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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6-06 (금) 17:59
분 류 사전3
ㆍ조회: 2311      
[근대] 1910년대의 한국사회와 독립운동 (민족)
일제강점기(1910년대의 한국사회와 독립운동)

세부항목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1910년대의 한국사회와 독립운동)
일제강점기(3·1운동)
일제강점기(3·1운동 후 1920년대의 한국사회의 독립운동)
일제강점기(193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와 독립운동)
일제강점기(참고문헌)

(1) 일본제국주의의 군사강점과 식민지 무단통치체제

①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헌병경찰제도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강탈하여 식민지로 강점하자 한국에 대한 식민지통치기구로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그 지휘자로 총독을 두어 식민지통치를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총독은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사법 및 군대(이른바 ‘조선군’)통수권까지 가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을 반드시 일본의 육군·해군 대장으로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국을 일본군부의 지배하에 두고, 군사방식에 의한 무단통치를 자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에 대한 식민지통치에 있어서 ‘법률’이 필요한 부문도 총독의 ‘명령’으로 행하도록 하였으며, 이것은 동서고금에 없는 특별권한이므로 총독의 법률효과를 가진 명령에 특별히 ‘제령(制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제는 조선총독에게 한국인의 모든 생사여탈을 자의로 결정할 수 있는 특별권한을 주어 한국인의 독립운동 등 저항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탄압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설령 명목상의 법률이 부분적으로 있었다고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법률에 의하여 통치된 법치지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군왕보다도 전제적인 조선총독의 명령(제령)에 의하여 전제·파쇼적으로 지배되고, 자의적으로 탄압된 특수지역이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부서로서 처음에는 6부를 두고, 그 밑에 6국 6과를 두었다가 이를 대폭증설하고, 지방행정조직을 개편하였다. 1911년 3월 조선총독부의 관리수는 11만5115명이었다.

이 관리 중 한국인은 극소수로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특히 고급관리는 그러하였다. 그것은 일제가 프랑스의 직접지배원칙을 채택하여 〈조선총독부관제 조선인관계규칙〉에서 한국인의 관리임용을 극도로 제한한 정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일제는 한국인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쥔 조선총독 밑에 1만5000여명의 일본인 관리들을 거미줄같이 늘어놓아 식민지통치의 행정조직을 편성한 것이었다.

또한 ‘무단통치’라 하여 1910년 9월 10일 헌병경찰제도를 창설하였다. 헌병경찰제도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제도로서 헌병으로 하여금 일반국민에 대한 경찰행정을 담당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에 의하여 일본헌병은 한국의 민간인에 대한 경찰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일반경찰도 헌병제도와 결합하여 한국의 민간인을 군사적 방식으로 사찰하게 되었다. 이 헌병경찰제도에 의하여 일본 헌병사령관이 중앙의 경무총감이 되고, 각도의 헌병대장이 해당 도의 경무부장이 되었으며, 위관(尉官)이 경시(警視), 하사관이 경부(警部), 사병이 순사(巡査)의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였다.

물론 일제의 헌병경찰제도에 의하여 종래의 경찰제도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경찰제도는 그대로 남아서 군사적으로 지휘 관리되는 위에 다시 일제의 헌병대가 일반경찰직무를 수행하도록 개편된 것이었다. 1911년 일제의 헌병기관수는 935개소에 7,749명이었다. 한편, 1911년 일반 경찰관서는 667개소였으며, 일반경찰수는 6,222명이었다.

즉, 일제강점 후인 1911년의 헌병경찰관서수는 모두 1,602개소였으며 헌병경찰의 총수는 1만3971명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헌병경찰관서와 헌병경찰을 전국 각지에 조선총독부 행정조직과 함께 거미줄같이 늘어놓아 한국인을 탄압하는 무력조직을 편성한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헌병경찰제도에 의거하여 조선총독부의 행정관리에게도 그에 준하는 제복을 착용시키고 무기로 대검(帶劍)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학교 교원들에게까지 제복과 함께 대검을 착용하게 하여 한국인을 처음부터 무력과 폭력으로 탄압하였다.

② 일본정규군의 무력배치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 무단통치를 조선총독부와 헌병경찰에만 의존하는 것이 불안하여 다시 이를 무력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일본정규군을 배치하였다. 일제는 일본 육군제19사단을 나남에 주둔시켜 북부조선 일대를 지역별로 구획하여 배치하였으며, 제20사단을 용산에 주둔시켜 중부와 남부조선을 지역별로 구획하여 각지에 배치하였다.

일제는 이를 합하여 조선군(朝鮮軍)이라고 부르고 조선군 사령부를 용산에 두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전국이 거미줄 같은 일본정규군의 배치망하에 중첩되어 들어가게 되었다.
일제는 또한 경상남도 진해와 함경남도 영흥만에 일본 해군요새사령부를 설치하고, 해군과 중포병대대를 주둔시켰다. 1911년 한국에 주둔시킨 일본정규군의 병력은 약 2만3000여명에 달하였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식민통치의 무력은 1911년을 기준으로 보아도 ① 헌병경찰 1만3971명, ② 조선주둔일본정규군 약 2만3000여명, ③ 조선총독부 행정요원 1만5115명으로 합계 약 5만2086명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5만여명의 무력조직을 전국에 거미줄같이 배치하여 한국에 대한 식민지 무단폭압통치체제를 만들었다.

③ 한국인의 완전무장해제

일제는 이상과 같이 그들 자신은 완전무장한 반면에 한국인들은 일제의 식민지 무단통치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완전무장해제하였다. 일제가 한국인의 무장을 본격적으로 해제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8월 1일의 대한제국 구군대의 해산과, 뒤이어 그해 9월 3일 일제 통감부가 의병전쟁 탄압책으로 〈총포급 화약류단속법〉을 공포하여 한국민족이 무기를 가질 수 없도록 규제하였을 때부터였다.

일제는 1910년 강점 이후에는 이 단속법을 더욱 강화하여 집행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는 투옥 등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특히, 일제는 매년 이른봄에 정기적으로 총포소지를 단속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밀고제를 설정하여 한국인의 무기소지자를 색출하여서 엄벌에 처하였다.

민간인에게 총기소유를 허가한 경우는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 유력자들과 한국인으로서는 친일지주들에게 극소량의 수렵용 엽총을 허가한 것뿐이었다. 3·1운동 직전인 1918년 말의 민간인 소유 총기류는 모두 2만5634정인데, 그 중에서 일본 민간인이 소유한 총기가 2만3894정으로 총민간인 소유 총기의 93.2%였으며, 한국인 친일지주 소유의 엽총은 1,741정으로 6.8%에 불과하였다.

일본인 소유의 총기 중 군용총이 1,975정이나 되었는데 한국인 친일지주의경우 군용총은 1정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교활한 일제는 친일분자·친일지주들의엽총도 그들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경찰관서에 보관하도록 하고, 일제가 지정한 짧은 수렵허용기간에만 단기간 반출하였다가 즉시 경찰관서에 보관하게 하였다. 일반 한국인은 엽총소유도 엄금하여 위반자는 가혹하게 처벌하고 투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국내의 한국인들은 완전무장해제당하였으며, 문자 그대로 무기가 될만한 것은 촌철(寸鐵)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일제의 한국민족에 대한 완전무장해제정책은 일제식민지 무단통치에 대한 한국인의 무력저항과 독립운동의 능력을 완전히 박탈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④ 헌병경찰의 특권과 태형제도(笞刑制度)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여 헌병경찰제를 만들고 무단탄압체제를 구축하고, 한국인을 완전무장해제시킨 다음 한국인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태형제도를 제정, 공포하였다. 일제는 1910년 12월 3일 총독의 제령 제10호로 〈범죄즉결례〉라는 것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경찰서장 또는 각 지방 헌병대장은 ① 징역 3개월 이하, ② 벌금 100원 이하에 해당하는 처벌은 재판소의 재판 없이 판정하여 즉결로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그 처벌대상은 87개 조항이었는데 유언비어나 허보를 말하는 자로부터 전신주 부근에서 연을 날리는 자, 타인의 밭을 가로질러 건너는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상생활에 걸친 것이어서 해석에 따라 어떠한 언행이라도 헌병경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한국인을 불러다가 3개월까지의 징역이나 100원까지의 벌금을 재판 없이 즉결할 수 있었다.

1912년 3월에는 제령 제13호로서 이른바 〈조선태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3개월 이하 징역이나 구류에 처할 자와 1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자는 헌병경찰이 필요에 의하여 형1일 또는 벌금 1원을 태1개로 환산하여 이를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일제가 〈조선태형령〉과 함께 제정한 〈조선태형령 집행심득〉에 의하면 ① 태는 소의 음경(陰莖)을 사용하여 만들 것, ② 기절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음수(飮水)를 설비할 것, ③ 수형자가 울고 부르짖을 경우에 대비하여 물에 적신 포(布)를 입에 물릴 것, ④ 사망자의 경우에는 그의 본적지 면장에게 통고할 것 등을 규정하고, 수형자를 형판에 엎드리게 한 뒤 두 팔과 두 다리를 형틀에 묶고 볼기를 벗겨 매질을 하도록 하였으며, 태의 끝에는 연(鉛)을 붙여 맞으면 살이 터지도록 하였다.

일제는 이 야만적 제도를 만들면서 조선의 옛 제도를 부활하는 것이라고 뒤집어씌웠다. 조선왕조의 태형은 중범(重犯)에 대한 것이었는데도 야만적 형벌이라고 하여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하였는데, 일제는 경범(輕犯)과 일상생활에 관한 모든 것에 이를 즉결하는 새로운 야수적 탄압제도를 만든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으로서 독립사상을 가졌거나 일본인에게 공손하지 않거나 헌병경찰의 기분에 거슬리기만 하여도 한국인을 연행하여 재판 없이 3개월까지 감옥에 처넣거나 하루에 80대까지의 야수적 태형을 예사로 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잔혹한 태형으로 말미암아 아무 죄도 없는 한국인 중에 사망자와 불구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농민들은 일제의 태형을 다른 어떠한 형벌보다도 싫어하고 무서워하였다. 왜냐하면, 극히 적은 수의 태형으로도 막심한 고통이 따를 뿐 아니라 귀가한 뒤에도 상처를 수개월간 치료해야 하므로 농삿일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태형을 당하면 생명을 잃거나 평생불구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물론 징역 3개월을 원하였으나 이것도 수형자가 선택하지 못하고 헌병경찰이 결정하였다. 일제의 헌병경찰은 검사의 직무까지 대행하고 나아가서는 판사의 직무, 즉 사법부의 직무까지 대행하였으며, 그 집행방법까지 그들의 자의적 판단에 의하여 태형으로 집행함으로써 죄도 없이 인신의 사망과 불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한국은 일제의 헌병경찰에 의한 공포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인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떠한 트집을 잡혀 헌병경찰에 끌려가서 태형당하고 처벌을 당할 것인지 항상 불안에 떨었다. "순사 온다."는 말이 어린애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공포용어로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사회는 일본군과 헌병경찰이 한 손에는 총검을, 다른 한 손에는 채찍(태)을 들어 한국인을 탄압, 학살, 착취하는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었다.

(2)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

① 의병운동에 대한 탄압

일제는 이러한 식민지 무단통치체제를 만들어 놓고 한국인의 국권회복운동·독립운동에 대한 잔혹하기 짝이 없는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 중에서 1905년 이래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1907∼1908년에 절정을 이루며 치열하게 전개되던 의병전쟁에 대하여서는 이미 한말에 ‘조선주차군’이라고 부르던 일본군을 투입하여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비록 숫자는 크게 줄어들었으나 1910년 일제강점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1914년까지 줄기차게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의병운동에 참가한 의병은 물론이요 그 가족과 그들에게 식량·물자를 제공한 한국인까지 처참하게 학살하고, 가옥에 방화하는 등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②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

일제는 또한 애국계몽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고 그 영향을 배제하려 하였다. 1910년 8월 이후에 일제는 우선 대한협회(大韓協會)·서북학회(西北學會)·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관동학회(關東學會)·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호남학회(湖南學會)·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흥사단(興士團) 등 모든 애국계몽운동단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또한 일제는 ≪황성신문 皇城新聞≫·≪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제국신문 帝國新聞≫·≪만세보 萬歲報≫·≪대한민보 大韓民報≫를 비롯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모든 신문들을 강제 폐간시켰다. 뿐만 아니라 ≪소년 少年≫을 비롯하여 모든 잡지들과 각 학회의 기관잡지들을 모두 강제 폐간시켰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每日申報≫와 그 영문판인 ≪서울 프레스 Seoul Press≫, 일본인거류민들의 ≪경성일보 京城日報≫만을 남겨 일제의 통치를 선전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그들의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집행에 종래의 애국계몽운동의 영향이 크게 방해된다고 보고, 애국계몽운동의 영향을 조직적으로 배제하려 하였다.

한말에 한국인이 저술한 각급 학교용 교과서들을 모두 몰수하여 사용금지시켰고, 이때에 간행된 모든 애국계몽서적들을 ‘금서(禁書)’라고 하여 모두 몰수하고 판매금지시켰으며, 이들을 읽는 한국인은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그리고 학교교과서는 일본인 저작의 교과서로 대체시켰다.

또한, 일제는 한국인의 정치집회는 물론이요 교양강연회와 연설회도 금지시켰으며, 종교집회까지도 반드시 사전에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한국인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철저하게 박탈당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무단탄압조처에 의하여 한국인의 입과 행동은 완전히 봉쇄당하였으며, 일제의 사슬에 묶여 입이 있어도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 묶이게 되었다.

한국사회는 완전히 암흑천지가 되고, 오직 조선총독부와 일본의 기관지들만이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한국인이 행복에 가득 차 있으며 크게 발전하고 있다고 전세계에 거짓 선전을 하고 있었다.

③신민회(新民會)에 대한 탄압과 105인사건

일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내의 독립운동세력이나 민족자주세력을 뿌리부터 뽑아버리려고 획책하였다. 일제가 가장 주목하여 탄압하려고 노린 것이 1907년에 비밀결사로 조직되어 일제강점 후까지 활동하고 있던 신민회와 그 회원들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전국의 지도적 애국자들이 거의 모두 신민회에 가입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시키고 그 회원을 탄압하기 위하여 ‘데라우치(寺內正毅)총독 암살음모사건’을 조작하였다. 신민회 회원들이 초대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려고 음모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신민회는 이러한 암살음모를 한 일이 없었고, 이것은 일제가 조작해낸 각본이었다. 일제는 1911년 8월에 총독암살음모혐의로 전국에서 약 800명의 신민회 회원들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날조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기소요건을 만들 수가 없어서 검거된 회원에 대한 전대미문의 잔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일제는 이 기회에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을 탄압할 결의를 보이고, 만일 독립운동에 가담할 경우에 당해야 할 잔혹한 개인적 고통을 보이기 위해서 다수의 체포된 신민회 회원들을 고문 도중에 학살하고 수많은 애국자들을 불구자로 만들었다.

이 중에서 122명을 기소하여 그 중 105명에게는 징역 5년에서 10년까지의 실형을 선고하였다. 105인사건의 조작과 지도적 애국자들에 대한 고문·학살·탄압은 일제가 사소한 독립운동의 가능성에 대해서조차 정치적 날조극을 만들면서까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과 학살을 야만적으로 자행하는 야수적 강도들이었음을 한국인들에게 증명하여 보여주었다.

④ 기타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

일제는 그밖에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들을 찾아내어 수많은 애국자들을 학살하고 투옥하였으며, 독립사상을 가진 개인들에 대해서도 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체포하여 고문하고 투옥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3)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약탈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자 토지약탈과 식민지착취를 목적으로 1910∼1918년간에 걸쳐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토지소유권을 재조사하고 토지가격과 지형을 조사한다고 하면서 신고주의의 약탈적 방법으로, ① 임야 및 민간인 공유지 약 1369만여정보와 미간지개간지 약 102만정보, 농경지 13만정보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국토면적 약 2225만여정보의 약 62%에 해당하는 실로 방대한 것이었다.

신고를 하지 않거나 신고에 필요한 증빙서류를 다 갖추지 못한 한국농민의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로 약탈당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농민의 권리인 ① 관습상의 경작권, ② 도지권, ③ 개간권, ④ 입회권 등을 소멸하였다.

예컨대, 조선왕조 말기까지에는 공유 미간지를 개간하는 경우에 그 토지는 개간한 농민의 사유토지가 되어 자작농이 되었는데,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그 이후에는 공유 미간지를 개간하는 경우에도 조선총독부의 소작농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반봉건적 지주소작제도를 강화해주어서 일반농민과 소작농의 처지는 더욱 열악하게 되었다.

(4) 민족말살을 위한 식민지교육

일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민족말살과 식민지교육을 위한 첫 조처를 자행하였다.

〈조선교육령〉의 기본내용은 ①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일본제국에 충량(忠良)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하며, ② 일본어를 보급하고, ③ 조선에는 대학을 설치하지 않도록 하고, 필요하면 실업기능교육만 시킨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 목적달성을 위하여 공립학교뿐만 아니라 사립학교의 교원과 교과과정, 교과서를 총독부의 지시에 따르도록 제도화하였다.

한편, 한국어시간을 줄이고 일본어시간을 대폭 증가시켰다. 날조과장된 일본역사를 강제로 학습시켜 일본숭배사상을 주입시키고, 한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여 한국민족은 고대부터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아온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민족이며, 오늘날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적·필연적 귀결이라는 의식을 주입시켰다.

또한, 자부심이 강하고 독립심과 단결성이 강한 한국민족에 대하여 일제는 한국민족의 민족성은 본래 사대성과 당파성이 강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교육하여 패배의식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민족말살을 위한 식민지 노예교육에 철저히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이를 탄압하고, 사립학교는 폐쇄하였다. 함경북도의 사립 온천학교(溫川學校)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조선어읽기를 강조한 일이 있다고 하여 폐쇄당하였다.

일제는 또한 한국민족의 찬란한 민족문화와 슬기롭고 유구한 민족사를 알지 못하도록 하면서 민족말살정책을 지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민족문화유산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1910년 총독부 안에 ‘고적조사반’을 만들어서 서울·개성·평양·부여·공주·경주 등지의 수많은 고분과 산성, 고적을 파괴하고 수많은 출토품들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총독부의 고급관리들이 일본인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헌병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관제도굴단을 조직하여 경주·공주·부여와 전국 각지의 고적들을 도굴해서 수많은 금관들, 금·은·옥의 부장품들과 불상 등의 미술품들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또한, 1910년 11월부터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전국의 서점·향교·서원은 물론이요 서적을 다수 보관하고 있는 개인집까지 수색하여 우리의 고전들을 약탈하였으며, 그 가운데 약 20만여책을 불태워버리고 일부는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강점기에 침략자들이 파괴하고 약탈해간 민족문화 유산들은 도저히 그 품목을 낱낱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대량이었다.

(5) 회사령과 민족산업의 파괴

일제는 한국을 일본공업발전을 위한 원료공급지와 독점 상품시장으로 착취하기 위하여 1910년 12월 29일 이른바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① 한국내에서의 회사설립은 반드시 조선총독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하고, ② 허가 없이 회사를 설립한 경우에는 투옥하며, ③ 허가를 받고 설립한 회사일지라도 일제의 눈에 거슬리면 언제든지 회사를 정지, 폐쇄, 해산시킬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한말부터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실업률이 점차 높아졌으나, 〈회사령〉체제하에서 한국인은 회사설립허가를 얻지 못하여 민족산업은 심하게 탄압을 받았다. 1918년까지 일제는 일본인에게는 289개 회사설립을 허가해주면서 한국인에게는 일본인보다 훨씬 많은 설립신청을 하였는데도 63개 회사밖에 허가해주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으로 한국의 민족산업은 발흥할 수가 없었다. 또한 일제는 1915년 12월 24일에 〈조선광업령〉을 제정, 공포하여 〈회사령〉과 동일한 총독의 허가제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전국이 무연탄·흑연·동광·아연광·텅스텐광·몰리브덴광은 완전히 일본재벌이 독점하였으며, 금광과 은광도 대부분이 일본인의 소유로 되었다. 1918년 일본인 소유의 광산액은 한국인 소유의 300배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광산자원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심지어 어업부문에서도 일본어민을 이주시켜 회사를 조직하게 하여 한국의 황금어장을 독점하였다. 일본의 어획고가 한때 세계 제2위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의 주요어장을 독점하여 약탈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와같이 극소수 친일분자들의 회사를 제외하고는 한국인의 민족산업은 탄압당하고 파괴되어 산업진흥을 이룰 수 없었을 뿐더러 심하게 약탈당하고 착취당하였다.

(6) 1910년대의 독립운동

① 국내의 항일비밀결사의 독립운동

일제가 식민지 무단통치체제를 만들어 아무리 살인적이고 야수적인 탄압을 가해도 한국민족은 불굴의 투지로 암흑천지 속에서도 줄기차게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105인사건’ 이후에 발각된 비밀결사만 하여도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1913)·광복단(光復團)(1913)·광복회(光復會)(1913)·기성볼단(1914)·선명단(鮮命團)(1915)·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1915)·영주 대동상점(大同商店)사건(1915)·한영서원(韓英書院) 창가집사건(1916)·자립단(自立團)(1916)·홍천 학교창가집사건(1916)·이증연(李增淵)비밀결사(1917)·조선산직 장려계(1917)·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1918)·민단조합(民團組合)(1918)·자진회(自進會)(1918)·청림교(靑林敎)사건(1918) 등이 있었다.

이 밖에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비롯하여 일제에 발각되지 않은 다수의 소규모 비밀결사들과 여러 이름의 계(契)들이 조직되어 민족독립을 되찾기 위한 광범위한 지하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② 국외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한편, 해외에 망명한 애국자들과 국민들은 국외에서 독립군기지 창건운동과 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신민회는 만주·노령 일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근거지를 건설하며, 독립군을 창건하여 적절한 기회에 국내와 호응, 국내에 진공하여 독립전쟁을 감행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만주국경 부근에 1911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1913년에는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와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를 설립해서 독립군 근거지를 창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무관학교는 청년학생들을 모집하여 사관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였다. 무관학교 졸업생은 독립군을 편성하여 본격적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또한 미국의 클레어몬트와 하와이에서도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가 설립되어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며, 심지어 멕시코에 이민간 동포들도 자제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한편, 만주에서는 광복회, 노령에서는 권업회(勸業會), 상해에서는 동제사(同濟社)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신한협회 등의 단체가 조직되어 독립을 위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가 열리자 한국민족은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결의하였으며, 같은 해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회의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의 결정을 이룬 것은 바로 3·1운동이었다.

<신용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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