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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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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한민국4-정치 (한메)
대한민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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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

<8·15와 정부 수립>

주권을 잃고 36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던 기간 동안 한국은 국가를 되찾아 민족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줄기찬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한국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민족의 노력보다도 연합국의 승리라는 제2차세계대전 종결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까닭에 광복을 맞았으나 민족이 스스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미·소 양 강대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사전의 약속에 따라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질서수립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38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미·소 양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의 성격을 가졌다.

그들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고, 한국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열망을 도외시한 채 진주하자마자 군정을 실시하였다. 1948년까지 실시된 군정기간 동안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세력들로 하여금 정부를 수립케 하여 <하나의 정부수립>이라는 국민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38°선 남쪽에는 대한민국을,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 하나의 민족을 각기 다른 체제와 이념으로 갈라놓았다.

일제는 패망에 따른 조선 땅에서의 통치권 부재와 그에 따른 혼란으로 인해 조선 땅에 머물던 일본인의 재산과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을 예상하고, 일본인들의 보호와 치안확보를 위해 조선인 민족지도자에게 질서유지를 위임하였다.

처음에는 송진우(宋鎭禹)에게 의뢰하였으나 송진우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내세워 거절하자 여운형(呂運亨)에게 치안권을 넘겼다. 여운형은 권력의 공백기에 치안을 유지하고 한국의 정부수립을 준비하는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8·15 이틀 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였다.

건준은 시·도조직을 상부구조로 하고 지방의 하부조직까지 구성하여 한민족의 자치조직으로서 질서유지에 힘썼다. 그러나 좌우익과 중간노선 등 모든 정파를 포함하려 했던 건준구성의 처음 의도와는 달리 안재홍(安在鴻) 중심의 우파가 탈퇴하였다. 그 뒤 박헌영(朴憲永)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을 선포함에 따라 건준은 해체되었다.

인공(人共)은 미군정이 시작된 뒤 불법단체로 규정되었던 10월 10일까지 존속하였다. 이 무렵 미군정당국에 의해 법통이 부인된 임시정부의 민족지도자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이들의 귀국으로 인하여 한국에는 김구(金九) 중심의 임정지지세력과 여운형 중심의 좌익중도노선, 공산주의자세력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등장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무장관회의에서 결정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놓고 반탁을 주장하는 비상국민회의와 찬탁의 민족주의민족전선이 대립하는 가운데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의 통치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46년과 47년 두 차례에 걸쳐 소집되었으나, 위원회 참가 대상 단체의 선정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여 단일정부 수립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단일정부 수립에 실패한 미군정 당국은 빠른 시일 안에 독립정부 수립을 추진하기 위해 한반도문제를 국제연합에 상정하였다.

국제연합에서는 국제연합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고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들의 입북을 거부함으로써, 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여 198명의 제헌의원을 선출하였다.

제헌국회에서는 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을 제정하였고 그 헌법에 의거,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고,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세계에 공포하였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그 국가이념으로 하였다.

대한민국의 수립에 뒤이어 북한에서도 9월 9일을 기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 김구 등을 중심으로 한 통일정부수립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한반도에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것은 국민의 열망을 도외시한 것으로, 한민족은 민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의 지배를 받으며 두 개로 나누어진 국가의 국민으로 살게 되었다.

<제1공화국>

제1공화국은 48년 7월 17일 공포된 헌법에 의거, 반공을 주요한 정책으로 해서 출범하였다. 5·10선거 당시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단정수립에 반대하여 불참하자, 제헌국회에서는 5·10선거를 추진하던 이승만계열과 호남의 지주들이 중심이 되었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이 대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민당과의 제휴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은 한민당을 배척하고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혀나갔다. 이승만이 이끄는 제1공화국 정부의 우선 과제는 식민지 지배의 유산을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것이었다.

당시 국민의 관심의 초점이던 친일민족반역자의 처벌을 위해 국회에서는 반민특위법을 제정하였고, 민족반역자처벌특별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설치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의 손발이 되어 민족을 수탈하고 고문하던 민족반역자에 대한 조사와 처벌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정부관료와 고위 경찰간부 중에 많은 친일경력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국회 안에도 적지 않은 친일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반민특위는 원래의 취지대로 활동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친일민족반역자의 조사에 앞장섰던 몇몇 국회의원들을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국회를 혼란에 빠뜨리려 한다>고 체포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이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이어 이승만은 반공과 정국혼란의 방지 및 국민화합을 이유로 반민특위 활동의 종결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반민특위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보지도 못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민의원선거가 실시되어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세력과 중도파가 크게 국회로 진출한 반면, 이승만계열과 이승만으로부터 배척당해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개편하였던 옛 한민당계열의 진출은 주춤해졌다. 이 선거의 결과는 민족의 통일을 바라는 국민들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었다.

그 뒤 6·25가 일어나 정부가 부산으로 옮기자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자유당을 창당하고 직선제개헌을 추진하였다. 1952년 직선제개헌안을 통과시킨 이승만은 선거에 의해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5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원내 제1당이 되었고, 야당인 민국당은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승만은 사사오입(四捨五入)으로 대통령중심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자유당의 이와 같은 전횡으로 자유당정부에 대한 반대세력이 생겨났는데, 국회내에는 민주당과 진보당이 등장하였다. 그런 상황 아래서 제3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자유당의 이승만과 진보당의 조봉암(曺奉岩)의 대결에서 이승만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조봉암이 200여 만 표를 획득했고, 제3대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張勉)이 당선되어 자유당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강하게 드러났다.

1958년 실시된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도 제1야당인 민주당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승리하여 원내의석 1/3을 확보하는 결과를 보여 국민들의 관심이 자유당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음이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정부가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이른바 3·15부정선거라고 하는 선거부정을 행하고 이승만과 이기붕(李起鵬)을 정·부통령으로 당선시키자 이를 계기로 쌓였던 국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4월 19일에는 전국적인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진보적인 학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된 저항은 시위학생들에 대한 경찰들의 발포로 온 국민이 참여한 전국적 규모의 시위로 발전했다. 결국 이승만의 하야로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제1공화국시절 동안 억눌렸던 각계 각층의 욕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와 사태수습을 담당한 허정(許政)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무력화시켰다.

허정정부는 의원내각제로 개헌을 하고 1960년 7월 29일 민의원선거와 참의원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민주당이 큰 승리를 거두고 윤보선(尹潽善)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총리으로 하는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제2공화국>

제2공화국정부는 사회제도의 개혁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사회의 안정을 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정부라는 권위주의체제의 붕괴와 그에 따라 제 몫을 찾으려는 사회 각계각층의 욕구분출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 진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편 혁신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일각에서는 통일운동과 현상타파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박정희(朴正熙)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5·16이다. 쿠데타의 지도자들은 무력을 앞세우고 서울로 진격, 윤보선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정을 실시하였고,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확정했다.

1963년 민간인의 정치활동 재개와 함께 5·16세력은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을 창당하고 정치에 참여하였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후보가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도 공화당은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제3공화국>

제3공화국정부는 군인의 정치참여라는 불명예를 씻기 위하여 일련의 정책들을 펴 나갔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조국근대화를 내건 경제개발의 추진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은 뿌리깊은 가난의 추방을 목표로 5개년 기간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 이를 추진하였다.

한편 광복 이후 단절되어 온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하여 1965년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사시켰다. 또한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월남파병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것은 6·25 때 연합군이 한국을 도와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준 데 대한 답례의 표시였다. 1967년 박정희대통령은 신민당(新民黨)으로 집결한 야당세력의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았다.

1967년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도 공화당은 제1당이 되었다. 1969년 박정희대통령은 단임의 약속을 버리고 재선하였던 것처럼 자신의 3선을 가능케 하는 개헌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키고, 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다. 신민당의 김대중(金大中) 후보와 접전 끝에 힘겹게 승리한 박정희대통령은 민심이 자신을 떠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편,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공화당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 무렵 미·소 냉전시대가 끝나고 해빙무드가 조성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제3공화국정부는 북한과의 대화를 모색, 남북대화를 열고 1972년 7월 4일에는 그 성과물인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통일에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정부의 이러한 통일노력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신뢰와 지지를 거두어 버렸고, 야당과 재야운동세력의 정치적 저항도 드세어졌다. 이에 대응하여 박정희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을 금지시키는 한편 비상국무회의로 하여금 국회의 기능을 대신케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개헌작업을 추진,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를 거쳐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 유신헌법에 따라 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대통령이 재선되고, 12월 27일 제8대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유신체제라 불리는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4공화국>

1973년 2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어 공화당과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의 여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여 원내는 여권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원내의 세력과는 관계없이 원외에서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범국민적으로 번져 나갔고 정부는 이에 강한 물리력으로 대처하였다.

1978년 7월 6일 또다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거를 통해 박정희대통령이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반정부운동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개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78년 12월에 치러졌던 국회의원선거에서도 그간의 독주를 깨고 공화당이 지역구에서 신민당보다 1.1%나 뒤진 득표율을 보임으로써 민심이반 현상을 확실히 드러냈다.

선거 결과가 사실상 자신들의 승리라고 확신한 신민당은 김영삼(金泳三) 의원을 새 총재로 선출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이에 정부여당은 1979년 10월 4일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김영삼의 제명으로 인해 대학가의 민주화시위는 가속화되었는데, 특히 부산과 마산지역에서의 시위는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이렇듯 민심이반 현상이 심화되자 지배층의 지도부는 수습문제를 놓고 이견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박정희대통령을 저격함으로써 유신체제는 붕괴했다.

박정희대통령의 죽음으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어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반대세력들은 개헌을 통한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며 계속적인 반정부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80년 5월 17일 정부는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구속하는 한편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였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 5월 18일 광주에서의 학생집회를 경찰이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함에 따라 유혈사태가 확대되어 수많은 시민이 생명을 잃는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다.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12·12사태를 일으켰던 신군부는 국가가 위기상황에 처해 있는데 이를 좌시만 할 수는 없다는 명분 아래 80년 5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10월 27일에는 국가보위입법의회를 발족시켜 정치·행정·사회·언론 등 각 분야에 걸쳐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또한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 김종필(金鍾泌)·김대중·김영삼 등 이른바 3김씨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언론인·공직자들의 해직 및 언론사 통폐합 등의 조치를 단행하였다. 1980년 8월 16일에 최규하를 퇴진시키고 신군부의 실권자인 전두환(全斗煥)이 통일주체국민회의선거를 통해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제5공화국>

1980년 9월 국민투표를 통해 7년 단임의 대통령간선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안을 확정하였다. 1981년 1월 5일 신군부를 중심으로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이 창당되고, 1981년 2월에는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와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실시,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5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3월 25일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민정당이 다수당으로, 민한당이 제1야당으로 등장하였다. 1985년에는 해금정치인이 주축이 되어 신한민주당을 창당, 그해 2월 12일 선거에서 선명야당의 깃발 아래 제1야당으로 등장하여 여당의 경쟁세력이 되었다. 야당은 헌법의 개헌논의를 정치 쟁점으로 부각시키면서 재야세력 및 학생들과 함께 민주화요구시위를 계속하였다.

정부와 여당은 대통령직선과 개헌을 부르짓는 야당과 운동권에 대해 1987년 4월 13일 성명을 발표, 호헌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정부의 호헌조치로 가열된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6월 민주화시위를 가져왔고,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1987년 6월 29일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항으로 된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1987년 10월 12일 5년 단임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3김(金)과 대결을 벌였던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6공화국>

1988년 2월 25일 노태우가 5년 단임의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6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같은 해 4월 26일 제13대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다수의석을 확보하여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이 시작되었다. 국회의 개원으로 야당은 공조체제를 형성하고 대정부 공세를 취해 1988년말 청문회를 열어 제5공화국이 저질렀던 비정(秕政)을 추궁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두환은 대국민사과성명을 발표하였다.

1990년에 들어와 민정당은 여소야대정국의 타개를 위해 야당인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총재 김영삼)·신민주공화당(新民主共和黨;총재 김종필)과 합당, 1990년 2월 15일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을 창당하여 제6공화국의 정치구도를 바꾸어 놓았다. 이에 뒤이어 야권도 9월 신민주연합당과 민주당이 합당,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김영삼 문민정부>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후보가 당선, 이듬해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32년만의 문민정부수립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출발한 김영삼정부는 신한국창조를 5년간의 국정지표로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정치개혁을 위한 정치관계법이 개정되고 공직자 재산공개와 사정활동이 펼쳐쳤다.

경제개혁조치로는 기존 제7차경제사회개발 5개년계획 대신 신경제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금융실명제를 단행하였다. 한편 민족사 정통성 확립을 위해 4·19의거를 혁명으로, 5·16혁명을 쿠데타로,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항쟁으로 규정하는 등 주요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작업이 이루어졌다. 문민화작업은 군(軍)에서도 예외없이 이루어져 하나회, 12·12 관련장성 등 이른바 정치군인 집단을 축출하였고 군비리를 파헤쳤다.

[헌법]

대한민국의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이래 9번의 개헌이 있었다. 제헌 이래 제출된 개헌안은 모두 14개였고, 그 처리과정에서 국회는 5차례 해산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유엔한국위원단의 감시 아래 실시된 총선에서 제헌국회(制憲國會)가 탄생되었고, 7월 17일에 역사적인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당시 정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국회의장 이승만의 뜻에 따른 대통령제가 채택됨과 동시에 한민당의 주장인 의원내각제 중에서 국무원제(國務院制)와 국무총리제가 채택되었다. 물론 이 밖에도 의원내각제의 요소로서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 및 정부각료의 국회출석·증언권 등이 포함되었다.

제헌헌법은 한마디로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혼합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성격이 강하였다. 헌정사에서 최초의 개헌은 6·25 중에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하였던 야당의원들이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하자 이승만대통령은 이에 대항하여 정·부통령 직선과 국회양원제 개헌안을 제출하였고, 이 두 개헌안 제출을 계기로 야당의원들이 연행되고 비상계엄이 부산에 선포되는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결국 정·부통령 직선제와 국회양원제가 채택되는 한편, 국회의 국무원불신임제도 반영되는 타협책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다. 제1차 개헌은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절충된 것이었으므로 <발췌개헌(拔萃改憲)>이라고 한다.

한편 1954년에는 당시 여당인 자유당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되자, 이승만대통령의 3선을 가능케 하기 위한 개헌안이 정부측에서 제출되었다. 대통령의 종신연임제와 의원내각제적 요소의 삭제로 철저히 대통령 중심의 권력구조를 보장하는 내용의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개정에 필요한 재적의원 2/3(당시 136명)에 1표가 부족하여 부결되었다. 그러나 여당은 <사사오입>이라는 논리를 도입하여 개헌안의 부결을 번복·가결시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칭 <사사오입개헌>이 이루어졌다.

1960년 4·19로 무너진 이승만정권에 이어 등장한 제2공화국하에서는 제3·4차 개헌이 이루어졌다. 특히 제3차 개헌안은 정부체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그 동안 명목뿐이던 양원제를 실질적으로 채택하였다. 또 기본권에서의 법률유보조항을 삭제하고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선거제, 경찰의 중립 등을 규정한 실로 민주·자유헌법의 면모를 보였다.

5·16 이후 구성된 국가최고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7월 11일 <헌법심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개헌작업에 들어갔다. 각 분야의 전문위원의 심의작업과 전국의 공청회 과정을 거쳐 마련된 제5차 개정안은 통치구조를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꾸고, 국회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해임 건의권을 가지게 하여 내각책임제적 요소도 가미된 것이었다.

이 밖에도 국회를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꾸었으며, 대통령은 1차에 한해 중임하도록 하였다. 이 개헌안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에 붙여져 투표인의 76%가 찬성함으로써 통과되었다. 제6차 개헌은 대통령의 3선여부가 초점이 되었기 때문에 <3선개헌>이라고 한다.

1969년 1월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은 조국근대화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대통령의 2차 이상 중임을 금지하는 헌법조항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대해 야당은 전국적인 개헌반대운동을 벌였고, 공화당에서도 반대의 소리가 높아 의원 5명이 제명당하는 등의 파동이 일어났다.

야당의 반대와 집권당내부의 진통 속에서 1969년 9월 14일 공화당 단독으로 개헌안은 통과시켰고, 이어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가결되었다. 제6차 개헌안은 <대통령의 재임은 3기에 한한다>로 대통령의 중임조항을 고치고, 국회의원이 국무위원을 겸직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1972년 10월 17일에 박정희대통령은 10월유신을 단행하였고, 정부는 10월유신의 과업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의 형성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10월 27일에 공고하고, 국민투표로써 그것을 확정하였다. 제7차 개헌으로 제정된 <유신헌법(維新憲法)>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을 국민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제도로 바꾸었고,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을 부여하여 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중임제한 규정을 철폐하는 것 등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으로 제3공화국이 끝나고, 80년 10월 10일 국무회의에 의해 헌법개정안이 의결된 뒤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됨으로써 제5공화국 헌법이 탄생되었다. 이 헌법은 유신헌법보다 그 입헌주의적 성격이 상당히 회복되어,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간선제, 대통령임기 7년 단임제, 대통령의 국회에 대한 우월한 지위 등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제5공화국을 탄생시킨 헌법은 1980년 말의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된 가운데 비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제정되었으므로 처음부터 국민적 합의라는 바탕이 결여되었다. 그래서 1985년 2월에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계기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1987년 6월의 <민주화시위>로 표출되었고, 당시 민정당 노태우대표위원의 이른바 <6·29선언>으로 그것이 수용됨으로써 10월 27일 국민투표에 의해 현행의 헌법이 탄생하였다.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제9차 개정헌법은 대통령을 직접 뽑겠다는 국민의 의지가 국회에 반영됨으로써 이루어진 민주적인 개헌의 전형적인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헌법조문의 약 37%에 손을 댄 전면적인 개정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헌법개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임기 5년 단임제 및 헌법재판소제도 등의 부분을 제외하면 대체로 제5공화국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변천을 거친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은 전문(前文)과 본문 10장 130개조 및 부칙 6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현행 헌법은 현대 입헌주의적·복지국가적 헌법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전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이념의 계승, 조국의 민주개혁의 사명이 명시되어 있다.

기본권에서는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처벌할 수 없음을 명시하였고(12 ① ②), 노동자의 최저임금제(32 ①)와 단체행동권 보장(33 ① ③) 조항을 두었으며, 여성의 근로보호(32 ④) 조항을 둠으로써 여권신장을 반영하였다. 권력구조에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게 하였고(67 ①), 헌법재판소를 신설하여 9명의 재판관으로 구성하게 하였고, 대통령이 이를 임명하게 하였다(3 ②).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게 하였다(104 ②). 경제면에서는 국가가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을 위해 경제에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고(119 ②), 지역경제육성의무조항(123 ②)을 신설하였다.

헌법개정에서는 국회의 심의를 거쳐 국민투표로 확정하도록 규정함으로써 헌법개정 절차의 일원화를 강화하였다.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 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은 헌법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128 ②)>고 하여 과거의 폐습을 시정한 것이 특색이다.

현행헌법은 제5공화국 헌법과 마찬가지로 헌법개정의 발안을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국회의 의결과 국민투표를 필수적으로 한 것이 특색이다. 한편 대통령권한에 있어서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에 대해 국회가 해제를 요구하는 권한이 삭제되어 대통령권한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사법권독립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법관 추천회의가 빠짐으로써 사법권의 독립이 형식화하기 쉽다는 면을 지니고 있다.

[통치구조]

제4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이 삼권을 가지는 <절대적 대통령제>를 취하였고, 제5공화국 헌법은 여기에서 생기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권력분립제도를 어느 정도 채택하였으며, 제6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더욱 축소하여 국회의 복권을 꾀하였다.

한국 헌법에 어느 정도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나, 이러한 것은 헌법 전체 구조에 비추어 볼 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입법·행정·사법 3권을 담당하는 국회·정부·법원의 권력분립·상호견제를 명시하여 지향하고 있다.

정부는 대통령과 행정부로 이루어지며,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며 국가원수이다. 5년단임제로 국회해산권은 없다. 국무회의는 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으로 구성한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보좌기관으로 내각의 일체성을 상징하며 행정부 장관의 임명을 대통령에게 제청한다. 행정 각부는 대통령·국무총리가 통괄하는 중앙행정기관으로서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행정사무를 집행한다.

국회의 지위는 제 5 공화국 헌법에 비하여 상당히 격상되어 있다. 국회는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되는데, 대법원장·국무총리·대법관 임명 동의권을 가지며 입법·재정·정부 견제·국정감사 및 주요공무원 임명 동의권을 가진다.

법원은 사법기관인 동시에 국민의 기본권 보장기관으로서 대법원장은 일반법관을 임명하고, 법관은 탄핵·형벌에 의하지 않고서는 파면되지 않는다. 법원은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각급법원으로 조직되며, 헌법재판소는 헌법보장기구로서 법률의 위헌심사를 담당할 뿐 아니라 헌법소원심판권(憲法訴願審判權)을 통하여 최종적인 기본권 보장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지닌다.

[정당]

한국은 8·15 이후 무수한 정당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여 왔으며, 어떤 정당도 20년 이상 존속한 적이 없고 대부분 단명에 그쳤다. 집권당은 대체로 실권과 더불어 해체되는 것이 통례였는데, 4·19 직후의 자유당 해체와 10·26 이후의 민주공화당 해체가 대표적인 예이다.

집권당은 자유당 → 민주당 → 민주공화당 → 민주정의당 →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새정치국민회의 순으로 변해 왔고, 야당은 한국민주당을 기점으로 민주국민당 → 민주당 → 민주한국당 → 신한민주당 → 통일민주당 → 평화민주당 → 민주당 → 국민회의 → 한나라당 순으로 이어지면서 창당·분당·합당 등의 이합집산을 되풀이하여 왔다.

제 1 공화국 이래 한국의 정당정치 구조는 대체적으로 우세정당인 여당과 열세정당인 야당을 주축으로 하는 양당구조였으며, 이 구조는 각 공화국별로 양태를 조금씩 달리하였다. 그리고 양태의 차이는 역대 총선 결과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제 1 공화국에서는 4번의 총선이 치러졌다. 제1·2대 총선에서는 여당이나 야당보다 오히려 무소속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제 1 대 총선에서는 정당다운 정당이 없었고 단체소속·무소속 후보들이 난립하였다. 제 2 대 총선에서도 역시 무소속 후보들이 다수의석을 차지하였으며, 대한국민당과 민주국민당이 각각 의석의 11.4%(24석)만을 차지하였을 뿐이다.

제3·4대 총선은 자유당의 장기집권 기도와 야당탄압 때문에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지 못하였다. 제 3 대 총선에서는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국민당의 의석비율이 뚜렷하게 차이났다(114석 대 15석). 제 4 대 총선에 이르러서는 야당이 우세하여 그 차이가 최소화되었다(126석 대 79석).

이유는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을 계기로 민주국민당이 무소속과 제휴하여 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야당진영이 통합되었고, 이승만정권의 강권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선거에서는 무소속이 퇴조하고 당인(黨人)들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것이 주목할 만하다.

제 2 공화국에서는 제 5 대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민주당이 압도적 지지를 받아 집권당이 된 반면(의석 75% 차지), 자유당은 사실상 붕괴하였고 제 1 야당이라고 내세울 만한 정당은 없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신·구 파벌대립으로 제 2 공화국의 정당정치는 체제의 취약성을 보였고 새로이 신민당이 창당되었다(1960. 8. 31).

민주당과 신민당의 대립으로 정국이 혼미한 가운데 1961년 5·16이 일어나 모든 정당이 해산되고, 국회도 문을 닫았다.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세력은 1963년 2월 26일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정당에 의한 군부체제의 운영을 시도하였다.

제 3 공화국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제 6 대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제 7 대 총선에서는 3선개헌 파동으로 지지도가 떨어졌고, 제 8 대 총선에서는 현격하게 하락하였다. 그러던 중 유신(維新)이 단행되자 정당정치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제 4 공화국, 즉 유신체제하의 총선에서는 대통령이 의원 총수의 1/3에 달하는 전국구의원을 지명할 수 있었고, 이들은 정당소속을 초월하였기 때문에 정당정치의 발전을 저해하는 역기능 요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제10대 총선에서 득표율에서는 제 1 야당인 신민당(32.8%)이 공화당(31.7%)을 앞질렀으나, 의석수는 공화당이 크게 우세해(61석 대 145석) 득표율과 의석비율의 괴리현상이 있었다.

10·26으로 유신체제가 붕괴하고 신군부가 등장하자 정당과 국회가 해산되었고, 한국의 정당정치는 또다시 동결되었다.

제 5 공화국 하에서 실시된 제11대 총선에서는 군부세력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이 여당으로 등장하였으며, 다수의 야당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친여적인 민주한국당이 제 1 야당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제12대 총선에서는 해금·재야 인사들이 주축이 된 신한민주당이 제 1 야당이 됨으로써 민주한국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다.

제 6 공화국에서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는 민주화의 기운으로 야당세가 급성장한 것이 특징이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지지도가 34.0%로 이전보다 떨어진 반면, 야당인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에 대한 지지도는 여당을 압도하는 42.1%에 이르렀고, 더구나 민주공화당의 후신인 신민주공화당도 15.6%의 지지율을 확보함으로써 야권우세 정국이 전개되었다.

종래의 양당체제는 4당정립의 다당체제로 전환되었으며, 의회·정당정치도 일방 독주와 극한 대립을 지양하고 협상 위주로 운영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90년에 들어오면서 제 2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제 3 야당인 신민주공화당이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합류함으로써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여당이 탄생하였다.

이에 야권에서도 1991년 9월 신민주연합당과 평화민주당이 합당하여 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권분열로 이루어졌던 다당체제는 4년 만에 양당체제로 재정립되었다. 1992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 여당인 민주자유당에서 자유민주연합이 분리되어 나왔고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서는 야당인 민주당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떨어져 나와 양당구조는 다시 붕괴되었다. 1997년 대선에서 야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연합하여 승리함으로써 한국은 사상 초유로 두 여당과 하나의 야당이라는 체제를 겪고 있다.

이상의 전개과정을 보면 한국의 정당들은 바람직한 정치활동을 보여주지 못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정당들이 정치적 이념과 이해를 같이하는 정치인들의 자생적인 집합이 아니라 대중과 연계 없이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제 6 공화국까지의 여당은 정권을 장악할 실권자의 필요에 따라 하향적으로 형성되었고, 야당은 특정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붕당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정당들은 제도적·정치적 면에서는 근대정당으로서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실제 기능면에서 여당은 통치권자의 장기집권과 권위주의 지배양식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고, 야당은 사당성(私黨性)과 붕당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정당정치가 실패한 이유는 정권교체가 정당체계를 통해 평화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탈정치적(脫政治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당이 정치권력을 능동적으로 창출·유지하지 못하고 새로운 징치권력에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수동적인 기능만 수행해 왔다는 점, 그리고 분단구조와 안보위기에 수반된 반혁신(反革新) 풍조 때문에 보수·혁신의 정책적·이념적 경쟁이 활성화될 수 없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지방자치]

지방자치는 일정한 지역을 기초로 하는 지방자치단체가 그 구성원인 지역주민의 의사에 따라 지역의 공공사무를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수립된 뒤 곧 지방자치법이 제정되어 시·읍·면 의회에 그 장(長)의 선임권과 불신임권이 부여되는 등 지방분권의 형식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1949년에 제정된 이 최초의 지방자치법은 1950년 6·25로 1952년까지 실시가 연기되었다. 1952년 부산 임시정부 당시 지방의회 총선거를 통해 지방의회를 구성하여 역사상 최초로 지방자치가 실시되었으나, 1956년 지방자치법이 개정됨으로써 시·읍·면장을 중앙정부에서 임명하여 중앙집권체제로 복귀하였다.

1960년 4·19 후에는 시·읍·면장뿐 아니라 서울특별시장·도지사 및 동·면장까지 직접선거에 의해서 선출되게 함으로써 지방분권의 전기를 마련하였으나 올바른 분권화를 위한 선행조건이 구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지방행정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협력 결여, 지방의회내의 불화 등 여러 가지 모순이 드러났다.

이러한 모순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5·16 이후에는 곧 지방의회가 해산되었고 그 기능을 중앙정부가 대신하게 되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도 국가공무원으로 임명하여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었다. 제5공화국은 헌법에 <지방의회는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에 따라 구성하되 그 구성시기는 법률로 정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지방의회를 구성할 의사를 보였으나 구체적인 실행이 뒤따르지 않았다.

지방자치에 대한 논의는 제6공화국에 들어와서 급진전되어 1989년 3월에 지방자치법 개정안 등 관련 5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정된 지방자치법에 평민·민주·공화 등 3야당이 단일 지방자치개정안을 제출·통과시킴으로써 여야간에 정치현안이 되어 오다가 12월 19일 국회에서 통과되어 지방자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995년 개정안에 따르면 지방자치는 특별시·광역시·도의 광역자치단체와 시·군·구의 기초 자치단체 등 2개로 나누어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방의회가 구성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주민들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지방의원은 시·도의원의 경우 시·군·구당 1명씩 소선거구제로 선출되고, 인구 30만 명 초과시 20만 명에 1명씩 추가하도록 하였다. 또 시·군·구의원은 읍·면·동당 1명씩 소선거구제로 선출되고, 인구 2만 명 초과시 1명씩 추가하도록 하였다. 시·도의회의원 선거에는 정당추천을 허용하되 시·군·구의회의원 선거에는 정당추천을 배제하였다.

지방의회의원은 임기 4년의 무보수 명예직이다. 91년 3월 26일 기초의회의원 선거를 실시, 전국 3562개 선거구에서 4304명의 시·군·구의회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95년 6월 27일, 기초의원과 기초자치단체장, 광역의원과 광역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어 명실상부한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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