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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7 (토)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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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333      
[국가] 이집트 (한메)
이집트 Arab Republic of Egypt

아프리카대륙 북동쪽 끝, 북위 22∼32°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이집트아랍공화국. 면적 99만 7739㎞². 인구 5969만(1995). 서쪽은 리비아, 남쪽은 수단, 동쪽은 시나이반도에서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여러 민족이 이곳을 통과하였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국토의 95%가 사막이고 주민의 99%는 나일강 골짜기와 삼각주지역에 살고 있다.

사막 한가운데를 흐르는 나일강은 예로부터 기름진 흙을 날라와 농경문화를 꽃피워 고대 이집트문명을 낳았다. 19세기 이후 용수로(用水路)와 댐이 건설되면서 목화의 단일 농작물 생산국이 되었고, 최근에는 석유수출액이 늘어나 공업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수도는 카이로.

[자연]

<지형>

해발고도 200∼300m의 대지와 나일강 골짜기 및 삼각주, 시나이반도 남부와 홍해 연변의 산지, 남서부 카비르산지에 있는 1000m가 넘는 산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일삼각주를 제외하면 해안평야는 좁다. 지형은 특징상 4지역으로 나누어진다.

⑴ 나일강 골짜기와 삼각주

나일강 전체길이 6690㎞ 가운데 1350㎞가 이집트에 속한다. 수단 국경으로부터 제1급류까지는 나비 5㎞ 정도의 골짜기가 이어져 있으나, 현재는 아스완하이댐에 의해 생긴 나세르호(湖)에 물을 채워두고 있다. 12㎞에 이르는 제1급류를 지나 키나의 대곡류(大曲流)에서부터 하류는 골짜기의 나비가 15∼17㎞이다. 강 양쪽에 있는 대지와 단구애(段丘崖)의 높이는 상류에서 300m, 하류에서 150m 정도이다.

키나의 대곡류로부터 하류의 넓은 하곡에서는 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며, 서쪽에는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여름에 강의 범람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오늘날은 수로망을 이용해 나일강의 물을 끌어들이고 있다. 충적토(沖積土)는 앗바라강과 청나일강을 따라 에티오피아고원에서 운반·퇴적된 현무암질의 검은 흙이다. 아스완에서 강바닥의 해발고도가 83m, 하류인 카이로에서는 해발고도가 12m라는 매우 완만한 경사의 나일강에 부채꼴로 형성된 나일삼각주는 남북길이 170㎞, 동서 나비 200㎞, 면적 2만 2000㎞²이다.

나일강은 카이로 북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다미에타지류와 서쪽으로 흐르는 로제타지류로 갈라진다. 19세기 이후에는 수로망과 배수로망이 건설되어 대농경지대가 되었다. 지중해 연안에는 바다 쪽이 사주(沙洲)로 둘러싸인 만잘라호·부룰루스호·이드쿠호·마리우트호 등과 습지가 있으며, 삼각주 북부연안에는 해안사구(海岸沙丘)가 있다.

⑵ 서사막지역

나일강 서쪽지역으로 북쪽은 지중해, 서쪽은 리비아국경, 남쪽은 수단국경과 접하며, 전국토의 2/3를 차지한다. 사하라사막의 일부이며 평균해발고도 500m인 대지(臺地)로 이루어져 있다. 북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지중해에 닿는다. 그 외에 해발고도 1000m가 넘는 남서부의 화산성 카비르산지와 함몰되어 해면 아래 133m 지역에 있는 북부의 카타라 저지 등 와지(窪地)가 있다. 와지에는 저위도 강우지역에서 땅속으로 흐르는 물에 의한 오아시스가 있다.

⑶ 동사막지역

나일강 동쪽으로부터 홍해 연안까지 남북으로 긴 지역이다. 홍해를 따라 해발고도 1500m 이상인 산맥이 뻗어 있다. 산맥의 경사는 홍해 쪽이 가파르고 서쪽이 완만하며, 와디가 발달되어 있다.

⑷ 시나이반도지역

지중해 연안을 밑변으로 하고 남쪽 홍해를 꼭지점으로 하는 역삼각형지역이다. 남부는 동사막지역의 연속으로 험준한 산지로 되어 있으며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카트리나산(2637m)이 있다. 중부에서 북부지역은 나일강 서쪽대지의 연속이며, 평균해발고도 800m 정도이다. 지중해 연안 해안사구에서는 체수층(滯水層)에 있는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지중해 연안 저지는 예로부터 많은 민족이 오가던 통로이며, 중동전쟁 때에는 격전지가 되기도 했다.

<기후>

북아프리카 사하라사막에서 서남아시아로 이어지는 대건조지대에 속한다. 겨울 강우량이 150∼200㎜에 이르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일부일 뿐이며, 국토의 대부분은 연강수량 150㎜ 이하의 사막기후이기 때문에 나일강이나 오아시스와 같은 외래하천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온은 온대로부터 아열대에 속한다. 1월 평균기온은 카이로가 13.5℃, 아스완이 15.5℃이다. 8월 평균기온은 카이로가 28.3℃, 아스완이 33.0℃로 무더우나, 지중해 연안의 알렉산드리아는 26.4℃로 피서지이다.

전반적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남부로 갈수록 기온은 높아지고 비는 적어진다. 계절은 시원하고 비가 내리는 11∼3월의 겨울과 덥고 건조한 5∼9월의 여름 2계절이다. 3∼7월에는 저기압이 지중해를 동진하면서 내륙부에 뜨겁고 건조한 모래바람을 일으키는데 이 계절풍을 함신이라고 한다. 아라비아어로 <50일 바람>이라는 뜻이며, 한번 불기 시작하면 매주 되풀이하여 7주 동안 계속 분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지지(地誌)]

나일강골짜기지역·나일강삼각주지역·서사막지역·동사막지역·시나이반도지역의 5지역으로 구분된다.

⑴ 나일강골짜기지역

사막 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지역으로, 예로부터 농업지대였다. 목화재배를 시작한 이후 아스완댐·아시우트제언(堤堰) 등의 댐과 수로·배수로를 만들어 관개체계를 정비했다. 밀·콩·목화 외에 수단과 가까운 지역에서는 사탕수수를 재배한다. 마을은 약간 높은 대지에 형성되었으며, 석조건축과 흙벽돌집 주위에는 대추야자·무화과·유칼리나무 등을 심는다. 농지개혁이 시행되었으나 페라(ferrah)라는 가난한 농민들은 도시나 외국으로 돈을 벌러 나가고 있다. 강변도시에는 제당·제분·방적 등의 공장이 건설되었고, 수력발전을 이용하는 아시우트와 아스완은 공업도시이다. 나세르호가 완공된 뒤에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

⑵ 나일삼각주지역

카이로 북쪽의 나일삼각주에서 동쪽 수에즈운하까지이다. 수도·국제항만도시·중공업도시 등이 있으며, 이집트의 정치·경제중심지이다. 정렬된 용수로와 구획정리(區劃整理)된 농장이 펼쳐져 있으며, 목화와 벼농사가 행하여진다.

⑶ 서사막지역

대지형태의 사막이며, 중앙부의 와지에는 시와오아시스·카타라오아시스 등이 있어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하르가·다하라·바하라 등의 오아시스에서는 지하수원재개발로 농지를 확대하는 뉴발레계획이 진행중이며, 대추야자·토마토·누에콩·밀을 재배한다. 북부에서는 석유·천연가스를 개발하고 있다.

⑷ 동사막지역

홍해산맥 등의 산악사막지역이다. 와디에는 오아시스농업과 양·염소를 치는 반유목목축이 발달해 있다. 수에즈만 연안에서는 석유를 개발하고 있다.

⑸ 시나이반도지역

대부분이 사막이다. 겨울에 비가 내리는 지중해 연안에서는 농사를 짓고, 남부에서는 아랍계유목민족 베두인족이 유목생활을 한다. 수에즈만은 이집트 제1의 유전지대이며 해저유전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역사]

<고대 이집트의 주민과 언어>

고대 이집트인은 니그로이드를 모체로 함족과 셈족의 피가 섞인 주민이다. 고대 이집트어는 아프리카적 요소에 함어와 셈어가 섞여 발달했다. 아프리카적 요소인 상형문자(히에로글리프)는 셈족의 쐐기문자와 같은 비상형문자로 바뀌지 않은 채 3000년 이상 사용되었다. 고대 이집트어는 고왕국시대의 고어(古語), 중왕국시대∼신왕국시대의 중기어(中期語), 신왕국시대∼말기왕조시대의 말기어 3가지로 나누어진다.

신전의 문자나 칙령 등에는 히에로글리프를 사용했다. 한편, 고왕국시대의 신관(神官)은 히에로글리프의 간략서체인 신관문자를 만들었다. BC7세기에는 도상성(圖像性)이 없는 속필문자(速筆文字)인 민중문자가 고안되어 상업 등에 이용되었다. 콥트어는 3세기 말 이집트어에서 생긴 뒤 새로운 문자체계로 표현되었다. 이슬람교도에게 정복당한 이후는 아라비아어를 사용했으며, 오늘날은 아라비아어의 이집트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이슬람 이전>

구석기시대 이집트인은 유목생활을 하였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가 건조화되기 시작한 이후는 강가에 모여 살았다. 신석기시대는 하(下)이집트 파이윰분지에서 BC5000년 무렵에 시작되었는데 이 문화를 파이윰A라고 한다. BC4500년 무렵에는 상(上)이집트에 구리를 이용하는 바다리문화가 발생했다.

BC4000년 무렵에는 보다 진보된 나카다 제1기문화가 출현하여 초보적인 이집트문자가 발생했으며, 이어 BC3500년 무렵 나카다 제2기문화로 발전했다. 나일강을 중심으로 마을이 연합하고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에 국가가 생긴 것은 이 무렵이다. 하이집트는 파이윰으로부터 북쪽지역에, 상이집트는 파이윰에서 아스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⑴ 초기왕조시대

BC 3000년 무렵 상이집트의 왕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한 뒤 제1왕조가 시작되었다. 수도는 티니스에 있었다. 왕권이 신격화되어 왕관의 형상도 왕권의 상징인 매와 뱀으로 정해졌다. 호루스신을 섬겼으며, 대형 왕묘 구축기술을 갖추었다. 제2왕조 초기의 왕은 수도를 멤피스 근처로 옮기고 왕묘를 세웠으며, 다음 왕 페리브센은 수도를 상이집트의 아비도스로 옮기고, 호루스신의 적(敵)인 세트신을 섬겨 종교상의 변혁을 가져왔다. 제2왕조는 BC 2700년 무렵의 카세케무이왕시대에 몰락했다. 이 제1∼2왕조시대를 티니스시대·고졸시대(古拙時代)·초기왕조시대라 한다.

⑵ 고왕국시대

BC 2700년 무렵 제3왕조는 멤피스에 수도를 두었다. 조세르왕시대에 국력이 신장되어 최초의 석조피라미드를 사카라에 구축했다. 그 규모는 동서 121m, 남북 109m, 높이 60m였다. 그 뒤의 왕은 이것을 모방하여 피라미드로 왕묘를 만들었다. 제4왕조는 BC2600년 무렵 스네프루왕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왕조는 남쪽으로 누비아, 동쪽으로 아시아, 서쪽으로는 리비아로 진출했다.

스네프루왕은 마이둠피라미드·굴절피라미드와 그 뒤 다슈르의 저경사(低傾斜) 피라미드를 건축했고, 아들 쿠푸왕은 기자에 대형피라미드를 세웠다. 카프레·멘카우레 등의 왕들도 각각 피라미드를 구축했으며, 제4왕조에서 라(Ra;太陽神) 신앙은 왕가의 신앙인 동시에 국가의 신앙으로 확립되었다. 또한 이때 미이라를 만드는 기술도 생겼다.

제5왕조는 BC 2450년 무렵 우세르카프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나스왕의 피라미드에는 사후 왕의 안녕과 영생을 기원하는 피라미드교서가 내부에 새겨져 있다. 제6왕조 페피 2세시대는 왕권이 쇠약해져 지방호족과 고관이 권력을 장악하다가 BC 2263년 무렵 몰락했다. 제3∼6왕조에 이르는 이 시대를 피라미드시대라고도 한다.

⑶ 제1중간기

고왕국시대 뒤 제1중간기는 혼란기였다. 이 혼란기는 제7∼10왕조까지 이어지는데 왕조들은 전국토를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지역적 존재에 불과했다.

⑷ 중왕국시대

제11왕조의 안데프 1세는 BC 2160년 무렵 상이집트 테베를 중심으로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재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멘투헤테프 2세가 재통일을 완성하고, 상부를 피라미드형으로 만든 대형 장제전(葬祭殿)을 디르알바리에 세웠다. 멘투헤테프 3세는 누비아의 일부를 이집트 지배하에 두었다. BC 2000년 무렵 아메넴하트 1세에 의해 시작된 제12왕조는 수도를 하이집트의 이타우이(지금의 다슈르)로 옮겼다. 그리고 테베지역의 아멘신을 왕가의 신으로 섬겼다.

아메넴하트 1세는 수에즈 지협에 성채를 구축했고, 말년에는 아들 세누세르트 1세와 공동통치를 하였다. 세누세르트 1세는 나일강지류를 개발, 홍해에 연결하였으며, 아메넴하트 3세는 농업을 진흥시키고 하이집트에 댐을 구축했다. 한편, 세누세르트 1세에 의해 식민지가 된 누비아에서는 금이 산출되어 이집트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제12왕조는 행정 및 군사제도를 정비했으며 문화적으로 번영했는데, BC 1785년 무렵 몰락하고 제13왕조가 이를 계승했다. 우카프·소베리호테프·아메넴하트·세켐레스·켄지엘 등의 왕들이 알려져 있으나 통치력은 극히 미약했다. 이 시대는 BC 1750년 무렵에 몰락하였다.

⑸ 제2중간기

중왕국시대가 끝난 뒤 혼란기인 제2중간기가 시작되었다. 제2중간기 초에는 이집트인을 왕으로 세운 제14왕조가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침입한 힉소스는 BC 1730년 무렵 아바리시(지금의 타니스)를 수도로 제15왕조를 세웠고, 그 뒤 제16왕조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힉소스는 하이집트만 직접 통치했을 뿐 상이집트는 지방호족을 통해 간접 통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테베에 기반을 둔 영주가 BC 1680년 무렵 제17왕조를 세웠다. 초기에는 힉소스왕조와 공존했으나 5대 세케넨레왕에 이어 그의 아들 카메스왕이 힉소스를 몰아냈다.

⑹ 신왕국시대

힉소스를 완전히 몰아낸 것은 다음 왕 아메스 1세시대 BC1580년 무렵이다. 그로부터 제18왕조가 시작되어 수세평화주의(守勢平和主義) 국가에서 공격적인 군사국가로 변했다. 전쟁에서는 힉소스가 들여온 말과 전차를 중요시했다. 그리고 아멘신(神)의 세력이 팽창하여 힉소스를 몰아내고 최고의 국가신이 된 동시에 태양신 라를 흡수하여 아멘라라고도 했다. 또한 아멘신을 위한 카르나크신전·룩소르신전, 핫셉수트여왕이 장제전 등을 세웠다.

6대왕 투트모세 3세는 영토를 가장 크게 넓혔는데, 남쪽으로는 누비아의 나일강 제4급류까지,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일대까지 지배했다. 제10대 이크나톤왕은 종교개혁을 실시하여 아멘신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축소시켰다. 한편 이 시대의 아마르나양식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18왕조 이후에 람세스 1세가 삼각주지대에 제19왕조를 세웠으며, 3대 람세스 2세는 정복왕 또는 건축왕으로 유명하다.

히타이트와 맺은 평화조약은 인류가 맺은 최초의 성문화된 평화조약이다. 건축은 이집트 및 누비아·아시아 각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아부심벨의 대암굴신전이 대표적이다. 제20왕조는 BC 1200년 무렵 세트나크트가 세웠다. 그러나 아들 람세스3세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BC 1080년 무렵 몰락했다.

⑺ 후기왕조시대

스멘데스왕이 타니스에 세운 제21왕조에 이어 BC 960년 무렵 리비아인이 제22왕조를 열었다. 힉소스 이래 2번째 외국인 왕조이다. BC 817년 무렵에도 리비아인이 제23왕조를 세웠으나 사이스에 기반을 둔 이집트인 지도자가 일어나 BC 780년 무렵 제24왕조를 세웠다. 21∼24왕조시대를 말기왕조시대 또는 제3중간기라 한다. 제3중간기 뒤에는 누비아인이 제25왕조를 열었다.

BC 663년에는 이집트인이 제26왕조를 세웠고, BC 525년에는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페르시아령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제27왕조이다. BC 404년 이집트인 아미르타이스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제28왕조를 세운 이후 이집트인이 제29·30왕조를 세웠다. 이 세 왕조가 파라오시대의 마지막 이집트 왕조이다.

⑻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

BC 341년에는 페르시아의 아르탁세륵세스 3세가, BC 33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부장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에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이집트 고유의 문화를 존중했으며, 왕들은 이집트식 신전을 세우고 이집트식 상형문자를 새겼다. 왕가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으며, 왕명은 상형문자·민중문자·그리스문자 3가지로 발표했다.

⑼ 로마제국령시대

BC 30년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가 로마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자살하자, 로마는 이집트를 속주로 삼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곡물을 가져갔다. 395년 로마제국이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으로 분열된 이후는 비잔틴제국령으로 편입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대제가 신전폐쇄를 명한 이후 파라오시대의 문화전통이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비잔틴제국령이 되기 이전부터 이집트에 들어와 있었으며, 콥트어에 그리스문자 및 음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콥트문자체계를 만들었다. 비잔틴제국시대의 이집트는 물질적인 착취와 종교적인 박해를 받았다.

<이슬람 이후>

641년 아랍인 아므르 빈 알라스가 이집트를 정복하여 군영도시 푸스타트를 건설하고 이집트를 통치했다. 아랍인은 푸스타트·알렉산드리아·아스완 등 주요 도시에 살며 조세를 징수하고 수비대를 두었다.

⑴ 옴미아드·아바스왕조

이집트의 아랍화·이슬람화는 칼리프권력에 복종하던 옴미아드왕조·아바스왕조시대(661∼868)에 진행되었다. 현주민 콥트계 그리스도교도는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아랍인이 농촌에 정착했다. 통치기구가 정비되고 8세기 이후에는 아라비아어가 공용어로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아랍화·이슬람화에 대해 콥트계 그리스도교도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아랍인은 지도적 위치를 잃었다.

⑵ 독립왕조시대

868년 이집트에 파견된 투르크계 군인 아마드 빈 툴룬은 반(半)독립왕조인 툴룬왕조를 세웠다. 아마드 빈 툴룬은 877년 시리아를 점령하고 툴룬왕조에 통합시켜 영역국가(領域國家) 이집트의 원형을 만들었다. 아바스왕조로의 재통합시대와 이흐시드왕조시대를 거쳐 969년 이후는 파티마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했다.

그해 이집트를 공략한 파티마왕조의 제4대 칼리프인 무이즈의 장군 자우하르는 푸스타트 북동쪽에 카히라라는 수도를 건설했다. 파티마왕조는 수니파 아바스왕조의 칼리프에 대해 칼리프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아즈하르사원을 건설하는 등 활발한 종교·문화활동을 벌였다.

1169년 파티마왕조의 재상이었던 쿠르드인 살라 웃딘은 아이유브왕조를 수립했다. 살라 웃딘은 십자군을 막기 위해 군대를 재편성하고 시리아의 영유권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수니파의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한편, 이크타제도를 도입하여 군인에게 봉토를 지급했다.

1250년에는 맘루크세력이 신왕조를 수립했으나 뒤에 바리 맘루크왕조(1250∼1390)와 부르지 맘루크왕조(1382∼1517)로 나뉘었다. 술탄을 우두머리로 바리 맘루크왕조는 십자군과 몽고인을 격퇴시킴으로써 강성해졌으나, 군벌의 세력다툼 격화와 왕조 말기의 경제적 혼란 및 중계무역지로서의 기능상실로 점차 쇠퇴하였다.

⑶ 오스만지배하의 이집트

1517년 이집트는 오스만제국의 속주가 되어 총독의 통치를 받았다. 때문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는 이스탄불로 바뀌었고 이집트는 정체기를 맞이했다. 초기에는 중앙집권적 징세체제가 시행되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 징세청부제도가 보급되면서 징세청부를 맡은 맘루크층은 농촌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고 이집트총독의 권한은 명목적인 것이 되었다.

한편, 맘루크층은 파벌을 조성하며 이집트사회에 토착화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공언하는 유력한 맘루크가 나오게 되는데, 이 맘루크를 뒷받침한 것은 농촌으로부터의 수입 외에 동방무역에서 얻은 수익이었다.

⑷ 메메트알리왕조

1798년 이집트를 원정한 나폴레옹은 3년 동안 이집트를 지배했다. 이 3년동안 나폴레옹은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이스탄불로부터 알바니아인 용병대 장교를 파견했으며, 1805년 나폴레옹이 퇴각한 뒤에 이 사업은 메메트 알리에게 넘어갔다. 메메트 알리는 맘루크세력을 없애고 징세청부제도를 폐지했다. 그리고 토지를 조사하여 일원적으로 농민을 지배하는 한편 전매제도(專賣制度)·근대공장설립·징병제 실시와 함께 근대적 군대를 창설하고 기술학교를 설립하는 등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을 실시했다.

대외적으로는 와하브파를 소탕하기 위해 아라비아반도로 출병하여 수단을 정복하고 그리스독립전쟁에서 오스만제국을 지원했으며 제1·2차 시리아전쟁 등을 통한 영토확장정책을 꾀했다. 그러나 유럽 열강과 충돌하여 40년 런던4국조약을 체결하고, 수단을 제외한 정복지를 포기하는 동시에 이집트 국내시장을 개방했다. 한편, 그 대가로 메메트 알리 일족의 이집트총독 세습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⑸ 영국식민지 이집트와 독립

메메트 알리가 죽은 뒤 사이드와 이스마일은 자유주의적 경제체제를 원칙으로 수에즈운하 개설 등 근대화정책을 실시했다. 그 동안 이집트재정의 외자의존과 목화의 단일경작 농업구조가 진전됨에 따라 이집트경제는 유럽에 종속되었다. 1876년 이집트재정은 파탄되어 국제관리하에 놓여졌으며, 유럽열강은 이집트내정에 간섭했다.

1879년 일어난 민족주의운동이었던 아라비의 반란을 무력진압한 영국은 이집트를 군사지배하에 두었다. 제 1차세계대전 뒤 1919년 자글룰을 지도자로 하여 반영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영국은 22년 명목상 이집트독립을 승인했다. 그 뒤 이집트 정치는 영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목표로 전개되었다.

⑹ 나세르 이후

1952년 7월 23일 G.A.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은 이집트혁명으로 파루크를 퇴위시키고, 이듬해 이집트공화국을 선언했다. 혁명정권은 제1차농지개혁과 공업화정책 등을 통해 국민통합과 자립된 국민경제를 목표로 했으나 1956년 제2차중동전쟁(수에즈전쟁) 뒤에는 계획경제를 바탕으로 공공부문을 확대했다. 1958년에는 시리아와 통합하여 아랍연합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61년 시리아통합이 해체된 뒤에는 제2차농지개혁, 대기업의 국유화, 사회복지제도 확충 등 사회주의적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 동안 나세르는 아랍민족주의운동을 배경으로 국제정치무대에서 비동맹중립주의를 지켰으나, 이 정책은 1967년 제3차중동전쟁을 계기로 좌절되었다. 1970년 요르단내전으로 아랍세계의 분열위기가 높아지고 요르단정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이의 화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나세르가 죽었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M.A.사다트는 1973년 제4차중동전쟁을 계기로 경제통제를 완화하고, 외자를 도입할 목적으로 개방정책을 실시했다. 그에 따라 경제는 활기를 띠고 물자가 풍부해진 반면 국제수지는 악화되고 물가가 폭등했다. 1977년 1월에는 생활필수품의 가격인상을 계기로 폭동이 일어났다. 사다트는 친러시아노선에서 벗어나 친미국노선으로 전환하고 1977년 11월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1979년에는 캠프데이비드합의에 따라 이스라엘과 단독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외교정책은 아랍세계의 분열과 이집트의 고립을 가져왔으며, 그는 1981년 10월 이슬람원리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그 후임으로 M.H.무바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87년 재선되었다. 1990년 이슬람원리주의자들과의 대결이 계속되는 가운데, 12월 총선거에서 여당인 국민민주당이 압승하여 무바라크가 계속 정권을 잡았다.

[정치]

<정치제도>

의회제 입헌공화국이다. 1971년 9월의 국민투표로 승인된 새헌법에는 국가의 성격을 노동자동맹을 기초로 한 민주주의·사회주의 아랍공화국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되어 있다.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며, 국민의회가 추천한 후보를 국민투표로 결정한다. 대통령은 임기가 6년이고 3선까지 허용된다. 대통령은 각료를 임명하고 행정권을 행사한다. 이집트혁명 이후 나세르·사다트·무바라크 등 군인출신 대통령이 이어지고 있다.

의회는 인민의회로 구성된 단원제이며, 의원은 대통령이 지명하는 콥트교도의원 10명 외에는 일반투표로 선출된다. 정당은 나세르정권시대에 1당제였으나 사다트정권 이후 1976년 복수정당제가 되었다. 여당인 국민민주당 외에 사회노동당·신와프드당·민족통일진보당 등이 있고, 군인과 재벌세력이 강하다.

지방행정구분은 카이로주·알렉산드리아주 등 25개 주로 되어 있고 그 밑에 군과 읍이 있다. 임명제도에 의해 각각 주지사·군수·읍장을 두고, 주·군·읍에는 각각 지방자치의회가 있는데 의원은 일부 지명된 의원 외에는 일반투표로 선출된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하다.

근대적 사법제도가 시행된 것은 영국이 사실상 이집트를 지배했던 1883년부터로 3종의 하급법원과 최고법원으로 구성된다. 제1심은 각 주에 있는 지방법원, 제2심은 19곳의 중앙법원, 제3심은 6대도시에 있는 공소법원이 담당한다. 각 법원에는 형사·민사 법정이 있다. 최종판결은 카이로에 있는 최고법원이 내린다. 최고법원은 장관·부장관 외에 36명의 판사로 이루어져 있다.

<외교>

이집트는 지리적으로 아랍세계의 중심에 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접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아랍세계와 제3세계의 여러 나라가 교류하는 곳이다. 따라서 정권담당자는 항상 아랍이나 제3세계 대표로서 외교를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는데 나세르외교가 그 전형이었다. 범아랍을 지향하여 시리아와 합병을 시도했으며, 이스라엘과의 중동전쟁에서는 아랍의 맹주로서 싸웠다.

비동맹국가의 대표로서도 활동했으나 아스완하이댐의 건설과 군사원조 등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했다. 사다트정권 초기에는 나세르외교를 답습했으나, 1972년 7월 러시아군사고문단을 추방하고 아랍 온건파 후원으로 제4차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 불패의 신화를 깨뜨렸다. 그 뒤 미국국무장관 H.A.키신저의 중재로 이스라엘과의 평화교섭에 나섰다. 1976년에는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서유럽 여러 나라에 무기 공급을 요청했다.

사다트는 단신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미국정부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평화교섭을 성립시켜 1979년 3월에 두 나라는 평화조약에 조인했다. 이러한 이집트 단독 강화조약은 아랍 여러 나라, 특히 강경파의 비판을 받게 되어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수단과의 합병을 실마리로 아랍 여러 나라와 관계 회복을 도모하려고 한 사다트가 암살된 뒤에, 후임 무바라크대통령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아랍 여러 나라나 러시아와 관계개선을 시도해 1984년 러시아와 대사 교환이 이루어졌다.

1987년 아랍정상회담을 계기로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등과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1989년 2월 이라크·요르단·북예멘과 함께 아랍권 경제공동체인 아랍협력위원회(ACC)를 창설했으며, 5월에는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에 복귀했다. 1989년 3월에 이스라엘이 1967년 중동전쟁 당시 강점했던 홍해연안 타바지역을 이집트에 반환함으로써 7년에 걸친 양국간 국경분쟁이 종식되었다.

<군사>

육·해·공 3군이 있는데 현역병력 총수는 45만 명이며 최고사령관은 대통령이다. 육군은 유도병기(誘導兵器)도 보유하고 있으며 중동지역에서 최강을 자랑하고 있다. 나세르정권시대에는 러시아의 군사고문단이 주재하고 병기 공급도 받았으나 1972년 사다트정권은 소련군사고문단을 추방했다. 무기공급도 미국·프랑스·중국 등으로 다각화되어 있고 미국과 협력하여 국산화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미국 육·공군과 합동훈련도 실시했다.

이스라엘과의 강화가 성립된 뒤 전쟁부를 국방부로 이름을 바꾸고 전시태세로부터 자국방위와 수단 등 동맹국방위태세로 바꾸고 있다. 국방비 지출은 15억 7000만 달러(1993)이고, 선발징병제로 18세부터 3년의 병역의무가 있다. 육군병력 31만 명, 해군병력 1만 6000명, 공군병력 3만 명, 방공군 8만 명이다. 이 밖에 준군대로서 국가경비대 6만 명, 국경경비대 1만 2000명, 국방치안군 6만 명, 연안경비대 7000명을 보유하고 있다.

[산업·경제]

이집트는 예로부터 나일강유역에 펼쳐진 농업과 사막 오아시스의 혜택 외에 지중해 연안과 아시아·아프리카를 잇는 교역으로 국민경제가 영위되어 왔다. 나일강유역의 농업은 19세기 전반 메메트 알리의 목화 도입에 따라 밀과 콩류의 1모작에서 2∼3모작으로 바뀌었다. 식산흥업에 의한 이집트 근대화를 위해 관영공장이나 도로, 상·하수도, 철도 등 도시의 기간시설 건설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포트사이드∼카이로∼수에즈를 잇는 철도 건설과 수에즈운하 건설 등 이중투자공사를 추진했기 때문에 엄청난 대외채무를 지게 되어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관영공장의 경영부진으로 근대화는 좌절되고 수에즈운하도 외국이 관리하게 되어 그 뒤 목화 단일경작경제의 길로 퇴보하게 되었다. 1922년 독립하여 민족자본이 싹트기는 했으나 큰 변화는 1952년의 이집트혁명 이후에 이루어졌다.

혁명 뒤 나세르는 반봉건·민족주의 입장에서 농지개혁, 수에즈운하의 국유화, 외국계 금융기관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1957년 이후에는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바꾸어 중공업·금융·무역·기간시설 등을 국유화하여 공공부문을 강화했다. 그러나 1967년의 제3차중동전쟁 이후는 외화수입의 감소와 거액의 군사비 지출로 국가재정이 파탄에 빠졌다.

1973년의 제4차중동전쟁 뒤 위기에 처한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교섭을 추진하는 한편 경제자유화정책을 펼쳐 외국자본의 도입과 민간부문활성화에 의한 공업화를 추진했으나 특정계층만이 혜택을 받게 되었고 인플레이션으로 빈부의 격차가 커졌다. 현재 이집트 국가경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수에즈운하 통항료 수입, 해외노동자의 송금, 관광수입, 석유수출대금 등 4개 부문인데, 노동자 송금 이외의 수입은 전쟁종결로 가능해진 것이다. 국민총생산은 366억 7900만 달러(1993), 1인당 국민소득 660달러이다(1993).

<자원>

수출액의 30.8%를 차지하여 외화 수입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석유는 수에즈만 동쪽연안 시나이반도유전과 수에즈만 해저유전이 주산지이고, 그 밖에 샤르키야사막유전·가르비야사막유전 등이 있다. 수에즈에서 알렉산드리아 쪽으로는 파이프라인이 연결되어 있다. 석유산업은 국유화되어 있으며 석유공단(EGPC)이 석유정제와 유통을 장악하고 있다.

채광이나 채굴은 외국기업과의 합작회사가 행하고 있다. 연간생산량은 3억 3320만 배럴(1993)이며 해마다 산유량이 늘어나고 있다. 매장량은 29억 배럴(1981)이며 새유전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천연가스도 연간생산량 116억 2000만m³(1993)이다. 나일삼각주의 아부마디와 알라메인 남쪽의 아부가라디그에 가스유전이 있으며 아부가라디그에서 기자까지 가스파이프라인이 설치되어 있다. 기타 광산물로는 아스완 부근에서 철광석이 생산되고 에시바이야 등에서는 인광석, 시나이반도에서 망간, 알렉산드리아 등에서 소금이 나온다.

이집트의 발전은 예로부터 석탄이나 석유를 이용하는 화력발전이 주이고 아스완댐 등 3곳에 소규모 수력발전소가 있을 뿐이었으나, 아스완하이댐에 210만 ㎾를 발전하는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어 수력 이용이 크게 늘었다. 이 밖에 해수면보다 134m나 낮은 카타라저지에 지중해 물을 운하로 끌어들여 발전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도 추진되고 있다. 연간 총발전량은 475억 ㎾(1993)이다.

<농·수산업>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인구의 21%(1988)로 해마다 그 비율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농업은 여전히 국민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집트농업은 지난 150년 동안에 크게 변화했다. 19세기 전반 목화의 재배가 도입되기 이전 대부분의 농지는 8∼10월 나일강 홍수기에 주위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기름진 진흙을 가라앉히는 관개방식을 취했다. 농사는 홍수기가 지나간 뒤 겨울 작물인 밀·토끼풀·누에콩·양파 등을 재배하는 1모작이었다.

초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재배하는 목화는 1년 내내 관개가 필요했기 때문에 댐이나 수로가 만들어졌다. 목화를 중심으로 한 2∼3년 윤작체계가 시작되고부터 겨울작물 외에 여름·가을작물인 목화·옥수수·벼·사탕수수·깨 등과 나일강홍수기에 재배되는 조·옥수수까지도 2∼3모작으로 재배하게 되었다. 전체 경지면적은 270만ha이다. 목화는 길고 부드러운 고품질섬유로서 이집트면(綿)으로 유명한데, 1940년대에는 전체 수출량의 85%를 차지하게 되어 면화 단일경작경제로 일컬어졌다. 주산지는 나일강하류와 나일삼각주 지역이다.

쌀과 양파도 중요한 수출농작물인데 쌀은 1ha당 5t 이상을 수확하고 있다. 사탕수수(연간 1190만t)는 기온이 높은 상이집트에서 많이 재배되어 국내 소비를 충당하고 있으며 그 재배면적이 늘어가고 있다. 콩류나 옥수수·조·쌀 등과 함께 주식농작물인 밀은 경지면적 59만ha에 연간 444만t(1994)이 생산되지만 자급률은 30% 정도이며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1ha당 수확률도 낮고 저장손실도 10%나 된다. 나일삼각주에서 60%가 재배되고 있다.

옥수수 재배면적은 80만ha로 가장 넓으며 연간생산량은 488만t(1994)이고 주로 상이집트에서 재배되고 있다. 이 밖에 감자·오렌지·포도가 재배되며, 오아시스에서는 대추야자가 수확된다. 최근에 기업적인 대규모 양계가 한창이다.

1952년의 혁명 이후 3차례에 걸친 농지개혁으로 봉건적 대지주는 일단 없어졌다. 즉 소유상한을 52년 84ha, 61년 42ha, 69년에는 21ha로 정해 이를 넘는 농지를 사들여 가난한 농가에 나누어주었으며 배분받은 사람들을 협동조합으로 조직화했다. 그러나 21ha를 소유하고 있는 중소지주의 지배행위는 여전히 남아 있다. 농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1인당 경작지는 0.6ha 밖에 되지 않으며 농사기술도 뒤떨어져 있다.

식량증산을 위한 관개면적의 확대도 꾀하고는 있으나 건조지 관개로 지하수위의 상승이나 염해(鹽害) 등의 문제가 생기고 있다. 수산업은 홍해·지중해 연안의 어업과 나일강이나 댐 또는 수로에서 민물고기를 잡는 어업이 있다.

<공업>

공업생산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5%(1988)로 아랍 여러 나라 중에서 제1의 공업국이다. 1952년까지는 섬유·식품·피혁 등 경공업이 주였으나 혁명 뒤 사회주의정책하에서 제1차 5개년계획에 따라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제철·화학·전기 등 중화학공업이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공업화 계획은 중동전쟁으로 중단되었다.

1973년 전시경제체제를 벗어나 약화된 경제를 바로 잡기 위하여 문호개방정책을 펼쳐 외자도입에 의한 공업부흥을 꾀했다. 포트사이드와 수에즈 등에 면세지역을 설치하고 5∼15년의 면세기간을 두는 등 외자에 의한 공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주요 공업은 제분·제당·맥주·착유(搾油) 등 식품과 섬유·제철·알루미늄·자동차·원동기·농기구·자전거·무기·기계·전기·비료·시멘트·피혁·석유정제 등이다.

식품과 섬유가 석유를 제외한 생산액의 59%를 차지하고 있다. 자유경제정책 이후 민간부문이 늘어가고 있으나 아직 공공부문의 생산액이 73%를 차지하고 있다. 공공부문은 관료화와 비능률의 결점이 있으며 민간부문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크다. 주요공업지대는 카이로·기자·헬완·포트사이드·수에즈·알아미리야·알렉산드리아 등이다. 제당·방적·착유공업 등은 원료입지 공업이어서 각지에 공장이 분포되어 있다.

<무역>

면화 단일경작경제에는 변화가 있으나 수입초과는 여전하다. 통계에 따르면 총수출액 30억 6480만 달러에 대하여 총수입액은 107억 1560만 달러(1994)로 76억 5000만 달러가 수입초과되었다. 이는 면화 수출이 부진한 반면 공업원료·공업제품·식량수입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수출품목은 원유(30.8%)·면화(20.8%)·면사(10.1%)·면포와 알루미늄주괴(鑄塊) 등이다. 주요 수입품목은 밀(6.5%)·트럭(5.8%)·강봉(鋼棒;3.7%)·시멘트(3.7%)·자동차부품 등이다. 수요 수출상대국은 이탈리아·이스라엘·일본·그리스 등이고 주요 수입국은 미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 등이다.

<금융·재정>

1961년에 은행 통합과 국유화가 단행되어 중앙은행 외에 149개의 상업은행이 이집트국영은행·미스르은행·알렉산드리아은행·카이로은행 등 4개 은행으로 통합되었다. 그 후 1974년의 자유화 조치에 따라 외국은행과의 합병회사나 지점에서도 외국환업무에 한하여 영업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석유수출과 통항료 수입이 늘어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으나, 그 뒤 불황과 역(逆)석유파동의 영향으로 수입이 줄어들었으며 연료와 농산물에 대한 보조금과 식량수입으로 인해 지출이 늘어나고 있다.

<교통>

나일강과 수로망을 이용한 수상교통이 발달했다. 수에즈운하는 제3차중동전쟁으로 8년 동안 폐쇄되었다가 1975년 다시 열렸고, 선박의 대형화에 따라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그 뒤 17만t급의 선박이 항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루에 60척 이상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철도는 세계적으로도 빠른 시기에 부설된 카이로―알렉산드리아선(1856)을 비롯하여 카이로를 중심으로 각 노선이 부설되어 있는데 총길이 7200㎞로 남쪽은 아스완, 서쪽은 칼란까지 뻗어 있다.

자동차교통의 발달에 따라 도로도 정비되고 있으며 도로의 총연장은 약 3만㎞이다. 또한 11개의 공항이 있으며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국내관광을 위한 카이로―룩소르선이 외화획득노선이다. 경제개발5개년계획(1981∼85)에서는 광공업·운수통신 부문에 대한 투자계획과 함께 농지개혁과 식량증산, 주택과 도시건설에 역점을 두었다.

[사회]

주민 대부분이 지중해인종의 하나인 이집트인이며 그 밖에 지리적 위치에 따라 지중해인·아시아인·흑인과도 혼혈되어 왔다.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살갗이 검은 사람이 많아진다. 7세기 이후 아랍인의 지배로 이슬람화와 아라비아어화되었다. 소수민족으로는 수단 국경 근처의 누비아인, 만잘라호수 주변의 바스물로스족, 리비아국경 근처의 베두인족 등이 있다. 그 밖에 그리스인·이탈리아인·아르메니아인 등 외국계 주민도 있다.

언어는 아라비아어가 공용어로 되어 있으나 상류층에서는 영어나 프랑스어도 사용한다. 관광시설에서는 영어가 통용된다. 종교는 이집트혁명 뒤 이슬람교가 국교로 되어 있다. 수니파의 이슬람교도가 90%를 차지하며 무슬림동포단, 이슬람협회 등 과격파도 있다. 상이집트와 카이로에 신자가 많은 콥트교도는 약 10%로 추정된다. 그밖에 여러 파의 그리스도교도·유대교도 등이 약 30만 명 있다. 이슬람교의 관습에 따라 목요일은 반휴일이고 금요일이 휴일이다.

인구는 제2차세계대전 뒤 급속히 늘어나, 1960년에 2577만 명이 95년에는 5969만 명이 되어 연평균증가율이 3%였다. 평균수명은 남자 65세, 여자 69세(1992)이다. 또한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시인구가 전체인구의 44.8%(1995)에 이르고 있다. 특히 카이로에는 전인구의 1/8이 모여 주택난이 가중되고 있다. 계층간 소득격차가 매우 심하며 실업자가 많다. 광공업 종사자의 연간 평균임금이 낮아 일자리를 찾아 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리비아 등으로 나가는 기술노동자수가 150만 명에 이르고 있다.

1952년의 혁명 뒤 초등학교의 무상의무교육이 실시되었고 기술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초등학교는 6살부터 6년간이며, 졸업시험 합격자는 중학교나 실업학교로 진학한다. 그 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고등전문학교·고등기술훈련소로 진학한다. 국립대학은 7개교가 있는데 이슬람계 아즈하르대학과 카이로아메리칸대학이 유명하다. 의무교육재학률은 90%(1987), 식자율(識字率)은 48.4%(1990)이다.

[문화]

피라미드와 신전으로 대표되는 수천 년의 문화적 전통과 지중해의 여러 문화, 이슬람문화, 서유럽문화가 섞여 있으나 그 바탕에는 나일강유역에서 생겨난 유구한 토착 이집트문화가 있다. 국민성은 붙임성이 있으며 인정미가 넘치고 온화하다. 융통성이 있는 반면에 겉치레가 심하고 이기적이며 자기 주장이 강하다. 가정에서는 남편이 절대적 권한을 가지며 결혼에 있어서도 상대자와 혼인자금에 대한 교섭을 갖은 등 여성의 지위가 낮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표면상의 원칙이고 실제 교섭을 하는 실질적 권한은 아내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집트풍습에 따르므로 이슬람적 요소는 없다. 콥트교도 결혼식은 콥트교 방식에 따른다. 이슬람교 계율을 지키는 일은 다른 나라처럼 엄격하지 않다. 문화시설은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2대도시에는 잘 정비되어 있다.

카이로에는 국립도서관·이집트박물관·콥트미술관·이슬람미술관이 있으며, G.F.F.베르디의 《아이다》가 초연되었던 카이로오페라극장도 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그레코로만박물관 등이 있다. 문학·미술에서도 창조적이며 현대적인 작품이 나오고 있는데, 영화 제작활동이 두드러져 한때 세계 제3위의 제작편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영화는 시대극이나 음악극 외에 농민이나 노동자를 묘사한 사회·문화 개혁적 영화가 있다. 주요 신문·잡지는 아라비아어로 발행된다. 《알아람》 《알악바르》 《알곰후리아》 등 3대신문이 있다.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은 국영이다.

[한국과의 관계]

1961년 영사관계를 맺고, 62년 카이로에 총영사관이 설치되었다. 이후 68년 문화협정, 79년 항공협정, 85년 전력기술협정 등을 체결했다. 1976년부터 한국의 건설업체가 진출하고 있으며, 1978년 한·이집트합작은행이 설립되었다. 이 밖에 한·이집트친선협회가 설치되어 있다. 교민수 6명, 체류자 326명(1989)이며, 대한수입은 3억 5438만 달러, 대한수출은 1억 5910만 달러(1994)이다. 북한과는 1963년 대사관계를 맺었다.

<한병선>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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