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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1-10 (토) 17:33
분 류 사전3
ㆍ조회: 1890      
[현대] 프로축구=축구 (브리)
축구 蹴球 association football

soccer라고도 함. 각각 11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발 또는 머리로 공을 쳐서 상대 팀 골에 넣는 경기.

전세계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행해지며, 관객 동원력이 높은 인기 있는 운동이다. 규칙이 단순하고, 장소에 제약이 없다는 장점 때문에 쉽게 대중화되었으며, 전세계 150여 개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세계 축구 관리기구가 행한 최근의 축구 인구조사에 따르면 어린이부터 프로 선수에 이르기까지 정식으로 등록된 선수가 4,000만 명에 달한다.

1984년 하계 올림픽 대회에서 축구경기는 약 150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여 관객동원 면에서 최고를 기록했다. 세계 최대의 축구장은 리우데자네이루에 있으며 약 20만 명의 관중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다.

역사

기원

두 팀이 상대방 골대 방향으로 공을 차며, 앞으로 밀고나가고, 드리블을 하는 형태의 경기는 고대부터 존재해왔으며, 공은 원형이 사용되었다. BC 206년경 이미 축구와 비슷한 경기가 중국에서 행해졌으며, 500년경에는 머리카락으로 채워진 둥근 공이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축구와 유사한 특징을 갖는 ' 에피스쿠로스'(episkuros) 또는 '하르파스톤'(harpaston)이라는 경기가 행해졌으며, 그 경기는 BC 2세기경 ' 하르파스툼'(harpastum)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전해졌다.

하르파스툼은 공이 양 팀 사이의 공간으로 던져지면서 시작되었으며, 양 팀은 공을 상대방 골 라인 너머로 보내기 위해 공격과 수비를 펼쳤다. 로마 제국시대(43/44~410)에 로마 군인들이 영국과 유럽에 주둔하면서 각지에 축구를 소개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아일랜드에서는 그 이전부터 속이 채워진 공을 사용하여 축구경기를 했다고 한다.

7세기 일본에서도 축구와 유사한 경기가 행해졌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14세기에 칼치오(calcio:'공차기'라는 뜻) 경기가 행해졌는데, 이 경기는 정기축제 기념경기로 행해졌다. 또한 중세 유럽에서는 멜레(mêlée) 또는 멜라이(mellay)라는 경기가 널리 행해졌는데, 동물의 방광을 부풀려 만든 공을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치거나, 공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는 형태의 경기였다.

시나 행정구에서 선발된 양 팀 선수들 100여 명이 양 팀의 중앙 지점에서 경기를 시작했으며, 자기 팀의 지역 경계선을 골로 사용했다. 1389년 영국의 리처드 2세는 양궁 수련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 경기를 금지시켰으며, 15세기까지 군주들은 이와 유사한 금지령으로 이 경기를 제약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2세기부터 영국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오순절 화요일을 전통적인 축구의 날로 지키고 있다. 잉글랜드 체스터에서는 217년 거대한 V자 대형의 영국 군대가 로마 군대를 내쫓았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축구가 행해졌다고 전해진다. 한편 8세기 잉글랜드의 킹스턴온템스에서 데인인(북유럽인)을 쫓아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축구가 행해졌다는 설도 있다.

그후 73~91m 길이의 축구 경기장이 생겼으며, 경기장 양 끝에는 0.6~0.9m 간격으로 막대를 꽂아 골로 사용하게 되었다. 공은 동물의 방광에 바람을 넣고 가죽을 입힌 것을 사용했으며, 한 팀이 상대방 골대로 공을 몰아 넣으면 경기는 종료되었다.

학교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세기부터 영국에서는 사립학교에 다니는 부유한 귀족가문의 자제들이 덜 폭력적인 형태의 축구경기를 했다. 학교마다 규칙의 차이가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공을 가지고 뛰거나 전진 패스하는 것은 금지했다.

초기

영국에서는 처음에 윈체스터·채터하우스·이튼 학교 같은 사립학교의 기숙사 대항의 겨울철 스포츠로 성행했다. 학교마다 핸들링 허용 여부에 대한 규칙이 달랐기 때문에 학교 대항전은 드물었다. 따라서 대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옛 친구들하고만 축구를 할 수 있었다.

1843년 경기규칙을 명문화하고 학교간의 차이점을 없애고자 하는 시도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있었으며, 1846년 대부분의 사립학교들은 케임브리지 규칙을 공동으로 채택했다. 이 규칙은 케임브리지대학교 팀과 학교 졸업 후 축구 클럽을 결성한 선수들이 적용한 규칙이었다.

그후 1862~63년에 런던 지역과 런던 인근지방에 위치한 학교 팀 및 클럽 팀들이 수차례의 회의를 거쳐 규칙의 명문화에 합의하고, 럭비 협회와는 별도로 영국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FA)를 결성했다. 그러나 새로운 규칙이 곧 모든 경기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FA에 가입한 최초의 지방 클럽인 셰필드와 근교지방을 비롯하여 많은 클럽들이 계속 자신들의 규칙을 적용했으며, 1867년 주 단위 협회의 선두격인 셰필드 축구협회가 창설되었다.

1866년 셰필드와 런던 축구협회는 2회의 경기를 했으며, 1867년 미들섹스 주 팀과 켄트·서리 주 연합 팀과의 시합이 개정된 규칙에 따라 치러졌다. 1871년 FA 소속의 15개 전(全)클럽이 클럽 팀 대항전에 사용될 우승 컵 구입을 위한 비용을 내놓았다. 1877년 43개 클럽들이 대항전에 참가했으며, 런던 지역 팀들의 전통적인 강세가 점차 줄어들었다.

1870년대말에 이르러서는 스코틀랜드 축구협회의 규칙만이 FA의 규칙과 차이가 있었다. 한편 관중수도 증가하여 클럽 팀 대항 선수권대회의 결승전에는 1893년 4만 5,000명, 1897년 6만 5,000명 이상, 1901년 10만 명 이상을 기록했다.

프로

1884년 축구의 프로화가 쟁점이 되었는데, 2개의 클럽 팀이 프로 선수를 고용했다는 이유로 FA로부터 제명당하게 되었으나, 결국에는 일부 클럽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FA는 프로 축구를 허용하게 되었다. 프로화가 제기된 가장 큰 이유는 정상적인 직장을 가진 선수들이 축구를 함으로써 빼앗기는 시간에 대해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긍정적으로 볼 때 프로화는 선수의 전임고용제를 의미하게 되었으며, 중부와 북부의 팀들을 중심으로 프로 축구가 자리를 잡아갔다. 1888년 12개 프로 클럽 팀들에 의해 전국적 규모의 축구 리그가 결성되었으며, 1892년 참가 팀의 수가 28개 팀으로 늘었다 (→ 색인 : 영국 프로축구 리그).

1890년에 아일랜드, 1891년에는 스코틀랜드가 축구 리그를 결성했으며, 1894년에는 서던 리그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 다른 국가들은 영국식 축구 리그를 표본으로 삼아 국가단위의 축구 리그를 결성했다. 1889년 네덜란드도 국내 리그제를 도입했으나, 1954년에 이르러서 프로화를 채택했다. 1903년 독일은 제1회 전국선수권대회 시즌을 시작했지만, 포괄적 규모의 전국 리그 대회인 분데스리가는 약 60년 뒤에 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870년대에 축구가 소개된 프랑스에서는 1932년 프로 리그제가 채택되었으며, 아르헨티나·브라질 등의 남아메리카 국가에서도 프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1885년부터 프로제가 합법화되었지만 FA는 영국 남부지방의 몇몇 클럽처럼 아마추어 경기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프로 축구가 확산되자 런던 축구협회도 1906년 프로 축구를 인정하게 되었다.

1920년 서던 리그를 흡수한 축구 리그는 한층 더 전국적 규모의 대회가 되었으며, 중부와 북부 지방의 클럽 팀들은 계속해서 실력의 우위를 유지했다. 또한 FA 주최 선수권대회가 계속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한편, 주 1회 벌어지는 축구 리그 경기들도 영국 축구의 중요한 축을 형성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축구 리그 시즌의 관중수는 계속 증가해 1938년 2,800만 명에 이르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9년에는 4,100만 명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1986년에는 관객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 1,600만 명에 불과했으나 그후 플레이 오프전이 도입되고 각종 연합대회가 개최되면서 서서히 회복되는 추세로 접어들었다.

국제경기

초기에는 영국의 기술자들과 사업가들이 축구를 외국에 소개했다. 1870년대에는 브라질에, 1880년대에는 체크의 프라하와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 1890년대에는 오스트리아의 빈에 축구가 소개되어 2개의 클럽이 생겼다. 1887년 한 직물공장 대표가 러시아에 축구를 소개했으며, 1895년 터키에서는 영국인 거주민들과, 영국인 선수들로부터 축구를 배운 그리스 학생들 간에 최초의 축구시합이 열렸다.

스웨덴의 말뫼에서는 영국인 거주민들이 럭비와 축구를 했으며, 럭비와 축구를 혼합한 경기를 함으로써 스웨덴에도 축구가 소개되었다. 1889년 덴마크에서는 볼드 스필(구기) 연맹이 결성되었고, 같은 해 네덜란드 축구연맹도 결성되었다. 1890년대에는 벨기에와 스위스에서도 축구협회가 결성되었다.

19세기 영국의 다른 스포츠와 비교해볼 때, 축구는 나중에 영연방을 구성하게 된 국가들과 미국에 비교적 늦게 소개되었고 처음부터 인기를 끌지도 못했다. 1870년대 캐나다, 1880년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는 럭비가 행해졌는데, 럭비는 경기규칙의 제정이 늦게, 그리고 천천히 제정되었던 영국의 축구(soccer)와 섞인 경기였다.

20세기초 미식축구가 미국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경기로 자리잡기 시작한 후, 축구는 1905년부터 미국대학체육협회(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NCAA), 1924년부터는 뒤에 NCAA에 통합된 미국 대학간 축구협회의 후원으로 대학간 스포츠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1920년대 당시의 대학 축구 팀들은 펜실베이니아·코넬·하버드·해버퍼드·프린스턴·예일 등 대부분 동부지방에 편중해 있었다. 본래 봄 시즌 경기였던 축구는 그후 봄·가을 시즌 경기가 되었으나, 뒤에 가을 시즌 경기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기후가 온화한 캘리포니아 주 등의 지역에서는 계절에 관계없이 연중 경기가 행해지고 있다.

학교 외에도 이민집단들이 많은 도시들, 즉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필라델피아, 시카고, 신시내티,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라틴계 이주민이 많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축구경기는 매우 인기가 높았다. 1913년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FIFA) 산하 미국축구연맹이 창설되어, 미국 내의 모든 경기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동부지역 프로 축구 팀들이 주축이 된 미국 축구 리그가 1923년 시작되었으며, 베슬리헴철강회사의 선수들이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 선수들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선수들을 대부분 외국에서 데려왔다.

처음에는 외국의 팀들이 미국 내에서 순회경기를 하면서 대부분의 경기에서 승리했고, 그후 미국의 팀들도 외국으로 나가 경기를 하게 되었다. 미국 팀은 1930년부터 세계축구선수권대회(World Cup)에 참가했지만 대부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1968년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North American Soccer League/NASL)가 시작되면서 미국 프로 축구경기가 전국적인 규모로 열리게 되었지만, 오랜 기간 지속되지 못했다. NASL은 미국의 스포츠 팬들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함으로써 1985년 시즌을 앞두고 사라졌다.

1978년 몇 번의 시험단계를 거친 후 팀당 6명으로 구성되는 실내 축구 메이저 리그가 창설되어 축구는 공식적으로 실내 스포츠로 변했는데, 그것은 미국 국민의 취향에 적합한 빠르고 고득점력의 경기를 유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국제기구

축구가 유럽 대륙으로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국제기구가 필요하게 되자 벨기에·덴마크·프랑스·네덜란드·스페인·스웨덴·스위스 등이 1904년 FIFA를 창설했다. 이보다 앞서 FA가 국제축구기구의 창설을 고려했지만, 영국 자체의 국제기구의 창설을 주도하지 못했다.

한편 1905년 FA는 FIFA의 창설을 인정하고, 1906년 FIFA에 가입했다. 그러나 1882년 FA의 주도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아일랜드의 대표들이 구성한 국제 축구경기 규칙 제정 기구인 국제축구연맹위원회는 계속 존속했다.

1913년 FIFA는 국제축구연맹위원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영국이 1920년 독일을 비롯한 제1차 세계대전 동맹국들의 FIFA 재가입에 반대하여 탈퇴함으로써 권한을 상실했다. FIFA의 권한은 4년 후 회복되었다.

1900, 1904년 올림픽 대회에서 축구가 비공식 경기로 선을 보이고 그후 1932년 올림픽 대회를 제외하고는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자 축구의 아마추어성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FA와 FIFA 사이에도 이 문제에 대한 협의가 진행되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의무는 아마추어 정신을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FIFA는 아마추어 정신의 문제를 각 국가의 축구협회가 독자적으로 조정하도록 위임했다. 우루과이는 1924, 1928년 올림픽 대회에서 사실상 프로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 팀을 이끌고 우승했으며, 이에 반발한 몇몇 국가는 경기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IOC는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스포츠인 축구가 엄격한 제한규정으로 인기가 저하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프로 선수들의 참가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미루었다. 1908, 1912년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영국은, 1920년 다른 국가들의 올림픽 대회 출전 팀들이 프로화한 것에 반발하여 1946년까지 FIFA를 탈퇴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공산국가들이 올림픽 대회 축구종목에서 거의 대부분 우승했다.

세계선수권대회

1930년 FIFA 주최 월드 컵 선수권대회가 브라질의 몬테비데오에서 처음 개최되었으며, 우루과이가 대회 첫 우승을 안았다. 월드 컵 대회는 4년마다 올림픽 대회의 중간연도에 개최되고 있다. 1955년에는 국내 리그 우승 팀들이 참여하는 유럽 선수권대회가 생겨, 1954년 결성된 유럽 축구연맹연합의 33개 회원국이 참가했다(유럽 축구연맹연합의 회원국들은 1960년 유럽 컵-위너스 컵 시리즈를 창설함).

그후 1960년에 창설된 남아메리카의 코파 선수권대회를 포함하여 각종 선수권대회가 잇달아 창설되었으며, 코파 선수권대회 우승 팀과 유럽 선수권대회 우승 팀 간에 비공식적인 선수권대회도 개최되었는데, 이후 그 대회는 FIFA의 정식승인을 받았다(→ 스포츠 기록:풋볼).

1955년 국제 도시간 대표 팀들이 시합을 벌이는 인더스트리얼 페어스 선수권대회가 시작되어 1971년부터 유럽 축구협회연합(UEFA) 컵 선수권대회라는 이름의 정식대회로 개최되기 시작했으며, UEFA 선수권대회로 개칭되면서 매년 총 64개 팀이 참가하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토너먼트 대회로 성장했다.

한편 1916년부터 시작된 남아메리카 선수권대회, 1957년 창설된 아프리카 선수권대회, 유럽 국가간 축구선수권대회를 계승하여 1960년 창설된 유럽 축구선수권대회 등 다양한 국가간 대항전도 열리고 있다.

관중문제

지역적·국가적·국제적 라이벌 팀간에 벌어지는 축구경기에서는 때때로 열광적이며 광신적으로 응원하는 팬들이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폭력행위 사태가 빚어지기도 한다.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영국에서는 시합 전후나 진행중에 관중들의 방해와 소란 행위가 매우 드물었다.

대조적으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흥분한 관중이 운동장 내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운동장과 관중석 사이에 울타리를 치거나 운동장 주변에 큰 구멍들을 파놓았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서면서 경기장 폭력이 크게 증가했으며, 그로 인해 관중들도 감소하게 되었다.

즉 축구경기는 본의아니게 반사회적 행동을 유발시키는 촉매작용을 하게 된 것이었다. 1970년대 들어서 경기장 폭력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라이벌 팀들의 응원단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분리되어 있어야만 했다. 이 문제는 1985년 브뤼셀의 헤이셀 스타디움에서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당시 벌어졌던 유럽 선수권대회결승전에서 영국 리버풀 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하던 관중들이 이탈리아 튜린의 유벤투스 팀의 응원진을 야유하면서 앞으로 돌진해 담장이 무너지게 되었고, 그결과 39명이 죽고 40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상자는 대부분 이탈리아인이었다. 그후 영국 팀들은 유럽 선수권대회 참가가 금지되었으나 영국병으로 일컬어지는 경기장 폭력문제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 번지게 되었다 (→ 색인 : 후리가니즘).

경기

장비와 경기장

경기방식은 손과 팔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분을 사용하여 공을 상대방 골로 몰고가 골인시키는 것으로, 골을 많이 넣는 팀이 이기게 된다. 공은 고무주머니를 부풀려 가죽으로 감싼 원형으로 둘레가 68~71㎝, 무게가 397~454g이다. 선수들은 머리나 발을 사용해 동료에게 공을 패스하거나, 발등 또는 발의 측면으로 공을 짧게 계속적으로 차면서 몰고 가는 드리블을 한다.

11명의 선수들 중 유일하게 골키퍼만이 너비 40.2m, 길이 16.5m의 직사각형 페널티 에어리어 내에서 손을 사용하여 공을 다룰 수 있다. 골대는 너비 7.3m, 높이 2.4m 규격이며, 경기시간은 총 90분이다. 각 팀은 전반과 후반 중간에 있는 15분 동안의 휴식 후 진영을 바꾼다.

FIFA의 규정에 따르면 일반 경기장은 길이 90~120m, 너비 45~90m이며, 국제경기가 펼쳐지는 경기장은 길이 100~110m, 너비 64~75m 규격이어야 한다. 여자와 국민학생 경기는 보다 규모가 작은 경기장에서 시간을 단축해 치른다.

경기시간을 측정하고 경기내용을 관리하는 주심과, 주심을 도와 터치라인 또는 사이드라인을 순회하며 공이 경기장 밖으로 나갔을 때 신호를 하는 2명의 선심이 경기를 통제한다. 한편 유니폼과 장비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옷은 점점 얇아지고 무거운 부츠는 가벼운 구두로 바뀌었으며, 많은 선수들이 정강이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양 팀간의 선수를 서로 식별할 수 있고 골키퍼를 따로 구분할 수 있다면 유니폼을 통일하지 않아도 되며, 맨발로도 시합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반칙

프리 킥은 반칙이나 규칙위반을 범했을 때 상대 팀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직접 프리 킥과 간접 프리 킥이 있으며, 이때 수비하는 모든 선수들은 반드시 공으로부터 9m 떨어져 있어야 한다. 직접 프리 킥은 상대방을 발로 차거나, 넘어뜨리거나, 고의로 손을 사용하여 공을 쳤을 때 등 중대한 반칙을 범했을 경우 주어지는 것으로 직접 득점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간접 프리 킥은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방 진로를 방해하는 등 비교적 덜 중대한 반칙을 범했을 경우 주어지는 것으로, 반드시 1번 이상 자기편에게 공을 패스한 후 득점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직접 프리킥의 일종인 페널티 킥은 페널티 에어리어 내에서 공격 팀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골 중앙으로부터 11m 떨어진 지점에서 차게 되는데, 이때 수비 팀 골키퍼와 공격팀 키커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은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 있어야 한다.

1960년대부터는 축구규칙의 해석 및 적용에서 두드러진 차이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어깨로 미는 행위, 골키퍼를 방해하는 행위, 선수 뒤에서의 태클 등이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별로 중요한 반칙으로 적용되지 않았지만, 공을 가지지 않은 선수를 방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한 규제를 했다. 1970년부터 중대한 반칙을 범한 선수에게는 경고용 황색 카드가 주어졌으며, 그러한 반칙을 2번 했을 때 적색 카드가 주어지고 퇴장당하게 되었다.

규칙

20세기 들어와 축구경기가 놀라운 성장을 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같은 시기에 오프사이드와 선수교체에 관한 2가지 규칙만이 개정되었다는 사실은 특이할 만하다. 상대 팀 진영에서 공격하는 선수가 그 자신과 골 라인 사이에 2명 미만(규칙이 변경되기 전에는 3명 미만)의 상대 팀 선수를 둔 상태에서 동료로부터 전진 패스를 받게 되면 오프사이드 반칙을 범한 것이 된다.

선심들이 각 팀의 최전방 공격수를 따라 자신들의 위치를 변경하면서 주심에게 오프사이드 반칙을 알리게 되지만, 오프사이드 판정은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많은 국가에서 팀당 11명의 선수로 제한되어 있는 규칙을 선수교체가 가능하도록 개정할 것을 국제위원회에 건의했다.

처음에는 부상선수에 한해 선수교체를 허용했으나, 현재는 부상 여부에 관계없이 경기 진행중 어느 때라도 2명에 한해서 선수를 교체할 수 있다. 1970년 월드컵 대회에서 처음으로 선수교체제가 공식적으로 적용되어, 선수 대기석에 있던 5명의 선수 중 2명이 교체선수로 투입되었다.

당시 대회 개최지였던 멕시코 시의 더위와 고도에 시달리던 선수들에게 이 새로운 제도는 매우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 선수교체는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언제라도 가능하지만, 주심이 경기를 잠시 중단시킨 후 경기장 중앙선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작전상 이유에 따른 교체이거나 부상에 따른 교체일 때, 교체한 선수는 반드시 교체된 선수가 경기장 밖으로 나온 후에만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일단 교체된 선수는 그 경기에 다시 출전할 수 없다.

기술

선수의 단독 질주와 드리블이 경기에서 매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축구경기는 같은 팀 동료간의 정확한 패스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단체경기이다. 따라서 패스는 유동적인 움직임과 다양한 형태의 경기진행을 유도하여 경기의 흥미를 증진시키는 중요한 기술이다.

1860년대 처음 소개된 헤딩 역시 경기의 중요한 기술인데, 수많은 감동적인 득점장면들은 전방을 향해 점프하면서 이마를 사용하여 공을 차는 헤딩 기술에 의한 것이다. 한편 축구경기를 운영하면서 많은 공격방법과 다양한 체계가 선보였지만, 축구의 기본적인 목적은 수비수나 공격수에 관계없이 상대방 골 부근에서 슈팅이 가능하도록 위치·시간·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며,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선수의 뛰어난 기술과 자세가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전술

축구의 프로화와 리그제의 실시로 유익한 점이 많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제도들은 부분적으로 수비중심의 축구 형태를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빈틈 없기로 유명했던 1930년대 영국 아스널 팀의 허버트 채프먼 감독은 센터 하프백을 제3의 수비수로 끌어내려 종전까지 2명이었던 최종수비수를 3명으로 보강했으며, 전방공격수를 5명에서 4명으로 조정했다.

상업화된 축구가 가장 발달한 국가로 꼽히는 이탈리아는 4명의 수비진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빈틈을 메우기 위해 스위퍼 또는 리베로('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뜻)라고 하는 여분의 한 선수를 수비진영의 제일 후방에 두는 카테나치오 시스템을 소개했다.

이 두 전술이 구축하는 튼튼한 수비형태는 팀의 신속한 역습을 위한 발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전술을 모방한 대부분의 팀들은 가능한 한 실점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그 두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한 수비중심 형태의 전술은 '홈 앤드 어웨이' 경기방식을 채택하는 유럽 클럽 팀 토너먼트 대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대부분 홈 팀이 대량득점으로 승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어웨이 팀은 경기에 이기려는 의도보다는 가능한 한 상대 팀의 득점을 최소화하자는 작전으로 경기에 임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극소수 공격중심 작전들 중 하나는 1950년대 헝가리의 난도르 히데그쿠티 감독이 개발한 것으로, 센터 포워드를 후방에 두는 공격법이었다. 후방에 위치한 센터 포워드는 자기 팀의 공격진 뒤에서 경기를 하면서 상대 팀 센터 하프백을 수비진영에서 끌어냄으로써 자기 팀의 인사이드 포워드들이 공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한 공격형태에서는 종래에 주로 사용되던 W자형의 공격대형 대신 M자형의 공격대형을 갖추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각 팀들은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만능선수보다 1가지 역할에 충실한 전문선수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즉 윙들은 양 터치라인 방향을, 풀백들은 수비진영의 후방을, 센터 포워드는 경기장 중앙을 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팀에 대한 공헌도가 선수의 기술만큼 중요하게 되었으며, 개인기보다는 전체적인 짜임새를 강조하는 축구가 더욱 우세해지게 되었다. 브라질은 1958년 월드컵 대회에서 우승할 당시, 선수 개개인에게 역할을 분담하여 전체경기를 운영하는 4-2-4 전술형태를 적용했다. 영국은 1966년 월드 컵 대회에서 윙의 역할을 없앤 4-3-3 전술형태를 사용해 우승했으며, 4년 후에는 전방에 2명의 공격수만을 배치하는 4-4-2 전술형태를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1970년대초 자신의 포지션을 무시하고 경기하는 네덜란드의 토탈 축구 방식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즉 모든 선수가 공격과 수비의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방식의 채택에 걸맞게 모든 선수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났지만 네덜란드는 1974년 월드컵 대회에서 준우승에 그쳤다.

그후 1980년대말에는 4-4-2 전술형태를 변형시켜 미드필드진을 보강한 4-5-1 전술형태가 개발되기도 했다. 이 전술은 공격진영에 1명의 공격수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수비진영에 가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경기에서 패하지 않기 위해 수비를 강조하는 경향은 특히 경쟁이 심한 프로 경기에서 나타났다.

J. D. Rollin B. Joy 글

한국의 축구

한국에 근대 축구가 도입된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많으나, 대체로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인 1897년 전후인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1882, 1897년에 영국 함선이 인천에 들어온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영국 수병들은 인천에 상륙하여 축구를 궁내부 참리들과 어전 통역관 등에게 선보였다.

대부분 관립 외국어학교 출신이었던 어전 통역관들은 외국인 교사로부터 외국어를 배우고 외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인물들로, 이미 영국 수병들이 선보인 축구를 보기 이전에 축구경기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1896년 한국 최초로 대한축구구락부라는 축구 팀을 창설했는데, 이것이 한국 근대 축구의 효시가 되었다.

한편 화동에 있었던 영수학원에서는 영국인 선교사가 축구를 보급시켰으며, 1899년 5월에는 동소문 밖 삼선평(지금의 삼선교 근처)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1903. 10. 28 창설, 지금의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와 오성학교가 영국인 교사의 지도 아래 경기를 가졌다. 그후 축구는 일반인들에게도 보급·발전되었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해서 점차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의 축구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처참한 수난이 절정에 달한 때였으므로, 스포츠를 통해 민족의 울분과 애국심을 달랬다.

1920년 7월 13일에 90여 명의 유지들의 발기로 조선체육회를 조직했으며, 그해 7월 15, 16일 양일에 걸쳐 조선체육회 주선, 조선청년회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도쿄[東京] 한국 유학생회 축구단의 모국방문 경기가 대구 달성공원에서 열려 애국청년회 운동원과 경기를 가졌다. 7월 17일에는 서울로 올라와 청년회 및 배재고등보통학교와 2차례의 경기를 가져 축구의 새로운 기술 및 경기 시범을 보여주었다.

1926년 1월 5일 배재고등보통학교 축구 팀이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거행된 제8회 전일본 중등학교 축구대회에 한국의 중학 팀을 대표해서 출전했다. 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첫 해외원정경기였다.

전국적인 첫 축구조직체는 1928년 5월 20일에 발족한 조선축구심판협회였다. 이 협회는 비록 심판분야에만 국한된 조직이었으나, 경기운영까지 관장하여 축구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후 축구가 전국적으로 보급·발전되자, 중앙을 중심으로 한 심판협회로서는 축구 전반의 일을 모두 감당하기 어렵게 되어, 1933년 9월 19일 이를 더 큰 전국적 조직체인 조선축구협회로 확대·개편하게 되었다.

이 조직체는 그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몇 대의 집행부를 거치면서 발전해나가다가, 1942년 2월에 해체되었다. 현재의 축구협회는 8·15해방과 더불어 9월 재건되어 그해 10월에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개최했고, 1946년 2월에 FIFA에 정식으로 가입했으며, 1948년 7월에는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다. 조선축구협회는 1948년 대한축구협회로 개칭되었다.

1954년 6월 스위스에서 개최된 제5회 월드컵 대회의 첫 참가는 한국 축구의 발돋움이라는 견지에서 의의가 있었다. 같은 해에 아시아 축구연맹(AFC)에도 정식 가입했는데, 그후 1956년 8월의 제1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게 되었다.

1957년 5월에는 전국중고축구대회의 결승경기가 텔레비전 녹화로 처음 중계방송되었다. 1959년 4월 제1회 아시아 청소년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으며, 1960년의 아시아 선수권대회와 아시아 청소년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2연패를 이루었다. 그해 10월에 서울 효창운동장의 축구장이 건립되어 축구의 발전을 크게 고무했다.

4년 뒤인 1964년 10월 제18회 도쿄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고, 1965년 산하연맹으로 중·고등학교와 대학 및 실업연맹이 발족했으며, 1968년 10월 제1회 대통령배쟁탈 전국고교축구대회를 창설했다. 또 1971년 5월 제1회 대통령배쟁탈 아시아 축구대회, 1972년 9월 한·일정기축구경기도 창설되었다. 이런 활발한 움직임 속에 1976년 8월에는 제5회 세계대학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77년 5월 축구회관이 마련되었다. 박스 컵 대회로 통칭되던 아시아 축구대회가 대통령배국제축구대회로 개칭된 것은 1980년 8월이었다. 그해 12월에는 한국 최초의 프로 팀 ' 할렐루야'가 창단되었으며, 1982년 1월 산하연맹(초·중고·대학·실업)이 해체되고, 1983년 5월 프로 축구 슈퍼 리그가 개막되었다.

또 6월에 멕시코에서 열린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는 4강에 진입하기도 했다. 한편 최초의 프로 축구단이었던 '할렐루야'가 1985년 12월에 해체되었고, 이듬해 5월에는 멕시코에서 열린 제13회 월드컵 축구대회에 참가했으나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해 10월에는 〈한국축구백년사〉를 발간했다.

1987년 3월에는 새로이 한국 프로 축구위원회가 발족되었고, 1988년 3월에는 선수등록 및 행정이 전산 시스템화되었다. 또 9월에는 서울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으며, 1989년에는 프로 위원회가 통합되어 축구협회의 산하단체로 부활했다. 1990년 6월에는 제14회 이탈리아 월드컵 축구대회,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지만 좋은 성적은 내지 못했다.

<참고문헌>

과학적 축구 : 한국체육과학연구원, 21세기교육사, 1992
축구실전학 : 박경호·박경화 공저, 문향, 1992
축구기초기술지도 상·하 : 황병진·김기호 공편, 금광, 1992
축구연습방법 : 노일환 외 저, 보경문화사, 1991
프로축구 2920 : 김덕기 편, 문향, 1991
축구 : 김희수, 동양문화사, 1988
한국축구백년사 : 대한축구협회 편, 라사라, 1986
최신축구기법 : 齊藤勇, 서림문화사 편집부 역, 서림문화사, 1984
Soccer:The Records, Facts, and Champions, 2nd ed. : Jack Rollin, 1988
The Guinness Book of Soccer Facts  Feats, 4th ed. : Jack Rollin, 1981
Association Football and English Society, 1863-1915 : Tony Mason, 1980
A Book of Soccer : Brian Glanville, 1979
World Soccer from A to Z : Norman Barrett (ed.), 1973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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