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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3 (화)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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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216      
[근대] 청일전쟁 (민족)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 세계질서(Sino-centric world order)○에 종지부를 찍고 신흥 일본을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시킨 동양 사상 획기적인 전쟁이었다. 또한 당시 아시아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들간의 영토분할경쟁을 촉발시킨 계기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 전쟁 결과, 조선은 뿌리깊은 청국의 종주권에서는 벗어났으나,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대상으로 바뀌어 인적·물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수난을 당하였다.

[발발 과정]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31일 전주까지 함락시켰다. 6월 2일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국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제독 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하였다.  일본 정부는 6월 2일 서울주재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杉村濬)로부터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때마침 중의원(衆議院)에서 내각탄핵상주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내각총리대신 이토(伊藤博文)는 이 보고를 받은 즉시 각의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그리고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라는 구실로 제5사단 오시마(大島義昌) 소장 휘하의 혼성여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이미 일본 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 ‘내정개혁’을 도모한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에 대규모 일본군을 파병, 청일전쟁을 일으키고자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6월 5일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大本營)이 설치되고, 동시에 오시마가 거느린 혼성여단 선발대가 요코스카(橫須賀) 항을 출발, 9일 인천에 상륙하여 곧바로 서울로 진군하였다. 그 뒤 6월 하순까지 8,000여 명의 일본군이 경인(京仁)간에 집결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이 독단으로 대규모 군인을 파병한 데 당황하고 이에 항의, 즉시 철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더욱이, 6월 11일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외국군이 간섭할 구실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육전대(陸戰隊)와 함께 서울에 귀임한 오토리(大鳥圭介) 일본공사는, 위안스카이와 3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양국군의 공동 철수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국내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청국과의 전쟁으로 해결하고자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찾으려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개전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공동철병안 대신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는 안을 청국에 내놓았다. 일본의 예상대로 청국측이 이 제안을 거절하자 일본은 청국에 ‘제1차 절교서(絶交書)’를 보냄과 동시에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강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이에 이홍장의 조정 의뢰에 따라 러시아와 미국이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지만, 7월 중순 일본 정부는 청국에 ‘제2차 절교서’를 보내는 한편, 영국과 영일신조약(英日新條約)을 체결, 영국의 간접적인 지원을 얻어 개전을 서둘렀다.

본국 정부의 개전 결의를 전달받은 오토리 공사는, 조선 정부에 청국의 대조선종주권 주장에 대한 확답을 요구하는 시한부 최후통첩을 발한 뒤 23일 경복궁을 불법 점령,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김홍집(金弘集) 등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전쟁의 경과]

청일전쟁은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 일본군은 서울의 조선군대를 무장시킨 다음 아산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청일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군함과 청국 증원군을 태운 영국수송선 가오슝호(高陞號)가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이어 29일에 벌어진 성환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했던 청국군을 쉽게 격파해 버렸다. 일본 정부는 이처럼 육·해상의 초전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8월 1일에야 비로소 청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청국도 이에 응해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일본 정부는 열강의 간섭을 피해 가능한 한 빨리 승리를 거두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육군이 9월 15∼17일 평양에 집결한 청국군 1만 4000명을 격파하고, 17일 해군이 황해전투에서 청국함대를 격침시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평양과 황해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곧이어 중국 본토에 대한 공략을 서둘렀다.

10월 하순 조선에 진주했던 일본의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진격하고, 제2군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하여 11월 하순 여순(旅順)·다롄(大連)을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1895년 2월 2일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있던 청국의 북양함대기지를 공략하였다.

사태가 여기에까지 이르자 청국은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한 강화회담을 서둘러, 장인환(張蔭桓)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1895년 2월 초 두 차례 열린 히로시마회담(廣島會談)에서 일본측은 자국에 더욱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할 목적으로 청국 전권대신의 위임장이 불완전하다며 그와의 교섭을 거부하고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 결과 3월 중순까지 일본 육군은 랴오둥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청국은 그제야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교체하고 강화회담 재개를 서둘렀다.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下關:馬關)에서 이토와 이홍장이 양국을 대표해 강화회의를 다시 열었으나, 3월 24일 이홍장저격사건이 일어나 한때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양전투와 황해해전 직후부터 전쟁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미국 등 열강의 간섭을 우려한 일본은 결국 4월 17일 청일강화조약, 즉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성립시켰다.

청일전쟁은 주로 청·일 양국간의 군사적 대결이었지만, 한반도 내에서 일본군과 동학의병(東學義兵) 간의 조일전쟁(朝日戰爭)을 수반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1894년 10월 중순 전라·충청도에서 전봉준(全琫準)·손병희(孫秉熙) 등은 동학농민군(의병)을 이끌고 조선을 강점한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쟁, 즉 조일전쟁을 개시하였다.

이 동학의병의 항일군사활동은 당시 요동·산둥반도에서 청군과 전쟁을 벌이던 일본측에서 볼 때는 후방을 교란하는 중대한 위험이었다. 때문에 일본의 대본영에서는 이노우에(井上馨) 공사의 서울 부임과 함께 동학의병을 무력으로 조기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조선 관군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토벌전을 벌였다.

우수한 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받은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조직적인 공세에 직면한 동학의병은 11월 18∼19일의 목천 세성산전투, 12월 4∼7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이어서 전봉준과 김개남(金開南) 등 동학의병 지도자들이 12월 24일 체포되어 조일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노우에 공사가 지휘한 동학의병 토벌작전이야말로 일본이 청일전쟁 중 조선에서 벌인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종전과 삼국 간섭]

청일 간에 조인된 시모노세키조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 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이 독립자주를 손상시키는 조선국의 청국에 대한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 완전히 이를 폐지한다.’ 이로써 중국이 전통적으로 조선에 대해 행사해 왔던 종주권은 부정되었다.

동시에 일본은 강화도조약·제물포조약·톈진조약 등으로써 일관되게 추진해 온 조선에 대한 우월한 정치·군사·경제적 지배권을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둘째, 청국은 랴오둥반도·대만·펑후(澎湖)열도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

셋째, 청국은 전비배상금으로 고평은(庫平銀) 2억 냥(약 3억 엔)을 일본에 지불한다. 넷째, 청국은 일본에게 구미 열강이 청국에서 누리는 것과 동등한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함을 승인한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지 6일 후인 1895년 4월 23일 러시아를 중심으로 프랑스와 독일 등이 일본 정부에 대해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라는 요구, 즉 삼국간섭(三國干涉)을 하였다. 프랑스는 러불동맹(露佛同盟)의 동반자 입장에서, 독일은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아시아 쪽으로 돌리게 만들어 중국분할경쟁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할 목적으로 각각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동조하였다.

결국, 5월 10일 삼국의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인정한 일본 정부는 간섭에 굴복, 랴오둥반도 영유권을 포기하고, 대신 청국으로부터 배상금 3000만 냥을 받기로 하였다. 삼국간섭을 계기로 일본은 러시아를 장래의 가상 적국으로 인식, 러일전쟁에 대비한 군비확장에 착수하였다. 삼국 간섭 이후 러시아는 랴오둥반도 남부를, 영국은 웨이하이웨이와 그 주변 지역을, 독일은 자오저우만(膠州灣) 주변 지역을 각각 조차(租借)하게 되었다.

[전쟁의 여파]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먼저 조선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시설을 설치하고, 강화도조약 체결 이래 구축된 불평등조약 체제를 한층 강화하는 게 필요하였다. 또한 본원적인 자본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며, 궁극적으로는 조선을 강제로라도 일본의 보호국으로 묶어 두는 것 등이었다.

서울주재 일본영사 우치다(內田定槌)에 의해 처음 제창된 일본의 조선보호국화안은, 경복궁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무쓰(陸奧宗光) 외상의 입안으로 8월 17일 내각회의에서 공식적인 정책 목표로 채택되었다. 오토리공사는 이 결정에 따라 조선 정부로 하여금 내정 개혁, 즉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실시하도록 권고하였다.

한편, 8월 20일에는 경부·경인 간의 철도부설권 및 군용전신선 관할권 등의 이권을 일본에 양도할 것을 보증한다는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 同條款)을, 26일에는 전쟁중 조선은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일본군의 진퇴와 그 식량준비 등을 위해 편의를 제공한다는 조일맹약(朝日盟約)을 각각 체결하였다.

그리고 15일과 26일에는 일본 고문관과 군사교관을 조선 정부 내에 배치한다는 약속을 조선의 친일정부로부터 받아냈다. 이로써, 일본 정부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열강의 간섭과 조선인의 반발을 우려, 당분간 이들 조약의 즉각적인 실현이나 제도 개혁을 강요하는 듯한 태도는 삼갔다. 이에 따라 그 당시 집권하였던 김홍집·유길준(兪吉濬) 등 갑오개화파 관료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국정개혁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양대첩을 계기로 일제는 조선 정부에 대해 적극간섭정책을 택하기로 결정, 이를 실행하기 위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원훈이자 현직 내무대신인 이노우에를 조선주재공사로 발탁하여 서울에 파견하였다.

이노우에 공사는 조선의 보호국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종과 박영효(朴泳孝)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정부를 꾸렸다. 그리고 조선 정부 내에 일본인 고문관을 배치하고, 조선 정부 제도를 일본식으로 개혁하는 등 조선 정부와 일련의 신조약을 체결한 뒤 500만 원의 정치차관 공여 등을 골자로 하는 적극적인 내정개혁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특히 500만 원이나 되는 차관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을 영국 치하의 이집트와 같은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생각, 이를 미끼로 조선의 중앙 및 지방정부의 재정권뿐만 아니라 일부 행정권까지도 장악할 것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이 차관공여안은 1895년 2월 하순경 300만 원으로 줄어든 상태로 책정되었다. 차관 제공이 시기적으로 지체된데다 그 액수도 원래보다 적었으며 조건 또한 불리해, 박영효 같은 조선측의 애국적인 집권자들의 반발을 초래 오히려 역효과를 낳게 되었다.

더욱이 청일강화의 조짐이 대두된 1895년 2월 중순부터 러시아의 간섭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쟁종결외교에서 랴오둥반도의 할양 문제에 치중하기로 결심한 무쓰 외상은 2월 27일, 러시아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명실공히 보장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사실상 보호국화정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 공사를 경질하고 그의 후임으로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三浦梧樓)를 선발, 파견하였다. 미우라 공사는 서울 부임 후 조선에 대한 장기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로 스기무라 서기관 등과 더불어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 10월 8일 미우라 공사는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군·순사·장사 등을 동원하여 왕궁에 난입, 황후를 시해하였다. 황후시해사건(皇后弑害事件)이 일어나자 조선인의 반일감정은 극에 달하였다. 또한 관계 열강의 비난이 세차게 일어나 일본은 곤궁에 빠졌다.

이러한 때에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이 11월 중순 단발령을 선포, 시행하자 곳곳에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기화로 고종은 1895년 2월 18일 자신의 거처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친일정권은 붕괴되고 일본은 조선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의의]

청일전쟁은 청국·일본·조선 등 관련 각국간의 국제질서를 일본 중심으로 재조정시킴과 동시에, 이들 각국의 근대화 방향을 결정지운 역사적 전쟁이었다.

일본은 삼국의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빼앗는 데는 실패했지만 청일전쟁 결과 대만 등 중국 영토를 식민지로 확보,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청국으로부터 얻어낸 배상금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반면에 청국은 이 전쟁 결과 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권을 상실한데다 열강의 격렬한 제국주의적 분할경쟁의 대상국으로 전락, 대내외적으로 왕조의 붕괴를 재촉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전쟁중 일본의 보호국화 기도에 휘말린 조선왕조는 갑오경장이란 공전의 제도개혁을 겪음으로써 전통적인 지배체제가 약화되었고, 동학농민의병 등 반일민중의 타격이 컸다. 또한 일본군에 경복궁을 점령당하고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는 등 임진왜란 이래 최대의 수난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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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익(柳永益>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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