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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6 (금)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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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599      
[국가] 미얀마 (한메)
미얀마 Myanmar

인도차이나반도 서쪽에 있는 연방공화국.

정식명칭은 미얀마연방. 버마(Burma)로 알려져 있다. 미얀마연방사회주의공화국에서 1988년 미얀마연방으로 개칭되었다. 면적 67만 6552㎢. 인구 4682만 2000(1997). 수도는 양곤(Yangon;랑군). 주요 언어로는 버마어를 사용하고, 통화는 키야트(Kyat)이다. 동쪽은 타이·라오스, 북동쪽은 중국, 서쪽은 인도·방글라데시와 접한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국민의 85%가 불교도이다.

[자연]

국토는 북위 9˚36′~28˚29′, 동경 92˚ 10′~101˚9′에 위치하며 전체의 모양은 마름모꼴에 가깝다. 동서의 나비는 최대 900㎞, 남북의길이는 300㎞이나, 남단에서 가느다란 띠가 다시 800㎞에 걸쳐 남쪽의 말레이반도 쪽으로 뻗어 있다. 지세는 북고남저(北高南低)로, 서쪽에서 뻗어나은 저지 히말라야가 미얀마 북단에서 분기해 하나는 나가구릉·친구릉·아라칸산맥을 이루며, 인도·방글라데시 사이를 남으로 달리고, 또 하나는 중국·라오스·타이 사이에서 샨대지·테나세림산맥을 형성하여 말레이반도로 이어지고 있다.

히말라야산맥으로 이어지는 북부의 카친산지에는 카카보라지산 등 만년설에 덮여 있는 6000m 정도의 높은 산들이 있다. 주요하천은 이라와디강·시탕강·친드윈강·살윈강 등으로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이라와디강은 길이 2400㎞, 유역면적 41만㎢에 이르는 큰 강으로, 국토의 중앙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하류에서 바세인 등 9개의 분류(分流)가 되어 마르타반만으로 들어간다. 하류의 저습지대인 이라와디델타는 면적 3만 5000㎢로 미얀마 최대의 쌀 생산지이다.

중앙에서 합류하는 친드윈강은 이라와디강 최대의 지류로, 북서쪽의 나가구릉에서 발원한다. 시탕강은 샨대지에서 발원하여 샨대지와 페구산맥 사이의 좁은 평야를 흘러 마르타반만으로 들어간다. 살윈강은 티베트고원에서 시작해서 윈난〔雲南〕을 경유하여 샨대지에서 카야·카렌 양주(兩州)를 2800㎞나 관류하면서 마르타반만으로 흘러들며, 목재의 반출에 이용되고 있다.

중부와 남부는 열대, 북부는 온대에 속해서 남북의 기후차가 심하지만, 전체적으로 고온다습하다. 남서계절풍·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1년이 건계와 우계로 나뉘며, 우계는 5~10월, 건계는 11~4월이다. 연강수량은 중부의 건조지대는 600~800㎜로 적지만, 이라와디델타에서는 2500㎜, 아라칸·테나세림해안에서는 4000~5000㎜에 이른다.

우계의 비는 한국의 장마와는 달리 스콜성이다. 건계는 11~2월의 양계(凉季)와 3~4월의 서계(暑季;때로 우계로 들어가는 5월 말까지 계속된다)로 나뉜다. 양계에는 북서계절풍 때문에 강수량은 0에 가깝고, 하루의 최저기온은 양곤에서도 15℃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서계는 몹시 무더워, 내륙부의 건조지대에서는 한낮의 최고기온이 40℃를 넘는 일도 종종 있다. 식물은 약 7000종이 알려져 있는데, 생육지에 따라 온대산지림·상록열대강우림·유자총림(有刺叢林)·반(半)사막림 등으로 나누어진다.

[역사]

10세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는데, 기원후 수세기에 걸쳐 오스트로네시아계 몬족은 시탕강 하구지방에, 티베트―버마계의 퓨족은 이라와디강 중류지방에 정착해 벼농사를 바탕으로 사회를 발전시켜 작은 왕국을 건설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브라만교·불교 등 인도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버마족은 중국의 서부 내륙에서 이라와디강 중류로 남하하여 그 곳의 퓨족을 동화·흡수하고 849년 파간에 수도를 건설했다 한다. 아노야타왕(재위 1044~77) 때 하(下)버마의 몬족을 멸망시키고 국가제도를 정비했다. 이 파간왕조의 역대 왕은 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어 사원과 불탑을 많이 건설했다.

파간왕국이 1287년 중국 원(元)나라 쿠발라이 원정군의 침공으로 약화되자 버마·샨·몬의 각 민족이 대립항쟁을 되풀이하는 분열시대가 계속되다가, 타웅구왕조가 성립되어 16세기 중엽 영토를 확대하는 등 세력을 넓혔다. 1752년에는 몬족이 이를 멸망시켰고, 1757년에 알라웅파야왕이 상(上)버마와 하(下)버마를 통일하여 최후의 버마족왕국인 콘바웅왕조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프랑스에 이어 영국이 3번의 침공으로 1885년 왕국을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삼아 영국령 인도에 병합했다. 제 1 차세계대전 중 시작된 버마민족의 반영(反英)독립운동은 세계대공황 이후 젊은 지식층 사이로 확대되었다. 제 2 차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는데, 각 정치세력이 대동단결해 반(反)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을 결성, 그동안 적대시해 왔던 영국·인도군과 협력해 일본군을 물리쳤다.

전후 미얀마는 영국과 독립협정을 체결하여 1948년 1월 4일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독립투쟁의 주역이었던 아웅산이 독립 직전 암살되자, 독립 후 정당·민족집단 사이의 대립투쟁이 격심해져 각지에서 반정부 무장집단이 일어나 내전상태가 되었다. 정세가 혼란한 가운데 1962년 3월 군총사령관 네 윈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해 헌법의 효력이 정지되고 국회는 해산되었으며 혁명평의회가 조직되었다.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한 네 윈은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을 결성한 후에 정치·경제적으로는 쇄국주의를 취하고, 국내 치안의 확보와 산업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사회주의화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내전은 계속되었으며, 유통기구의 혼란, 농공업생산의 정체와 인플레이션의 장기화에 따라 국민의 생활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국내가 안정기조로 돌아서자 네 윈 군사정권은 차츰 국제사회 복귀로 방향전환을 하여 단계적인 민정이양을 실시하였다.

1973년 12월 신헌법초안이 국민투표로 압도적 지지를 받아 다음해 1~2월 중앙·지방의 국회의원선거가 행해졌다. 단원제(單院制) 인민의회가 성립되고 네 윈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는데 1981년 네 윈은 당(黨) 의장직만 남기고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네 윈은 계속 막후의 실권자로 남아 있었으며 쿠데타 이후 계속된 권위주의적 통제정치는 결국 1987년 가을의 격렬한 민주화운동을 유발시켰으며, 1988년 3월과 6월 양곤에서 학생반정부시위가 발생, 7월 네 윈이 비마사회주의계획당의장을 사임했다.

그러나 9월 군이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사우 마웅 국방장관 겸 참모총장이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를 결성, 의장으로 취임했다. 군과 시민과의 충돌로 300~10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그 배후에는 네 윈이 있었다.

1989년 3월 소수민족카렌민족동맹, 카진독립기구, 전버마학생민주전선 등이 버마민주동맹을 결성했다. 1989년 국명을 미얀마로 개칭, 1990년 5월 30년만의 총선거로 야당인 국민민주연맹(NLD)이 압승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정권이양을 거부했으며, 10월 연금중인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아웅산 수지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3년 10월 카진독립기구와 정전에 합의, 1995년 반정부조직이 잇따라 군사정권과 화해했다. 1997년 2월 정부군은 마지막으로 남은 카렌민족동맹의 거점인 티카프라를 함락시켰다. 1995년 7월 수지의 연금해제, 1996년 5월 NLD당대회에 앞장 선 NLD관계자 200명이 일시에 구속되기도 했다.

[정치·외교·군사]

국권(國權)을 행사하는 최고기관은 단원제인 인민의회로, 의원 임기는 4년, 의석수는 489이며, 총선거에서 선출되는데, 후보자는 모두 버마사회주의계획당에 의해 지명된다. 유일한 입법기관으로서 다수결원칙에 입각해 운영되며 연 2 회 정례회의가 개최된다. 행정기관은 장관 17명으로 구성되는 각료조직으로서, 장관은 인민의회의원 중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4년, 총리는 각료 중에서 선출된다. 최고사법기관은 인민재판조직으로, 인민의회의원 중에서 선출된 9명의 판사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 합의제로 운영된다.

미얀마의 국가기능은 입법·행정·사법으로 공식상 분리되어 있으나, 인민의회를 중심으로 각 구성원은 인민의회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인민의회지상주의이다. 국가평의회는 인민의회대표와 지방대표·총리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인민의회 폐회 중에는 법적 구속력을 갖는 명령권을 가지며, 비상사태 선포, 군정 보고,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군사행동 결정, 각료후보의 선정, 조약 체결·비준·파기·탈퇴 등의 결정, 중앙 및 지방 여러 행정기관에 대한 지도·감독 권한을 갖는다. 평의회의장은 대통령이 겸임한다. 지방행정은 관구(管區)·주(州)·군(郡)·촌락·구(區) 각 단위마다 설치된 인민평의회가 행한다. 평의회의원은 당해지구 주민에 의한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1989년에 다당제가 인정되기까지는 유일한 정당이었던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은 혁명평의회의 기본강령을 추진하는 기관으로서, 1962년 7월 설립 당시에는 혁명평의회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하는 한정된 수의 정당원에 의한 간부정당이었으나 1970년 이후 대중정당으로 개편되었다. 당에는 중앙·감사(監査)·규율의 3개 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당대회에서 선출한 위원으로 구성된다. 중앙위원회 산하에는 관구·주 단위의 지역위원회와 군 단위의 당지부(黨支部)가 설치되어 있다.

당은 국가의 지도역할을 맡으며 인민의회·인민평의회 의원후보는 당원이어야 한다. 1983년 당의장에는 네 윈, 대통령에는 1981년 11월 네 윈의 뒤를 이은 산유, 총리에는 마웅 마웅이 취임했으며 1985년 8월에는 사회주의계획당 제 5 차당대회를 통해 당부의장직에 산유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군정 당시의 성격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독립 이래 무장투쟁을 계속해 온 버마공산당과 소수민족의 반정부조직이 있다.

1988년에는 쿠데타를 통해 사웅 마웅의 군사정부가 들어섰다. 군사정부는 1989년 총선거를 실시하고 유화정책의 하나로 대외투자법을 제정, 경제개발과 개혁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1988년 9월 이후에는 중단되었던 외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을 재개했다. 외교상으로는 <어떤 나라와도 군사동맹을 맺지 않고,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않으며, 군사원조도 받지 않는다>는 비동맹엄정중립을 기본노선으로 하고 있다. 비동맹회의(非同盟會議)의 창설회원국이었지만, 1979년 쿠바 등 친소(親蘇)국가들을 비판하고 탈퇴했다.

한국·북한 양쪽과 등거리외교(等距離外交)를 유지해 왔으나, 1983년 10월 아웅산암살폭발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발표하고 북한과의 외교를 단절했으며, 1997년 7월 동남아시아제국연합(ASEAN)에 가입했다. 무장중립을 국방의 기본방침으로 하며, 군대는 지원제로, 육군 30만, 해군 1만 2000, 공군 9000, 총병력 32만 1000에 이른다(1996).

[경제]

독립 전에는 농업·임업·광업 등 제 1 차산업에 의한 생산과 수출 및 완성소비재의 수입이라는 식민지형 경제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1952년 야심적인 8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였으나 국제시장에서의 쌀수요의 후퇴로 외화사정이 악화, 4년 만에 폐기되었다. 1962년에 등장한 군사정권은 사회주의를 지향하여, 1963~64년에 금융·유통기구를, 1967~68년에 산업기구를 국영화하였다. 또 1964년에 설립된 수출입공사가 무역을 독점하였고, 1965년에는 22개의 공사가 설립되어 주요 산업의 국가관리가 이루어졌다.

토지의 국유화도 농업관계법의 정비로 1960년대에 실현되었다. 1964년 이후에는 공업화정책에 주력해, 부문별 투자비율은 70년대에 이르러 농업의 한자리 수에 비해 공업이 총액의 1/4을 차지하였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총생산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80년대초 1/10에 불과했고 농업은 1/4을 차지했으며, 쇄국경제체제와 정정(政情)불안으로 경제가 악화되었다. 1988년 9월 군사쿠데타로 대부분의 원조국이 지출을 동결, 10월 특징품목을 제외한 민간 무역을 자유화했다.

1989년 3월 사회주의경제체제를 버리고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착수하여 경제는 회복, 정부가 발표한 1992~95년도 4개년경제계획의 GDD성장률은 연평균 8%를 넘었다. 1994년 3월말 대외채무는 54억 달러로 연체채무가 급증, 외화부족이 심각하다. 199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30억 7070만 달러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700달러이다. 공업화는 늦어지고 있으며 쌀과 티크재가 최대의 수출상품이며 그밖에 원유·천연가스가 있다. 무역상대국은 주로 일본·싱가포르·인도네시아·중국·인도·타이 등이다.

[인구·사회]

미얀마는 다민족국가로서 총인구의 70% 가량이 평지에 사는 버마민족이고, 산지에 사는 각종 소수민족이 25%, 인도인·화교(華僑) 등 외래 아시아인이 5% 정도이다. 미얀마의 토착민족은 인류학적으로는 모두 몽골로이드인데, 언어계통적으로는 티베트―버마어파·타이제어(諸語)·오스트로아시아어족·오스트로네시아어족으로 나뉜다.

불교국으로서 전 인구의 85%가 불교를 신봉하고, 그 가운데서도 버마·몬·샨의 세 민족은 90% 이상이 불교도이다. 그 밖에 산지소수민족의 애니미즘(5%), 인도계 주민의 이슬람교와 힌두교(각 4%), 카렌·카친·친 등 민족자치주의 산지민(山地民) 사이에 퍼진 그리스도교(2%) 등이 있다. 불교는 스리랑카·타이·캄보디아 등과 마찬가지로 남방상좌부불교(南方上座部佛敎)로서 BC 3세기 초엽 몬족의 땅 라마냐데사에 전해진 것이 최초라고 한다. 오늘날에도 흰 불탑이 전국 각지에 많으며, 또 미얀마사회에서는 남자는 일생에 한 번 출가(出家)하여 수행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왕제국가(王制國家)였던 19세기 이전의 미얀마는 왕권을 지지하는 관료(官僚), 군인계급인 아트무단, 농민층인 아티로신분으로 구분되었다. 이런 신분제도는 영국의 식민지화와 함께 폐지되어,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주민과 지방주민 사이에는 의식·행동·가치관 등에서 상당한 차이점이 있지만, 버마어를 사용하고 불교를 믿으며 전통생활양식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기반은 같다고 할 수 있다.

미얀마사회는 부부와 그 자녀로 된 핵가족이 중심이다. 그러나, 결혼한 자식들이 부모와 동거하는 확대가족, 결혼한 형제자매가 동거하는 방계(傍系)의 확대가족도 많이 볼 수 있다. 조상의 영을 모시는 조령신앙(祖靈神仰)은 없고, 유산은 자식들에게 균등하게 상속된다. 하지만 몬족이나 샨족은 조령제사를 모시고, 카친족과 친족 사이에서는 장자가 아니라 말자 중심으로 재산상속이 이루어진다. 국영 라디오방송 1개, 일간지 7개, 국영통신사 1개, 종합대학 2개가 있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1961년 8월에 영사관계를 수립한 이후 1975년 5월 16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64년 무역협정, 1972년 뉴스교환협정을 체결하였다. 1987년 6월에는 네 윈이 한국을 방문했다. 무역관계는 1995년에 대한수입 8669만 8000달러, 대한수출 1287만 6000달러이며, 체류자는 265명이다.

<김추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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