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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3-31 (수) 08:24
분 류 사전4
ㆍ조회: 738      
[원시] 단양 금굴 구석기유적 (민족)
단양 금굴 구석기유적(丹陽金窟舊石器遺蹟)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 유적. 충청북도 기념물 제103호. 이 유적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약 70만년 전)부터 3000년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석회암동굴 유적으로 해발 135m 높이에 있다.

동굴은 깊이 80m, 너비 6m, 높이 90m에 다다르고, 사람이 살기에 넉넉하며, 나들이가 남쪽 한강을 앞으로 바라보고 있어 사냥과 물고기ㆍ조개잡이에 알맞는 굴이다.

이 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원 점말용굴 유적, 단양 상시바위그늘 유적, 수양개 유적, 창내 유적 등의 구석기 유적들이 있어 이 지역은 우리 나라 선사시대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이 유적은 제원과 25㎞, 상시와 7.5㎞, 수양개와 5㎞ 거리에 있다.

이 유적의 발굴은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결과 모두 14개의 자연지층이 밝혀졌고, 그 중 7개의 문화층을 찾았다.

[문화층별 내용]

제일 아래층인 1문화층(Ⅷ지층)에서는 큰 찍개, 큰 옛주먹도끼 들이 나왔다. 제작수법과 유물의 갖춤새 및 짐승ㆍ지층으로 볼 때, 70만년 전 곧선사람(Homo erectus)이 짧은 기간 동안 옛큰꽃사슴을 잡아먹으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찍개ㆍ옛주먹도끼ㆍ긁개ㆍ주먹자르개 등은 큰 짐승잡기에 필요해서 제작된 석기로 옛 전통을 지니는 것들이다. 그 뒤에 바로 둘째 간빙기를 맞이해 큰물이 나 210m 높이까지 물이 들었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2문화층(Ⅶ지층)은 동굴 천장과 벽에서 두꺼운 낙반석이 떨어지고 찰흙이 쌓인 층으로 석기ㆍ짐승화석이 많이 나온 층이다. 곧선사람들이 쌍코뿔이ㆍ동굴하이에나ㆍ첫소ㆍ큰꽃사슴ㆍ말 들을 잡아먹고 산 것으로 밝혀졌다. 찍개ㆍ긁개ㆍ팔매돌ㆍ찌르개ㆍ주먹대패ㆍ주먹도끼 등의 석기가 나왔다. 석기 제작 수법은 1문화층보다 발달하였고 사냥기술도 나아졌으나 아직도 곧선사람의 테두리에 든다. 소나무ㆍ텍사과ㆍ벼과ㆍ붓꽃과의 꽃가루가 나온 것으로 볼 때, 물기가 있는 습한 환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3문화층(Ⅳ지층)은 더욱 큰 낙반석이 천장에서 떨어지고 찰흙이 쌓이면서 슬기사람(Homo sapiens)이 살았던 층이다. 긁개를 가장 많이 만들어 썼고 찍개를 비롯해 격지로 만든 주먹도끼ㆍ홈날ㆍ주먹대패ㆍ자르개ㆍ톱날ㆍ찌르개 등을 골고루 만들어 썼다. 짐승화석도 37가지로 가장 많고, 따뜻한 기후에서 살았던 짧은꼬리원숭이ㆍ쌍코뿔이와 추운 기후에서 살았던 동굴곰ㆍ옛불곰들이 있다. 그 밖에 첫소ㆍ하이에나ㆍ스라소니ㆍ말ㆍ북쪽갈밭쥐 등의 사라진 짐승들이 많았다.

이와 같은 짐승화석과 석기의 갖춤새는 이른 슬기사람의 살림을 알려주고 있다. 이들은 빙하기로 접어들 때까지 간빙기의 따뜻한 기후 아래서 오랫동안 살아 층위가 가장 두껍다. 반면에 자연환경은 소나무ㆍ벼과만을 가려낼 수 있어 오히려 서늘했던 것으로 보인다.

4문화층(Ⅱㄹ지층)은 100㎝의 두께를 가진 얇은 층으로, 격지가 많고 간접떼기로 떼낸 돌날석기가 나와 후기 구석기층으로 밝혀졌다. 우리와 같은 슬기슬기사람들(Homo sapiens sapiens)이 살았던 시기의 문화층이다. 짧은 기간동안 살았고 석기의 수도 적은 편이다. 이들은 불곰ㆍ호랑이ㆍ여우ㆍ너구리ㆍ산양ㆍ영양ㆍ멧돼지ㆍ말사슴ㆍ노구 들을 잡아먹었고, 작은 석기를 만들었으며, 긁개ㆍ밀개ㆍ톱날ㆍ새기개ㆍ찍개 들을 만들어 썼음이 알려졌다. 소나무ㆍ벼과ㆍ시초과ㆍ붓꽃과ㆍ국화과 등이 자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람의 윗머리-앞머리뼈의 맞붙은 뼈가 나왔다. 화석은 매우 굳고 무거우나 슬기슬기사람으로 가늠된다.

5문화층(Ⅱ지층)은 50㎝의 얇은 층으로 석기가 한자리에서 몇 개가 나왔을 뿐이다. 석기는 방해석과 차돌조각에서 떼어낸 좀석기가 있다. 짐승화석은 사슴ㆍ메토끼ㆍ남생이ㆍ두꺼비ㆍ개구리뿐이다. 주목과ㆍ쥐손이과만이 찾아졌다. 빙하가 풀려 선선한 기후가 찾아오는 잠깐동안 머물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석기문화가 후기 구석기시대에 이어서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6문화층(Ⅱㄴ지층)도 5∼15㎝의 두께를 가지는 층으로 무늬토기가 나오고 뗀석기와 마름질만 한 석기가 나왔다. 짐승으로는 사나운 짐승은 없고 집소ㆍ산양ㆍ영양ㆍ말사슴ㆍ사슴ㆍ노루ㆍ사향노루ㆍ고라니ㆍ멧돼지ㆍ너구리ㆍ말ㆍ멧토끼 등이 있어 이들을 잡아먹고 산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이들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좁쌀무늬고둥을 많이 잡아서 바닥돌을 화덕삼아 구워먹은 큰 자리도 확인되었다. 잡아먹은 조가비를 깎고 갈아 물고기뼈를 새기고 양쪽 끝에 구멍을 뚫어 치레거리를 만든 것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굴의 나들이에서 7㎝ 안쪽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7문화층(Ⅱㄱ지층)은 맨 위층으로서 드러나 전에 더 높이 덮여 있던 층은 쓸려나갔다. 돌자귀ㆍ돌대패ㆍ돌도끼ㆍ화살촉들의 간석기를 만들어 썼고, 멧돼지ㆍ사슴ㆍ남생이도 잡아먹은 것으로 밝혀졌다. 토기에는 무늬를 새기지 않은 민토기를 만들어 썼으며 짧은 기간 동안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소나무ㆍ녹나무ㆍ벼과ㆍ천남성과ㆍ백합과ㆍ명아주과ㆍ비듬과ㆍ국화과가 자랐음을 알 수 있다. 국화과 꽃가루가 266개나 몰려나오는 것으로 보아 민토기를 만들어 쓰던 사람들은 국화를 꺾어서 굴 안으로 가져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의]

이 유적은 곧선사람ㆍ슬기사람ㆍ슬기슬기사람들이 이어서 살았고 청동기시대까지의 문화 흔적이 찾아진 매우 드물고 귀한 유적이다. 흙쌓임의 두께가 적은 것은 간빙기 때마다 큰 물로 쓸려나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유적은 우리 나라 선사시대의 본보기가 되는 귀한 문화유적이다. 충주 둑을 쌓아서 물이 드나들고 차있는 동안도 길어졌다.

≪참고문헌≫

단양도담리지구유적발굴약보고(孫寶基, 忠北大學校博物館, 1983), 단양도담리지구유적발굴조사보고(孫寶基, 忠北大學校博物館, 1984), 단양도담리금굴유적발굴조사보고(孫寶基, 忠北大學校博物館, 1985), The Early Industry and its Palaeoecology at Kumgul Cave,South Han River,Korea (Sohn Pokee, The Pleistocene Perspective Vol. 1, The World Archaeological Congress, 1986), The Palaeolithic Industries of Kumgul Cave in Korea(Sohn Pokee, lle Union international de science prehistorique et protohistorique, 1987).

<손보기(孫寶基)>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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