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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4 (수)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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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520      
[국가] 인도 (한메)
인도 印度 Republicof India

히말라야산맥 이남, 인도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화국.

정식명칭은 인도공화국(Ganahantra Bharat). 면적 316만 6400㎞橈. 인구 9억 3574만(1995). 동쪽은 미얀마·중국과 접경하고 방글라데시를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은 파키스탄, 북쪽은 네팔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닿아 있다. 수도는 뉴델리.

[자연]

<지형>

인도는 4개의 대지형구로 이루어져 있다. 즉 빙하로 뒤덮인 히말라야산맥, 갠지스강과 인더스강 상류에 형성된 힌두스탄평야, 건조지대인 타르사막 및 반건조지대인 데칸고원으로 되어 있다. 히말라야산맥은 6억 년전에는 해저였던 곳으로 대략 7000만 년 전부터 대규모의 습곡운동과 단층운동으로 융기가 시작되어 지금의 거대한 산체를 이룬 신생대조산대(新生代造山帶)에 속하는 산맥이다.

동서길이 약 2500㎞, 나비 240㎞ 규모의 이 산맥에는 에베레스트산(8848m)을 비롯하여 많은 고봉이 있다. 히말라야는 히마(Hima;눈)와 알라야(격laya;저택)의 합성어로 <눈의 집>이라는 뜻이며, 만년설로 뒤덮인 설원의 면적은 4만㎞²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힌두스탄평야는 갠지스강·브라마푸트라강·인더스강의 3대 하천유역에 형성되어 있다. 동서길이 약 2400㎞, 남북길이 240∼320㎞, 면적 77만㎞²로 전체적으로 낮고 편평한 평야를 이룬다.

갠지스강 하구의 벵골만 연안에서 서쪽으로 약 1600㎞나 떨어진 자무나강의 델리 부근도 해발고도는 200m에 불과하다. 힌두스탄평야지역은 홍적세(洪積世) 무렵에는 해저였는데 그 이후 북쪽 히말라야산맥과 남쪽 데칸고원으로부터 운반된 대량의 토사로 메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퇴적층은 가장 깊은 곳이 6000m를 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곤드와나 육괴(陸塊)로 이루어진 데칸고원은 넓게는 갠지스강 이남 반도부에 있는 고원군과 산맥군의 총칭이며, 좁게는 마하라슈트라주·카르나타카주 및 안드라프라데시주에 포함되는 고원부분을 일컫는다. 면적은 약 70만㎞²이다. 데칸고원의 서쪽 경계에는 평균 해발고도 1200m의 서(西)고츠산맥이 약 1600㎞에 걸쳐 남북으로 뻗어 있고, 동쪽 경계에는 해발고도 600m의 동고츠산맥이 있다.

이들 산맥은 몬순의 비구름이 이동하는 데 장애가 되어 고원 서부는 연강수량이 600㎜ 전후의 반건조지대이다. 또 고원은 전체적으로 해발고도 1200∼1300m로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계단식으로 낮아진다. 따라서 북부의 나르바다강과 탑티강을 제외하면 주요 하천은 모두 서고츠산맥에서 발원하여 동쪽의 벵골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양은 북서부의 데칸 용암류지대(熔岩流地帶)의 흑색토를 제외하면 지질이 메마른 적색토와 라테라이트성 토양이 일반적이다.

<기후>

아시아대륙의 남단에 있으면서 북반구에 광대하게 자리잡고,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산맥과 인도양에 둘러싸인 인도는 이러한 지형에 의하여 전체적으로 몬순(계절풍) 기후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계절은 겨울·여름·우기(雨期)·가을의 4계절로 나누어진다. 겨울(12월∼2월)은 서지중해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의 둥베이지구에 이르는 고압대의 영향으로, 고공에서 냉기가 동쪽을 향해 흐르고 쾌청·저온으로 일교차가 심하다.

그러나 한 달에 4∼5번 정도 이란고원 방면에서 발생하는 저기압이 동우전선(冬雨前線)을 동반하여 힌두스탄평야를 동진(東進)하기 대문에 비를 내리며, 그 뒤에는 한랭기단(寒冷氣團)이 흐르므로 기온이 0℃ 전후로 떨어지는 일도 있다. 이 비는 북인도의 겨울밀 작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 뒤 태양이 북회귀선을 향해 북상함에 따라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하여 여름(3∼5월)이 된다.

기온의 상승은 남인도(3월 평균기온 38℃)에서부터 시작하여 4월부터 중부인도가 38∼43℃, 5월에는 북인도가 45℃ 이상의 혹서가 된다. 힌두스탄평야에서는 고온으로 인해 상승기류가 발생하여 전체적으로 저압대가 된다. 또한 데칸고원으로부터 강한 열풍이 불어와 때로는 모래태풍과 우박을 동반하는 뇌우(雷雨)가 닥치기도 한다.

힌두스탄평야의 기온상승과 저압대는 5월 말에 극한상태에 이르고, 또 남서쪽으로부터 습도가 높은 인도양의 무역풍이 불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남서몬순, 즉 우기(6∼9월)의 시작이다. 6월 초에 인도 남단지역부터 우기로 접어들어 점차 북상하다가 6월 중순에는 인도 전역이 우기로 접어든다. 이 시기에 북인도에서는 연강수량의 90%가 내린다. 9월 둘째주가 되면 무역풍이 약해지고 인도를 넓게 덮고 있던 저기압이 벵골만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여 10월에는 점차 고기압이 확장하면서 가을(10∼12월)이 된다.

북인도에서는 건조하고 상쾌한 날씨가 지속되나 남인도의 동쪽 연안에는 벵골만 남쪽으로 내려간 저기압의 활동으로 사이클론(태풍)이 발생한다. 평균 3년에 1번 정도 크게 발달한 태풍이 남동부 연안에 상륙하여 많은 피해를 준다. 때로는 동해안에서부터 데칸고원을 가로질러 서해안의 케랄라지방에 큰 피해를 입힌 뒤 아라비아해로 빠져 나가기도 한다.

인도에서 몬순으로 인한 비는 농업발전을 저해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연평균 1000㎜ 이상의 다우지역은 서고츠산맥의 서쪽 해안평야, 동고츠산맥의 동쪽해안평야 및 동인도에 한정되고, 나머지 데칸고원의 주요부와 북서인도는 반건조지역이어서 농업개발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생물상>

넓은 국토와 다양한 지형, 온대에서 열대에 이르는 기후조건으로 인도의 식생(植生)은 3만여 종에 달한다. 지역별로 보면 건조열대 낙엽수림지역, 건조지 유자(有刺)관목수림지역, 습윤(濕潤)열대 열대 낙엽수림지역, 온대 고지림지역 등 4개의 특징있는 식생지역으로 나뉜다.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건조열대 낙엽수림지역은 펀자브평원에서부터 갠지스강유역, 데칸고원의 북서부와 남단부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다.

주요 수종은 힌두스탄평야 인도보리수·사라수(沙羅樹), 데칸고원의 티크·자단(紫檀)·월계수 등이다. 건조지 유자관목수림지역은 하리아나주·라자스탄주·구자라트주 등과 데칸고원 중앙부에 널리 분포한다. 아카시아·님(높이 10m 이상되는 가로수) 등은 인도 서부에 많고 백단향과 님은 데칸고원 중앙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수종이다.

습윤열대 낙엽수림지역은 네팔국경에 닿아 있는 테리지방, 아삼구릉, 데칸고원 동부, 서고츠산맥에서 볼 수 있다. 이 수림은 연강수량 1000∼2000㎜ 지역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며 건조혹서기의 6∼8주 사이에 잎이 떨어진다. 수종은 티크·월계수·자단·사라수 등이 대표적이다. 온대 고지림지역은 서히말라야지역에 넓게 분포하며 히말라야삼나무·해송·가문비나무·전나무 등이 많고 더 높은 곳에서는 자작나무·노간주나무 등도 볼 수 있다.

또 시가지나 취락 주변 등 전국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으로 북인도에서는 인도보리수·반얀나무(벵골보리수) 및 님, 남인도에서는 종려과의 수종, 특히 코코야자를 들 수 있다. 독립 후 인도정부는 연강수량 400∼800㎜의 반건조지역에서 유카리나무의 조림사업을 광범하게 벌이고 있다. 인도의 국토는 경지면적이 넓은 데 비해 삼림면적이 17% 정도로 좁지만 그 가운데 90% 이상이 국유림이어서 조림사업은 정부의 중요과제로 되어 있다.

인도는 자연환경의 혜택으로 포유류 약 500종, 조류 약 2만 1000종, 곤충 3만 종 등 많은 동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유류 중 가축을 제외 하면, 코끼리·야생물소·인도코뿔소·호랑이·사자 및 각종 사슴 등 큰 짐승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왕후(王侯)와 지방의 영주들이 사냥을 좋아했고 또 식민지시대에는 영국인도 사냥을 즐겼기 때문에 현재 큰 짐승의 서식지는 거의 국립공원이나 자연동물보호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주요 동물의 지역별 서식지를 보면 카슈미르지방의 히말라야산맥에는 야생염소·곰·카슈미르사슴·표범 등이 많고, 펀자브평원 일부에는 시로우류가 남아 있다. 동인도 아삼구릉의 삼림지대에는 야생물소·사슴 등과 세계에서 유일한 인도코뿔소가 서식하며, 유명한 벵골호랑이는 갠지스강 하구의 밀림에서 지금도 가끔 사람을 위협한다. 또 마하나디강에는 악어가 서식하고 있고, 서인도의 구자라트주 기르보호구는 아시아 유일의 사자서식지로 유명하다.

카르나타카주 북부 벨가움시의 삼림에는 코끼리·호랑이·야생물소·표범·곰·사슴 등이 서식한다. 또 카르나타카주 남부의 서고츠산맥 동쪽 기슭의 삼림에는 야생물소나 코끼리가 서식하여 국도에 <코끼리 주의>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남쪽의 닐기리산지에는 <닐기리염소>라 일컬어지는 야생염소가 서식한다. 또한 인도에서 호랑이는 국민의 동물로, 공작은 국민의 새로 지정되어 있다.

인도는 1972년 시행된 자연동물보호법 아래 2500마리 이상의 호랑이 서식을 목표로 전국 11개보호구에서 증식사업을 실시하고 있고, 악어도 74년부터 3000마리를 목표로 국제연합기구의 원조를 받아 12개 보호구에서 증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동물과 조류는 전국 국립공원 20개소, 자연동물보호구 197개소에서 보호되고 있다.

[지지(地誌)]

지형을 지표로 하여 지역을 구분하면, 인도는 히말라야산맥·힌두스탄평야·데칸고원 및 연안도서로의 4대 지역으로 나뉜다.

<히말라야산맥>

인도의 히말라야산맥은 네팔을 사이에 두고 서히말라야지방과 동히말라야지방으로 나누어진다. 서히말라야지방은 잠무카슈미르주·히마찰프라데시주 및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북부를 포함한 지역을 가리키고, 동히말라야지방은 아르나찰프라데시중앙정부 직할지역과 시킴주를 중심으로 한다. 두 지방 모두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악지대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강수량이나 역사적 개발과정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서히말라야지방은 카슈미르분지를 중심으로 비교적 빠른 속도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데 반하여 동히말라야지방은 인도에서 개발이 가장 늦은 지역의 하나이다. 농업은 쌀·옥수수 및 수수류가 두 지역의 주요 작물이지만 동히말라야지방에는 지금도 화전농업 경작지가 남아 있다. 서히말라야지방의 사과재배는 적합한 기후조건으로 최근 산출량이 늘고 있다. 또 서히말라야산지는 카슈미르분지를 중심으로 한 피서지와 힌두교의 성지로서 유명하다.

카슈미르분지에는 주도(州都) 스리나가르를 비롯하여 근교에 파파르감·아마르나트·소나마르크 등의 산악명승지가 있어 <진주에 에나멜로 아로새긴 맑게 흐르는 물과 호수의 낙원>으로 평가되면서 관광객이 해마다 늘고 있다. 특히 한여름에도 20℃ 정도인 키슈미르분지는 40℃가 넘는 혹서를 겪어야 하는 힌두스탄평야와 데칸고원 주민에게 좋은 피서지를 제공한다. 또 가내공업으로 생산되는 카슈미르융단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진 특산품이다.

서히말라야의 카메트산(7756m)은 갠지스강의 발원지로서 힌두교의 3신 가운데 하나인 시바신(파괴의 신)이 거처하는 곳이라 하여 숭배되고 있다. 6000m 이상의 고지에 있는 바드리나트·케다르나트 등의 성지는 예로부터 개방되어 있어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든다. 한편 서히말라야지방에서는 파키스탄과 중국, 동히말라야지방에서는 중국과의 사이에 국경선이 확정되어 있지 않아 독립 이래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힌두스탄평야>

북쪽의 히말라아산맥과 남쪽의 데칸고원 사이에 있는 힌두스탄평야는 동서길이 약 2400㎞, 남북길이 약 240㎞로 국토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는데, 인도 전체 인구의 약 40%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어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평야지역의 하나이다(인구밀도 433명/㎞橈). 이 평야는 서쪽에 펀자브·라자스탄·하리아나, 중앙에 우타르프라데시 및 비하르, 동쪽에는 서벵골·아삼 등의 주와 동부산악지역의 여러 주를 포함한다.

힌두스탄평야는 세계적인 큰 강들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데 중앙부를 갠지스강 상류, 서쪽을 인더스강 상류, 동쪽을 브라마푸트라강의 하류 유역이 차지하고, 땅이 비옥하여 쌀·밀·수수류의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위도상으로는 북회귀선에서 북위 30禑 정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내륙성기후이기 때문에 아삼지방의 열대다우지역에서 타르사막의 건조혹서지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 기후의 다양성이 힌두교·불교·자이나교·시크교 등 인도기원의 다양한 종교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인도사를 크게 결정지은 이슬람교도의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 지배는 13세기, 이 평야서부에 있는 델리에서부터 시작되었고, 17세기에는 동쪽 캘커타에서부터 영국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반영독립전쟁인 세포이의 항쟁 역시 1857∼58년 이 평야를 무대로 일어났다. 1947년의 인도·파키스탄 분리독립도 결과적으로 인구가 조밀한 데다가 생산력이 높은 풍요로운 이 평야의 정치적 분할이었다.

힌두스탄평야는 현대의 경제활동면에서도 두드러진 지역적 특징을 나타낸다. 서부의 라자스탄주는 석고·은·석면의 생산지이며, 펀자브주는 밀·쌀의 생산지 및 기계기구공업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부의 우타르프라데시주는 사탕수수, 비하르주는 석탄 및 철광석·구리·운모 등 각종 광물자원의 보고로서 인도 전체 광업생산량의 40%를 산출하고 있고, 동부의 서벵골주에서도 쌀·황마(黃麻)·차(茶) 및 제철·화학공업 등이 활발하다. 또 아삼주는 홍차생산의 중심지이며 국내 산출량의 50%에 이르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산출하고 있다.

<데칸고원>

이 고원지대는 인도아대륙 반도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이곳은 많은 산지와 잔구(殘丘)가 모자이크모양을 이루고 있는 해발고도 300∼1200m의 지대로 파상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서쪽 가장자리에 서고츠산맥, 동쪽에는 동고츠산맥이 있기 때문에 몬순에 의해 강수량이 적어 서부는 연강수량이 600㎜ 전후의 반건조지역이며, 전체적으로도 1000㎜ 이하의 소우지역이어서 농업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

데칸고원의 문화권은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뉘고 남부는 다시 각각 특징있는 3아구(亞區)로 나누어진다. 북부의 마디아프라데시주와 마하라슈트라주는 아리아어(語) 문화권이며, 특히 마라타인들에게는 중세의 이슬람교도 지배에 크게 저항했던 힌두교 민족주의의 성격이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다. 남부의 안드라프라데시주·카르나타카주 및 타밀나두주는 원주민족계의 드라비다어권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중세 이래 이슬람교도의 강력한 지배가 계속된 안드라프라데시주민, 타밀민족주의 색채가 농후한 타밀인, 또 3개 주 중에서 가장 건조지역이 많아 진취적 기질이 강한 카르나타카주민 등은 각각 정치·경제활동에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안드라프라데시주는 이슬람 색채가 강하기 때문에 반중앙정부적이며 자원이 부족한 상태여서 독립 후의 경제발전에서도 뒤지게 되었다.

타밀나두주도 반도 남단부에 위치한 연유로 이제까지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되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타밀인들은 예로부터 동남아시아 각지에 많은 이민을 보내는 등 국제감각에도 뛰어났고 타밀문화의 우월성과 타밀인들의 단결력을 과시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 때문에 중앙정부에 대하여 한층 강한 자치의식을 가지고, 자주독립의 기풍을 꾸준히 다지고 있다.

한편 카르나타카주는 예로부터 데칸고원의 남부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아울러 반건조기후인 관계로 농업에 대한 투자가 없었던 반면 상공업발달에 힘썼다. 근세에는 이 지역 출신 명장 티푸술탄이 영국의 식민지화에 끝까지 저항하여 인도의 영웅이 되었고, 20세기 초에는 위대한 기업가이며 정치가인 비슈베스 바라야가 나와 남인도에 첫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크리슈나라지호(湖)를 축조하여 카르나타카주 남부에 대규모 관개용수로망을 완성하는 등 농업발전에 기여했다.

<연안·도서>

아시아대륙으로부터 인도양으로 돌출한 꼴의 국토는 해안선이 약 6100㎞에 달하며, 반도 남단의 코모린곶을 경계로 동해안과 서해안으로 나누어진다. 또 마드라스의 서쪽 약 1500㎞, 미얀마 남해상에 안다만제도와 니코바르제도가 있고 케랄라주의 캘리컷(코지코드) 서쪽 앞바다 약 350㎞의 아라비아해에는 락샤드위프제도가 있다.

이 제도들은 중앙정부직할지이며 안다만제도와 니코바르제도는 포트블레어에, 락샤드위프제도는 케랄라주의 캘리컷에 정청(政廳)을 두고 있다. 주민들은 어업과 야자생산 및 자급용 미곡재배에 힘쓰고 있다. 연안지역을 보면 동해안은 융기해안평야로서 남쪽으로 갈수록 폭이 넓어져 100㎞에 이른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코로만델해안이라 일컬어지며 쌀의 곡창지대로서 번영했다.

서해안은 서고츠산맥이 아라비아해로 침수된 침수해안으로 말라바르해안이라 일컬어지며 평균나비 25㎞의 좁은 띠모양의 평야이다. 남서몬순의 영향으로 연강수량이 2000∼6000㎜에 이르는 다우지역이어서 쌀과 야자재배가 활발하다. 연안지역은 오래 전부터 해양을 통하여 외국과 접촉하면서 인도 고유의 역사를 구축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북서인도의 구자라트주 연안은 고대부터 중세까지 인도와 서아시아·아라비아방면을 잇는 해상교통의 문호였으며 특히 수라트는 서해안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였다. 15세기 말에는 포르투갈세력이 서해안에 내항하여 봄베이·고아를 비롯하여 다만·디우 등의 항구도시를 열었다.

또 동해안에 내항한 프랑스는 퐁디셰리, 영국은 마드라스·캘커타에 상관(商館)을 설치하고 인도상인과 교역을 시작하였다. 현재 동해안에 발달한 주요 항만도시는 캘커타·할디아·파라디프·비샤카파트남·마드라스·투티코린 등이며 서해안에서는 봄베이·마르마가오·망갈로르·코친 등이다.

[역사]

인도라는 말은 힌두와 같은 어원으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인더스강 연안에 도달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힌두(신두), 그 토지를 힌도(인도)라고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인도인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바라트라고 하였다. 바라트란 북인도, 특히 갠지스강 중류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19∼20세기에는 오늘날의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3국을 포함한 인도아대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영국식민지 지배시대에 영국인은 인도아대륙 전체를 인도라고 부르고, 인도인은 자신의 나라를 바라트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도에서는 바라트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다. 인도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중국과 함께 최고(最高)의 문명발생지로서 역사가 길고, 문화도 독자적이다.

<고고시대(考古時代)>

인도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는 인더스문명이다. 인더스강 유역에서 BC 2500∼BC 1700년 무렵까지 번영했던 인더스문명의 특징은 도시유적이다. 정연하게 계획된 도시 내부에는 곡물창고·목욕탕 등 공공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신전(神殿)이나 왕궁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문명과 구별되는 특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더스문자는 아직 해독되고 있지 않다. 중심유적지는 모헨조다로·하라파·칼리방간·로탈 등이다.

인더스문명은 BC 1700년 무렵 급속히 쇠퇴했는데, 그 원인으로는 외래민족에 의한 파괴나 기후·지형적 조건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인더스문명의 담당자는 현재 남인도에 거주하는 드라비다 여러 민족과 동일계통의 사람들이었으나 멸망한 뒤의 인더스문명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古代)>

역사시대는 BC1000년 무렵 아리아인에 의해 갠지스강 상류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아인은 갠지스강 유역에 농경촌락을 형성하고 철기(鐵器)와 회색칠무늬토기〔灰色彩文土器〕를 사용하였다.

⑴ 부족국가의 탄생과 통일국가

BC6세기 무렵 인도에는 16개국의 부족국가와 씨족국가가 있었다. 그 가운데 오늘날의 우타르프라데시에 있었던 코살라국과 비하르에 있었던 마가다국은 전제적 고대국가(專制的古代國家)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 뒤 마가다국이 코살라국을 멸하고 갠지스강유역을 통일하였다. 이 마가다국의 뒤를 이은 난다왕조를 멸하고 최초의 고대제국을 형성한 왕조는 마우리아왕조이다.

⑵ 마우리아왕조

BC 317년 찬드라굽타가 세운 마우리아왕조는 BC300년 무렵에는 갠지스강유역뿐만 아니라 북인도 전역을 지배하였고 제3대 아소카왕 때는 인도반도 남단부를 제외한 인도 전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갠지스강유역,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서인도, 우자인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인도 일부와 데칸지방 일부 등 경제적 선진지대에 대한 지배와 그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관리·지배에 한정되어 있었다.

마우리아왕조는 이 지역을 중앙직할지역과 몇 개의 속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중앙직할지역에는 상급관료군(上級官僚群), 군사장관(軍事長官)의 지휘를 받는 군인 등이 있었다. 각 속주는 태수가 통치했으나 북서인도의 타크샤시라, 중부인도의 우자인 등 주요 속주는 왕자가 다스렸다. 마우리아시대의 농촌사회에서는 분업관계(分業關係)가 성립되어 농민촌락 이외에 목수촌(木手村)·철공촌(鐵工村)과 같은 각종 수공업촌이 있었다. 국가와 농민 사이에 중간적인 영주계층은 없었으며, 농민은 경작토지에 대해 많은 종류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중세>

⑴ 힌두시대

마우리아왕조는 아소카왕이 죽은 뒤 급속히 쇠퇴하여 BC2세기 무렵 멸망하였다. 그 뒤 강력한 통일국가가 형성되지 못한 채 각 지방을 대표하는 왕조가 일어나 흥망을 되풀이하였다. 먼저 세력을 확정한 것은 북서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쿠샨왕조로서 AD2세기 전반 카니슈카왕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무렵 데칸지방에는 사타바하나왕조, 남인도에는 촐라·체라·판디아의 3왕국이 있었다. 그 후 4세기 초에는 북인도에 굽타왕조, 데칸지방에 찰루키아왕조, 남인도에 팔라바왕조가 있었다.

굽타왕조가 쇠퇴한 뒤 하르샤왕조의 통일기를 거친 북인도에서는 라지푸트계의 여러 왕조가 난립했는데, 특히 벵골지방에서는 팔라왕조가 벵골문화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 굽타왕조 이후 12세기 무렵까지의 인도사회는 동판문서(銅板文書)를 통해 알 수 있다. 동판문서는 왕이나 현지의 유력자들이 사원과 토지를 하사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남인도에서는 대신 석조사원의 벽면에 석각문(石刻文)을 새겨 토지의 기증을 나타냈다. 이와 같은 사료를 통해 당시 국왕 밑에 영주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⑵ 무슬림시대

12세기 이슬람교도 세력이 인도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아프가니스탄 고르왕조의 무장이었던 쿠트브 웃딘 아이바크는 델리를 함락하고, 1206년 인도 최초의 무슬림왕조인 노예왕조(1206∼90)를 창시하였다. 노예왕조의 뒤를 이은 할지왕조(1290∼1320)의 알라웃딘 힐지는 서인도의 데칸지방을 침략하고 남인도의 카카티야왕조·판디아왕조·호이살라왕조 등을 점령하였다.

할지왕조를 대신한 투글루크왕조의 무하마드 이븐 투글루크는 데칸 북부로 도읍을 옮기는 등 남하정책(南下政策)을 중시하고 남인도로 여러 차례 원정군을 보냈다. 이들 두 왕의 활동을 통해 이슬람의 영향이 북인도에서 남인도까지 미쳤다. 투글루크왕조의 데칸원정은 굴바르가에 데칸지방 최초의 이슬람정권 바만왕조를 수립하였다. 바만왕조는 15세기 말 5왕국으로 분립되었다. 데칸 이남의 힌두세력들은 비자야나가르왕국을 세워서 여러 무슬림왕국의 연합군에게 대항하였으나 패하여 쇠퇴하였다.

⑶ 무굴제국

북인도에서는 델리의 여러 왕조에 이어 1526년 바부르가 무굴왕조를 수립했다. 제3대 황제 악바르 이후, 자항기르·샤자한·아우랑제브의 약 150년간은 무굴제국의 전성시대였다. 이 동안 무굴제국은 북인도 일대의 펀자브·아프가니스탄 지방뿐 아니라 구자라트·신드·벵골 등을 정복했으나, 아우랑제브시대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델리·펀자브지방에서는 시크교도가 활동하고 있었다. 무굴제국은 시크교를 탄압했으나 세력을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데칸지방에서는 마라타세력이 시바지의 지휘아래 17세기 중엽부터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우랑제브는 데칸에 있는 군영(軍營)에 몇십 년간 체재하면서 마라타세력을 몰아냈다. 1680년에는 시바지의 아들이며 제2대 왕인 산부지를 학살하여 마라타세력이 한때 후퇴하였으나, 제3대 왕 라자람은 남인도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그 뒤 17세기 말 세력을 회복한 마라타세력은 데칸에서 무굴세력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죽자 무굴제국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고, 18세기 말에는 무굴궁정의 실권을 마라타의 신데가(家)가 장악하게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지배>

18세기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진출했다. 영국이 먼저 발판으로 삼은 곳은 벵골지방으로, 1700년 오늘날의 캘커타를 거점으로 삼았다. 18세기 전반은 통상을 주로 하고 있었으나, 중반 이후는 정치문제에 관여했다. 1757년 프랑스를 인도에서 축출한 영국은 64년 바크사르싸움에서 벵골태수·아우드태수·무굴황제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벵골의 징세행정권(徵稅行政權)을 탈취했다. 이 결과 벵골지방은 실질적인 영국식민지가 되었다.

1799년에는 남인도의 마이소르왕국을 정복하고, 1804∼1805년에는 마라타세력을 격파함으로써 북인도 일대를 획득하였다. 18년에는 마라타의 재상정부가 영국에게 멸망하여 영국은 데칸고원 서부를 중심으로 하는 마라타령을 획득하였다. 1820년에 펀자브의 시크왕국을 제외한 인도 전역은 영국지배 아래 들어가거나 영국과 조약을 맺은 토후국(土侯國)이 되었는데 1894년 시크왕국마저 멸망시키고 영국은 인도식민지화를 완료하였다. 그 뒤 1850년대는 직계자손이 없는 경우 양자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실권(失權)의 원리>에 의해 많은 인도토후국이 무너졌다. 1856년 아우드왕국의 멸망은 세포이의 항쟁의 한 계기가 되었다.

⑴ 인도사회의 변질

영국의 인도지배는 인도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그것은 영국이 영국이념에 맞추어 인도 사회를 지배하면서 인도사회에 내재된 논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토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토지소유자를 확정하고 그들로부터 지세를 징수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래의 직책에서 오는 이익에 의해 중층적으로 형성되어 있던 토지권익체제(土地權益體制)를 변경시켰다.

이처럼 사회에 대해 배타적·근대법적 토지소유권관념을 강요하는 것은 인도의 사회관계를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인도사회에서는 관습법적으로 판차야트집회에서 분쟁을 재결(裁決)하였다. 하급심(下級審) → 상급심(上級審)의 서열관계(序列關係) 및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재결의 결과는 사회관습의 구속력에 의해 강제적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러한 법관행을 무시하고 근대적 법과 재판제도를 도입한 인도법전을 편찬했다. 한편 경제적인 면에서도 인도는 촌락이나 지역사회를 단위로 한 경제구조에서 국제적인 상업관계로 편입되는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동 속에서 인도 고유의 문화체계는 해체되었다.

<제국주의시대>

세포이의 항쟁 뒤 인도는 정치적·경제적 변동기를 맞이했다. 제국주의시대가 개막된 1870년대부터 인도는 제국주의지배를 직접 당하게 되었으며, 인도는 반제국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전인도를 대표하는 정당 <인도국민회의파>가 발족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58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산되면서 인도는 인도정청을 통해 영국의 지배를 직접 받게 되었다. 세포이의 항쟁 뒤 영국은 토후국의 병합방침을 버리고, 그것을 온존(溫存)시키는 방침을 내세웠다.

그 결과 식민지 인도는 영국령의 주(州)와 토후국으로 구성되는 모자이크형의 변칙적인 통치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 형태는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경제적 측면에서 인도는 종래의 상품·원료시장의 기능과 함께 자본투하시장의 성격도 갖기 시작했다. 자본수출의 대상은 철도건설로 세기 말에 주요 철도망이 완성되었으며 이 밖에도 황마·석탄·면공업 등에 자본이 투하되었다.

면공업은 조로아스터교도가 1854년 면방적공장을 설립한 이후 급속히 발전했는데, 이와 함께 조로아스터교도계의 타타재벌은 면공업과 제철업에 자본을 투자해 성공했다. 또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인도자본은 차츰 경제적인 기반을 강화하고 있었다. 1885년 12월 상공업도시 봄베이에서 인도국민회의파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벵골정치가 S.바네르지와 봄베이 출신 정치가 D.나오로지가 참가했는데, 신당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영국·인도 사이의 우호관계 촉진이었다. 동시에 대회결의를 통해 행정제도의 민주적인 개혁과 군사비의 삭감 및 수입목화관세(輸入木花關稅)의 재실시를 요구했다. 신당의 이러한 온건노선은 인도 지식계급에 의한 제국주의 비판의 초기형태로서 각 주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자체가 인도정치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1905∼1908년에는 국민회의파의 지도 아래 벵골분할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1905년 당시의 인도 총독 G.N.커즌이 벵골을 동·서로 분할한다고 발표했는데, 그것은 인도 선진지대 중 하나인 벵골지방의 벵골민족주의 운동을 힌두와 무슬림으로 분열시켜 약체화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벵골분할의 강행은 인도 여론의 반발과 저항을 초래하였다.

1905년 말 개최된 국민회의파대회는 영국제품의 배척을 결정하고, 1906년 12월 캘커타대회에서는 국산품애용, 독립과 민족교육의 달성을 결정했다. 이 반대운동의 주요 지도자는 펀자브 출신의 L.라지파트 라이, 벵골 출신의 B.C.팔, 봄베이의 B.G.틸라크 등 3명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지도이념을 달리하는 온건파의 방해와 영국측의 탄압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틸라크는 미얀마로 추방되었고 라지파트 라이는 미국으로 도망갔다.

그 뒤 영국은 1909년 무슬림 중간층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몰리―민토개혁안을 채택하고 개혁을 시도하였다. 또 1906년 전인도무슬림연맹이 영국의 주선으로 발족되었고, 11년 벵골분할령이 철회되었으며 수도는 캘커타에서 델리로 옮겨졌다.

<제1·2차세계대전>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을 포함하는 30여 년의 시기를 인도에서는 <간디단계의 인도민족운동기>라고 한다. 이 단계는 인도민중이 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정치투쟁을 제기한 시기였고, 인도 부르주아계급도 독립인도의 경제개발구상을 내세우는 단계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즉 이 시기는 영국지배의 후퇴기에 해당하며, 제2차세계대전기에 인도는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하였다.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시 영국은 인도의 인력과 자원을 동원했으며, 그 결과 인도는 희생을 치렀다. 그 희생의 대가는 적었으며, 인도의 정치적·경제적 위기는 급속하게 깊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시 영국은 대전 후의 자치실현을 약속하고 인도의 전쟁지지를 얻었으나, 몬터규―쳄스퍼드개혁은 인도민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1919년 국민회의파와 M.K.간디의 제1차 비폭력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인도의 저항형태는 반제(反帝)·반봉건(反封建)의 두 형태로 나타났으며, 도시 소부르주아계급·노동자·농민이 참여한 피압박민족의 계급투쟁이었으나, 1922년 정지되었다. 1920년에는 전인도노동조합회의가 결성되었고, 북인도 각지에 개별적인 농민조합이 탄생하였다.

1925년에는 칸푸르에서 인도공산당창립대회가 개최되었고, 각지에서 노동당 활동을 벌였다. 30년 초 국민회의파가 지도하는 반제민족운동이 다시 고양되어 34년까지 지속되었다. 세계공황은 인도의 도시생활자와 농민을 생활고에 빠뜨렸다. 국민회의파는 1929년 대회에서 완전독립을 결의하고, 30년 1월 26일을 독립요구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노동운동은 영국의 탄압으로 좌절되었으며, 전인도노동당은 반제민족운동에 협력하지 않았다.

인도농민을 결집하는 전인도농민조합은 1936년에 창립되었다. 한편 영국은 1935년 인도통치법을 마련하고 국민회의파에 뿌리를 둔 인도의 중간충을 통치기구 내부로 끌어들였다. 이 통치법으로 국민회의파의 저항·타협이라는 양면성과 M.A.진나가 이끄는 무슬림연맹을 인지(認知)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슬림연맹은 펀자브와 벵골 두 주에서 제1당이 되었다.

신통치법(新統治法)은 한정적 주자치(限定的州自治)를 도입했다. 제2차세계대전의 개시와 함께 인도는 참전국이 되었지만 국민회의파는 비협력 방침을 취했다. 1941년 독일·소련의 전쟁개시와 함께 전쟁은 제국주의전쟁에서 반파시스트인민전쟁으로 변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변동 속에서 국민회의파는 인도가 즉시 독립되는 것이 세계의 진보진영을 강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한편, 무슬림연맹은 영국협력방침을 채택했다. 그리고 1942년 8월에는 국민회의파가 인도퇴거요구투쟁으로 탄압받고 비합법화되자 파키스탄 독립요구를 확대시켜 나갔다. 반파시스트인민전쟁의 지지와 대영협력방침(對英協力方針)을 내세운 인도공산당은 1942년 7월 합법화되었다. 공산당은 국민회의파와 인도퇴거요구투쟁을 적전자살(敵前自殺)이라고 규정하고 국민회의파의 민족주의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파는 공산당을 영국제국주의의 대리인이라고 반론했다. 전쟁기(戰爭期)의 인도정치는 국민회의파·무슬림연맹·공산당의 3당이 충돌하는 가운데 공동으로 대처할 터전을 상실한 것이다. 인도의 장래에 대해서도 무슬림연맹은 무슬림국가 파키스탄을 내세웠고, 공산당은 다민족통일을 기초로 하는 연방국가 구상을 제기했으나, 국민회의파는 힌두·무슬림통일을 기초로 하는 연방제를 내세웠다. 그 사태는 독립 후의 국가구상 분쟁으로 나아갔다.

<독립 후의 국가건설>

1945년 8월 제2차세계대전 종결부터 47년 8월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까지를 <권력의 이양단계>라고 한다. 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또한 파키스탄은 같은 해 8월 14일 독립했다. 신생인도의 여당은 인도국민회의파, 총리는 P.J.네루, 대통령은 R. 프라사드가 되었다. 50년 1월 인도는 신헌법(新憲法)을 시행하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연방제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이어서 소선거구제의 제1차 총선거를 실시했으며, 국민회의파는 여당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51년 4월에는 제1차 5개년계획을 세워 토지개혁과 공업화를 추진했다. 1955년 1월에는 국민회의파대회에서 인도가 달성해야 할 목표로서 <사회주의형 사회>를 설정했다. 대외적으로는 비동맹정책외교를 내세우고 중국과 평화5원칙을 확인했다. 1956년 제2차 5개년계획에서는 공업화계획을 강화하고, 언어별로 주를 재편성했다. 독립인도의 정치사(政治史)는 1957년 제2단계를 맞이했다. 즉, 인도공산당이 제2차총선거에서 케랄라의 제1당이 되어 주정부를 장악했다.

이 정부는 1959년 대통령지배가 도입될 때까지 국민회의파 중앙정부가 내세운 혁명을 부분적으로 실행하려 하였으나 국민회의파는 이 <붉은 정권>의 타도에 전력을 기울였다. 대외적으로 국민회의파는 내정불간섭원칙을 포기하였다. 1967년 제4차 총선거에서는 국민회의파의 일원적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연방에서는 I.P.간디 총리가 주도하는 국민회의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서벵골과 케랄라에서는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전선정부가 실현되었다. 또한, 타밀나두에서는 드라비다진보연맹이 국민회의파를 대신하여 주정부를 장악했다. 이에 대해 간디총리는 1975∼77년 비상사태를 선언하여 인도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1977년 제 6차 총선거에서는 국민회의파가 패배하고 인민당(人民黨)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980년 제7차 총선거에서 다시 간디가 총리가 되어 강권정치를 계속하였다. 1980년대 펀자브의 시크교도들은 모두 반회의파·반중앙정부 입장에 있었다. 정부군은 1984년 6월 시크교의 총본산에 무력을 행사했으며, 시크교도들은 10월에 간디총리를 암살하였다. 신임총리에는 장남 R. 간디가 취임하였으나, 1989년 실시된 총선에서 간디총리의 국민회의당이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40여 년간 인도를 통치해 온 네루일가의 권력독점이 종식되고, 자나타달당을 중심으로 5개 야당연합의 국민전선 지도자인 W.싱내각이 발족되었다.

그러나 싱총리는 집권 11개월 만에 사임하고, 1990년 C.셰카르총리가 새 내각을 구성했다. 1991년 3월 국민회의당의 간섭과 비협조를 이유로 사임하고, 1991년 6월에 P.V.N.라오 국민희의당 총재가 취임했다.

[정치]

인도는 1947년에 파키스탄과 분리되면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로 인하여 주권이 영국인에게서 인도인의 손으로 옮겨지는 등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반면 관료기구나 군대제도 등 대부분의 것은 그다지 변경되지 않은채 물려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립된 뒤 2년 반 정도는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과 같이 영국연방 내의 자치령이었으며 형식상으로 영국 국왕이 원수였고, 그가 임명하는 총독을 받들었다.

그러나 독립 이전과는 달리 정치의 실권은 이미 총독을 제쳐 놓고 중앙정부의 각료들이 잡고 있었다. 1950년에 시행된 헌법에 의하여 인도는 영국 국왕을 원수로 하지 않고 대통령제를 채택하였으나, 영국연방에는 가맹국으로 머물렀다. 1951∼52년 남녀평등권을 기초로 최초의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때부터 중앙과 각 주에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의원내각제가 성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체로 자유선거가 거의 정기적으로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1977년과 1980년 2차례에 걸쳐 중앙정부가 바뀌었다. 그러나 독립 이후 대부분의 기간을 통하여 총리의 자리는 불과 두 사람, 즉 네루(재임 1947∼67)와 그의 딸 인디라 간디(재임 1966∼77, 1980∼84)에 의하여 이어져 왔다. 네루가 이끄는 국민회의파를 여당으로 하는 정부는 <사회주의형 사회>를 목표로 내걸고 5개년계획 실시에 들어갔다.

간디는 여당인 국민회의파를 분열시켜 많은 원로정치가를 추방하는 등(1969) 아버지보다 더 현상(現狀)개혁파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좌익의 여러 정당과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서 이들에게 봉쇄정책을 폈다. 이 특징은 간디의 경우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연고자나 측근을 중용하면서 개인적 독재의 경향을 강하게 나타냈다. 특히 75∼77년의 비상사태기간에 이들 특징이 두드러졌다.

독립한 뒤 인도가 직면한 주요과제로는 먼저 식민지적인 경제구조를 바꾸어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정치·경제·사회의 전분야에서 민주화를 행하며, 종교적 이유로 국민들이 대립, 파키스탄과 인도가 분열된 불행한 역사를 극복한다는 3가지로 요약되는데, 인도의 정치는 바로 이러한 주요과제를 둘러싸고 움직여 왔다.

<헌법체제와 실태>

인도의 원수는 대통령이지만 이것은 상징적인 지위일 뿐 사실상의 실권은 없다. 대통령은 연방의회와 주의회 의원의 간접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대통령에 비하여 총리 및 그를 지도자로 하는 각료회의는 헌법규정이 매우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집행권력의 중심이다. 각료의 수는 많지만 그 중에서 주요 의원을 일괄하여 내각이라 한다.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각료는 총리의 조언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명한다. 각료회의는 연방하원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진다. 또 각료는 누구나 6개월 계속해서 연방회의에 적(籍)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즉 원칙적으로는 의회가 정부를 조정한다는 것이다. 연방의회는 양원제이지만 직접선거에 의하여 구성되는 하원의 역할이 훨씬 크다. 연방 하원의원선거는 1선거구의 의원정수는 1명이라는 소선거구제에 의해 치러진다.

10년마다 국세조사에 의해 선거구의 조정이 이루어지는데, 각 선거구의 유권자수는 거의 균등하게 되어 있다. 지정카스트·지정부족을 위해 그 인구비율에 거의 비례한 수의 선거구가 유보되어 있다. 연방을 구성하는 정치단위는 22개의 주(州)와 9개의 중앙정부직할지이다. 주는 언어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힌디어만은 특별히 6개 주에서 사용되고 있다.

주에는 명목상의 장관인 주지사 밑에 주의회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지는 주각료회의가 있으며 주집행권력의 중심을 이룬다. 주의회는 소선거구제에 의하여 선출된다. 지정카스트·지정부족에 대한 의석유보는 여기서도 이루어진다. 요컨대 주지사는 중앙정부의 의향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주정부를 감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해임시키는 기능도 아울러 가진다. 또 주의회의 입법권에는 제약이 있다.

연방제이긴 하지만 주의 재정기반이 취약하므로 중앙의 입지가 매우 강력하다. 중앙정부직할지는 수도가 있는 뉴델리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중앙과 주의 정치를 지탱해주는 큰 힘은 인도행정직(IAS)이라 일컬어지는 약 4000명의 고급관료들이다. 국민회의파도 1969년 당의 분열 이후로 그들을 비롯한 관료기구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 IAS 또는 인도경찰직(IPS)과 같은 중앙정부가 관할하는 고급관료들은 중앙의 주에 대한 입지를 강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사법제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식민지시대의 제도를 거의 계승하고 있다. 델리에 있는 최고법원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밑으로 전국에 18개 고등법원이 있다. 이들은 모두가 인사 및 그 밖의 점에서 연방의 관할하에 있다. 고등법원 밑에는 주에서 관할하는 여러 법원이 있다. 최고법원과 고등법원의 판결은 판례가 된다. 사법권은 독립되어 있으며 법원에는 위헌심사권이 부여되어 있다.

<외교정책>

독립 직후 파키스탄이 카슈미르에 침입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1947∼49). 그 뒤에도 양국관계는 개선되지 않아 1965년과 1971년에도 전쟁이 일어났다. 1971년의 전쟁은 방글라데시독립전쟁이 확대된 것으로서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독립한 결과 인도아대륙에서 인도의 비중은 매우 커졌다.

1950년 인도가 공화국이 된 뒤에도 영국연방으로 연계된 사실은 후에 아프리카 등에서 영국령 식민지가 독립했을 때에 영국연방으로 머물게 한 전례가 되었다. 1947년의 인도·파키스탄 및 48년 세일론(지금의 스리랑카)의 가맹으로 백인제국(諸國)으로만 이루어진 집단으로서의 영국연방의 성격은 어느 정도 무너졌지만 1960년대 전반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대량가맹으로 영국연방의 양상은 일변했다.

한편 네루외교로 일컬어졌던 비동맹중립 및 아시아·아랍·아프리카 여러 나라와의 우호를 중시한 정책은 1954년 네루와 저우언라이[周恩來]에 의한 평화 5원칙 발표, 1955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 전후에 가장 빛을 발했다. 이들 정책은 네루의 만년인 1957년부터 대(對)미국경제원조 의존도의 강화와 1959년부터 중국과의 불화, 특히 1962년 중국과 벌인 국경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어두움을 드리웠다.

그러나 1961년 이후 비동맹운동으로 인도가 해낸 역할은 매우 크다. 네루의 뒤를 이은 간디정권은 주로 러시아 의존형 정책을 폈으며, 1971년 체결된 유효기간 20년의 인도·러시아우호평화협력조약은 인도의 대외관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축으로 볼 수 있다. 그 뒤에 들어선 신정권도 간디정권하의 ① 비동맹외교 ② 대러시아 우호촉진 ③ 경제중심의 대미(對美)관계 중시 ④ 주변국과의 관계개선 등을 외교의 기본방침으로 삼았다.

<국방>

식민지시대의 인도군은 관료기구와 마찬가지로 1947년에 파키스탄과 분할되었다. 지금도 인도군은 당시의 조직을 모체로 하고 있고 계급제도도 영국과 같다. 헌법상으로는 대통령이 군대의 최고지휘권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총리와 국방장관이 이를 관장한다. 국방장관은 문관으로서 문민통제의 원칙을 지금까지 잘 지켜가고 있다. 지원병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3군의 병력은 육군 98만, 해군 5만 5000, 공군 10만 5000으로 총 114만이다.

[경제·산업]

인구의 73.2%가 농촌에 살고 있으며 67%가 농업에 종사하고 국민순생산(NNP)의 40%가 농업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아직 농업국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외국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많은 업종에 걸쳐 근대공업을 일으킬 능력이 있으며 주변 여러 나라에 자본·기술을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업력이 향상되고 있는 나라이다.

일부 상류층은 매우 부유하고 서구적인 생활을 누리고 있으나 국민의 대다수가 가난하고, 그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하루에 필요한 절대열량도 섭취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18세기까지 인도의 산품은 세계적으로 귀중하게 취급되어 그 산품 대신금·은이 유입되었지만 영국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특히 산업혁명 후 인도의 공업은 몰락하여 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독립 때까지 계속해서 체감된 데다 농업도 정체하여 경제가 황폐화되었다. 인도는 1947년 독립 후 오랜 민족의 숙원이었던 경제사회개발에 착수하여 경제의 제로성장 또는 마이너스성장에서, 낮은 비율이기는 하지만 플러스성장으로 전환했다.

<개발계획>

1951년 이래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제8차 5개년계획(1990∼94)이 시행되었다. 특히 제2차 5개년계획(1956∼60) 이후, 철강·화학비료 등의 중공업 육성에 중점을 두어 60년대에는 많은 중요산업에서 자급이 가능하게 되었다. 개발의 기본전략은 중공업을 일찍부터 일으키면 초기에는 그 효과가 적지만 먼 장래에는 발전이 가속화하여 경제자립도 확실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독립 전부터 J.N.타타·G.D.비를라 등의 대재벌 외에도 많은 자본가가 대두하였지만 중공업을 일제히 일으키는 일은 이들로서도 불가능하다고 보고 국가가 직접 중공업에 참여하는 개발방식을 채택하였다. 원칙적으로 제철소, 중기계공업, 기초화학공업, 중요한 광업 등 기간산업의 설립·확장은 모두 공공부문에서 담당하고 민간부문에서는 기타분야, 특히 소비재산업을 분담한다는 방침을 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두 부문의 분담관계가 엄격한 것은 아니고 기존의 사기업이 공공기관의 분야를 담당하더라도 존속이 허가되는 것이 보통이며, 또 첨단기술을 요하는 외자계통의 기업이나 자본력이 있는 대재벌의 경우에는 새로 생산재 공업에 진출하는 것이 종종 인가되어 왔다. 이러한 혼합식 경제의 개발방식 아래에서 공공부문이 국민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은 증대되어 왔다. 1970년대 후반 국민계정 통계를 보면 공공부문이 전체 투자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어느 나라든 국방과 행정은 공공부문이고 전력·운수·통신도 비교적 공공부문의 비중이 높은 것이지만, 인도에서는 이러한 분야는 물론, 금융업이나 제조업, 광업 분야에서도 공공부문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제조업의 경우에도 공공부문의 투자가 4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공공부문은 생산성이 낮고 영업실적이 좋지 않다. 특히 주정부가 운영하고 있는 전력사업·관개사업은 해마다 거액의 적자를 내고 있다.

중앙정부가 담당하는 광공업도 대개의 경우 적자경영이다. 이 때문에 국내순생산 중 공공부문의 점유율은 19% 정도에 불과하고, 제조업에서는 불과 15%에 지나지 않는다. 공공부문의 수익성이 낮은 이유는 생산성이 낮고, 담당 분야가 생산재이므로 기술적인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또 기초 자재나 기간산업 분야에서 고의로 저가정책(低價政策)을 펴고 있고, 경영을 담당하는 사람이 전문적 경영인이 아닌 관료적 경영인이라는 점도 그 이유이다.

농업은 거의 전부 민간부문에서 분담하고 있다. 상업·건설업에서도 민간부문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독립 후 여러 차례에 걸친 5개년계획하에서 국민소득은 1.1%의 비율로 성장해 왔다〔표 2〕. 많은 분야에서 생산이 증가되고 있고〔표 3〕, 산업구조도 완만하지만 고도화되었다. 즉 농업 등을 포함한 제1차산업의 비율은 60%에서 40%로 내려가고, 공업·전기 등의 제 2차산업은 20%에서 30%로 상승했다. 생활·사회면에서 보면 평균수명은 1951년 33세에서 81년 54세로 길어졌고, 식자율은 51년 17%에서 81년 36%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경제성장률, 1인당 소비액의 수준, 수명, 식자율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다른 개발도상국 특히 중진 여러 나라에 비하여 두드러지게 낮다. 또한 인구 성장률도 2.5%로 높다. 가족계획 보급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지만 가난한 가정의 출생률이 높아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가정일수록 자녀의 노동력이 필요한데 영양부족과 열악한 의료조건으로 아이들이 모두 사망하는 경우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구조>

공공부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인도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경제이다. 공공부문은 주로 비경제적 요인(정치적 의사결정이나 재정자금의 원용)에 의해서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상품경제·시장에 의해 규정되어 운영되는 측면을 가진다. 민간부문은 그 활동분야에서 정부의 규제를 받고 있는 반면, 관세장벽 및 그 밖의 대외통제정책에 의하여 외국과의 경쟁에서 보호를 받고 또 개발금융 및 그 밖의 보호육성책을 누려왔다.

한편 민간부문은 복잡한 생산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봉건적 잔재를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는 수공업이나 지주·소작관계가 남아 있는가 하면 고도의 자본집중도 이루어지고 있다. 외자계 기업에는 자본·기술력을 자랑하는 다국적기업 계열의 것과 식민지시대에 인도를 발판으로 하여 생성·발전한 영국인의 식민지형 기업이 있다. 후자는 플랜테이션·황마·석탄 등의 분야에서 지배적이었으나 현재는 쇠퇴하고 있다. 대신에 전자는 확대가 현저하여 점유율이 증가하는 경향에 있다.

그러나 인도의 대외 경제정책은 다른 개발도상국보다는 민족적 성격이 강하여 외자기업이 강한 규제정책에 부닥치고 있다. 민족계 기업은 이러한 규제정책에 힘입어 지배적인 지위를 유지해 오고 있다. 민족계 기업 중 대규모인 것에 타타와 비를라 등이 있다. 이들은 금융업을 제외하고 중요한 각종 분야에서 거대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경영의 다각화가 두드러진다. 이들은 각각 인도의 전민간회사의 대략 10%를 지배하고 있으며, 또 각각 30만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과 함께 다른 재벌들도 경영을 다각화하여 많은 기업을 산하에 두고 있는데 경영의 실권은 소유가족 또는 동족이 잡고 있다. 독점가격, 정부와의 유착, 독단경영 등이 여론의 비평 대상이 되어 정부도 1969년 독금법(獨禁法)을 제정하여 일정한 규제를 가하고 있다.

<재정·금융>

인도는 중앙집권적 지향이 강한 연방제의 재정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중앙·주 모두 재정은 경상계정과 자본계정의 2가지 예산으로 이루어지며 매년 회계연도가 시작되는 4월보다 1, 2개월 앞서 의회에 상정하여 결정된다. 중앙정부의 경우 이 밖에 철도특별회계가 있다. 중앙의 재정규모와 각 주 합계의 재정규모는 거의 같은 액수이다. 또 중앙·주 모두 경상계정 세입에 차지하는 세수입비율이 약 2/3가 되는데, 세수입 가운데 간접세의 비율이 압도적이며 그 역진적 성격으로 종종 문제가 일어나곤 한다.

중앙과 주는 세목이 서로 달라, 중앙의 주요 세목이 소득세·법인세·관세·내국소비세 등인데 비해 주의 주요 세목은 판매세·주(州)소비세 등이다. 일반적으로 중앙재정 관할하에 있는 세목은 세목을 늘리는 데 탄력적이지만, 각 주는 세수입부족으로 허덕이게 되어 중앙에 의존해야 하는 경향이 있다. 중앙의 경상계정 세출의 최대비목은 국방비로서 약 1/4이나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큰 비목은 국채비〔元利拂〕로서 최근에 상승하고 있으며, 1981년도 예산에서는 세출 전체의 1/5로 증가했다.

경제개발비는 독립 후 급증했지만 현재는 국채비를 약간 밑돌고 있으며, 사회개발비를 더하면 사회·경제개발비는 거의 국방비에 필적한다. 자본계정에 있어서는 경제사회개발 관련지출이 30% 이상, 주·공사 등에 대한 대출지출이 50% 이상 차지하고 있다. 중앙재정의 최대문제는 매년 적자폭이 확대되고, 시장차입 이외의 결손도 거액으로 올라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차입에 의존하게 되어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정부의 경우는 시장차입 및 중앙은행차입도 제한받고 있다. 주의 재정도 세입부족으로 허덕이는데, 그 원인의 하나는 주의 세목인 농업소득세의 도입을 대다수의 주가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부농의 권력이 강하여 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도의 금융제도는 독립 후 정비되고는 있지만, 국민경제에 차지하는 이른바 제도적 금융의 양적(量的) 지위가 반드시 큰 것은 아니다.

인도의 중앙은행은 인도정부가 주식의 전부를 소유하고 있는 인도준비은행(본점 봄베이)이다. 그 주요 업무는 통화의 발행량과 준비율 및 공정비율의 규제에 의하여 통화의 안정을 꾀하는 외에 중앙·주정부, 상업은행·협동조합은행에 대한 은행역할을 담당하며 또 외화규제의 창구 역할을 한다. 상업은행은 종래에는 경시되고 있던 농민·소기업에 대한 융자를 확대하고 있다.

상업은행은 원래 단기자금을 취급하는 곳이므로, 독립 후 장기개발 자금 수급에 부응하기 위해 특수금융기관이 많이 설립되어 왔다. 모두 15개의 주립금융공사는 각 주의 소기업에 융자를 하고, 중앙정부가 설립한 인도공업융자공사는 대기업에 융자를 해주며 인도공업재건공사는 파산 직전의 기업에 대한 갱생융자와 경영지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개발금융기관에 대한 지도와 재융자를 하는 관할기관으로서 인도정부 직속의 인도공업개발은행이 있다.

보험업은 모두가 국영이며 그 잉여자금은 개발 투자(증권투자)에 쓰이고 있다. 이처럼 개발목적의 금융기관은 제도적으로 정비되었지만 협동조합 등의 각 지방을 위한 제도금융의 발달은 늦어지고 있다. 그 때문에 농민은 마을의 지주·상인·고리대금업자 등의 고리융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도시에서도 제도적 금융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어서 고리대금이나 사영은행(私營銀行;토착은행) 등의 이른바 비제도적 금융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주요산업의 개요>

전국토 가운데 삼림은 22%, 황무지와 경작의 목적지는 13%이고 가경지가65%에 달한다. 그 중 경작면적은 46∼47%이다. 농가 1가구당 평균경영규모면적은 2.0ha이다. 삼림이 적고 강우량이 우기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에 관개지가 적어 총경작면적의 72%는 비관개지이다. 경작면적 가운데 약 3/4은 식량생산에 할당되어 있으며, 다시 그 5/6는 쌀·보리·잡곡 등 곡류가 차지한다. 곡류 가운데 쌀이 40%, 밀이 20%를 차지한다.

식량 이외에도 세계적으로 알려진 땅콩·사탕수수·면화·황마 등을 생산한다〔표 4〕. 독립 전의 수준에 비하면 생산성은 상승했는데 그 원인으로는 토지개혁과 <녹색혁명>정책을 들 수 있다. 토지개혁은 우선 자민다르·미라스다르 등의 불경작지주제를 폐지하고 소작료를 내리는 한편 대규모의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조치였다. 그 과정에서 농장경영에 비교적 열심인 부농층이 생겨났지만 반면에 다수의 소작인이 소작지를 지주, 부농에게 빼앗기는 사례도 있어서 땅없는 농업노동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녹색혁명은 쌀·밀 등의 신품종을 도입하여 증산을 꾀하기 위한 정책이다. 1960년대 중반 이래 이 방식에 의한 증산정책이 인도농업정책의 주안점이 되었다. 일부 지역, 특히 펀자브·하리아나 두 주와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서반부에서는 그 효과가 매우 컸다. 광공업은 독립 후 가장 두드러지게 발달한 분야인데,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그 자체 구조도 크게 변모했다〔표 5〕.

식료와 섬유는 독립 당시 공업생산의 2/3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약 30%를 차지하고, 대신 화학공업이 10%에서 20%로, 금속가공·기계공업은 10%에서 25%로 비중이 두드러지게 높아졌다. 이것은 생산재 공업 중시정책의 결과이다. 주요 업종별 생산량을 보면, 생산재 특히 공작기계나 산업용기계, 산업용전기기기(변압기 등)의 생산이 급신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표 6〕.

대중소비재는 무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장이 억제되어 있고 내구소비재는 생산재와 대중소비재 중간의 신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인도의 공업생산 증강의 진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는 냉엄한 국제시장의 조건 외에 국내 대중수요의 혼미, 전력부족 등이 있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하여 공장가동물이 저조해지면서 생산체감경향을 보여왔다.

첫째로 공기업·재벌계·외자계기업이 거대한 공장을 가지고 있는 반면, 도시에도 소규모 공장이 생겨나고 있는데, 그 격차가 매우 크다. 대규모 공장과 소규모 공장의 임금의 격차는 2:1이다. 하청관계도 발달하지 못하여 양자의 관련이 밀접하지 못하다. 둘째로 아직도 수공업이 광범위하게 잔존하여 공장제공업과 경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공장제 무명의 점유율은 40%에 불과하고 수직(手織)이 30% 이상, 영세동력직 기업이 30% 이하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자원·에너지>

인도는 각종 지하자원이 비교적 풍부하다. 특히 양질의 철광석 매장량은 세계에서 손꼽히며 90억t 정도로 추정된다. 석탄도 비(非)코크스탄을 포함하면 매장량이 400억t이나 되지만 양질의 석탄은 많지 않고 지역적으로 편재되어 있다. 이 밖에 운모와 보크사이트가 풍부하다. 석유는 2/3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였으나 최근 봄베이의 먼바다에서 유전이 발견되어 자급률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표 7〕.

인도의 소비에너지원을 상업적 에너지(석탄·석유·전력)와 전통적 에너지(쇠똥·땔나무·농업부산물)로 나누면 1950년대 초의 상업적 에너지소비율은 30%였으나 공업화의 진전과 함께 비중이 높아져 75년에는 57%에 달하였다. 요리용 에너지원으로 요긴하게 쓰이는 쇠똥이 10%에서 7%로 체감하는 사이 석유의 의존도는 배증하여 26%나 되었다. 이 때문에 1981년 국제적 석유가격의 급등이 경제적 위기와 에너지 위기를 초래하였고, 그 뒤 대체에너지로 석탄과 전력증산에 힘쓰고 있다.

<운수·통신>

철도는 1853년 개통되었다. 영국의 상업적·군사적 요청에 의하여 캘커타·봄베이·마드라스의 3대항구에서 내륙을 향하여 철도망이 형성되었는데 광궤(廣軌)·협궤 등이 뒤섞여 있다. 도로의 길이는 1991년 현재 약 200만 ㎞로 상당히 발달되어 있지만 차량도로가 없는 마을이 아직 많다. 4개 국제공항 외에 85개의 공항이 있고, 통신망도 비교적 정비되어 가고 있다. 주요 도시 사이는 텔렉스망과 자동다이얼전화로 연결되고 있다.

<대외경제관계>

인도는 인구면에서는 세계의 1/7을 차지하는 대국이지만 무역은 세계 전체의 1/200을 차지하는 데 불과하다. 그 원인은 인도가 판매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특산물이 없다는 것과 차(茶)·황마와 같은 특산물도 그 수요량이 증대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생산량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점, 또 인도정부의 경제정책이 경제자립을 목표로 자급달성을 우선으로 해온 내에 있다.

1960년대에 인도는 철강·제당업(製糖業)플랜트, 방적·방직 기계, 소다회(灰) 등 주요 생산물의 자급화를 달성했다. 그 과정에서 무역품목의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 독립 당시에 주요 수출품목이었던 차·황마·면제품의 비중(1950년도에는 55%)이 급락하여 77년에는 24%로 된 반면, 다이아몬드 등 귀금속의 가공품이 10%, 기계·금속제품이 11%를 차지하게 되었다.

수입면에서도 1977년부터 식량을 수입하지 않는 반면, 원유가격의 급등으로 원유·석유제품의 수입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기계플랜트류의 수입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의 주요 수출상대국은 미국·일본·소련·영국·독일 등이었으며, 주요 수입상대국은 미국·이란(석유)·소련·영국·독일·일본·캐나다·프랑스 등으로 다각화되었다. 선진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은 기계류·중간재가 주류를 이룬다.

인도의 국제수지는 1970년 중반 이후 2, 3년간 해외취업자의 본국 송금이 크게 증가해 대폭 흑자를 기록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외화부족상태였다. 국제수지적자의 주요 원인은 대폭적인 무역수지의 적자이다. 수출부진과 식량·플랜트류의 수입이 적자를 가중시켰다. 1977년 식량수입이 없어진 것과 기계류 수출의 호조로 무역적자폭이 대폭 축소되고, 또 해외취업자의 본국송금으로 외화준비고는 1979∼80년에 50억 달러를 초과하였으나 국제석유가격의 제2차인상으로 급격히 저하하여 81년부터 다시 위기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1981년 11월부터 3개년에 걸쳐 합계 50억 SDR(56억 달러 상당)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차입하였는데, 이 차관에는 통화의 안정화정책(재정긴축), 일부 통제정책의 완화(외국자본·기술도입의 적극화) 등을 시행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 일이 여론을 비등시켜 당시 간디정권 인기하락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 후반 이후의 고질적인 외화부족은 부분적으로는 경제활동의 저수준균형을 초래하면서 동시에 그 태반을 외국정부와 국제기관의 원조에 의하여 메우도록 했다. 1981년 말까지 인도정부는 누계 146억 2000달러의 원조를 받았는데 이는 1980년도 국민순생산의 25%에 상당하는 액수이다. 1980년도 수출액에 대한 원조의 원리금 지불대금 비율은 13%이므로 그다지 높은 것은 아니다.

원조액은 제2차 5개년계획기간에 급증하여 제2차, 제3차 5개년계획의 원자금에 차지하는 비중이 30% 가까이에 이르렀다. 그 뒤 의존율은 줄었지만 절대액에서는 증가하여 제4차 5개년계획기간중 23억 7000달러, 제5차 계획기간중 36억 달러가 되었다〔표 8〕. 원조 주체별로 보면 제4차 계획기까지는 세계은행·제2세계은행이 제1위로서 차관의 28%, 미국이 제2위로서 차관의 21%를 차지했다.

제5차 계획기에는 미국·인도관계의 냉각경향이 반영되어 미국은 차관의 불과 5%에 불과하였고 대신 이란이 주요원조국(18%)이 되었으며, 세계은행·제2세계은행은 48%로 중요도를 더했다. 이란의 원조는 이란이 신설예정이었던 제철소용 철광산의 개발수입프로젝트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란혁명으로 이란측 제철소가 완성되지 못하여, 최근 완성된 새 광산이 유휴화되고 있다.

[사회]

<사회구조의 전반적 특징>

인도의 사회적 특징은 종교·카스트·민족의 3가지 측면에서 그 구성요소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⑴ 종교

인도인의 약 76%가 힌두교도인으로, 가장 많다.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되지 않았던 식민지시대에는 그 비율이 이 정도로 높지는 않았다. 1870년대 이후에 발전한 인도의 민족운동은 힌두의 중산계급이 주도하였다. M.K.간디로 대표되는 그 지도자들은 누구나 종래의 힌두교 교의를 그대로 신봉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합치시키려 했다.

그러나 무슬림(이슬람교도)이나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인도 카스트제도의 四姓에 속하지 않는 가장 낮은 층의 천민)의 반발을 초래하여 무슬림은 인구의 11%로 절대수로는 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파키스탄에 이어 세계 제4위이다. 독립 당시 옛 인도 무슬림의 대부분이 파키스탄에 속하게 되었지만 인도에도 약 1/3이 남아 있다.

이것은 종교와 민족을 동일시하고 이에 의해서 국가를 구성해 보려는 시도가 무리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다음은 인구의 7%를 차지하는 지정부족이다. 이 부족은 구릉지대 등에 사는 사람들을 정부가 이와 같이 인정하고 있는 것인데, 종교적으로는 힌두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경제생활면에서도 그 외의 인도사회와 그다지 구별이 없어지고 있다. 이 밖에 그리스도교도·시크교도·자이나교도 등이 있다. 불교도는 1956년부터 불가촉천민의 개종자가 늘고 있다.

⑵ 카스트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에 불가촉천민을 더한 5개 신분을 보통 카스트로 간주한다. 이것은 카스트의 이념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며, 실제로 카스트는 훨씬 복잡하고 아(亞)카스트(subcaste)가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사람들의 접촉과 결혼의 범위를 정하는 것은 아카스트이며 직업과 아카스트와의 관계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농촌에서는 지주 또는 유력한 농민의 아카스트를 중심으로 생산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브라만의 아카스트는 일반적으로 육식을 삼가고 육체노동을 기피하는 등 특정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브라만 이외의 아카스트 사람들이 집단으로 육식을 금하는 등 브라만적인 생활양식을 채택하고, 자기들이 브라만이라 주장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말하자면 개개인으로서는 그 소속하는 아카스트를 일생 동안 바꿀 수 없지만, 아카스트가 집단으로서 상위 혹은 하위로 옮기는 것은 가능했다.

최근에는 중위의 유력한 농민 아카스트가 브라만의 행동양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들은 브라만에 의해 낮은 지위로 내쫓기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지정카스트나 지정부족과 같은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 헌법에서는 특정인을 불가촉천민이라 하여 차별하면 처벌대상이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카스트의 폐지는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공식적으로는 불가촉천민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뿌리깊게 남아 있다. 정부는 인구의 약 14%에 해당하는 범위의 사람들을 종래에는 불가촉천민으로 차별을 해왔지만, 지정카스트로 인정하여 지정부족과 똑같은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에게만 한하고, 다른 종교에 속하는 불가촉천민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카스트는 이념상으로는 힌두교만의 것이지만 다른 종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⑶ 민족

1950년대부터 인도의 각 주는 언어별로 구성되어 각각의 공용어를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힌디어만은 6개 주에서 사용되고 있다. 언어가 다른 각각의 집단을 민족이라 볼 수 있을 만큼 인도는 다민족사회, 다민족국가이다. 인도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이와 같이 복잡하지만 그 내용은 정치적·경제적인 움직임을 반영하여 변화해가고 있으므로 이것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런 복잡한 인도사회가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지가 큰 문제이긴 하지만 정치와 종교의 분리, 여러 민족과 여러 언어의 평등,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 걸친 민주화에 의하여 가능하게 될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인도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고 있다.

<주민·언어>

인도에서는 10년마다 국세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1995년 국세조사의 숫자를 보면 인구는 9억 3574만 4000명이다. 출생률이 조금씩 낮아지고 있지만 사망률도 똑같이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인구증가율은 높아져 71년의 국세조사 이후 10년 동안에 24%, 즉 1억 6500만 명의 증가를 기록하고 있다. 각 주의 인구규모의 차이는 매우 커서 1억을 넘는 우타르프라데시주를 비롯하여 1000만 명 이상의 주가 15개 있는 반면 200만 명 미만도 4개 주가 있다〔표 1〕.

헌법에 1000만 명 이상의 주 공용어로 되어 있는 11개 언어, 즉 힌디어·마라티어·벵골어·텔루구어·타밀어·칸나다어·구자라트어·오리야어·말라얄람어·아삼어·펀자브어와 널리 무슬림 사이에 쓰여지고 있는 우르두어, 자무카슈미르주의 공용어인 카슈미르어, 현재 파키스탄에 속하는 신드주에서 힌두 난민이 쓰는 신드어,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를 더한 15개 언어가 주요 언어로 쓰이고 있다.

각 주가 언어별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나, 주의 구획과 주민의 언어적인 구분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각 주에는 각각 소수의 언어집단이 여럿 있고, 제각기 다민족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주의 인구와 그 주의 공용어인 언어의 실제 사용인구는 일치하지 않는다. 힌디어는 연방공용어지만 이것을 공용어로 하는 6개 주의 인구비율은 42%, 실제 사용인구는 30% 전후이다. 인도는 유럽과 비슷한 넓이를 가지고 있으므로 주요 언어가 15개나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또한 산스크리트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각 언어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성이 있다.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언어에 강한 긍지를 가지고 있어서 중앙정부가 힌디어를 연방의 공용어에서 국어로 정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면 반드시 반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각 주가 언어적인 폐쇄상황에 빠지면 민족간의 통혼이나 주 사이의 인구이동도 그만큼 어려워지게 되는데, 이러한 언어문제는 인도 발전의 저해요소로 지적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영어가 공통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생활>

독립 후 경제발전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못한 데다 인구도 급격하게 늘어 1인당 국민소득면에서 개발도상국 가운데서도 하위에 있는 나라의 하나이다. 식량이나 의료(衣料)의 1인당 소비량도 독립 이후 거의 증가하지 않고 있다. 1981년 국세조사에서 도시인구의 비율이 71년의 20%에서 24% 정도로, 도시인구의 절대수가 1억 900만 명에서 1억 5600만 명으로 증가했음이 밝혀졌다. 이 기간에 증가한 인구의 1/3 이상이 도시의 증가분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도시인구가 과잉상태이며 그 가운데 절반은 슬럼가의 양상을 띠고 있다. 도시인구 증가의 태반은 인구 10만 명 이상의 대·중도시에서 나타나며, 그 가운데 100만 명 이상인 도시의 수가 71년 9개에서 81년 12개로 증가했다. 도시인구의 증가율이 전체인구의 증가율을 크게 웃돌았다는 것은 농촌으로부터의 이동이 컸음을 뜻한다.

농촌에서는 토지소유의 불균등과 인구증가로 인해 토지를 가지지 못한 농업노동자가 많이 늘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지정카스트, 그 밖의 하위 아카스트와 지정부족 출신이다. 한편 사망률의 저하는 천연두의 절멸(1977년 4월) 등 보건위생상태의 개선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평균수명은 50대에 이르렀을 뿐이어서 아직도 극복해야 할 장애요소가 많다. 정부는 나병·결핵·눈병의 퇴치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영양상태의 개선에 있다.

<교육>

인도의 교육제도는 주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5년제 초등학교, 3년제 중학교, 3년제 고등학교와 3년제 대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 이것을 전국적으로 10년의 보통교육(초등과 전기중등 각 5년), 2년의 후기중등교육, 3년의 대학교육으로 재편성하여 대학까지의 교육기간을 1년 연장하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앞의 제도로 본 경우 1970년대 말 취학률은 초등학교(6∼11세)가 84%, 중학교(11∼14세)가 40%, 고등학교(14∼17세)가 19%로 모두가 독립 이래 많이 상승했다. 그러나 취학률에는 남녀의 격차가 심하며, 상급학교로 갈수록 그 폭은 넓어지고 있다. 또 여기에서 말하는 취학률이란 학교에 등록한 학생의 비율이고 실제로 통학하여 규정연한을 마치는 학생의 수는 훨씬 적다. 이것은 가정에서 학생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취학률도 높아지고 성인교육도 어느 정도 진행되어 식자율은 1951년 국세조사에서 17%였던 것이 81년 36%로 상승했다. 그러나 문맹자수는 이 사이 50%나 증가했다. 남녀별 식자율은 남자 47%, 여자 25%이다. 대학수는 1950년의 542개교에서 급증하여 3000개교를 넘고 있다. 그 대부분은 각각 종합대학 관할하에 있다. 대학이 학부교육을 실시하고 종합대학이 대학원교육을 담당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으며 종합대학은 115개교가 있다.

독립 후 취학률과 취학자수의 증가는 상급학교로 갈수록 높으며 대학의 경우는 더 두드러진다. 식민지시대의교육적 결함이 이처럼 시정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해도 적당한 직업을 얻을 수 없는 것은 경제발전의 속도가 늦은 탓도 있지만, 고등교육이 문과에 편중되어 있어서 가장 시급한 중소기업이나 농촌의 인력양성에 적합하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이다.

<출판과 매스컴>

인도는 출판활동이 활발한 나라로서 매년 간행되는 서적은 1만 3000여 종에 이른다. 문학작품은 각각의 언어로 씌어지는 일이 많지만 학술서는 주로 영어로 씌어지고 있다. 이는 전국 고등교육기관의 교과서나 참고서로 이용되기 위해서는 영어로 씌어지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일간지 1802개를 비롯하여 많은 신문이 발행되고 있다(1991).

일간지를 언어별로 보면 힌디지 294개, 우르두지 103개, 마라티지 102개, 영자지 95개 등인데, 발행부수의 합계로는 영자지가 256만 부로 가장 많고 힌디지가 248만 부로 뒤를 잇고 있다. 일간지 전체의 발행부수 합계는 1289만 6000부이며 유력한 신문 가운데에는 민간 재벌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신문발행이나 서적출판은 주로 도시의 고등교육을 받은 주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식자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보다 많이 보급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방송은 모두 국영으로 중앙정부의 정보방송부에서 관할하고 있다. 인도에는 식민지시대부터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많았다.

그들은 권위에 굴하지 않았으며 정부도 이들에게 경의를 표해왔다. 그러나 1975∼77년의 비상사태 기간에는 의회에서의 토론에 대한 보도를 제한받거나 정부에 비판적인 저널리스트가 압력을 받기도 했다. 대개의 신문이 이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인도언론사에 큰 오점이 되고 있다.

[문화]

인도의 자연이 한랭과 혹서, 건조와 습윤의 양극단을 공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문화에도 갖가지 수준의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생태계에 상응한 생활문화의 다양성과도 대응하지만, 단적으로 말해 차량으로 1시간 정도 가면 말이 달라지는 언어나 민족문화의 압도적인 다양성에서도 알 수가 있다.

종종 사람들은 인도 국민으로서의 의식보다도 자신들이 속하는 모어집단(母語集團)이나 민족집단에 강한 귀속의식을 갖는데, 각 집단이 각각 수천, 수백 년의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서유럽을 합한 것과 비슷한 광대한 인디아대륙의 넓은 지역을 고려한다면 단일의 <인도문화>나 <인도인의 국민성·민족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도사람들은 자신의 근거지인 각 지방 나름의 자민족 문화를 고집하는 한편, 두 변경이 산으로 둘러싸인 북쪽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남쪽의 광활한 대지를 예로부터 <근원(母)인 인도>로서 의식해 왔다. 아무리 광대하다고 해도 이 마름모꼴을 이룬 문화지리적 단위는 갖가지 이질적 문화를 수용해 가면서 독자적 문화의 틀을 조성, 확립해 나가고 있다.

옛날에는 서방으로부터 선사시대의 선진농경, 목축문화, 유목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를 특징으로 하는 아리아문화, 그레코로만문화, 페르시아·중앙아시아·이슬람 등의 여러 문화, 더 최근에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문화를 차례로 받아들였고, 동방으로부터는 티베트·미얀마계 및 그 밖의 문화요소까지도 수용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인도 독자의 문화는 점점 그 탄력적 구조를 복잡화하고 내용을 풍부하게 하면서 인도적(印度的)인 발전을 새롭게 이루어왔다.

이때 인도의 구조에 맞지 않는 것은 결국 수용되지 않거나 또는 원형을 잃지 않을 정도로 인도화한 형태만이 받아들여졌다. 인도는 어떠한 이질적인 문화에도 적극적인 수용태도를 취하는 한편, 그 구조가 가지는 동화력 또한 매우 강해서, 특히 의식주나 사상·예술 등에서 이질적인 문화요소를 원형 그대로 공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음악을 예로 든다면, 인도의 음계에 적합하지 않은 피아노와 같은 건반악기는 정착이 잘 안되고 바이올린도 호궁(胡弓)처럼 세워서 인도악기를 연주하는 형태로만 받아들여졌다. 또 여성들이 민족의상인 사리(Sari)를 고집하고, 요리는 이른바 <카레>로 한정하고 있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도문화의 특질의 하나로 흔히 <관용성>을 들 수 있는데 그 관용(개방)의 특징은 반드시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틀에 맞춘 뒤 적극적으로 소화시키는 강인성에 있다.

또한 이 탄력성 있는 구조는 외부로부터의 이질문화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원래 인도가 가지고 있는 문화의 여러 유형에 대해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 즉 언뜻 보기에 양극단으로 보이는 사상(事象)까지도, 한 가지 사실의 양국면으로 보고 허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불살생·비폭력은 인도의 종교·사상을 통해서 자주 강조되고 있는 특징이지만, 한편에서는 힌두교 샤크티파(性力派)사원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제사 때에는 하루에도 수십 마리의 염소가 제물로 바쳐지고 이전에는 인신공양까지도 이루어진 일이 있었다.

무사무욕, 철저한 고행마저 강조되는 한편 《카마수트라(Kamasutra)》에서는 철저한 애욕의 추구가 인정되었다. 고도로 추상적인 철학교리는 현세이익을 바라는 주술적 의례(儀禮)와 공존하며, 현세는 환상임과 동시에 참(眞)이며 색(色)과 공(空), 동(動)과 정(靜) 등도 결국은 불이(不二)의 존재로 여긴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는 선악·광음(光陰)·정사(正邪)와 같은 명확한 이원적 대비론은 대개 멀리 했다. 빛이 있고서 그늘이 있고, 창조가 있어야 죽음이 있으며 남자가 있고서 여자가 있는 것처럼 양자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거나 하나의 양면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져 이러한 모든 양상은 일원으로 수렴되었다.

힌두교가 일원적 다신교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이러한 사조는 생과 사의 윤회관(輪廻觀), 영겁(永劫)의 시간관념, 정(淨)·부정 관념 등 종교나 철학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의식주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인식되어 인도의 독자적 풍습을 형성하고 있다. 이른바 카스트제도의 원리도 식사관습, 의복착용법, 가옥 부지의 배치 등 모두가 이러한 관념에 의하여 차별없는 하나의 생활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문예·예능·미술·건축·회화·조각 그리고 음악·무용·연극 등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인도는 1962년 한국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고, 73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같은 해 북한과도 수교하였다. 인도와 한국의 교역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인데 인도는 철강·시멘트 등의 중간재를 수입하고 철광석·원면·피혁제품 등을 수출한다. 1994년에는 수출 5억 8455만 6000달러, 수입 11억 6001만 2000달러이다. 1974년 문화협정 체결, 76년 과학기술협정 체결 이후로 스포츠 등 문화 및 과학교류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1977년 6월에 한·인 공동경제협의회를 창립하여, 제1차 합동회의를 가졌으며, 이후로 2년마다 개최되고 있다. 96년 2월 김영삼대통령이 최초로 인도를 방문하여 양국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윤길진>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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