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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3 (화)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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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171      
[근대] 청일전쟁 (브리)
청일전쟁 淸日戰爭

1894~95년 청(淸)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였던 전쟁.

전쟁의 결과 일본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조선과 중국은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대상이 되어갔다.

배경

1880년대 후반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급속히 발전한 일본자본주의는 1890년에 시작된 경제공황을 통해 그 모순을 드러냈다. 즉 값싼 노동력의 국내시장 발전제약과 섬유공업·군수공업 등에 대한 수년 간의 투자확장이 공황의 원인이었다. 1889년의 흉작으로 인한 쌀 생산의 감소도 공황을 더욱 촉진시켰다. 결국 1890년도의 일본경제는 심한 수입초과를 나타냈으며 일본은 무역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시장 침략을 꾀하게 되었다. 1890~94년 일본 의회에서 나타난 일본지배층 내부의 대립 격화와 농민·노동자들의 경제상태 악화 및 불만의 증대는 지배층의 침략기도를 부추겼다.

한편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영토분할을 주도하고 있던 영국은 당시 제정 러시아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로 보고,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동맹세력을 찾고 있었다. 영국은 일본을 장래의 동맹국으로 보고 청일전쟁 개시 2주일 전인 1894년 7월 16일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동의했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전쟁 개시를 승인한 것을 의미했다.

미국도 러시아를 위험시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게 했다. 반면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침략 기도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도, 일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정책은 취하지 않고 장차의 침략기회만 노리고 있는 단계였다. 1894년 조선에서 발생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조선정부의 청군개입 요청은 일본에게 침략동기를 제공했다.

순식간에 남부지방 전역을 휩쓴 농민군의 기세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청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6월 8~9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牙山灣)에 상륙하여 12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톈진 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청군의 조선출동 통고를 받자마자 곧 조선에 침입했다. 그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을 장악했다.

전쟁의 경과

일본군의 침입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진정되었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의 오오토리[大鳥] 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의 내정개혁(內政改革)을 구실로 철수를 거부했다.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는 겉으로는 '일본의 자위(自衛)를 위해 조선내정의 개혁을 촉구하여 변란의 근원을 단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에 대처할 전략적 시설을 한반도 안에서 확보하고 불평등조약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본원적 축적을 강행하려는 것이었고, 나아가 조선을 보호국화(保護國化)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이 철수한 후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하여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8월초에 일본군은 아산·공주(公州)·성환(成歡)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9월에는 평양에서 청군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청군은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평양전투의 승리를 전기로 하여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고, 갑오정권(甲午政權)의 개혁적 성격도 희석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군수물자만 자국에서 가지고 왔을 뿐, 8월 27일 체결된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對朝鮮對日本兩國盟約:朝日盟約)에 의해 식량·부식물·군수물자 수송의 노동력을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했으므로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의 자주권은 유린되었다.

이에 농민군은 그해 10월 다시 전면적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공주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급히 남하하여 조선정부군과 함께 농민군토벌에 나섰다. 결국 농민군은 12월 우금치전투에서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한편 9월 17일 황해해전(黃海海戰)에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주력을 격파한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11월 6일 진저우 성[錦州城]을 점령했다. 부패한 청군 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22일 뤼순[旅順]이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강화교섭과 시모노세키 조약

전쟁에 참패한 청나라정부는 강화를 시도하고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청나라 대표단이 파견되기 직전, 일본에서는 조선의 독립승인(청의 종주권 파기), 랴오둥[遼東]·타이완[臺灣]·펑후[澎湖]의 할양, 배상금지불, 서구열강과 맺은 것과 같은 통상조약(불평등조약)을 일본과 체결할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강화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1895년 1월 30일 청나라 대표단이 도착하자, 일본은 시간을 지연시켜 점령지를 확대함으로써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하려는 속셈에서, 대표단의 권한부족을 트집잡아 귀국시켰다.

그동안 일본 해군은 1월 20~23일 위해위(威海衛)를 봉쇄한 다음, 2월 12일 육군의 상륙작전으로 이를 함락시켰다. 사태의 급진전에 놀란 청나라 정부는 이홍장(李鴻章)을 강화전권대사로 하는 새로운 대표단을 시모노세키[下關]파견하고, 일본측이 제시하는 강화초안을 수용하여 4월 17일 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은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과 랴오둥·타이완·펑후의 할양, 쑤저우[蘇州] 등 4개 도시의 개항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대 강국이 산둥 반도[山東半島] 부근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랴오둥 반도 포기를 권고해왔으므로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랴오둥 반도 반환의 보상으로 일본은 3,000만 냥을 더 얻었다.

역사적 의의

청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과중한 세금수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압살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참고문헌

청일전쟁과 조선 : 박종근, 박영재역, 일조각, 1989
청일전쟁과 한일관계 : 한국사연구회 편, 일조각, 1925
청일전쟁 및 삼국간섭과 러시아의 대한정책 〈한로관계 100년사〉 : 김원수, 한국사연구회, 1984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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