고, 직업안정 기능확충, 종업원지주제 확산, 최저임금제 도입(1988년부터 시행), 임대주택건설의 확대 ④ 88년부터는 농어촌지역, 1989년부터 도시지역에 전면적으로 의료보험 실시, 영세민에 대한 직업훈련 확대와 실업계 고등학교에 재학하는 자녀의 학비지원 등 탈영세민시책 추진, 중장기 주택금융제도 발전촉진 ⑤ 1988년부터 국민연금제도 실시, 교통안전, 식품위생, 범죄예방 등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민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를 강구하는 한편, 여가선용, 문화예술활동 등 다양한 생활 향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시책도 발전시켜 나가는 것 등이다.

[국토개발]

8·15 후 정부에서 농지개혁을 통하여 소작제도를 폐지하는 등 국토개발의 출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6·25로 인하여 이와 같은 의욕적인 국토개발계획은 중단되어야 하였다. 따라서 6·25 후의 국토개발은 전재복구사업(戰災復舊事業)이 주요대상이 되었으며, 미국의 식량농업기구(FAO)와 국제행정협력기구(ICA)의 원조를 통하여 철도·도로 등에 대한 복구사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71)의 추진과정에서 공업입지와 교통망의 정비 등 주요 국토개발사업은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하여 경인지역과 남동해안지대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 중반부터는 대도시의 과밀억제가 국토개발의 주요 과제로 등장하였다.

한편, 국토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기에 앞서, 농업과 공업개발 그리고 에너지를 비롯한 기초자원의 부족을 충당하기 위한 석탄·수력발전 등의 개발에 초점을 맞춘 사업으로 1965년의 경인지역을 시발로 하여 이후 울산·제주도·태백산·영산강·아산-서산·영동-동해 등 6개의 특정지역이 차례로 지정되었고, 이에 따라 울산·포항·여천 등지에 공업지대가 구축되었으며 서울의 구로동과 인천의 부평지역에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조성되었다.

한편, 사회간접자본시설의 일환으로서 도로율과 포장률이 증가하였고, 1968년부터는 서울-인천(29.5㎞), 서울-부산(428.0㎞)간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공로(公路) 부문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

또한 발전설비 용량의 성장과 항만시설규모의 확장 등과, 홍수조절과 생활 및 공업용수의 공급을 위해 60년대에 한강수계의 춘천·의암·소양댐 등과 낙동강수계의 남강댐, 섬진강수계의 섬진강댐 등이 착공 또는 완공되어 국토개발의 기초자원으로서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1963년에 국토건설종합계획법이 제정되어 국토의 종합적인 개발을 뒷받침하였고, 관련법규로는 도시계획법(1962), 건축법(1962), 토지수용법(1962), 공유수면의 매립에 관한 법률(1962), 토지구획정리사업법(1966) 등이 제정되었다·.

<제1·2차 국토종합개발계획>

1971년에 수립된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2∼81)은 그 기본목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① 전국의 각지역이 능률적이고 자주적인 입장에서 국민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국토의 효율적 이용관리를 다할 수 있게 한다. ② 국민경제 규모의 확대와 고도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교통·통신·수자원 등 개발기반을 확충한다. ③ 국토의 부존자원을 적극 개발하여 활용도를 높이는 한편 자연경관을 계속 보호·보전한다. ④ 도시와 농촌에 알맞은 공공시설을 정비하여 국민생활환경을 개선한다.

이에 따라 호남(전주-순천), 남해(순천-부산), 영동(새말-강릉)등의 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수출자유지역설치법(1970)·산업기지개발촉진법(1973)·공업단지관리법(1973) 등이 차례로 제정되어 공업의 지방분산과 중화학공업의 진흥이 본격화되었다. 국토개발사업의 용수(用水)의 다목적 이용을 위한 수자원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소양·대청·안동댐 등의 건설), 농업용수개발을 위해서 아산호(牙山湖)와 삽교호(揷橋湖)를 포함한 장성댐·담양댐 등이 건설되었다.

또한 자연경관의 보호·보전과 국민의 여가공간 확보를 위하여 덕유산·가야산·주왕산·오대산·서산해안 등 5개의 국립공원이 추가로 지정되어, 1981년말 현재 14개로 늘어났다.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82∼91)은 과밀·과소로 인해 야기된 파행적인 국토 공간구조의 개편을 기본전략으로 하여 지방중심도시를 핵으로 한 광역개발에 중점을 두고 ① 국토의 다핵구조 형성과 지역생활권 조성 ② 서울과 부산의 성장억제 및 관리 ③ 지역기능의 강화를 위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④ 후진지역의 개발촉진 등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중반기에는 기간 고속도로망의 형성, 주요국도·지방도의 포장, 철도의 개량·확충 등을 토대로 국토의 기본 골격망이 갖추어짐으로써 전국토가 <일일생활권>의 편리한 정주공간(定住空間)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또 지역특성을 고려한 중소규모의 공업단지를 분산·조성하여, 대도시내 부적격공장을 성장거점도시와 지방도시로 이전함으로써 공업의 과밀화 방지와 도시환경의 개선에도 역점을 두었다. 특히 대전과 청주를 연결하는 내륙공업지대를 형성, 발전시켜 전자·정보 산업 등을 육성하였으며, 정보화사회에 대비한 각종 첨단기술의 집중적인 개발을 위해 대덕연구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아울러 남한강의 충주댐이 1985년에 완공됨으로써 한강수계는 대규모의 다목적댐이 무리를 이루어, 홍수조절과 경제성장에 따른 각종 용수의 공급측면에서 효과적인 수자원관리가 용이해졌다.

<수도권의 성장억제와 신도시개발>

수도권 정비의 기본목표는 ① 서울의 인구집중을 가져올 산업시설 등의 설치를 강력히 제한하여, 전국적으로 필요한 중추관리기능만 유지시키고 ② 수도권내 도시간의 기능을 적절히 분담시켜 다핵적 광역생활권을 계획적으로 형성하며 ③ 교통·용수·위락 등 기반시설을 정비하여 광역적 이용 체계를 확립하고 ④ 한강수계(漢江水系)의 환경오염을 미연에 방지하여 쾌적한 농지공간을 확보하며 ⑤ 방위전략상의 취약성을 보완하고 국가안전보장의 개념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 등이다.

한국의 신도시는 다음의 4가지 정책목표하에 건설되었다. ① 서울에 과도하게 집중된 인구 및 산업의 분산기지 ② 대규모 공단도시 또는 그 배후 주거도시 ③ 낙후지역 개발을 위한 성장거점도시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성남단지(城南團地)를 시초로 하여, 창원·여천·안산·과천 등의 신도시가 건설되었으며,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등의 대규모 신도시가 건설중에 있다.

<지역·도시·농촌 개발>

지역간 균형개발은 국토개발의 주요한 목표 중의 하나가 되어 왔다. 이와 병행하여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낙후되었거나 특수한 여건에 처해 있는 지역의 개발을 위하여 특정지역 개발과 광역적 지역개발도 아울러 추진되어 왔다.

특정지역개발로는 ① 태백산 특정지역 개발사업(사북읍을 중심으로 후생복지시설 등의 확충) ② 제주도 특정지역 개발사업(관광주도형 종합개발계획) ③ 다도해 특정지역 개발사업(소득증대와 복지향상) ④ 88올림픽고속도로 주변 특정지역 개발사업(산간·오지 개발과 자연환경 보존에 역점) 등이다.

광역적 지역개발로는 ① 광주권 개발사업(광주·여수·목포·순천에 주택단지, 어항, 수산 및 농산물 유통센터 건설) ② 전주권 개발사업(전주·이리·남원에 공단, 주택단지, 관광단지 조성) 등이 있다.

한편, 대도시로의 인구집중의 원인인 산업시설·고등교육시설·주요 행정시설 등의 지방분산이 집요하게 추진되었고, 행정권한의 지방이양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서울의 강남개발, 대전 대덕연구단지의 건설, 과천·안산·창원 신도시 건설 등이 이러한 정책추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계획은 1960년대의 성장지상주의에서 70년대의 조정기를 거쳐 최근에는 81년의 도시계획법 개정을 계기로 한 도시계획의 체계화·민주화·전문화의 과정을 밟고 있으며, 도시설계제도의 도입을 위한 시도가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1980년대는 농촌개발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다.

즉, 1970년대에 인식되었던 단순한 생산공간으로서의 농촌이 아니라 생산·생활·문화가 한꺼번에 어우러지는 삶의 장소로서의 농촌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시는 주변 농촌에 일자리와 고급 서비스를 공급하고, 농촌은 도시에 식량뿐만 아니라 여가공간·전통문화공간, 나아가서는 주거공간까지를 제공하는 생활권으로 통합된 양자간의 기능적 연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에 경지정리, 수리안전답화, 농로건설, 주산단지조성, 농경지의 타용도전환 억제 등에 덧붙여서 농공단지(農工團地)건설이 긴요하게 되었다.

<국토개발의 과제>

국토개발이란 국민이 어느 곳에 살든지 삶의 만족을 누릴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는 데 근본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본인식하의 국토개발의 과제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있다.

① 정보화의 급속한 진전에 따른 국토공간 체계의 정립 ② 민주화의 추세에 따른 국토개발방식의 강구 ③ 여가수요(餘暇需要)의 급증에 따른 대처방안 강구 ④ 국토공간의 다핵화(多核化), 국민생활의 형평화, 국토이용 고도화의 지속적인 추진 ⑤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 산지와 간척지의 개간, 삼면인 바다를 국토자원으로 이용하는 것 등이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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