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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6 (토) 22:11
분 류 사전3
ㆍ조회: 2315      
[근대] 전화 (민족)
전화(電話)

음성이나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꾸어 이를 전송로를 이용하여 먼 곳까지 보내는 통신기기.

[전화의 발달]

음성은 가장 편리한 정보전달수단이지만 도달거리가 짧다는 약점이 있다. 고대로부터 인간들은 음성을 멀리까지 전달하고자 여러 가지로 궁리하여 왔다.

1845년 모스(Morse,S.F.B.)가 전신을 발명한 다음해 영국에서 나팔모양의 확성기에 압축공기를 불어넣어 음을 내는 일종의 기적(汽笛) 장치가 고안되었는데, 이 장치를 그리스어의 텔(tel:먼 곳에)과 폰(phon:音)의 합성어인 텔레폰(telephone)이라고 이름하였다.

따라서, 이때의 전화는 전기현상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멀리 떨어진 곳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계를 말하지만, 지금은 전기현상을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되었다.

지금의 전화기는 1876년 벨(Bell,A.G.)이 발명하여 그 해 4월 3일 보스턴∼뉴욕 사이에 최초로 실용화되었으며, 1878년 에디슨(Edison,T.A.)에 의하여 송화기(送話機)가 개량되자 전화보급은 한층 더 진전되었고 현재의 전화기의 기본 원리가 정립되었다.

이와 같은 발명과 실용화의 노력은 전기를 이용한 음성통신의 시대를 열어가게 하였으며, 전신과 함께 전화는 전기통신시대를 이끌어 갈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전화가 실용화되어 보급된 이듬해 보스턴시에서 전화교환업무가 개시됨으로써 전화의 실용화에 있어서 교환이 필수적인 기능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때의 교환방식은 모두 자석식 방식으로서, 수화기를 걸어놓고 핸들을 돌리는 데서 오늘날 ‘전화를 건다. ’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그 뒤 자석식 전화기가 공전식 전화기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수동식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으며, 1889년 미국의 스트로저에 의하여 자동식 교환기가, 1896년에는 다이얼전화기가 발명되었다.

따라서 ‘다이얼 M을 돌려라. ’와 같이 전화를 ‘거는 시대’에서 ‘돌리는 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1958년에는 미국의 벨연구소에서 개발한 전자교환기가 출현하였다. 이에 따라 MFC전화기가 등장하여 이제 전화는 다시 ‘돌리는 방식’에서 ‘누르는 방식’의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2580이라는 전화번호가 인기가 있는 것 또한 누르는 버튼의 순서가 일렬로 나란히 배열된 전자식 전화기의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전화]

우리 나라에는 전화가 발명된 지 6년 만인 1882년 3월 처음으로 실물이 도입되어 실험통화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단지 실험통화라는 측면 이외에도 과학문명의 이기(利器)가 가장 먼저 유입되었는다는 사실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882년 3월 톈진(天津) 유학생 상운(尙雲)이 귀국시 휴대한 전화에 관한 용품기록이 있는데, 전선 40장(丈:약 100여 m)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험통화를 위한 것이라 하겠다.

전화기의 실물이 도입되기 전에도 문헌상으로는 다리풍(窮釐風, 1880)·어화통(語話筒, 1882)·전어통(傳語筒)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으며, 1882년 2월에는 톈진 유학생을 인솔하고 간 김윤식(金允植)이 톈진의 한 전기국(電機局)을 시찰할 때 전화기를 처음 보고 실제로 통화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이 기록에서 겨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록상으로 볼 때 우리 나라 사람이 한 최초의 통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1893년 11월에 정부는 총해관(總海關:지금의 세관)에 “일본 동경에서 구입하여 들여오는 전화기와 전료(電料) 등을 면세하라.”는 조처를 시달하였는데, 이는 궁내부(宮內府)에서 전용전화를 가설하기 위하여 구입할 때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전화기의 도착을 몹시 기다린 듯 인천과 부산감리(釜山監理)로부터 이를 싣고오는 일본 상선에 관한 보고를 전보로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듯 정부의 관심 속에 기다리던 전화기는 다음해 1월 26일 인천에 도착하였고, 상운을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중국에서 대리 경영한 오늘날의 중앙전신국의 전신)에 보내 실험을 청하였다. 이듬해 3월 1일 전화기의 시험을 실시하겠다고 통고하였으나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 아마도 전용전화의 개설을 위한 준비가 완료되어 가설공사를 기다리던 중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발발로 그 실현을 보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최초의 전화개통]

우리 나라 최초의 전화는 1896년에 이르러 서울∼인천 간에 개통되었는데, 이 전화의 개통으로 김구(金九)의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당시 김구는 1895년 10월 일본인에게 피살당한 국모(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고 안악 치하포에서 이듬해 2월에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하고 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고종에게 알려지자 곧 인천감리 이재정(李在正)을 전화로 불러 사형집행을 면하게 하였는데, 그때가 1896년 윤8월 26일로 전화가 개통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고 ≪백범일지≫에 기록되어 있다.

1898년 1월에는 궁내부전화를 전보사(電報司)에서 관장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다가 1900년 3월 통신원관제를 제정할 때 전신전화의 건설과 보존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여 체신관서 관할하의 공중통신용 전화개설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정사정 등 여러 가지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그 실현을 보지 못하다가, 1902년 3월에 이르러 서울∼인천간에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되었다.

정부에서는 전화개통을 발표함과 아울러 전문 2조로 된 『전화권정규칙(電話權定規則:임시규정)』을 공포하였다. 이때 공포된 전화권정규칙은 통화요금과 전화통신규칙에 관한 것으로 매우 간단하지만 우리 나라 최초의 전화법령이었다.

이 때 전화를 개설하게 된 경위와 그 구체적인 공사진행 등에 관하여서는 상세한 기록이 없어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일본 측의 불법가설을 막기 위하여 사업 개시를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보급]

그러나 당시의 전화사업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시내 교환전화에서 시외전화로 발전해 간 것이 아니고, 시외전화가 먼저 개설되고 다음에 시내 교환전화가 개시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까닭은 아마도 당시의 도시생활이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는 점과, 봉건적 사회체제 아래에서 전화를 설치할 만한 상류계층의 시내연락은 하인들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고 오직 지방과의 직접통신에만 전화가 필요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전화요금도 시내와 시외의 구별이 없는 단일통화권이었음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어떻든 1902년 3월 20일 최초의 공중용 전화개설 이후 이용자와 사업 범위도 점차 확대되어 같은 해 5월에는 서울∼개성 간에 전화가 개통되었으며, 6월에는 한성(서울)전화소에서 시내 교환전화가 개시되었다.

또 다음 해인 1903년 2월에는 일본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인천에서의 시내 교환업무가 시작되었으며, 개성∼평양 간, 서울∼수원 간의 전화개설을 비롯하여 전화사업은 확대되었다. 당시의 전화가입자 수는 안국동 소재 체신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민상호(閔商鎬) 유품 중 ‘각전화소청원인표(各電話所請願人表:오늘날의 전화번호부)’에서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1902년에는 가입자가 넷(서울 2, 인천 2)이던 것이 1905년 당시 서울 50, 인천 28, 수원 1, 시흥 1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 밖에도 가입자의 주소, 가입날짜 등을 알 수 있다. 또, 당시의 가입자가 외국인이 다수이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 사람도 상당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02년에 가입자 넷으로 시작한 전화가 오늘날에 1000만 대에 육박한 것은 실로 금석지감이 아닐 수 없다.

[발전과정]

이처럼 발전적 추세에 있던 우리의 전화사업은 1905년 4월에 일본에게 우리 나라의 통신사업권을 빼앗기게 되어 통신사업과 더불어 독자적인 전화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1905년 4월 이른바 한일통신협정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통신권을 강탈한 일제는 통신을 대륙침략의 도구로서, 식민정책수행의 보조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전기통신의 공중이용이라는 이상의 실현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고 말았다.

광복과 함께 전화사업에도 새로운 출발이 시도되었으나 국토의 분단과 함께 통신망도 남북으로 분할되고 말았으며, 그나마 6·25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함께 좌절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6·25전쟁의 참담한 피해는 전후부흥사업에 힘입어 어느 정도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변변하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개발계획의 수행으로 전화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어 1970년대에는 극심한 전화적체 현상을 초래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청·백색의 전화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기통신 부문에 혁신적인 진보가 있었다. 기술적으로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진전되어 전자교환과 광통신시대를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보화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기반조성이라는 차원으로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다.

또한, 종래 전기통신사업을 정부가 직접 경영하여 오던 것을, 시설의 대량 확장에 필요한 능률과 기술을 확보하고 통신의 공공성에 입각한 기업성 추구로 통신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경영체제를 개편하여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족되면서 공영화가 되었다.

이후 연간 100만 회선 이상의 신규 전화를 지속적으로 공급하여 극심하였던 전화 적체를 해소하고 1가구 1전화의 시대를 이룩하게 되었으며, 시설 수도 또한 1000만을 육박하게 되었다.

[전화기의 변천과정]

우리 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전화기는 실물이 남아 있지 않으나 당시의 기록과 사진자료에 의하면 유럽의 자석식 벽걸이 전화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초창기 전화사업이 일본과의 합작에 의하여 이룩되었다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그 뒤 서울과 인천 간에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되면서 사용된 전화기는 멜빌조립형 자석식 전화기였으며, 대한제국 말기에는 공전식 전화기가 사용되었다. 자동식 전화기는 일제가 1935년 나진(羅津)과 경성중앙전화국에 자동교환기를 설치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최초의 자동교환기가 개통된 지 43년 만에 도입된 것으로, 전화가 실용화된 지 20년 만에 우리 나라에 최초로 전화사업이 시작된 것과 비교한다면 상당히 늦었다고 하겠다. 이는 일제 35년간에 2%도 안 되는 일본인이 전화가입자의 80% 이상을 차지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그 당시 일제의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통신사업의 실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지금도 전보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용건을 해결하는 것이 실례라는 인식의 저변에는 이와 같은 일제의 통신이용 제한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전화기의 국내 개발은 1960년대에 들어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6·25전쟁 후 우리 나라의 산업은 식품공업에서 기계부품공업으로 발달하여 갔으나 기계부품의 표준사양 개발은 통신기재 분야에서 앞서 나갔다.

그에 앞서 1953년부터 통신기자재 및 부품이 생산되었으나 호환성과 정합성이 이루어지지 않아 1956년 통신기재사양위원회를 설치하고 표준사양을 계속 개발하여 왔는데, 이는 1962년 〈공업표준화법〉에 의한 공업규격표시품규정이 시행되기 6년 전의 일이다.

이와 같은 통신기재표준화의 노력의 결과 1961년에 체신1호 자석식 전화기와 체신1호 공전식 전화기, 다음해에는 체신1호 자동식 전화기가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체신1호 자동식 전화기는 기본 기능에는 크게 변화된 바가 없었으나 이 전화기만을 사용하도록 한 당시의 방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ST·EMD·ESS 등의 다양한 교환기종이 도입되고, 다기능 전화기 및 장식용 전화기의 대두와 전화기 생산기술의 급속한 진전 등으로 체신1호 자동식 전화기의 사양은 여러 가지로 변화하였다.

관급전화기의 수요가 점차 감소하고 자동식 전화기를 누구나 임의로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이용자 자급제, 이른바 단말기의 자유화가 1981년 1월 1일부터 실시되면서 그 문호가 개방되었다.

1976년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가 설치되어 전자교환기의 도입이 결정되고 1979년 당산과 영동전화국의 전자식 교환기가 개통되면서 전화기도 전전자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전전자식 전화기는 송수화기의 기본구조와 기능 이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기계식과 크게 달라져 다이얼은 푸시버튼식으로 바뀌었고, 전자식 교환기에서 제공하는 특수서비스기능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컴퓨터와 연결되어 원격제어 등 더욱 다양한 기능이 개발되어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단말기의 자유화(자급제)로 인하여 국내 전화기시장이 경쟁체제로 전환되면서 천편일률적인 외형과 검은색 일변도에서 벗어나, 전화기가 단순한 통화의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실내공간을 장식할 수 있는 부가적인 기능을 갖게 되는 전화기의 패션시대가 대두하였다.

자율화·자유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표적이며, 전화기의 수출만도 1억 달러를 넘은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宮內府來案, 韓國電氣通信100年史(遞信部, 1985).

<진강옥>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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