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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18 (목) 21:22
분 류 사전3
ㆍ조회: 2767      
[도시] 도시-도시의 역사 (민족)
도시(도시의 역사)

세부항목

도시-개관
도시(도시의 역사)
도시(우리 나라 도시의 생태학적 특징)
도시(도시인의 생활양식)
도시(도시문제)
도시(참고문헌)

[고대]

한반도에 있어서도 석기를 도구로 한 농경으로 잉여생산이 생기고, 토기를 구워 생활용구로 쓰게 되면서 도시가 싹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 권1에는 “환웅(桓雄)이……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정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니 이를 신시(神市)라 하고 환웅천왕이라 하였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농경·수명·질병·죄형(罪刑)·윤리 등 인간 360여 가지 일을 다스렸다.”고 한 단군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풍백·우사·운사 등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무속적 전문가들로 지배계급이 형성되고, 그들에 의하여 기상관측과 농경감독이 이루어졌으며, 의료와 법질서가 행해진 신전도시가 탄생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소박한 신전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석기로 농사를 짓던 신시라는 도시사회도 청동기문화시대로 내려오면서 차차 규모도 커지고, 예의와 윤리와 질서가 엄격한 계급사회로 옮아갔음은 ≪한서 漢書≫·≪후한서≫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의 수송수단이나 정보매체는 하천이 중심이 되고 도로는 부수적이었으니, 고대도시는 예외없이 하천 유역에 형성되었다.

또, 한민족은 그 주류가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였으므로 도시형성도 북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반도의 도시문명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을 중심으로 꽃피었으나, 삼한시대로 내려오면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모두 78개라고 전해진 삼한의 작은 나라들은 오늘날 성읍국가(城邑國家)로 설명되고 있으나, 그 중 상당수는 도시국가였을 것이다. 즉, 산성 또는 읍성을 쌓고 왕후(王侯)·제사(祭司) 등의 지배층과 농경에서 해방된 전사(戰士)·수공업자·상인들이 독립된 단위로 모여 살았으며, 계급의 분화와 사회적 분업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청동·철 등 금속기나 토기의 제작에도 굴레를 사용하고, 농경에 말과 소를 부렸으며, 조직된 노동력을 이용하여 보를 막는 따위의 관개시설을 설치하여 농산물의 잉여를 쌓아갔다.
마한의 백제국(伯濟國)이 백제가 되고, 진한의 사로국(斯盧國)이 신라가 되는 등의 과정에서 크고 작은 성읍국가들 중 어떤 것은 국도(國都)가 되고 어떤 것은 한 촌락으로 전락하였을 것이다. 삼한시대의 성읍국가 중 상당수는 오늘날 유수한 지방도시의 원형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완산국(完山國)이 전주가 되고, 금관가야국이 김해가 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삼국시대의 도시는 훨씬 더 발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 권2 미추이사금 원년(262)조의 “7월 금성 서문에 화재가 나서 인가 100여 구(區)가 불탔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도시국가들 중 인구밀도가 꽤 높은 곳도 있었던 것 같다.

고구려 전기 400여 년간의 수도였던 집안(輯安)의 국내성(國內城:지금의 通溝)이 어떤 도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427년(장수왕 15) 이후의 수도였던 평양이 얼마나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문명을 형성하였던가는 출토품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인구의 규모나 생활상을 알아볼 기록은 거의 없다.

기원전 6년부터 거의 500년간이나 백제의 수도였던 광주(廣州)는 풍납동토성지(風納洞土城址)에서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고, 제2·제3의 수도였던 웅진(熊津:지금의 공주)과 사비(泗歷:지금의 부여)의 도시 규모도 성곽이나 출토품을 통하여 추측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삼국시대 우리 나라 도시의 규모나 형태는 국내외의 여러 기록에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3에, 신라는 건국 21년(기원전 36) 왕경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이름하고, 이어서 101년(파사왕 22) 금성 동남쪽에 둘레 1,023보인 월성(月城)을 쌓아서 각각 왕의 거처로 삼았다는 기록과, ≪구당서≫·≪신당서≫의 신라전에 “왕의 거처를 금성이라 하였는데, 그 둘레는 8리이며 위병이 3천 명이었다.”는 기록에서 통일기 이전의 신라 수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삼국유사≫ 권1 진한조에 “신라 전성시의 경중(京中)은 17만8936호(戶) 1,360방(坊) 55리 35금입택(金入宅)이었다.”고 하였고, 같은 책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郎望海寺條)에 “제49대 헌강대왕 때는 경사(京師)에서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하여 초가가 하나도 없고, 노래와 악기 소리가 길에서 그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경중 17만8936호’에 대해서는 이의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삼국사기≫ 헌강왕 6년(880)조에도 “경도의 민가가 줄지어 늘어섰고 노래와 악기소리가 계속되었다.” 내지 “민가는 기와로만 덮고 풀로 이지 않았으며 밥은 숯으로만 짓고 나무를 때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신라의 왕도가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하였던가를 짐작하게 하며, 왕도 안은 방리제(坊里制)가 시행된 바둑판모양의 계획도시였음도 알 수 있다.

한편, 509년(지증왕 10) 동시(東市)를, 695년(효소왕 4) 남·서시의 양시를 두었다고 하여 시장이 제도화된 것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구체적 양태는 알 길이 없다.

고구려는 삼경제(三京制)로서 수도인 평양 외에도 국내성과 한성(漢城:지금의 載寧)을 두었으며, 전국을 5부로 나누어 지방장관과 이원(吏員)을 두었다고 하였다.

백제도 초기에는 22담로(首魯), 즉 22개의 고을을 두었다가 그 뒤 전국을 중·동·남·서·북의 5방(方)으로 나누고, 각 방에 방령(方領)이라는 지방장관을 두어 1천 명 정도의 군사를 배치하였다. 방 밑에는 각각 6∼10개의 군(郡)을 두고 각 군에 군장(郡將) 3인씩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들 방·군은 대개 지난날의 성읍들이 변화한 것이라 추측되나, 그 위치나 규모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 ≪양서 梁書≫ 신라전에 통일 이전의 신라에도 국도(國都) 주변인 기내(畿內)에는 6탁평(啄評), 기외에는 52개의 읍륵(邑勒)이 있다고 하였으나, 이 또한 그 위치나 규모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방도시들은 삼국시대의 이들 현읍(縣邑)에서 싹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의 경우, 통일 이후 687년(신문왕 7)에 완성된 구주오소경(九州五小京)의 제도가 생긴 뒤부터 지방도시의 도시성은 뚜렷이 부각된다.

상주(尙州)·양주(良州:지금의 梁山)·강주(康州:지금의 晉州)·한주(漢州:지금의 廣州)·삭주(朔州:지금의 春川)·웅주(熊州:지금의 公州)·명주(溟州:지금의 江陵)·전주(全州)·무주(武州:지금의 光州) 등 구주와 금관(金官:지금의 金海)·중원(中原:지금의 忠州)·북원(北原:지금의 原州)·서원(西原:지금의 淸州)·남원(南原)의 오소경은 모두 수륙교통의 연결점이자 농경시대의 지방 중심지점이었다.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도 양주가 부산으로, 한주가 서울로 그 위치가 조금 바뀐 채 이어지고 있고, 특별한 예외도 있기는 하나, 거의 전부가 특별시·직할시를 포함한 도시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봉국의 수도 철원에서 개국한 고려는 919년(태조 2) 송악(개성)으로 천도하였다. 그 뒤 1029년(현종 20) 둘레가 2만9700보인 나성(羅城:외성)을 완성하고, 성안을 5부 35방 344리로 구분하였으니 이것이 개경(開京)의 규모였다.

송나라의 서긍(徐兢)이 ≪고려도경≫에서 “왕성의 규모가 비록 크기는 하나…… 지붕은 대개 풀로 이어 비바람을 가릴 정도이고, 부잣집은 기와로 이었으나 겨우 열에 한둘뿐이다.”라고 혹평하였지만, 왕성 안에 70구(區)의 절이 있다는 ≪송사 宋史≫ 고려전의 기록들로 미루어 보면 그다지 초라한 서울은 아니었을 것 같다.

또, ≪고려사≫ 유승단전(兪升旦傳)에 의하면 1232년(고종 19) 강화 천도 직전 “경도의 호(戶)는 10만에 이르고…….”라 하였고, 이수광(李邈光)이 ≪지봉유설 芝峯類說≫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조 때 개성부의 성내 민호는 13만이라.” 한 것을 보면 전성기에 개경의 인구는 10∼15만 정도에 이르렀을 것이다.

여기에 관아·불사(佛寺)·민가가 섞여 매우 조밀하게 모여 살았고, 시가 중심에는 장행랑(長行廊)이라는 상설 점포 외에 허시(墟市)라는 노점시장이 매일 개설되어 은병(銀甁)·곡물·포목 등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고려의 지방도시 중 큰 것은 서경(평양)·동경(경주)·남경(한양)의 3경인데 각각 유수관(留守官)을 두었다. 특히, 서경은 태조가 〈훈요십조 訓要十條〉에서 ‘……만대(萬代)나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라고 한 만큼 대대로 군사 및 정치상의 준(準) 수도로 중시되었다.

한편, 983년(성종 2) 목(牧)이 된 양주·광주(廣州)·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순천)·해주·황주 등 12개 고을은 모두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 읍들은 예외없이 지방교통의 요충이자 정보의 매개 및 물자의 집산지여서 삼국·통일신라 시대부터 요지가 되어 온 지방도시였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1018년(현종 9) 이후 안북(安北:지금의 安州)·안서(安西:지금의 海州)·안동·안변의 4도호부와, 광주(廣州)·충주·청주·진주·상주·전주·나주·황주 등의 8목으로 계승되었다.
이상 3경 4도호부 8목의 수령은 이른바 계수관(界首官)으로서 다수의 군현을 직접 간접으로 통치, 관할하였으므로, 다수의 관리와 군졸을 휘하에 두게 되어 읍내의 도시성을 높였다.

[조선 전기]

조선이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1394년(태조 3) 10월이었고, 그 해 12월 정도전(鄭道傳)이 책임자가 되어 신도(新都)의 조영(造營)을 시작하였다.

한양은 8도의 중앙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남산·인왕산·낙산 등에 둘러싸여 있어 천연의 성곽을 이루고 한강수가 감싸고 흘러,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산하금대(山河襟帶)의 승지이므로 일찍부터 왕도의 후보지로 거론되어 왔다.

한양이 한성부로 개칭된 것은 1395년으로, 이후 그 이름은 조선시대 말까지 사용되었다. 수도 조성계획의 기본근거는 풍수지리설과 ≪주례 周禮≫의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이었다.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지금의 北岳山)을 기점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성을 둘러싸고 안산(案山)인 목멱산(木覓山:지금의 南山)에서 연결시켜 도성의 규모를 정하였다.

주산을 배경으로 본궁인 경복궁을 앉히고, 부(副)주산 격인 응봉(鷹峯)을 배경으로 별궁인 창덕궁을 배치하였으며,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왼쪽인 창덕궁 앞에 종묘, 오른쪽인 인왕산 기슭에 사직단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전면에 육조(六曹)의 관아를, 북문인 신무문 밖에 시전(市廛)을 설치하였으나, 이 시전은 주산인 북악산에 너무 근접하여 있을 뿐 아니라, 시민의 주거와 멀어서 얼마 안 가서 폐지되었다.

동서가 긴 타원형의 도성 안 중간에 동서로 큰길을 내어 그 양끝에 동대문과 서대문을 세우고, 안산인 남산의 줄기와 백호인 인왕산의 줄기가 이어지는 지점에 남대문을 세웠으며, 남대문에서 동서로 난 큰길의 중심까지 남북으로 큰길을 내고, 그 맞닿은 곳에 종각을 세워 도심으로 삼은 외에 경복궁과 창덕궁에서도 각각 동서 큰길에 연결되는 길을 내었다. 이것이 조선왕조 초기의 한성시가계획의 대강이었다.

시전의 배치를 살펴보면 1410년(태종 10) 대시(大市)는 장통방(長通坊)에, 곡물·잡화는 동부 연화동 입구, 남부 훈도방(薰陶坊), 서부 혜정교(惠政橋), 북부 안국방, 중부 광통방(廣通坊)에, 그리고 우마시장은 장통방 밑 개천에 각각 배치하였고, 여항소시(閭巷小市)는 소시민들이 거주하는 문전에서 거래하도록 하였다. 이들과 별도로 혜정교에서 창덕궁 입구까지에 좌우 행장 800여 칸의 시전이 개설된 것은 1412년의 일이었다.

한성에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된 것은 1395년 9월이었지만, 그 뒤 정변·천재(天災) 및 인력과 자재부족 등으로 인하여 공사에 차질이 겹쳐서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422년(세종 4)이었으니, 1394년에 착공한 지 28년 만의 일이었다. 도성 안 5부 59방(뒤에 49방이 됨)의 넓이는 약 17.8㎢이었고, 도성 밖 10리 안의 한성관할구역인 성저십리(城底十里)의 넓이는 약 250㎢ 정도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0년 윤4월 8일조에 ‘경성 5부 호(戶) 1만6921, 구(口) 10만3328, 성저십리 호 1,601, 구 6,044’라 하고, ≪세종실록≫ 지리지에 ‘5부 호 1만7015, 성저십리 호 1,779’라 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 한성의 인구는 대체로 11만∼12만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도성 안의 토지는 사유를 인정하지 않았고, 주민의 가옥은 한성부가 신청을 받아 공지를 분양, 대여하였다.

≪경국대전≫의 기준을 보면, 대군(大君)·공주(公主)는 30부(약 4,225㎡)로 가장 넓고, 서인(庶人)은 2부(약 282㎡)로 가장 좁게 계층에 따라 증감되었고, 주택의 규모도 엄격히 규제되었다. 심지어 좌향조차도 궁궐과 같은 자좌오향(子坐午向)은 허용되지 않은 것 같다.

조선 전기의 지방도시도 고려 때의 그것과 같이 행정의 중심지로서, 곧 대읍(大邑)이었다. 건국 초인 1393년에 정하여 계수관을 둔 대읍은 계림(지금의 경주)·안동·상주·진주·김해·경산(京山:지금의 성주)·완산(지금의 전주)·나주·광주(光州)·광주(廣州)·충주·청주·공주·수원·교주(交州, 交河)·원주·회양·춘주(春州:지금의 춘천)·강릉·삼척·황주·해주·한양·철원·연안·부평 등 25개 읍이었다.

그 뒤 지방행정기관은 대체로 1403년(태종 3)부터 세조 때까지 정비되었다. 이때 유수부(留守府)를 둔 읍은 개성 하나뿐이었고(뒤에 광주·화성 추가), 부윤(府尹)을 둔 읍은 경주·전주·평양(뒤에 함흥·의주 추가)의 셋, 대도호부를 둔 읍은 안동·창원·강릉·영변·영흥의 다섯이었으며, 목(牧)을 둔 읍은 양주·광주(廣州)·연주·파주·충주·공주·청주·홍주·원주·황주·해주·나주·광주(光州)·제주·상주·진주·성주·안주·정주·의주 등 20곳이었다.

이들 고을은 경역이 넓고 인구도 많았으며 교통의 요충에 위치하였으므로, 사람과 물자의 빈번한 교류에 따라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마련이었다. 더욱이, 고을의 격이 높아지면서 업무량이 늘어나자 그만큼 관아의 이속(吏屬)·군졸·노비 등과 관아에 예속된 장인(匠人)·객주·여각(旅閣) 등 상공인도 늘어나서 자연히 전산업형(前産業型) 도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조선 전기의 부·군·현 소재지 사이의 거리는 평균 80리 정도이었고, 대도호·목 소재지끼리는 대개 2일 내지 3일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로 분포되어 있으니, 모두가 정보 및 교통의 결절지(結節地)이었다. 특히, 15, 16세기 무렵부터는 각 지방도시마다 장시가 서게 되어 상업의 중심지까지 겸하게 되면서 지방도시의 기능은 더욱 다양해졌다.

따라서, 그러한 지방도시 주민의 상당수는 비농업(非農業) 또는 반농업적(半農業的)인 직업인이었으나, 아직도 전원적·비산업적 도시의 성격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조선 후기]

조선왕조가 성립된 지 200년이 지나고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큰 병란을 겪고 난 뒤 도시사회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겹쳐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공업상의 변화이다. 종래의 관공장(官工匠) 중심의 독점적 수공업에서 독자적 사(私)공장들이 등장하여 경쟁적인 생산활동으로 양질의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상업상의 변화이다. 외국(주로 청나라)과의 무역이 활발해지고 금속화폐의 유통과 장시의 보급 및 보부상의 활동 등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상업인구가 대폭 증가하고, 관인시전(官認市廛)에 대한 사상(私商)들의 도전경쟁이 활발해져서 상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셋째, 시골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든 현상이다. 적자와 서자 및 양반과 상민의 신분질서가 문란해지고, 일부 지식층의 의식개혁이 일어나면서, 관리와 양반의 수탈 및 천재지변에 지친 농민들이 상인 또는 공장(工匠)으로 전업하였다.

우선 한성의 경우, 왜란과 호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나 17세기에 들어 궁궐을 중건 또는 창건하여 면모가 일신되고, 국내외 물품의 수급을 독점하여 번영한 육의전(六矣廛) 등의 관인상전, 송파(松坡)·누원(樓院) 등에서 자생하여 활기를 띤 사상, 용산·마포 등 한강변에서 활개치던 경강상(京江商) 등 경쟁적 활약이 상공업을 크게 발달시켰다.

난리 뒤 4만 명 이하로까지 감소되었던 한성의 인구는 17세기 중엽인 1669년(현종 10) 20만에 육박하여 조선시대 말까지 지속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한성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도시에서도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개성·의주·평양·동래 등지에서는 청나라 또는 일본과의 무역으로 이른바 송상(松商)·만상(灣商)·유상(柳商)·내상(萊商)들이 활발한 장사를 벌였다.

또, 전주·대구·공주·해주·원주·함흥 등 감영(監營) 소재지 및 이에 준하는 충주·청주·상주·광주·나주·제주·진주·안주 등 대읍들이 굳건한 상업기반을 확보하고 있어, 단순한 행정도시만이 아니라 경제도시로서의 면모도 아울러 갖추어가고 있었다. 특히, 안성은 상공업으로, 강경과 원산은 장시 중심의 대규모 상거래를 통해 각각 특별한 행정적 기반 없이 순전한 경제도시로 번창한 예이다.

18세기 중엽에 쓴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 평양과 안주는 대청무역(對淸貿易)으로, 원주는 생선·소금·목재의 집산지로, 상주는 수륙교통이 결절하여 상거래에 편리한 곳으로, 그리고 전주는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한 곳이라는 등, 주로 경제적 이유를 들어 이러한 도시를 ‘대도회(大都會)’라 하였다.

다음, 원주·철원·대구·안성·강경·덕원부·원산촌은 ‘도회지’라 표현하였고, 이 밖에 충주는 명도(名都), 진주는 대읍, 광주(光州)는 명읍이라는 용어를 써서 각각 그 도시성을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 주요 도시의 인구수를 알 수 있는 자료로 ≪호구총수 戶口總數≫가 있다. 이는 규장각에서 편찬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1789년(정조 13)의 호구수를 종합기록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당시 한성, 즉 경조오부 (京兆五部)가 18만9153명으로 가장 많고, 개성(2만7769명)·평양(2만1869명)·상주(1만8296명)·전주(1만6694명)·대구(1만3734명)·충주(1만1905명)·의주(1만838명) 등이 인구 1만∼2만대의 도시였다.

이 밖에 진주·해주·경성(鏡城)·부산·길주·황주·공주·제주·정주(定州)·안주·안동·경주·의성·동래·밀양·강화·나주·광주(光州)·광주(廣州)·청주·함흥·부여·양주·선천 등 49개의 부·읍이 5천 인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 나타났다.

이들 도시인구의 총수는 57만여 명으로서 전국인구 740만 명의 약 7.8%이었다. 또, 당시 도시부의 인구밀도는 ㎢당 평균밀도가 185인에 달해 전국 인구밀도 33.5인에 비하여 상당한 고밀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주·청주·평양·나주·광주·함흥 등 도시의 인구밀도는 2천∼8천 인에까지 이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도시사회의 특징]

조선시대 도시사회의 특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수도 한성을 비롯하여 지방도시 거의가 부·목·군·현청의 소재지인 읍으로서 행정의 거점이었으므로, 그 고을의 민호수와 농지의 대소에 따라 도시규모의 대소도 비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난을 거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인구의 증가, 장시의 확충, 상공업의 발달, 그리고 도시집중현상 등으로 도시사회는 점차 행정적 거점에서 경제적 거점으로 전환해 갔다.

그리하여 행정적 기능이 전혀 없는 경제적 도시취락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농본(農本)을 강조하고 상공을 천시하던 사회기풍과 쇄국정책 등의 제약요인 때문에 경제도시로서의 발전에는 자연히 한계가 있었다.

둘째, 한성은 물론이고 330여 개의 고을〔邑〕은 그 반수 이상이 읍성을 쌓았는데, 이 읍성은 주목적이 방위에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관권의 과시수단도 되었고, 도시와 농촌을 갈라놓는 경계의 구실도 하였다.

이들 읍성 중 광양·함양의 예처럼 겨우 관아를 둘러싼 정도의 작은 읍성도 있었으나, 그 밖의 읍성들은 그 규모가 커 성내에 능히 수천 내지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성 안에는 관아와 관인·이속·군졸들, 관인시전 및 양반·지주들이 거주하였고, 성 밖에는 장시가 서고 상인·장인·빈농들이 각기 기능별로 모여 살았다.

셋째, 당시에도 도로·배수·청소·소방·야간통행금지 등의 도시제도가 나름대로 틀을 잡고 있었다. 특히, 1794년(정조 18)에 시작하여 2년 반 만에 완성한 신도시 화성(華城:지금의 수원성)은 조선 후기의 축성 및 도시설계의 집대성이었다.

넷째, 조선시대 지방도시의 인구규모는 2만을 최고로 5천에서 1만대가 대부분이었는데, 이 수는 중세기 서구의 도시인구에 비하여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특히, 한성의 20만 인구는 전산업형 도시인구 중에서는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음에 불구하고 동일한 연대에 이미 산업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서구 도시들에 대비되는 조선시대 도시의 후진성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도시발달이 늦어진 데는 ① 지정학적으로 국토가 양(洋)의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로와 동떨어졌다는 점, ② 정책적으로 왕조 500년간에 철저한 쇄국주의를 폈다는 점, ③ 사상적으로 은둔적인 유교에 치중한 점, ④ 산업적으로 상공업을 억제하고 농업에 편중한 점, ⑤ 제도적으로 중앙집권에 치우쳐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가 발달하지 못한 점, ⑥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큰 전란을 겪은 점 등의 요인을 들 수 있다.

[개항기]

여기서 개항기라 함은 강화조약을 계기로 개국, 개항한 1876년부터 1910년 국권상실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의 우리 도시사회는 개항장·개시장(開市場)을 중심으로 크게 변화해 갔다.

동양 3국 중 제일 먼저 1842년에 개항, 개시한 중국 각지에는 80개의 개항장·개시장이 있었으며, 상해(上海) 등지에는 외국인 전용 거주구역인 조계(租界)가 설정되었다. 1859년에 개항한 일본에도 요코하마(橫濱) 등에 외국인 거류지가 설정되었다. 우리 나라의 개항장은 바로 일본이 서구 각국에서 배운 수법을 역수출하여 생겼는데,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1876년 우리 땅에 처음으로 개항장을 설치하게 하여 등장한 세력은 일본이었고, 뒤를 이어 중국은 1882년, 영국·미국 등 서구 각국은 1883년과 1884년에 걸쳐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위의 개항장·개시장 중 의주·용암포(龍巖浦)의 경우처럼 명목뿐인 개항장도 있었고, 부산·목포·군산·청진의 경우처럼 일본의 독무대인 예도 있었다.

우리땅에 있어서의 개항장·개시장의 역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된 청일·러일·영일 등 열강끼리의 각축전이 반영된 것이었다.

특히, 일본은 개국을 강요하던 당시부터 한반도를 그들의 지배 아래 둘 속셈으로 ① 부산·원산·인천에 설치된 그들 전관거류지의 경영에 전력을 기울였고, ② 그 밖의 개항장·개시장에서도 각국 공동조계 중 가장 좋은 자리에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③ 조계 안팎의 땅을 한 뼘이라도 더 사 모아서 개항장·개시장을 그들의 경제거점 및 군사침략의 교두보로 삼는 한편, ④ 개항장·개시장 이외 외국인의 거주·통상이 금지되어 있던 대구·함흥·전주·개성·수원·진주·밀양·김천·제주·해주·황주 등 내륙지방 도시에까지 침투하여 거주, 통상함으로써 일본 식민지화의 선봉으로 활약하였다.

개항장·개시장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각기 자기 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함께 가지고 들어왔다. 그들의 무역선과 정기선이 드나들면서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었고, 1900년을 전후하여 경인선(인천∼노량진간 1899, 한강철교 1900), 경부선과 마산선(1905), 경의선(1906) 등 철도가 부설되어 지역 질서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1884년에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은 갑신정변으로 곧 혁파되었으나, 1895년에 재개된 근대적 우편제도는 단시일 안에 전국에 보급되었고, 1885년 한성∼인천, 한성∼평양간에 전신이 개통된 뒤 19세기 말까지 전국의 주요 도시간의 전신망이 거의 연결되었다. 1902년 한성에 가정전화가 가설되었고, 이듬해 인천·평양에까지 확대되었다.

석유로 불 밝히는 것이 일반화된 것은 1880년대 초부터의 일이었고, 1885년 무렵 경복궁에 전등이 가설된 뒤 한성(1900)·인천(1906)·부산(1910)에도 전등이 보급되었다. 한성에 자전거와 인력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4년 전후의 일이었고, 전차가 운행된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을 이어온 8도 330여 군(郡)의 지방행정구역은 1895년 23부(府) 337군으로 바뀌었고, 이듬해 1수부(首府) 13도(道)로, 다시 1906년 일제 통감부(統監府)가 발족되면서 1수부 13도 11부 332군으로 개편되어 그 해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1876∼1910년에 걸친 개항기가 비록 짧기는 하였지만, 이 사이에 이 땅의 기존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로 개편되는 중대한 변혁이 일어났는데, 지역질서 내지 도시질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개편과정에서 먼저 나타난 현상으로 지방도시의 성쇠부침이 뚜렷해진 것을 들 수 있다.

외국자본, 특히 일본인들에 의하여 활발히 개발되고 있던 부산·원산·목포·군산·마산·진남포 등의 개항 신흥지들은 현저히 도시화해 간 데 비하여, 강화·광주(廣州)·양주·홍주·상주·성주·경주·나주·원주·강릉·안주·정주·길주 등 주로 내륙의 옛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원·청주·공주·전주·광주(光州)·대구·진주·해주·평양·의주·춘천·함흥·경성(鏡城) 등 13도의 도치(道治)에는 각급 재판소·경찰서·세무서·보통학교·사범학교·우편관서·전신전화국 등이 설치되어 행정도시로서 그 면모를 새로이 갖추어 갔다.

한편, 경부선·경의선 두 철도의 개통으로 대전·신안주(新安州) 등지에 새 도시가 싹트고, 김천·천안·개성·황주 등 일부 전통적 지방도시도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10년을 전후한 우리 나라 도시의 인구와 면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1907년 5월 20일 기준으로 대한제국 경무고문본부(警務顧問本部)가 실시한 ≪한국호구표≫와 제2차 ≪통감부통계연보≫에 실린 1907년 말 외국인 호구를 자료로 인구 1만인 이상의 17개 도시를 〔표 2〕로, 5,000∼1만인의 40개 도시를 〔표 3〕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상 57개 도시를 대상으로 1918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편찬한 ≪조선지지자료 朝鮮地誌資料≫에 따라 도시부의 면적을 계산(한성부만은 1907년 당시의 면적)하여 이를 기초로 도시의 인구밀도를 〔표 4〕와 같이 얻어내었다.

이 세 개의 〔표〕를 통하여 새로 개항장이 된 부산·인천·원산·마산·목포·진남포·성진 등과, 경부선 연선인 대구·수원·김천·구포·삼랑진·밀양 등, 그리고 일본세력의 침투가 많은 경상남도지방의 도시화가 현저함을 알 수 있다.

개성·원주·충주·청주·전주·남원·상주·안동·해주·의주·함흥·경성 등 전통적인 도시의 인구규모가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과, 당시에도 청주·전주·함흥·평양·인천·목포·공주 등지의 인구밀도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1910년 8월 29일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개항장제도를 폐지하고 식민지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지방제도 개정에 착수하여 1914년 4월 1일부터 시행에 옮겼다.

그들은 거의가 과거에 개항장·개시장으로서 일본인이 많이 거류하였고, 통감부시대에 일본 이사청(理事廳)을 두었던 경성(京城)·인천·군산·목포·대구·부산·마산·평양·진남포·신의주·원산·청진의 12개 도시지역을 기초행정단위인 부(府)로 정하고(성진만은 면으로), 종래의 12부 317군을 220군으로 줄였으며, 4,336면을 2,521면으로 줄이는 동시에 종전의 부·군청소재지인 읍을 모두 면으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행정구역 개편에는 우리 국토를 반봉건적인 농업생산지로 영구히 머무르게 하여 그들의 식량공급지로 삼으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다. 따라서, 이미 다수의 일본인이 거주하며 많은 부동산을 침탈하여 사실상 일본화한 곳만 도시, 곧 부로 정하여 집중 개발하고, 나머지 지역은 단순한 농산물생산지로만 묶어두려 하였던 것이니, 회사령을 제정하여 회사설립을 허가제로 억제한 것도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종전의 무단강압정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방향을 바꾼 총독부는 회사령 폐지, 관리와 교원의 제복·착검(着劍)의 폐지, 태형(笞刑)을 벌금형으로 바꾸는 등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1920년 7월 29일자로 면제(面制)를 개정하여 수원·개성·영등포·청주·공주·대전·강경·조치원·전주·익산·광주(光州)·김천·포항·진주·진해·통영(지금의 충무)·춘천·해주·겸이포(지금의 송림)·의주·함흥·나남·성진·회령의 24개 면을 ‘지정면(指定面)’으로 하였다. 전국 2,500여 개의 면 가운데서 비교적 인구가 많고 상공업이 발달하여 재력도 넉넉하며 도시형태를 갖추었다는 데 그 지정이유가 있었다.

이들 지정면을 기능별로 분류하면 ① 도청소재지가 청주·공주·전주·광주(光州)·진주·해주·춘천·의주·함흥 등 9개, ② 철도가 통과하는 교통요충이 대전·조치원·익산·김천·회령 등 5개, ③ 철도 연선이면서 상업의 중심지가 수원·개성·강경 등 3개, ④ 포항·통영은 어항으로 크게 발전한 곳, ⑤ 진해·나남은 일본의 대규모 군사기지, ⑥ 영등포는 경성(서울)의 관문, ⑦ 성진은 개항장이었던 곳, ⑧ 겸이포는 대규모 공장지대였다.

그러나 위와 비슷한 여건을 갖춘 전통적 지방도읍 중 지정에서 빠진 곳이 있었는데, 충주·천안·남원·나주·경주·안동·상주·동래·밀양·사리원 등이 그 예이다.

회사령 철폐, 관세제도 개정 등에 따라 일본 자본의 한반도 진출이 자유로워진 1920년 이후 이 땅에도 서서히 공업화의 기운이 일어나 한인노동자의 수가 늘어나는 한편, 3·1운동 이후 교육·산업에 대한 자각이 적극화, 진취화하면서 현저한 이농향도현상(離農向都現象)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종래의 부면제(府面制)로는 주민통제가 어렵다고 판단한 총독부는 1930년 12월 1일 지방행정제도를 개혁, 부·읍·면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미 있던 12부에 개성·함흥의 2개 지정면을 승격시켜 14부로 하고, 나머지 지정면 22개를 모두 읍으로 개편하되, 새로 충주·천안·정주(井州)·여수·제주·경주·정주(定州)·선천·강계·강릉·철원·북청·웅기 등 19개 면을 승격시켜 41개 읍으로 하였다. 이와 같이, 지방제도를 개혁한 1930년 10월 1일에 실시한 인구조사 결과 부·읍의 인구는 193만3062명으로, 전국 인구 2105만8305명의 9.2%이었다.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滿洲國)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운 1930년대에 이르러 한반도를 종래의 식량 및 원료공급지·공산품판매시장으로부터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바꾸어갔다.

당시 이 땅에는 〈공장법〉이 시행되지 않아 노동력의 착취가 무제한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한 일본 자본의 대거 진출로 방적·시멘트·제분·제지 등 경공업공장이 여러 도시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청진·나진·웅기 등의 항만은 일본 본토에서 만주대륙으로 통하는 최단거리라는 이른바 ‘북선(北鮮)루트’ 이론에 따라 1933∼1934년 무렵부터 북한지역 4개 도에 중화학공장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937년의 〈중요산업통제령〉의 시행과 중일전쟁의 발발로 군수공업 중심의 경제체제 재편성이 강행되었으며, 군사수송능력의 증강을 위한 교통·통신 시설 확충 등의 요인이 겹쳐 값싼 노동력이 도시로 집중되면서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1935년 대전·전주·광주(光州)가, 1936년 이후로 나진(1936)·해주(1938)·진주(1939)가 각각 읍에서 부로 승격되었다. 이리하여 1940년의 인구조사에 나타난 부의 인구는 1930년 당시의 배가 넘는 281만8460명에 이르렀고, 이 중 경성(서울)은 93만 명, 부산은 30만 명에 육박하였으며, 읍의 수도 1940년 말 80개로 크게 늘어났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0년대 후반기부터 신사참배·창씨개명 등 온갖 극단적 시책을 강행하던 일제는 1941년 12월 마침내 미국·영국 등 연합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따라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생활에 내핍과 복종만 강요되었다.

따라서, 경제부문도 전시체제로 개편되어 식량의 강제공출과 배급제, 각 가정의 금속기물의 공출, 제한송전 또는 단전, 강제근로동원 등으로 우리 나라 전체는 결핍과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대개의 큰 도시는 공습대책의 일환으로 소개령(疎開令)이 내려져 주택은 강제철거되면서도 어떤 도시에는 군수품의 생산·수송 등을 위하여 사람을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1941년부터 광복 때까지 5년 동안 성진(1941)과 흥남(1944)이 부로 승격되고, 약 40개의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광복일인 1945년 8월 15일 당시 22부에 123읍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쟁수행을 위하여 남은 자원을 파악하려고 1944년 5월 1일을 기준으로 자원조사를 실시하였는데 22개 부의 인구 합계는 355만5246명으로 전국 총 인구 2591만7881명에 대한 비율은 13.7%이었다. 여기에 123개 읍의 인구 합계 약 264만8000명을 합한 부·읍 인구가 전체인구의 23.9%에 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강점 2년 뒤인 1912년 10월 훈령으로 전국 주요 도시의 시가지구획개정에 인가를 받도록 하여 가로(街路)의 길이·너비 등의 통일을 기하는 한편, 부령(府令) 11호 〈시가지건축취체규칙〉을 제정하여 용도지구지정(用途地區指定)과 건축규제를 실시하였다.

1934년 6월 다시 〈조선시가지계획령〉을 발하여 1934년 나진 시가지계획을 시작으로 1941년까지 경성(서울)·부산·평양·대구 등 모두 37개 도시의 시가지계획과 경인지구(京仁地區)의 지역계획을 수립,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들은 중일전쟁에 이은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거의 실시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상수도시설은 1880년의 부산상수도가 처음이었고 서울에서는 1908년에 준공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모두 79개의 부·읍에 상수도가 시설되었으나, 급수능력이 적어 대다수의 도시민은 생활용수를 우물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전등은 1935년까지 부·읍에 전화사업(電化事業)이 완료되어 사용되었으나,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후 철저한 제한송전으로 램프나 호롱불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주택은 공급이 급격한 수요를 따르지 못한 데다가 총독부의 주택정책이 일본인 위주였으므로 한국인의 거주사정은 매우 나빠서 주요 도시에서까지 ‘토막집’이라는 불량 가건물이 적지 않은 실정이었다.

[현대]

광복 당시 우리 땅에는 22부 123읍이 있었음은 위에 적은 바와 같다. 그 중 38선 이남에는 서울·부산·인천·대구·광주·대전·개성·목포·전주·군산·마산·진주 등 12개의 부와 76개의 읍이 있었다.

광복 후 남한에 거주하던 70여만 명의 일본인(군인 24만 포함)이 떠난 대신, 일본·중국 등 외지에서 살던 동포 120만 명이 돌아오고, 공산체제를 반대한 북한주민 약 48만 명이 남하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도시에 흩어져 정착하였다.

이와 함께 권력과 부(富)와 자유를 찾아, 또는 교육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모여드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좌우익 사상대립에 사회적 불안을 느낀 사람들, 농지개혁으로 생활기반을 잃은 농촌의 지주층들도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정부수립 후 처음 실시한 1949년 5월 1일의 인구조사에서 전국의 인구는 2018만9000명이었고, 서울시의 인구는 144만6000명이었으며, 14개 부의 인구 합계는 202만8000명으로서 시·부 인구 대 총인구 비율은 17.2%, 또 73개 읍의 인구 합계는 191만3000명으로서 시·부·읍 인구 대 전국 인구 비율은 26.7%에 이르렀다.

6·25전쟁의 3년 동안 99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8만 동의 주택피해, 전국 20개 시청 중 15개의 청사가 피해를 입었고, 국내 전체 제조업체의 70%에 달하는 4,673개의 공장이 전재(戰災)로 인해 가동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전재의 피해에도 지역차가 있어 시골보다 도시의 피해가 훨씬 컸고, 특히 서울·인천·천안·대전·김천·진주·춘천·원주·포항·평택·왜관·성주·하동 등 격전지는 도시 전체가 거의 파괴되다시피 하였다.

전화를 피하고자 많은 도시인이 농촌으로 피난가고, 인민군의 남진에 따라 시골사람들 중에서도 대구·부산 등지로 피난가는 사람이 많아서, 일시적이나마 이러한 도시·농촌 사이의 많은 교류가 휴전 후 도시 지향의 심리적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한때 압록강변까지 전진하였던 국군이 후퇴할 때 200만 명에 가까운 북한주민이 따라서 월남하여 주로 서울·부산·인천·대구·대전·춘천·원주 등 도시에 정착하게 되었고, 군대생활을 통하여 도시생활을 경험한 시골 젊은이들이 제대 후 도시로 몰려들었다.

여기에 광복 후 부쩍 늘어난 고등학교·대학 등 고급학교를 찾아 시골학생이 도시로 몰리고, 이들은 학교를 졸업한 뒤 그대로 도시에 눌러 살게 되는 일까지 겹쳐 도시화의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리하여 1955년의 센서스에서 전국의 시 인구는 528만1000명, 읍 인구는 179만1000명이었는데, 1960년의 센서스에서는 시 인구 699만7000명, 읍 인구 225만9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원래 공업이 부진한 데다가 약간 남아 있던 생산시설마저 파괴된 탓으로 일자리는 없는데 인구만 집중되어, 1950년대 후반기의 우리 나라 도시화는 이른바 ‘고용기회를 웃도는 인구의 집중’이라는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도시화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따라서, 원조물자·구호물자의 판매·소비를 통한 제3차산업에의 과잉종사를 일으키는 한편, 서울·부산·인천 등지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판잣집이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 지식과 의지만 가지고 도시로 몰려온 젊은이들에게 취업의 기회는 없고, 부정부패와 퇴폐풍조만이 가득 찼으니 현실에 대한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제3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시행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1962∼1966년의 제1차, 1967∼1971년의 제2차로 이어져 갔다. 이에 따라 1960∼1964년 사이에 매년 5.5%를 기록하던 경제성장률이 1965∼1969년의 5년간은 연평균 11.7%로 뛰어오르고, 특히 제조업 분야의 성장률은 1960년대 전반기의 9.4%에서 후반기에는 22.6%라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하였다.

이처럼 급격한 공업화에는 이미 도시에 집중된 인구가 거대한 소비시장을 이루었던 점이 도움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 공업화는 동시에 새로운 인구를 도시로 유도하기도 하여 1970년의 센서스에서는 시 인구의 합계가 1270만7000명, 읍 인구의 합계가 280만 명으로, 시·읍 인구의 합계 1550만9000명은 전국인구 3088만2000명의 50.2%가 되어 마침내 도시인구율이 50%선을 넘어섰다.

개발도상국의 도시화과정에서 항상 문제되는 것은 인구가 몇 개의 대도시로 편중 집중되는 현상인데, 우리 나라에서도 1961∼1970년의 10년간 대도시집중현상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다.

주요 도시의 인구수는 1960년과 1970년 사이에 서울이 244만 명에서 553만 명으로, 부산이 166만 명에서 187만 명으로, 대구가 67만 명에서 108만 명으로 늘어났고, 인천·광주·대구도 50∼70%가 증가되었다.

그 결과 이들 대도시는 새로운 주택지 조성과 도로의 신설·확장 등 급증하는 인구수용대책에 전력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이와 같은 공공개발사업은 동시에 민간의 개발의욕을 자극하여 서울의 경우 1966년 6∼9층의 건물이 111동, 10층 이상이 18동밖에 없었으나, 1970년 6∼9층이 487동, 10층 이상이 122동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대도시의 확장과 고층화에도 불구하고 1950년 이후의 인구과잉집중은 심각한 주택난을 초래하여 서울을 비롯한 부산·인천 등지마다 판잣집과 같은 불량 무허가주택이 난립하였다. 서울의 경우 1966년 13만7000동, 1970년 6월 18만8000동의 무허가건물이 있었고, 봉천·구로·시흥·상계·미아 등 지역에는 대규모의 빈민촌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960년대 후반기의 급속한 개발은 졸속개발을 수반하기도 하여, 서울특별시가 세운 400동의 서민아파트 중 마포 와우산 기슭의 와우아파트 1동이 1970년 4월 8일에 무너져 사망 33명, 중상 19명의 인명피해를 내는 참사가 있었고, 1971년 8월 광주(廣州) 대단지에서는 난동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1971년 말 167명의 사망자를 낸 대연각(大然閣)호텔, 1972년 말 사망 51명, 부상 76명을 낸 시민회관, 1974년 11월 사망자 88명을 낸 대왕(大旺)코너 등의 대형화재를 낸 건축물들은 모두 1960년대 후반기에 건설 또는 준공된 것들이었다.

1970년대의 도시화를 유도한 큰 요인 중의 하나는 고속도로망 형성이었다. 1969년 7월 경인선, 1970년 7월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전국의 일일생활권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어 1973년 11월 호남·남해선, 1975년 10월 영동·동해선, 1977년 12월 구마선이 개통되면서 전국토에 고속도로망이 형성되어 도시간 이동의 시간적 거리를 대폭 단축시키고 직접생활권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그뿐 아니라 경제개발·지역개발에 엄청난 촉진효과를 거둔 동시에 “도시에의 인구집중은 송출지(送出地)로부터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라벤슈타인(Ravenstein)의 법칙에 따라 지방인구의 가속적인 대도시 집중과 지역간 인구이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반면, 통과지나 경유지의 중소도시들은 인구가 감소되는 결과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한편,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으로 추진된 울산공업단지가 기대하였던 성과를 거두자, 이에 따라 고도의 경제성장에 기여함과 아울러 인구와 산업의 대도시 과밀집중을 막는 방안으로 전국 각지에 많은 공업단지가 조성된 것도 1970년대 도시화의 한 특징이었다.

1969년 7월 구미, 1970년 9월 포항, 1974년 여천, 1977년 반월 등 공업단지가 각각 기공되었으며, 이 밖에 인천·성남·안성·춘천·원주·강릉·청주·충주·대전·천안·전주·군산·정읍·광주·목포·나주·순천·대구·오산·온산·양산·부산 등지에 대소규모 공업단지가 조성, 가동되어 많은 인력을 흡수하였다.

1970년대 도시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72년 말에서 1973년 말에 걸쳐 일어난 제1차 유류파동, 1978년 말에서 1979년에 걸친 제2차 유류파동이었다. 이 두 차례의 충격으로 우리 나라의 경제는 고도성장에서 저성장으로 전환하였고, 이에 맞추어 도시정책도 종전까지의 개발·확대 일변도에서 개발·보전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실을 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전국 주요 도시 주변 5,397㎢에 광역의 개발제한구역을 설정한 것은 도시의 무질서한 평면확대를 방지하는 시책이었고, 하수처리장·위생처리장·도시가스사업 등은 도시시설의 내실화를 위한 조처들이었다.

두 차례의 유류파동으로 국내외 경기가 침체, 위축되고 울산·포항·구미·여천 등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공업단지에서 많은 노동력을 흡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도 서울·부산·대구 등 거대도시로의 인구집중은 계속 강세를 보여 개발의 손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서울에는 영동·잠실 지구에 1000만 평의 대규모 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었으며, 서울역∼청량리 간 9.5㎞의 지하철과 98.6㎞의 수도권전철이 개통된 것은 1974년 8월이었다. 여의도·영동·잠실 지구에 고층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대도시의 땅값이 폭등하여 사회문제화한 것도 1970년대의 일이었다.

1975년의 센서스 결과에 의하면 읍을 포함한 도시인구의 총수는 2053만6000명으로 전국 인구 3744만9000명의 69.4%에 이르렀다. 1971∼1975년의 도시화는 1960년대 후반기로부터 이어온 공업화와 그에 따른 고도의 경제성장의 결과이며, 1976∼1980년에 일어난 도시인구율 10.2% 증가는 그 사이 도시, 특히 공업단지가 소재한 지방도시의 인구집중 결과였다.

또한 1979년 5월부터 53개의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이전에는 농촌인구였던 부분이 도시인구로 집계된 데도 원인이 있었다. 이 조처로 47개의 군청소재지 면이 읍으로 승격됨으로써 전국의 군청소재지는 모두 읍 이상의 도시가 되었다.

광복 이후 청주·춘천은 미군정하인 1946년에, 이리는 1947년에 부로 승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인 1949년 7월에 개정된 〈지방자치법〉으로 부를 시로 바꾸고, 같은 해 수원·여수·순천·포항·김천을 시로 승격시켰다. 6·25전쟁 후 서울·부산에 인구집중이 현저하여 1962년 서울을 국무총리 직속의 특별시로, 부산을 정부 직할시로 개편하였다.

1955년 이후 연도별 시 승격상황은 다음과 같다. 1955년 제주·강릉·경주·충무·원주·진해, 1956년 충주·삼천포, 1962년 울산, 1963년 의정부·천안·안동·속초, 1973년 안양·성남·부천, 1978년 구미, 1980년 동해·창원·제천·영주, 1981년 광명·송탄·동두천·태백·정주(井州)·남원·금성(錦城)·영천·김해·서귀포가 각각 읍에서 시로 승격되고, 대구와 인천이 직할시가 되었다. 그 결과 1985년 1월 1일 현재 우리 나라에는 특별시 1개, 직할시 3개, 시 46개, 읍 187개가 있다.

〔표 8〕은 1949∼1980년의 도시와 농촌의 인구 분포를 나타낸 것이다. 1949년 26.7%, 1955년 32.9%밖에 안 되던 도시인구율이 1970년 50%, 1975년 59%, 1980년 69.4%에 이르렀다. 〔표 9〕와 〔표 10〕은 6·25전쟁 후인 1955∼1980년까지 25년간의 도시규모별 인구증가추세를 알기 위한 표이다.

〔표 10〕을 통하여 1956∼1980년간의 전국 인구증가가 1592만3000명인 데 비하여, 시부(市部)의 증가수는 1616만 명으로 101.5%가 시부에서 늘었고 군부(郡部)에서는 그만큼 절대수가 줄었으며, 시부 가운데서도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의 6대 도시에서 전국 증가수의 73.9%가 늘었고, 특히 서울에서만 706만 명이 늘어 전국 증가총수의 44.4%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끝나는 1966년까지는 농촌지역에도 인구가 점점 늘어 농촌노동력의 과잉이 우려되었는데,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7년부터는 전반적으로 감소현상이 일어났다.

1981년 7월 현재의 지방행정구역을 기준으로 1967∼1980년간에 전국 139개군에서 321만4000명의 인구가 감소되고, 경기도·제주도의 21개 군을 제외한 7개 도 118개 군의 감소수는 336만2000명으로서 군평균 21%의 감소를 나타냄으로써 심각한 인구과소지역(人口過疎地域)·낙후지역의 문제를 낳았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의 도시화는 또 한번 크게 변화한다.

그 첫 번째 요인이 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이었다. 이른바 3저 현상(저환율·저국제금리·저석유가격)으로 한국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여 1980년에 1인당 GNP가 1,600달러였던 것이 1985년에 2천달러, 1988년 4천달러로 급성장 됨으로써 인구의 도시집중, 그것도 대도시집중이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1986년 11월에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하였고 이어 1989년 1월에는 대전시도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요인이 1986년의 아시아게임,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였다. 이 두 차례의 국제행사를 치르면서 서울과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 그리고 요트경기 등이 개최된 부산에 대규모 투자가 전개되었다.

도심부재개발, 불량지구 재개발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서울 한강변의 올림픽도로, 올림픽대교 등을 위시하여 많은 교통시설의 신설·확장·재정비가 실시되었다.

세 번째의 요인이 1980년의 주택 500만호 건설, 1988년부터 시작된 주택 200만호 건설이었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에 의해 주장된 500만호 건설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그 부산물로 1980년 12월에 『택지개발촉진법』이라는 법률이 제정·공포되었으며 서울시내의 개포지구·고득지구·상계지구·중계지구·목동지구 등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낳게 하였다. 위 5대 지구의 면적합계는 2천평방미터가 넘어 세계의 도시개발사상에 유래가 없는 대규모였다.

주택 200만호 건설은 1988년부터 1992년까지의 5년간에 전개된 사업이었으며 서울근교에 분당·일산·중동·평촌·산본 등 5개의 대규모 신도시가 건설되어 수도권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게된다.

86·88 양대행사와 주택 500만호·200만호가 추진된 과정에서 서울과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엄청난 인구증가가 계속되었다. 서울의 인구수는 올림픽이 개최된 88년에 1천만명을 넘어 1992년에는 1,100만에 육박하게 되었다.

또 서울·인천·경기도 인구수는 1990년에 1,858만으로 전국인구수(4천 287만명)의 43.4%에 달하게 되었고 1995년에는 수도권 인구수가 2천만명을 넘어 전국인구수의 44.4%에 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서울 및 수도권에의 인구집중은 전 국토에 점하는 서울에의 1극집중이라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전 국토면적중 겨우 0.6%의 면적밖에 안 되는 서울에 전국인구수의 24.5%, 국민총생산(GNP)의 3분의 1이상, 금융기관 여·수신고의 각각 3분의 2이상, 종합소득세(신고분)의 40%이상, 법인세의 70%이상, 의사수·자동차 등록대수의 각각 40%이상이라는 엄청난 다집적 현상을 낳게 되었다.

네 번째 요인은 1991년부터 다시 시작된 지방자치였다. 이 지방자치의 시행으로 도시재정의 확대, 지역별 개발정책, 지역이기주의 등으로 모든 도시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직할시라는 명칭이 광역시로 바뀌는 것은 1995년부터의 일이고 1997년에는 울산시도 광역시로 승격한다.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이하게 된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의 도시현상을 총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서울과 서울을 둘러싼 수도권의 비대화 현상.

둘째 서울특별시 및 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울산 등 6대 광역시에의 인구집중현상. 1995년 현재로 서울의 인구수 1천 23만, 부산 389만, 대구 248만, 인천 236만, 광주 130만, 대전 130만, 울산 100만으로써 위 7대도시 인구수 합계가 2,256만 명으로 전국인구수(4,598만명)의 49%에 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 대도시에 바로 인접한 도시권 인구수를 합하면 전국 인구수의 거의 6.70%가 이들 대도시권에 집중하고 있다.

셋째 도시군 형성의 현상. 서울과 수도권, 부산·대구를 중심으로 한 부산·대구 도시권, 이렇게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집단현상 외에도 전국에 걸쳐 여러개의 도시군이 형성되어 있다.

동쪽에서부터 고찰하면 속초·강릉·동해·삼척 도시권, 포항·경주·울산·부산으로 연결되는 도시군, 마산·창원·진해권, 진주·사천·통영권, 광양·여천·여수·순천권, 광주·나주·목포권, 전주·익산·군산권 등, 전국을 여러개의 도시 군으로 분류할수 있게 되었다.

넷째 전국토의 도시화 현상. 지난날 도시라는 개념은 농촌과 대비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도시·농촌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농촌은 도시의 외연일 뿐이며 도시와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게 되었다. 그와 같은 현상을 가속화한 것은 1996년 3월 1일부터 실시된 시·군 통합정책이었다.

종전에는 읍이 시로 승격하면 종전의 군 행정구역에서 독립되었는데 이 정책의 시행으로 시가 군을 흡수하게 된 것이다. 즉 시라는 행정구역안에 읍·면이 공존하는 도농일체가 시행된 것이다.

이 때를 계기로 많은 시의 명칭도 바뀌게 된다. 전북 이리시가 익산시가 되고 경남 충무시가 통영시, 삼천포시가 사천시가 되었다. 즉 이리시·익산군이 통합되면서 익산시가 되었고 충무시·통영군이 합치면서 통영시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도농일체의 체제와 함께 전국민의 생활양식도 일체화된다. 종전에는 분명히 도시적생활·농촌적생활에 구분이 있었다. 그러나 교통·통신·정보매체의 발달로 농촌적 생활양식이라는 것이 사라져버린다.

농업과 비농업이라는 차이는 있으되 농촌적 생활이라는 것이 없어진 것이다. 모든 농촌에도 자가용 승용차와 휴대전화와 컴퓨터가 동시에 보급된 것이다. 전국이 1일생활권에서 동시생활권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20세기 인류문명이 도달한 위대한 성과였다.

21세기의 도시사회는 과연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인구의 노령화, 소자화(少子化) 및 전국인구의 절대수 감소, 농업인구의 격감 등의 요인과 전국토의 고속전철망 건설 등으로 지역질서가 크게 바뀌어지는 한편 수도권의 범위확대, 수도권과 동남권(포항·경주·울산·부산·진주·여수·목포)에의 양극화현상,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도시가 연결되는 세계도시화현상(ecumenopolis)도 전망되고 있다.

<손정목>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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