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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6-18 (금) 08:17
분 류 사전4
ㆍ조회: 501      
[고대] 단양 신라 적성비 (민족)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에 있는 신라 시대의 비석. 높이 93㎝, 윗너비 107㎝, 아랫너비 53㎝. 국보 제198호. 545(진흥왕 6)∼550년(진흥왕 11)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78년 1월 6일 하방리 뒷산인 성재산 적성(赤城) 내에서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 조사되었다.

[비의 형태]

출토 상태는 표면이 위를 향하고 뿌리가 북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 있어 깊게는 30㎝ 정도가 묻혀 있었다. 비문은 화강암 자연석의 곱고 판판한 면에 새겼는데, 얕게 음각했으나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 비면이 깨끗하고 자획(字劃)이 생생하다.

비의 형태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밑으로 내려오면서 좁아들고 얇아져 22㎝, 14㎝, 5㎝의 두께이다. 개석(蓋石 : 뚜껑돌)과 대좌석(臺座石)이 없이 발견되었으나, 비의 모양을 보아 뚜껑돌은 본래부터 없었던 것 같고, 밑부분이 좁은 것을 보면 꼽는 형식의 대석(臺石)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비의 윗부분이 절단, 파손되었으나 좌ㆍ우 양쪽 측면은 거의 완형이고, 특히 비 표면은 양쪽이 완전해 22행의 비문이 분명하다. 각 행의 명문은 20자씩으로 짐작되어 19행까지는 20자씩 모두 380자이고, 20행과 21행은 19자씩으로 38자이며, 끝 행은 12자로 전체의 명문은 도합 430자로 추산된다.

지금 남아 있는 글자는 284자로서 판독이 가능하다. 글자는 자경 1.5㎝, 2㎝, 3㎝ 크기로 각 행의 명문은 가로와 세로의 줄을 잘 맞추고 있는데, 예서풍(隷書風)의 해서(楷書)로서 서예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결국, 결락된 글자는 146자인데, 파손된 윗부분을 보면 첫머리인 제1행부터 제4행까지와 제8행부터 제10행까지, 그리고 제13행부터 제16행까지가 큰 덩어리로 파손된 것 같고, 다른 부분은 얇게 격지로 깨지면서 조각이 난 것으로 짐작된다.

큼직한 덩어리로 떨어져나간 것 같이 보이는 부분은 돌 색깔이 검게 죽어 있고, 바위이끼의 흔적까지 있어 파손된 시기는 상당히 오래 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발견 당시 노출되어 있던 석비의 첫머리 부분은 비바람에 씻기고 등산객들의 발길에 시달려 마손된 부분도 있다. 그 뒤 3, 4개월에 걸쳐 석비 주변 일대를 발굴해 동서 12m, 남북 9m 범위의 장방형 발굴구역 내에서 옛 건물터 및 비편, 기와ㆍ토기조각ㆍ금속제 유품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을 수습, 조사하였다.

석렬(石列)로써 추측해본 건물자리는 남면 길이 7.5m, 서쪽면 길이 7m인데, 비는 서쪽면 석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서편으로 또 다른 석렬 자리가 있어, 이들 석렬 사이에 3m 너비의 툇간이 있었고, 이 곳에 석비를 보존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건물 자리는 작은 냇돌[천석(川石)]을 평평하게 거의 전면에 깔아 다졌는데, 이 부분에서 약간의 삼국시대의 기와ㆍ토기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곳의 건물은 주변의 지세, 대지의 위치, 적성산성과의 관계 등으로 보아, 적성을 축성하고 건립한 건축물로서 당시의 지휘본부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수습된 유물을 비편부터 살펴보면, '성재(城在)ㆍ아간(阿干)’,'주(主)ㆍ제차(第次)’,'사(舍)ㆍ추문(추文)’,'십(十)ㆍ육가(六家)’,'전사(佃舍)’,'본(本)’,'도(道)’,'선(선)’,'적(赤)’,'성(城)’,'물(勿)’ 등이 새겨진 11조각에서 21자를 판독하였다. 11조각 중에서 '성재ㆍ아간’,'주ㆍ제차’,'사ㆍ추문’,'십ㆍ육가’ 등 4조각은 2행씩이고, 나머지 7조각은 1행 혹은 1자씩이다.

이 밖에 글자를 알 수 없는 비편 6조각, 글자가 없는 비편 23조각이 발견되었다. 23조각 가운데는 둥근 부분이 9조각이나 있어 석비의 윗부분이 둥근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발굴된 21자를 더해 이제까지 판명된 비문은 총 305자가 된다.

기왓장은 불[火]에 맞아서인지 붉은색 평와편[赤色平瓦片]이 많고, 얇고 단단한 회청색(灰靑色)의 전형적인 삼국시대 평기와도 드물게 보이며, 평행선이나 사선이 그려진 기와도 있었다.

토기는 삼국 시대 신라의 붉은색 연질토기편[赤色軟質土器片]과 고배편(高杯片)을 비롯해 그릇의 입구 둘레편과 손잡이 등의 토기조각들이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유물로 출토되었다. 금속류의 유물로는 철지은피교구(鐵地銀被沽具) 1점, 철로 만든 칼ㆍ화살촉ㆍ둥근장식편ㆍ못 등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녹이 슬고 삭아서 형태를 분간하기 어렵다.

비문의 자체(字體)는 중국 남북조 초기의 것과 일치하며, 굴곡을 지닌 율동적인 글씨로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정이 나타난 운필법(運筆法)이다. 얕게 새겼음에도 붓을 움직인 선율의 감각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글씨의 특징은 약간 옆으로 퍼져 있어 진흥왕 때의 정방형체의 비문들과는 다른 취향을 보이고 있다. 중국 북조의 비가 대체로 방필(方筆)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남조의 영향을 받아 원필(圓筆)을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나 <평양고구려고성각석(平壤高句麗古城刻石)>의 방필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가로와 세로의 간격을 맞추어 썼는데도 글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맛을 풍기는 것도 더욱 높은 품격을 보여주며, 서예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비문의 이체자(異體字)들은 중국 남북조 초기의 비갈들의 글자와 일치해 시대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비문의 내용과 성격]

문장체는 신라고비(新羅古碑) 중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향찰식(鄕札式)도 아니며 그렇다고 한문체로도 통하지 않는다. '절(節)’ㆍ'중(中)’ㆍ'야(耶)’ㆍ'여(如)’ 등 향찰에 쓰이는 글자가 없지 않으나 관계사가 거의 없어 향찰식의 연결이 불가능하다. 또한 한문식의 어기사(語氣詞)인 '야(也)’, '야(耶)’ 등이 있으나 한문식으로도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제6행의 “절교(節敎)……” 이하에서 제17행까지 모두 11행이 문장에 해당되는데, 이 문장 가운데 '사문(師文)’ㆍ'파진루(巴珍婁)’ㆍ'도지(刀只)’ㆍ'마례혜(馬禮兮)’ㆍ'도두지(道豆只)’ㆍ'열리파(悅利巴)’ㆍ'도라혜(刀羅兮)’ 등 6인의 사람 이름을 제외하면 모두가 연속되는 문장으로서 삼국 시대 신라비로는 가장 긴 글이다.

문장 첫머리에 왕교(王敎)를 받은 10인의 중앙고관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은 이간(伊干) 이하 급간(及干) 이상의 고관이고, 모두 탁부(喙部)ㆍ사탁부(沙喙部)의 출신부를 가진 점으로 보아 왕경인(王京人)임을 알 수 있다.

인명 밑에 '지(智)’의 경칭이 있는 것은 진흥왕순수비와 같으나, 관등 밑에도 '지(支)’의 경칭이 붙은 것은 다르다. 출신부명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는데, 없는 경우는 앞사람의 부명과 같기 때문에 생략된 것이며, 황초령비(黃草嶺碑)나 마운령비(摩雲嶺碑)에서도 볼 수 있다.

10인은 이사부(伊史夫:伊干)ㆍ두미(豆彌:彼珍干)ㆍ서부질(西夫叱:大阿干)ㆍ거칠부(居柒夫:大阿干)ㆍ내례부(內禮夫:大阿干)ㆍ고두림(高頭林:미상)ㆍ비차부(比次夫:阿干)ㆍ무력(武力:阿干)ㆍ도설(導設:及干)ㆍ조흑부(助黑夫:及干) 등이다. '이사부’는 ≪삼국사기≫의 이사부, '내례부’는 ≪삼국사기≫의 노리부(弩里夫), '비차부’는 ≪삼국사기≫의 비차부(比次夫), '무력’은 ≪삼국사기≫의 무력(武力), 즉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었다.

특히 이사부는 지증왕대부터 진흥왕대에 걸쳐 북방개척의 주역을 담당하고, 진흥왕 후반기에는 거칠부에게 임무를 넘겨준 최고사령관이었다.

비차부는 551년(진흥왕 12) 거칠부를 따라 고구려의 10군을 탈취할 때 출정한 장군이었다. 무력은 553년 백제의 동북지방을 빼앗아 설치된 신주(新州)의 군주(軍主)가 된 장군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이사부’ 이하 8인은 북방개척의 군사령부의 수뇌들인 것이 확실하다.

뒤에 명기된 두 사람의 당주(幢主) 역시 북방경략의 직접적인 담당자였음은 분명하다. 당주는 주(州)에 설치된 군주보다 하위단위의 군사 책임자로 촌이나 성에 설치되었음은 여기에 나오는 추문촌당주(志文村幢主)’ㆍ'물사벌성당주(勿思伐城幢主)’에서 알 수 있다. 이들 추문촌당주와 물사벌성당주가 당시 적성지방의 공략에 참가한 사람인지, 적성 점령 후 그 지방에 설치한 당주인지는 확실지 않다.

다만 비문의 '추문촌파진루하간지(志文村巴珍婁下干支)’에서 적성 부근의 당주로 추측할 수도 있겠으나, 비문의 해독에 따라 오히려 적성지방 공략에 참가한 전진기지의 당주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진흥왕의 왕교를 받은 이사부 이하의 왕경인 고관들은 북방경략의 중심인물로 적성지방의 공략과 관련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앞의 8인은 군사령부의 수뇌들이고, 2인의 당주는 현지 군지휘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주와 관련해 물사벌성은 525년(법흥왕 12) 상주(尙州)에 군주를 설치한 사벌주(沙伐州)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비문 첫줄에 보이는 대중등(大衆等)은 대등(大等)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연구과제 중의 하나이다.

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진흥왕이 이사부 등 10인의 고관에게 하교해, 신라의 척경사업(拓境事業)을 돕고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다한 적성인 야이차(也爾次)의 공훈을 표창하고, 장차 야이차와 같이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의 포고인 것 같다.

이것은 다른 진흥왕순수관경비(眞興王巡狩管境碑)에서 새로 개척한 지방의 민심을 살피고 노고를 위로하며, '충신정성(忠信精誠)' 있는 자와 나라를 위해 용맹하게 싸워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는 상작(賞爵)을 내리겠다고 약속한 취지와 같다. 이렇게 보면, 적성비는 순수비의 선구적 형태로 척경비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비의 건립 시기]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 첫머리 연대 부분의 4자가 결락되어 절대 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추정 연대뿐이다. 당시 적성 지방을 중심한 역사적 상황과 비문에 보이는 인물들을 분석함으로써 추정하고 있다.

551년 거칠부 등 8장군이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해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을 탈취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지금 단양 지방이 이 때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보는 것은 속단이다. 이보다 앞서 신라의 북방 경략은 진행되고 있었고, 적성의 신라 귀속은 551년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동해안 지방은 일찍부터 북진을 서둘러 505년(지증왕 6) 삼척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512년에도 이사부가 강릉의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영토를 확장하였다.

또한, 내륙 지방에서도 525년 대아찬(大阿飡) 이등(伊登)으로 상주의 사벌주 군주를 삼아 일찍부터 관산(管山 : 지금의 옥천)ㆍ서원(西原 : 지금의 청주)ㆍ모산(母山 : 지금의 진천)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550년 백제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 : 지금의 천안)ㆍ금현성(金峴城 : 지금의 전의)를 공취했고, 이듬해 진흥왕이 낭성(娘城 : 지금의 청원)에 순행하였다. 따라서, 청주ㆍ충주와 연접한 단양지방이 551년까지 고구려의 세력권에 있었다고 볼 수 없고, 늦어도 550년에는 신라에 귀속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한편, 인물들을 분석해 볼 때 10인 가운데 다른 사료(史料)에도 보이는 사람이 이사부ㆍ비차부ㆍ무력 등이다. 이간 이사부는 지증왕 때 실직주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고, 541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어 신라의 경략 사업에 주역을 맡았던 이사부임이 분명하다. 이렇듯 진흥왕대의 원로 재상인 이사부의 등장은 이 석비가 진흥왕 때 세워졌음을 증명한다.

또, 무력은 김무력(金武力)으로서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비문에는 관등이 보이지 않지만 '아간 비차부’ 다음에 나열되어 아간(阿干) 이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무력은 553년 대아간(大阿干)으로서 한강 하류에 신설된 신주(新州)의 군주가 되었고, 561년 건립한 창녕척경비에는 잡찬(林飡)이었다. 따라서 무력이 아간 이하의 관등을 가졌던 적성비는 553년 이전에 세워졌음이 분명한 것이다.

한편, 아간 비차부는 ≪삼국사기≫ 거칠부전의 551년 고구려를 치기 위해 파견된 '대아간 비차부’와 동일인이다. 이것은 석비가 비차부가 아간에서 대아간으로 승진하기 이전, 즉 551년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적성비 건립의 하한연대는 550년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건립의 상한연대는 제3행 첫머리의 '支□□夫’에서 '□□夫’가 되는 당시의 중앙고관을 추정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인물의 관등은 대아간이었다. 그렇다면 진흥왕대 초반에 '이사부 이간’을 중심으로 북방경략과 국력을 확장할 때 대아간으로서 국가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 거칠부를 들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거칠부전에 의하면, 진흥왕은 545년 7월 이사부의 말에 따라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국사 國史≫를 편찬하도록 했으며, 그 공으로 그에게 파진찬(波珍飡)의 벼슬을 주었다.

그는 ≪국사≫를 편찬, 완성시에는 대아간이었고, 완성 후에는 파진찬이 되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적성비 건립의 상한은 늦어도 545년 거칠부가 대아간의 자리에 있을 때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온달전(溫達傳)에 의하면,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陽岡王)이 즉위함에 온달이 출정해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양원왕(양강왕) 즉위'를 즉위년으로 본다면 545년, 곧 신라 진흥왕 6년에 해당한다.

당시 온달이 회복할 것을 맹세한 계립현(遽立峴)과 죽령은 이미 신라의 점령지였으며, 이곳은 신라 북방경략의 전초기지였다. 다만, '아단성'을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 : 지금의 단양군 영춘면)으로 비정할 수 있다면, 온달군과 신라군의 싸움은 적성의 인접지역에서 벌어졌던 것으로, 이 시기의 적성은 신라 수중에 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을 종합해볼 때 적성비의 건립 연대를 545년에서 550년 사이로 추정함이 옳을 것이다.

[비의 역사적 가치]

고대사 연구에서 금석문(金石文)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 이러한 점에서 적성비의 역사적 가치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비문에 보이는 10인의 중앙 고관과 그들의 관등 및 지방의 관등도 새로이 등장되는 관명이 있어 주목된다.

특히 신라 율령제도(律令制度)의 발달을 이해하는 데 많은 새로운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 노역체제에 대한 율령, 재산분배에 대한 국법이 진흥왕대 초반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적성지방의 관습적인 전사법(佃舍法)을 법으로 삼아 공인한 점을 통해 법이 이룩되는 새로운 사례를 알 수 있다. 또한 '야이차’ 등의 공훈자에 대한 특수한 포상조처를 일반화하여 전국에 통용되는 국법으로 발전함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 통치자들이 공을 세운 지방민을 조처하는 방책을 어떻게 취했는가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신라가 죽령을 넘어 고구려세력을 축출하고 첫발을 디딘 요충지에 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있다.

죽령 너머 최초의 기지인 적성에 유공자의 공훈을 새기고,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 포상을 약속한 척경비를 세운 것은 새 영토에 대한 신라의 국가시책의 천명인 것으로, 뒤에 세워진 순수비 정신의 최초의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적성비는 비록 국왕의 직접적인 순행비는 아니나 척경비의 성격을 지니고 순수관경비의 선구적 형태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비문에 '적성’은 모두 세 번 보이는데, 이곳 단양은 본래 고구려의 적성현으로서 신라가 점령한 뒤에도 적성이라 불렀던 것이다. 현지에 남아 있는 석성은 고구려 이래 신라가 적성현을 경략한 뒤에도 요충으로서 다스리던 적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적성은 신라의 영역인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죽령을 넘어 남한강을 건너기 전 바로 강 연안의 성재산 거의 정상부에 축성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천험한, 그리고 전략적으로도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사방을 정찰할 수 있는 요충이다. 그리하여 신라가 일찍이 158년(아달라왕 5) 3월 죽령의 길을 개척하고, 진흥왕 때 이르러 강력한 북진정책에 따라 이곳 단양지방을 완전히 점령하고 적성을 고구려 경략의 전초기지로 여기에 석성을 구축했던 것이다.

적성의 축성방법에서도 기초부분은 돌과 진흙으로 다져 든든히 하고, 외벽을 자연석으로 고루 쌓았으며, 내면은 외벽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안쪽으로 군사와 병마가 다닐 수 있게 평평하게 다졌는데, 이러한 축성은 삼국시대는 신라나 백제의 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석비의 발견장소가 거의 원위치로 짐작되고 있는데, 적성비 자체도 중요하지만 적성 내에서 발견되었다는 점과 적성이라는 성 이름이 밝혀진 일, 그리고 천연적인 요충지역을 북방경략의 전초기지로 택한 사실 등이 주목된다.

적성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멀리 남한강 상류의 영춘(永春), 즉 고구려의 을아단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강줄기가 보인다. 영춘에는 바로 강가에 온달산이 솟아 있고 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는 석성을 온달산성이라 일컫고 있다. 온달산성이라는 이름은 고구려의 장군 온달과 얽힌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史學志 12-丹陽新羅赤城碑特輯號-(檀國大學校史學會, 1978).

<정영호>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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