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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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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한민국5-국제관계 (한메)
대한민국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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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

[국제관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안보·경제복지·국위선양·조국통일은 한국 외교의 기본목표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목표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상충되는 면이 없지 않아 한국의 외교정책은 그 내용에서 커다란 변천을 거듭해 왔다.

특히 국력의 미약함과 지정학적 위치, 국제질서 등에 의해 한국은 외부상황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국제질서에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대체로 이에 적응하고 반응하는 외교정책이 형성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은 외교에 있어서 자주외교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활동범위의 폭도 계속 확대·심화되고 있다. 그것은 대서방(對西方) 외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갖는 대미·대일 외교정책에서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도 잘 나타나는데, 이는 최근 들어 급속히 고양된 한국의 국제적 지위 상승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제3세계국가들과도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전후한 활발한 외교노력의 전개로 눈에 띄게 그 간격이 좁혀져 있는 상태이고, 1980년대말부터 추진한 북방정책은 중국·옛 소련 및 동유럽 제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를 바탕으로 1990년대 초반 미국·중국·일본·러시아의 4강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본격적인 외교시대를 열었고 앞으로의 다각적·다목적적 외교정책 수행은 탈냉전의 국제관계 속에서 한반도 평화와 안정 및 국제적 입지를 확고히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정책변천>

제1공화국 수립과 동시에 대한민국이 한국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북한의 불법성을 인식시키기위한 외교정책을 안보적 차원에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즉 한국은 1948년 9월 1일 조병옥(趙炳玉)을 단장으로 하는 대통령특사를 미국·영국·프랑스 등을 비롯한 17개 자유 우방국가에 순방시켜 대한민국정부 승인을 요청하도록 하는 한편, 같은 해 9월 9일에는 유엔총회에 장면(張勉)을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여 각국 대표와 접촉, 대한민국정부 승인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12월 12일 제3차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였고, 이에 뒤따라 1949년 1월 1일 미국이, 1월 4일 중화민국이, 1월 18일 영국이, 2월 5일 프랑스가, 3월 3일 필리핀이, 그리고 8월 15일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각각 대한민국을 승인하였다.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은 계속되어 1949년 말까지 대한민국을 승인한 나라의 수는 30개국에 가까웠다. 이에 비하여 북한을 승인한 나라는 공산권에 국한되었다.

국제사회에서의 승인을 넓혀 가면서, 제1공화국은 그 초기에 태평양동맹체의 발족을 추진하였다. 중화민국 및 필리핀과 손을 잡고 반공의 성격을 가지는 지역공동체를 출범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냉담한 반응으로 좌절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면서 대한민국은 미국과 유엔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미국의 주도하에 열린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5일 공산침략행위 정지요청에 관한 결의안을, 6월 27일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제공 결의안을 각각 채택하였다.

한편 트루먼대통령은 미 (美) 제7함대(第七艦隊)에 의한 타이완해협봉쇄와 한국내의 군사작전개입을 명령하였다. 곧 이어 7월 7일 유엔총회는 유엔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유엔군과의 효과적인 작전수행을 위하여 1950년 7월 15일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한국에서 전투행위가 종식될 때까지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렇게 하여 유엔군이 개입하자 중공군이 북한을 도와 참전함으로써 전쟁이 장기화하게 되었다. 3년간의 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매듭지어진 뒤 한국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1954년 제네바에서 열렸다. 남북한이 함께 참석한 이 회담에서 대한민국 대표단은 14개 항목의 제의를 하였는데, 그 핵심적 내용은 대한민국 주권 아래 남북한을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네바회담은 자유진영의 입장과 공산진영의 입장이 대립되어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6·25와 제네바회담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친미·친서방·친유엔외교는 더욱 강화되었다. 반면에 공산권에 대해서는 물론 중립국가들에 대해서조차 반공적 입장에서 철저히 반대하는 노선을 걸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한국외교정책은 반공이 그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외교적인 면에 있어서 ① 공산국 일반에 대한 적대주의에 유래하는 외교통로 및 기타 교류의 단절 ② 좌경중립국에 대한 비우호국 규정 ③ <할슈타인원칙>의 견지 ④ 북한접촉·교역의 비우호시(非友好視) ⑤ 2개 한국론에 대한 철저한 배격 ⑥ 우방이 대한정책(對韓政策)에서 반공을 무시하는 경우, 그것에 대한 비우호시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공외교정책은 냉전절정기의 미·소 대립과 동시에 자유·공산 양진영에 있어서의 미·소 양국의 확고한 지도력이라는 국제환경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외교환경에 따라서 공산진영은 한국의 가상적(假想敵)으로 취급되었다.

1960년 4·19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수립되자, 정부는 제1공화국의 반공외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려고 하였다. 즉 정부는 냉전적 논리를 수정하고, 외교정책을 유연하고 다원적 정책방향으로 몰고 나가려고 하였으며,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제1공화국의 <북진통일론>이 아닌 평화적 수단에 의한 통일정책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경제건설을 지향하기 위해 경제외교에도 주력하였고, 중립국과의 외교문제를 확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노선은 한계에 부딪쳤다. 왜냐하면 1950년대 후반 이후 독립을 얻어 유엔에 가입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들은 반서방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친미적 대한민국의 외교노선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중립국들은 1961년 봄 제15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대표단을 초청하던 종래의 결정에 반대하여 남북한 대표를 동시에 초청할 것을 제의하였다. 미국은 북한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인정한다면 남북한 동시 초청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웠고, 그리하여 이 수정안은 통과되었다.

1961년 5·16으로 집권한 군정은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국가들은 물론 중립국가들, 이른바 제3세계에 외교적으로 접근해 갔다. 이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를 나타내어 대한민국의 외교관계는 넓어져갔다. 군정을 계승한 제3공화국은 우선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하여, 국내에서의 많은 반발을 무릅쓰고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관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뒤 제3공화국은 베트남전쟁에 개입하여 1965년부터 1973년 사이에 국군을 보내어 전투에 참가시켰다. 베트남파병은 한·미간의 유대를 크게 강화하였으나 친공적 중립국가들로부터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제3공화국은 이어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의 창설에 성공하였다. 1966년 6월 일본과 필리핀을 비롯한 8개국 각료들과 서울회의를 열고 이 지역 최초의 지역협력기구를 발족시킨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 이 기구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1969년 미국에 닉슨행정부가 들어서고, 베트남으로부터의 미군철수와 한국에서의 미군감축을 골자로 하는 <닉슨독트린>을 채택한 뒤 한·미관계는 긴장상태에 있었다. 특히, 미국이 공산권과의 긴장완화를 추구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하여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권고한 것은 한국정부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곧 국제질서의 변화를 받아들여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하여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할 수 있었다. 남북공동성명의 발표는 국제사회에 대하여 한반도에 2개의 <국가> 또는 <정부>가 실존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리하여 이제까지 북한을 승인하지 않던 서방국가들 중의 일부에서 북한을 승인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대한민국이 건국 초부터 지켜온 이른바 할슈타인원칙, 즉 <대한민국은 북한을 승인하는 나라와 단교한다>는 원칙은 위협받게 되었다. 여기에서 제4공화국은 1973년 6월 23일 <외교에 관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사실상 할슈타인원칙을 버렸고 공산권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정책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소련 및 동유럽과의 관계가 조금씩 좋아진 반면에, 제4공화국은 1976년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이와 같이 1970년대는 세계정치질서의 다원화 추세의 심화와 더불어 강대국간의 긴장완화 및 미국 세력의 상대적 약화라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념보다는 국가이익이 상대적으로 중시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에 대하여 한국도 지난 10년 동안의 지속적 경제성장에 의한 국력의 신장을 배경으로 국제적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다각적인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80년 제5공화국의 수립 이후 한·미관계와 한·일관계는 정부 대 정부의 차원에서 1970년대 후반의 <불편>을 씻고 다시 가까워졌다. 이 시기의 두드러진 현상은 공산권과의 관계개선이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는 비정부(非政府)의 차원에서 크게 좋아졌다. 소련과의 관계는 1983년 소련 공군의 대한항공기격추사건이 빚었던 긴장에도 불구하고 개선의 잠재성이 점차 현재화의 전향성을 보였다.

1980년대말과 1990년에 들어와 소련과 동유럽에 밀어닥친 급격한 개방화의 물결로 인하여 동구권에 변화가 일어나자 한국정부는 북방외교를 활발히 전개하게 되었다.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변영을 위한 7·7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하여 대공산권 외교의 폭을 넓히는 조처를 취했으며, 그 뒤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와 외교관계 및 무역관계를 수립하였다.

또한 1990년 9월 30일 소련과, 92년 8월 중국과 수교를 맺는 등 북방 외교의 영역을 넓혀갔다. 한편 1993년 11월에는 캐나다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각료회의(APEC) 정상회담에 김영삼대통령이 참석, 본격적인 다자간 정상외교의 길을 열었다.

이렇듯 한국외교의 주체와 경로가 다각화되어 외교 상대국의 대사관이나 외무부라는 공식경로가 아닌 행정부·의회·언론계·학계 등 각계각층을 통해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그에 따라 한국의 상대국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근래 한국외교의 특징은 수직외교에서 수평외교로, 일방적인 의존관계에서 상호의존관계로 그 형태와 내용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1994년 1월 현재 한국의 수교국은 174개국에 이른다.

<한·미관계>

국가 안전보장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최우선시되는 국가의 목표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한국은 정부 수립 이래 북한으로부터의 침략위협에 직면하여 왔기 때문에 한국의 안전보장은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되어왔으며, 이를 위하여 대미정책(對美政策)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1947년 9월에 발표된 <웨드마이어조사단 보고>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북한의 군사적 도발 가능성이 크게 고조되고 있는데 반하여 한국의 군사능력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하여, 주한미군의 철수계획을 연기하도록 하는 것이 대미관계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물론 한국은 유엔 임시 한국위원단으로 하여금 남북한간에 평화교섭이 달성될 때까지 주한미군의 철수를 연기하도록 요구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총회에 제출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미국으로 하여금 이것을 실천하게 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50년 1월 26일 <대한민국정부와 미합중국정부간의 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여 미국의 대한국(對韓國) 군사원조제공을 약속받았으나 그것이 집행되기 전에 북한의 남침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한국은 미국에 긴급 무기원조를 요청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긴급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여 미국과 유엔의 적극적 지원을 받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한국은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위한 회담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8월 8일 이 조약을 가조인(假調印)하였으며 10월 1일 변영태(卞榮泰) 외무부장관이 미국을 방문하여 정식조인하였다. 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1월 17일부터 발효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안전보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맹관계의 법적장치가 마련되었으며, 한국의 안보를 위한 외교정책의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조인과 더불어 제기된 문제는 유엔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주한미군이 한국의 안보를 위하여 계속 주둔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한국안보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범위내에서 진행하는 한편, 국군의 전력증강을 위한 미국의 군대획득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6·25에 참전했던 주한미지상군 8개 사단 가운데 6개 사단이 1954년 8월 말까지 철수하였으며, 1954년 11월 17일 <경제 및 군사원조에 관한 한·미간의 합의의사록(合意議事錄)>에 합의하여 1955년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원조로써 7억 달러가 제공되었다.

한국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4·19 및 5·16 등 정치적 변혁을 맞이하였다. 제2공화국은 약체성의 노정으로 1961년 5·16을 가져왔으며 결국 군정으로 대체되었다. 군정은 전통적인 한·미안보 협력관계에 유의하고 1961년 11월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의 케네디대통령과 회담하였다.

박정희 의장은 이 회담에서 한국의 입장과 정책방향을 명백히 밝히는 한편, 태평양지역에서의 공산권에 대한 상호방위체제의강화에 상호 노력할 것을 재확인하면서 한국의 국력강화를 위한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의 계속적인 제공에 합의하였다.

군정을 계승한 제3공화국의 박정희대통령은 1965년 5월과 1968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의 존슨대통령의 초청으로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양국간의 전통적 우의와 미국의 계속적인 군사원조를 재확인하는 등 양국간의 안보협력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또한 존슨대통령을 1966년 11월에 초청, 방한하게 하고 1969년 8월에는 닉슨대통령을 초청하는 등 양국 원수간의 긴밀한 상호방문을 통하여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놓았다. 1960년대 말에 있어서 한국의 안보를 위한 대미정책에서 중요한 과제는 주한미군의 철수문제와 군사원조의 성격변화 및 그에 따른 군대감축 경향에 대한 대책이었다.

이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미국의 정책 변화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1969년 7월 26일 닉슨은 괌도에서 <닉슨독트린>으로 표현되는 기본노선을 밝혔다.

주요 내용을 보면 첫째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계속 아시아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둘째 중국·북한·북베트남의 힘을 인정하며, 셋째 아시아에 있어서 핵전쟁을 제외한 군사적 위협은 아시아 스스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아시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미국의 정책원리를 명백하게 밝힌 것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어떠한 방향으로 전환될 것인가 하는 것은 1970년 1월말 1970회계년도 대외원조액을 18억 달러로 낮게 책정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대외정책 성격의 변화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무상원조의 감소 내지 중지, 군사원조 및 주한미군의 감축경향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대미정책의 중요한 과제는 무엇보다도 한·미 상호방위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자주국방능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국군의 증강과 장비현대화 및 장비 자주생산을 위한 군원(軍援)의 획득이었다. 한국은 1968년 1·21사태와 1월 23일 미해군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밴스대통령특사가 1968년 2월 방한하였을 때 향토예비군 창설의 필요성과 아울러 한·미 상호방위체제의 보강을 위하여 양국 국방장관 사이의 연례안보회의를 제도화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1968년 4월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한국의 안전보장의 필요성은 한국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지역 안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것에 합의하였으며 또한 국군의 계속적인 현대화의 필요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이 현대화계획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에 합의하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제정세의 변화와 <닉슨독트린>이 구체적으로 현실화함으로써 주한 미지상군 2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인 제7사단 철수문제가 제기되어 한국은 전쟁을 억제시키기 위한 힘의 보강을 위해 대미교섭을 수 차례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국내의 일부세력은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가 한국의 군사균형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주장은 카터대통령의 취임과 더불어 미국의 대외정책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주한 미지상군이 대북억제력(對北抑制力)의 일부로서 역할을 해온 사실에 비추어 철수정책의 수정을 요구하는 한편, 충분한 보완장치가 철군에 선행하여 실시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대미교섭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결과 미국은 철군의 동결(凍結)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한·미 앙국간의 관계는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는 10·26이 발생하여 국내적 혼란을 야기하였고, 1980년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5공화국은 그 탄생에서부터 정통성 시비를 비롯하여 10·26, 12·12 및 광주민주화항쟁으로 인하여 한·미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러나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1981년 2월 3일 미국의 레이건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개최하였고, 그 결과 한·미간에 안보·경제·통상·문화면에서의 협력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1983년 레이건대통령이 방한하여 15개 항목으로 된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한국의 안보상황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또한 양국은 앞으로의 과학기술협력계획을 추진하는 데 합의를 보았다.

제5공화국은 한·미간의 정상급외교를 전개하여 정치·경제·안보 및 과학기술 등 다방면에서 새로운 관계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약소국과 강대국 사이에 내재하는 본질적 제약과 불평등, 일방적 의존성 등의 문제들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제6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한·미관계는,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의 성공적 개최와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원협력으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북방정책이 진전되어 소련과 시베리아 합작개발 등에 합의하자 미국은 이것에 주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북방정책 추진으로 인한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미관계의 기조는 긴밀한 안보협력과 유대강화임이 여러 차례 공식회담에서 확인되었다.

1991년에는 남북관계 변화를 유도하는데 어느 때보다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부시대통령이 단거리핵무기 포기선언을 함에 따라 노태우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합의를 가능하게 하였고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통해 한·미 관계가 재조정되었다.

1992년 양국은 대통령선거를 통해 새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재확인하였으며, 동북아정세 안정을 위해 노력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또한 한반도 평화와 안정구축을 위한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응방안을 협의해 나간다는 데도 인식을 같이하였다.

<한·일관계>

한국의 일본에 대한 정책은 크게 2단계로 나뉘는데, 제1단계는 대한민국정부의 수립과 일본의 주권회복을 계기로 양국간의 여러 문제를 해소하여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제2단계는 국교 정상화의 바탕 위에서 주권의 상호존중과 선린우호의 원칙을 통하여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킴으로써 지역의 안전과 평화유지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전후 한국이 일본과 교섭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51년 10월부터이다. 1949년 중국대륙에서는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가 붕괴되고 이를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하였으며, 1950년에는 한반도에서 6·25가 일어났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 세력의 급속한 팽창은 미국의 대일정책에 수정을 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의 재무장이 요구되었다.

한편 일본점령미군정청(GHQ) 외무국장 시이볼트의 주선으로 1951년 10월 20일부터 한·일간에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약 40일간 지속된 예비회담에서 재일한국인의 국적문제와 선박문제를 의제로 하였으나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다만 1952년 2월중에 회의를 개최할 것과 본회의의 의제를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및 처우문제, 선박반환문제, 청구권문제, 어업문제 그리고 기본관계문제로 할 것에 합의하였다.

본회담이 1952년 2월 15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제1차 한·일회담이었다. 예비회담에서 합의된 5개의 의제를 상정, 토의하였으나 각 의제에 관한 양국입장에 현저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난항을 면하지 못하였다. 특히 청구권문제와 관계가 있는 군정법령 33호의 해석에 있어서 견해 차이가 많았으며, 일본이 재한(在韓) 일본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하였으므로 회담은 같은 해 4월 21일 결렬되었다.

그 뒤 1년 후인 1953년 4월 15일 제2차 한·일회담이 다시 개최되었으나 여전히 견해 차이의 폭은 줄어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6차에 걸친 회담을 통해서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던 한·일회담은 높은 차원에서의 정치적 타결을 필요로 하였다.

즉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방미 도중 일본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총리와 회담하여, 한·일회담에 관하여 조속한 시일내에 각 현안에 대한 원만한 타결을 보고 양국간의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62년 10월 20일과 11월 12일 2차례에 걸쳐 김종필(金鍾泌) 전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외무장관의 회담이 개최되어 정치적인 절충이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 난제의 하나였던 청구권문제가 타결되었다.

즉, 일본이 무상으로 3억 달러를 10년 동안 지불하는 동시에 정부차관으로 2억 달러를 연리 3.5%, 20년 상환, 7년 거치(据置)의 조건으로 10년간 제공하고 또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1965년 2월 20일에는 이동원(李東元) 외무부장관의 공식초청을 받은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郎〕 일본외무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한·일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 가조인되었다. 그리고 1965년 4월 3일에는 이동원 외무부장관의 공식방일을 계기로 어업문제, 청구권문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문제가 타결되었다.

같은 해 6월 22일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 도쿄〔東京〕에서 정식 조인됨으로써 14년간에 걸친 장기간의 교섭에 종지부를 찍고 한·일국교 정상화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일회담의 협상이 있기까지 국내에서는 야당과 국민 각계 각층의 반발이 극심했으며, 특히 1965년 4월 3일 한·일조약이 가조인되자 가조인반대, 굴욕외교 청산 등을 골자로 하는 시위가 범사회적으로 확산되어 정권의 위기로까지 연결되어 박정희정권은 6·3비상계엄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일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한·일관계는 제2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 단계에 있어서 한국의 대일정책은 안보협력과 경제협력의 강화였다. 한·일 안보협력관계의 강화는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인 것으로 한·미 상호방위체제, 미·일 안보체제 및 한·일국교 정상화에 의한 3각관계의 형성이었다.

국교정상화 이후 1966년 2월부터 대일청구권구매사절단이 일본에 상주하기 시작하였고, 1966년 5월 16일 한국측의 장기영(張基榮)부총리와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총리를 각각 단장으로 하는 제1차 한·일경제각료간담회가 개최되어 상업차관, 대일청구권자금 사용문제 등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졌고, 1965년부터는 한·일 무역회담, 1967년부터는 한·일 각료회담이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양국간의 중요한 정치문제를 비롯하여 통상문제·자본협력문제·기술협력문제 등 광범위하게 경제협력이 논의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의 대일정책에 있어서 경제협력관계의 강화는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나, 무역역조의 심화는 한국의 대일경제 협력면에 있어서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간의 관계는 1973년의 김대중(金大中)사건과 74년의 8·15박정희 대통령저격사건으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양국관계의 미묘성에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데, 한·일기본조약에서 합의한 한반도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유일합법성에 대한 일본의 해석이다.

즉 일본은 유엔결의 195호의 전제하에서의 유일합법성을 인정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면 일본이 북한과의 무역을 중지하고 두 개의 한국관을 지양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른바 경제분리의 원칙 아래 이미 1960년 이케다 하야토내각 때부터 공산국가와 통상관계를 맺어가면서 실리적 외교를 추구했으며 북한과의 접촉도 이러한 일환에서 유지하고 있다.

국교정상화 이래 국가원수가 일본을 정식 방문하여 상호이익과 한반도문제를 토의한 것은 1984년 9월 전두환대통령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의 방일은 국내에서 찬반 양론이 거세게 일어나는 가운데 이루어졌는데, 이 회담에서 양국은 상호존중·평등·상호이익을 기반으로 하는 동반자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일본에 대한 무역적자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으며, 1989년 한·일관계는 재일한국인 후손의 법적지위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대두되면서 많은 갈등을 야기시켰다. 1990년 5월 노태우대통령은 일본을 공식방문하고 재일한국인 3세의 법적지위개선을 1·2세까지 확대적용, 재한원폭피해자 치료요양기금지원, 일·북한 관계개선 추진시 사전협의 등에 합의하였다.

1991년 한·일관계는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자는 노력으로 일관되었는데 1월에 가진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관계의 기반이 될 한일우호협력 3원칙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민간차원에서의 과거배상 움직임은 계속 이어져 정신대문제가 한·일관계의 가장 첨예한 현안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북한 관계개선이나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루었으나 남북한 UN동시가입을 계기로 일본이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겠다는 방침을 발표, 한국의 강력한 항의로 취소되었다.

1992년에는 국교정상화 이후 최초로 한·일간 무역역조가 구조적 차원의 문제임을 인정하고 그 시정을 위해 공동노력하기로 합의하였다. 과거사문제는 1993년 김영삼정부가 더 이상의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기로 선언함에 따라 매듭지어졌다.

<제3세계와의 관계>

제3세계의 변화로 인하여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국제관계에 있어서 한국은 제3세계에 대한 정책을 현실적으로 국가이익에 부합되게 변화시켜 왔다. 한국의 제3세계외교정책은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자유당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의 기간이다. 이 단계에 있어서의 한국의 외교적 입장은 일반적인 국가이익을 제외한다면, 첫째 적극적 반공, 둘째 한·미 우호관계의 우선, 셋째 대북한 방위정책에 관계되는 외교정책, 넷째 유엔남북통일결의안을 지지한다는 입장에서의 외교정책 등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제1공화국의 제3세계국가에 대한 정책은 좌경시된 중립국들에 대한 경원정책(敬遠政策)과 한국에 불리한 태도를 취하는 중립국들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유엔남북통일결의안>을 지지하는 입장에서의 외교정책을 위한 대중립국 외교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2단계는 제2공화국이 수립된 60년의 민주당 정권시대이다. 민주당정부는 자유당정부의 중립국에 대한 경원정책을 지양하고 제3세계의 세력증대라는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중립국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제2단계에 있어서 제2공화국은 단명하였기 때문에 제3세계로의 진출을 구체화하지 못하였다.

제3단계인 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제3세계 외교정책은 새로운 장을 열기 시작하였다. 동서(東西)의 일원적 구조가 붕괴됨에 따라 미·소 냉전이라는 기본환경의 변화에 의한 외교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 한국은 지난날의 냉전외교를 지양하고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으며, 제3세계 여러 나라와의 정치·경제·문화적 측면에서의 유대강화를 위하여 박차를 가하였다.

국위선양과 국제적지위향상을 대외정책으로 내세운 군정은 유엔총회에서의 한국측 결의안 지지표의 획득과 아울러 신생국가들과의 국교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1961년 7∼9월에 걸쳐 친선사절단 5개반을 편성하여 각 지역에 파견하였다. 이들 사절단은 30여 개의 비동맹중립국들에 접근하여 한국에 대한 이해증진을 도모함으로써 한국외교망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61년 유엔총회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서 아프리카 신생국 13개국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문외교는 1962년에도 계속되어 친선사절단 3개반이 편성되어 아프리카·중남미 및 중근동(中近東) 여러 국가에 파견되었으며 이와 아울러 동남아시아 문화사절단·동남아시아 통상사절단·중남미 경제조사단·아프리카 통상사절단 등을 파견하여 경제외교도 전개하였다. 1963년 수립된 제3공화국도 제3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을 추진하였다.

특히 제3공화국은 유엔에 있어서의 한국문제토의에 대비하여 비동맹 중립국의 지지를 획득한다는 종래의 정책으로부터 국가이익을 최대한으로 추구한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북한은 1964년 1월 프랑스의 중국승인 등 새로운 사태발전으로 비동맹 중립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증대에 편승하여 중근동과 아프리카의 비동맹 중립국에 진출하였다.

이에 한국은 한반도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유일한 합법성 견지라는 외교정책기반에 실제적인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비동맹중립국에 대하여, 첫째 비동맹국들과의 외교관계수립에 있어 과거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비동맹중립국의 승인, 외교망의 확장, 친선사절단의 파견, 초청외교의 강화 등을 통한 보다 능동적이고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고, 둘째 비동맹 중립국과의 통상관계를 촉진함으로써 실질적 이해관계를 확대시키며, 셋째 문화교류를 통한 상호이해의 촉진, 의사·농업기술자의 파견, 장학생의 초청 등 기술협력을 도모한다는 대책을 세워 추진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비동맹국정책 아래 1965∼69년 한국은 비동맹중립국에 특사·대사·장관 등을 연차별로 파견하여, 그 파견국이 1965년에 15개국, 1966년에 10개국, 1967년에 22개국, 1968년에 37개국, 1969년에 10개국에 달하였다. 그러나 제3단계인 1960년대에 있어서의 제3세계정책은 할슈타인원칙이 적용되고 있었으며, 당시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어떤 국가가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경우, 할슈타인원칙을 적용하여 그 국가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던 것이다. 1964년 12월 10일 모리타니와의 외교단절이나 1965년 5월 11일 콩고와의 국교단절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제4단계의 70년대에 있어서도 한국은 비동맹중립국에 대하여 적극적 진출을 꾀했으며 그 결과 괄목할 단한 성과를 을렸다. 이 단계에 있어서 한국은 73년의 6·3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을 계기로 북한과 수교한 국가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이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즉 1960년대의 할슈타인원칙의 적용을 1970년대에는 지양하였으며, 정치 위주에서 경제 위주의 정책으로 전환을 꾀하였다. 1978년 현재 비동맹국에 대한 한국 상주공관(常駐公館) 설치현황은 중동·아프리카지역에 상주대사관 24개, 통상대표부 2개, 총영사관 2개와 동남아시아지역에 상주대사관 7개 및 중남미지역에 4개가 각각 설치되었다.

제5공화국의 출범과 더불어 제3세계 국가와의 관계강화가 외교정책의 목표가 되었다. 1982년 전두환대통령의 아프리카순방외교는 바로 비동맹외교를 강화하고, 개발도상국에서 한국의 지지기반 확보와 그들과의 협력관계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공산권관계>

1960년대 말까지 양극화된 국제정치하에서 제3공화국의 외교정책은 철저하게 냉전논리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 즉, 한국은 정부 수립 이래 국가이익과 관계없이 공산국가와는 외교를 전개하지 않는 반공외교를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부는 1970년대에 이르러 데탕트물결에 편승하여 국제사회에서 국가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려는 실리외교로 전환하였으며, 외교목표를 공산권과의 교류에 두었다. 박정희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비적대공산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용의가 있음을 처음으로 공식 표명하였다.

정부는 공산권과의 교역을 시도하기 위하여 1971년 9월 시장조사를 위해 대한무역진흥공사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한국의 민간경제인단을 유고슬라비아에 파견하였고, 이어 73년 7월 유고슬라비아와의 직접교역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하여 무역협회 부사장 외 11명의 통상사절단으로 하여금 다시 방문하게 하였다.

또한 동유럽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교역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① 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등 동유럽공산권국가에 대한 GATT 35조의 원용철회(援用撤回) ② 일부 비적성공산국가들과 외교·적십자·문화부문의 우편수발(受發) 허용 ③ 대공산권교역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무역거래법 개정 ④ 한국선박의 비적성공산국 기항(寄港) 허용 및 비적성공산국선박의 한국 기항 허용 ⑤ 공산권상사의 입찰참여 허용 ⑥ 베트남·북한을 제외한 모든 공산국가와의 국제우편 교환 허용 등 국내법상 조치를 취하였다.

그 후 1987년 한국은 헝가리와 경제협력을 위한 업무협조협정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한국무역진흥공사는 12월 15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하였으며, 헝가리도 1988년 3월 공산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서울에 무역사무소를 설치하였다. 1988년 8월 26일 한국과 헝가리 정부는 상주대표부 설치협정에 서명하고 9월 13일 정부간 공식관계를 수립하였다.

헝가리와의 공식관계 수립은 정부의 공산권을 상대로 한 북방정책에 기폭제가 되었으며, 동구권국가들에게 한국과 관계개선을 이루고자 하는 파급효과를 크게 미쳤다. 한편 한국은 70년부터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여 왔다.

1973년 3월 <중공>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호칭했고 대륙권의 자원탐사를 협상하자고 제의했으나 당시 중국은 한국이 합법정부가 아니라고 거부했다. 그러나 황해에서 석유 탐사와 시추제의를 하자 중국은 이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한국을 <남한당국>이라고 호칭하기 시작했다. 1974년 고려대학교부설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중국의 국립도서관을 포함한 학술기관에 한국의 도서자료를 보냈고 그 후 중국에서도 교환가능 도서목록 등을 보내 왔다.

경제관계에 있어서도 낙관적인 환경이 조성되었다. 한국은 중국에 주로 전자제품과 섬유직물·비료 등을 홍콩을 통하여 수출하여 80년 양국간의 간접교역량이 약 6억 달러에 이른 것으로 보도되었다. 1983년 5월 중국의 민항기피랍사건은 한·중관계를 좁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은 이 사건을 국제관례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처리함으로써 양국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1949년 이후 최초로 대한민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사용하였다. 인적 교류도 1980년대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1983년 9월 중국은 유엔기구회담에 한국관리의 입국을 보장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곧 한국에 대한 정책변화에 조짐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를 위하여 개입할 용의가 있다고 함으로써 양국관계 개선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1985년 3월에는 중국의 어뢰정이 한국의 황해안으로 표류하여 왔을 때 한국은 이념을 초월하여 인도주의적 처리를 하였다. 이와같은 환경변화와 더불어 양국간에는 학자의 교환 및 스포츠교류가 증가하여 왔다. 특히 중국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에 참여하는 한·중 양국간에 화해와 협력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 뒤 1991년 4월 중국 무역대표부가 서울에 설치되었으며 1992년 8월 수교가 이루어졌다.

한·소간에도 이와 유사한 교류와 접촉이 있었다. 1970년부터 간헐적이지만 인적 교류에서 의미있는 발전이 이루어져, 기자들의 입국, 대사의 입국, 보사부장관의 입국, 학자들의 초청이 있어 왔으며, 유엔연설과 국제의원연맹(IPU)에서도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소관계의 진전은 1983년 9월 KAL기 격추사건으로 인하여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 후 소련은 1986년 고르바초프의 블라디보스토크선언 후 아시아외교 강화책의 일환으로 일본·한국 및 동남아시아국가들과 경제협력 등을 통한 동서(東西)의 세력균형을 모색해왔으며, 1988년 소련의 서울올림픽대회 참가는 한·소관계를 보다 진전시켰다. 양국은 1989년 12월 8일 무역사무소 내에 영사처를 설치함으로써 영사관계를 수립하였고, 1990년 6월 4일 한·소정상회담이 이루어져 모색기에 머물러 있던 양국관계가 외교적 교섭단계로 급진전되었으며, 마침내 같은 해 10월 1일 한·소 수교가 이루어졌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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