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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5-14 (금) 23:49
분 류 사전4
ㆍ조회: 495      
[고대] 부여 (한메)
부여 夫餘

BC2세기 무렵부터 494년까지 북만주 지역에 존속하였던 예맥족(濊貊族)의 국가. 북부여라고도 한다.

[성립]

부여는 BC 1세기의 중국 문헌에 등장하므로 이미 그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기원에 관해서 중국측의 기록인 《논형(論衡)》과 《위략(魏略)》에 시조인 동명(東明)이 북으로부터 이주해 와 건국하였다고 쓰여 있으며, 《삼국지》 <동이전>에는 당시 부여인 스스로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 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부여국의 중심 집단이 어느 시기에 이동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 구체적 이동시기나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부여국은 서로는 오환(烏桓)ㆍ선비(鮮卑)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把婁)와 잇닿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남서로는 요동의 중국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부여국의 중심 지역인 부여성(夫餘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창춘[長春]ㆍ눙안[農安]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 일찍부터 제기되었고, 근래에는 지린시[吉林市] 부근으로 짐작하는 설이 제기되었다.

[정치]

초기 부여의 정치 체제는 부족연맹체적 성격을 지녔다. 왕은 일정한 가계(家系)에서 나왔을 것이나 선임(選任)의 유제가 강하게 존속하였다. 족장 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왕은 주술적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 성격도 띠고 있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그해의 농사에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하였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영해 준다.

그 뒤 점차 사회 분화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어 갔다. 3세기 전반 부여의 왕위는 간위거(簡位居)―마여(麻余)―의려(衣慮)로 이어지는 부자 계승이 행해졌으나 그 당시 부자 상속의 관행이 족장층 내에서 정립되지 못하였고, 친족 집단의 분화도 충분하지 못하여 공동체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 중앙에는 왕 아래 마가(馬加)ㆍ우가(牛加)ㆍ저가(猪加)ㆍ구가(狗加)ㆍ견사(犬使)ㆍ견사자(犬使者)ㆍ사자(使者) 등의 관인이 있었는데, 중앙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가(加)들이 각기 부족을 통솔하였다. 왕은 가들의 대표였으나, 초월적 존재는 되지 못하였으므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대외적으로 부여는 남으로부터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 유목민의 압박을 받았다. 이 양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요동의 중국 세력과 연결을 꾀하였고, 중국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막고, 이들을 제압하는 데 부여의 무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사회]

부여 사회의 지배층을 이루는 호민층(豪民層)에는 족장들과 종교적 기능을 행하던 샤먼과 같은 이들과,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와 같은 기술자, 그 밖의 부유하고 유력한 민호가 속하였다. 그 아래 촌락에 일반민호들이 있었는데 전시에는 족장의 지휘 아래 병사로 출전하였다. 일반민 아래에는 노예가 있었다.

족장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보여 그들에 의한 부의 집중이 진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족장층과 호민들은 많은 노예를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장례 때 백 수십 명을 순장(殉葬)하기도 하였는데, 노예에는 전쟁포로ㆍ형벌노예ㆍ부채노예가 포함되었다. 부여의 법에,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예로 삼았다. 절도를 할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하였으며, 변상이 여의치 않으면 노예로 삼았다.

3세기 전반 부여 사회는 공동체적 유제가 남아 있으면서 일면에서는 사회 분화가 진전되어 갔다. 부여인은 농업을 영위하여 오곡을 생산하였고, 목축도 성행하여 말ㆍ소ㆍ돼지ㆍ개 등을 사육하였는데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부여인들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혼인을 할 때에는 남자집에서 여자집에 혼납금(婚納金)으로 소와 말을 보냈다. 부여의 풍속에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모두 죽였다. 또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취수혼(娶嫂婚:levirate)이 널리 행해졌다.

부여인은 12월에 영고(迎鼓)라는 축제를 거행하였다. 축제 때에는 노예나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민이 참여하여 서로간의 결속을 다졌는데, 이때에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를 석방하였으며, 수도에서는 각 부족의 족장들이 왕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한 해를 결산하였다.

[멸망]

부여는 지형적으로 대평원에 자리잡고 있어 외침을 방어하는 데 불리하였으며, 삼림민ㆍ유목민ㆍ농경민이 교차하는 중간 지대로서 주변 세력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았다. 특히 3세기 말 이후 중국의 통일 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 세력이 흥기하여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기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더욱 그러하였다.

남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과 서쪽 선비족의 세력 팽창에 의해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하였다. 285년 선비족의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공격을 받아 북옥저로 피난하였다. 그 뒤 나라를 회복하였으나 346년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쇠약해진 부여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부여 왕실은 고구려의 지배 밑에서 고구려의 부여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5세기 말 물길(勿吉)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 내지로 옮겨오면서 494년(문자왕 3) 고구려에 합병되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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