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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6 (금)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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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470      
[국가] 미얀마 (두산)
미얀마 Myanmar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 대륙 사이에 있는 나라.

I. 개관

위치 : 동남아시아, 중국 남방 인도차이나 반도 서북부
면적 : 67만 6577㎢
인구 : 4251만 1000명(2003)
인구밀도 : 62.8명/㎢(2003)
수도 : 양곤(Yangon)
정체 : 군사정부
공용어 : 미얀마어
통화 : 챠트(Kyat)
환율 : 6.20K = 1$(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 2,610$(2003)
나라꽃 : 사리쌍수

면적은 67만 6577㎢, 인구는 4251만 1000명(2003)이다. 인구밀도는 62.8명/㎢(2003)이다. 정식명칭은 미얀마연방(Union of Myanmar)이다. 수도는 양곤이며 버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옛 이름은 버마(Burma)이다. 서쪽은 인도양에 면하며, 북동쪽은 중국, 동쪽은 타이, 라오스, 북서쪽은 인도에 접한다. 1989년 국명이 버마에서 미얀마로 개칭되었다.

II. 자연

미얀마는 일반적으로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세로서 북위 16~28°에 걸쳐 남북으로 긴 마름모꼴을 이루고, 테나세림 지구가 말레이 반도의 북서부를 차지하여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최북부에는 빙하의 5,000m 이상의 높은 산이 있는 산지이고, 여기서 남서쪽으로 향하여 호상(弧狀)으로 뻗은 서부 산지, 남쪽으로 달리는 동부 산지가 있어, 중앙저지의 세 방향을 둘러싸고 있다. 파므카이 구릉, 친 구릉, 아라칸산맥으로 이어지는 서부산맥은 제3기 습곡지대에 속하며, 그 연장부는 안다만·니코바르의 두 제도를 거쳐 인도네시아 열도로 계속된다.

동부산지 중앙부에 있는 해발고도 900∼1,200m의 샨 고원은 오래 된 결정암과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살윈·이라와디 두 수계(水系)의 하천이 남북으로 뻗은 산맥군 사이에 많은 분지를 형성한다. 중앙저지는 제3기, 제4기의 두꺼운 퇴적층으로 뒤덮여 있고, 이라와디강(江)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어귀에 대 삼각주 평야를 형성한다.

페구산맥 동쪽에는 시탕강 계곡이 있다. 살윈강은 샨 고원에 깊은 골짜기를 파며, 어귀에 삼각주 평야를 형성한다. 산지를 배후에 둔 테나세림 해안 앞바다에는 메르귀 제도의 섬들이 산재한다. 국토의 대부분이 북회귀선 이남에 위치하고, 여름에 계절풍이 발달하는 벵골만에 면하여 열대 계절풍 기후가 지배적이며, 원식생(原植生)은 상록 관엽수림 또는 건기에 낙엽하는 열대 우록림(雨綠林)이다. 북부의 카친 산지와 동부의 샨 고원은 고도가 높아서 온대적이며, 겨울에 눈과 서리를 볼 수 있는 곳도 있다.

이라와디강 중류의 상부(上部) 미얀마는 아라칸산맥의 배후에 있기 때문에 강우가 적어, 사바나의 경관을 보이는 건조지역이다. 이 두 지역을 제외하면, 기온은 1년 내내 높고, 대량의 비가 여름에 집중적으로 내린다. 연강수량은 산을 배후에 두고 해안에 위치하는 시트웨와 모울메인에서 약 5,000mm에 이르고(80%가 6∼9월), 이라와디강 삼각주에서 2,000∼2,500mm, 바다에서 먼 샨주에서 1,200mm 정도이다. 이라와디강 중류 유역은 800mm 이하, 파코쿠는 620mm밖에 안 되어, 아카시아 등 건조기후에 강한 수목만이 자란다. 우록림에서 자라는 티크·핀카드 등 단단한 수목은 재목용으로 벌채되며, 대나무는 종류가 많고 용도가 다양하다.

III. 주민

미얀마의 중심 민족은 버마족(70%)이고, 나머지는 여러 소수민족으로 나뉘어 있어, 이 민족구성의 복잡성이 미얀마 정치의 중요 문제의 하나이다. 소수민족은 전인구의 25%를 차지하며, 예로부터 미얀마에서 거주했던 종족과 최근의 1세기 동안 미얀마로 유입한 종족이 있다. 전자(前者)로는 샨족(약 190만)·카렌족(약 220만)·카친족(약 110만)·친족(약 60만)·몬족 등이 있는데, 각기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다. 샨족은 샨 고원에, 카렌족은 타이와의 국경 산악지대와 이라와디강 삼각주 지역에, 카친족은 북쪽 고지에, 친족은 인도와의 국경 방면에 살고 있다.

몬족은 중세까지 이라와디·시탕 두 강의 하류 유역을 지배하였던 민족으로 페구 등의 성시(城市)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으나 중세 이후에 남하해 온 버마족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인구도 감소하여, 지금은 물메인 지방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근래에 미얀마로 유입한 민족으로는 인도인·중국인이 있는데,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19세기 후반부터 유입하기 시작하여 상공업·서비스업 종사자, 농업 노동자, 금융업자, 지주 등이 되었다.

특히 인도인은 최근까지 백수십 만을 헤아리며, 미얀마 경제의 중심세력이었으나, 1962년 성립된 네윈 군정의 미얀마화정책으로 수십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그밖에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거주한다. 중심 민족인 버마족은 몽골티베트계 민족으로, 10세기경 북쪽에서 남하하여 이라와디 중류 유역에 세력을 뻗치고, 18세기 중엽에는 미얀마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영국지배하에서는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지배민족이 되었다. 주요거주지는 이라와디 중·하류 유역과 시탕강 유역이며, 언어는 버마어, 문자는 남인도계의 파리 문자를 쓴다.

IV. 역사

미얀마는 중국의 문헌에 예로부터 탄(a:후한대), 표(驃:당대), 포감(蒲甘:송대), 면(緬:원대), 면전(緬甸:명·청대)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이 나라의 역사는 현재 전국의 산야에 살고 있는 여러 종족의 이동의 역사이다. 서력기원의 시초에는 몬족이 시탕강 하류 지방에 정착하고, 인도로부터 농업기술과 힌두교·불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미얀마 최초의 강력한 왕조는 8세기에 이라와디강 하류의 프롬을 수도로 정했던 표족(驃族) 왕조로, 9세기에 멸망하고, 표족도 사라졌다.

11세기가 되면서 이라와디강 중류 유역에 버마족의 파간 왕조가 일어나, 남쪽의 몬족 지대, 샨 고원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는 1287년 몽골군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후 미얀마는 타이계의 여러 종족(샨족·타이족)의 침입 등으로 어지러웠으나, 16세기가 되어 시탕강 중류의 타웅구에 버마족의 퉁구 왕조가 일어나, 1560년경 현재의 미얀마령을 넘어 타이 북부와 라오스까지도 판도에 넣고 1569년에는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까지도 공략하였다. 그러나 이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정(外征)과 내전으로 피폐하였으며, 17세기에는 삼각주지대의 반란으로 타웅구를 버리고 이라와디강 중류 유역의 아바로 천도하였으나, 1752년 이곳까지 북상해온 몬족에게 멸망당하였다.

얼마 후 버마족은 영웅 알라웅파야 밑에 집결하여 몬족을 격파하고, 1755년 이라와디강 삼각주로 진출하여 몬족을 추방하였다. 이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다고웅이라 불리던 도시가 랑군(‘전쟁의 끝’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양곤)으로 개명되었다. 몬족의 최후 거점인 페구는 1757년 미얀마군에 점령되고, 그후 몬족은 완전히 세력을 잃었다.

알라웅파야 왕조는 1767년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를 재차 정복하는 등 강력해졌으나, 19세기에 들어와 아시아로 진출한 영국과 충돌하게 되어 결국 1824년 싸움으로 물메인 지방을, 1852년 싸움으로 삼각주 전역을 잃었으며, 1885년 마지막 싸움에 패함으로써 붕괴되고, 미얀마 전영토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령 시대의 미얀마는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 경영의 거점이 되었다. 영국은 특히 인도방면에 대한 식량 공급지로서 이라와디·시탕의 삼각주 지대에 주목하여 이곳에 인도인을 이입하고, 또 버마족·카렌족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개발하였다. 그 결과 이라와디 삼각주는 1930년대에 세계 최대의 수출용 벼농사지대로 발전하여, 미얀마는 세계 제1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영국은 또 미얀마에서 티크재를 벌채하여 유럽으로 수출하였다. 석유·텅스텐 광석 등도 개발되었다. 영국은 미얀마 경영의 중심을 랑군에 두고 그곳에 인도인 상인과 기업가를 초치하고, 공무원 등도 인도인을 채용하였으며, 또 구르카족·카렌족 등 비(非)버마족을 모집하여 군대를 만들어 미얀마를 다스렸다.

샨족·카렌족·카친족 등은 버마족과 구별되어 실질적으로는 족장에 의한 자치가 인정되는 등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의 미얀마 통치와, 특히 인도인에 의한 경제 지배는 버마족의 반감을 고조시켜 버마 민족주의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격렬해졌다. 이 운동 중 아웅산과 우누 등이 이끄는 그룹이 두각을 나타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얀마는 일본에 점령되었으나, 여러 정치세력이 대동단결하여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FL)을 결성하고, 영국군에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전쟁 후 아웅산과 우누 등은 영국과 교섭 끝에 마침내 1948년 1월 4일 버마 연방을 탄생시키고, 신정권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신정권하에서도 미얀마는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즉 버마족 중심의 새 정부에 카렌족·샨족 등 소수민족이 반발하여 제각기 독립·자결을 요구하였고, 또 신정권을 탄생시킨 버마족 독립운동가 중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신정권 주류파의 친서방적 노선을 반대한 데서 새 정부와 그 반대자들의 대립이 악화하여 결국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내전은 1946년 7월 공산당 과격파 ‘적기(赤旗) 공산당’의 반란시 이미 시작되었으나, 1948년 공산당 다수파(미얀마 공산당, 속칭 백기 공산당)가 반란을 일으키고, 1949년 카렌족이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전은 확대되어, 미얀마 신정권은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나 그후 미국·영국 등의 원조로 미얀마 정부는 정상을 되찾았고, 이때 총사령관 네윈이 이끄는 미얀마 정부군은 점차 그 지배력을 확대해갔다. 1954년경 반정부군은 게릴라적 규모로 축소되고, 공산계는 이라와디 삼각주와 페구산맥으로, 카렌족은 삼각주와 타이 국경 방면의 산악지대로 분산하였다.

우누가 이끄는 미얀마 정부는 이러한 국내 안정을 배경으로 하여 복지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국영공장의 건설, 외국계 대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등을 통해서 경제개발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게릴라전은 계속되고, 국가지도형 경제개발은 잘 진전되지 않았으며, 농촌에서의 토지개혁도 제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56년경부터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서, 미얀마의 정국은 다시 불안해졌다.

거기에 반정부군측이 단결을 강화하여, 1959년 미얀마 공산당과 카렌족 좌파와의 제휴가 이루어져 내전이 다시 확대되고, 샨족·카친족 등의 민족자결 요구도 높아졌으며, 그중에는 무장 반란부대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우누 정부는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여당마저 분열하는 등, 미얀마 정계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커다란 혼란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중에 1962년 3월 2일 장군 네윈이 이끄는 미얀마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정당활동을 정지시키고, 총리 우누 등 많은 정치인을 체포함으로써 미얀마는 군정에 들어갔다.

네윈 군정은 그 기본원칙으로서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도입, 비(非)버마족 자본의 국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국영 경제기구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계획당을 창설, 기타 모든 정당을 불법화함으로써 1당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미얀마식 사회주의 건설 기간이 끝난 1974년 1월 1당 체제에 내각책임제를 혼합한 헌법을 공포하고, 그해 3월에 민정에 이양하면서 네윈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8년 1월 사회주의계획당만 입후보한 가운데 실시된 총선에서 구성된 새 국회는 네윈을 다시 대통령 겸 국가평의희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1980년 5월 대통령 네윈은 대은사령(大恩赦令)을 내려 정치범 등 4,000명을 석방하고 우누 전 총리는 망명지인 인도로부터 11년 만에 귀국하였다.

1981년 8월 대통령 네윈이 건강상의 이유 및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사의를 표명한 데 이어 총선거를 거쳐 11월에 개최된 미얀마 인민의희에서 산유 국가평의회 서기장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0년대 말까지 경제적으로 가난한 대중은 반정부 폭동을 일으켰으나 군의 폭력으로 진압되었다. 1988년 권력을 장악한 군부정권은 이전의 모든 기구를 폐지하고,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 의장이 국가 수반이 되었다. 1990년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야당 민주국민연맹(NLD)이 총선에서 승리했으나 여전히 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

V. 정치

1974년 1월에 공포된 미얀마의 헌법은 1988년 9월 군사정권에 의하여 폐지되었고 1993년부터 초안이 새롭게 제정되고 있다. 1988년 전국적인 민주화 요구 데모에 의해 26년간 계속된 사회주의정권이 붕괴했으나 군대가 시위를 진압하면서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를 조직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1990년 의회구성을 위한 총선 결과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국민연맹(NLD)이 압승하였으나 당시 군사정부는 총선 무효를 선언하였다. 2000년 10월부터 정부와 아웅산 수지 사이에 직접 대화가 개시되어 정부가 정치범 170여 명을 석방함과 함께 NLD 지부 9곳의 활동 재개를 인정하고 있다.

1992년부터 탄쉐(Than Shwe)가 행정부의 수반인 총리를 연임하고 있으며 1997년 SLORC를 개편하여 국가평화 발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민주통일당은 군사정부에 1998년 8월까지 의회를 소집토록 요구했으나 묵살되자 독자적인 의회소집과 새 정부 구성을 선언하였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정원은 485석이고,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그러나 현재는 의회 부재의 상태이다.

외교면으로는 비동맹중립정책을 고수하여 UN(United Nations:국제연합)과 콜롬보계획 외의 국제회의 참가를 기피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벗어나고자 1977년 적극적인 외국원조를 받아들일 것을 결정하고 쇄국주의로부터 큰 전환을 이루었다.

특히 중국과는 미얀마 공산당 문제로 미묘한 관계에 있으나 기본적인 선린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1978년 1월과 11월의 중국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의 방문에 이어 1979년 7월 총리 카가 중국을 방문하고 1억 원(元)의 경제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9월에는 소련 등의 영향이 강해 비동맹의 이념에 어긋난다고 하여 비동맹회의에서 탈퇴하였다. 1981년 1월에는 중국 총리 자오쯔양[趙紫陽]이 미얀마를 방문하였다.

1980년 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캄보디아 정책을 지지하였으며, 1997년 7월에 가입하였다. 대외적으로 군사동맹체결을 거부하고 원칙적으로 외국에 군사 기지를 제공하지 않지만 중국에 한해 대코코도를 임대하고 있다. 병역은 지원제이며 1996~1997년의 국방예산은 28억 8000달러이다. 1998년 현재 총 병력은 약 39만 명으로 함정 150척, 항공기 200여 대가 있다.

VI. 경제

식민지시대에 미얀마의 광산·임산 자원의 개발, 운수·무역은 영국인이, 중소 규모의 상업과 유통은 중국인과 인도인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라와디강 삼각주의 벼농사지대에는 인도인 계절 노동자가 대량으로 유입하고, 하부(下部) 미얀마 농지의 1/3은 인도인 체티야(금융업 카스트)와 영국인을 포함하는 부재지주가 소유하고 있었다.

독립 후 정부는 외국자본을 추방하고, 경제의 미얀마인화정책을 취하였다. 특히 네윈이 집권한 이후는 미얀마식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비(非)미얀마인의 자본을 중심으로 국유화하여, 국영 경제구조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국영 경제구조는 처음부터 여러 요인으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또 국내 치안의 혼란과 외국원조의 도입 억제 등으로 경제는 장기적인 침체 상태에 빠졌다.

1962∼1976년의 국내총생산 신장률은 연평균 3%선이고, 공업생산의 신장률은 불과 1.1%에 머물렀다. 또한 정부가 저임금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단행한 저미가(低米價) 정책과 농산물 거래의 통제가 농민의 생산의욕을 저하시켰다. 1962년 이전에 연평균 200만t 이상이었던 쌀 수출이 1970년대에는 50만t으로 격감하였다. 수출 총액에서 차지하는 쌀의 비율이 70%였으므로, 수출 규모자체도 감소하였다. 거기에 정부가 균형무역을 고수하여 엄격한 수입제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원자재 및 설비 부족이라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어, 만성적인 물자 부족, 실업 증가가 계속되었으며, 이를 보완하는 것으로 암시장과 밀수가 성행하였다.

1974년 민정이양을 계기로, 이러한 악순환을 지양시키기 위해 먼저 외국원조 도입을 단행하였다. 1972년까지 연평균 2000만 달러 정도였던 외국원조가 1975년 이후에는 1억 달러가 넘었고, 국영공업이 회복할 징조를 보였다. 1977∼1978년의 경제성장률은 6.4%로, 네윈 정권이 들어선 이래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나라의 기본경제인 쌀농사는 저미가와 공출제도로 인하여 여전히 생산의욕이 저하되어, 쌀 수출은 증가하지 않고 있다. 쌀 외의 수출품은 목재(주로 티크재)·콩·수산물·보석 등이며, 해마다 상당량이 밀수되고 있다.

석유는 1976년부터 자급하고 있으며, 소량이지만 수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구리·아연 등 수출이 가능한 광물자원은 아직 미개발이어서, 목재·수산자원 등과 함께 장래의 개발이 기대된다. 공업화는 특히 뒤떨어져 있어, 민간 중소공업은 원자재 부족과 거래 제한 등으로 거의 유휴상태에 머물러 있고, 국영공업의 조업율도 1978년 겨우 평균 70%이다. 1988년부터 경제개혁을 시작하였으며,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탈피하고 개방경제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경제 개혁을 위해 수출장려, 사회간접자본 확충, 농업 자유화를 추진하였다.

1986∼1989년 사이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지만, 개혁의 결과로 국내총생산(GDP)이 5.4%(1990)에서 6.7%(1991)로 성장하였고, 1991∼1992년 홍수로 인하여 농업부문에 타격을 받았지만 0.6% 성장하였다. 그후 9.7%(1993), 6.0%(1994), 7.5%(1995), 9.8%(1996)의 성장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외국인 투자와 수출의 확대에 힘입은 것이다. 현재 석유화학·종이펄프·식품공업에 특히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에는 챠트화 환율의 급격한 평가절하로 인한 급격한 인플레, 서방의 경제제재 조치로 인한 외국인 투자부진 및 심각한 외화부족 등으로 국민경제가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2000년 실질경제성장률은 6.2%이고 수출은 13억 8600만 달러, 수입은 22억 2900만 달러이다.

1. 농림수산업

미얀마의 농업은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총 노동인구의 63%가 종사하고 있다. 토지개혁을 1953년부터 단행하여, 일정한 보유한도를 넘는 농지는 수용되어 토지를 갖지 않은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미얀마는 매년 300만t 이상의 쌀을 수출하였으나, 세계대전과 유통구조의 혼란, 농민의 생산의욕 저하로 수출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었다.

하부 미얀마의 수출용 수전단작(水田單作) 농업에 대하여 상부 미얀마에서는 버마족의 전통적 농업이 행하여진다. 농지는 운하와 저수지에 의해 관개되며, 쌀·콩류·깨·땅콩 등의 식량작물, 목화·담배 등 다양한 작물이 재배된다.

샨 고원의 구릉지에서는 차와 각종 과일, 테나세림 연안 저지에서는 코코야자와 고무가 생산되고 최근에는 황마 생산도 늘고 있다. 삼림은 국토면적의 48%를 차지하며, 중국·인도에 이어 아시아 제3위의 산림자원 보유국이다. 중요한 삼림은 독립 전부터 국유화되어 티크·핀카드 등 견목류(堅木類)가 영국계 기업에 의해 벌채되었으며, 가치 있는 수출품이었다. 현재는 국가목재청이 벌채·반출·제재·판매를 독점하고 있다.

수산업은 하천·호소·운하 등에서의 내수면 어업이 중요하다. 수산물은 염건어(鹽乾魚)나 어장(魚醬)으로 처리되며, 미얀마인의 식생활에 불가결한 것이지만 대형 어선과 냉장시설이 부족하여 국내소비량을 충족시킬 정도이다. 어업의 수출 기여 비중은 점차 높아져왔으나 주종 수출품인 새우의 상당량이 밀수출로 인접국(주로 타이)에 판매되고 있어 정부수입이 감소되고 있다.

2. 광공업

미얀마의 중요한 광산자원은 샨주 북부의 납과 아연, 샨주 서부에서 테나세림 지방에 걸친 주석과 텅스텐이며, 광산은 1962년부터 석유광물개발공사가 경영하고 있다. 석탄은 친드윈강 유역의 칼레와에서 채굴되고, 철광은 샨주 각지에 매장되어 있으나 본격적인 개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예난자웅과 차우크를 중심으로 하는 이라와디강 중류 유역은 원유의 매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독립 전에는 유력한 수출품이었다.

유전은 전쟁으로 막대한 손상을 입었으나, 국영으로 복구·가동되고 있다. 그러나 산유량은 독립 전 수준의 절반밖에 안 된다. 공업은 독립 전에는 정미(精米)와 제재 외에는 미미하였다. 산업 국유화 정책으로 외국계 기업이 접수되고 국영공장이 신설되어, 양곤을 비롯한 공업지역이 형성되었다. 정미·제재·정유 외에 주요업종으로 설탕·식용유·담배·맥주·홍차 등의 식품공업, 철강·농업기계·펌프·면직물·견·화학섬유·마대·약품·세제·시멘트 등의 각 공업이 있다.

3. 교통

미얀마는 이라와디강어귀에서 1,400km 상류에 있는 바모까지 흘수 1.2m의 기선이 항행할 수 있고, 삼각주지대에 3,000km, 친드윈강에 630km의 가항(可航) 수로가 있다. 수입품의 85%가 양곤항으로 들어온다. 수로 총연장은 1만 2800km이다. 철도는 양곤∼만달레이 620km, 만달레이∼미치나 540km의 간선을 비롯하여 전국에 3,991km(1997)의 노선이 있다. 주요도로의 총길이는 약 2만 8200km(1996)이고, 그중 1만 3,700km만이 우기에 통행이 가능하며 3,440km만이 포장도로이다. 항공은 국영기업이 양곤의 밍갈라돈 공항을 중심으로 국내·국제의 각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VII. 사회

미얀마는 소승불교국으로 출생부터 사망까지 불교가 미얀마인의 사상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며 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부모들은 작명을 위해 승려와 상의하고 시골 어린이들은 정식 정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승려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수업을 한다. 최근 들어 불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에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국민들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무료진료 혜택을 받고 있으나 의료시설은 매우 낙후되어 있고 약품도 부족하다. 지방이나 밀림지대에는 아직도 말라리아가 남아 있으며 우기중에는 이질성 설사 널리 만연되는 등 보건분야 문제점이 심각히 대두되고 있다.

언론매체는 영자 일간지 1개, 미얀마어(語)로 발간되는 일간지 4개, 잡지 1개가 있으며 모든 저서나 발간물은 정부의 검열을 받은 후에 발간·배포할 수 있다. 텔레비전·라디오 방송 채널은 각각 하나이며 양곤에서 전국에 송신한다. 학교교육은 전 교육과정이 무료로 실시되며 의무교육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수용능력 부족 등으로 미흡한 실정이다. 문맹률은 20%이다. 학제는 유치원 1년, 초등학교 4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2년, 대학교 4/7년(의학 7년, 공학 6년 등)으로 이루어진다.

VIII. 문화

미얀마는 고대에 인도·중국문화권과 접촉이 있었으나 중국문화의 영향은 미미한 편이고 인도의 영향이 더욱 크다.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전통적으로 불교 문화가 중심이며 국교는 아니지만 여전히 정부의 업무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서양 문화 유입으로 영국과 프랑스식 예술도 발달하였다. 소승불교국으로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 사원과 파고다는 황금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미얀마 남자는 누구나 사원에 들어가 수도승 생활을 거치며 이곳에서 공부를 한다.

일생에 1번 불문(佛門)에 들어가는 것을 명예로 여기고 있다. 미얀마인들은 대부분이 불교도이면서 굿을 많이 한다. 부처를 사랑하고 굿에 등장하는 신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 영웅신앙이라 할 수 있는 나추트 신앙이 민중생활에 널리 뿌리박고 있다. 오랫동안의 식민지 경험과 그 이전의 오래된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미얀마인은 전통을 준수하고 민족적 긍지가 높으며, 지금도 대부분의 국민이 민속 의상(롱지)을 착용하고 서양 문명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소수민족도 제각기 독자적인 종교·언어·전통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IX. 대한관계

미얀마는 한국과 1962년 영사 관계를 맺은 이후 1975년 5월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양국간에 체결된 협약은 무역협정(1964), 체신협정(1965), 통신교환협정(1966), 뉴스교환협정(1972), 항공운수협정(1976), 이중과세방지협정(2000, 가서명) 등이다. 또, 1975년 10월 양곤 무역관이 설치되어 시장개척·입찰정보 수집 등 무역증진을 위한 가교역을 맡고 있다. 1983년 10월 대통령 전두환의 미얀마 아웅산 묘소(墓所) 방문 때 북한의 테러로 수행원 17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그해 11월 북한과는 단교하였다.

1996년에 통신부 장관 우소에 따, 1999년 외무장관 우 윈 아웅, 2000년 농업장관 틴, 상무장관 피 소네가 방한하였고, 1998년 농림부장관 김성훈, 1999년 산림청장 김동근이 미얀마를 방문하였다. 2000년 현재 대(對) 한국 수입은 2억 8931만 6000달러이고, 수출은 2268만 6000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경유, 강관, 봉제용 원·부자재, 섬유기계, 종이·판지, 석유화학제품, 철강제품, 전기·전자제품 등이고, 수출품은 농산품, 수산품 등이다. 2001년 10월 현재 교민(대부분 체류자)수는 약 700명이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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