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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9 (월)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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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849      
[지역] 아시아 2 (한메)
아시아 2

(앞에서 이음)

[정치]

<과거의 유산>

아시아는 표면상으로 유럽적인 문명이 개화함으로써 화려하게 보이지만, 현재의 아시아에서는 과거가 크게 문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더욱이 이중의 형태로 부각되고 있다. 그 하나는 현존하는 정치적 구조, 지배자의 자질에서 볼 수 있는 아시아적 정체현상이며, 또 하나는 과거의 영광을 자극제로 삼은 변화 기대의 현상이다. 아시아의 과거는 길고 또한 변화무쌍하였다. 그것은 고대 문명이 꽃핀 아시아사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도 아시아에 일어난 문명, 즉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현재의 이란), 인더스계곡 및 황하 유역의 여러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사에서는 반드시 이 네 문명 가운데 앞의 두 문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의 문명도 어떤 점에서는 앞의 두 문명보다 뛰어나며 지금도 여전히 이들 양국 민중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양국의 민중은 각 세기를 통하여 놀랄 만한 인내심과 순응성을 발휘해 왔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인도 북서부에 원정해온 것은 기원 전이지만, 오래 전부터 이미 아시리아·페르시아와 기타 몇 나라의 대제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BC 3세기 중국에서는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그리고 인도 및 중앙아시아에서는 아소카왕이 각각 강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의 건설자이며 세계 최초의 분서사건(焚書事件)의 주인공이다. 아소카왕은 전쟁포기자로서, 또 불교의 선포자로서 유명하다. 그 후 수천 수백 년간, 즉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에는, 오늘의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에 해당되는 지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각지에 번영했던 많은 인도 식민지가 있었다.

5세기 무렵 대도시가 정비되고 8세기 무렵에는 항해에 뛰어난 제국이 일어났다. 그들 나라 가운데 최대의 것은 샤일렌드라 또는 스리비자야라고 일컬어졌던 왕국이며 8세기까지 스리랑카, 수마트라, 자바, 브루나이, 셀레베스, 필리핀 및 타이완의 일부에 걸쳐 육지와 해양을 지배하는 대국이 되었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캄보디아에도 13세기말 무렵까지 약 700년 동안 인도 식민지에서 발전한, 유능한 지배자를 가진 강대국 캄보디아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왕도(王都)가 오늘날 유적으로서 유명한 앙코르(빛나다라는 뜻)였다. 앙코르가 번영하고 있을 때,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에서도 여러 강대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부하라, 사마르칸트, 헤라트 및 발흐 등 4개의 번영한 도시가 카스피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들 도시는 13세기초 사막에 나타난 몽골의 대군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철저히 파괴할 때까지 이어졌다. 중국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다. 다만 근대 19세기에 들어 와서도 중국 및 중국문명은 그 본질에서, 또 그 주요한 윤곽에서, 이미 고대 BC 3세기에 형성된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및 지리상의 발견(유럽 국가의 식민지 개척)으로 근대의 역사가 유럽에서 개막될 때까지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및 초기 그리스도교와 같은 주요 문명을 예외로 한다면 아시아가 지구상의 모든 문명의 발상지였다. 더욱이 이러한 아시아 이외의 여러 문명조차 그 대부분은 아시아로부터 전파되었고 그 영향에 힘 입은 바가 큰 것이었다. 그리스인은 아시아의 많은 고대문명에 힘입은 바가 컸으며, 특히 헬레니즘문화는 발상지인 그리스보다 서아시아에서 번영했다.

로마는 그리스를 중개로 하여 간접으로 아시아와 연계된 것에 불과했지만 서아시아는 로마의 일부였다. 그리스도교는 그 선포자의 대부분이 아시아 출신이었다. 이러한 아시아에서 발생한 많은 문명 가운데 가장 영속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문명은 아랍―페르시아문명, 인도문명 및 중국문명의 셋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세 문명은 그 영속적인 영향력과, 그리고 각각 독특한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넓게 교류함으로써 유럽과는 별개의 <아시아>라는 문명체를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아랍―페르시아문명은 지금은 붕괴된 티그리스·유프라테스문명으로부터 생겨났지만 6세기 말부터 7세기에 걸쳐 아라비아사막의 예언자 마호메트에 의한 이슬람교 탄생을 계기로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8∼9세기에는 바그다드가 생겨 그리스인·헤브라이인·그리스도교도·인도인 학자가 각지에서 모여들어 당시의 세계 최대의 학예 중심지가 되었다.

그 뒤 이슬람교도들은 북아프리카를 횡단하여 에스파냐를 침공하고, 이어서 프랑스에 침입했지만 여기서는 싸움에 패배하여 전진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에스파냐에서는 대학을 세워 현란한 문화의 중심을 건설함으로써 당시 암흑에 휩싸인 중세의 유럽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결국 이슬람교는 사방을 정복하여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아시아의 파키스탄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옛 그리스도교도 지역을 제외하고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인도문명은 수세기에 걸친 여러 주민, 여러 문화의 융합의 소산인 동시에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및 극동에도 그 영향력이 있다. 그것은 인도의 여러 제국이 중앙아시아의 각지를 지배한 일이 있고,

또 중앙아시아에서 나온 강자가 몇몇 인도의 지배자가 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에 인도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오랫동안 몇몇의 인도 식민지였던 결과였지만, 극동에 있어서는 주로 불교가 널리 전해진 데에 연유하고 있다. 중국의 문명은 주로 극동을 그 범위로 하고 있다.

이 문명은 근본적으로는 자기충족·자기중심적이어서, 다른 여러 주민과 문화의 융합에서 이루어진 인도문명과는 대조적이지만 중국의 문명이 그 밖의 번영했던 다른 아시아의 문명이나 유럽에서 일어난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좋은 예로는 중국과 인도 간의 학승(學僧) 교환이 있는데 이로써 인도의 불교와 철학이 중국으로 전래하였다.

요컨대 이상의 세 아시아문명의 어느 것도 고립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고대에는 인도와 중국, 인도와 서남아시아간에는 육·해의 두 경로를 통하여 널리 교역이 이루어졌고, BC3세기의 아소카왕시대가 그 전성기였다. 적어도 1세기 무렵에는 인도와 극동 사이에도 동남아시아를 경유한 해상교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자체의 힘으로 번영했던 문명, 또한 조선(造船)과 빈번했던 해상무역을 통하여 다른 많은 번영한 문명과 끊임없이 교류함으로써 그 문명에 다양성을 더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도·아랍의 문명, 즉 아시아의 문명에서는 어느 것에서도 창조적 정력이나 기계적 진보를 볼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도 그것은 어느 정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최초의 시계 중 몇몇은 유럽암흑시대의 지식향상에 공헌한 바 있는 아랍에서 만들어졌지만 아랍의 쇠퇴와 함께 시계제작기술도 퇴조하였다. 인도에서는 해상무역의 융성이 자극제가 되어 한때 선단(船團)의 건조도 계획되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국왕의 도락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15세기 아시아의 세계는 1000년 또는 2000년 전의 아시아 세계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16세기에 이르자 유럽에 역학(力學)이 생겼다. 이것은 그야말로 인류생활의 일대 혁명적인 전진이었다. 역학의 발달과 함께 유럽이 세계의 선두를 달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서서히, 그리고 19세기에는 비약적인 전진을 이룸으로써 마침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유럽은 제자리걸음으로 잠든 채였던 아시아에까지 침입하여 영국은 18세기에 인도를 완전히 지배하고, 1840∼42년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하여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입수하고 5개 항구를 개항시켰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인도차이나와 접촉한 뒤 오랜 세월을 두고 드디어 자국 영토로 만들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의 극소 부분과 영국령 홍콩 근처의 마카오를, 그리고 네덜란드는 동인도제도를 손에 넣었다.

미국은 태평양 연안의 캘리포니아를 획득한 후 태평양을 건너 우선 일본의 쇄국(鎖國)을 풀었고, 에스파냐로부터는 필리핀을 얻고 중국으로 다가갔다. 한편 아시아 북부에서는 러시아가 시베리아에 진출하여 1860년에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열고 1891년부터 15년이나 걸려 연장 7600㎞에 달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완성시켰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약 300년에 걸친 유럽 세력의 아시아 침입, 그리고 이에 이은 아시아 전역에 대한 직·간접적 지배는 유럽 문명이 가져온 기술, 특히 교통기관·시설에 의하여 아시아 역사상 일찍이 볼수 없었을 만큼 아시아 각지를 접근시켰다. 그러나 아시아의 주민은 전에 없던 분리와 고립을 강요당하였다. 고대아시아에서 이루어졌던 상호 접촉은 유럽 세력의 지배로 방해를 받아 거의 없어진 상태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과거의 유산은 송두리째 뽑혔고, 새로운 아시아의 지배자들은 서로의 세력균형에 따라 아시아를 분할하였다.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인의 아시아>

오늘날 아시아 전역은 유럽의 기술과 관념의 충격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그 기술과 관념은 옛 아시아에서는 싹트지 못했던 것이었고, 그 때문에 아시아사회는 잠든 채 정체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물론 아시아에도 기술과 관념의 발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전제사회에 의하여 움트기 전에 짓눌려 발달이 늦어진 것에 불과하였다.

기술과 관념은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만 발달할 수 있다. 유럽의 기술과 관념이 아시아에 던진 충격은 심각했지만, 그 충격에 의하여 아시아의 기술과 관념 또한 발달하게 된 데에서 아시아 주민들도 자유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보다 좋은 변화의 가능성>을 동경하는 꿈이 자란 것이다. 특히 식민지에 대한 가혹한 지배에 시달리고,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던 아시아 주민 대중에게는 크나큰 자극이 되었다.

변화, 즉 어떠한 형태이든 현상(現狀)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인 해방을 기대하게 되었다. 주민 대중은 사회의 심층부이다. 이 심층부에 아시아사상 처음으로 변화의 관념이 심어진 것이다. 오늘날 아시아는 유럽에서 볼 때 <손을 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다. 또 <아시아 반역의 세기>가 개막되고 있다고도 하는데, 이와 같은 사태의 출현과 관련하여 힘이 된 요소로서는 앞에서 말한 유럽의 기술과 관념의 자극 외에도 다음 2가지가 있다.

첫째, 아시아 일반대중에게 자부심과 확신을 주고 있는 <위대한 아시아문명>에 대한 추억이다. 둘째, 아시아의 정치적 환경이 자유로워진 것, 특히 유럽 각국에 의한 아시아지배에 변화가 일어나 유럽의 지배력이 약화된 것 등이다. 지난 수세기 이래 아시아무대에는 부단한 정치적·사회적 불안이 일어났다.

정치적·사회적 불안은 아시아의 지배 및 민중의 심정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이지만,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러한 조건이 완전히 갖추어졌다. 따라서 20세기의 아시아는 불안 바로 그것이었으며, 그 영향은 지리적으로는 세계적이어서, 20세기를 <아시아의 세기>라고 부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아시아의 불안은 19세기가 되면서 현저히 나타났는데, 각지에서 잇따라 대규모의 격렬한 반란이 일어났다.

인도네시아의 디포네고로의 반란(1825∼30)을 비롯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카불의 반란(1841∼42), 스리랑카의 반란(1848),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이란의 바브교도의 항쟁(1848∼52), 중국의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1850∼64), 인도의 세포이의 항쟁(1857∼59), 기타 필리핀·베트남·터키·시리아의 반란 등이다. 그러나 이들 반란은 거의 동시적이지만 서로 관련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시아의 여명을 알리는 서막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반란은 무력이 우세한 영국 등의 탄압과 반란자측의 배신, 무통제 등으로 제압되어 구질서는 회복되고 정세는 안정되었지만, 반란 후의 아시아는 눈에 띄게 생기가 넘치고, 잠에서 깨어난 새로운 아시아로 재탄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반란의 진압은 무엇보다도 지배자인 유럽 여러 제국(帝國)의 강력한 식민지지배력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20세기에 들어서자 이내 시작되었던 제정러시아와 일본의 군사적 충돌에서의 일본의 승리, 이에 이은 1905년의 제1차 러시아혁명, 그 발전이며 제1차세계대전의 소산인 1917년의 러시아혁명 성공,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후에 유럽 제국(帝國)들의 약체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일대변혁으로서, 아시아를 뒤흔들었고, 아시아를 떨쳐 일어나게 하였으며, 아시아로 하여금 아시아의 독자적인 길을 가도록 준비해 주었다.

1905년의 러시아혁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왜냐하면 아시아의 프롤레타리아를 처음으로 자각하게 하여 조직적으로 반란에 참여시켰기 때문이다. 1906년 러시아의 남쪽 인접국 이란에 샤(전제군주)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터키에서는 마케도니아의 농민반란, 아나톨리아의 도시반란(1905∼1907), 인도에서도 1907∼1908년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민중의 격렬한 저항에 의한 신해혁명이 1911년에 일어났다.

이후 아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민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과 제휴하면서 반란을 민족적 투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아시아 민중을 더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터키(1923), 이집트(1919∼22), 중국(1925∼27), 시리아(1925), 자바(1926)의 반란은 혁명러시아의 지원으로 정치적 개혁을 달성하였다.

또한 제2차세계대전은 아시아에서 주요 지배세력인 영국의 힘을 근본적으로 약화시켰다. 영국은 이때까지 350년 동안 인도·싱가포르·홍콩 등지를 거점으로 하여 극동으로부터 지중해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대전 후에는 인도·버마에서, 또 1971년 말 이후로는 수에즈 동쪽의 모든 군사기지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의 아시아제국은 붕괴되었고,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양 세력도 어쩔 수 없이 영국처럼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로부터 철수하였다.

또 제2차세계대전 중 식민지 민중의 벗으로서 행동하여 아시아에서 위세를 떨치던 미국도 역시 대전 후에는 그 위세가 약화되었다. 특히 1949년 가을, 중국대륙에서 국부군(國府軍)과 중공군(中共軍)의 내전이 미국이 지지하는 국부군의 패배로 끝남으로써 새로운 중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출현한 사실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오늘날 아시아의 동반(東半)에는 타이 및 일본 등 예로부터의 독립국 외에 대한민국과 북한 및 중국·몽골·네팔·아프가니스탄·필리핀·인도네시아·미얀마·인도·파키스탄·스리랑카·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 여러 국가가 있다. 1957년 영연방 내의 독립국이 된 말레이연방은 1963년 싱가포르·사바·사라와크를 더하여 말레이시아가 되었고,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분리, 독립했다.

인도양상에 있는 몰디브는 1965년 7월에 독립하였고, 방글라데시는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였다. 또한 인도가 독립했을 때 인도에 병합되지 않았던 포르투갈 식민지인 고아와 디우 등은 1961년 12월부터 62년 1월에 걸친 인도의 무력행사로 해방되었다. 인도네시아가 1950년 이래 네덜란드와 귀속을 다투던 서이리안은 1962년 8월에 국제연합(UN)을 통하여 네덜란드에서 인도네시아로 이양되는 협정이 성립되었다.

서남아시아에서도 주로 영국세력의 철수와 수반되어 1960년대에 들어와 남아 있던 식민지·보호국이 독립하였다. 즉 1961년 6월 쿠웨이트, 1967년 11월 예멘민주인민공화국(독립 당시는 남예멘인민공화국)이 독립하고, 1971년 후반에는 바레인·카타르·오만·아랍에미리트가 독립국이 되었다. 1990년 말 현재 미독립식민지는 영국령인 홍콩, 포르투갈령인 마카오 정도이다.

현재로는 성급하게 아시아의 장래상을 전망할 수 없지만, 독립한 아시아, 신흥의 아시아, 평화의 아시아, 번영의 아시아, 즉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가 곧 아시아의 미래상일 것이다. 이와 같이 제2차세계대전 후의 약 25년 동안에 대부분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이었던 아시아의 정치지도는 완전히 바뀌어 많은 독립국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아시아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1970년대의 아시아>

아시아의 여러 독립국은 195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AA)회의 이래, 아프리카의 독립국들과 협력하여 국제연합 안에 AA그룹을 만들어 식민지제도의 철폐를 추진하는 외에도 대립한 미국과 소련의 2대 블록 사이에 서서 세계평화 확보를 위하여 노력하는 등 국제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 AA그룹의 지도적 지위에 있던 국가들은 미·소 2대 군사블록의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는, 이른바 비동맹주의를 국시나 외교방침으로 삼았다.

이처럼 아시아의 신흥국은 국제정치상 행동통일을 하고 있는 반면에 대립되고 있는 면도 많다. 아시아 각국은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1970년까지는 크게 나누어 3가지 정치적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제1의 경향은 중국·북한·월맹·몽골 등의 공산주의국가, 제2의 경향은 한국·일본·필리핀·월남·타이·말레이시아·파키스탄·이란·요르단·터키·키프로스 및 자유중국 등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나 중앙조약기구(CENTO)에 가입하였거나 영국이나 미국과 군사적으로 결부된 국가, 제3의 경향은 인도·네팔·미얀마(당시 버마)·인도네시아·캄보디아·라오스·스리랑카·아프가니스탄·이라크·예멘·레바논·시리아 등의 중립주의국가이다.

이상의 세 정치세력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특수한 나라로서 이스라엘이 있다. 또 같은 정치적 경향의 나라일지라도 의회정치체제·군인독재체제 등 여러 체제가 있다. 1957년 가을 이래 파키스탄과 타이는 군인독재국이 되었고, 미얀마는 1957년 가을부터 현재까지 군인독재정치 → 의회정치 → 군인독재정치로 바뀌고 있다.

한국에서는 1960년 4·19에 의하여 이승만독재정권이 무너졌지만 의회정치도 오래 가지 못하고 60년 5·16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또 네팔에서는 1960년 12월 의회제도가 폐지되고 국왕의 친정으로 바뀌었다. 서남아시아에서는 1958년에 이라크혁명이 일어나 왕정으로부터 공화제로 바뀌었다. 아시아국가에서 나타난 이러한 서로 다른 유형의 3가지 정치경향은 1950년대의 미·소 냉전에 따른 아시아 분극화현상의 기초가 되었다.

독립과정에서 미·소 냉전에 휘말리어 이 2대진영의 어느 한편과 결부한 나라가 많았는데, 중립주의국가도 이러한 냉전의 영향을 면할 수는 없었다. 즉 이러한 나라들은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자마자 곧 경제적 독립을 이룩할 과정에 돌입하여 각국이 모두 경제개발에 치중했지만, 국내의 자본축적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는 거액이 요구되는 경제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외국의 원조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도 분극화현상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더욱이 어느 나라나 경제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경우 원조의 필요가 더욱 커져 분극화현상이 강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더욱이 1955년부터는 미·소 양국 사이에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를 미끼로 각각 그 나라를 세력권에 넣으려는 경쟁이 일어나면서부터 중립주의로 전환하는 나라도 생기게 되었다.

이처럼 아시아 각국의 정치 경향의 차이가 제2차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미·소 대립에 이용되거나, 또는 모처럼 이룩한 독립조차 유명무실해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즉, 한국의 6·25(1950∼53년), 1946∼54년의 인도차이나전쟁에 이은 베트남전쟁(1956∼75년), 1947∼49년·65년·71년의 3차례에 걸친 인도·파키스탄전쟁, 1948년·56년·67년 및 73년에 걸쳐 4번이나 빈발한 아랍·이스라엘전쟁 등이다.

다시 말해서 제2차세계대전 후 냉전이 열전으로 화한 지역은 아시아뿐이었다. 그러나 아시아가 미·소 냉전에 이용되어 전쟁의 무대가 됨으로써 아시아 국가끼리 싸우게 된 것도 영속적인 일은 아니었다. 1950년대 중반에 미·소간에 해빙현상이 일어난데다가 1950년대 말부터 미국경제에 파탄 징후가 나타나서 미국 지도자들이 <달러 방위>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됨으로써 미국의 소련과의 화해가 도출되었다.

미국이 1965년에 시작한 베트남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군사개입은 미국경제를 점점 약체화시켰고, 아시아 각국을 비롯한 세계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도 소극적이 되었다. 한편 미국에 대한 소련의 화해 움직임에 중국이 반대함으로써, 중·소가 대립하고, 드디어 1963년 소련은 공산주의 맹방인 중국을 잃어, 아시아에 대한 위세가 크게 꺾였다.

이와 같이 1960년대 중반에 일어난 미·소양대국 사이의 세력관계 변화는 강대국의 세력 다툼에 이용되어 전쟁무대가 되었던 아시아를 대신해 또 하나의 아시아, 즉 독립·평화·중립·민주·번영을 추구하는 아시아, 혁명의 아시아를 출현하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혁명의 아시아라는 아시아의 일면은 1950년대 중반에 아시아 태반의 국가가 독립한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아시아 각국의 국내는 격동 속에서 분열하여 새로운 구도를 창출하려는 정치재편성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1955년 10월 이라크가 바그다드조약에 가입했지만 1958년 7월 혁명이 일어나 CENTO에서 탈퇴하여 중립을 택하게 된 일이었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1965년 중국에서의 혁명 재시도, 즉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것과, 오랫동안 막대한 경제개발 원조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국민생활 안정의 실패, 그리고 세계 최강인 미국의 무력도 베트남이라는 소국의 저항력에 소용없게 되었다는 3가지 사실이, 혁명의 아시아라는 아시아상을 강화시켰다. 그것은 타이·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파키스탄·스리랑카·팔레스타인 등 아시아 도처에서 무장혁명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상징되고 있다.

어쨌든 1970년대 이후의 아시아는 국내에서는 인민의 혁명적 기세가 드높아졌고 국외에서는 강대국의 압력이 약화됨으로써 1954년의 평화5원칙, 1955년의 반둥회의 결의로 이루어진 평화10원칙의 길로 한걸음씩 다가갔으며,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움직임과 함께 미국권이나 소련권과도 다른 제3의 세력권 곧 제3세계, 자주·자립의 세계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말에는 베트남을 통일한 공산주의정부가 캄보디아를 침공하는 새로운 사태가 일어났으며(1978년 12월), 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침입함으로써(1979년 12월) 미국의 베트남 개입 재판(再版)과 같은 수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80년대의 아시아>

1980년대에 접어들자 이란―이라크전쟁이 일어났고 1988년에 가서야 휴전이 성립되었다. 1984년 12월에는 구미 제국주의의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한 상징이던 홍콩조차문제(租借問題)에 대한 영·중 사이의 홍콩반환(1999년) 합의문서 조인이 있었다. 1985년 소련에 고르바초프 정권이 성립되어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표방하고 나섬으로써 세계의 국제관계에 신(新)데탕트시대가 열렸고, 이것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도 매우 컸다.

고르바초프는 또 1986년에 신사고외교(新思考外交)를 제창한 데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선언을 함으로써 소련과 동북아시아(남북한·일본·중국 등)간의 외교에서 새로운 장(章)을 열었다. 한편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 독재정권이 붕괴하고 아키노정부가 수립되었다(1986년 2월). 1988년 5월에는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가 시작되었고, 6월에는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안전보장문제에 관한 7항목(핵무기동결, 해군력 동결, 남북한·소·중·일 연안의 해·공군력 감축, 미국의 필리핀 기지와 소련의 베트남 캄람만기지의 상호 철수, 해상 및 그 상공에서의 사고방지에 관한 조처, 인도양평화지대화구상국제회의, 아시아안보구상회의) 제안이 있었다.

한편 아시아와 관련하여 태평양시대의 개막이라는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국·타이완·싱가포르·홍콩의 경제력과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 등에서 나타날 태평양국가의 대두에다 일본과 미국의 경제·기술의 세계적 우위와 자원대국으로서의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의 존재 등이 어우러져 태평양시대를 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편 1989년 5월에는 오랜 반목을 청산하고 중·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짐으로써 아시아의 평화에 큰 몫을 하게 되었다.

<1990년대의 아시아>

1990년대초 소련 및 사회주의 진영의 해체와 그로 인한 동서 양 진영간의 긴장완화로 아시아의 역사도 전기를 맞았다. 냉전종식으로 특히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사실상 사라진 것은 동아시아의 긴장완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1994년 베트남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가입, 1990년대초 한국과 러시아연방·중국·동유럽 국가들의 국교 수립, 1991년 한국과 북한의 국제연합(UN) 동시 가입 등은 모두 냉전시대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변화이다.

그동안의 친서방국가·공산주의국가·비동맹국가라는 구분은 무의미해졌고 냉전종식 이후 세계의 세력균형은 미국이 실제로 패권을 행사하는 상황으로 변화된 가운데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미국의 영향력 행사를 견제하고 자신의 지역패권을 추구할 수 있는 국가로 부각되었다. 중국은 오랫동안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매우 절실한 민족주의에 불타고 있다.

유럽국가들은 이미 과격한 민족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파괴력을 갖고 있는가를 경험해본 반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강대국에 의해 지배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함으로써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의 표현으로 민족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유럽은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1993년 유럽연합(EU)을 발족시키는 등 민족국가를 유럽지역 통합과정 속에 용해함으로써 보다 넓은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역사적인 대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반면에 아시아지역 국가들은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에 와서야 영토국가체제를 갖추게 된 데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몰락한 이후 이를 대체한 민족주의가 가장 결정적인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한편 남아시아에서는 종교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특히 정부나 정당들이 민족이나 계급간의 갈등으로 분쟁이 발생할 조짐이 보일 때마다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종교적인 측면을 부각시켜온 데도 큰 원인이 있다.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스리랑카 또 네팔이 이러한 정교분리의 숙제를 안고 갈등을 겪고 있다. 이렇듯 아시아에서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국제환경 속에서 국가간 협력을 모색하는 한편으로 민족·종파간 대립이 심화되는 양상도 나타났다. 오늘날 아시아지역에는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거나 평화를 유지하는 체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강대국들의 관계는 어느 정도 유동적이어서 각 나라에 적용되는 세력균형정책이 상당히 불안정하다.

세기말을 맞는 아시아지역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다. 한반도에서의 남북대립,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둔 중국과 타이완의 긴장, 일본의 군사대국화 우려, 앞서 언급한 민족·종교간 갈등 등이 그 예들이다. 1993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후 세계경제가 인위적 장벽에서 해방되고 국가간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심화되는 가운데 아시아지역의 협력은 아직 요람기에 있고 제도화가 별도 진척되지 않고 있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아시아 국가의 공동 발전을 도모하는 연합체제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사회]

아시아의 인구는 34억이 넘어 전세계의 반 이상이 되며 대부분 인도반도·중국본토·일본·자바섬에 집중되어 있다. 아시아는 아라비아반도·고비사막, 그리고 북부시베리아의 동결지대와 같은 인구가 희박한 지역과, 자바섬,중국의 양쯔강·황허강 2대 하천의 하류유역,인도의 갠지스강 유역 등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아시아 인구의 80%는 농촌인구이며 토지가 없는 소농이다.

아시아 인구의 과반수는 청년이 차지하고 있다. 또 그들의 대부분은 기아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문맹이고, 궁핍으로 신음하며, 역병(疫病)에 시달리고 있다. 문맹과 궁핍은 인구증가율을 더욱더 높이고 있지만, 궁핍과 역병이 반작용하여 평균수명을 매우 낮추고 있다. 아시아 사회의 모든 움직임은 이상과 같은 근본적 사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빈곤·문맹,그리고 인구 압력의 3요소는 아시아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아시아는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는 농민의 세계이지만 농업경작 단위는 소규모이기 때문에 생산은 상업적이 되지 못하고 자급용 곡물생산이 압도적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볼 수 있는 상업적인 대규모 농업은 거의 볼 수 없다. 그 원인은 자연의 맹위에 쉽게 굴복하며, 또 근대식의 농업과학적 경영을 받아들일 여지가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1세기 이상에 걸쳐 공업을 위주로 하는 유럽이 아시아를 지배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시아의 유럽화를 낳은 것 같지만, 사실은 아시아대륙의 표면만을 겨우 바꾸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유럽화·공업화는 아주 예외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시아 각국은 예로부터 농업국이며 지금도 역시 후진농업국에 머물러 있다. 유럽의 식민국가에 의한 아시아 수탈(제국주의적 착취), 아시아의 토착지배계급인 지주의 농민 착취, 그리고 고리대금업자의 착취 등 3가지의 착취가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유럽과 같이 내부로부터 공업의 싹이 트는 것을 막아 광활한 국토개발의 기회를 빼앗았고, 아시아의 민중을 숙폐(宿弊)가 쌓인 구태의연한 사회와 지역으로 남겨둔 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서 빈곤과 문맹이 생기고, 다시 인구증가의 압력이 겹쳐 빈곤의 도를 더욱 크게 하였으며, 인간을 물질적·정신적으로 파멸상태에 빠뜨리고 있다. 매년 아시아의 인구는 무서운 기세로 증가하고 있다. 1850년부터 1900년까지 50년 동안의 인구증가는 2억, 1900년부터 1950년까지 50년 동안은 4억이 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1950년에서 2000년까지인 다음 50년 동안의 인구증가 추정은 8억에서 10억이 될 것은 분명하다.

아시아의 인구통계는 불비하며 부정확하다. 그러나 가장 적게 잡은 추산에 따르더라도 지금까지 이미 인구가 아주 밀집해 있는 아시아지역의 장래 인구는 중대한 경계를 요한다. 중국 본토의 인구는 1970년대에 들어와 8억을 돌파했고, 인도와 파키스탄을 합한 인구는 다음 세대에는 현재의 6억에서 더욱 대폭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의 인구는 이미 4000만을 넘고 있으며, 자원도 한정되어 있고 경지 또한 제약되어 있다.

그러나 아시아의 인구증가문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시아의 현실에 작용하여 아시아적인 빈곤, 아시아적인 비인간성이라는 과거의 유산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지만, 한편으로 증가하는 인구야말로 아시아의 잠재력이라는 의미에서 경시할 수 없다. 아시아에 힘이 있다면, 그것은 유럽의 힘이 그 기술속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힘은 밑바닥생활에 몸부림치는 침묵의 백성으로 바뀐 인간대중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종종 <아시아 대중의 힘은 원폭의 위력보다도 강하다>라고 말하는데, 이 아시아의 잠재력은 아시아 주민이 <빈곤은 하늘이 준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식함에 따라서 더욱더 강하게 발휘될 것이며, 그 힘의 크고 작음은 민중수의 많고 적음에 관계될 것이다. 그 좋은 예는 중국과 베트남일 것이다.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세계적인 대 공산권 수출금지정책에 제약을 받았고, 또한 사회주의 국가인 구소련으로부터의 원조도 거부당했지만, 국민 개개인의 왕성한 노동정신에 의지하여 자립으로 산업을 진흥시키고 원자력공업과 우주산업을 발전시켰다. 베트남은 근대적 군수산업을 가지지 않은 작은 나라이면서 국민의 단결에 힘입어 대군과 근대병기를 아낌없이 투입한 강대국 미국에 저항하여 미국을 철수하게 하였다.

이미 아시아인구의 증가문제는 아시아적 빈곤과 무지를 촉진하는 각도에서가 아니고 세계에 대한 아시아발언권의 증대라는 각도에서 논의되기 시작하고 있다. 즉, 아시아 인구의 기세와는 반대로 유럽 및 미국의 인구는 증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부에서는 감소하는 경향에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의 정치·경제력의 세계적 중심이 아시아로 이동하는 큰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아시아의 지도자,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 및 국제기관의 협력을 얻어 아시아의 인구문제를 합리적이며 과학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다고 부르짖고 있다. 자신들의 비참한 생활상태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아시아 대중은 현존의 사회질서와 정치적 질서를 변혁하려고 일어났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현재 결정적 영향을 가지고 있는 아주 소수의 특권자(그것이 비아시아인이거나 아시아인이거나 관계없이)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이것이 곧 세계를 뒤흔드는 아시아반역의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사회 구성이 옛날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 반역은 폭발적인 것이 되었다. 아시아 각국의 사회구성은 전통적으로 비합리적이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유력한 영향력을 가진 중산계급은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한 것은 한 지배자와 무수한 피지배자, 또 사회적·정치적 계층제의 정점에 있는 소수의 사람과 그 아래에 있는 수많은 일반민중과의 사이에 놓인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예를 들어 인도에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부자가 있는가 하면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극빈자가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구성을 가진 아시아에서는 유럽식 민주주의 정치가 그대로 쉽사리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대중은 그들 자신의 생활환경에 직접 미치는 영향에만 반응한다. 그들은 빈곤과 착취를 유지시키는 사회질서에는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어떠한 변화라도 그것을 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냥 변화만을 기다리고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정치지배자는 이와는 반대로 모든 사회적·정치적 변화에 강하게 반대하며, 항상 아시아의 오랜 질서에 관심을 가지고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와 공공연한 동맹을 맺으면서까지 이러한 변화를 억제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터키의 말이 밟은 뒤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라고 했던 터키의 술탄, 근래에는 4대가족이라는 중국의 저장재벌[浙江財閥]이 그 예이다.

이것은 1951년 6월 석유의 국유화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켰던 이란의 상태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도가 잘 나타내고 있다. 이란은 최근 역병과 빈곤, 그리고 정부관료의 부패에 시달리고 있다. 국민의 90%는 문자 그대로 15세기에 살고 있다. 4만 3000을 헤아리는 이란의 촌락은 200~300의 극소수 부자의 사유물이다. 농가 1가구당 수입은 연평균 50달러이다.

국민의 80~90%는 문맹이어서 정치를 모르며 외계의 뉴스에 접하지 못하고 있다. 대도시 이외에는 보건시설이 거의 없다. 88%가 말라리아에 걸려 있다. 서구식 정치는 없다. 마치리스라는 이란의 국회의원 136명 중 8명이 도시에서 일반선거로 선출된 사람이며 그 8명이 석유국유화법안을 제안한 사람들이다. 나머지는 극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부유지주이거나 그 대변자다.

부패와 뇌물의 수수는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일이다. 실업계도 공무원사회도 약체화하고 부패해 있다. 지방관리는 테헤란에서 임명되어 부수입 챙기기를 일삼고 있다(《뉴욕타임스》). 그러나 아시아 사회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경제력의 급성장으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세계 성장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오랜 정체에서 벗어나 세계사에서 새로운 아시아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경제·산업]

<아시아의 경제 현황>

오늘날 아시아는 세계 경제성장의 중심지로서 빠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일본은 경제지표상 단연 아시아 제일의 선진국으로 일본제조업계의 경쟁력은 세계최고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하는 시대가 온 데에는 1980년대 이후 빠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그 핵심이었다. 한국·홍콩·싱가포르·타이완 등 신흥공업국지역(NIES)과 이스라엘·중동산유국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근래 아시아 지역 무역동향을 보면 대미(對美) 수출이 줄고 아시아 역내무역(域內貿易)이 확대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아시아 각국이 수출시장을 다변화하고 외수주도(外需主導)로부터 내수주도의 경제성장으로 전환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90년대 들어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경제권의 성장이 두드러지고 있다. ASEAN국가들은 아시아지역내 산업구조 재편 등과 같은 국내외의 경제여건 변화에 힘입어 경제성장에 있어서 성장의 대명사격인 NIES의 성장률을 앞지르는 세계최고의 경제성장지역으로 등장하였다.

1990년대 세계경제의 큰 특징은 한편으로는 기업의 다국적화, 세계공통의 인권·환경문제의 중시 같은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주의가 나타난 것이다. 유럽공동체(EC)가 경제·통화 통합을 추진하면서 유럽연합(EU)이 탄생하고,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가 발족한 것이라든지 미국 B. 클린턴 대통령의 신태평양공동체제안 등 지역경제권 형성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세계경제의 삼극화도 나타나 유럽·아메리카·아시아태평양의 주요 지역 곳곳에서 국지적 경제권 형성이 이뤄지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 변화이다. 유럽의 중구(中歐)경제협력회의·지중해경제협력 구상 등이 그것이며, 아시아에서는 성장의 삼각지대(싱가포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의 반탐섬 공동개발), 홍콩·타이완·광둥성[廣東省]·하이난성[海南省]간의 화남경제권(華南經濟圈), 한국·중국·일본간의 황해경제권 등의 국지경제권 형성이 진행되고 있다.

일부는 이미 구체화되어 싱가포르·말레이시아·타이완·인도네시아·필리핀·브루나이 등 아세안 6개국이 1993년 아세안자유무역지대(AFTA)를 결성, 2008년까지 역대 공산품의 관세율을 5% 이내로 낮춘다는 목표를 추진시키고 있다. AFTA는 경제개발과 시장확대에 따르는 무역창출효과를 가지고 있어 반드시 역외국가에서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과거 생산기지로만 활용했던 ASEAN을 이미 새로운 소비시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편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높은 아시아의 경제성장률에는 각국별로 편차가 있는데 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북한 등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겪는 가난한 나라이다. 아시아 국가들간에 이같은 경제수준 격차가 생긴 이유는 대다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처음으로 경제개발을 시작한 데 일부 원인이 있다. 식민지시대에 이루어진 경제개발은 일부 생산품에의 의존도가 커서 세계시장의 가격변동에 따라 국가경제가 불안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정치체제나 이념정책, 내란 등도 경제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전통적 농업구조의 개혁과 공업화를 통해 자립경제를 이룩하려 하고 있으며 많은 나라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가고 있다. 냉전시대의 종식과 아시아 여러 지역의 분쟁 소멸에 따로 4개의 신경제구가 출현, 태평양시대를 열게 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아시아의 4개 신경제구는 ① 남북한과 러시아연방 극동지역, 중국 동북부지역을 망라한 대조선경제구 ② 타이완·홍콩 및 중국 광둥성·푸젠성[福建省]이 포함된 대중국경제구 ③ 타이·베트남·캄보디아 및 중국 광시성[廣西省]·하이난성이 포함된 중남반도경제구 ④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ASEAN회원국들을 포함하는 싱가포르경제구이다.

<농업>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살고 있는 아시아의 농업은 연평균 강수량 1000㎜ 이상 지역인 벼농사지대와 350~1000㎜ 지역인 밭농사지대, 그리고 그 주변의 350㎜ 이하인 목축지역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영세성이고 자급적이며, 생산성이 낮고 사료작물의 재배가 없는 것이 유럽식 농업과 다른 점이다.

하지만 아시아는 세계의 주요한 농업지역의 하나이며, 일본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농업이 생산에서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그 생산액도 매우 많으나 인구가 많으므로 아시아 내부에서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시아의 차·황마·고무·향료는 세계시장에서 제 1 위를 차지하며 밀·쌀·설탕·코프라·콩·면화·유채씨·땅콩, 그 밖의 유용(油用)열매·건포도·커피·담배·아편·키나·장뇌·마(麻)·무명·생사도 수출한다.

축산·임산 및 수산자원은 부분적이고도 지역적으로 중요하며, 피혁·모피·달걀 등의 축산품과 티크·나왕 등의 목재가 수출된다. 농업의 형태는 하크경작·가래경작·관개경작·계단경작·재식경작(栽植耕作)·원예경작 등 각 지역의 기후 및 문화의 차이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⑴ 북아시아

시베리아에서는 흑토대(삼림과 초원의 混淆地帶)를 중심으로 동·서로 폭넓게 농업지대가 펼쳐지며, 맥류·두류·잡곡과 같은 내한성(耐寒性) 작물이 경작되는데, 동유럽 곡창지대로부터의 연장이다. 경영은 유축농업(有畜農業)이 보급되어 있다. 농업은 북방으로 감에 따라 여름이 짧아지므로 비중이 낮아지나, 근래에는 저항종(抵抗種)을 육성함으로써 북극해연안의 툰드라지대에서도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임산에서의 용재(用材)·펄프재는 중요하나, 임업은 벌채가 수목의 성장량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로밖에 발달하지 않았다. 게·연어·다시마 등의 북양수산물과 낙농산물도 많아졌다. 수달·산족제비·검은담비·스라소니 등이 생육하며 타이가지대에서는 토나카이(순록)가 사육된다.

⑵ 중앙아시아

농업이 널리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키르기스스텝의 북부지대뿐이고 다른 지역에서는 산기슭의 선상지대(扇狀地帶)에서 인공관개로 오아시스농업을 하는 곳과 산간의 단구(段丘) 위에서 농업과 목축업을 겸업할 뿐이며, 밀·보리·옥수수·쌀·포도·담배·양귀비 등을 재배한다. 임산물도 톈산계[天山系] 산지에 얼마간 있고, 솔송나무·호두나무 등의 특산물도 산출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활발하지 못하다. 이 지방의 주산업은 목축업이며 유목이 탁월하다. 낙타·말·당나귀·소·영양·양·염소가 사육되고, 피혁·털·낙농산물이 수출된다.

⑶ 동아시아

오랜 역사를 가진 아시아 제1의 생산지인데, 일반적으로는 인구밀도가 높아 식량부족인 지역이 많다. 쌀은 예로부터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대표적 식량이다. 따라서 벼농사는 열대로부터 난대를 거쳐 북위 45。의 냉대까지 보급되어 있으며 생산도 많지만, 수요 또한 많아서 인도차이나로부터의 수입 등으로 부족분을 메우고 있다. 밀도 널리 경작되고 있으나 인구가 많아서 자급자족은 안 된다.

예를 들면 일본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밀 수입국에 속한다. 보리·나맥(쌀보리)도 중요성은 떨어지지만 아시아에서는 제1의 생산지이며, 중국은 구소련과 겨루었던 생산국이다. 콩은 세계총생산액의 90%를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차지한다. 콩은 식료·유료(油料)로 쓰이며, 중국의 둥베이[東北]는 세계 제2의 생산지이다.

중국에서는 땅콩·호두·콩 등 기름을 짜는 작물의 생산도 많다. 또한 면화도 많이 경작되며 미국 다음의 세계 제2위 생산국이다. 이 밖에 마닐라삼을 비롯하여 아마·저마(모시풀)·대마도 생산되며, 차의 생산도 중요하다. 중국·일본에서는 양잠도 성행하며, 생사와 비단을 생산하여 수출하고 있다.

⑷ 남아시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은 세계 열대농업의 대표적 지역으로, 식민지적 색채가 짙은 에스테이트농업과 원주민농업이 병립하고 있다. 쌀·옥수수 등도 경작되지만 세계적 상품성을 지니는 고무·설탕·후추·코프라·커피·담배·카사바·향료 등도 생산되어 수출한다. 인도차이나·타이·미얀마지방에서는 쌀농사가 성행하며, 그 수출 능력은 세계 제1위이다. 인도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열대농업의 중심지인데, 밀은 건조지역인 북서난대지방에서 생산되고, 쌀은 습윤한 힌두스탄평야에서 생산되지만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또한 면화·황마와 같은 섬유자원도 생산된다.

⑸ 서아시아

시리아·팔레스타인 등 하계건조난대지방에서는 지중해형 농업을 영위하며 밀·보리를 경작하는데, 올리브·포도·시트론·오렌지 등의 과수나무도 가꾸고 있다. 터키·이란·아라비아 북서부 등의 인공관개가 성한 곳에서는 곡물·면화·삼·유과(油果) 등이 생산되며, 대추야자 같은 특산물도 있다. 건조지방에서는 유목을 하며 낙타·소·양·염소를 사육한다.

<광업>

⑴ 북아시아

시베리아에는 석탄·철·구리·납·망간·석유 등 광산자원이 많으며, 알려진 매장량도 방대하다. 다만 채굴은 운반이 편리한 곳에서만 하고 있고, 내륙의 오지는 미개발상태이다. 쿠즈바스는 매장량 9000억t으로 세계 제2위의 탄전이다. 이어서 미누신스크·퉁구스·예니세이강 하류·이르쿠츠크·자바이칼·레나강·아무르강 및 해안지방의 갈탄갱도 알려져 있다. 북사할린에는 유전이 있다.

⑵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는 석탄·은·구리·아연·납·암염·철·망간과 같은 광산물이 많다. 석탄은 키르기스스텝의 카라간다탄전 부근에 많고, 구리는 발하슈호 북부지방에 많다. 광산과 공업지역은 철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황은 카라쿰사막 내부에 있다. 카자흐, 우즈벡의 사마르칸트 남방의 알라이산지에서는 유전도 발견되었고 방사능 함유광도 발견되었다.

톈산[天山]의 남쪽 기슭과 쿤룬산지[崑崙山地]의 북쪽 기슭에서는 석유·석탄·구리·금이 채굴되고 있으나, 대체로 신장[新疆]·몽골지방의 광산자원 조사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암염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채굴되지 않고 있다. 서쿤룬[西崑崙]에서는 네프라이트·경옥(硬玉)을 산출하며, 고대중국의 예술 소재(素材)로 이용되었다.

⑶ 동아시아

중국의 화베이[華北]와 둥베이[東北]에서는 철·석탄이 주로 산출되는데, 매장량도 많으며, 최근에는 석유도 채굴되고 있다. 철은 안산[鞍山]·번시[本溪]·룽옌[龍煙]·진링전[金嶺鎭] 등 유명한 광산을 비롯하여, 오지(奧地)와 난링산지[南嶺山地]를 제외한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석탄은 매장량이 3000억t에 이르고 있는데, 그 80%는 화베이와 둥베이에 있다.

마그네사이트의 채굴은 세계 제1위이다. 화중[華中]·화난[華南]에서는 다예[大冶] 및 하이난섬[海南島]의 철, 장시[江西]·후난[湖南]·광둥[廣東]의 텅스텐, 후난성 장차오[江草]·린우[臨武]의 안티몬이 유명하다. 한국은 석유와 백금을 제외하고는 각종 광물이 다양하게 매장되어 있으나, 대부분이 북한에 편재되어 있다.

⑷ 남아시아

미얀마·타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는 주석·석유가 세계적으로 중요하고, 말레이시아의 보크사이트, 미얀마의 보드윈을 위주로 하는 납·아연·니켈, 인도차이나의 석탄 및 말레이시아의 철도 중요하다. 필리핀 만니록광산의 크롬은 매장량 1000만t이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곤드와나탄전(비하르 벵골)의 석탄, 펀자브·아삼의 유전을 비롯하여 구리·철·망간 등의 광산물이 많다.

⑸ 서아시아

카프카스의 바쿠와 그로즈니의 유전, 아르메니아·이란으로부터 페르시아만 연안,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등의 유전은 세계적으로 중요하다. 석유는 이곳으로부터 레바논의 트리폴리 및 이스라엘의 하이파까지 송유관으로 운반된다. 그 밖에 아제르바이잔의 케다베크의 구리광산, 그루지야 치아투라의 망간광·황광, 터키의 크롬광이 유명하다.

<공업>

아시아의 각 문화권에서는 예로부터 일용 필수품을 만드는 공업이 왕성하였다. 그리고 그 공산품은 토착민의 경제단계(채집·수렵·어로·유목·농업)에 따라 토지 고유의 자재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져 왔다. 각 지방의 소도시에서는 이와 같은 소규모적 공업자가 가두에서 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생산품 중에는 공예품으로서 수출되는 것도 있다.

유목민의 융단, 말레이인의 가구, 아라비아의 벽걸이융단, 중국의 도자기, 일본의 칠기 등이 그것이고, 이들 가운데에는 근대공업화한 것도 있다. 근대공업은 일반적으로는 초기단계이다. 다만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공업이 발달하여 유럽이나 미국에 필적할 정도에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톈진[天津]·상하이[上海]·광저우[廣州] 등의 항구도시에서 섬유·정미·제분·제유·벽돌·시멘트공업이 우선 성행하였고, 석탄과 철 같은 자재의 생산지에 가까운 우한지구[武漢地區]나 둥베이에서 중공업이 발전하고 있다.

시베리아에서는 우랄쿠즈네츠콤비나트를 비롯해서 석탄·철·면화 등의 자재 생산지 부근에서 많은 콤비나트가 발달해 있다. 인도에서는 예로부터 금속·진주·상아 등의 수공업과 금속·면화·황마공업이 병행되고 있으며, 비하르주의 잠셰드푸르 부근에서는 중공업이 발달한 것을 비롯하여 5개년계획으로 제강업 건설 등도 추진되었다. 서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석유 채굴이 진행됨과 동시에 근대공업도 활발하다.

<상업>

아시아에서는 각 단계의 상업을 볼 수 있다. 열대 및 극지의 민족 사이에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필수품의 물물교환을 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화폐에 의한 경제로 옮겨졌고 브로커가 사이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 밖의 민족 사이에는 화폐유통의 갖가지 형태에서 국내상업이 발달하고 있다. 무역은 서아시아 도시문화가 번영했던 시대부터 성행하였다.

중국으로부터의 비단, 인도로부터의 금속은 예로부터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거래되었으며, 시베리아의 금속은 한자동맹의 상인에 의하여 유럽에 보내졌다. 항로·철도의 발달에 의하여 근대적인 세계무역도 성행하게 되었고, 제2차세계대전 전에 세계무역액 총액의 15%를 차지하였다. 원래 아시아는 주로 세계시장에다 원료를 공급하는 지역이었고 공업생산품을 수입하는 곳이었으나, 최근에는 공업제품 수출도 하고 있다.

<교통>

가장 오래된 방법인 눈 속에서 신는 짚신에서부터 최신식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몇 백 종류에 이르는 교통방법이 현재의 아시아에는 공존하고 있다. 말이나 순록의 썰매를 이용하는 북아시아에서는 겨울철에는 적설과 하천의 동결로 인해 교통이 쉬워진다. 근래에는 심지어 난방을 갖춘 썰매도 있다. 그러나 여름철의 하천교통도 중요하며, 선박은 원류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고, 배를 짊어지고 고개를 넘어서 다음 강까지 갈 수도 있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는 낙타·말·당나귀에 의한 대상교통(隊商交通)이 아직 남아 있으며, 중국 서부에서는 가마와 일륜차도 남아 있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사람의 어깨와 인력거에 의한 교통도 성행한다. 산지에는 현수교도 있고, 강에서는 양가죽의 뗏목과 통나무배, 돛단배 등을 볼 수 있다. 한편 근대교통기관의 발달도 빨랐다. 우선 대륙을 가로질러 자동차교통이 성행하게 되었고, 철도는 어느 정도 인구밀도에 비례하여 발달했으며, 자바, 인도의 갠지스평야나 데칸반도도 동유럽 정도로 보급되고 있다.

세계 철도연장의 15%는 아시아에 있다. 횡단철도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맺는 시베리아철도, 중앙아시아의 면작지(綿作地)와 시베리아의 곡창지대를 연결하는 투르크시브철도, 중국의 만저우리[滿洲里]에서부터 베이징[北京]·한커우[漢口]·광둥[廣東]을 맺는 철도 등이 있는데, 서아시아에서는 소(小)아시아로부터 이라크·이란을 연결하는 철도가 있다. 아시아의 철도를 좀더 상세히 개관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는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전쟁으로 파괴된 철도노선의 복구작업과 새로운 철도노선 건설에 대한 계획이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57년 이후로는 중국·소련 기술진의 협력에 의하여 소련·몽골·베트남·북한 등과의 국제선 건설도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베이징∼모스크바 사이 약 9000㎞는 세계에서 가장 긴 국제철도이다. 또한 쿤밍[昆明]∼하노이 사이 등 베트남에 이르는 노선은 베트남전쟁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는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서 도로망이나 항만시설과 더불어 철도의 증설·근대화에도 힘을 쏟아왔다. 디젤화가 진행되어 증기기관차는 모습을 감추었고, 철도의 전화사업(電化事業)도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특히 서울∼부산 사이의 경부선 고속전철철도사업을 실현시키고자 준비 중에 있다. 서울에서는 지하철도 건설이 일부(1호선∼4호선) 끝남으로써 운행되고 있고, 최종적으로는 142㎞ 이상의 거대한 지하철망을 설치하여 교통혼잡을 해소시킬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61년부터의 7개년계획으로 철도노선의 신설, 광궤화(廣軌化), 전화(電化), 디젤화가 진행되었으나, 아직도 수송력 부족현상은 해소되지 않아 계속적으로 철도 노선 증강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러시아 양국과의 국제선은 조중국경철도연합위원회(朝中國境鐵道聯合委員會)·조소국경철도협동위원회의 관리하에 운영되고 있다.

1893년에 시작된 타이의 철도는 그 뒤 국유화되어 타이국철이 운영하고 있다. 주요한 노선은 방콕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즉 치앙마이에 이르는 북선(北線), 코라토를 거쳐 농카이 또는 우봉에 이르는 동북선(東北線), 아란야부라테이트를 지나 캄보디아국유철도에 접속하는 동선(東線), 하자이를 거쳐 말라야철도에 통하는 남선(南線) 등 4개 노선이다. 1m의 협궤(狹軌)가 쓰이고 있고, 장작을 때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가 중심인데, 1965년 무렵부터는 디젤화가 추진되고 있다.

홍콩에서는 홍콩섬의 케이블카와 노면전차를 제외하면 주룽반도[九龍半島] 앞끝의 주룽에서 중국 국경의 뤄후[羅湖]를 거쳐 중국 영토로 들어가는 광저우[廣州]∼주룽철도(35㎞)가 있을 뿐이다. 이 철도선에서는 1949년 이래 정지되어 있었던 국제열차의 운행이 1979년 4월에 재개됨으로써 국경에서 갈아타기의 불편이 없어졌다. 1979년 10월에는 최초로 지하철도가 개통되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복잡하고 오래된 철도망이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의 3개국에 나누어져 있다. 이것은 지난날의 영국령시대에 인도에 부설해 놓았던 것이다. 1849년에 동인도철도회사가 설립되었고, 1853년에는 최초의 철도가 봄베이∼타나 사이에서 개통되었다. 인도에는 철도부의 관할하에 8개의 철도가 있고, 각각 중부·동부·북부·동북부·동북국경·남부·동남부·서부의 8개 지구를 달리고 있다.

파키스탄은 1956년에 인도로부터 독립했을 때 넓은 인도를 사이에 끼고 동·서의 2개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그 뒤 1972년에는 동파키스탄이 파키스탄을 이탈하여서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방글라데시 쪽의 철도는 태반이 1000㎜ 게이지인 데 비해 파키스탄의 철도는 주로 1676㎜ 게이지이다. 1960년 이후 계속적으로 전화(電化)보다는 디젤기관차를 채용하는 움직임이 강하다.

인도네시아에는 여러 가지 궤간(軌間)의 철도가 있는데, 3/4은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에 부설되어 있다. 베트남에는 하노이에서 호치민시(옛 사이공)까지 해안선을 남하하는 철도가 있는데, 프랑스와 싸운 인도차이나전쟁과 이어진 월남·미국 등과의 베트남전쟁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특히 베트남 남부의 피해가 커서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통일 후인 1976년에는 30년 만에 개통하였다. 베트남전쟁중 북베트남 최대항구인 하이퐁과 수도 하노이를 연결하는 철도는 큰 역할을 하였다. 캄보디아에는 수도 프놈펜으로부터 서쪽으로 보이베트(타이 국경)에 이르는 노선과 남쪽으로 콤퐁솜만(灣) 방향으로 가는 노선이 있는데 모두 단선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맺는 항로는 1869년의 수에즈운하 개통 후 갑자기 늘어났으며, 태평양을 통한 아메리카대륙과 아시아의 해운도 활발해졌다. 또 북극해를 통한 연락은 1878∼79년 N.A.노르덴쇨드의 베가호에 의해 개통되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항공기의 이용이 더욱더 중요하다. 동아시아·남아시아·서아시아의 문화권을 맺는 항공으로는 최근 더욱더 밀접해졌으며 북극권항공로도 열려 유럽·아메리카대륙과의 항공교통도 편리해졌다. → 동남아시아 → 서아시아사 → 중앙아시아사 → 북아시아사.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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