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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08:28
분 류 사전3
ㆍ조회: 2308      
[현대] 대한민국5-정치 (두산)
대한민국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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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 정치

1. 법체제

8·15광복 후 미군정(美軍政)이 실시되는 동안 한국은 미군정장관의 포고·법령·고시 등의 적용을 받았다. 그리고 군정법령 제11호로 일제강점기의 법령 중 치안유지법·정치범죄처벌법·출판법 등을 비롯한 악법이 폐지되었으나, 군정법령 제21호로 일제강점기의 법령 대부분이 그대로 효력을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건국을 앞둔 과도기의 부득이한 조치였다. 광복 후의 사상적 대립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제헌국회(制憲國會)가 소집되어 1948년 7월 17일 대통령제 및 단원제 국회를 통치체제의 골자로 한 대한민국헌법이 공포됨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국민주권·권력분립·기본권 보장 등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담은 헌법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헌법에 입각하여 7월 17일 법률 제1호로 정부조직법이 공포되고,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회법(1948)·법원조직법(1949)·검찰청법(1949)·국군조직법(1948)·지방자치법(1949)·국가공무원법(1949) 등의 주요 조직법과 국세징수법(1949)·관세법(1949)·농지개혁법(1949)·재정법(1951) 등도 공포되었다. 또한 국가보안법(1948)이 제정되었고, 노동3법(1953)과 형법(1953)·형사소송법(1954)·민법(1960)·민사소송법(1960)·상법(1962) 등의 기본육법(基本六法)을 차례로 정비하였다.

6·25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등이 이루어졌고, 4·19혁명 후에는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국회를 참의원과 민의원의 양원제로 하는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었다. 이로써 종래의 의원내각제 요소를 가미한 대통령중심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일부 헌법기능이 정지된 가운데 조사정변주체세력이 주축이 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7월 ‘구법령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법률 659호)을 제정하고 법령정리위원회를 설치하여 일제강점기의 구법령을 모두 폐지하고 그에 대치될 법령 제정에 착수함으로써 비로소 주권국가로서의 형식적 면목을 갖추었다.

1963년의 제5차개정 헌법은 다시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행정부의 권한을 한층 강화하였다. 1972년 10월 이후 이른바 유신체제하에서는 전통적인 민주주의체제가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국세기본법·농지기본법·산업기지개발촉진법·민방위기본법·부가가치세법·사회안전법·의료보험법·모자보건법 등 수많은 법률이 여·야 국회의원의 극한적인 대립 속에서 제정·개정되었다. 노동3법의 개악 등으로 근로자들과 일반국민의 기본권이 많은 제약을 받았고, 법규사항(法規事項)이 대폭적으로 대통령령에 위임되는 등의 변칙성을 보였다. 1980년 제8차개정 헌법은 유신체제하의 제약들을 폐지하여 인권불가침성을 확인시켰고, 국회의 지위를 회복시켰으며, 복지사회구현을 위한 법체제 마련에 노력하였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직선제 및 대통령단임제를 규정하여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정부 선택 보장과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확립하였으며, 대통령 권한의 합리적 조정과 국회기능 활성화를 통한 국가권력의 균형과 조화를 도모함과 아울러 헌법재판소의 신설 및 법관 임명 절차의 개선 등을 통해 사법권 독립의 실질적 보장과 헌법의 실효성을 제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더욱이 김영삼정부에서의 개혁입법 추진으로 국민의 기본권 신장과 복리증진 및 국민생활의 기본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률정비에 노력하고 있다. 행정소송에서는 기존의 행정심판전치주의에 따른 2심제를 개선하여 행정소송 3심제를 채택하여 국민의 권리구제 강화와 국민편익을 도모하고, 세계화·지방화 등 행정환경과 행정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강력한 정부를 구현하기 위해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였으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1990)과 남북협력기금법(1990)을 보완하였다. 아울러 실질적 법치주의 구현 및 사법민주화를 위한 사법개혁을 비롯한 여러 개혁정책에 따른 법률 개폐로 인한 법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2. 정당

한국은 8·15광복 이후 정치활동이 자유로워지자 좌경세력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 우익민주세력인 한국민주당, 지하공산세력인 조선공산당을 비롯하여 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인민당 등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정당활동이 인정된 것은 1946년 11월 23일에 발포된 미군정법령(美軍政法令) 제55호 ‘정당에 관한 규칙’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르면 당원수가 3인 이상이면 정당이 성립되는 데다가 당시에는 좌우익간의 대립이 심하여 주도력을 가진 정치적·사회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다만 혈연·지연 중심의 소규모 사회적 연대관계가 존재하였으므로 수많은 군소정당들이 난립하였다.

(1) 제1공화국

한국의 정당이 의회주의 정당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제헌국회가 성립된 이후부터이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는 48개 정당들이 참가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국민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조선민족청년단 6명, 기타 정당 13명, 무소속 85명이 선출되었다. 그 해 제정된 제1공화국 헌법에는 정당에 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으며 별도의 정당 법규도 없었으므로 정당의 보호나 규제에 관한 법적 근거가 없었다. 국회의원이 있는 정당은 원내교섭단체라는 국회법에 의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만큼 정당의 성립도 용이하여 군소정당이 난립하고, 무력하게 해산당하기도 하였다.

1950년 총선거가 끝난 후 대통령 이승만은 그 동안의 초당적인 카리스마적 태도를 바꾸어 1952년 자유당을 창당하였으며,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선거를 통하여 자유당은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하였다. 1954년 11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이 이루어지자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1949년 한국민주당과 대동청년단이 통합)은 자유당 탈당의원 및 흥사단을 흡수하여 1956년 9월 민주당을 발족시켰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자유당 126명, 민주당 79명, 무소속 27명, 기타 1명이 당선되었는데, 이로써 군소정당들은 몰락하고 양당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권위주의에 치중된 자유당은 정권의 안정과 지속을 위하여 강제적 수단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이에 야당은 여당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제1공화국 당시의 혁신정당으로는 진보당을 비롯하여 노농당(민족주의 민주사회당)과 민주혁신당이 있었으며, 기타 주요 보수당으로는 통일당·대한여자국민당·삼민당·대한국민당·국민회 등이 있었다.

(2) 제2공화국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은 해체되고 민주당세력이 확대되면서 그 동안 억압받았던 혁신세력이 대거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 해 민의원선거에서는 민주당 175명, 자유당 2명, 통일당 1명, 무소속 49명, 기타 1명과 혁신세력으로 사회대중당 4명, 한국사회당 1명만이 당선되었으며, 참의원선거에서도 민주당 31명, 자유당 4명, 무소속 20명, 기타 1명과 혁신세력으로 사회대중당 1명, 한국사회당 1명만이 당선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들은 온건보수정당인 민주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신·구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1961년 2월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양분되어 집권당으로서의 국민통합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후 계속 체제의 취약성을 나타내다가 5·16군사정변으로 정당들은 해체되고 1963년 1월까지 정당활동이 금지되었다.

(3) 제3공화국

1962년에 제정된 정당법은 법률적인 규제를 통하여 군소정당, 특히 혁신계 정당의 출현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배제하였다. 1963년 2월 5·16군사정변 주체세력에 의한 민주공화당이 등장하였고, 야당은 난립상태에 있었다.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는 12개 정당이 참가하여 여당인 민주공화당 110명, 친여세력인 자유민주당 9명, 재야(在野) 3당인 민정당 41명, 민주당 13명, 국민의당 2명이 당선되었다. 민주공화당은 집권당으로서 반공안보와 조국근대화를 내세웠다. 1965년 민정당과 민주당이 통합하여 민중당으로 발족하였으며, 민중당은 신한당과 합당하여 1967년 2월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그 해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전체의석의 2/3가 넘는 129석, 신민당 45석, 대중당 1석으로 군소정당들의 후보는 완패하였다.

1969년 정당활동은 주로 대통령의 3선 개헌처리를 둘러싼 여·야간의 격돌로 나타났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의 결과는 대통령 박정희가 3선되었으며, 제8대 국회의원선거의 결과는 여·야의석의 근소한 차로 균형국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제1야당인 신민당이 당권 경쟁과 원내 파벌 간의 대립을 일삼는 동안 1972년 대통령의 10·27특별선언으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중지되는 이른바 10월유신을 맞이하였으며, 12월 27일 장기집권의 초석이 된 유신헌법이 공포·발효되었다.

(4) 제4공화국

1972년 12월 23일 제8대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되었으며, 1973년 2월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73명, 신민당 52명, 민주통일당 2명, 무소속 19명이 당선되었고,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국회의원 73명은 민주공화당과는 별도로 친위집단인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따라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유정회로 인하여 집권당으로서의 기능이 크게 위축되었다.

1978년 10월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68명, 유정회 77명, 신한민주당 61명, 민주통일당 3명, 무소속 22명이 당선되어 민주공화당과 유정회가 다수의석을 차지하였으나, 득표율에서는 신한민주당이 32.8%로 31.7%를 얻은 민주공화당을 앞질렀다. 신한민주당이 이를 바탕으로 민주화운동을 강화함에 따라 그에 대한 탄압도 가중되었다. 결국 1979년 10·26사태가 발생하여 1980년 10월 27일 새 헌법이 발효되었고, 그에 따라 국회와 각 정당들은 자동 해산되었다.

(5) 제5공화국

1981년 2월 25일 새 헌법에 따라 3월 3일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3월 25일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151석, 민주한국당 81석, 국민의당이 25석을 획득하였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신한민주당이 대도시를 석권, 50석을 차지하면서 정계에 새로운 돌풍을 일으켰다. 신한민주당은 1986년 2월 기습적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서명운동을 전개하여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로써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6) 제6공화국

1987년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여·야 합의로 발의되어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새 헌법이 확정되었다. 1988년 2월 25일 새 헌법에 따라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6공화국은 민주화의 추진, 5공과의 단절, 올림픽 이후의 중간평가 등의 문제를 안고 출범하였다.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1석, 무소속 9석을 획득하였다.

그 결과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이 33.9%를 차지함으로써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형성되어 5공비리 청산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간평가가 유보되고 자치단체장선거가 연기되면서 민주화에 역행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어 1990년 1월 22일의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함으로써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7) 김영삼정부

1992년 12월 18일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가 출범하였다. 이어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는 민주자유당 116석(38.5%), 민주당 75석(29.2%), 통일국민당 24석(17.3%)로 나타났다. 이는 3당통합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결국 정국판도를 3당통합 이전인 13대 초기의 여소야대 상황으로 되돌려 놓았다.

(8) 김대중정부

김대중 정부의 정당으로는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한나라당 등이 있다. 1997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대표는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 여당의 이회창 후보와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새정치국민회의당은 1998년 1년의 국정을 책임진 집권여당으로서 당정 협의를 활성화하고 당 체제도 일시시키는 한편 효율적인 정책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하였다. 한나라당은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뀌며 신한국당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내부와 외부의 여러 문제들로 흔들렸지만 당의 지도 체제와 조직을 정비하고 새로운 야당으로서 면모를 갖춤으로써 재집권을 위한 기반 쌓기에 주력하고 있다.

자유민주연합은 공동여당으로 내각제 개헌을 둘러싸고 국민회의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집권여당으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자유민주연합과 민주당으로 이루어진 공동여당간의 정책 혼선이 가끔 벌어져 권력 구조의 갈등을 드러냈으며, 결국 2001년 9월 두 당간 공조가 파기되어 공동여당은 해체되었다.

(9) 한국정당의 특성

한국은 8·15광복 이후 수많은 정당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의 과정을 거쳐왔다. 그중에서도 주요 정당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민주당 → 민중당 → 신민당 → 민주한국당·신한민주당 → 평화민주당 → 민주당 → 한나라당의 순서로 이어져 온 야당세력과 둘째, 제1공화국의 대부분을 집권한 자유당(1952∼1960) 셋째, 제3·4공화국의 집권당인 민주공화당(1963∼1980) 넷째, 제5공화국의 여당으로 출발한 민주정의당 다섯째, 제6공화국 때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김대중 정부의 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등 5대 정당세력을 들 수 있으며, 그밖의 정당들은 군소정당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정당사를 통해서 볼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발견된다.

① 한국 정당은 국민의 정치의식화, 정치인구의 결집과 훈련, 의회정치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② 한국 정당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인물중심주의의 취약성을 지녔다. ③ 주요 정치적 변혁이 정당에 의하여 주도되지 않았다. ④ 한국의 주요 정당들은 특정 사회세력이나 특정 이념을 대변하기보다는 국민 전체를 대변하는 범국민적 정당을 지향하였다. ⑤ 정당에 대한 일반국민의 부정적 견해 또는 무관심이 오히려 특정 집단의 물리적 힘에 의한 정치변혁의 길을 열어 주었으며, 정당은 이전의 모든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에 대하여 1차적 책임을 지는 속죄양이 되기도 하였다. ⑥ 정치변동이 심하여 한국의 정당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단명(短命)할 수밖에 없었다. ⑦ 집권당은 권력 정점의 주도로 창당되며, 야당은 권력접근봉쇄에 대한 반발로 인맥집단화(人脈集團化)됨으로써 정당의 자율성과 다원성이 결여되고 경직성·단순성·종속성·분열성이 비교적 높았다.

3. 정부와 의회

정부와 의회의 관계는 한 나라의 정부형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한국의 경우는 건국헌법(제1공화국)에서 현행 제6공화국 헌법에 이르기까지 6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⑴ 제1공화국 초기의 정부형태는 헌법 제정 당시의 대립된 정치세력 간의 정치적 타협으로 말미암아 의원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제였다. 그러나 1954년 11월 제2차 개헌(사사오입개헌)으로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 요소를 거의 청산한 대통령제가 되었다. 그 결과 국회보다 정부인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어 K.뢰벤슈타인이 말하는 신대통령제로 전락하였다.

⑵ 제2공화국의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의 이념형으로 간주되는 영국형 의원내각제에 해당한다. 당시의 의원내각제는 국회에 대한 정부(내각)의 연대책임과 내각의 국회해산권은 물론, 행정권의 이원적 구조, 입법권과 행정권의 균형, 국회와 정부의 협조관계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5·16군사정변으로 구성된 박정희정부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따라 국가의 최고통치기관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이에 모든 국가권력을 집중시켰다. 즉,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며,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하여 구성되는 내각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연대 책임을 지고,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까지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군사정부에서 정부와 의회의 관계는 전혀 새로운 정부형태를 의미하는 회의제(assembly government)의 한 유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⑶ 제3공화국에서는 정부의 국회해산권과 국회의 정부불신임권이 인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정부의 수반이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대통령제에 해당하는 정부와 의회의 관계를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의원내각제 요소와 철저한 정당국가적 경향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그 정부형태는 결코 고전적 의미의 대통령제라고 할 수는 없다.

⑷ 제4공화국의 정부형태는 정부와 의회의 관계에서 정부인 대통령이 의회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제에서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었다. 예컨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방식,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일부 국회의원에 대한 추천권, 절대적 긴급조치권 등은 고전적 의미의 대통령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도이다.

⑸ 1979년 10·26사건과 12·12사태, 1980년 5·17비상계엄 선포, 광주민주화운동 등 일련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탄생한 제5공화국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의원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선출된 7년 단임(單任)의 대통령은 비상조치권·계엄선포권·국회해산권·국민투표회부권·헌법기관구성권 등의 권한행사를 할 수 있어 정부가 국회에 대하여 절대적 우위를 가지는 관계에 있었다.

⑹ 제5공화국의 정통성과 개헌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 등을 기점(起點)으로 한국 헌정사상(憲政史上) 최초로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⑺ 제6공화국은 대통령제를 채택,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정부선택을 보장하였으며, 아울러 대통령 5년 단임제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확립함으로써 민주국가발전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대통령의 비상조치권·국회해산권을 폐지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국정감사권 등을 부활시키는 등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여 그 기능을 활성화함으로써 정부와 의회 간에 권력의 균형과 조화를 도모하였다.

⑻ 김영삼 정부는 경제의 발전을 위해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 발전을 꾀하였다. 하지만 많은 외채와 이자 부담으로 인해 국민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

⑼ 김대중 정부는 제2의 건국운동을 펼치며 나라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부정부패척결,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실업자가 경제 위기를 맞고 있지만 정부와 의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또한 자유민주연합과 민주당으로 이루어진 공동여당간의 정책 혼선이 가끔 벌어져 권력 구조의 갈등을 드러냈으며 결국 2001년 9월 공조가 파기되어 여소야대 상황이 되었다.

4. 사법제도

사법제도란 법원과 소송에 관한 제도 및 기타 사법권의 작용에 속하는 제도 전체를 말한다. 한국의 현행 헌법에 따르면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하며(101조 1항), 사법권의 독립을 위하여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고(103조),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刑)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停職)·감봉(減俸)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하는 것으로(106조) 되어 있다. 현행 헌법은 종래 대법원 판사를 대법관(大法官)으로 바꾸고,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고, 일반법관은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104조). 법원에는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하급법원으로서 고등법원·특허법원·지방법원·가정법원·행정법원이 있으며, 그 외에 헌법상 인정되는 특별법원으로서 군사법원(110조 1항)이 있다.

사법제도는 원칙적으로 3심제로 운영되며, 행정소송은 제1심이 고등법원이 되고 제2심은 대법원이 되어 2심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대통령선거소송과 국회의원선거소송은 대법원의 전속관할(專屬管轄)로 단심제로 하고 있다. 다만 비상계엄하의 군사재판은 단심제로 하는 경우도 있다(110조 4항). 재판은 반드시 공개주의 원칙에 따르도록 되어 있으나, 헌법(109조)과 법원조직법(57조 1항)에 의하여 예외적으로 공개하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심리를 비공개로 하는 경우라도 판결의 선고는 반드시 공개하여야 한다. 현행 소송제도로는 민사소송·형사소송·행정소송·가사소송·헌법소원 등이 있다. 행정소송의 경우는 특수성을 인정하여 행정심판 전치주의(前置主義)·2심제·출소기간의 제한 등 특례를 인정하고 있으며, 헌법소원의 경우는 헌법재판소제도를 채택하여 ① 위헌법률심판권, ② 탄핵심판권, ③ 정당해산심판권, ④ 기관 간의 권한쟁의심판권, ⑤ 헌법소원심판권을 인정하고 있어 법원의 관할로서는 다만 선거소송·위헌법률심판제청권만이 인정되고 있다.

5. 지방자치

한국의 지방자치는 민주정치의 개념상 필연적인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풀뿌리민주정치(grass roots democracy)라고도 한다. 한국의 지방자치제는 건국헌법에 규정된 지방자치조항(78장 96조)에 의거하여 지방자치법이 제정·공포됨으로써 확립되었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지방의회(地方議會)가 해산되면서 그 후 제3공화국(헌법부칙 7조 3항), 제4공화국(헌법부칙 10조), 제5공화국(헌법 8장)을 거치면서 명목상의 규정으로만 존재하였다. 그러나 제6공화국에 들어와서 헌법규정(8장)에 따라 새로이 지방자치법을 제정하여 지방자치단체의 종류와 그 조직 및 운영에 관한 사항을 정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기본적 관계를 정함으로써 지방자치행정의 민주성과 능률성을 도모하며, 지방의 균형적 발전과 한국의 민주적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지방자치단체는 크게 ① 특별시와 광역시 및 도(道), ② 시(市)와 군(郡) 및 구(區)로 구분하며, 특별시와 광역시 및 도는 정부의 직할하에 두고, 시는 도의 관할구역 안에, 군은 광역시 또는 도의 관할구역 안에 두며, 자치구(自治區)는 특별시와 광역시의 관할구역 안에 두도록 하고 있다. 헌법과 지방자치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에는 지방의회를 두며, 지방의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의 장(長)은 직선으로 선출하고, 그 임기는 각각 4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통합선거법인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1994. 3)에 따른 최초의 지방의회의원 선거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1995년 6월 27일에 동시 실시되었다. 지방자치단체는 헌법규정(117조 1항)에 따라 ①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처리권, ② 자치입법권, ③ 재산관리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지방재정의 영세성으로 인해 재정자립도가 낮고, 광역행정·개발행정·사회복지행정에 따라 중앙집권화 경향이 나타나며, 단체장의 독주와 전시행정 등 예산 낭비요인도 크게 지적되고 있고 이에 대응한 중앙의 통제방식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6. 외교

(1) 개관

한국 정부는 안보·경제복지·국위선양·조국통일을 외교정책의 기본목표로 삼고, 구체적인 상황변화에 따라 그 우선순위와 내용을 조정해 나갔다. 건국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국은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미약한 국력 때문에 주변정세나 국제질서에 영향을 주기보다는 이에 적응하는 형태로 외교정책을 수립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상황변화에 대한 장기적인 예측을 할 수 없었고, 외교적 선택이나 영향력의 범위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외교정책은 발전을 거듭하여 그 활동범위가 계속 확대되어 왔다.

(2) 50년대 반공안보외교

1950년대는 동서냉전체제와 세계정치질서의 양극화 현상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경우 6·25전쟁과 국토분단을 초래함으로써 반공국가의 건설과 안보가 주요 과제로 제기되었다. 특히 이데올로기가 강조되었던 냉전체제하에서 세계의 국가들은 자국의 국방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미국 또는 소련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에 한국의 안보외교정책도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한미공동방위조약(韓美共同防衛條約)이 그 주축이 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대(對)유엔외교도 강화되어 유엔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3) 60년대 경제건설외교

1960년대 한국의 국내정치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으로 격동기에 있었으나, 국제적으로는 냉전체제의 완화와 더불어 제3세계가 국제정치의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한국 정부는 경제발전을 국가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였다. 특히 경제건설이 수출과 국제협력을 바탕으로 추진됨에 따라 경제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한일회담의 타결과 수출진흥 및 차관도입을 위한 외교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중립국에 대한 외교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수출증대와 국위선양에 기여하였고, 안보면에서도 한미 간의 유대강화와 ASPAC의 창설 및 월남파병을 통하여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4) 70년대 평화통일외교

1970년대는 강대국 간의 데탕트 및 미국 세력의 상대적 약화와 함께 세계정치질서가 다원화되었고, 이념보다는 국가이익이 상대적으로 중시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이용한 북한의 전쟁도발 가능성이 증가되어 평화정착과 통일이 주요 과제로 제기되었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남북대화와 6·23평화통일외교정책 및 평화통일 3대원칙을 선언하는 등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해 나갔다.

(5) 80년대 선진북방외교

1980년대 제5공화국의 국정지표는 선진조국을 건설함으로써 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을 평화적·민주적으로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정부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정착해야 함은 물론, 한미안보체제의 유지·강화 및 주한미군의 주둔, 자주국방의 달성을 위하여 미국과의 협력을 유지하는 한편, 일본 등 기타 우방국들과의 협력관계도 강화해 나갔다. 또한 북한에 의한 전쟁발발의 억제와 남북한 간의 대화 및 교류 증진, 4강의 남북한 교차승인(交叉承認),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등과 관련하여 공산권 국가들과도 적극적인 외교적 접촉과 교류를 추진하였다.

제6공화국에 들어와서는 북방정책이 추진되고 북한에 대한 기존의 소모적 경쟁외교를 지양함에 따라 대북우위(對北優位) 확보에 중점을 둔 제5공화국의 정책기조에 변화가 이루어졌다. 1987년 민자당 총재 노태우의 7·7선언이 바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경제는 수출주도형이므로 정부는 지속적인 수출증대와 기술 및 자본투자의 증진을 통하여 대외진출을 확대하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 왔으며, 이러한 대상에는 공산권 진출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자원빈국(資源貧國)인 한국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하여 자원의 안정적 확보가 절실하기 때문에 자원보유국들에 대한 경제외교도 강화해 왔다.

(6) 90년대 외교방향

한국 제6공화국의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민주화 및 북방외교의 성공적 추진을 기초로 1990년대 한국 외교정책이 추구한 기본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포괄적 안보개념에 바탕을 둔 한미안보협력을 강화하면서도 북방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전방위(全方位)외교를 구현해 나가야 하며 둘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중간단계인 ‘남북연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제적 협력과 지지를 확보하는 등 평화통일외교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셋째, 지속적인 경제발전 및 번영을 위하여 경제통상·과학기술 등 선진국 지향의 실리외교를 강화하고 넷째, 태평양시대의 구현을 위하여 대아태지역협력(對亞太地域協力)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사회에서 국력에 상응하는 책임과 역할을 분담하고 각계각층의 국민이 동참하는 평화·문화 외교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이상과 같은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정부는 당면이익에 국한된 단기적 안목에서보다 중장기적 안목에서 종합평가하여 안보·통일·복지·국익(國益)의 4가지 외교목표가 상충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01년의 외교정책은 한반도 평화체제 기반구축을 위한 외교를 구현하며,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경제·통상 외교와 다자협력과 민주주의·인권을 신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또 문화외교를 펼침과 함께 재외국민의 권익 신장과 외교체제 개혁 및 정보화에 역점을 두었다.

7. 통일정책

(1) 제1공화국

한국은 1948년 초기부터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라는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그 해 8월 제헌국회는 결의문을 통해 북한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한국 국회에 공석으로 남아 있는 100석의 의석을 채우도록 촉구한 바 있다. 6·25전쟁 직후에는 통일문제를 미수복지역에 대한 수복의 개념으로 보고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정부는 제네바회담 이후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을 정책기조로 삼았다.

(2) 제2공화국

장면내각의 통일정책은 ‘대한민국 헌법절차에 의한 유엔감시하의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였다. 이승만정부의 통일정책을 그대로 지향하면서 북한 불승인원칙하에 2개의 한국을 부인하는 할슈타인원칙을 고수하였다. 당시 혁신계 정당들은 남북협상과 중립화 통일안을 제시하였으나,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부가 수립되어 반공을 국시로 내세움에 따라 그러한 혁신계 정당들의 제의는 일축되었고, 군사정부는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을 유일의 통일방안으로 재확인하였다.

(3) 제3공화국

박정희정부는 장면내각의 통일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선건설 후통일(先建設後統一)’이라는 원칙에 보다 역점을 두어 통일방안의 논의보다는 통일을 위한 역량을 배양하는 데 힘쓰는 ‘통일역량 배양정책’을 내세웠다. 즉, 북한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의 우위를 확보한 후에 한국의 제도를 북한에 확대해 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미·소의 데탕트가 진행되고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그 여파가 한반도에도 파급되어 한국 정부는 1960년대에 조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평화통일정책을 추구하였다. 요컨대 박정희정부는 가능한 문제 또는 비정치적인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면서 점진적으로 통일로 접근해 나가자는 것이다.

(4) 제4공화국

제 4공화국은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에 대한 외교정책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을 일원화시켰다. 이 선언을 통해 한국 정부는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에 반대하지 않으며,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와도 문호를 개방할 것을 천명하였다. 또한 정부는 1974년 8월 15일 평화정착, 문호개방과 신뢰회복, 통일성취라는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을 제시하였다. 결국 박정희정부의 통일정책의 이론적 근거는 단계적·점진적 접근방법에 기초한 기능주의적 통합이론과 안정형 분단 유지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독일모델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5) 제5공화국

제 5공화국은 1982년 1월 22일 한국이 추구하는 평화통일방식으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천명하고, 이를 북한이 수락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통일방안은 당시까지 한국 정부가 제시한 모든 통일정책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단계적 접근방법에 의한 구체성과 실현성에 중점을 둔 ‘선평화 후통일’의 기본원칙에 기초한 것이다. 즉, ‘잠정협정’을 통해 남북한 상호간에 신뢰를 회복하고, 민주통일에 이르는 단계에서 남북한 주민의 뜻을 대변하는 남북대표로 가칭 ‘민족통일협의회의’를 구성하여 그 기구에서 통일헌법을 기초하며, 그 통일헌법이 6천만 민족의 자유로운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면 그에 따라 민주적 총선거를 실시,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하여 ‘통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자는 것이다.

(6) 제6공화국

제 6공화국은 1989년 9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면서 “민족자결의 정신에 따라 자주적으로, 무력행사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민족대단결을 도모하여 민주적으로”라는 통일의 3원칙과 신뢰구축협력→남북연합→단일민족국가건설의 3단계로 통일을 실현시켜 나가겠다고 천명하였다. 통일의 과도기적 체제로서의‘남북연합’은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최고협의결정기구로서 ‘남북정상회담’을 두고, 남북한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남북각료회담’과 남북한 동수(同數)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남북평의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남북연합체제하의 각료회의와 평의회 일부를 지원하고 합의사항 이행 등 실무를 위해 공동사무서를 두며, 서울과 평양에 상주 연락대표를 파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통일방안은 남북연합의 발족을 계기로 민족공동체의 회복과 발전을 도모하는 여러 가지 공동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해 비무장지대의 적성지역을 ‘평화구역’으로 설정할 것을 제의하였다.

(7) 김영삼정부

김영삼 정부의 통일 정책은 1993년 7월 6일 화해·협력과 남북연합의 단계를 거쳐 1민족 1국가의 통일조국을 실현한다는 3단계 통일론을 제시하였으며, 정책기조로 ① 민주적 절차 존중(국민적 합의), ② 공존공익, ③ 민족복리의 3가지를 강조하였다. 3단계 통일론은 첫째, 남북한이 냉전구조의 산물인 적대와 불신관계를 청산하고 신뢰를 회복해 나가면서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발전하는 단계이며 둘째, 남북한의 관계개선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고 정례화되면서 제도화된 남북기구들이 나타나는 남북연합의 단계이고 셋째, 남북평의회에서 제정한 통일헌법을 바탕으로 1민족·1국가·1체제·1정부의 형태로 통일을 이루는 통일국가단계이다. 한편 김영삼정부는 김일성 사망 등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에 맞추어 종합적 통일 청사진으로서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을 천명하였다. 이 통일방안은 약칭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또는 ‘공동체 통일방안’이라고도 한다. 이 통일방안의 기본철학은 자유와 민주를 핵심으로 하고, 1체제·1정부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통일과정에서는 ‘국가통일’보다는 ‘민족통일’을 우선시하고, 특히‘7천만 한민족공동체 통일’과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강조하였다.

(8) 김대중정부

한반도의 평화, 이것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4대 강국간에 가장 중요한 공통적인 과제로 제기되고 있고, 역으로 말하면 한반도 상황이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것이며, 이는 한반도의 평화가 곧 동북아의 안정과 번영에 직결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명백히 말하면, 화해협력의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는 지금도 반세기에 걸친 대결과 반목, 그리고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1999년 6월 22일, 동해에서 발생했던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은 남북관계가 여전히 심각한 대결관계를 지속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몇 년 동안 경제난, 식량난 등으로 북한체제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있는데 이 역시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정부는 통일 문제의 국제화를 방지하면서, 통일문제만은 민족 내부문제로 처리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되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은 또한 남북 당사자 원칙과 "자주, 평화, 민주"의 통일 3원칙에 입각하여, 점진적, 단계적으로 실현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반세기에 걸친 적대와 반목으로 상호 불신과 이질화가 심화된 상황에서, 남북간 합의에 의하지 않는, 일방적이고 급진적인 통일은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과 혼란을 가져다 줄 것이 명백하므로, 이러한 방식의 통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정부가 "실사구시"적 차원에서, 남북간 대결구도를 화해협력 구도로 전환하는데 주력하기로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대북정책의 목표를 [평화, 화해, 협력의 실현을 통한 남북관계의 개선]으로 정했다. 이를 위해 세가지 원칙을 설정했다.

첫째, 남북간에 평화를 파괴하는 일체의 무력도발을 허용하지 않고 둘째로, 북한을 흡수통일 한다, 안한다 이런 얘기는 고사하고, 흡수통일 자체를 배제한다. 셋째로, 이 두 전제하에서 남북간에 공존하면서, 화해ㆍ협력의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간다는 것을 대북정책의 세가지 원칙으로 설정한 것이다. 즉, 북한에게 변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접촉과 대화, 그리고 협력을 통해 북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고 보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이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였고 이후 남과 북은 이를 토대로 대화와 협상을 통해 남북간 실질적 협력관계를 증진시켜 나가고 있다. 또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실현한데 이어 이산가족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토대 마련에 노력하고 있다. 《2001년 통일백서》에서 김대중 정부는 다양한 남북대화를 진행하고 남북교류협력을 활성화하며, 남북간 인도적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로 하였다. 또 대북 경수로사업을 지속하고 통일정책에 대한 국민 합의기반 조성에 노력하기로 하였다.

8. 군사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가 창설되면서 사관학교가 개교하게 되어 병사들을 모집함으로써 통일된 조직을 갖춘 군사기구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三相會議)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안의 집행과 문제점을 토의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미국이 단독으로 남한지역에 정식 국방군을 조직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으므로 국방경비대는 그 출발부터 정규군으로서가 아니라 국내의 치안질서 유지와 주요 시설의 경계 등을 주임무로 하는 기존경찰의 보조예비대라는 성격을 띠고 창설되었다. 이처럼 국방경비대는 독립국가의 정식 군대가 아닌 관계로 군대의 장비를 제대로 지급받을 수도 없었고, 게다가 일본식 군대에서 미국식 군대로 갑자기 바뀌면서 혼란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남한 1개도에 1개 연대를 각각 둔다는 계획 아래 확장을 계속하여 1947년 12월 1일 제1·제2·제3여단이, 1948년 4월 29일 제4·제5여단이 창설되었다.

정부 수립 당시 육군의 규모는 5개 여단 예하 15개 연대, 병력 5만 명에 이르렀다. 1949년 5월 12일 국방기구를 간소화하고 모든 자원과 역량을 부대의 증강에 투입하기 위한 조치로서 육군의 각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켰다. 그 결과 육군은 제1·제2·제3·제5·제6·제7·제8사단을 보유하게 되었고,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어 6·25전쟁 당시에는 8개 사단이 있었다. 이후 3년 간의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군은 풍부한 실전경험과 화력증강으로 전투력이 향상되었으며, 연속해서 생기는 훈련소에서 공급되는 인원으로 인해 작전부대의 재편성과 증설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1950년 11월경에는 한국군의 규모가 10개 사단으로, 1952년 11월에는 12개 사단으로, 1953년 2월에는 14개 사단으로 확장되었다.

교착된 전선에서의 전투손실은 크게 감소한 반면, 신병은 매주 7,200명 정도로 계속 보충되어 1953년 4월에는 한국군의 실병력이 미국의 허가선인 46만 명 선을 돌파하였다. 이에 유엔군 총사령관은 한국군의 인가병력을 65만 5,000명으로 증가시키고, 20개 사단을 한국군 건설의 최종목표로 삼는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에 따라 육군본부는 그해 4월 21일 양양에 제22사단과 제25사단을, 6월 18일 논산 제2훈련소에 제26사단을, 광주에 제27사단을 창설하여 총 18개 사단을 보유하게 되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한미간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그 편성이 지연되어 휴전 이후에 이루어졌다. 한국군의 건군과정은 휴전에 즈음하여 현대적인 군사기구를 완성함으로써 일단락되었고, 이후 한국군 고유의 군사전통과의 조화를 모색해 나가는 가운데 군사적 근대화와 국방체제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1999년 말 현재 한국의 병력은 총 69만여 명으로, 육군 약 56만 명, 해군 약 6만 7000명, 공군 약 6만 3000명이다.

9. 안전보장

국가안전보장은 외국의 침략이나 국내 반정부집단의 체제파괴(體制破壞) 또는 반란에 대해 국가가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모든 조치를 강구함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안전보장은 분단국인 한국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의 안보는 분단국가적 상황과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강대국들의 이해대립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보의 위협이 이중으로 가중되는 군비경쟁구조(軍備競爭構造)를 형성하여 경제발전과 사회안정 및 외교신장 등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 분단국으로서의 한국의 안전보장에 대한 위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① 한 민족이 같은 생활방식하에서 살다가 인위적으로 분열되었을 때는 통일지향성(統一指向性)을 강하게 나타내는데, 이 경우 분단된 각 개체는 통일을 자기 나름의 이념이나 체제를 중심으로 이루려 하기 때문에 분단국은 원천적으로 격렬한 충돌이나 경합의 소지를 지니게 된다. 더구나 남북한은 6·25전쟁까지 경험함으로써 적대감과 불신감이 더욱 심화되어 왔다.

②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한반도는 북한을 지원하는 중국이나 러시아와 육속(陸續)되어 있고 한국을 지원하는 미국이나 일본과는 해양으로 떨어져 있는데다가 한국 인구의 24% 와 정치·경제·군사 등의 모든 분야가 집중되어 있는 수도권이 휴전선에 너무 근접해 있어서 북한의 전격전(電擊戰)에 취약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세계정치의 탈냉전화(脫冷戰化)와 동북아 지역질서의 재편, 남북한의 유화정책(宥和政策) 독일의 통일 등으로 안전보장에 대한 위협이나 안보상황이 달라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 대상과 내용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의 냉전체제하에서는 북한의 적화통일과 군사도발만을 위협의 대상으로 삼고 안보문제를 군사적 측면이나 정치이념적 차원에서만 다루었으나, 최근에는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국가능력이 강조됨에 따라 군사능력뿐만 아니라 경제·과학·사회·문화 등 전 영역에서의 국력의 강화가 안보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한·미연합전략과 미국정보통신체계에 주로 의존해오던 기존의 대미(對美)군사관계의 편중에서 점차 탈피하여 자주국방체제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안보문제에 대한 전통적 개념이 약화되고 그 의미가 확대되면서 지금까지 안보정책의 독점적 주체였던 정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즉, 새로운 안보상황에 대응하여 국가전체가 동원할 수 있는 총체적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독점적 지위를 낮추고 국민적 자발성과 안보문제에 대한 포괄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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