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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3-18 (목) 11:26
분 류 사전1
ㆍ조회: 4836      
[고대/중세] 봉건제도 (한메)
봉건제도 封建制度 feudalism

봉건사회의 통치 형태. 대별하여 3가지 용어법이 있는데, 첫째는 봉토(封土)의 수수(授受)가 따르는 주종관계(主從關係)를 가리키는 경우, 둘째는 장원제도(莊園制度) 내지는 영주제도(농노제도)를 가리키는 경우, 셋째는 이상의 2가지를 구성요소로 하는 사회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이다.

첫번째의 것은 좁은 뜻의 봉건제도 내지는 법제사적 봉건제도 개념이고, 두번째의 것은 사회경제사적 내지는 사회구성사적 봉건제도 개념이며, 세번째의 것은 사회유형으로서의 봉건제도 개념이다. 그러나 세번째의 경우에는 <봉건(제) 사회>라는 말을 갖다붙일 수 있으며, 두번째의 경우에는 feudalism의 어원이 된 feodum(봉토)과의 관계가 들어 있지 않다.

[유럽의 봉건제도]

<성립>

좁은 뜻의 봉건제도는 종사제도(從士制度:주종 관계)라는 인적 요인과 은대지제도(恩貸地制度)라는 물적 요인이 법적으로 불가분한 형태로 결합되어 있다. 7세기 말부터 8세기 전반(前半)에 걸쳐서 장차의 카롤링거왕권은 내전, 새로운 정복, 아랍인의 침입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되도록 많은 신하, 특히 기병대를 필요로 하였는데, 처음에는 그러한 가신(家臣)을 급양하기 위한 토지를 일부의 왕령지(王領地)와 대부분의 교회령·수도원령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교회생활이 위태로워졌으므로 743∼744년에 열린 3차례의 공의회(公議會)에서 이렇게 수용된 토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해결을 도모하였다. 즉, 수용된 토지는 법적으로 모두 교회에 반환되어 교회의 소유권이 확인되나, 가신들의 토지를 빼앗으면 왕권의 기초가 흔들리므로 국왕은 가신들이 앞으로도 그 땅을 프레카리아(Precaria;恩貸地)로서 보유할 것을 명하고, 가신들은 법적 소유자인 교회에 지대(地代)를 내고 또 십일조(十一租;10분의 1세)도 내게 했다.

하지만, 이 땅은 동시에 국왕의 은대지로 간주되어 국왕이 수봉(授封)하는데, 가신은 국왕에게 지대를 네는 것이 아니라 가신으로서의 의무만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카리아는 얼마 후 교회의 그 밖의 프레카리아와 구별해서 <왕명에 의한 프레카리아>라고 했다. 이 왕명에 의한 프레카리아를 매개로 이제까지 주로 성계령(聖界領)에서 실시되어 온 은대지제로는, 거기에서 벗어나서 종사제도와 결합하게 되었다.

같은 무렵, 국왕은 가신에게 자기의 토지까지도 지대의 부담이 없는 종신은대지로 주게 되었고, 이윽고 많은 귀족들도 이것을 본받게 되었다. 카를대제가 즉위했을 때(768), 가신에게 은대지를 주는 일이 이미 일반화되었고, 또 그의 정책에도 힘입어 이 봉건적 주종관계는 급속히 보급, 종사제도와 은대지제도의 결합이 완성됨으로써 프랑크왕국의 국제(國制)의 한 지주가 되었다.

<특징>

좁은 뜻의 봉건제도, 즉 레엔(Lehen:封土)의 주고받음을 수반하는 주종관계의 기본적 특징은 자유인과 자유인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이며, 종사(가신)만이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라 주군(主君) 쪽도 법적 구속을 받는다는 뜻에서 쌍무적이라는 점에 있다.

봉건제도의 인적 요인인 종사제도는 몸을 맡긴다는 탁신(託身)의 예(禮)를 갖추고 성실을 선서함으로써 설정된다. 이 중 탁신은 종사제도의 기원이 예속적이었던 것을 이어 받아서 종사는 주군의 보호와 권력하에 몸을 맡기고 평생의 복종과 봉사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성실은 주군에 대한 여러 가지 봉사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주군의 생명과 재산에 손실을 입히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의무에서 나아가 주군의 이익이 되는 일은 모두 해야 한다는 적극적·전체적인 윤리적 태도까지도 뜻한다.

이에 대해서 주군도 또한 종사를 급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 이 중 급양의 의무를 다하는 방법으로서 일반적으로 쓰인 것이 은대지제도인데, 베네피키움(은대지;후에 독일에서는 레엔이라고도 하였음)으로 종사에게 종신제로 수여한 것은 토지뿐만 아니라 관직 같은 것도 포함되었다.

그것은 주종관계 및 종사 쪽의 봉사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본래부터 1대로 그쳤으며, 주군·종사 어느 쪽이 죽으면 일단 반환되었고, 또 종사 쪽에 의무위반이 있는 경우에는 몰수되었다. 이런 의미에서는 봉건제도의 두 요인 중 원래는 인적 요인이 우월했다고 할 수 있으며, 주군이 지는 의무는 점차 <보호와 비호>로 요약할 수 있게 되었다.

<변질과 붕괴>

그러나 이미 9세기 중엽 이후에 <봉건제도의 물권화(物權化)>라고 통칭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즉 종사에게 레엔을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레엔을 받거나 확보하기 위하여 주종관계를 맺는 현상이다. 본래는 1대에 한하였던 레엔이 사실상 세습화되기에 이른 것은 그 현저한 예이다.

또 이와 병행하여 복수종사제도, 즉 한 종사가 복수의 주군을 가지며, 그 각각으로부터 레엔을 받는다는 현상도 나타났다. 물론 주군 쪽, 특히 국왕은 이러한 물권화현상을 좌시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복수종사제도에 대해서는 성실의무의 유보와 일신전속적 종사제도에 의한 봉건제도의 인적 요인 내지 주군의 입장 강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레엔의 세습화에 대해서는 유효하게 대처할 수가 없었고,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의 봉건왕정기(봉건국가)를 마지막으로 봉건제도는 그 정치적 기능을 다하고 만다. 다시 말해서 봉건제도가 국제(國制)의 한 기둥이던 상황은 대개 14세기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당장 봉건제도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그 인적 요인이 점차 이름만 남고 또 완전히 망각된 뒤에도, 봉건제도는 차지(借地)의 한 형식으로서 근세, 구체적으로는 18세기(곳에 따라서는 1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시에 <봉건제도>나 <봉건적인 여러 권리>의 폐기가 문제되었을 때, 그 말들은 이미 레엔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영주제도(領主制度), 영주적인 여러 권리를 뜻하였다. 이와 같이 원뜻과의 연관을 잃게 된 <봉건제도>를 역사철학적인 도식속에서 인류진보상의 한 단계로서 좌표를 잡게 한 사람은 프랑스의 초기사회주의자 생 시몽이 처음이었다.

K.마르크스의 이른바 <발전단계설>, 계기적(繼起的)인 경제적 사희형태의 한 단계로서의 <봉건제도>라는 파악은, 이와 같은 사상사적(思想史的) 전개의 연장선상에 자리잡고 있다.

[중국의 봉건제도]

본래 봉건이란 <땅을 봉(封)하고 나라를 세운다[建]>는 뜻으로 군현제도(郡縣制度)에 대응하는 말이다. 제후의 봉건은 이미 은(殷)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주(周)나라는 왕조를 창건하자 일족과 공신 50여명을 중위안[中原]의 요지에 봉건하여 800제후를 군사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결절점(結節點)으로 삼았다.

새로 제후를 임명하는 경우, 책명(策命)이라고 하는 의식을 가지는데, 관(官)·작(爵)과 동시에 읍토(邑土)와 백성을 준다는 뜻의 임명서가 주어지며, 아울러 권위의 상징으로서 청동예기(靑銅禮器)와 무기, 거마구(車馬具)·의복·장신구·기(旗)·관구(官具) 등이 주어진다.

제후는 이것을 받들고 지배지로 가서 국도(國都)의 읍(城市)을 세우고 주변의 여러 읍(鄙邑)을 복속시켰다. 제후는 또한 일족을 중심으로 경대부(卿大夫;귀족)에게 <씨(氏);성씨·가문)>를 내리고 관직과 채읍(采邑)을 주어 지배조직을 만들었다.

왕실·제후·경대부는 혈연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종법(宗法)에 의해서 조직되고 결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정치도 제사(종묘와 사직)를 중히 여기고, 왕실의 제사에는 제후가 참가하며, 공납의 의무 이외에 군역(軍役)이나 토목사업에도 종사하였다. 제후에 복속한 여러 읍 또한 같은 의무를 지고 있었다.

다만 국도에 사는 서인(庶人)은 국인(國人)이라고 불리며 정치·군사·제사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비읍(鄙邑)의 서인은 야인(野人)으로 불리며 씨족적 질서를 유지한 채 왕공귀족(王公貴族)에게 조세를 내고 부역에도 종사하였다. 이같은 국도에 의한 비읍의 지배라는 형식을 가지고 읍제국가(邑制國家)·읍토국가(邑土國家)·성시국가(城市國家)·도시국가 등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있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제후는 독립하여 군현제(郡縣制)를 실시, 측근관료에 의한 지배를 하게 됨으로써 봉건제도는 붕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전한(前漢)·서진(西晉)·명(明)나라 등에서 봉건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본의 봉건제도]

일본에서의 봉건제도 개념은 일의적(一義的)이 아니다. 중국사에서의 군현(봉건)이란 경우의 봉건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해석도 있고, 유럽 중세의 주종제도(主從制度)를 가지고 봉건제도라고 하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널리 이루어지고 있는 해석은 주종제도적 결합에 의해서 권력을 구성하는 지배계급이 자립적인 소생산자인 농민으로부터 고율의 소작료(해마다 바치는 공물)와 부역 등을 거두어들이는 관계를 기축으로 해서 성립된 사회를 봉건사회라고 하며, 그 사회를 규정하는 제도를 봉건제도로 간주하는 것이다.

<봉건제도 성립 논쟁>은 주로 소농민경영의 성립이라는 생산방식에 기본적 관점이 두어진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그 뒤 권력론·국가론적 관점이 도입됨으로써 일본의 봉건사회의 구조적 특질로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점들이 주목되었다.

첫째로는 중앙집권성이 강한 일본의 봉건사회에서는 재지영주층(在地領主層)의 자립할 거적인 영역지배가 장기적 과정을 거쳤다는 것, 둘째로는 재지영주층에 의한 농민지배가 유럽과는 달리 일률적인 <농민> 신분지배로서 이루어졌다는 것, 셋째로는 가마쿠라[鎌倉]시대를 통하여 고부[公武], 즉 구게[公家:조정]와 바쿠후[幕府;막부]권력의 결합에 의한 집권적(集權的)인 국가체제가 계속되었다는 것, 넷째로는 중세 후기에 재지영주층의 영역지배가 진행되었으나 다시 오다[織田]·도요토미[豊臣]정권과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때에 집권적 정치체제·국가체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에서는 대체로 유럽의 그것과 비슷한 주종제도가 형성되었으나 국가체제·신분제 등의 측면에서는 개별의 영주제적 지배가 국가적으로 규제되어, 집권적 경향이 짙은 봉건제도가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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