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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6-06 (일)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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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백제 (두산)
백제 百濟

기원 전후한 시기에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하여 한반도 중부와 남서부를 차치하고 고구려, 신라와 삼국을 이루었다. 일본 등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일본의 문화에 영향을 끼쳤고,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궁남지 포룡정 다리. 궁남지는 백제의 궁이었던 사비성(지금의 부소산성) 남쪽에 있는 왕을 위한 인공 연못이다. 연못의 섬에는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그곳까지 이어지는 다리가 놓여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사진
궁남지 포룡정 다리 / 궁남지는 백제의 궁이었던 사비성(지금의 부소산성) 남쪽에 있는 왕을 위한 인공 연못이다. 연못의 섬에는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그곳까지 이어지는 다리가 놓여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각기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오므로 비로소 백제(百濟)라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고 한다.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율령(律令)을 반포하는 등 실질적인 시조로 등장한 것은 고이왕(古爾王)이며,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마한(馬韓) 전역을 통합한 뒤 크게 발전하여 역대 31왕(王)으로 이어지면서 660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유리한 자연 환경과, 지배층이 북방 유이민(流移民)을 모체로 한 단일 체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등의 이점(利點)으로 일찍부터 정치ㆍ문화적 선진성(先進性)을 과시하고, 4세기 중엽에는 일본, 중국 랴오시[遼西] 지방ㆍ산둥 반도[山東半島] 등지와 연결되는 고대의 해외 상업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특히 일본 고대 문화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역대 왕]

[백제의 건국]

《삼국사기》에 실린 온조 설화는 백제를 주몽의 아들인 온조(溫祚)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서 서기전 18년에 세운 나라라고 소개하였다. 반면, 비류 설화에서는 우태의 아들인 비류(沸流)가 동생인 온조와 함께 미추홀(彌鄒忽)에서 세운 나라라고 하였다. 하남위례성은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 풍납토성 혹은 몽촌토성으로 추정하며, 미추홀은 흔히 지금의 인천이라고 믿지만 파주로 추정하기도 한다.

신화 속의 개인은 집단을 상징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하남위례성에서 성장한 온조 집단과 미추홀에서 성장한 비류 집단은 형제라는 뜻이 된다. 집단과 집단간의 형제 관계를 달리 표현하면 연맹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어느 시기 온조 집단과 비류 집단 사이의 연맹 관계를 이야기로 만든 것이 바로 온조 설화와 비류 설화인 셈이다.

그런데 설화에서는 비류가 형이고, 온조가 동생이다.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에 따른다면 형이 우선이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동생인 온조가 결국 시조왕으로 추앙받았다. 비류가 현명하지 못해 땅을 잘못한 선택한 뒤 후회하다가 자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설화의 설명이다.

학자들은 대체로 비류 집단이 먼저 한강 유역에 자리잡은 뒤 온조 집단이 남하해 정착하면서 서로 경쟁하다가 온조 집단의 경제ㆍ군사력이 비류 집단을 압도함으로써 비류 집단이 온조 집단에 흡수된 사정을 온조설화에 담았다고 풀이한다. 즉, 부여ㆍ고구려방면에서 한강유역으로 주민 이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한강유역에 여러 집단이 공존하다가 하나의 정치 체제 속으로 통합된 역사적 사실이 백제의 건국 설화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 백제의 건국 설화로는 도모(都慕)라는 사람이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와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백제의 시조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만큼 백제를 건국하고 발전시키는 데 참여한 집단이 다양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백제가 서기전 18년에 건국했다는 설화 속의 연대를 그대로 믿어도 된다는 학자도 있지만,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중에는 나중에 지어낸 듯한 부분이 없지 않아서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학자들도 있다.

백제의 건국 및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유적으로는 보통 서울시 송파구의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ㆍ가락동 고분군, 춘천시 중도의 적석총, 양평군 문호리의 적석총, 연천군 삼곶리의 적석총, 하남시 미사리의 주거지와 밭 유적 등이 꼽힌다. 이들 유적은 백제를 세운 사람들이 부여ㆍ고구려 계통이라는 건국설화의 내용에 대체로 부합한다.

그런데 백제의 왕성 내지 도성일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風納土城)을 처음 쌓은 시기를 두고 연구자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2세기 사이에 처음 쌓았으며 늦어도 3세기에는 지금과 같은 크기ㆍ모습이었다고 보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일러도 3세기 중엽에야 토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지금과 같은 크기ㆍ모습은 5세기 후반 개로왕 때 수리한 결과라고 본다. 만약 풍납토성이 온조가 나라를 세운 하남위례성에 해당한다면 백제의 건국시기는 유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중국 기록을 참조해서 백제가 2∼3세기에 세워졌다고 보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三國志)》에 실린 마한(馬韓)의 작은 나라 54개국 중 8번째에 백제국(伯濟國)이라는 나라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이 고대 국가 백제(百濟)의 초기 단계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지》는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책으로서 대체로 3세기 중엽경의 상황을 전하고 있으므로, 백제국은 이른바 성읍 국가(城邑國家)단계의 백제가 늦어도 3세기에는 성립되어 있었다는 뜻이라고 풀이하는 것이다.

이처럼 백제가 건국한 시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다만, 풍납토성ㆍ몽촌토성ㆍ석촌동 고분군이 백제의 초기 중심지라는 데에는 학계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어, 이들 유적을 면밀히 발굴 조사한다면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백제의 건국 설화]

백제의 건국설화는 3가지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3가지 이야기 모두 신비스럽거나 괴상한 부분이 거의 없고 매우 사실적이고 소탈한 방법으로 백제 건국을 설명하고 있어, 고구려ㆍ신라의 건국설화에 비해 오히려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백제의 건국 설화가 뒤늦게 채록되었거나 중국화된 합리주의적 시각에서 채록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하여 2개의 설화가 전한다. 제1대 온조왕(溫祚王)을 주인공으로 건국 과정을 설명한 온조 설화는 본문에 실린 반면 비류(沸流)를 주인공으로 삼은 비류 설화는 작은 글씨로 덧붙여져 있다. 그리고 온조 설화에는 위례성의 백제가 미추홀의 비류 집단을 병합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온조계의 성읍 국가가 주체가 되어 비류계 집단을 흡수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삼국사기》의 온조 설화

먼저, 《삼국사기》에 실린 온조(溫祚)설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로서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비류(沸流)라 하고 둘째 아들을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고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생각하건대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말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았으며,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다.

비류는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는데,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나중에 백성들이 올 때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삼국사기》의 비류 설화

한편, 온조 설화에 덧붙여 참고자료처럼 실린 비류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는 졸본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 아들이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가 되어 졸본에서 살았다. 나중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라고 불렀다. 주몽이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는데, 소서노가 국가의 기틀을 열고 다지는 데에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히 두텁게 총애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아들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인 유유(孺留)가 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가며 도와 방업(邦業)을 이루니, 그 노고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국가가 유유의 소유로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서는 한낫 혹과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국도(國都)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온조 설화에서는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라고 하였다.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왕이 된 유리와 남쪽으로 이주해 백제를 세운 온조는 배다른 형제라는 관점이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파생한 나라로서 지배 세력의 혈통과 문화 기반이 같다는 생각을 반영한 설화인 셈이다. 그런데 비류 설화에서는 주몽이 단순히 비류 형제를 예뻐해 준 의붓아버지에 지나지 않는다. 비류 형제의 친아버지는 주몽과 마찬가지로 북부여 출신의 졸본사람 우태이다. 백제는 부여에서 파생한 나라로서 고구려와도 혈통과 문화 기반이 서로 통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설화인 셈이다.

《수서(隋書)》《북사(北史)》의 구태 설화

한편,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와 《북사(北史)》 등에는 전혀 다른 관점의 백제 건국 설화가 전한다. 《수서》 백제전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선조는 고려국(高麗國)에서 나왔다. 그 나라 왕의 시녀 한 명이 갑자기 임신하여 왕이 죽이려하자 시녀가 "마치 달걀처럼 생긴 물건이 내게 와서 감응하더니 임신했다"고 말하였다. 왕이 풀어주었더니 나중에 드디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뒷간에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자 신기하다고 생각해 기르라고 명령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장성하매 고려 왕이 미워하자, 동명은 두려워하더니 도망해 엄수(淹水)에 이르렀는데, 부여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어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는데,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시집보냈으며, 점차 번성하더니 동이(東夷)의 강한 나라가 되었다. 처음에 백 집[家]이 바다를 건넜다 해서 백제라고 불렀으며, 10여 대를 지나도록 대대로 중국에 신하로 지냈는데, 예전 역사책에 상세히 실려 있다.

구태 설화도 역시 백제를 고구려에서 파생한 나라로 설명하고 있다. 설화 속의 구태(仇台)가 공손도(公孫度; ?∼204)의 딸과 혼인했다는 대목에 주목해 이름이 비슷한 백제의 고이왕(古爾王; 234∼286)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백제의 국호]

백제는 국호, 곧 나라의 이름을 몇 차례 바꾸었으며, 기록에 따라 여러 가지 별명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시대를 떠나 가장 일반적인 이름은 역시 백제(百濟)인데, 그 뜻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설명이 조금씩 다르다. 국내기록 중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십제(十濟)라는 나라를 세운 뒤 형인 비류(沸流)의 백성까지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 때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했으므로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에는 처음에 부여사람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와 《수서》 중 어느 쪽 설명이 맞는지는 아직 가려내기 어렵다. 양쪽 모두 설화에 입각한 설명이기에 양쪽 모두 잘못된 설명일 수도 있다.

백제 국호가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바꾸었다는 《삼국사기》의 설명은 중국화된 시각, 곧 한자(漢字)에 입각한 해석이다. 그래서 인위적인 분위기도 함께 지니고 있다. 즉, 나라가 성장함에 따라 '십(十)'에서 '백(百)'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마치 '백'을 염두에 두고 숫자논리에 입각해 '십'을 지어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 점은 《수서》 도 마찬가지다. 숫자 백(百)과 건너다라는 뜻을 지닌 제(濟)를 이어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기록은 중국에서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이다. 《삼국지》에는 <한전(韓傳)>이라 하여 우리의 삼한(三韓)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부분이 있는데, 그곳에는 마한(馬韓)에 속한 소국 54개의 이름을 열거한 대목이 있다. 그중 8번째에 백제국(伯濟國)이라는 나라 이름이 적혀 있다.

백제(伯濟)와 백제(百濟)는 한자만 약간 다를 뿐 같은 음(音)으로 된 글자이다. 또, 《삼국지》의 백제국은 한강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백제와 근거지도 같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백제국을 고대국가 백제의 초기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 즉, 백제국이 국력을 신장한 결과 국호를 한자 뜻이 더 좋고 세련된 백제(百濟)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 서기 720년에 편찬된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위례국(慰禮國)'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한 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에는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나라 이름으로 사용한 예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위례국이라는 이름도 그다지 어색한 것은 아니다. 만약 《일본서기》의 위례국이라는 표현이 어떤 근거를 가진 것이라면, 백제라는 이름보다 앞선 시기의 나라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것이 정식 국호였는지, 아니면 일종의 별명이었는지는 아직 가리기 어렵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성왕(聖王) 16년(538)에 도읍을 웅진(熊津 ; 지금의 공주)에서 사비(泗비 ; 지금의 부여)로 옮기면서 나라 이름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부여'라는 국호를 오래 사용하지는 않았다. 도읍을 옮길 때 국가 분위기를 새롭게 한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까지 바꾸었지만, 백제라는 국호가 지니는 전통적 이미지가 이미 국내ㆍ외에 널리 퍼져있었던 탓에 얼마 뒤 나라 이름을 백제로 되돌린 것으로 알려진다.

백제는 응준(鷹準)과 나투(羅鬪)로 불리기도 했다. 고려 시대의 책인 《제왕운기(帝王韻紀)》 에는 '후대의 왕 때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한 적이 있으며, 또 응준 혹은 나투라고 칭하기도 했다'는 대목이 있다. 응준과 나투는 모두 조류(鳥類)의 일종인 '매'를 가리킨다. 그래서 응준과 나투는 정식 국호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백제를 지칭할 때 사용한 일종의 별명이라고 한다. 또,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가 선덕왕(善德王) 14년(645)에 건립한 황룡사(皇龍寺) 9층탑의 제5층에 신라의 경계해야 할 적대국으로서 응유(鷹遊)를 적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의 응유를 응준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백제의 성립과 발전]

백제 고이왕(234∼286)은 16관등급, 6좌평(佐平)의 관제를 정비하고 관복(官服) 제정, 율령 반포, 남당(南堂) 설치 등 고대 국가의 체제를 마련하여 백제의 실질적 시조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낙랑군(樂浪郡)의 압력을 배제하면서 한강 유역을 통합하였다.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346∼375) 때에는 정복 군주로서 대방군(帶方郡)의 옛 땅을 확보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살해하는 등 국위를 떨쳤다. 한편 마한을 완전히 통합하여 그 세력이 오늘날의 전라도 남해안까지 미치고, 중국 랴오시 지방까지 진출하는가 하면 중국의 남조(南朝)인 동진(東晉)과 통교하여 문화를 수입하고 다시 일본과도 접촉하여 한학(漢學)을 전하기도 하였다.

지도. 4세기 백제의 발전

이와 같이 근초고왕 치세(治世)를 전후로 한 4세기 중엽에는 랴오시 지방, 산둥 반도 및 일본의 북부 규슈[九州] 지방까지 진출하여, 고대 상업 세력을 형성하고, 특히 중국의 송(宋)ㆍ제(齊)ㆍ양(梁) 나라와의 교역은 물론, 일본에 대한 한반도의 문화이식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제17대 아신왕(阿莘王) 5년(396)에는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군대에 패하여 한성을 침공당하고 한강선(漢江線)까지 후퇴하여 임진강 유역을 잃었다. 비유왕(毗有王:427∼455)때에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신라 눌지왕(訥祗王)과 나제동맹(羅濟同盟:433)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했으나 개로왕(蓋鹵王:455∼475) 때에는 장수왕의 압력이 더욱 가중되었다.

결국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에 침공하여 개로왕을 패사시키고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때 문주왕(文周王:475∼477)은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천도하였으나(475) 국세는 더욱 쇠약해졌다. 삼근왕(三斤王)에 이은 동성왕(東城王:479∼501)은 남제(南齊)와 외교하고, 신라 소지왕(炤知王)과 결혼동맹(結婚同盟:493)을 맺어 양국의 유대관계를 굳혔으나 임류각(臨流閣) 같은 궁전을 짓고 방종과 사치에 젖어 끝내 반신(反臣)인 좌평 백가(苩加)에게 피살되었다.

무령왕(武寧王:501∼523)이 즉위하면서 안으로는 전국에 22개의 담로(檐魯:邑에 해당하는행정단위)를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 지방 통치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平山)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다. 또한 말갈(靺鞨)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중국의 양나라와 통교하면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聖王:523∼554)은 부왕(父王)의 업적을 기반으로 하여 중흥의 군주로 활약하였다. 그는 수도를 사비(泗沘:부여)로 천도하고(538)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는 한편, 중앙에 22부를 두고 지방을 5부, 5방 제도로 정비하여 국력의 쇄신에 진력하였다. 그는 중국 남조인 양나라와 통교하여 문물을 수입하는 한편,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썼다. 그리고 신라 진흥왕(眞興王)과 제휴하여 독산성(獨山城:지금의 禮山으로 추정)에 침입해온 고구려군을 격퇴시키는 등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으나, 신라 진흥왕의 배반으로 나ㆍ제동맹은 결렬되고(553) 관산성(管山城:沃川)에서 싸우다가 왕이 전사(554)하여 한강 유역은 신라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제의 국운은 날로 쇠약해지기만 하고 위덕왕(威德王)ㆍ혜왕(惠王)ㆍ법왕(法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600∼641)ㆍ의자왕(義慈王:641∼660) 때 지나친 토목공사와 신라의 침공 등으로 국력이 극도로 소모되고 민심이 이반함으로써 국정은 문란해졌다.

[백제의 왕위 계승]

백제의 왕실과 왕위계승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이다. 그에 따르면, 백제는 시조 온조왕을 포함하여 모두 31명의 왕이 즉위하였으며, 그들의 성(姓)은 예외없이 부여(扶餘)씨였다고 한다. 그리고 제5대 초고왕(肖古王)부터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까지의 기간에 이루어진 일부 형제상속의 특별한 예를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자상속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을 그대로 믿는 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사의 정확도를 의심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왕위의 부자상속에 대한 부분을 믿기 어렵다는 학자가 적지 않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린 왕실계보를 그대로 믿지 못하는 학자들 중에는 이른바 왕실교대론(王室交代論)이라 하여 제8대 고이왕(古爾王) 때라든가 제11대 비류왕(比流王) 또는 제12대 근초고왕 때 왕실이 교체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즉, 《삼국사기》의 기록에서와 같이 부여씨가 대대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비교적 후대의 일이며, 그 전에는 다른 성씨(姓氏)의 왕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침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조에는 백제 왕실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해씨(解氏)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백제의 왕실 성씨가 해씨에서 부여씨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한다.

중국측의 백제 관련 기록을 참고할 때, 백제의 왕 중에서 부여씨임이 분명하게 입증되는 최초의 왕은 근초고왕이다. 따라서 적어도 근초고왕 이후는 부여씨의 왕실 독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선 비류왕 때까지의 왕실에 대해서는 기록이 매우 적을 뿐 아니라 신빙성마저 높지 않은 부분이 있기에 왕실의 성격을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다. 다만, 제5대 초고왕의 이름이 제13대 근초고왕과 같다는 점에 주목해 초고왕 이하는 모두 부여씨로 간주하고, 그에 앞선 제4대 개루왕까지는 부여계통의 해씨로 해석하는 견해라든가, 제8대 고이왕과 그의 자손인 제9대 책계왕(責稽王), 제10대 분서왕(汾西王), 제12대 계왕(契王) 등을 우씨(優氏)로 해석한 다음 일정기간만 부여씨 대신 우씨가 왕실을 차지하였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삼국사기》에 입각한 백제의 왕위계승도는 다음과 같다.
백제 왕위계승도. 두산세계대백과 사진
[백제의 정치제도]

중앙 관제

백제는 일찍이 중국 주(周)나라 육전(六典) 제도를 본떠서 삼국 중 제도정비의 선구였다. 고이왕 때부터 왕 밑에 6좌평과 16관등급 제도를 두어 행정을 맡게 하고, 또 왕의 바로 밑에는 수상격인 상좌평(上佐平)을 두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 관청의 장관들은 3년마다 선거로 뽑았다. 성왕 때 사비로 천도(538)한 이후에는 내관(內官:12부)과 외관(外官:10부)으로 이루어지는 22부의 중앙관서를 새로 두었다. 중앙의 행정구역은 상 ㆍ하ㆍ전ㆍ후ㆍ중의 5부로 구분하고 부 밑에 항(巷)을 두었으며 각 부에는 500명의 군인이 주둔하였다.

지방 관제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웅진시대까지 담로제(擔魯制)였다. 《양서(梁書)》의 <백제전>에 따르면 전국에 22담로를 두고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담로는 지방지배의 거점으로서 성을 뜻하는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일정한 통치영역을 나타내는 것이며, 일종의 봉건제라고 할 수 있다. 담로의 설치에 대해서는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 보기도 하지만 근초고왕이 지방지배조직을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한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2개라고 한 것은 웅진(熊津)에 도읍하던 때의 것으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천이 있었으며 백제 영토가 확대되었을 때에는 50여 개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로 천도 후,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5방제(五方制)로 변경되었다. 5방은 중방인 고사성(古沙城), 동방인 득안성(得安城), 남방인(久知下城), 서방인 도선성(刀先城), 북방인 웅진성(熊津城)이었다. 각 방에는 방령(方領) 1명, 방좌(方佐) 2명이 파견되었다. 각 방은 6~10개의 군(郡)으로 이루어졌다.

군사 제도

백제의 군사제도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로서 중앙의 5부에는 각 부마다 군사 500명씩을 배정하여 치안을 유지하였다. 지방의 5방 아래 10군을 두어 군마다 3인의 장군과 700∼1,200명의 군대를 두었는데, 지휘관은 방령ㆍ군장이었다. 방과 군은 행정구역인 동시에 순수한 군사적인 임무를 띠고 있었으므로, 각 성진(城鎭)은 모두 험준한 산에 의거한 산성이었다.

형벌 제도

백제의 형법은 매우 가혹하였다. 살인자ㆍ반역자 및 전쟁에서 퇴군(退軍)한 자는 사형에 처하였으며, 부인을 범간(犯姦)한 자는 남편집의 노예가 되게 하고, 뇌물을 받은 관리와 절도자는 2배의 배상을 하게 하며 옥에 가두거나 귀양도 보냈다.

[백제의 인구와 사회 구조]

세기 전반기의 한반도 정세를 전하는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마한(馬韓)의 세력 가운데 큰 나라는 1만여 집[家], 작은 나라는 수천 집[家]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백제는 전체 50여 개 나라 중 대체로 큰 나라에 속했을 것이므로, 1호(戶)당 5명 안팎으로 보는 계산법에 따라 당시의 백제 인구를 추산해보면, 대략 5∼6만 명 정도 된다.

한편, 백제 멸망시의 인구는 자료에 따라 달리 기재되어 다소 혼란스러운 편인데, 그중 비교적 주목되는 자료로서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당나라가 백제 땅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할 당시 37주(州), 250현(縣)에 모두 24만호(戶), 620만 명이 살았다고 적혀 있다. 당시의 사실을 적은 금석문(金石文)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지만,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즉, 1호당 5명 안팎이라는 평균치에 비추어볼 때, 24만호는 120만 명에 해당하는 수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5배가 넘는 620만 명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마침 육(六)자와 일(一)자는 글자 모양도 유사하기에 620만 명은 120만 명의 잘못일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백제의 전성기에 인구가 152,300호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의 전성기가 과연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4세기 중ㆍ후반 근초고왕대의 인구가 70∼80만 명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대략 4∼5세기 무렵의 인구가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4∼5세기에 70∼80만 명, 7세기에 약 120만 명에 달하였을 백제의 주민은 모두 당시의 신분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은 왕과 왕족, 귀족과 관료, 그리고 일반민과 노예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왕과 왕족은 부여ㆍ고구려 방면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일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의 역사서 《주서(周書)》에는 백제에서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는데, 백성들은 건길지라고 부른다"는 대목이 있다. 학자들은 이를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언어 차이를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백제 초기부터 큰 세력을 형성한 대표적 귀족으로는 여러 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며 서로 경쟁한 해씨(解氏)와 진씨(眞氏)가 있다. 특히, 해씨는 부여씨(扶餘氏)가 왕실을 차지하기 전의 옛 왕족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하는데, 이들 역시 부여ㆍ고구려계통이었던 듯하다. 사비시대의 귀족세력으로는 사(沙)ㆍ연(燕)ㆍ협(협)ㆍ해(解)ㆍ진(眞)ㆍ국(國)ㆍ목(木)ㆍ백(백)씨 등 8개의 성씨가 《통전(通典)》을 비롯한 중국측 기록에 소개되어 있다.

백제에서는 관리를 16개의 관등(官等)으로 서열화했다. 제1위 좌평(佐平)부터 제6위 내솔(柰率)까지의 이른바 솔(率)계통 관료들은 정치ㆍ행정ㆍ군사분야의 지휘관, 제7위 장덕(將德)부터 제11위 대덕(對德)까지의 덕(德)계통 관료들은 각 분야의 실무진, 제12위부터 제16위까지의 문독(文督)ㆍ무독(武督)ㆍ좌군(左軍)ㆍ진무(振武)ㆍ극우(克虞) 등은 대부분 군사 행정과 관련된 하위 관리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들 각 계층 사이에는 구분이 명확해 솔계통 관료들은 자주색 옷, 덕계통 관료들은 붉은색 옷, 문독 이하의 관리는 파란색 옷을 입었다고 한다. 《구당서(舊唐書)》 등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일반 백성은 붉은색이나 자주색 계통의 옷을 입지 못했다고 하는데, 파란색만 제외한 것을 보면 문독 이하의 하위관리는 일반 백성과 신분 차이가 크지 않았던 듯하다.

일반 백성의 15세 이상은 성인으로 분류되어 매년 각종 세금을 내어야 했으며, 또한 병역과 부역에도 종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금은 그 집의 생활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으며,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역시 내용상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에는 대체로 5∼6가구당 1명 정도가 군대에 징발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군대 징발은 일단 일반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전쟁 등에서의 공훈을 통해 사회ㆍ경제적 지위가 상승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의 한 축을 형성하였던 국가이기에 한시도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많은 백성을 전쟁터에서 잃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승리한 전쟁을 통해 적지 않은 수의 포로를 얻기도 하였다. 포로는 주로 노예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포로를 장병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기사가 여러 차례 나온다.

또, 《북사(北史)》ㆍ《구당서》 등의 중국 기록에 따르면, 백제에서는 혼인한 여자가 간통을 하면 남편 집의 노예로 삼았고, 국가에 반역한 사람의 가족 역시 노예로 삼았다고 한다. 또, 살인한 사람은 노비 3명을 내면 죄를 용서해주었다는 기록도 있어 노예 매매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경제 생활]

백제는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여 삼한 시대부터 벼농사와 제언(堤堰)이 발달하였고, 직조술ㆍ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금속공업도 발달하여 무기ㆍ금관ㆍ금은 장식품 ㆍ불상 등을 만들었다. 토지 제도는 국유가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 방법은 두락제(斗落制)를 썼으며 조세는 조(租)를 쌀로, 세(稅)를 포ㆍ비단ㆍ삼베 등으로 바치게 하였는데 그 징수 방법과 양(量)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백제의 대외 무역을 보면 중국 남부 및 일본과 교역이 성행하여 일본에 말ㆍ누에ㆍ직조법ㆍ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이 전파되었다. 백제의 무역항으로는 영암(靈岩) 및 당항성(黨項城)이 크게 번성하였다.

[백제의 종교 생활]

삼국 시대에도 민간에서는 천신ㆍ산신ㆍ해신ㆍ동물들을 비롯한 잡신을 모시는 샤머니즘이나 점술ㆍ조상 숭배 등이 널리 유행되었다. 백제에서는 동명신(東明神:주몽)ㆍ국모신(國母神:유화 부인)ㆍ구태신(仇台神:고이왕) 및 민간신앙이 있었다. 불교는 384년(침류왕 1) 동진(東晉)으로부터 인도의 중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처음으로 전래하고 385년 광주(廣州)에 한산사(漢山寺)를 세워 차차 전파되었다. 불교의 종파는 율종(律宗)과 성실종(成實宗)이 유행되었다.

불교는 불법(佛法)ㆍ사상과 문화 개발에 이바지하였는데, 중국 남조(南朝)와 국교가 열리면서 많은 구법승(求法僧)의 활약이 있었고, 특히 성왕(聖王) 때를 전후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파시키는 등 번성하였다. 당시에 활약한 명승 가운데 위덕왕 때의 혜총(惠聰)은 일본에 계율종(戒律宗)을 전하고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역시 성왕 때 인도에 유학한 겸익(謙益)은 불법을 연구하고 율종(律宗)을 전래하여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하였다.

또 성왕 때 혜현(惠顯)은 당나라에 구법승으로 가서 삼론종(三論宗)을 받아들이고, 관륵(觀勒)은 무왕 때 일본에 천문과 역법 등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성왕 때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가 일본에 불경 등을 전하고(552), 법왕(法王) 때는 살생금지령과 사상통일에 노력했으며, 무왕 때는 왕흥사(王興寺)ㆍ미륵사(彌勒寺)를 건축하여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백제에 도교(道敎)가 전래되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부여에서 출토된 산경전(山景塼:화전)의 그림(三神山:道使)이 도교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며, 부여의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서도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유행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 근구수왕조(近仇首王條)에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하기를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면…’이라고 한 기록을 봐도 당시 도교의 유행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의 한학]

백제의 교육 기관에 대하여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으나 오경박사(五經博士) ㆍ의박사(醫博士)ㆍ역박사(易博士)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자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증거로는 472년(개로왕 18)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國書)가 《위서(魏書)》에 실려 있고, 541년(성왕 19) 양(梁)나라 사신 육허(陸詡)가 와서 <예론(禮論)>을 강의하였으며, 근초고왕 때의 아직기(阿直岐)와 근구수왕 때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한학을 전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

또한 무령왕 때 단양이(段楊爾)ㆍ고안무(高安茂) 등이 일본에 유학(儒學)을 전한 사실 등으로 보아 백제 한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고,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해서체의 금석문이 지석(誌石:왕 523, 왕비 526)이나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로 된 사택지적비 등은 이미 한문학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려준다.

[백제의 국사 편찬과 시가]

백제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면서 왕권의 존엄과 국가의 위신을 떨치게 되자 국왕의 정치적 업적을 수록할 국사 편찬사업에 착수하여 삼국 중 백제가 제일 먼저 그것을 편찬하였다. 375년(근초고왕 30)에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하고, 그 밖에도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면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의 역사책이 있었다고 하나, 이 모두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백제의 시가로는 작자ㆍ연대가 미상인 《정읍사(井邑詞)》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해지며, 가명(歌名)만이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전해지는 《지리산가(智異山歌)》 《무등산가(無等山歌)》 《방등산가(方等山歌)》 《선운산가(禪雲山歌)》 등이 있다.

[백제의 예술]

삼국은 역사적 환경의 차이로 각각 어느 정도 특성을 달리하고 있다. 백제의 예술은 우아하고 섬세한 미의식(美意識)이 세련된 것이 특징이다. 백제 예술은 중국의 남조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예술을 개발하였다. 특히 일본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개발시키는 등 한반도 문화 전달의 공이 컸다.

1) 백제의 건축

백제의 건축은 절터ㆍ탑ㆍ고분(古墳)에서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절터로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金馬面) 소재의 백제 최대의 미륵사지(彌勒寺址)가 있고 이 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 최대의 것으로 목조탑(木造塔)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정림사지 5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은 우아하고 세련되어 안정감을 주며 삼국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하다.

백제의 분묘는 복장(複葬)이 가능한 석실묘의 전통과 현실(玄室)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중국 남조의 전실(塼室) 고분의 형태까지 받아들인 것으로, 당시 대륙과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 한성시대의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石村洞)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卒本)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積石塚)이며, 웅진(熊津) 시대의 공주 송산리(宋山里) 고분은 굴식[橫穴式] 돌방[石室] 고분이다.

또한 무령왕릉과 같은 전분(塼墳)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蓮花文)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전축분(塼築墳)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ㆍ석수(石獸)ㆍ동자상(童子像)ㆍ청동경ㆍ자기ㆍ지석(誌石)ㆍ금은 장신구 등이 있는데, 이 고분을 통해서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양(梁)나라와의 문화교류, 장법(葬法)은 물론이고, 특히 삼국간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다.

또 사비 시대의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은 횡혈식 석실고분으로 송산리 고분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기술과 연화문ㆍ운문(雲文), 사신도(四神圖)의 벽화가 세련되었다.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은 백제 말기에 화강암벽에 새긴 마애석불인데, 소박한 옷차림,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아름다움은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금동관세음보살상(金銅觀世音菩薩像:충남 부여군 출토),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 무령왕릉의 출토품인 금제 관식(金製冠飾)ㆍ석수ㆍ동자상, 금은 장식품인 목걸이ㆍ팔찌ㆍ귀걸이 등이 유명하며 산수귀문전(山水鬼文塼)ㆍ연화문전(蓮花文塼) 등과 기와 등에도 백제미술의 우수성이 나타나 있는데, 고구려의 와당(瓦當)은 힘과 정열(와당의 귀신상)을 표현한데 비하여 백제의 것은 온화한 아름다움이 그 특색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 조각가로서는 신라의 황룡사(皇龍寺) 9층탑을 건축한 아비지(阿非知)가 있다.

2) 백제의 미술과 음악

백제의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ㆍ운문, 사신도(四神圖)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神宿圖)가 우아하고 섬세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화가로는 위덕왕의 왕자로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화상(畵像)을 그린 아좌태자(阿佐太子),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남긴 하성(河成)이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誌石:해서체)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러나 5∼6세기에 중국 남송(南宋)과 북위(北魏)에 백제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고,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음악가가 교대로 일본에 건너가서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는 고(鼓)ㆍ각(角)ㆍ공후(箜篌)ㆍ쟁(箏)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7세기 초 백제의 미마지(味摩之)가 중국 오(吳)나라에서 배운 기악(伎樂)을 일본에 전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백제 문화의 일본 전파]

백제 근초고왕 때 최초로 일본에 한학을 전하고, 근초고왕 또는 아신왕 때 왕인 박사가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했으며, 무령왕 때 단양이ㆍ고안무, 성왕 때 유귀(柳貴) 등은 오경박사(五經博士)로서 한학과 유학 등을 전하였다. 그리고 무왕 때 관륵(觀勒)은 천문ㆍ역법ㆍ지리 등을 전하고, 성왕 때(552) 노리사치계는 최초로 불교를 전했으며, 혜총은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고, 도장은 성실론(成實論)을 저술하였다. 아좌태자는 쇼토쿠태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 밖에도 화공(畵工)ㆍ와공(瓦工)과 경사(經師)ㆍ율사(律士)ㆍ의사들을 보냈다. 이와 같이 삼국 중 백제문화는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백제의 멸망]

백제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은 초기에 문신인 성충(成忠)ㆍ흥수(興首), 무신인 윤충(允忠)ㆍ계백(階伯) 등을 등용하여 선정을 베푸는 한편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김품석(金品釋)과 그의 처자를 죽이는 등 신라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643년에 고구려와 화친한 것을 계기로 당항성(黨項城)을 공략하는 등 지나친 외정과 사치스런 태자궁(太子宮)ㆍ망해정(望海亭)의 건축 등 향락에 빠지고 흥수ㆍ성충 등의 인재 배척이 민심을 이반시키면서 국정은 문란해졌다.

이 틈을 타고 나ㆍ당연합군이 합세하여 신라는 김유신(金庾信)ㆍ김법민(金法敏:文武王)ㆍ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군대로 탄현(炭峴)을 넘어 공격하여 백제의 장군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하고,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과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백강(白江:錦江 하류)으로 침입, 백제군을 격파하니 660년(의자왕 20) 마침내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 때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ㆍ융(隆)ㆍ연(演) 및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870명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당나라는 백제 땅에 5도독부(都督府:熊津ㆍ馬韓ㆍ東明ㆍ金漣ㆍ德安)을 설치, 통치하다가 다시 이를 개편하여 웅진도독부를 최고의 치부(治府)로 하고 그 밑에 7주(州)ㆍ52현(縣)을 두어 잠시 통치하다가 훗날 신라가 통치하게 되었다.

[백제의 부흥 운동]

백제 왕족 출신의 복신(福信)은 승려인 도침(道琛)과 주류성(周留城:韓山)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시도하여 왕자 풍(豊)을 영립하고 광복군을 조직, 일본에 원병을 청하고 임존성(任存城:大興)에서 기병한 흑치상지(黑齒常之)ㆍ지수신(遲受信) 등의 호응을 받아 662년(문무왕 2)에는 지라성(支羅城)ㆍ급윤성(及尹城)ㆍ대산책(大山柵)ㆍ사정(沙井)ㆍ내사지성(內斯只城:儒城) 등 대체로 금강 이동(以東)의 여러 성책(城柵)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당군에 대한 신라의 군량미 보급을 한때 불가능하게까지 하는 등 그 세력을 떨쳤으나, 복신과 도침의 불화로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복신을 죽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광복군은 약화되어 주류성이 함락되었다. 풍은 고구려로 망명하고,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들어가 무공을 세웠으며 지수신은 주류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임존성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고구려로 망명하니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백제ㆍ고구려의 부흥운동과 나당전쟁.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백제는 복신ㆍ흑치상지ㆍ도침 등을 주축으로, 고구려는 안승ㆍ검모잠ㆍ고연무 등을 주축으로 각각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 지도
백제ㆍ고구려의 부흥운동과 나당전쟁 /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백제는 복신ㆍ흑치상지ㆍ도침 등을 주축으로, 고구려는 안승ㆍ검모잠ㆍ고연무 등을 주축으로 각각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김기섭 집필>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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