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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7 (목)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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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532      
[조선]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이성무)
1.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관련 문서

1.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1-1.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1-2.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일본 학자들의 견해
1-3.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1-4.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
2-1.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1
2-2.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3-1. 선조조의 당쟁 1
3-2. 선조조의 당쟁 2
4-1. 광해조의 당쟁 1
4-2. 광해조의 당쟁 2

1)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박정희 대통령은 5ㆍ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서 당파 싸움을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갑제 기자는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의 생애를 추적한 연재 기사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구미보통학교에서 배운 [보통학교 국사] 과목을 통해 일본 무사들의 호쾌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은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조선일보], 1998년 1월 13일자).

박정희는 당쟁의 원인을 불교에서 유교로 문물 제도가 바뀌어 민족 자주의 기개가 좀먹히게 된 데서 연유한다고 했으며, 이를 "민족사의 악유전(惡遺傳)이라 칭했다. 그리고 "말(言)로는 머리를 가고 행실(行)은 끄트머리를 가면서, 거기다가 시비와 패거리라면 창자를 움켜쥐고 달려들었던" 조선조 양반 정치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지주(地主) 정당인 한민당(韓民黨)과 그 쌍생아인 자유당(自由黨)과 민주당(民主黨), 즉 이른바 구정치인들이라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을 다같이 "이조의 당파 정치 전통을 이어받은 봉건적 수구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세력의 타도를 혁명의 명분으로 내걸었다. 즉 조선조 양반 정치―한민당―자유당―민주당 계열로 이어지는, 당파적 이해 관계에 집착하는 봉건 정치 세력을 애국적 에리트로 물갈이한 것이 5ㆍ16이라고 자찬한 것이다.

이와 같은 당쟁 망국론ㆍ양반 망국론ㆍ유교 망국론은 앞으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일제의 어용 학자들이 창안해놓은 주장이다. 비단 일제 어용 학자들뿐만이 아니다. 신채호(申采浩) 같은 한말의 지식인들도 망국의 책임을 양반ㆍ유교ㆍ당쟁에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신채호는 [조선사에 있어서의 일천년내 일대 사건]에서, 유교를 신봉하는 김부식이 선교(仙敎)를 신봉하는 묘청에게 승리한 것이 우리 나라의 불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양반 유학자들의 사대주의와 당쟁이 심해져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라가 망한 책임을 조상탓으로 돌린 것은 한탄하는 심정으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종의 신세 타령이라고도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어용 학자들은 한국(조선)은 자치 능력이 없었으므로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는 편이 낫다는 논리를 끌어내기 위해 당쟁을 이용했다.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는 이미 1907년 [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를 써서 조선의 당쟁을 논했다. 그는 당쟁의 역사를 사화(士禍) 시대까지 끌어올리고, 당쟁의 원인은 개인간의 감정 문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정쟁의 양상을 추악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또한 호소이 하지메(細井肇)ㆍ미지나 쇼에이(三品彰英) 등은 당쟁은 한국인의 분열적인 민족성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 만큼, 고칠래야 고칠 수 없는 고질적인 병폐라고 몰아붙였다. 일제는 이러한 이론을 보통학교 역사 교과서에 넣어 전 한국인에게 교육시켰다. 그리하여 박 대통령을 비롯하여 일제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이론에 수긍하도록 만들었다. 일제의 독침이 우리의 뇌리에 깊숙히 박히게 된 것이다.

물론 일제 어용 학자들의 이론은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에 대해 무조건 틀렷다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엑 필요한 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과거사를 총체적이고 균형 있게 이해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일제 학자들은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단결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특히 부각시키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진흙과 같고 한국 사람들은 모래와 같아서 하나하나의 낱알을 보면 진흙보다 모래가 낫지만, 진흙은 잘 뭉쳐지는 데 반해 모래는 잘 뭉쳐지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지적은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일제 학자들이 강조하는 한국인의 단결력 부족 또는 당파성은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뽑았던 조선시대의 능력주의로 인한 역사적 소산이지 한국민의 민족성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

능력 위주의 경쟁이 심하다 보면 단결이 잘 안 되는 수도 있다. 일본의 경우 상대적으로 단결이 잘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일본 특유의 무사 제도 하에서 굳어진 수직적 명령 체계와 관련이 깊다. 다시 말해서 상관이 지시하면 부하는 꼼짝 못하고 따르는 관습이 단결력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문치주의ㆍ능력주의 사회인 한국 사회에서는 가장 가까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플 수밖에 없다, 능력 위주의 경쟁 사회에서 단결에 장애가 되다는 이유로 능력주의 자체를 문제시할 수는 없다. 오히려 능력주의야말로 우리가 계승해야 마땅할 정신적 자산인 것이다.

땅도 좁고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우리 민족이 주변 강대국들의 간섭을 물리치고 민족 문화를 꼬피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능력주의 덕분이었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문치주의ㆍ능력주의는 오늘날 교육열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교육열에 힘입어 우리는 근대화 과정의 근대화 과정의 거센 파고를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능력주의의 부산물인 당파성은 교육과 제도를 통해서 개선해 나가면 된다.

일제 학자들은 한국인의 당파성이란 고질적인 것이며 그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다는 논리를 폈다. 과연 그러한가? 망국의 책임이 당쟁과 전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가문과 학벌, 지역별로 나누어져 싸우다 보니 국론이 분열되고 외침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당쟁의 폐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200년간의 당쟁을 한국사 전체에 적용해서는 안된다. 실상 나라가 망할 때는 당쟁이 아니라 몇몇 노론 척신 가문의 일당 독재가 시행되고 있었다. 오히려 당쟁의 배경이 되는 사림정치의 틀이 살아 있어서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졌다면 난국 타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망국의 직접적인 책임은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가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정치 형태인양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 왕조는 벌써 망햇어야 했다. 조선 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된 까닭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는 시대 상화과 주변 정세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어떤한 체제이건 좋고 나쁜 양면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조선 왕조 500년간의 정치를 단 하나의 고정된 틀로 파악하고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당쟁과 같은 현상이 왜 그 시점에서 일어났는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당쟁은 사림정치의 산물이고, 사림정치는 유교적 문치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당쟁의 원인과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양의 유교적 문치주의의 성격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라의 화랑도(花郞道)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무치주의가 어떤 이유로 문치주의로 바뀌게 되고, 그와 함께 우리는 왜 중국화ㆍ유교화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가 하는 문제를 해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수ㆍ당나라와 싸울 때는 무치주의가 극성했다. 고구려의 경당(扃堂)과 신라의 화랑도는 모두 청년 무사 집단을 키우는 제도들이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하게 되자, 무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복 왕조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고구려ㆍ백제의 멸망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일대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로부터 중국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동맹국이었던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으나 자칫하면 전 국토를 당나라에 빼앗길 뻔했다. 신라는 때마침 당나라에서 일어난 절도사의 난 때문에 그나마 대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근본적인 실패가 근본적으로 문화의 차이ㆍ능력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중국화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당나나 등주(鄧州, 산둥반도)에 신라방(신라인들의 자치 구역)ㆍ신라소(신라인들의 자치 기관)ㆍ신라원(신라인들이 세운 절)을 두고 중국의 문물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한편 당나라는 세계 제국으로서 중화 중심의 세계관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신라ㆍ발해ㆍ안남의 유학생을 받아들였고, 이들에게 외국인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를 실시하여 중국 문화를 전파했다.

한국은 중국화의 길을 걸으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살아 남기 위해 사대 정책을 써야만 했고, 중국 문화와 토착 문화를 조화시키는 데 많은 힘을 들여야 했다. 사대주의를 실현하다 보니 국권의 손상이 따랐고, 그러면서도 자주성을 잃지 않아야 했다. 특히 원나라 때에는 세계 최강의 제국에 직면하여 중국에 대한 종속적인 지위가 더욱 심화되었다. 강력한 황제권에 바탕을 둔 중국의 중앙 집권적인 문치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고려 500년이 다 소모되었다.

그러나 그에 힘입어 조선시대에는 중국과도 다른 독특한 중앙 집권적 문치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귀족 문화와 원나라의 세계 문화를 조합하여 세종조에는 독자적인 정치 제도가 확립되었다. 그리고 퇴계(退溪)ㆍ율곡(栗谷)에 이르러 한국적인 주자학을 개발해 내었다.

한편 일본은 고구려ㆍ백제의 멸망 이후 상당 기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일본은 백제가 멸망할 때 5만 수군이 백강(白江, 백마강) 어구에서 전멸했는데, 그 충격으로 무치주의를 고집하면서 중국화의 길을 포기했던 것이다. 고대까지는 한국의 영향을 받아 율령국가를 잘 유지해 왔으나, 그 후로는 중국 문물을 한국을 통해 단편적으로 받아들일 뿐 봉건제도 하에서 무치주의를 유지하며 문화적으로 후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명나라 때에는 중국의 쇄국 정책으로 직접 중국과 통하지도 못했다. 그 시기에 한국은 중계 무역의 거점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사정은 돌변했다. 밀려오는 서양 세력에 중국의 변방인 일본이 먼저 문호를 개방하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통해 동아시아의 선진국으로 부상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은 무너지고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생산 공장이 중국에서 서양으로 바뀌고, 그 도매상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뀐 셈이다.

그러면 중앙 집권적인 문치주의란 무엇인가? 당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부터 먼저 짚어 보아야 한다.

도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 투쟁은 항상 있었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권력 투쟁을 전개하는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전근대 시대의 권력 투쟁은 무력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칼을 휘둘러 권력을 잡으려는 무치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칼을 쥐어야 권력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붓으로 하는 권력 투쟁도 있었는데 문치주의가 바로 그 예이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을 갖춘 문관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문치주의 정치가 시행되었다. 그런데 문치주의는 황제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제를 수반한다. 통치술이 그만큼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중앙 집권 체제에서는 황제나 국왕이 파견하는 지방관들에 의해 전국이 통치되었다. 이른바 군현 제도가 그것이다.

국왕은 최고 권력자요 최고 명령자였다. 입법ㆍ사법ㆍ행정에 관한 권한이 모두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을 국왕 혼자만의 힘으로 수행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일정한 권한을 신료들에게 위임해 통치하는 방법을 썼다. 정치가 복잡해짐에 따라 신료들은 무관과 문관으로 직능이 분화되었다. 그리고 문치지주의 정부에서는 문관이 정치를 주도했다.

이렇듯 붓을 든 문관이 칼을 든 무인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관은 무인뿐만 아니라 아전(衙前)들과 여자들의 발호도 제압했다. 조선에서는 환관(宦官)도 제압했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이루지 못한 경우였다. 문관과 무관은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했으며, 아전들은 행정 실무의 보조 역할을 맡았고, 환관은 궁중의 잡심부름을, 여자들은 집안일만을 돌보았다.

고대 중국에서는 주군인 국왕과 보조자인 신료의 관계가 주종(主從) 관계에서 출발했다. 신(臣)ㆍ관(官)ㆍ환(宦)은 본래 주군의 노예였다. 재상(宰相)ㆍ복야(僕射)ㆍ시중(侍中) 등 최고위 관직의 본래 직종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재(宰)는 요리사요, 상(相)은 왕의 의복을 관리하는 노예였으며 복인(僕人)과 야인(射人)은 왕의 환관이었고, 시중도 천민 출신의 환관이었다.

이들 신료 집단은 주군의 권력이 강해지자 덩달아 세력이 강해졌다. 이에 노예 아닌 자들도 스스로 신료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일단 신료가 되 이상 주군에 대해 노예적 봉사를 해야 했다. 그리하여 지배와 복종의 군신(君臣) 관계가 성립되었다. 신료는 주군에 대해서는 노예적 지위에 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지위가 인정되어 일반 평민보다 상위의 특권 계급이 되었다.

이렇듯 주군과 신료의 군신 관계는 주종 관계로부터 출발한 만큼 신료는 주군에게 충성을 다해야만 했다. 주군은 충성의 댓가로 신료들에게 권력의 일부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생활 보장을 위해서 녹봉ㆍ토지ㆍ노예를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임금은 하늘(天)이요, 신하는 땅(地)이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신하가 권력을 남용한다든가, 패거리[朋黨]를 만든가, 연고지에 독립적 세력을 쌓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리고 임금을 배반하는 경우에는 극형을 받았다.

그러나 정치 권력이 일단 신료들에게 배분된 이상 권력을 둘러싼 국왕과 신료 세력과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국왕은 형통에 의해 계승되기 때문에 계승자의 능력에 따라 왕권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신료들은 시험을 거쳐 능력 있는 인재 위주로 등용되었기 때문에 대문에 자연히 발언권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신료들은 되도록 왕권을 제약하고 신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한국과 같이 통일신라 이후 한 번도 정복 왕조가 들어선 적이 없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귀족 세력이 강했고, 유약한 국왕이 많았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에도 중앙 집권적 문치주의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료들간에 붕당을 조성해 당쟁을 일삼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1939년에 제정된 명나라의 형법전인 [대명률(大明律)]에는 "만약 조정의 관원들이 붕당을 지어 국가의 정치를 문란하게 한다면 모두 목을 베어 죽이고, 처자는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관청에서 몰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명률이 그대로 쓰이고 있었으니, 이 규정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중종조의 조광조(趙光祖)조차 붕당을 지었다는 죄목으로 죽어간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로 사림의 도학정치(道學政治)가 실시됨에 따라 국면이 달라지게 되었다. 유교 국가에서 통치자 그룹인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부터 수양을 쌓아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인 관료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문치주의 국가에서 최우선의 덕목이었다. 젊은 신료들은 이를 근거로 해서 노재상들의 부정과 부패를 공격했고, 나아가 국왕에게 군림해 왕권을 제약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君弱臣强] 형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왕권이 제약되고 신권이 강화되자 금기로 되어 있던 붕당이 조성되고, 붕당 사이의 당쟁이 치열해지게 되었다.

그러면 사림의 도학정치는 어디에서 연원한 것인가?

사림의 바탕이 되는 선비[士]의 정치 참여는 멀리 중국의 춘추시대까지 소급된다. 춘추시대에 공자(孔子)는 주나라 종법(宗法)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심화된 계층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주례(周禮)'로 복귀할 것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는 '주례'로의 복귀는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춘추시대의 사회 변화를 통해 영향력을 획득한 지식인[士] 중심의 유신(維新)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이러한 사회를 실현하는 주체를 지식인인 군자(君子)로 성정했고, 토지 사유제의 발달에 따라 새로 일어난 농민과 상인을 소인(小人)으로 상정했다. 군자의 배움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고, 소인의 배움은 일을 잘 하는데 있다고 했다. 물론 지식인 중에도 소인이 있을 수 있다. 도덕적 수양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그렇다. 공자는 새로운 군자의 육성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교육자요 철학자였다. 그는 귀천을 막론하고 교육을 받으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교육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교육은 지배층에 국한되었고, 피지배층인 백성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군자는 백성을 통치하고, 백성은 군자를 먹여 살려야 했다. 공자에 의하면, 인간은 평등하고 교육을 통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똑똑하고[賢] 똑똑하지 못한[不肖] 차이가 있기 때문에, 똑똑한 사람은 군자로서 통치자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군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는 철저한 문치주의의 기틀이 마련된 셈이다. 지주=지식인=관료가 지배하는 문치주의는 이 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도덕적 실천[仁]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도덕적 실천은 부부ㆍ부자ㆍ형제ㆍ붕우ㆍ군신간의 윤리를 최우선으로 했다. 즉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사회 윤리의 근간이었다. 이러한 사회 윤리를 지키기 위해서 군자는 도덕적 인격자가 되어야 했고, 도덕적 인격자가 되기 위한 자기 수양과 아울러 지식인답게 지식도 부단히 연마해야 했다.

그리하여 정치적으로 유교 사상은 도덕적 자기 완성과 실천을 통해 국가를 통치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덕치주의(德治主義)를 표방하게 되었다. 국가 권력이나 법에 의거한 폭력 정치를 배격하고, 예의와 염치를 중시하는 도덕 정치를 지향했다. 덕치주의를 통해 통치자와 백성들 사이의 충돌은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었으며, 통치자인 군자의 지배는 한층 더 강화될 수 있었다.

공자의 덕치주의는 맹자(孟子)의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으로 계승되었다. 맹자에 의하면, 통치자는 하늘의 천명을 받들어 백성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덕치를 행해야 하며[仁政], 통치자가 덕치를 행하지 못하면 쫓아내도 되었다. 특히 맹자는 사회 생산력의 적극적 촉진보다 생산물의 정당한 분배를 통해 백성의 신뢰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맹자의 이러한 생각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하는 유교의 보수적 산업관을 형성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또한 유교에서는 명분(名分)을 중시했다. 사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장유(長幼)ㆍ귀천(貴賤)ㆍ존비(尊卑)간의 명분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명분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예(禮)와 악(樂)에 기초한 예치주의가 실현되어야 했다. 이른바 정명사상(正名思想)이다. 공자가 [춘추(春秋)]하는 역사책을 지은 것도 역사의 정명(正名)을 확립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공자와 맹자의 유교적 실천 윤리는 한(漢)나라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확립된 이래 당ㆍ송에 이르러 더욱 발달했다. 한ㆍ당 시기에는 경전에 주석을 다는 훈고학으로 경전적 기초를 다졌고, 송대에 이르러서는 위진 남북조와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도교와 불교의 형이상학을 가미함으로써 철학적 이론 체계를 확립했다. 그리하여 우주와 인간을 연결하는 송나라의 주자학(朱子學0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중종조에 조광조 등이 주장한 도학정치는 바로 이러한 주자학의 이념을 현실 정치에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주자학은 12세기에 고려에 전래된 후 조선 왕조의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으며, 16세기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더욱 심화되면서 사림정치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이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은 도학정치를 내세워 공신ㆍ권신 세력의 부정ㆍ부태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사회에 청신한 기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도학정치는 공신ㆍ권신 세력의 위압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왕의 도움을 받아 활성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종 말기에 권신 세력이 무너지면서 공격 대상이 사라지게 되자 사림들은 분열하여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에 당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붕당은 학연ㆍ지연을 중시했고, 그리하여 당쟁에는 지역적 대립과 혈연ㆍ학연적 대립이 수반되었다. 붕당의 정쟁 도구는 도덕적 수양 여부와 명분ㆍ의리였다.

그러나 사림의 당쟁은 근본이 권력 투쟁이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당당한 명분과 의리가 아니라 자기 당에 유리한 명분이나 의리를 견강부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론(禮論)과 같은 이론적인 논쟁도 숨은 동기는 권력 투쟁에 있었다. 그런데 무릇 권력 투쟁이란 상대방을 일망타진해야만 긑이 난다. 이렇듯 당쟁이 사림정치의 본령을 벗어나 권력만을 추구하게 되면서 정치는 혼란스러워지고 사회는 병들어 갔다. 이러한 당쟁의 폐단은 국왕이나 신료들 모두에게 바람직한 일이 못 되었고, 자칫하면 체제 자체가 공명할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창안된 것이 영ㆍ정조조의 탕평정치였다. 이는 국왕의 힘으로 붕당의 뿌리를 뽑을 수 없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고육책이었다. 그런데 탕평정치의 결과로 외척 세력이 성장했고, 그들이 무능한 국왕을 세우면서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치닫게 되었다. 사림정치의 와해와 함께 더 이상의 견제 세력이 사라지게 되자 정권은 부패했다. 결국 조선은 끊이지 않는 민란에 속수무책이었고 외세의 침입에도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해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야 말았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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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