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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0 (목) 09:56
분 류 사전3
ㆍ조회: 2429      
[근대/현대] 20세기의 음악 (민족)
음악(1900년대 이후의 한국음악)

세부항목

음악
음악(상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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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통일신라시대)
음악(고려시대)
음악(조선시대)
음악(1900년대 이후의 한국음악)
음악(참고문헌)

1. 서양음악의 수용과 발전

서양음악이 우리 나라에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말엽부터이다. 물론 역사 이래로 중국·서역 등과 교류하여 오는 동안 서양의 악기나 음악이 유입되어 한국음악으로 수용된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엽부터 시작된 서양음악의 수용은 보다 지속적이고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오늘날의 음악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는 한국음악사의 커다란 전환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말엽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서양음악 수용에 주체적 역할을 맡았던 활동 주제를 중심으로 이 시대의 음악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서양음악과의 접촉]

서양음악의 수용은 1885년 기독교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포교를 시작하면서 그들이 가르친 찬송가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음악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에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공후(謙隸)라는 악기가 고대 이집트의 악기와 관련있는 것이라든지, 고려시대에는 원나라를 통하여 서양악기의 존재가 고려에 알려졌다는 기록이 있어 서양음악과의 접촉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면 청나라와의 빈번한 문화교류 및 실학자들의 왕래를 통하여 서양음악과의 접촉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 등 대표적인 실학자들은 그들이 북경(北京)에서 보고 온 오르간 등의 악기를 그들의 저술에 상세한 기록으로 남기고 있으며, 이덕무 (李德懋)는 그의 저서인 ≪청장관전서≫에서 ‘서양음악의 원리약설(原理略說) (1795)’을,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와 ≪구라철사금자보≫에서 서양음악의 조와 음계, 음의 고저장단 등을 상술하였다.

특히, 이 무렵에는 양금(洋琴, dulcimer)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어 전통음악의 편성에 수용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박지원·홍대용 등의 실학자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고, 이덕무·이규경 등은 이 악기의 사용법과 악보 등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양악기의 한국적 수용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후기부터 서양악기 및 이론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면서 점차 서양음악에 대한 접촉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1885년에는 찬송가를 통한 서양 기독교음악이 들어오게 된다.

감리교 선교사인 미국인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성경과 찬송가로 포교를 하고 이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노래들은 1886년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배재학당에서 ‘창가(唱歌)’라는 과목으로 책정되어 교육되었고, 1893년에는 언더우드에 의하여 ≪찬양가≫가, 1896년과 1897년에는 감리교회에서 각각 ≪찬미가≫와 ≪찬송시≫가 발행되었다.

당시의 이 출판물들은 악보 없는 가사집의 형태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악보에 의한 찬송가가 출판된 것은 1905년에서 1908년 사이에 제작된 ≪합동찬송가≫였다.

이와 같은 찬송가의 출현은 전통적인 노래의 패턴과는 다른 새로운 것으로서, 신학문교육기관의 성장과 함께 점점 그 바탕을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후로는 새로운 노래를 위한 가사를 찬송가식의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것이 성행하게 됨에 따라 찬송가의 여파는 단순히 기독교 포교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기능 이외에 한국의 신음악(新音樂)이라는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서양음악 수용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던 또 하나의 주체는 서양식 군악대 창설이다. 1896년 전권특명대사 자격으로 러시아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온 민영환(閔泳煥)이 군악대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서양식 군악대 창설계획이 수립되자 당시 독일공사 바이파르트(Weipart)는 한국 양악대의 지도자로 그 무렵 일본 해군군악대를 지도하고 있던 독일인 에케르트(Eckert,F.)를 추천하였고, 1901년 2월 에케르트의 도착과 함께 양악대 창설에 필요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에케르트는 작곡가인 동시에 오보에 연주자로서 독일의 프러시아 왕국의 궁정악장을 역임한 바 있는 드레스덴음악학교 출신의 유능한 음악인이었다. 게다가 에케르트는 이미 일본에서 군악대를 지휘한 경험까지 갖추고 있어, 그의 탁월한 지도력에 힘입은 서양식 군악대는 매우 빠른 성장을 보였다.

그들은 군의 의식은 물론 정부의 각종 의식에서 음악을 담당하였고, 이 밖에 시민을 위한 연주회를 파고다공원에서 갖는 등 서양의 군악 및 국가·국민가요, 서구의 행진곡 등을 우리 나라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약 10여년간 의욕적인 활동을 벌여온 서양식 군악대는 1910년 경술국치와 동시에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로 개편되었다.

에케르트가 죽은(1916) 뒤 백우용(白禹鏞)이 그 뒤를 이어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왕직양악대는 해체되고, 1919년 경성양악대로 계승되었으나 결국 변화를 겪으면서 해산되고 말았다.

비록 이들의 활동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으나, 서양식 양악대의 설립 및 그들의 활동이 초창기 서양음악 수용에 미친 영향은 이를 모체로 한 민간에서의 양악활동이 그 영역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20년대 이전](1)

창작음악의 태동 우리 나라에서 서양의 작곡개념에 의한 창작품이 처음으로 선보였던 것은 독일인 에케르트에 의한 〈대한제국애국가〉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서양식 군악대를 지도하기 위하여 체류중이던 에케르트는 1902년에 황실로부터 대한제국 국가를 위촉받아 한국의 전통적인 음계를 바탕으로 하고 서양음악의 형식과 화성을 사용한 〈대한제국애국가〉를 탄생시켰다.

이 음악은 제목상으로는 애국가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공식적인 국가(國歌)였다. 에케르트는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 나라 전통음악의 음계와 장단을 이용, 아악과 민속악의 분위기를 서양기법으로 재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창작정신은 이후의 여러 작품에서도 분명히 반영되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실제 그의 음악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리고 에케르트의 작품경향은 그의 뒤를 이어 군악대를 이끌었던 백우용에게 이어졌을 법하나 역시 백우용의 작품도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에케르트의 지도 아래 플루트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던 정사인(鄭士仁)의 작품경향을 에케르트와 관련지어 생각하여 볼 수 있을 뿐이다.

정사인은 완전한 민요풍의 노래인 〈태평가〉 같은 작품과 전통음악의 5음음계를 절충한 작품인 〈내고향 이별하고〉, 5음음계를 바탕으로 한 〈돌진〉·〈추풍〉 등의 행진곡 등을 남겼다.

비록 그의 작품연대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태평가〉는 1916년 그의 군악대 시절 작품이고, 나머지 작품들은 1916년 이후 송도고등보통학교 시절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사인은 10대 후반에 군악대에 입대하여 젊은 시절을 군악대에서 보내다 1926년부터 1940년까지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브라스밴드를 지휘하였으며, 한때는 경성방송관현악단 등에서 플루트 주자로 활동하였고, 경전(京電)철도국 등에서 브라스밴드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2) 김인식(金仁湜)의 음악활동

한편, 서양 선교사와 평양 숭실학교에서 코르넷과 바이올린·성악·풍금 등을 수학한 김인식은 1905년 〈학도가 學徒歌〉를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음악 내용은 5음음계로 된 단순한 동요풍이다. 이후 그는 〈표모가〉나 〈찬송가〉의 곡조 등을 남겼으며, 서양음악 수용기에 그가 보여준 창작활동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밖에 1913년 〈영산회상〉을 오선보로 옮기는 작업을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그의 전통음악 체험이 창작품으로 승화되지는 못하였다.

(3) 이상준(李尙俊j)의 음악활동

창작활동에서 다음으로 주목되는 인물은 이상준이다. 그는 정사인이나 김인식과는 달리 새로운 음악풍토에서 배출되었다.

1909년에는 우리 나라의 전통음악 전수와 서양음악의 주체적 수용을 목표로 한 새로운 경향의 음악운동이 조양구락부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이 운동은 결국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동시에 수용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음악교육기관을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로 조선정악전습소이며, 이상준은 이 전습소의 1회 졸업생이었다.

그는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조선악과와 서양악과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여 일생을 마치기까지 많은 창가를 작곡하였다. 그는 1918년 ≪이상준 최신창가집≫에 자작곡 〈야구가〉·〈효순〉 등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이 창가집은 1911년에 낸 그의 ≪보통창가집≫과 함께 중고등학교에 널리 퍼졌다. 그 밖에도 ≪신유행창가집≫ 등 10여 종의 노래책을 펴내는 한편, 당시 서양음악 보급에 크게 주력하였다.

(4) 홍난파 (洪蘭坡)의 음악활동

조선정악전습소 출신의 음악가로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인물은 홍난파이다. 그는 조선정악전습소에서의 음악수업을 끝내고 1918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3·1운동 이후 귀국하여 창작 분야에서 남다른 업적을 남긴 음악가이다. 특히, 그의 작품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김형준(金亨俊) 작사에 멜로디를 얹은 〈봉선화〉이다.

이 작품은 본래 1920년 그의 단편집 ≪처녀혼≫에 〈애수〉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었으나, 1925년 그가 펴낸 ≪세계명창가집≫에 〈봉선화〉라는 노래로 다시 소개되었다. 이 노래는 점차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일제의 억압 밑에서 민족의 한을 푸는 노래로 퍼져 나갔으며, 1940년대 이후 애국적인 노래의 대명사가 되었다.

동요조의 2절 음절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당시의 노래들에 비하여 이 노래는 짜임새와 음악적 구성을 갖춘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평가되며, 더욱이 그가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뒤에 발표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5) 윤극영(尹克榮)과 박태준(朴泰俊)

한편, 윤극영은 1925년에 동요집 ≪반달≫을 출간하면서 우리 나라 동요의 패턴을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동요집 ≪반달≫은 이 분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노래들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결국 이러한 양상은 우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동요를 통하여 서양음악에 대한 귀를 익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같은 동요 분야는 1929년 홍난파의 ≪조선동요백곡집≫ 출간으로 한층 성하여졌다. 박태준은 1922년경 대구·마산 등지의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동안 〈순례자〉·〈사우〉 등의 가곡을 작곡하여 보급하였는데, 당시 그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고 한다.

(6) 여타의 음악활동

이상에서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1910년에서 1920년대의 창작활동을 살펴보았다. 다음은 이상에서 언급되지 못한 음악활동을 간단히 정리하기로 한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교육과정에서의 음악내용이다. 앞서 김인식·이상준 등의 음악활동을 살피는 과정에서도 본 바와 같이 당시의 교육과정에서는 거의 창가를 중심으로 한 음악수업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창가집 발간 및 창가 작곡 등이 주요한 음악활동으로 등장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창가교과서가 간행된 것은 1910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 창가집에는 한국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작품은 한 곡도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교육과정에 채택됨으로써 우리 나라 학생들의 서양음악에 대한 취향을 결정짓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은 깊은 관찰을 요한다. 이후 창가집은 김인식·이상준 등에 의하여 꾸준히 간행되었다.

한편, 1918년경까지만 해도 양악의 보급은 이렇다 할 만한 성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에 주재한 외국인 동호인과 일부 음악 애호가들에 의하여 하이페츠·크라이슬러·짐바리스트 등의 초청연주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1922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와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서는 학생들의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음악활동이 장려되어 브라스밴드와 합창활동 등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양악교육의 온상역할을 하였으며, 1925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우리 나라 최초의 음악과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대학 수준의 전문교육기관의 효시로서 물론 여성들의 사회활동 영역이 제한되어 있던 무렵이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 음악발전에 중요한 촉진제가 되었다.

이 밖에 숭실전문학교의 음악부에서는 1917년경부터 마오리·말스베리 등의 선교사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는데, 현제명(玄濟明)·박경호(朴慶浩)·박원정(朴元貞)·김세형(金世炯)·박태준·김동진(金東振)·권태호(權泰浩) 등이 모두 평양 숭실전문학교 출신이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에서는 김영환(金永煥)의 지도 아래 윤기성(尹基誠)·이인선(李寅善) 등의 음악가와 그 밖에 음악적 교양을 쌓은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1928년부터는 현제명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지도를 하게 되는데, 김성태(金聖泰)·김생려(金生麗)·이유선(李宥善)·문학준(文學準)·김관(金管)·최성두(崔聖斗)·이유성(李有聖)·이인범(李仁範)·한인항(韓鱗恒)·곽정선(郭正善)·정희석(鄭熙錫)·배석빈(裵錫彬) 등 이후 한국 양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음악인들이 이 학교에서 대거 배출되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연주단체의 출현이다. 1926년에는 15, 16명으로 구성된 관현악단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가 결성되어 우리 나라에서의 관현악 활동이 펼쳐졌으며, 곧이어 1928년경에는 연전관현악단(延專管絃樂團)과 경성제국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성대교항악단 (城大交響樂團)이 활동을 벌임으로써 학교를 중심으로 한 연주단체가 성장하였다.

[1930년대]

서양음악의 수용 및 발전단계를 요람기·정착기·성장기 등으로 명명한다면 1930년대는 성장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외국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고 돌아온 음악가들이 각각 활발한 음악회와 작품집을 출간하는 한편, 그 동안 노래 중심으로 펼쳐지던 양악활동이 관현악 등으로 영역을 넓혀감에 따라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1927년에 방송을 시작한 중앙경성방송(JODK)이 1933년부터 점차 서양음악방송을 늘려나가기 시작함에 따라 그에 따른 여파는 서양음악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31년 창작가곡집을 출간한 현제명과 홍난파 두 작곡가는 이후 1930년대의 예술가곡의 작곡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은 1933년의 작품발표회에서 〈나그네의 마음〉이라는 연가곡(連歌曲)풍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2년 독일유학에서 돌아온 채동선(蔡東鮮)은 작곡발표회를 통하여 독일 낭만주의 작품의 견실한 발판을 바탕으로 현제명·홍난파의 작품경향과는 또 다른 새로운 면모를 선보이며 우리 나라의 음악계에 등장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30년대 중반에는 안기영(安基永)·김동진·김세형·이흥렬(李興烈) 등이 가곡을 중심으로 한 활발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리고 박태준·김성태 등의 동요집이 출간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한편, 1939년 6월 8일과 9일에는 서울의 부민관에서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전조선창작작곡발표회 (全朝鮮創作作曲發表會)가 열렸는데, 이 음악회는 위에서 살펴본 1930년대 창작음악계를 총결산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1936년에 김동진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초연되고, 1940년에는 김성태가 전래동화에 바탕을 둔 무용극 음악 〈흥부와 놀부〉를 발표함으로써 창작음악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는 전망을 보였다.

[1940∼1945년]

이 시기의 창작음악 분야는 극심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위축되는 한편, 김동진·김성태·김순남(金順男) 등 몇몇의 작곡가들에 의하여 새로운 경향이 개척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한국어를 말살시키려는 일본 식민정책의 의도 아래 가사를 중심으로 한 가곡 창작이 제한을 받았으며, 연주 분야에 있어서도 식민정책 수행의 도구로 이용당하였다. 연주가 위주로 활동하던 후생악단(厚生樂團)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 어두웠던 시절에도 김동진은 만주의 신경교향악단에서 〈양산가 陽山歌〉 등을 발표하였고, 김성태는 한국적 선율에 의한 〈카프리치오〉를 작곡, 초연하는 등 관현악을 위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이들 작품은 대체로 유럽 국민주의 작곡가들의 영향 아래 우리 나라 민요를 주제로 사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한편, 1943년에는 김순남이 가곡 〈탱자〉등을 발표하여 작품으로 승화된 민족음악적 경향을 보여주었고, 그의 〈피아노 소나타〉 등에서는 견실한 작곡기법을 구사한 창작품의 새로운 면모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1942년에는 여류작곡가 김순애(金順愛)가 〈현악4중주〉·〈바이올린 소나타〉·〈피아노 소나타〉 등을 발표하였다.

[1945∼1950년] 광복 이후 1950년까지의 서양음악계는 의욕적인 관현악 활동과 1946년 서울대학교에 음악대학이 창설되어 서양음악 발전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발전기라고 지칭할 만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감격과 함께 서양음악인들이 결속하여 시작하였던 일은 오케스트라의 조직이었다. 현제명 등의 음악인들은 광복과 함께 서둘러 고려교향악단을 탄생시켰고, 그 해 10월 수도극장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으로 첫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매달 두 차례의 정기연주회를 갖는 등 당시 음악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는데, 1946년 8월에는 채동선의 교성곡 〈조선〉을 연주하면서 광복1주년의 감격을 되새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려교향악단의 의욕적인 활동은 1948년 김생려 등이 민간활동을 표방하며 고려교향악단을 빠져나와 서울교향악단을 창설함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며, 6·25전쟁으로 인하여 1950년에 해산되었다.

광복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서울대학교에 음악대학이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1946년 국립대학교에 음악부가 생기고 이것이 음악대학으로 발전하면서 서울대학교의 음악대학은 수많은 인재배출은 물론 우리 나라 음악활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이후 각 대학교에 음악대학이 설립되면서 양악계의 면모는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은 또한 많은 작곡가들이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어 작품다운 작품을 탄생시키지 못한 민족음악의 비극적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1948년에 채동선이 교성곡 〈한강〉·〈조국〉등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 밖에 조두남(趙斗男)이 가곡집 ≪옛임얘기≫를, 윤이상(尹伊桑)이 가곡집 ≪달무리≫ 등을 펴내어 이 시기 창작활동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었다.

한편, 1950년에 들어와서는 현제명이 가극 〈춘향전〉을 작곡하여 전례 없는 관중 동원이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것은 1948년 이인선이 중심이 되어 국제오페라단을 설립하고 그 창단공연으로 베르디의 〈춘희〉를 공연한 2년 뒤의 일이었다.

[1950년 이후]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해군 정훈음악대가 조직되었고, 이를 통하여 음악활동이 유지되었다. 또한 이상근(李相根)·윤이상 등의 새로운 음악가들이 새로운 경향을 띤 창작활동을 보여준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상근은 부산의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가곡발표회를 가졌고, 윤이상이 〈첼로 소타나〉를 발표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 밖에 김대현 (金大賢)은 〈콩쥐팥쥐〉를, 나운영(羅運榮)은 가곡집 〈다윗의 노래〉(1954) 및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1955) 등을 각각 발표하였다. 특히, 이 곡은 바르토크의 영향 아래서 한국적 소재를 통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또 한규동(韓圭東)이 편찬한 ≪한국가곡집≫(1955)은 그간의 우리 나라 가곡의 성격을 정리한 것으로 의의 있는 작업이었다. 1955년에는 한국작곡가협회가 결성되는데, 이 단체는 나운영·윤이상·이상근 등 근대적 경향을 띤 작곡가 그룹과, 김대현·김동진·김세형·윤용하(尹龍河)·이흥렬 등 보수적 경향을 띤 작곡가 그룹으로 양분화되어 당시 창작계의 경향을 대변해 준다.

한편, 1951년 해군 정훈음악대는 아세아재단의 지원을 얻어 신작교향곡을 위촉 연주하였다. 이밖에 1957년 한국음악가협회가 제정한 작곡상에서 스트라빈스키류의 작품경향을 도입한 정윤주(鄭潤柱)의 〈까치의 죽음〉이 당선되었다. 1959년에는 최인찬이 실험적 작품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경향을 띤 서양음악이 계속적으로 수용되는 양상을 보이다가 1960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현대풍의 작품들이 도입, 정착된다.

이와는 달리 1959년 서울대학교의 음악대학에 국악과가 설립되면서 창작음악계는 또 하나의 흐름을 갖게 된다. 즉, 서울대학교 국악과가 생긴 이후 국악정기연주회에서는 양악작곡가들에게 작품이 위촉되었는데, 이것은 많은 작곡자들에게 국악을 소재로 한 창작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69년 강석희(姜碩熙)의 〈예불〉과 같은 작품이 탄생되었다.

이와 같이 국악을 소재로 한 작품의 출현은 서양음악과 한국음악 사이의 다리역할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창작의 경향은 새 한국음악 창조라는 과제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우리 나라의 서양음악 수용의 역사는 초창기의 무의식적인 수용으로부터 시작하여 계속적으로 서양음악을 우리 나라에 소개하는 일면적인 양상을 보였다. 한편, 1970년대 이후의 한국양악계는 세계적인 연주가·작곡가를 배출할 만큼 성장하였고, 연주와 창작·평론 분야 등에서 다면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국음악계에는 그 간의 서양음악 수용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진정한 한국음악의 실현을 위한 ‘한국음악론’·‘민족음악론’이 뜨겁게 제기되었다.

이는 서양음악의 자주적 수용이라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고,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과 서양음악의 올바른 수용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심층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국음악론에 입각한 창작품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어, 민족음악의 새로운 국면을 다지는 모색기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한편, 1981년 국립교향악단이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KBS교향악단으로 재출범을 하였다. 많은 국민적 관심 속에서 ‘세계 속의 교향악단’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의욕적으로 출발을 하였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교향악단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1985년에는 9월 21일 22일 양일간에 걸쳐서 남북한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 공연이 서울의 국립중앙극장과 평양의 평양대극장에서 개최되었다. 분단 후 처음 실시된 교환 방문 공연이라 기대도 컸고, 또 문화적 충격도 컸다. 이후 남북한은 모두 문화 예술을 통한 민족 동질성 회복이라는 과제를 갖게 되었고 ‘통일음악론’에 대한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예술의 전당이 개관을 하였다. 전문 음악회장 시대의 개막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후 중요 연주회는 대부분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1988년 10월 27일에는 월북음악가들의 작품규제 해제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동안 들을 수도 부를 수 없었던 김순남(金順男), 이건우(李建雨), 안기영(安基永) 등 월북작곡가의 작품이 해금되어 자유롭게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분단이 낳은 비극을 아우르는 상징적인 조치였는데, 당초 예상과는 달리 김순남의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구소련를 비롯하여 동구권의 음악단체와 음악인 대거 내한하여 공연을 가졌고 음악도 많이 유입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북한의 음악을 제외하고는 그 동안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금지가 되었던 공산권과 동구권의 음악도 수용을 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1993년 전문 예술인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이 개교를 하였다. 국내 최초로 국립으로 설립된 음악 실기 전문교육기관으로, 이로 인하여 국내의 음악교육은 음악대학 시스템과 음악원 시스템으로 나뉘게 되었다. 1995년에는 광복50주년을 축하하는 축전음악제가 개최되었다.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이란 이름으로, 세계를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통일과 미래를 향한 힘찬 새출발을 상징하는 음악제로, 지휘자 정명훈씨를 비롯하여, 피아니스트 한동일, 신수정, 이경숙, 김혜정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김남윤, 김영욱, 강동석, 장영주 첼리스트 장명화, 조영창 소프라노 홍혜경, 김영미, 신영옥, 조수미 등 국내외에서 활동중인 정상급 음악가 20명이 출연을 하였다.

다른 음악제와는 달리 우리 나라의 음악 수준이 서양음악을 수용하고 발전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역수출을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상징적인 음악제였다. 이 음악제가 상징하듯 21세를 맞이한 한국음악계는 통일과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다.

2. 전통음악의 변천

‘현대’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를 거쳐온 ‘오늘’과 동시대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경우, 광복 이후 시대·남북분단시대·대한민국시대로 불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가 현대사에 속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음악이라는 보편성 속에 존재하는 한국음악의 특수성이라는 점에 기초하여야 한다. 그러한 특수성은 바로 한국음악의 역사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40년의 한국음악을 말할 때 우리들은 흔히 전통문화 파괴와 대중문화의 혼란이라는 말을 자주 접한다.

광복 후 4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음악을 논하려면, 광복 이전 40년의 음악상황을 꿰뚫어보는 것이 선결문제이다. 일제 식민지하에서의 한국 전통음악의 계획적인 파괴와 말살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광복 후의 우리 음악의 변천을 연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40년간의 한국사회에서의 지도력 발휘는 주로 일제 치하에서 성장한 지도층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국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일군의 지도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인 사회 각계의 지도층은 일제하에서 세뇌된 계층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광복 후 상당한 기간을 두고서도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외래문화의 수용에만 급급하였으니, 광복 후 40년의 음악계도 바로 그러한 우리 사회·문화의 맥락 속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할 단계에 왔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까지도 전통적으로 이어왔던 우리의 음악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기보다는 예술음악이라는 배경 아래 서양음악을 일방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고, 그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한국에서의 음악교육은 여타 한국어나 한국사의 교육에 비하여 그 시발단계에서부터 서양음악 위주로 구성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러한 한국음악교육의 기현상을 부채질하고 가속화한 것은 6·25전쟁을 정점으로 하는 서구사회와의 상봉이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5·16군사정변 이후 경제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본격적인 서양세계의 본질적 사상과 행동을 서양군대식의 훈련을 통하여 익혔다. 이와 같은 일부 외래문화 지향층에 의하여 일제하에서부터 유행되었던 저속한 유행가가 대중문화의 일부로 대두되었다.

또한 상업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 외래문화를 완숙하게 익히는 경제입국·현실입국 등을 지향하면서 6·25전쟁과 동시에 유입되었던 미국의 G.I. 문화의 하나인 경음악과 구미의 유행음악과 함께 서양예술음악 등이 만연되기에 이름으로써 전통적인 음악문화와 정면으로 대립되기 시작하였다.

눈을 감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청각문화를 파악한다면 거리에서, 버스 속에서, 다방에서, 그리고 연주회장과 심지어 학교교육 현장에서까지도 들려오는 음악은 거의 외래음악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적인 외래편향적(外來偏向的)인 음악풍토 속에서도 한국의 음악전통은 몇 겹으로 쌓인 외래음악의 지층 속으로 그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니, 1960년대 말부터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 한국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즉, 서구음악이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였지만, 이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노력을 꾀한 것은 1960년대 이후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의지를 밑거름으로 하여 새로운 민족음악을 정립하려는 역사적인 움직임이 일부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음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민족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며 민족적인 주체성이나 자주성의 확립과도 일맥상통한다.

[전통음악]

전래되어 온 한국의 전통음악은 지금까지 정악과 민속악, 또는 아악과 민속악 등으로 이분(二分)되어 분립되어 온 것이 관례였다. 여기에서 정악이란 말은 조선시대 후기부터 풍류방(風流房)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쓰여오던 용어로, 그 대상은 주로 시조나 가곡 같은 성악곡(聲樂曲)과 〈영산회상〉과 같은 기악곡(器樂曲)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정악이라는 말의 역사적 용례에만 그 의미개념을 국한시키고 본다면, 여기서처럼 민속악의 대칭이 되는 여타의 음악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한 어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음악사에서 많이 쓰였던 아악이라는 용어만 보더라도 시대마다 각기 그 포괄범위를 달리하며 변천하여 왔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정악이라는 말을 어제의 의미를 초월하여 오늘의 용례대로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민속악에 있어서는 그 개념의 사용에 있어 주의를 요한다. 그것은 민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여러 가지로 혼동되어 사용되는 데다가 확대 해석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앞의 이분적인 분류방법에 있어서도 이러한 민속의 개념이 확대 적용되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민속 또는 민속문화는 조선시대의 상민(常民)이나 오늘의 민중이 주로 전승하고 향유해 온 그 사회의 기층문화(基層文化)를 뜻하며, 여기에 반하여 조선시대의 양반이나 오늘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문화는 고급문화 또는 상층문화로 볼 수 있다.

양반과 상민이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있던 봉건사회의 계급개념이라면, 엘리트와 민중은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무너진 근대사회의 계층개념이다.

고급문화의 담당층인 조선시대의 양반이나 오늘의 엘리트들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내는 역량이 있되, 외국문화를 서둘러 받아들이고 익힘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한 계층이었다면, 민속문화의 담당층인 상민과 민중은 선조의 문화를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이어받으면서 생활상의 필요와 상황에 맞게 재창조한 계층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발달에 따른 대중문화의 형성에 따라 대중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생겨나게 되는데 주로 도시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루며,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필요로 등장하여 새로운 문화권, 즉 통속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이것은 1960년 이후 정부가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가속되었다).

이러한 민속문화권은 대개 상업주의에 의하여 주도되는데 원각사(圓覺社)나 협률사와 같은 극장의 등장이나 1930년을 전후하여 번창하기 시작한 레코드 산업 등이 이러한 통속문화의 번창을 부채질하였다.

전통음악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민중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잉태되고 육성된 민속음악이 그들의 손을 떠나 상업적인 흥행성에 바탕을 둔 특정 전문음악인들에 의하여 변질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도 한몫 하였다고 보겠다. 즉, 고유의 민속이며 놀이가 전근대적이니 봉건적이니 미신이니 하여 배척당하였고, 이러한 와중에서 민속음악 역시 그 뿌리를 잘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현재의 민속악은 그 대부분이 민속악 본래의 속성을 떠난 통속문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현재 전래되는 한국의 민속음악을 정악과 민속악으로 이분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재고되어야 한다고 본다.

조선시대의 양반층에서 즐겼던 상층문화의 음악을 정악이라고 한다면, 상민 등 하층에서 즐겼던 기층문화의 음악을 진정한 민속악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 뒤 민중의 생활현장을 떠난 특정 전문음악인에 의하여 불려진 노래나 기악곡 등은 통속음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악을 제외한 음악을 굳이 민속악과 통속음악으로 나누는 것은 민속악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민속악의 연구와 진작은 민속문화의 발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며, 그것은 민족음악의 수립에 있어 특정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진정한 민속악의 모습은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 사회의 밑바탕을 이루는 기층문화가 거의 단절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주체적인 민족문화의 창조는 그 민족 고유의 기층문화에 바탕을 두고 자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의 유입 이래 지금까지 민족음악 수립에 대한 수많은 노력들이 큰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기층문화권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서양음악의 수용이 오랫동안 주체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그것이 기층문화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외래음악의 수용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접촉은 오히려 바람직한 것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 문화를 앎으로써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과 함께 우리도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긍지를 지닐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외래문화를 맹목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서 우리 문화를 오염시키거나 흔들어 놓는 것은 경계해야 것이 마땅하다.

외국문화는 보다 가치 있고 발전된 것이며, 우리 문화는 뒤떨어져 있고 그래서 버려야 한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사고이다. 외래문화를 받아들일 때에도 일정한 가치판단의 기준 위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은 당연히 우리의 기층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기층’의 의미는 공간적인 측면에서 ‘밑바탕’을 뜻하며,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원초적인 것’을 뜻한다. 한편, 공시적(共時的)인 관점에서는 ‘근원적인 것’을 의미하며, 통시적(通時的)인 관점에서는 ‘전통적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족의 기층문화’는 민족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전통적인 고유문화를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기존문화 일반의 형성과 발전 및 변모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문화의 모태(母胎)이자 생성기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래문화의 수용이나 민족문화의 창조 역시 이러한 민족의 기층문화에 바탕하여야 하며, 이는 음악에 있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구분에 있어서 광복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를 주대상으로 하되 이를 1945∼1960년과 1961년부터 현재로 이분하여 살펴보려 한다. 그것은 이 두 시기가 여러 가지 면에서 구분되기 때문이며, 이 두 시기의 음악사적 특징을 좀더 뚜렷이 부각시켜 보려 하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덧붙여 광복 이전의 음악현황을 간략히 기술하겠다.

[상층문화권의 음악]

상층문화권의 음악은 주로 궁정이나 양반·사대부집 등에서 연주되던 음악으로 각종 제례와 연향(宴享)·조회(朝會) 등의 제반 의식음악과 가곡·시조 같은 성악곡, 〈영산회상〉 등의 기악곡을 지칭하는 정악 계통의 음악을 말한다. 이러한 음악들이 어떠한 변천과정을 겪어왔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1910년의 경술국치 이래 1945년까지의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이 시기는 한마디로 전통음악의 수난시대로 불러 마땅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마자 각종 국가의식에 사용되는 음악들이 대폭 축소되는 상황을 맞았고, 이에 따라 국가 음악기관의 규모 역시 대폭 축소되었다.

1897년 장악원이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되고, 1907년에는 다시 장악과(掌樂課)로 개칭되었으며, 경술국치 이후 1911년에는 장악과를 아악대(雅樂隊)라 개칭하고 모든 악사들을 용원(庸員)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직제도 국악사장(國樂師長)을 아악사장으로 고치고, 악공 81명을 해산하여 총 189명으로 축소시켰다. 1913년에는 아악사장만을 겨우 용원으로 만든 뒤 악공 84명을 다시 해고시켜 105명의 정원으로 축소시켰다. 1915년에는 아악사장 이하 48명을 또 다시 해고시켜 57명의 정원이 남게 되었다.

1920년에는 다시 직제를 개편하여 아악사장은 주임대우(奏任待遇), 아악사(雅樂師) 및 아악수장(雅樂手長)은 판임대우(判任待遇), 아악수(雅樂手)는 용원, 그 밑에 아악수보(雅樂手補)를 하나 더 두고 용원으로 대우하였다. 1922년에는 아악대를 아악부로 개칭하고 21명을 해고시켜 결국 40명의 정원으로 축소되었다.

1945년 광복 직전까지 30여 명의 악사와 25명의 아악생이 남아 근근히 그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다. 이렇게 하여 멀리 성종 이래 오랜 기간 동안 정통 음악기관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던 장악원이라는 이름은 20세기초의 전환기를 전후하여 교방사·장악사로, 장악과·아악대에서 다시 아악부로 전전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아악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다나베(田邊尙雄)의 공적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학기사(理學技士)이자 음향학자(音響學者)로서 신·구음악에 정통한 당시 일본 음악계의 권위자였다. 일본 궁내성(宮內省) 아악부 부속의 아악대연습소(雅樂隊練習所)에서 강사로 있었으며, 1920년 한국의 아악을 조사연구할 목적으로 내한하였다.

이때 그는 우리 아악의 진가를 체험하게 되었고, 귀국 후에 기울어가는 조선 아악대의 재건을 일본정부에 적극 건의하였다. 존폐의 위기에 처하여 있던 아악대는 다나베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그 형세가 나아지게 되었으니, 1922년에는 관제의 개정으로 악원의 처우가 개선되었고, 1925년에는 종로구 당주동 소재 봉상사 건물 한 귀퉁이에 우거하다가 운니동에 새로 건축된 독립건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 명칭 또한 아악대에서 아악부로 개칭되었다.

한 나라의 음악기관의 존폐가 외국의 음악학자에게 달려 있었던 당시의 상황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하겠다. 어쨌든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가 그 치욕적인 명칭과 더불어 파란만장한 역경과 시대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수백 년 이래의 한국 전통음악의 뼈대를 이어주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여 온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왕직아악부에서 전승한 음악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대별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제례악(祭禮樂)·연례악(宴禮樂)·군악(軍樂)과 같은 전통적인 국가의식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가곡·시조와 같은 상층문화의 음악이었다.

① 제례악은 원구(珤丘)·사직(社稷)·풍운뇌우(風雲雷雨)·일월성신(日月星辰)·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종묘(宗廟)·문선왕묘(文宣王廟)·경모궁(景慕宮)·관왕묘(關王廟) 등 제례의식에 관련된 음악으로서, 전술한 바와 같이 19세기 말엽을 전후하여 악원의 제도가 축소되면서 제례행사의 종류와 규모가 대폭 축소됨에 따라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만이 남게 되고, 여타의 음악은 악보로만 전하여질 뿐이다. 이것을 협의의 아악이라고 한다.

② 연례악은 궁중의 잔치에 사용되던 음악이다. 이들 연례악도 이왕직아악부에 의하여 관장되어 온 것으로 당시에 연주되던 음악으로는 당악계(唐樂系)의 〈보허자〉와 〈낙양춘〉, 그리고 〈여민락〉과 같은 고취악이 있었다. 향악으로는 〈관악영산회상 管樂靈山會相〉과 평조영산회상(平調靈山會相)을 중심으로 여러 형태로 변개(變改)된 음악이 있었다.

또한 빗가락정읍〔壽齊天〕과 세가락정읍〔動動〕, 현악보허사(絃樂步虛詞)와 그 변개곡인 〈밑도드리〉·〈웃도드리〉·〈양청도드리〉·〈우조가락도드리〉와 이들 여러 곡들이 줄풍류의 〈영산회상〉과 혼합되어 연주되던 별곡, 〈여민락〉 및 각국 행악 등이 전승되었다.

또한, 가곡의 기악화된 사관풍류와 각종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된 각종 악곡들이 있었다. 그 밖에 군악으로 대취타(大吹打)와 그 변개곡인 취타(吹打)가 전수되었다.

③ 정악은 사대부 계층의 풍류방〔律房〕을 중심으로 생산, 수용되던 〈현악영산회상〉과 〈여민락〉 등의 기악과 가곡·가사·사조 등의 성악이 두루 포함된 음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왕직아악부의 악사들에 의하여 전승되었다.

1945년 이후 일제 때의 이왕직아악부에 의하여 명맥을 유지하여 온 전통음악도 재건의 몸부림을 쳤으나, 그 명칭이 구황궁아악부로 개칭되었다가 1951년 현재의 명칭인 국립국악원이 되었고, 1955년에는 국악사 양성소를 부설하였다.

당시의 열악한 재정형편 때문에 구황궁아악부 악사들의 처우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아악생의 양성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결국 아악부 자체도 해산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였다.

이에 아악부는 자구책으로 경향 각지를 순회하면서 연주여행을 다니는 한편, 라디오방송을 통한 해설을 곁들인 음악방송과 각종 국악 실기지도 등을 통하여 악사들의 생계를 근근히 꾸려가는 형편이었다.

1945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해 11월에 아악부의 국영화(國營化) 등에 관한 안건이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1950년 1월에 대통령령으로 국립국악원의 직제가 공포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개원이 지연되다가 1951년 부산피난시절에 정식으로 개원되어 초대 원장에 이주환(李珠煥)이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국립국악원이 개칭되고 안정되어 일정한 궤도에 오르자 후진양성의 뜻을 세우고 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중학교과정 3년과 고등학교과정 3년 등 모두 6년제 과정의 전문연주자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현재 국립국악원 연주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부터 국립국악원과 부설 국악사 양성소는 전통음악 전승을 위한 제도적·교육적인 면에서 한국전통음악의 발전을 위한 틀을 잡아가며 사회적인 공감대를 넓혀가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고, 한국전통음악에 대한 자각심과 자부심은 민족적 자각과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재인식 내지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에 기여한 바 크다고 하겠다.

한편 국립국악원의 연주곡목도 기존의 아악과 정악 중심에서 탈피하여 판소리 및 산조 등의 통속악이 포함되게 되었으며, 신작국악도 발표하는 등 연주회용 음악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에는 마당극, 풍물, 마당굿, 대동놀이 등이 우리 음악의 새 장을 열었으며, 1980년대에는 민중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민중음악·민족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특히 ‘사물놀이’는 국내에서보다 세계적으로 더 유명한 음악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서편제〉를 비롯한 국내영화에서 우리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우리 영화 및 음악의 새로운 발전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현재 방송매체 등에서 공연 및 국악이론을 포함한 다양한 소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전통음악의 재정립 및 활성화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상만>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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