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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6-08 (화) 09:33
분 류 사전4
ㆍ조회: 927      
[삼국] 신라 (두산)
신라 新羅

[신라 개관]

BC 1세기에 영남지방에서 일어나, 고구려ㆍ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국가(BC 57∼AD 935).

그릇과 숟가락 /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통일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로부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하였다. 국호는 신라ㆍ신로(新盧)ㆍ사라(斯羅)ㆍ서나(徐那:徐那伐)ㆍ서야(徐耶:徐耶伐)ㆍ서라(徐羅:徐羅伐)ㆍ서벌(徐伐) 등으로 불렀는데, 모두 마을[邑里]을 뜻하는 사로(斯盧)로 해석된다.

신라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① 상대(上代:시조∼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는 원시 부족 국가ㆍ씨족 국가를 거쳐 고대 국가로 발전하여 골품 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다.
② 중대(中代: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 왕권(專制王權)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다.
③ 하대(下代: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골품 제도의 붕괴,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ㆍ해상 세력이 등장하고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밖에 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 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 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신라의 역대 왕]


신라의 역사

<상대의 신라>

신라의 모체는 진한(辰韓) 12개 성읍국(城邑國)의 하나인 사로(斯盧:慶州ㆍ月城)였는데, 사로국은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及梁),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沙梁),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本彼),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漸梁),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漢祗),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 등 6개촌과 6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해서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BC 57년이 건국연대로 되어 있으나 사로국이 성립된 것은 이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는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 곁에 있던 알[卵] 속에서 나온 아이인데, 고허촌장인 소벌공(蘇伐公)이 데려다 길렀다. 혁거세의 나이 13세가 되자 6부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왕호를 거서간(居西干:君長),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혁거세는 즉위 후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맞았는데, 알영은 사량리(沙梁里)의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용의 오른쪽 갈빗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조의 난생 설화(卵生說話)는 신라의 건국 설화라기보다는 6부족의 연맹체인 사로국의 전설로 짐작되고 있다. 사로국을 모체로 하였던 초기의 신라는 박(朴)ㆍ석(昔)ㆍ김(金)의 3성(姓) 중에서 왕을 추대하고 이들이 주체가 되어 6부족의 연맹체를 이끌어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대륙과 멀리 떨어진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과 간헐적으로 경주분지에 정착한 유리민(流離民) 집단의 이질적 요소 등으로 3국 가운데 가장 뒤늦게 발전하였다.

4세기에 들어 내물왕이 거서간(居西干:제사장)ㆍ차차웅(次次雄:무당)ㆍ이사금(尼師今:계승자)으로 변천한 왕호를 마립간(麻立干:통치자)으로 개칭하고, 3성 중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면서 고대국가의 실질적 시조로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는 377년, 광개토왕이 국위를 떨치고 있던 고구려와 국교를 맺고, 볼모를 보내어 화친정책을 썼으며, 377년과 382년에는 고구려의 알선으로 중국의 전진(前秦)에 사신(使臣)을 보냈다.

또한 내물왕은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괴롭히자 399년 고구려에서 5만의 원병을 얻어 백제군과 합세하여 왜구(倭寇)를 무찔렀다. 눌지왕 때는 고구려의 평양 천도(427) 등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자 그 대비책으로 백제와 나제 공수 동맹(羅濟共守同盟)을 맺었고, 왕권의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막기 위해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마련하였다.

20대 자비왕은 중앙집권화를 위해 경주의 방리명(坊里名)을 정하였고(469), 소지왕은 지방의 귀족을 중앙으로 흡수하는 한편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市肆]을 열어 물화(物貨)의 원활한 유통을 꾀하는 등 서정 쇄신에 힘썼으며, 대외적으로는 백제의 동성왕과 결혼 동맹을 맺어 양국의 관계를 더욱 굳게 하였다(493).

지증왕 때에는 왕권 강화와 내물왕계의 혈족 결합을 전제로 왕위의 세습제를 확립하였고,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통치자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개칭하였고, 지방에 주ㆍ군ㆍ현(州郡縣)과 2소경(小京)을 두어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의 기반을 굳혔다.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軍主)를 두어 실직주(悉直州)의 군주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정벌하게 하여 이를 신라영토에 편입시켰다(512).

왕권의 안정기에 들어간 신라는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律令)을 공포하고(520),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528), 불교를 공인하고,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법흥왕 23년을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으며(536), 병부(兵部)와 상대등(上大等) 등 새로운 관제를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를 이룩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대가야국(大伽倻國:高靈地方)의 혼인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회유하였으며, 524년에는 왕 자신이 남쪽의 경계를 순시하여 국경을 개척하였고, 532년에는 본가야(本伽倻:金官國)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이어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인 죽령(竹嶺) 이북에서 고현(高峴:鐵嶺) 이남에 이르는 고구려 10군(郡)을 점령하였다. 또한 백제를 공격하여(553) 한강 유역의 백제영토를 전부 차지하여 이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신주(新州:漢山州)를 두었으며, 이로써 120년간 지속되어온 나제 동맹은 깨어졌다. 진흥왕은 낙동강 유역에도 손을 뻗쳐 562년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게 되어 합천(陜川)에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여 백제 방어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동북 해안을 따라 북진하여 안변(安邊)에 비열흘주(比列忽州)를 설치(556)하고 이원(利原)의 마운령(摩雲嶺)까지 진출하여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진흥왕의 정복 사업은 단양의 적성비(赤城碑)와 창녕ㆍ북한산ㆍ황초령(黃草嶺)ㆍ마운령에 세워진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가 웅변하여 주고 있다. 이후 당항성(黨項城:南陽灣)을 거점으로 하여 중국(陳ㆍ北齊) 통로의 관문으로 삼았다.

이어 진평왕은 관제의 정비에 힘써 위화부(位和府)ㆍ조부(調府)ㆍ예부(禮府)ㆍ승부(乘府) 등을 신설하여 관부를 직능별로 조직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통일 왕조로 등장한 수(隋)ㆍ당(唐)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선덕여왕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한 침공을 본격화하였으며, 이로 인해 나ㆍ당(羅唐) 통로의 거점인 당항성도 크게 위협을 받았고, 백제는 대야성(大耶城:陜川)을 점령하여 백제와의 서부 국경은 경산(慶山)까지 후퇴하였다. 이에 신라는 김유신을 압독주(押督州:慶山)의 군주로 삼아 대처하였고, 친당 정책(親唐政策)을 적극화하여 당에 유학생ㆍ유학승도 보냈다.

647년 비담(毗曇)ㆍ염종(廉宗) 등의 반란을 진압한 뒤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김춘추ㆍ김유신 일파는 진평왕의 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 진덕여왕을 옹립하고 중앙 관제를 정비 개편하여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와 창부(倉部)로 분리하고 좌ㆍ우 이방부(左右理方部)를 설치하는 한편,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의장인 상대등(上大等)을 상징적인 위치로 바꾸고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侍中)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귀족층에 의한 관직 독점이 배제되는 등 권력 구조에 변혁이 일어나 귀족 연합 정치가 무너지고 전제 왕권이 성장하게 되었다.

<중대의 신라>

신라 진덕여왕 때 정권을 주도하였던 진골(眞骨) 출신의 김춘추가 상대등 알천(閼川)의 양보로 왕에 추대되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자 성골(聖骨) 출신의 왕계는 진덕여왕으로 끝나고 이로부터 진골출신의 왕계가 비롯되었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청원하여 나ㆍ당 연합군을 편성, 백제를 멸망시켰고(660), 문무왕은 백제의 부흥 항쟁을 진압하는 한편 역시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그러나 당나라는 일방적으로 백제의 고토(故土)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자국의 관리와 군대를 주둔시켰고, 신라마저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라 하고 문무왕을 계림도독에 임명하였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는 등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획책하였다. 신라는 당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검모잠(劍牟岑)의 고구려 부흥군을 도와 당에 대항하도록 하였고, 또한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 이하 4,000여 호(戶)의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 금마저(金馬渚:全北 益山)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게 하는 등 영토의 잠식투쟁을 하였다.

671년 신라는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泗沘省:扶餘)을 빼앗아 당군을 몰아내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675년에는 당의 20만 병력을 매초성(買肖城:仁川) 등지에서 섬멸하고 676년에는 서해를 통하여 소부리주ㆍ기벌포(伎伐浦:錦江下流)에 쳐들어온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부대를 격파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백제 멸망 후 16년간 존속하여온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게 되었고, 위축된 당나라의 세력은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도 만주의 요동성(遼東省:遼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동강에서 원산만으로 이어지는 선의 이남에 이르는 반도를 통치하게 된 신라는 역사상 최초의 단일 왕국에 의한 통일 국가를 이루게 되어 이로부터 통일신라 시대가 개막되었다. 통일신라는 3배로 늘어난 영토를 조직적ㆍ능률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제 왕권의 확립을 위한 지배 체제의 정비 및 개편과 새로운 문화 창조에 힘썼다.

신문왕은 중앙 관부에 예작부(例作府)와 공장부(工匠府)를 설치, 당나라 6전(典) 조직과 비슷한 정무(政務) 분담 형식의 집사부(執事部) 이하 14관부를 완성하여 일원적 지배 체제를 이룩하였다. 지방 제도에 있어서는 전국을 9주(州)로 나누어 그 밑에 군(郡)ㆍ현(縣)을 두었으며, 요소에 5소경(小京)을 두어 이곳에는 서울인 경주와 같이 6부제를 실시하고 왕이 때때로 순주(巡駐)하였다.

그리고 지방 세력의 억제책으로 상수리(上守吏) 제도를 실시하고 689년에는 녹읍제(祿邑制)를 폐지하였다. 통일신라는 성덕왕(702∼737) 때 극성기(極盛期)를 맞이하였고, 통일 후 120여 년 간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어 오늘날 안압지ㆍ임해전ㆍ포석정 등이 당시 상류 사회의 호화로운 한 모습을 전하여 주고 있다.

<하대의 신라>

통일신라 시대의 사회적 안정과 전제적(專制的) 관료제는 귀족 세력의 대두를 유발하여 경덕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한화 정책(漢化政策)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지방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녹읍 제도를 부활하였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의 왕권 도전이 표면화하여 768년(혜공왕 4) 김대공(金大恭)의 난을 시발로 96각간(角干)에 의한 반란이 3년간 계속되다가 내물왕의 10대손 김양상(金良相)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가 신라 하대의 첫 왕이다.

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족당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왕권의 강화책으로 골품에 의한 소수 귀족의 관직 독점을 방지하고 관리를 인재 본위로 등용하기 위해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科擧의 일종)를 설치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는데, 이는 내물왕계의 원성왕이 왕위를 이으면서부터 무열왕계의 반격이 개시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헌덕왕 때에 이르러 무열왕계인 웅주 도독(熊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은 앞서 선덕왕이 죽었을 때 왕위에 오른 그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내물왕계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부르고 한때 청주ㆍ충주ㆍ김해 등지를 장악하였으나 토벌되었다. 왕위의 쟁탈전은 흥덕왕 이후에 더욱 격화되어 민애왕은 희강왕을 살해하여 즉위하고 신무왕(839)은 민애왕을 살해하여 즉위하였으며, 하대의 기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재위 1년 미만의 왕이 4명이다.

이와 같은 왕권의 불안정은 중앙의 행정 체제를 뒤흔들어 귀족연립적인 정치 형태로 변질되고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에서는 군진(軍鎭)을 근거로 한 해상 세력이 등장하였다. 군진은 9세기에 들어 해적이 발호(跋扈)하면서 이에 대처해서 설치된 청해진(淸海鎭:莞島)ㆍ당성진(唐城鎭:南陽)ㆍ혈구진(穴口鎭:江華) 등인데, 이 가운데 완도의 청해진이 해상 세력의 중심이었다.

청해진은 828년 당나라에서 활약하다 돌아온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것으로, 그는 1만의 병력으로 해적을 일소하고 해상권을 장악, 신라와 당나라ㆍ왜국 사이의 무역을 관장하여 해상의 패자(覇者)로 군림하였다. 그는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앞서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민애왕을 살해하여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등 막강한 실력을 행사, 그의 딸을 문성왕에게 차비(次妃)로 바쳐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히려다 실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이와 같이 왕권이 무력에 의해 유린되어 통치체제가 무너지자 지방에서는 새로운 호족(豪族) 세력이 형성되어 행정ㆍ징세권까지 장악하여 농민을 수탈하는 등 중앙의 경제기반을 잠식하였다. 진성여왕에 이르러 국정의 문란은 절정에 달하여 나라에서는 조세조차 거두지 못할 정도였고, 호족ㆍ군도(群盜)들에 시달린 백성들은 일본ㆍ중국 등으로 유망(流亡)하거나 사병(私兵)ㆍ도둑 등으로 변신하였다.

중앙의 정치적 부패와 통치권의 무정부상태에 따라 지방에서는 군호(群豪)가 나타나 북원(北原:原州)의 양길(梁吉), 죽주(竹州:竹山)의 기훤(箕萱)과 적고적(赤袴賊)ㆍ초적(草賊) 등이 무리를 지어 발호하였다. 이 중에서 전라남북도지방을 차지한 견훤(甄萱)은 후백제를 세우고, 강원도 북부ㆍ경기도ㆍ황해도 및 평안도지방을 차지한 궁예(弓裔)는 마진국(摩震國)을 세웠으며, 신라의 세력은 지금의 경상남북도를 차지하는 데 그쳐 이로부터 한반도는 얼마 동안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가 전개된다.

918년 후삼국 중 가장 강대하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의 신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자 신라의 경명왕은 이를 기존국가로 인정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수호하였다. 927년 견훤은 신라의 서울 경주까지 침범하여 경애왕을 잡아 자살하게 하고 왕제(王弟) 경순왕을 즉위시켜 신라의 국가적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935년 신라의 국토는 더욱 축소되어 민심은 고려로 기울어 나라를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경순왕은 마지막 화백회의(和白會議:君臣會議)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귀부(歸附)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 가서 그 절차를 밟았다.

고려의 태조는 경순왕을 정승(政丞)에 배(拜)하여 태자의 상위(上位)에 예우하고,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여 매년 1,000섬의 녹(祿)을 주었다. 이로써 시조로부터 56대왕, 992년을 이어온 신라의 사직(社稷)은 끝나고, 고려는 이 해에 후백제마저 병합하여 이로부터 한반도는 새로운 통일 왕조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라의 중앙 관제

신라의 관제는 골품 제도와 관련을 맺으면서 편성된 것이다. 법흥왕 때에는 귀족 회의의 의장격인 상대등(上大等)과 병부(兵部)를 두었고, 진평왕 때에는 위화부(位和府)ㆍ조부(調府)ㆍ예부(禮部)를 설치하였다. 651년(진덕여왕 5)에는 품주(稟主)가 집사부(執事部)와 창부(倉部)로 분리되어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中侍:통일 후에는 侍中)가 수상직을 맡으면서 국가 권력은 강화되어 중시는 상대등과 맞서는 위치에 있었다.

통일 후 신문왕 때에 공부(工部)에 해당되는 공장부(工匠府:682)와 예작부(例作府:686)를 설치하여 14개의 관청으로 중국의 6전 조직과 유사한 정무분담 체제가 이루어졌다. 신문왕 때에 국학(國學)이 설치된 것도(682) 왕권의 강화와 정치체제의 정비를 위한 유교 정치이념이 설정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통일신라의 관직체제는 망할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중대에는 집사성의 시중(侍中)의 권한이 강화되었으나, 하대에 와서는 상대등의 권한이 다시 부상하는 현상이 나타나 이를 둘러싼 정권 다툼이 격화되었다.

신라의 지방 관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였다. 말단행정 단위인 촌(村)의 장은 그 지역의 세력가를 촌주(村主)로 임명, 그 지방 행정기관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한편 각주에는 군단(軍團)인 신라는 전국을 5주(州:軍主)로 나누고 주 밑에는 군(郡:太守)ㆍ현(縣:縣令)을 두어 정(停)을 두어 국방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지방행정 조직은 군사조직이기도 하여 지방관이 군사 지휘권을 겸하였다. 또한, 수도 행정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동원경(東原京:강릉, 639), 중원경(中原京:충주, 557) 등 2소경을 두고 사신(仕臣:왕족)을 파견하여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통일 후에는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677년(문무왕 17)경부터 685년(신문왕 5) 사이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재편성하였다. 통일 후 지방제도는 점차 행정적인 성격으로 변모했으나 그 기구는 통일 전과 동일하게 주ㆍ군ㆍ현ㆍ촌과 향(鄕)ㆍ소(所)ㆍ부곡(部曲)으로 구성되었다. 촌은 몇 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양인들이 거주했고, 향ㆍ소ㆍ부곡은 피정복민이나 반역민을 집단적으로 사민(徒民)시켜 천민화한 집단지역으로 여겨진다.

특히 지방 향리(鄕吏)들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하여 상수리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각 주의 향리 1명씩을 인질로 중앙에 머무르게 하여 시위(侍衛)ㆍ사역(使役) 또는 궁중용 화목(火木)을 공급하게 하였다. 5소경 제도는 수도인 경주가 동쪽에 치우쳐 있는 불편을 보충하려는 의도와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5소경의 위치는 원래의 신라영토 밖인 소백산맥 외각지대로서 신라가 정복한 피정목민들을 강제로 사민시켜 중앙에서 파견한 왕경인(王京人)의 지배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피정복 가야ㆍ백제ㆍ고구려인에 대하여는 그들의 신분과 관직에 따라 신라 17관등의 신분체제에 편성시켰다. 그러나 백제인은 10관등급(大奈麻), 고구려인은 7관등급(一吉飡) 이하의 신분에 편입되었다. 그러므로 출세의 제약을 받은 피정복민들은 그들의 진로와 출세를 문화면에서 발휘하였다. 그 결과 5소경은 지방문화 발달의 산실로서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대가야계(大伽倻系)의 강수(强首)ㆍ우륵(于勒)ㆍ김생(金生)은 중원경에서, 고구려계의 법경(法鏡)은 남원경에서 각각 출세한 사람들이다.

신라의 관등 조직

신라의 관등 제도는 골품 제도(骨品制度)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관등 제도는 법흥왕(6세기 초) 때에 완성되었는데 경위(京位:王京人) 17등과 외위(外位:地方人) 11등의 이원적 체계로 구성되었다. 진골(眞骨)은 최고 상한선인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으나, 6두품은 6위인 아찬까지, 5두품은 10위인 대나마까지, 4두품은 12위인 대사까지 승진의 한계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한선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진골 출신도 다른 두품과 같이 17위(조위)에서 출발하였다.

이와 같이 구분된 골품 제도는 신분에 따라 유능한 인재라도 출세에 제한을 받았고, 의ㆍ식ㆍ주의 일상생활도 차별을 두었다. 따라서 혼인도 같은 골품끼리하는 것이 상례였다. 만약 다른 골품과 결혼하면 그 소생은 어머니의 골품으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골품을 유지하기 위하여 근친결혼이 유행되었다.

이와 같은 골품 제도의 모순에 불만을 가진 계층은 특히 6두품과 도당 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반골품적 입장을 취하면서 지방 호족들과 결부하여 반(反)사회적 집단으로 화하였다. 외위는 촌주를 포함한 지방의 유력자를 중앙에 포섭 편입시키면서 왕경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7세기 중엽에 와서는 유력한 지방의 촌주층에 대한 군공 포상책으로 경위 관등을 개방함에 따라 외위는 자연히 소멸되었다.

신라의 군사 조직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이 수도를 수비하였다. 삼국항쟁이 격화된 544년(진흥왕 5) 6개의 부대를 통합하여 대당(大幢)을 편성하였다.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더불어 설치된 상주정(上州停:552), 한산정(漢山停:新州停, 604)과 문무왕 때 우수정(牛首停:比列忽停, 673), 무열왕 때 하서정(河西停:悉直停, 658), 신문왕 때 완산정(完山停:下州停, 685) 등 6정(停)을 편성, 주치(州治)에 배치하였다. 이 외에도 서당(誓幢:583), 낭당(郞幢:625)이란 부대를 두어 국방에 힘썼다. 한편 군조직과는 별도로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624)도 있었다.

통일 후 신문왕 때에 완성된 9서당은 수도에 주둔한 중앙군단으로서 신라인 외에 고구려ㆍ백제ㆍ말갈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9서당은 옷깃의 빛깔에 따라 부대 소속을 구별하였다. 지방의 군단인 10정은 9주를 기준으로 각 주에 1정씩 배치하고 한주(漢州)는 지역이 넓고 국방상 요지였기 때문에 2개의 정을 설치하였다. 10정이 배치된 곳은 국방상 지방통치의 거점이었다. 이와 같이 배치된 정은 국방 및 경찰의 임무도 겸하였으므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이밖에 주 및 변방에 배치된 군단인 5주서(五州誓)와 3변수당(三邊守幢)도 있었고 또 노당(弩幢:弩牛部隊)ㆍ운제당(雲梯幢:登城部隊)ㆍ석투당(石投幢:抛車部隊)ㆍ여갑당(餘甲幢)과 법당(法幢) 등이 있다.

신라의 토지 제도

신라의 토지제도는 국유제를 전제로 한 제도였다. 통일 전에는 전공(戰功)에 따라 지급된 식읍(食邑)과 관복무의 대가로 받은 녹읍제가 발전하였고, 능위전(陵位田)ㆍ사전(寺田) 등이 있었다. 통일 후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신문왕 때에 녹읍을 폐지하고(689), 수조권(收租權)만 인정하는 직전(職田:官僚田)과 세조(歲租)를 주는 제도로 바뀌었다.

성덕왕 때에는 정남(丁男)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여(722), 국가에 조세를 바치게 했다. 이 정전은 당나라의 균전제(均田制)를 연상시키며, 일본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장적(新羅帳籍)에서 보이는 연수유답(烟受有畓)ㆍ전(田)이 바로 정전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정전제도는 종래 식읍이나 녹읍을 경작하던 농민을 국가가 지배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8세기 중엽에 이르자, 귀족 세력이 전제왕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결과 757년(경덕왕 16) 직전과 세조는 폐지되고 녹읍이 다시 부활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왕권강화를 위하여 귀족들의 토지 지배를 견제하려던 시책이 실패한 것으로 귀족세력이 국가를 능가한 것을 뜻한다. 이후 신라 사회는 귀족 및 사원세력을 중심으로 토지의 장원화(莊園化)가 초래되어 국가 경제가 위태롭게 되었다.

신라의 조세 제도

신라의 조세 제도는 조ㆍ용ㆍ조(租庸調)에 바탕을 두었다. 이 중 조(租:田租)는 토지 산물인 곡식이나 직물의 원료 등을 현물로 바쳤고, 용(庸)은 산성 축성, 궁궐 등을 짓는 일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부역(賦役)의 의무로 동원되었다. 조세(調稅)는 해당 지방의 특산물을 공납하는 것이었다. 신라시 대의 세율은 토지산물의 10분의 1이었을 것이라는 간접적인 시사가 있기는 하나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일본 쇼소인[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서원경(西原京)지방의 신라장적(新羅帳籍)을 보면 농민들은 자신의 연수유답뿐만 아니라 관유지(官有地:官謨畓)ㆍ관료전ㆍ마전(麻田) 등을 공동으로 경작하였으며, 특히 뽕나무ㆍ잣나무ㆍ호두나무 등의 수가 장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자기가 내는 세율 이상으로 부담을 지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조세 기준은 인정(人丁)의 수와 재산에 따라 민호(民戶)의 등급을 9등급으로 나누고 촌(村)을 단위로 하였다.

신라의 사회 경제 생활

신라 사회는 골품 제도를 근간으로 한 17등 관계(官階)를 두고 골품에 따른 정치적ㆍ사회적 지위를 고정시킨 귀족 중심의 사회였다. 삼국통일 후 식읍ㆍ사전(賜田)ㆍ마거(馬阹:목마장) 등을 받아 경제적 부를 누린 귀족들과 많은 노비와 가축ㆍ사병(私兵)을 거느린 귀족도 나타났다. 수도인 경주는 17만 8936호, 1,360방, 55리, 35금입택(金入宅), 4절유택(四節遊宅) 등이 있는 호화로운 도시로서 통일 후 약 100여 년 간 번영을 누렸다. 오늘날 경주에 남아 있는 안압지ㆍ임해전ㆍ포석정 등은 당시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반증해준다.

통일 후 인구 증가와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 개간사업이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다. 790년(원성왕 6) 벽골제(碧骨堤)가 개수 이용되었으며, 828년(흥덕왕 3) 김대렴이 당에서 차(茶)의 종자를 수입하여 재배하기도 하였다. 상업 활동은 이미 509년(지증왕 10) 동시전(東市典)이 설치되었고 695년(효소왕 4)에는 서시전과 남시전이 설치되어 문화의 유통이 활발하였다.

특히 신문왕 때는 공장부까지 설치되어 수공업이 발달하여 어아주(魚牙紬)ㆍ조하주(朝霞紬) 등의 명주와 금은 세공품ㆍ나전칠기ㆍ죽기 등이 생산되어 일본과 당나라에 수출되는 등 공사무역(公私貿易)이 성행하였다. 당과의 수출품은 대개 금ㆍ은ㆍ인삼ㆍ어아주ㆍ조하주 등이며, 수입품은 각종 비단ㆍ의복ㆍ문방구ㆍ서적 등이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발전은 귀족 중심이었다.

한편 농민의 생활은 일본 쇼소인[정창원(正倉院)] 에서 발견된 서원경 지방의 장적(帳籍)을 통하여 농민의 실태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촌(村)은 10호 정도의 혈연 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부락을 기준으로 3∼4개의 촌을 관장하는 촌주(村主)가 중앙의 통치를 대행하였다. 장적의 내용을 보면 촌의 전답결수, 호구수, 인구수, 과목(果木)의 주수, 우마(牛馬)의 필수 등이 기록되었는데 이 장적은 3년마다 재작성하였다. 호(戶)의 등급은 9등급으로 나누고 연령의 등급은 6등급(小子女ㆍ追子女ㆍ助子女ㆍ丁男女ㆍ除公母ㆍ老公母)으로 나누었다.

이와 같은 통계는 농민들로부터의 정확한 조세 징수와 노력 동원의 편리를 위하여 조사 작성된 것이다. 당시의 자영 농민은 귀족 사회의 경제적ㆍ사회적 여건이 향상되었으나 예민화(隸民化)되는 실정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농민과 천민의 희생 위에 그들의 삶을 영위하였으므로 신라 말의 정치적ㆍ사회적 파탄은 더욱 격심해졌다.

이와 같이 신라사회가 파탄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은 골품 제도에 의한 사회적 신분의 지위를 17등 관계로 고정화시킨 모순을 해소시키지 못했기 때문이고, 골품 제도의 모순에 대한 시정책은 6두품의 정치적 이념에서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혼란한 사회질서를 권력을 통한 신분적 차별로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려 했기 때문에 사회안정을 기할 수 없었고 도리어 반사회적 신분 집단을 결속시키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구심점을 잃은 신라사회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신라의 한문학과 유학

신라의 한학(漢學) 수용은 지배층으로부터 문화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발전하였다. 한학은 유학을 중심으로 확대되면서 특히 왕권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한학의 발달은 왕권의 권위와 국가발전을 찬양하는 국사(國史)의 편찬으로도 나타났으며 의학ㆍ역학ㆍ천문ㆍ노장학 등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폭을 넓혀주었다.

이와 같이 한문의 수용과 보급은 법흥왕 때부터 진덕여왕 때에 성행한 불교를 통하여 한문의 사용이 확대되었고 수ㆍ당과의 외교에서 문화 발전에 안목을 넓혀주었다. 그리고 한자가 널리 보급된 사실과 한학의 수준은 현존한 금석문인 청제비(菁提碑), 진흥왕의 순수관경비, 적성비(赤城碑),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남산신성비 등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한문을 수입하면서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만들어 경서를 훈독하게 하였다.

삼국통일 후의 한학은 애국심의 강조에서 벗어나 전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현실적인 유교정치 이념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따라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이 설립되었고 717년(성덕왕 16)에는 당으로부터 공자(孔子)ㆍ10철(哲)ㆍ72제자의 화상을 얻어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 이어서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으로 개칭하고 경(卿)ㆍ박사ㆍ조교를 두고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필수과목으로 한 3분과로 나누어 교육하였다. 입학 자격은 15∼30세까지의 귀족자제이며 수업연한은 9년이었다.

788년(원성왕 4)에는 독서출신과를 두고 능력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관리에 채용하였다. 이 제도는 관리채용의 기준을 골품보다 유학의 실력에 두었기 때문에 6두품의 환영을 받았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중대에 활약한 문신으로서 강수(强首)는 외교문서에 능했고, 김대문(金大問)은 우리의 문화를 인식, 중국 것을 모방하던 단계에서 이탈하려는 경향을 나타낸 《화랑세기》 《한산기》 《계림잡전》 등 저서를 남겼으며, 경서에 조예가 깊은 설총은 이두문을 정리하여 한문학 학습에 공헌하였다.

하대에 들어와서는 왕족이나 6두품 중에서 당에 유학한 자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10년간을 수학연한으로 당의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과 종교분야에서 유능한 석학이 배출되었다. 이 때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자가 58명이고, 오대(五代)의 후당(後唐)ㆍ후량(後梁) 때에도 32명이 되었다. 그 중에서 문명을 떨친 석학으로는 최치원(崔致遠)ㆍ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ㆍ최승우(崔承祐)ㆍ최신지(崔愼之)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유교 이외의 잡학 교육기관으로 산학ㆍ천문ㆍ의학ㆍ병학ㆍ육학 등을 전문으로 하는 관청에서 박사를 두고 학생을 교수하였다. 혜공왕 때 김암(金巖)은 천문ㆍ병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당에 유학하여 음양술을 연구, 둔갑술(遁甲術)을 지었으며 귀국 후 패강진장(浿江鎭將)으로 있을 때 농민들에게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교수하였다. 나말에 도선(道詵)은 풍수지리설을 선양시켜 《도선비기(道詵秘記)》를 남겼다. 이 풍수지리설은 고려 태조 왕건도 신봉, 그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반영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되었다.

신라의 문학과 음악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우리 민족은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한(三韓)에서 행한 5월 기풍제(祈豊祭)나 10월 상달제에서 음주가무한 것을 보면 고대 문학은 종교적인 가무 제의(祭儀)에서 발생한 것임을 시사해준다. 삼국시대의 문학은 설화문학과 시가문학으로 대별되는데 신라의 설화문학에는 우노(于老)의 이야기 등을 들 수 있고, 시가문학으로는 향가를 들 수 있다. 향가로는 《삼국유사》에 혜성가(慧星歌)ㆍ안민가(安民歌)ㆍ헌화가(獻花歌) 등 14수가 전하며, 혁련 정(赫連挺)의 《균여전(均如傳)》에도 11수가 전한다.

888년(진성여왕 2) 대구화상(大矩和尙)과 위홍(魏弘)이 지은 《삼대목(三代目)》이란 향가집이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이 향가는 작가인 융천사(融天師)ㆍ광덕(廣德)ㆍ월명사(月明師) 등에서 보듯이 승려 사회와 화랑도(花郞徒:得烏) 사회에서 우수한 작품을 내고 있으며,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도 국가안태의 기원(혜성가), 불덕(佛德)에 대한 찬양과 기원(千手大悲歌), 사자(死者)에 대한 기도(願往生歌) 등 종교적인 뜻에서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시가와 관계가 있는 음악과 무용도 종교적 성격이 농후하다. 음악가로서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인 계고(階古)ㆍ이문(尼文)ㆍ법지(法知)ㆍ백결선생(百結先生)ㆍ옥보고(玉寶高)ㆍ귀금(貴金)ㆍ장안(長安)ㆍ극상(克相) 등이 대가였다. 악기로는 3죽(三竹:大笭ㆍ中笭ㆍ小笭)과 3현(三絃: 伽倻琴ㆍ玄琴ㆍ鄕琵琶), 대고(大鼓) 등이 사용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시 《향약잡영(鄕約雜詠)》에 나타난 금환(金丸)ㆍ월전(月顚)ㆍ대면(大面)ㆍ속독(束毒)ㆍ산예(狻猊) 등 5기(五伎)와 처용무ㆍ상염무(霜髥舞)가 있었다.

문장으로는 진흥왕의 순수비, 진덕여왕의 《태평송(太平頌)》, 강수의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 문무왕릉 비문과 최치원의 《계원필경(桂苑筆耕)》 외에 진감선사비문(眞鑑禪師碑文)ㆍ낭혜화상비문(朗慧和尙碑文)ㆍ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ㆍ숭복사비문(崇福寺碑文)이 있고, 최승우의 《사륙호본집(四六餬本集)》과 견훤을 위하여 왕건에게 보낸 격서(檄書), 즉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 등이 대표적 작품인데 신라 하대의 유작에서는 유교ㆍ불교ㆍ도교 사상의 색채가 혼용되어 나타난다.

신라의 분묘

신라 시대 왕ㆍ귀족의 무덤은 경주시 황남동 고분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 시대에는 왕궁이나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평지에 무덤을 썼으나 통일 후에는 수도 주변의 산하(山下) 구릉 지대를 택하여 무덤을 썼다. 무덤의 양식도 달라서 삼국 시대에는 구덩식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통일 후에는 굴식 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변하고 화장법(火葬法)도 유행하였다.

구덩식 돌무지덧널무덤은 목곽을 덮고 외면을 돌로 쌓은 위에 흙으로 덮었기 때문에 도굴이 용이하지 않아 많은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가 출토되고 있다. 특히 금관총ㆍ금령총ㆍ서봉총ㆍ천마총 등에서는 금관(金冠)이 출토되었고, 1946년 경주 호우총(壺杅塚)에서는 '乙卯年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란 명문이 새겨진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굴식 돌무지무덤[積石塚]의 구조는 널길[羨道]과 널방[玄室]으로 되어 있는데 널방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되어 있고, 천장은 돌로 덮였다. 입구는 대개 남쪽으로 있으며, 천장과 벽은 석회(石灰)를 발랐다. 굴식 돌방무덤은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합장(合葬)하기에는 손쉽다는 장점이 있다.

분묘의 외형을 보면, 삼국 시대에는 봉분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하단부에 자연석을 보이지 않게 적당한 간격으로 놓았으나 통일 후에는 석축(石築), 12지신상, 석상(石床), 방주석(方柱石), 석사자(石獅子)상, 문ㆍ무인석(文武人石) 등 둘레돌을 크게 이용하였는데, 신문왕릉ㆍ성덕왕릉ㆍ원성왕릉이 그와 같은 유형에 해당된다. 특히 죽은 뒤에도 방위신(方位神)인 12지신과 석사자 등 호석물을 세워 호위를 받으려 한 것은 전제 왕권의 권위 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불교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불교 전래과정은 국가적 사절을 매개로 한 외교적 통로에 의한 전래였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 초기 전래는 눌지왕 때 고구려로부터 무명인에 의해 전래되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고, 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善山) 지방 모례(毛禮)의 집에서 아도(阿道)가 전도했으나 이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521년(법흥왕 8)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불교가 알려지자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진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고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異次頓)마저 순교하게 되었다(527). 이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고 중단했던 흥륜사(興輪寺) 창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535). 이와 같이 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불교를 수용한 원인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재래의 토속신앙을 극복하면서 고대국가의 이념과 사상을 통일하고 국가 발전을 비는 호국신앙(護國信仰)과 현실구복적(現實求福的) 신앙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불교의 호국 사상은 왕권의 신성함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불교왕명을 낳았다. 즉, 진평왕과 그 왕비는 석가의 모친명(名)을 따서 백정(白淨)ㆍ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불렀고, 법흥왕은 법공(法空), 진흥왕은 법운(法雲)이라 하는 등 불교 왕명 시대가 찾아왔다.

불교의 호국관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국사(佛國寺)ㆍ흥국사(興國寺)ㆍ흥왕사(興王寺) 등을 축조한 것이나, 황룡사9층탑의 축조 및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화랑이 되었다는 신념 등은 왕실호위와 국가수호의 호국신앙의 표시였다. 또한 호국경(護國經)인 인왕경(仁王經)이 존중되고, 국가의 안태(安泰)를 비는 백좌강회(百座講會:仁王會)ㆍ팔관회(八關會) 등 불교행사가 성행하였다.

한편 승직제도인 국통제(國統制)가 진흥왕 때 수립되어 불교의 정치 참여를 촉진시켰다. 또 현세구복적 성격면에서는 아들의 출산이나 치병(治病)을 기원하는 등 샤머니즘과 결부되어 불교의 대중화가 촉진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는 왕권 중심의 지배 체제를 강화하는 데 정치적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중국 및 서역문화 수입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여 민족문화 개발에 활력소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문화 개발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특히 승려들은 학문과 사상의 선각자가 되어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신라인의 도덕적 요강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도 실증된다.

통일 전 불교의 종파는 자장을 중심으로 하는 계율종(戒律宗)이 유행하여 국민사상의 통일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한편 의상(義湘)의 화엄종(華嚴宗)은 원융사상(圓融思想)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부합되었기 때문에 귀족사회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통일 후 중대의 불교는 나ㆍ당간의 친선관계가 이룩되면서 유학생ㆍ유학승의 노력으로 단순한 호국종교의 역할을 벗어나 사상과 이념을 앞세운 종교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이 결과 5교(敎)의 종파가 성립되었다. 이때 원효는 통일신라의 불교를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종파간의 대립 의식이나 형식을 배격하고 일심(一心)ㆍ진여(眞如)와 통일ㆍ화합의 화정 사상(和靜思想)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형식화ㆍ귀족화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불교를 생활화하며 대중화하는 정토 신앙을 확립하였다.

5교가 귀족들의 환영을 받은 데 대하여 정토 신앙은 일반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이 정토 신앙은 불경의 깊은 교리를 터득하지 않더라도 극락세계에 생왕(生往)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면, 고해에서 벗어나 서방의 정토(淨土:극락)에 귀의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도 손쉽게 믿을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정토 신앙은 통일신라의 사회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민중들의 현실도피적 염세 경향을 반영해준 불교 내세관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8세기 이후 신라 사회에 정치적 권위가 추락되자 불교계에도 불경과 계율을 앞세워 중앙귀족과 연결된 5교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대두되어 지방 호족과 연결, 9산(九山:禪宗)의 종파가 이룩되었다. 하대의 선종 사상은 교리보다 스스로 사색하여 개인적인 심적 체험과 도야로서 진리를 깨닫는 것[견성오도(見性悟道)]이 옳다고 생각한 종파로서 문자를 떠나[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중요시하였다.

이 선종은 8세기 말 혜공왕 때의 신행(神行)과 9세기 초인 헌덕왕 때의 도의(道義)에 의하여 가지산파(迦智山派)가 성립되면서 9개파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정치ㆍ사회적으로 혼란을 거듭했던 하대에 심성(心性) 도야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시대적 환경에 부합될 수 있었다. 대개 6두품 출신이 지방 호족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변경에서 개창되었기 때문에 호족의 종교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발전 성행한 선종은 중세(中世)의 지성을 성립시키는 자극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왕실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호족세 력의 사상적 이념을 제시해주었다. 특히 해주(海州) 수미산파의 개창자 이엄(利嚴)이 호족 출신인 왕건(王建)의 스승이 된 것 등으로 미루어 선종 사상은 고려 왕조 개창의 정신적 계기가 되었다. 선종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중국 문화의 폭을 넓혀주었고, 한문학 발달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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