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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3-07 (일)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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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164      
[원시] 구석기시대 (민족)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개요 / 한국의 구석기문화 / 전기 유적군/ 후기 유적군 / 북한의 구석기 유적

최초의 고인류(古人類)가 등장한 때부터 약 1만년 전까지에 걸친 긴 시기.

개요

[개념]

구석기시대란 용어는 19세기 말부터 사용되었다. 19세기 중엽 유럽에서 고고학이 근대 학문의 틀을 갖춘 후, 고고학자들은 인류의 역사를 기술사적 관점에서 석기.청동기.철기시대로 구분하였다.

그 뒤, 석기시대는 다시 사용도구상 때려 만든 뗀석기(타제석기)와 갈아 만든 간석기(마제석기)에 의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구분되었다. 즉, 구석기시대는 원래 돌을 때려 만든 석기를 사용하던 시대를 의미했다. 그러나 뗀석기가 아주 늦은 시기까지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는 현재 통용되지 않고 있다.

많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당시의 유물이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홍적세 또는 갱신세라고도 한다.)의 퇴적층에서 맘모스와 같이 오늘날에는 사라진 동물유해와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에, 구석기시대를 플라이스토세와 동일한 시기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아프리카에서 플라이스토세 이전 시기인 플라이오세의 지층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과 유물이 속속 발견되어 구석기시대의 상한은 플라이스토세 이전 시기로 당겨졌다.
현재까지 공인된 가장 오래된 고인류화석은 에티오피아 남부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로서 440만년 전의 고인류유해이다. 그러나 최초의 인류는 이보다 훨씬 전에 등장했다고 여겨지며, 1990년대 말부터 500만년 전 이전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사람들이 도구를 사용한 것이 400∼500만년 전 최초의 고인류단계부터일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실물로서의 석기는 약 250만년 전 정도의 것이다.

구석기시대란 수백만년에 걸친 긴 시기로서, 여러 단계의 고인류를 거쳐 구석기시대가 끝날 무렵 우리와 같은 현대인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구석기시대동안 문화진화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즉, 최초의 석기가 등장한 때부터 약 10만년 전 무렵까지 도구제작기술과 형태는 매우 미미하게 변화하였다.

[시기구분]

구석기시대의 시기구분은 주로 석기군의 변화양상에 기초해 이루어지고 있다. 19세기 이래 전기.중기.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나 각 시기의 경계와 시기지칭용어는 지역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구석기 연구의 전통이 가장 깊은 프랑스 서남부지역을 예로 들자면, 전기와 중기의 경계는 대략 8만∼7만 5,000년 전, 중기와 후기의 경계는 대략 4만∼3만 5,000년 전으로 설정되고 있다.

우리 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구석기 연구는 아직 그리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한 상태여서 확실한 시대구분을 시도할 형편은 못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구분방법은 대체로 통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한국의 구석기문화

[연구사]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 유적이 공식적으로 처음 발견된 것은 1960년대 초이다. 1963년 북한에서 웅기 굴포리 유적이, 이듬해에는 남한에서 공주 석장리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인 1933년 두만강변 동관진에서 흑요석(黑曜石)제 타제석기가 멸종동물의 뼈와 같이 발견되어, 구석기 유적은 이미 이 때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는 동관진 유적의 중요성을 고의적으로 무시하였다. 이 유적의 학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수습된 실물자료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평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따라서 1963년 신석기시대 유적인 웅기 서포항 패총에서의 구석기문화층 발견이야말로 구석기고고학 연구의 개시를 말해주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굴포리 유적은 중기와 후기 구석기의 두 문화층으로 나뉜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연대와 유물의 내용은 아직 확실치 않다. 이런 사정은 굴포리 유적 조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하는 부포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료의 취사선택적 부분공개와 도식적 결론의 제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한고고학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대한 결함이다.

정치적 이유에서 구석기시대의 연구를 중시해온 북한에서는 1960년대의 상원 검은모루 동굴과 1970년대의 덕천 승리산 동굴 발견을 시작으로 1980년대까지 석회암 동굴 조사에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것은 주체사관에 따른 민족기원론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고인류화석 표본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구석기연구는 주춤한 형편이다.

석장리 유적은 발견 이후 여러 차례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1970년대 말까지 남한에서 발굴된 유일한 구석기 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유적이 수십만년에 걸친 유적이라는 주장은 1970년대부터 초중고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불명확한 점이 많다.

이 후, 10여 년동안 공주 마암리, 서울 면목동, 제주 빌레못 동굴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단편적인 구석기 발견 주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러한 보고의 거의 대부분이 신빙성이 없거나 매우 낮다고 여겨지고 있다. 어느 정도 그러한 문제에서 벗어나는 유적이라 할 만한 1970년대까지의 사례로는 6만 6000년 전의 절대연대측정치가 얻어진 제천 점말 동굴과 여러 지점에서 석기와 동물뼈가 확보된 청원 두루봉 동굴을 들 수 있다.

1978년의 전곡리 유적의 발견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곳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또한 유사한 유적이 임진강유역 곳곳에서 확인된다는 점은 우리 나라의 구석기고고학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임진강유역에서는 새로운 발견과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1980년대 들어와, 댐 건설을 비롯한 대형 토목공사에 수반된 대규모 구제발굴로 각지에서는 새로운 유적이 알려졌다. 특히, 남한강변의 수양개 유적과 보성강변 여러 곳에서 확인된 구석기 유적은 종래까지 분명치 않았던 우리 나라 후기 구석기 내용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90년대에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보았던 것과 같은 대규모 유적의 발견보고는 없지만, 구석기에 대한 안목이 고고학 종사자 사이에 커짐을 반영하듯 전국 각지에서 꾸준한 발견보고가 이루어졌다. 또한 청동기시대나 역사시대 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오늘날 학계에 알려진 구석기 유적은 남한의 경우 아마도 수백 개소 이상 되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은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남북한을 통틀어 합해도 50개소 정도밖에 없었던 것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아직 만족하기 어려운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구석기시대에 대한 우리의 지식도 곧 많이 나아질 것이다.

[개괄]

우리 나라 구석기 유적 중, 그 연대에 대해 객관적 정보에 입각한 의심의 여지없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사례는 아직 없는 형편이다. 그 까닭은 대부분의 유적이 절대연대측정을 실시하기 어려운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퇴적층의 층위학적 평가를 위한 기초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구석기 유적의 연대에 대한 평가는 대개 석기의 형식이나 공반된 화석자료의 단편적 평가에 기초한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같은 유적을 두고도 연구자에 따라 서로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비롯한 여러 문제는 구석기고고학의 연구수준이 높아지면 점차 해결될 것이다.

개별 유적에 대한 연대평가가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구석기시대의 시대구분을 논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은 외국, 특히 서유럽의 정의를 차용해 구석기시대를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구석기시대를 세 시기로 구분하는 것 자체는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어떠한 유적을 어느 시기로 배정할 것인가 하는 일차적 문제와 더불어 시대와 시대의 구분 또는 연결의 근거가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로 볼 때, 확실한 것은 우리 나라의 구석기 자료는 세석인석핵(細石刃石核)을 지표유물로 하는 1만년 전대에 형성된 후기 유적군과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듯한 전기 유적군의 두 군으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 정도이다.

전기 유적군의 특징은 주먹도끼나 찍개를 비롯한 주로 규암이나 석영 원석으로 된 대형 자갈돌석기를 유물군 구성의 주요 성분으로 한다. 전기 유적군에 속하는 유적들은 매우 넓은 시간대에 걸쳐 만들어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전곡리 유적은 적어도 8만년 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해 2만년 전 무렵까지 계속 퇴적층이 쌓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 유적군에 속하는 유적들도 유사한 내용의 유물이 있는 경우에도 서로간 수백 또는 수천년 정도의 시간적 차이가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시간적 차이에 따른 유물군의 성격변화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후기 구석기시대동안의 문화변화양상에 대한 파악은 불가능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구석기고고학의 가장 중요한 연구과제는 유적 하나하나의 시간적 위치를 밝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유물군의 변화상을 정확히 평가해 그로부터 장구한 세월에 걸친 구석기시대 동안의 문화변화양상을 파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구분에 대한 의미있는 논의는 그러한 작업의 기초 위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다음의 주요한 발견의 내용을 살핌에 있어서는 종래와 같이 전기.중기.후기 구석기라는 시대별 제목을 다는 대신, 잠정적으로 전기 유적군과 후기 유적군으로 대별해 보겠다. 그러나 구석기 유적 중에서 연대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제한되기 때문에, 연구의 축적에 따라 새로운 시대구분과 평가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한편, 구석기 유적은 북한에서도 보고되고 있지만 출간된 자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고려해, 북한의 구석기 유적은 별도의 항목에서 약술하겠다.

전기 유적군

[임진강유역 구석기 유적군]

임진강과 그 지류인 한탄강유역에서는 전곡리 유적이 발견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이 지역은 높은 유적분포밀도와 이른바 아슐리안식 주먹도끼의 발견으로, 동아시아 구석기문화의 성격과 우리 나라 구석기 연구에도 중요한 곳이다.

주먹도끼는 전곡리 발견 이전까지는 동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으며, 현재까지도 극히 드물게 발견될 뿐이다. 전곡리 유적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됨과 더불어 구대륙의 구석기시대는 주먹도끼를 가진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이 있었다는 정설이 폐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강유역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유적은 모두 20곳 정도이다. 그 중 연천 전곡리 유적과 파주 주월리.가월리 유적은 각각 사적 제268호와 제389호로 지정되었다. 이 두 사적지를 비롯해 임진강유역 구석기 유적은 대부분 용암대지 위에 형성된 야외 유적으로 발견되고 있지만, 용암대지 밖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 중 전곡리, 연천 남계리와 원당리 유적과, 파주 주월리.가월리 유적에서는 발굴이 실시되었다. 특히, 전곡리 유적은 1979년에서 2000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0회 이상에 걸쳐 발굴되었다.

임진강유역의 구석기 유적에서는 주로 자갈돌 및 그로부터 얻어진 박편을 가공해 만든 주먹도끼, 가로날도끼, 찍개나 다각면원구를 비롯한 대형 석기, 긁개와 밀개를 비롯한 소형 석기가 다수 발견되었다.

유물의 외형은 주먹도끼가 말해 주듯 고졸한 양식이어서, 전곡리유적 발견 당시 이 유적의 연대가 30만년 전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 후 용암대지의 절대연대가 약 20∼30만년 전으로 밝혀지자, 이 연대를 바로 대입시키거나 또는 퇴적층이 2차 이상의 빙하기를 겪었다는 가정 하에 유적의 나이가 수십만년 전이라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 이들 유적의 나이는 그렇게 오래 될 수 없음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임진강유역 구석기 유적은 발굴에서 드러난 유적의 퇴적학적 성격이나 유물의 구성 및 용암대지의 형성에 대한 지질학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할 때, 용암분출 후 상당한 시기에 걸친 하천의 퇴적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유적이 형성된 시기문제와 관련해 전곡리 및 주월리.가월리 유적의 퇴적층 상부에서 2만4천년 전 무렵 일본에서 날아온 화산재 자료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들 유적이 적어도 2만년 전 무렵까지 계속 형성되었음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유적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서는 퇴적층의 토양학적 특성을 생각할 때, 8만년 전 무렵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양평 병산리 유적]

양평 병산리 유적은 1990년대에 들어와 알려졌으며, 우리 나라에서 유물과 퇴적층의 성격이 가장 자세히 보고된 유적중의 하나이다. 이 곳에서도 유물은 주로 자갈돌 및 그로부터 얻은 박편을 이용해 만들었다. 또한 임진강유역을 비롯한 다른 전기 유적군에서 보는 바와 비슷한 여러 석기가 수습되었다. 그러나 주먹도끼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적은 남한강 하상의 상하운동으로 만들어진 하안단구 내의 퇴적층 속에 만들어졌다. 퇴적층은 임진강유역의 구석기 유적에서 보듯이 서로 색상을 달리 하는 여러 매의 고토양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나라 각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 곳에서도 고토양층 상면에는 기하학적 평면형태의 토양파열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발굴자는 이러한 흔적을 추운 기후 아래에서 형성된 것으로 해석해 유적이 적어도 2회 이상의 빙하기 환경을 겪으며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어 발굴자는 심해천공자료에서 얻어진 고기후 변화곡선에 드러난 기후순환주기를 대비해 유적의 연대가 마지막 간빙기에서 최후 빙하기에 걸칠 것으로 비정하였다. 따라서 최하부층의 연대는 13만년 전 무렵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결론은 비록 간접적 방법에 의한 연대추정이긴 하지만, 토양파열이 기후적 요인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신빙성이 높은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 나라 고토양층 내의 토양파열 흔적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확실한 결론이 얻어지지 않았으며 독립적인 절대연대자료도 얻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유적의 연대에 대해서는 추후 논의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기타 유적]

기존에 널리 알려진 구석기 유적 중, 전기구석기 유적이라고 주장된 대표적 유적으로는 공주 석장리 유적과 단양 도담리 금굴 유적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구석기 유적인 석장리 유적은 구석기시대 전기에서 후기에 걸쳐 형성된 여러 개의 문화층을 갖고 있다고 주장되고 있다. 또한 금굴 유적의 아래층은 70만년 전의 문화층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석장리의 이른바 전기 및 중기 구석기시대 문화층에서 수습된 석기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비판적 생각을 하고 있으며, 퇴적층의 지질학적 성격도 의문시된다. 1994년 간행된 보고서에는 유적의 전 퇴적층이 플라이스토세 말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견이 발굴에 참가한 지질학자에 의해 제시되었다. 따라서 석장리는 후기 구석기 유적으로 불러야 할 듯하다.

금굴 유적의 경우, 석기에 대한 주관적 판단 이외에는 유적의 연대를 논할 근거가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수습유물 중에는 인공적으로 제작된 유물로 판단하기 힘든 것도 있다.

이 외에 널리 알려진 유적으로는 제천 점말 동굴 유적과 청원 두루봉 동굴 유적을 꼽을 수 있다. 점말 동굴의 경우, 수습된 뼈조각들이 인공적으로 제작되고 사용된 연모라는 주장이 있으나, 석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두루봉 유적에서는 일부 지점에서 규암제 자갈돌 석기가 발견되었으나, 지점과 지점 사이의 층서관계는 물론 개개 지점의 층위도 명확하지 않은 형편이다.

보다 최근에 발견된 유적으로서 전기 유적군으로 분류할 만한 유적으로는 동해안의 강릉시(옛 명주군) 심곡리 유적이나 동해시 발한동 유적을 비롯해 북한강 상류의 파로호 퇴수지구나 낙동강 유역인 남강댐 수몰지구 내에서 발견된 유적들을 대표로 들 수 있다. 파로호 퇴수지구에서는 풍부한 양과 질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남강댐 수몰지구에서는 전곡리에서 확인된 것과 같은 화산재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지점 외에도 지표조사나 시굴조사 과정에서 소량의 구석기시대 유물이 플라이스토세의 층에서 채집되었다는 보고는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보다 이른 시기의 구석기시대 유적이 존재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적이 열악한 퇴적환경 하에 놓여 있고 충분한 자연과학적 기초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어서, 아직 많은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후기 유적군

[석장리 유적]

공주 석장리 유적은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구석기유적으로서, 1964년 이래 수차의 발굴이 있었다. 발굴자는 석장리 유적에서 전기구석기시대에서 중기 및 후기구석기시대에 걸친 12개의 문화층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보아야 타당할 듯하며, 심지어 중석기시대의 유적일 가능성도 있다.

후기 구석기시대층에서는 20830 1880 및 30690 3000년전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가 얻어졌다. 발굴자에 따르면, 후기 구석기문화층은 제10.11.12층으로서, 각 층의 대표유물은 가파른 긁개와 찌르개(제10문화층), 흑운모.석영.편암제 찌르개와 긁개(제11문화층) 및 몸돌(제12문화층) 등이다.

많은 석기가 간접타격법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간접타격으로 떼어낸 돌날을 다시 가공해 여러 종류의 도구를 만들었다. 석장리에서 발견된 끝긁개.긁개.첨두기.조각칼.송곳 등의 석기는 우리 나라 후기 구석기의 전형적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조사자는 이러한 유물제작전통이 중국 동부나 몽고, 시베리아의 후기 구석기문화와 연관된다고 하였다.

[수양개 유적]

단양 애월리 수양개 유적은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구석기유적의 하나라고 할 만한 유적이다. 199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3년 이래 실시된 여러 차례의 발굴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들이 종별로 수백에서 수천 점 이상씩 채집되는 등, 수적으로 엄청난 양의 유물이 수습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발굴보고는 극히 소략해 유적의 성격과 유물군의 특징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유적은 2개 이상의 문화층으로 구성되었다고 여겨지며, 상당한 시간대에 걸쳐 석기제작장으로 사용된 유적인 듯하다. 유적에서 수습된 유물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석기제작과정을 잘 보여 주는 몸돌(석핵)이다. 수십 점 이상에 달하는 몸돌은 상이한 석기제작과정을 보여 주는 여러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 유적에서 발견된 소위 슴베찌르개가 서일본지역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과 유사하다는 이유에서 주목하고 있다.

[상무룡리 유적]

양구 상무룡리 유적은 평화의 댐 건설로 드러난 파로호 퇴수지구에서 확인되었다. 확인된 구석기 지점은 여러 곳으로서, 시대가 다른 유적이 함께 발견되었다.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우리 나라에서는 드물게도 다량의 흑요석제 석기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석기의 종류는 다양하며, 그 중에서도 긁개류가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주암댐 수몰지구 내 유적]

1986년부터 2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보성강유역의 전라남도 순천시(옛 승주군) 주암댐 수몰지구에서는 순천시 송광면과 보성군 문덕면의 여러 지점에서 구석기가 채집되었다.

흥미롭게도 이들 구석기 유적은 대부분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알려졌다. 이 중 구석기 발굴이 이루어진 곳은 송광면의 우산리 곡천 유적, 신평리 금평 유적과 덕산리 죽산 유적, 문덕면의 죽산리 유적과 송전리 유적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규암이나 석영제 석기들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호온펠스로 보이는 회록색조의 퇴적암계 변성암 원석을 가공해 만든 각종 소형 석기와 세석기류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원석의 사용례는 주암댐 수몰지구에서 처음 확인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알려지고 있다. 중요한 유물로는 각종 몸돌과 긁개류를 들 수 있다.

주암댐 수몰지구 밖에 위치한 보성강 상류역에서도 유사한 유적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옥과 유적의 예와도 같이 보성강의 모하천인 섬진강의 다른 지류역에서도 유사한 유적이 발견된다.

[옥과 유적 및 기타 유적]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일원에서는 여러 지점에서 구석기가 채집되고 있다. 1990년 주산리와 송전리 두 지점에서 소규모 발굴이 실시되었다. 발굴에서는 주암댐 수몰지구 내의 유적에서 알려진 유물과 혹사한 것들이 채집되었다. 특히, 얇은 박편을 몸돌의 원재료로 이용한 보기 드문 유물도 수습되었다.

이상 서술한 후기 유적군의 실연대와 관련해서는 석장리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 외에는 절대연대측정치가 없다. 따라서 유적의 나이는 유물군의 특징을 이웃 지역에서 알려진 내용과 비교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중요한 사항은 후기 유적군에 속하는 유적에서는 이웃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세석인석핵(細石刃石核)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세석인석핵을 반출하는 유적에 대한 이웃 지역의 연구성과를 감안할 때, 대체로 후기 유적군은 1만 5,000년 전을 전후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서 발굴이 실시된 유적에는 홍천 하화계리 유적, 거창 임불리 유적, 부산 해운대유적, 보성 죽산리 유적과 밀양 고례리 유적이 있다. 또한 의정부 민락동 유적이나 공주 하봉리 유적과도 같이 다른 시기의 유적조사과정에서 소량의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채집되거나 문화층이 확인된 사례도 몇몇 있다.

하화계리 유적과 임불리 유적의 발굴자들은 이 두 유적을 중석기시대 유적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석기시대임을 확인시켜 줄만한 증거는 제시되지 못하였다. 퇴적층의 성격이나 유물의 특징을 감안할 때, 다른 후기 유적군에 속하는 유적들과 비슷한 시기로 생각된다.

해운대 택지개발지구 내에서 확인된 구석기 유적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형성되었지만, 대부분의 유물은 심하게 풍화된 상태로 채집되어 그 내용을 알기 힘든 형편이다.

보성 죽산리 유적은 앞으로 우리 나라 남부지방의 구석기 편년을 확립함에 있어 표준유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중요한 유적이다. 발굴중간발표에 따르면, 확실한 후기 구석기층 아래쪽과 위쪽으로는 보다 이른 시기와 늦은 시기의 문화층이 있다고 하며, 4m 이상의 퇴적층에서 시기를 달리하는 여러 문화층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들은 원석이용양식이나 석기제작기법 및 그 형태에 있어서 매우 닮았다. 더구나 상무룡리, 하화계리, 민락동 및 하봉리 유적에서 채집한 흑요석 석기의 성분분석 결과, 모두 동일한 원산지로부터 얻은 원석일 가능성이 큼이 밝혀졌다.

이것은 후기 구석기시대에 이미 오늘날의 양구·홍천·의정부·공주에 해당하는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걸쳐 생활에 극히 중요한 자원이 이동하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당시 한반도에 살던 수렵채집집단은 매우 넓은 범위에 걸친 이동생활을 했거나 또는 각 지역을 점유하던 집단은 밀접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나라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중국·시베리아·일본 등 이웃한 지역과 여러 점에서 높은 유사성을 보여준다는 점을 볼 때, 이 시기의 동북아시아에는 넓은 범위에 걸친 모종의 사회문화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구석기 유적

굴포리 유적의 발견 이래, 북한에서는 구석기 연구를 북한정권의 민족사적 정통성 확립과 관계된 중요한 과제로 생각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구석기 유적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1966년에서 1970년에 걸쳐 40∼60만년 전의 유적이라고 보고된 상원 검은모루 동굴이 조사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덕천 승리산, 평양 대현동과 만달리를 비롯한 여러 동굴 유적에서 구석기시대의 석기나 인골 혹은 동물뼈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심지어 검은모루 동굴에 인접한 용곡 동굴에서는 50만년 전의 인골을 찾았다는 주장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후, 용곡 동굴의 연대는 대폭 하향 수정되었지만, 검은모루 동굴의 연대는 70만년 전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따라서 평양 일대가 70만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한민족이 발원한 중심지라는 주체사관적 민족기원론이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검은모루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유물이 인공의 산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여러 정황증거로 보아, 이것은 석기라기보다는 동굴의 붕괴 등과 같은 자연현상에 의해 형성된 의사(疑似)석기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즉, 평양 일대에 70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북한의 주장은 문제가 많다.

그러나 인골이 발견된 승리산과 대현동 및 만달리 동굴은 우리 나라의 구석기시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되고 있으며, 이 일대의 석회암 동굴에서 앞으로 더욱 많은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의 정확한 나이나 문화적 특징에 대해서는 제시된 자료의 미비로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만달리 동굴에서는 쐐기형석핵이 발견된 만큼 이 유적이 후기 구석기시대 말에 해당되는 것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한국 구석기문화 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한국사론 12(국사편찬위원회 편, 1983), 한국의 구석기문화 Ⅱ(李隆助, 탐구당, 1984), 한국 구석기 연구의 길잡이(孫寶基, 연세대학교출판부, 1988), 상무룡리(강원대학교박물관, 1989), 북한의 선사고고학 1-구석기시대와 문화-(韓昌均, 白山文化, 1990), 주암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보고서 Ⅶ(전남대학교박물관.전라남도, 1990), 한국의 구석기문화(崔茂藏, 集文堂, 1990), 양평병산리유적(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 1992), 보성강.한탄강유역 구석기유적 발굴조사보고서(文化財硏究所 編, 1994), 議政府民樂洞遺蹟(서울대학교박물관, 1996), 한국사 2(국사편찬위원회, 1997), 한국의 구석기문화(孫寶基, 百濟硏究 3, 1972), 구석기시대 혈거유적에 대하여(鄭永和, 文化人類學 6, 1974), 신발견 구석기유적 소개(李鮮馥, 孫寶基博士停年紀念考古人類學論叢, 1988), 한반도 홍적세 환경과 구석기문화(裵基東, 韓國上古史學報 2, 1989), 구석기시대 연구사(裵基東, 國史館論叢 19, 1990), 북한 구석기문화 연구 현황(최무장, 金正起博士華甲紀念論叢, 1990), 남한강 상류의 구석기유적 조사 예보(한창균.장명수.신숙정, 박물관기요 5, 1989), 북한의 구석기연구 성과와 분석(李隆助, 國史館論叢 29, 1991), 한국의 구석기문화(박영철, 韓國考古學報 28, 1992), 전남의 구석기문화(李起吉, 東方學誌 81, 1993), 북한강유역의 구.중석기시대 문화(鄕土서울 54, 1994), 한국구석기문화연구의 제문제(鄭永和, 人文硏究 16, 영남대학교, 1994), 우리의 구석기 연구 반세기(李隆助, 韓國學報 81, 1995), 임진강유역 구석기유적의 연대에 대하여(李鮮馥, 韓國考古學報 34, 1996), 보성강 유역에서 새로 찾은 구석기 유적(李起吉, 韓國考古學報 37, 1997), 구석기 고고학의 편년과 시간층위 확립을 위한 가설(李鮮馥, 韓國考古學報 42, 2000).

<이선복(李鮮馥)>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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