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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30 (화)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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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1차세계대전 (두산)
제1차 세계대전 First World War 第一次世界大戰

1914년부터 4년간 계속되었던 세계전쟁.

I. 개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II. 배경 ·원인

1.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다.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미국과 프랑스·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

2.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러 ·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 ·프랑스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 ·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다.

3국협상과 3국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 ·Cairo ·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Berlin ·Byzantium ·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 ·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9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對)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

3. 발칸문제

발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다. 이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 지지하에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랐으나 러 ·일전쟁과 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병합정책 지지성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후 러시아는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에게 발칸동맹을 결성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 싸워(제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913년 재차 전쟁(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 때문에 소국(小國)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III. 발발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연습의 통감(統監)으로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는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對)세르비아 강경방침에 대한 독일측의 양해를 얻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측이었음이 밝혀졌다. 독일의 정부 ·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측의 군비강화가 19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915년 또는 1916년이었음으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局地化)를 불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 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하고 만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4일)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IV. 경과

독일의 작전은 서쪽에서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키고, 이어 동쪽으로 옮겨서 러시아를 칠 계획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개전 후 가장 먼저 북서 프랑스로 침입, 파리로 육박하였으나 1914년 9월 초순 마른(Marne)의 싸움에서 진격이 저지되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의외로 빨리 프로이센으로 침입하였으나,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원수의 지휘하에 8월말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대패시켰다(타넨베르크전투). 그러나 동서 공히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곧이어 참호전(塹壕戰)으로 바뀌어, 전선은 교착(膠着)되었다.

이 사이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연합국측으로 참전(8.23)하여, 이 기회에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독일의 권익을 빼앗고, 특히 중국에서의 발판을 굳히려고 하였다. 한편 전전(戰前) 독일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는 11월 2일 동맹국측으로 참전하였다. 그 때문에 유럽의 전선은 카프카스,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으며, 1915년 2월에서 4월에 걸쳐 영·프 연합함대는 다르다넬스해협에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1915년 4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최초로 독가스를 영국군을 상대로 사용하였다. 동년 연합국과 동맹국 쌍방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3국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동향이었다. 참전의 조건에 대하여 양진영과 거래하였던 이탈리아는 결국 동년 4월 ‘런던 밀약’에 의해 ‘미수복지’와 달마티아 등의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하고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다. 이탈리아는 군사적으로는 약체이었기 때문에 그 참전이 전국(戰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불가리아가 동맹국측으로 참전하여 독일 ·오스트리아군은 그 협력을 얻어 세르비아를 점령하였다. 한편 1916년 8월에는 루마니아가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으나, 곧 동맹군에 의하여 제압되었다. 이와 같이 1915∼16년 동맹국은 동유럽 ·발칸에서 적극적 공세로 나와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교착상태는 의연 타결되지 않았다. 즉, 16년 2월에서 6월에 걸쳐, 독일군은 베르됭요새에 4회에 걸치는 대공격을 가하여 50만 명의 병사를 희생하며 막대한 탄약을 소모하여 사투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페탱 장군의 지휘하에 요새를 굳게 지켰으며, 6월 말부터 영 ·프 연합군은 서쪽의 솜(Somme)에서 총반격으로 나왔고, 9월 15일 영국은 최초로 18대의 전차를 병기로서 전장에 투입하였다(솜전투). 약 5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영 ·프군은 90만 명, 독일군도 60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육상에서와는 달리, 해상에서는 영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독일 해군은 대폭적 증강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비하여 수적으로도 열세이어서 개전 이래 북해에 갇히고 말았다. 중요한 해전으로는 1915년 12월 도거뱅크의 해전과 1916년 5월 유틀란트 해전이 있었을 뿐인데,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고, 영국의 해상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신병기로 등장한 전차는 영국에 이어 1917년 프랑스, 1918년 독일이 각각 그 뒤를 이었으며, 주로 정찰용으로 쓰인 비행선은 독일이 처음 사용하였다.

V. 교전국 국내정세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즈음하여, 각국 정부는 전쟁이 각각 상대방측의 공격에 의하여 야기된 정당방위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국민에게 그것을 믿게끔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드높은 애국심의 고양(高揚)이 엿보였다. 각국의 지도자가 가장 근심한 것은 국내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동향이었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그 대회 때마다 전쟁 반대결의를 하였는데, 특히 1912년의 바젤 대회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으로써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각국 특히, 서유럽 대국의 사회주의 정당 내부에는 기회주의나 내셔널리즘의 경향이 강하여서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는 자세는 어느 정도 약화되어 있었다.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일부를 제외하고 종래의 슬로건에서 180도 전환하여 전쟁협력으로 내달았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사회주의 정당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부의 군사예산에 찬성하고, 정부와 ‘성내평화(城內平和:Burgfriede)’를 맺어(1914.8.4) 전쟁협력을 약속하였으며,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그 뒤를 따름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장기화함으로써 국민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 전쟁 중에 예를 든다면 독일에서는 인구 6,000만 명 가운데 1,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그 중 전사자 177만 명, 부상자 422만 명을 내었으니, 국민 가운데 5명에 1명이 동원되어 그 반수 이상이 사상(死傷)한 것이 되는데, 이 비율은 프랑스에서 거의 같고 영국에서는 약간 떨어진다. 또한 이 전쟁은 공전의 물량(物量) 전쟁으로 이미 개전 당초, 불과 1주일간의 마른의 싸움에서 탄약 100만 발, 솜의 싸움에서는 그 20배인 2,000만 발이 소모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 수행을 위하여 각국은 자국의 경제력을 동원하고 경제 전체를 전쟁을 위한 것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여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자, 각국 정부에게는 국민의 불만을 누르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만드는 일이 사활문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는 1916년 12월에, 로이드 조지 거국일치내각이 만들어졌고, 프랑스에서도 1917년 11월에 클레망소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들 내각은 경제통제를 강화하고, 군수생산을 높이는 한편, 국내외 반전 평화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영 ·프 양국은 식민지에게 식량과 원료의 공급을 강제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150만 명, 아프리카에서 100만 명이나 되는 원주민을 병사 혹은 노동자로서 유럽의 전선과 공장에 투입하여, 식민지인의 희생으로써 본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킬 수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식민지나 해외시장을 모두 빼앗긴 동맹국측에서는 물자의 부족, 국민생활의 궁핍은 그야말로 심각하였다. 독일에서는 이미 1915년부터 빵의 배급제를 도입하였고, 곧이어 고기 ·우유 ·버터 등도 배급제가 되었다. 1916년 겨울을 예로 들면, 어른 한 사람의 1주일분 배급량은 빵 1,900g, 감자 2,500g, 버터 80g, 고기 250g, 설탕 180g으로서 평상시의 3분의 1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1916년 말에는 노동력 부족을 보충키 위하여, 국내에 있는 16∼60세의 남자를 탄광이나 공장에 동원하는 힌덴부르크 계획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불만이 높아짐에 따라 1917년 7월 의회 다수파가 ‘화평결의’를 행한 뒤, 재상 베트만 호르웨크는 강경노선의 군부와 의회 사이에 끼어 맥없이 사임하고, 이후 군부에 의한 사실상의 군사독재체제가 성립되었다. 한편 같은 해 4월 사회민주당에서 ‘성내 평화’에 협력하지 않는 좌파가 따로 분열하여 독립 사회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노동자의 반전(反戰) 운동과 스트라이크가 번져갔다.

VI. 비밀외교

제1차 세계대전중에 교전국은 결속을 다지고 또한 중립국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전후의 영토나 세력권의 재분배를 약속하였다. 1915년 협상국측은 이탈리아에게 ‘미수복지’를 비롯하여 터키령과 아프리카의 독일령 식민지 등의 분할을 약속하였다. 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를 약속받고 동맹국측으로, 루마니아는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의 영유를 미끼로 연합국측에 끌려들었다.

또, 빈사의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에워싸고 영 ·프는 러시아에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영유를 약속하였으며, 다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1916년 5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러시아에 흑해 동남 연안을, 프랑스에게 시리아를, 영국에는 남메소포타미아의 영유를 각각 약속하였다.

또한 투르크령 서아시아에서는 아랍인의 독립운동이 고조되었는데, 영국은 1916년 초에 아랍인에게 전후 이 지방에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마크마옹 선언)하는 한편, 1917년 11월 연합국에 사는 유대인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같은 지역의 팔레스티나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확약하였다(밸푸어선언).

또 인도에 대하여서도 전쟁협력의 대상(代償)으로서 전후의 자치(自治)가 약속되었으나,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끝났다. 똑같이 동맹국측에서도 독일은 대전 중 러시아령의 핀(Finn)사람, 발트 3국의 제민족,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에게 독립을 약속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한편,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게 산둥성이나 만주, 몽골을 위시한 중국 전토에서의 일본의 권익 획득에 대한 ‘21개조 요구’를 강요하고, 최후 통첩에 의하여 그 대부분을 승인케 하였다.

VII. 종결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은 최종 단계로 접어들었다. 독일은 같은 해 1월, 무제한 잠수함전의 개시를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영국 주변의 해역에서 중립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상선을 무경고로 격침하여 식량이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과 경제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미국의 참전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미국 참전의 효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즉 6~8개월 이내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독일 자신의 패배가 결정적이 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독일의 잠수함은 이 싸움에서 예정을 상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영국도 중립국의 상선까지 동원하여 곤경을 타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전은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야기시켰을 뿐, 실패로 끝났다.

이리하여 패배가 결정적으로 된 독일에게 있어, 나머지 승리의 최후의 기회라고 할 러시아혁명이 같은 해 3월(러시아曆 2월)에 일어났다. 러시아는 정치 ·경제 체제의 후진성 때문에 장기에 걸치는 총력전에는 견디지 못하여, 군수품 ·식량의 부족, 정정(政情)불안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3월혁명이 일어나 차르 정부가 쓰러졌고, 이어 11월(러시아曆 10월) 혁명으로 소련 정권이 성립하여, 즉각 정전을 전(全) 교전국에게 제안하였다.

소련정부의 평화 호소와 비밀외교의 폭로는 세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연합국측의 동요를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의 일각이 무너졌으며, 독일과 러시아는 같은 해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다.

동부전선의 부담에서 해방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폈으나 3~7월의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이 공격에서 힘이 소진되었고, 7월 18일에는 미군의 증원을 얻은 연합군이 반격으로 나왔다. 이제까지 ‘승리의 평화’를 주장하여 모든 타협을 거부해 오던 군부도 이에 패배를 자인하고, 9월 말에는 연합국에게 휴전 제의를 하도록 정부에 제안하였다. 이와 동시에 군부의 괴뢰내각은 쓰러지고, 의회 다수파로 이루어진 막스 폰 바덴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신내각은 즉시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한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14개조’에 의거하는 화평개입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 동맹측은 총 붕괴되어, 9월 30일 불가리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 오스만투르크로 항복이 잇따랐다. 독일에서도 11월 3일 킬 군항(軍港)에서 수병(水兵)폭동이 일어나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곧이어 제정(帝政)이 붕괴되고, 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국과의 휴전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리하여 5년에 걸쳐 세계의 민중에게 커다란 희생을 입히고 싸웠던 제국주의 전쟁은 2개의 혁명을 유발시키고, 연합국측의 승리로서 종결되었다.

VIII. 베르사유조약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심의하는 이 회의를 주도한 이념은 미국 대통령 T.W.윌슨의 ‘14개조’의 원칙이었으나, 이것은 세계 민중의 평화에의 원망(願望)을 대표함과 동시에 세계정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 요구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3대국이 주도한 이 강화회의는 열강의 거래의 무대가 되었으며, 그러나 윌슨의 이념은, 독일에 복수하여 그 힘을 될 수 있는 한 약화시키고 그 대신 스스로 패권(覇權)을 확립하려 한 영 ·프 양 제국주의국의 현실적 이해(利害) 앞에 패하여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 결과, 6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의 내용은 독일 국민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 되었다. 즉, 이에 따라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각각 약간의 영토를 할양함으로써, 인구의 15%와 유럽에서의 영토의 10%를 잃었다. 또 엄격한 군비제한이 부과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하여졌다. 특히,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배상으로서, 1921년에 1,320억 마르크가 결정되었다.

한편, 다른 동맹제국과의 강화조약은 생제르맹조약(9.10:對오스트리아), 뇌이조약(11.27:對불가리아), 세브르조약(20.8.10:對터키), 트리아농조약(對헝가리) 등 각각 별개로 체결되었다. 베르사유조약을 중심으로 이들 조약이 형성한 전후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체제라고 부른다.

이 체제는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등 동맹국측의 구제국(舊帝國)을 해체하여 단일 소국가로 하였을뿐 아니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서 발칸과 동유럽에는 다수의 소국가(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발트 3국)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민족자결’의 원칙도 패전국이나 비유럽 세계의 식민지 ·종속국(從屬國)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동유럽에서의 신국가 건설도 동맹 제국을 약화하고, 나아가서는 소련을 묶어 두려는 의도하에서 행하여진 것이었다.

또한, 베르사유조약은 세계전쟁의 비참한 경험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평화유지 기구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정하였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이 가맹하지 않았으며, 독일이나 소련도 당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맹은 평화유지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었다. 결국 베르사유체제 그 자체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의 재편성에 불과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로서는 지극히 불충분하여 새로운 국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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