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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25 (일) 17:09
분 류 사전3
ㆍ조회: 2569      
[근대] 제1차 세계대전 (한메)
제일차세계대전 第一次世界大戰 The First World War

1914년부터 18년까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연합국(처음에는 협상국으로 불림)과 독일·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제국주의적 전쟁.

[제1차세계대전의 특징]

제1차세계대전의 성격은 우선 개전의 경위가 매우 복잡해 어느 한 나라의 특정행위가 대전을 초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쟁 후 전승국 쪽이 패전국인 독일에게 일방적으로 전쟁의 책임을 전가시켜 독일국민이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것은 후에 A.히틀러의 나치즘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이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한 특징이다.

나폴레옹전쟁을 별개로 하면 19세기 유럽의 전쟁은 어느 것이나 극히 일부 사람들에 의해 국민의 생활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은 형태로 수행된 내각전쟁(內閣戰爭)이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은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일반국민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졌다. 전선(前線)의 병사에 국한되지 않고 후방의 국민까지 전쟁에 동원된 이 세계대전은 국가가 지니고 있는 힘을 모두 동원한 최초의 총력전이었다.

또한 독가스·전차·비행기 등의 신무기가 투입된 것도 이 전쟁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 때문에 전사자의 수도 그 때까지의 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독일과 러시아가 대략 170만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프랑스가 136만, 오스트리아가 120만, 영국이 90만, 미국은 12만 6000여 명이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는 25개국이었다.

<개전 날짜>

대전의 특성과 관련해 개전날짜를 언제로 잡느냐의 문제도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대략 4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①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이하 오스트리아로 略記)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일반적으로는 이 날짜를 개전날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② 1914년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③ 1914년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 ④ 1914년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등이다.

① 의 시점에서는 양국간의 국지전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위계승자 F.페르디난트 부부가 같은 해 6월 28일 세르비아내에 본거지를 두었던 암살자 그룹에 의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사라예보사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계를 무력으로 타도함으로써 대국의 면목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발칸반도에 흩어져 있는 슬라브계 여러 민족의 대동단결을 꾀하려는 범슬라브주의에 바탕을 두고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그 해 7월 30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 결과 독일은 러시아와 전투를 시작하였고 러시아·프랑스동맹에 의해 러시아와 긴밀한 군사적 유대관계를 지녔던 프랑스와도 싸움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중립을 표방했으나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범한 것을 이유로 독일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러시아가 총동원을 하게 된 것은 전쟁이 국지전으로 끝나지 않고 독일이 참가해 큰 전쟁으로 발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판단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3국동맹)이 존재했다는 데 기인한다. 원래 이탈리아도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사실상 3국동맹에서 탈퇴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도 처음에는 중립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상의 경위를 통해 볼 때 대전 발발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전전(戰前)의 3국동맹과 3국협상의 배경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유럽전쟁에서 세계대전으로>

대전이 일어난 초기 단계에서는 전쟁이 유럽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1914년 8월 23일 일본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나 일본이 수행할 역할은 한정되어 있었고, 전쟁이 서계전쟁으로 확대된 것은 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한 시점이었다.

미국 참전 직전에 러시아에서 3월 혁명(러시아력 2월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왕조가 무너졌다. 1917년은 대전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사 전반에 걸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3월혁명에 이어 11월혁명(러시아력 10월혁명)으로 독일과의 즉시강화를 바랐던 V.I.레닌이 정권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으로 러시아가 독일측에 굴복하였으나 대전 그 자체는 그 해 11월 독일측 패배로 끝났다.

독일측 패전에 결정적 작용을 한 것은 무제한잠수함작전에 의한 미국의 참전이었다. 결국 유럽전쟁으로 시작된 대전은 세계전으로 전개되었고, 18년 11월 11일 파리 교외의 콩피에뉴숲에서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측과 독일측 사이에 휴전조약이 조인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대전전사(大戰前史)]

<독일통일의 유산>

대전의 원인은 1870∼71년 에스파냐 왕위 계승문제로 시작된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전후처리방식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국민은 알자스·로렌(엘자스·로트링겐)의 2개 주를 빼앗긴 사실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전쟁에서 이긴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 독일통일이 달성되었지만 프랑스국민의 원한은 통일 후 독일과 프랑스 관계에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새로운 독일제국의 총리가 된 O.E.L.비스마르크는 위의 2개 주를 합병하는 일에 반대했으나 군사적인 이유로 합병을 주장한 군부에 의해 결국 강행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안전을 보장할 국제적 조약망을 만들어내는 데 전력을 쏟았다. 독일통일 달성 후에 그가 먼저 기대를 걸었던 것은 오스트리아·러시아·독일간의 3제동맹(三帝同盟, 73년 10월 성립)이었으나 이 동맹도 의지할 만한 것이 못 됨을 보여 준 사태가 75년 발생하였다.

<개전의 위기>

프랑스 국회가 <카도르(하사관)법>을 성립시켜 육군 증강에 강한 의욕을 나타낸 것을 본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 군용말 수출을 금지하는 한편, 신문기사를 이용하여 프랑스측에 압력을 가했다. 75년 4월 9일 《포스트》지(紙)에, <전쟁은 절박한가?>라는 도전적 표제를 단 K.F.H.뢰슬러의 논문이 실린 것이다.

이 논문에 대하여 독일외무부의 한 고관이 프랑스대사에게 해명했으나, 대사는 그 해명 속에 온당치 못한 표현이 있었던 것을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파리에 전했다. 그 내용은 마치 독일이 프랑스의 복수에 선수를 치기 위한 예방전쟁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영국 빅토리아여왕은 독일에 직접 경고할 움직임을 보였고, 또한 러시아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외무장관 A.M.고르차코프를 데리고 5월에 베를린으로 찾아가 독일을 적극 견제하였다.

비스마르크는 그 때 예방전쟁을 치를 의도는 없었고, 《포스트》지의 논설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은 프랑스를 말로써 위협하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때 국제적 분위기는 독일이 조심성 없는 태도를 취할 경우 3제동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영국과 함께 프랑스를 도와 독일을 협공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1914년 그러한 사태가 일어났다.

<비스마르크체제의 성립과 붕괴>

1875년의 사건을 통해 3제동맹이 의지할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은 비스마르크는 새로운 안전보장체제를 모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비스마르크체제였다. 그 중심은 독일·오스트리아동맹(1897. 10.), 그리고 이탈리아를 포함한 3국동맹(1882. 5.)이었다. 또한 독일과 루마니아동맹도 1882년 성립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1887년 6월 러시아·독일 재보장조약(再保障條約)이 성립된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발칸문제를 둘러싸고 악화되고 있었으므로 비스마르크는 재보장조약의 내용을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에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또한 독일은 영국과도 좋은 관계에 있었으므로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체제의 완성에 의해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독일에 대한 복수전쟁을 원한다 해도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리하여 독일의 안전은 충분히 보장된 것처럼 보였지만 90년 3월 20일 비스마르크는 새 황제 빌헬름 2세와의 불화로 사직하였으며, 3월 23일 비스마르크의 후계자인 L.카프리비총리 등은 오스트리아와의 우호와 확실히 모순되는 러시아·독일재보장조약의 갱신을 거부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와 가까워지기 시작하였으며 94년 1월 4일에는 러시아·프랑스동맹이 정식으로 성립하였다.

전제군주국인 러시아가 공화국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리라는 사실을 독일 정치가들은 예상하지 못하였다. 한편 영국은 공업·무역·해군·식민지 4개 분야에서 독일의 도전에 위협을 느끼고 차츰 프랑스·러시아 양국에 접근하였다. 1904년 4월 영국·프랑스협상이 조인되고, 1907년 8월 영국·러시아협상이 조인됨으로써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간의 협력체제가 성립하였다.

이는 비스마르크의 후계자들이 예견할 수 없었던 외교혁명이었으며, 비스마르크체제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독일이 기대할 수 있는 동맹국은 오스트리아 한 나라뿐인 상황이 되었다. 1902년 프랑스와의 비밀 중립조약을 맺은 이탈리아도 확실한 동맹국일 수는 없게 되었고 동아시아 일본도 1902년 영·일동맹, 1907년 불·일 협상과 러·일협상에 의해 독일을 포위하는 협상국측의 일원이 되었다.

<발칸문제>

러시아는 전통적 정책의 하나인 남하정책에 의거해 발칸반도의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세력을 뻗치려 힘쓰고 있었는데, 이 지역을 제압하고 있었던 오스만투르크제국은 <유럽의 병자>라고 불릴 만큼 약해져 있었고 발칸반도에는 여러 형태의 슬라브계 민족이 거주하고 있어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있어서는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비스마르크가 주재한 1878년의 베를린회의로 이 해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은 일단 꺾였으나, 그 뒤 러시아는 한때 시베리아로부터 만주·한반도 쪽으로의 진출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1904∼05)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동아시아 쪽으로의 진출을 단념한 러시아는 재차 발칸 쪽으로의 남하정책을 본격화하였다.

그 당시 슬라브민족의 맹주(盟主)인 러시아가 발칸반도의 다양한 슬라브계 여러 민족을 통합해야 한다는 범슬라브주의의 주장은 19세기 후반 이후 일관되게 러시아에 편리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쇠퇴를 계속하고 있었던 오스만제국의 현상타파를 목표로 한 청년터키당의 혁명이 1908년에 일어나, 발칸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보스니아의 위기>

청년터키당의 혁명은 오스트리아에 의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양주 합병의 계기가 되었고 양주 합병을 노리고 있었던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조치에 대해 심한 불만을 나타내며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범슬라브주의의 맹주였던 러시아는 러·일전쟁과 제1차혁명(1905)의 상처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여서 오스트리아의 배후에 있는 독일과의 전쟁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세르비아를 지원할 수는 없었으며, 1909년 3월 오스트리아의 합병정책을 지지하던 독일총리 B.뷜로브의 위협적 성명에 사실상 굴복하였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세르비아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의 조치를 승인하게 하였다. 러·일전쟁의 후유증 때문에 러시아가 자중함으로써 보스니아 위기는 가까스로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고 수습되었다. 그러나 2차례에 걸친 발칸전쟁(1912, 1913) 후 사라예보에서의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자 페르디난트 암살사건을 계기로 같은 사태가 재차 발생하자 대전은 불가피하게 되어 발칸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오스트리아의 동진정책이 교차한 1875년의 전쟁절박 위기 때 예견되었던 것과 같은 형태의 전쟁이 발생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의 동진정책은 흔히 <범게르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정책을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같은 뜻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스트리아의 동진정책은 발칸반도에 사는 독일민족을 오스트리아가 맹주가 되어 통합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대립과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제1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배경이 된다.

<영국·독일의 대립>

인도의 캘커타와 이집트의 카이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를 잇는 지배권을 노린 영국의 3C정책과, 베를린·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바그다드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독일의 3B정책의 대립은 불가피하였다. 1890넌대로 집어들어 급성장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우월한 지위를 위협하자 양국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영국·독일의 대립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양국의 <건함경쟁(建艦競爭)>에서였다. 독일의 동아시아 순양분함대사령관(巡洋分艦隊司令官)에서 1897년에 해군장관으로 승진한 A.티르피츠는 1900년에 독일해군의 비약적 발전 강화를 목표로 한 건함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때까지 해군력이 약했던 독일은 이 법안에 실린 건함계획이 실현되면 영국·프랑스 다음가는 세계 제3위의 해군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티르피츠의 해군력이론은 제2차 건함법안으로 성립되어 독일이 계획대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면 제1위인 영국해군과 싸웠을 경우 비록 패하더라도 영국의 해군력 역시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므로 앞으로 더 이상의 영국에 의한 세계 해상지배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가 그 핵심이었다.

이러한 티르피츠의 해군증강정책은 영국과 독일 사이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영국이 고립에서 벗어나 프랑스, 러시아와 협상체제를 조직하게 된 배경이 되었으며 후에 독일포위망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그 자체는 발칸반도를 둘러싼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대전의 발발과 경위]

<사라예보사건과 7월위기>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는 아내와 함께 육군 대연습 시찰차 보스니아를 방문하고, 1914년 6월 28일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삼원화(三元化) 구상으로 인해 세르비아인들로부터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즉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외에 체코인을 중심으로 한 제3의 반독립적 국가를 만든다는 그의 구상은 세르비아인 등 남슬라브 여러 민족에 대한 헝가리인(마자르민족) 억압을 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피억압 민족인 남슬라브 여러 민족들의 단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 D.디미트리예비치대령은 검은손〔黑手組〕이라는 암살단을 조직, 페르디난트를 암살하기 위해 G.프린치프를 프함한 7명의 자객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 배치하였다. 결국 프린치프가 쏜 권총에 맞아 페르디난트 부부가 죽자 오스트리아정부는 이 기회에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범슬라브주의의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맹국 독일의 지지가 필요했으며, A.호요스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 빈에서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독일총리 T.T.F.A.베트만 홀베크는 7월 5일 베를린에서 호요스편으로 실질상의 백지위임장을 오스트리아측에 준다는 취지의 회신을 보냈다. 이때 베트만 홀베크는 영국과의 전쟁은 차치하더라도 프랑스·러시아 양국과의 전쟁은 계산에 넣고 있었다.

독일의 회신으로 힘을 얻은 오스트리아정부는 세르비아정부가 암살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월 24일 세르비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담은 최후통첩을 보냈고 28일에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이후 각 나라 나름대로의 움직임과 그 연쇄반응의 결과, 며칠 뒤에는 유럽의 주요국가가 관련되는 큰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슐리펜계획과 마른전투>

러시아·프랑스동맹이 성립된 결과,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은 러시아·프랑스 양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1906년까지 독일육군참모총장을 지낸 A.슐리펜은 독일의 동서 양면에서의 전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슐리펜계획>이다. 이 계획은 독일 육군전체의 7/8 병력을 개전과 동시에 서쪽의 프랑스로 진격시켜 6주 안에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다음, 곧바로 러시아군과 맞부딪친다는 대담한 구상이었다.

프랑스를 굴복시킬 때까지 동부전선에서는 독일군 전체의 1/8 병력으로 러시아군의 서진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더욱이 서부전선에 배치되는 독일군에 대해서는 프랑스방향을 향하여 우익, 즉 북쪽에 병력을 집중시켜 우선 가장 강력하게 작용할 우익으로 벨기에를 공격하고 북프랑스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슐리펜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필히 우익을 강화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3년에 죽었다.

그러나 후임자인 육군참모총장 H.J.L.몰트케(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H.K.B.몰트케의 조카로 小몰트케라 불리움)는 우익쪽에만 병력을 집중시키는 슐리펜의 계획과는 달리 좌익 쪽으로 많은 병력을 빼돌렸다. 그 결과 남쪽은 강화되었으나 북쪽은 그만큼 약화되었다. 더욱이 러시아군의 동프로이센 진격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개전 직후 북프랑스로 공격해 들어가기 직전 서부전선의 2개군단을 동부전선으로 돌렸다.

1914년 9월 6∼12일의 마른전투에서 독일군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진격이 저지된 까닭은 가장 우익쪽에 있던 제1군과 제2군 사이에 50㎞나 되는 간격이 벌어져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룩셈부르크에 설치되어 있던 독일육군참모본부에서 몰트케의 대리자로서 전선에 파견되어 있던 R.헨츄중령이 자신의 판단으로 제1군과 제2군의 철수를 건의하면서 그 때까지의 진격을 정지시킨 일에 대한 타당성의 여부가 자주 논의되었으나,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원인은 몰트케가 슐리펜계획에 2차례나 간섭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고 서부전선의 병력 자체를 약화시킨 데 있었다.

게다가 그 근본에는 독일의 국방예산을 해군증강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육군을 충실하게 육성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티르피츠가 육성한 독일해군은 단 한 차례 영국함대와 싸웠을 뿐이고, 대부분 킬 등의 군항에 머물러 있었다.

잠수함 이외의 함정은 제해권을 쥐고 있었던 영국해군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결국 1918년 10월 28일에 킬항구에서 일어난 해군반란은 독일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헨츄중령의 경고에 놀란 독일 제2군은 9월 9일에 서둘러 정찰기를 발진시켜 50㎞에 이르는 간격의 설정을 시찰케 하였고 정찰비행을 통해 영국의 대륙 파견군이 이 사이를 중앙돌파하려는 것을 감지하였다.

위험사태를 간단한 제1군과 제2군은 헨츄가 진언한 대로 같은 날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의 진출은 중앙돌파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항이 전혀 없는 틈을 탄 우연한 진입일 뿐이었다. 원래 영국의 참전구실은 벨기에의 중립을 독일이 침범했다는 것이었고, 슐리펜계획에 의해 벨기에의 중립을 짓밟은 것은 처음부터 예정된 독일군의 행동이었다.

이처럼 마른 전투에는 뜻밖의 많은 요인이 작용하였고 이들 요인은 모두 독일에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하였으며 마른전투는 대전 전체의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전투이기도 하였다. 결국 슐리펜계획은 영국·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실패로 끝나고 지구전으로 바뀌었다.

지구전은 인구나 물량면에서 앞선 협상국측에 유리했고 미국의 협상국측 가담은 사태를 더욱 촉진시켰다. 그 뒤에도 많은 전투가 벌어졌으나 마른전투 이상으로 전국(戰局)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전투는 없었다.

<주요 공방전과 과학무기>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사투를 되풀이한 북프랑스의 베르됭요새 공방전(1916. 2∼12)에서는 H.P.페탱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요새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전투에 이어진 같은 북프랑스의 솜전투에서는 프랑스군보다도 영국군이 주력이 되어 독일군과 싸웠고, 3국 군대가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1916. 6∼11).

러시아군은 러시아혁명 바로전 해에 독일군 및 오스트리아군에 최후의 대공격을 펼쳤다. 이 전투는 러시아군을 지휘한 A.A.브루실로프의 이름을 따서 브루실로프공세(1916. 6∼9)라 불린다. 이 공세는 루마니아의 참전을 유도함과 동시에 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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