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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8 (일)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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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680      
[지역] 아프리카 (두산)
아프리카 Africa

동반구(東半球)의 남서부에 있으며 남북 양반구에 걸친 세계 제2의 대륙.

I. 개관

콩고분지조약의 발효에 따라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서구 제국은 대(對) 아프리카 정책에서 두 가지 경향을 명백히 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특허회사에 의한 경제적 이익의 추구였고, 둘째는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무력에 의한 분할의 촉진이었다.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주의국(植民地主義國)에 대해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금하고 기회균등과 문호개방의 원칙을 강요하였다. 이 제약을 벗어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 1885∼1900년에 걸쳐 식민지주의 제국은 똑같이 특허회사를 설립하였다.

특허회사는 식민지 내에서 자원이 풍부한 지역에 대한 토지소유권 ·광업권 ·무역의 권리 등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징세권(徵稅權)을 비롯하여 행정 ·사법 ·입법 및 경찰의 권리까지 보유하면서 이 권리를 배타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영국의 특허회사는 산업자본가의 발언권이 강하고 자본주의적인 자원개발을 추진한 데 비해, 프랑스나 벨기에의 특허회사는 상업자본가나 봉건적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경영됨으로써 확대재생산을 꾀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강제 노동이나 강제재배에 의한 약탈적인 착취를 일삼았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종래의 노예무역을 대신하여 원자재 등의 국제 상품과 서구 공업제품의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을 강요당하였다.

한편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 영유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요건(要件)으로서 실질적인 점령과 지배상태를 명시할 것을 식민주의 국가에 요구하였다. 때문에 차드호(湖)를 목표로 한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군대 파견 전쟁이나, 수단을 점령하려는 영국 ·프랑스군의 충돌(파쇼다사건) 등의 분할경쟁이 진행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系) 보어인(지금의 아프리카너) 공화국 내에서 다이아몬드나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침략이 시작되고 1899∼1902년 사이에는 보어전쟁이 계속되었다. 또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통합 지배하려 한 포르투갈, 남서 아프리카와 동부 아프리카(지금의 탄자니아)를 연결하려는 독일, 게다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 식민지를 연속시키려고 하는 영국 등이 대립하여 콩고 분지 이남의 내륙에서 분할경쟁을 벌였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둘러싼 분할경쟁이 1912년에 끝났으며, 리비아는 1911년 이탈리아령으로, 이집트는 1914년 영국보호령이 됨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지배해온 터키의 세력은 일소(一掃)되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아프리카 대륙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라는 두 개의 형식적인 독립국을 남겼을 뿐 식민지 분할경쟁은 완전히 끝나고 식민지 대륙으로 바뀌었다.

II. 자연

아프리카 대륙은 평균 해발고도 약 670m의 고원상 대지이며 전반적으로 지형 ·지질이 모두 단조롭지만 동시에 지역에 따라 웅대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 많다. 습곡산맥으로서는 대륙 북단부의 아틀라스산맥과 남단부의 드라켄즈버그산맥 등 두 산맥이 있고, 아틀라스산맥에는 높이 4,165m에 이르는 투브칼, 드라켄즈버그산맥에는 높이 3,482m의 타바나엔틀렌야나가 있다. 또 지구상 최대이며, 단조로운 경관을 벗어난 동부 아프리카 대지구가 있는데 이것은 서부 아시아의 사해(死海)로부터 홍해(紅海)를 거쳐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상륙하여 대륙 남동쪽의 베이라 부근까지 직선거리로 남북 4,000km 이상에 이른다.

적도 부근에서는 1,000km에 가까운 너비로 두 개의 지구대로 나뉘는데 그 중앙에 세계 제3의 대호(大湖)인 빅토리아호가 있고, 동쪽 끝에는 이 대륙 최고봉인 킬리만자로(5,895m)를 비롯해서 케냐산(5,199m), 서쪽에 루웬조리(5,119m) 등 빙하와 만년설을 이고 있는 화산군이 웅대하고 특이한 경관을 이룬다. 이 대륙 최대의 하천인 나일강(6,632km)과 콩고강(4,370km)은 이 대지구대 내의 수많은 호수를 수원지로 한다.

대륙의 북반구 부분은 절반 이상의 광활한 지역이 사막으로 덮여 있는데, 서부는 아틀라스산맥의 남사면에서 세네갈강 ·나이저강 유역까지, 중앙부는 지중해 연안에서 차드호(湖)까지, 동부는 나일강 삼각주에서 에티오피아 고원까지이다. 너비는 모두 약 2,000km이며 대서양안에서 홍해 연안까지 5,500여km에 이른다. 이것은 광의의 사하라 사막인데 이 속에는 아하가르산맥이나 티베스티산맥 등 3,000m급의 높은 암산(岩山)도 있고 홍해 연안에도 높이 2,000~2,700m의 산맥이 있다.

사하라 사막의 남단부에는 서쪽에 나이저강 내륙 삼각주, 중앙에 차드 분지, 동부에 백(白)나일 습지대 등이 각각 전개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남하하면 사바나대를 거쳐 기니만 연안의 열대우림지대인 콩고 분지가 펼쳐지는데 동단부의 돌출부는 사하라로 이어지는 사막과 건조지대이다. 콩고 분지는 적도가 지나는 광대한 분지로 동부 아프리카 대지구대의 서쪽에 있으며 대부분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있다. 인도양 연안의 적도 지역은 사막 지대와 연안 저습 지대의 경계를 이룬다.

이 대륙의 남반구 부분은 동부 아프리카 대지구대의 고원 지대로부터 남위 8° 부근의 중앙부를 거쳐 아프리카 남단부에 이르는 고원 지대가 내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서양 연안은 칼라하리 사막으로 이어지는 건조 지대이지만, 인도양안은 고온다습한 우림지대이다. 인도양에는 모잠비크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다가스카르섬이 있다.

아프리카 대륙은 북위 37°20'의 북쪽 끝에서 남위 34°52'의 남쪽 끝까지, 또 동경 51°24'의 동쪽 끝에서 서경 17°34'의 서쪽 끝까지 남북 약 8,000km, 동서 약 7,500km에 이르러 다양한 기후풍토를 나타낸다. 즉 적도 부근의 중부 ·서부 아프리카에는 고온다우한 열대우림 지대가 있고 그 남북쪽에 사바나 기후와 스텝 기후 지대가 전개된다. 또 남 ·북 회귀선 부분은 고압대로 사막지대가 펼쳐져 있고 대륙의 남북 양쪽 끝 부분에는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는 부분이 있어 마치 위도와 기후 풍토의 관계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부 아프리카 대지구대에서 인도양 연안에 걸친 동부에는 이와 같은 법칙은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동부에서는 마다가스카르섬의 동안 외에는 열대우림 지대는 볼 수 없다. 열대우림 지대에서는 기니만 연안의 일부에서 연평균 강수량 3,000mm를 넘는 곳도 있으나 대체로 1,000~2,000mm 내외이다. 이에 비하여 사하라나 칼라하리 사막에서는 250mm 이하인 곳이 많다.

대서양 연안은 북반구에서 카나리아 해류가, 남반구에서는 벵겔라 해류가 연안 일대에 각각 찬 해류를 운반한다. 인도양 연안은 북쪽이 아시아 대륙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북반구에 한류가 흐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반구에서도 최남단까지 아굴라스 난류가 흘러 대륙 남동부에서 온난습윤한 기후를 나타낸다.

식물은 기후의 영향을 반영하여 열대우림은 상록활엽수의 밀림으로 이른바 정글의 전형이며 이 지대 해안의 대부분은 맹그로브가 밀생하여 바닷속에 녹색의 제방을 조성하고 있다. 사바나 지대에는 아카시아 ·미모사 등과 함께 아프리카 특유의 바오밥나무 등 건조한 기후에 견딜 수 있는 수목이 소림(疎林)을 이룬다. 스텝지대에 이르면 수목은 적어지고 초원이 전개되며, 건조도(乾燥度)가 높은 사막지대의 오아시스 주변에 대추야자 등이 있을 뿐 거의 식물을 볼 수 없고 모래와 바위로 이루어진 산과 들이 펼쳐진다.

동물은 열대우림 지대에서는 고릴라나 침팬지를 비롯한 원숭이류가 살고 있으나 대형 포유류(哺乳類)는 적다. 한편 사바나 지대에는 대형 포유류와 대형 초식수(草食獸)가 분포하며 사자 ·표범 ·하이에나 ·코끼리 ·기린 등이 활동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스텝에서 사막지대에 걸쳐서는 타조 ·낙타 등 건조한 기후를 견뎌낼 수 있는 동물이 서식한다. 마다가스카르는 모두 대륙과는 다른 동 ·식물이 분포한다. 식물로는 트래블러스트리(나그네나무) ·화염목(火炎木), 동물로는 여우원숭이 ·아이아이원숭이 등이 알려져 있다.

III. 주민·언어

1. 주민

아프리카의 인종군(人種群)의 분류는 학자에 따라 견해차가 있는 데다 아직 정설(定說)이 없고, 인종의 명칭도 구구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나뉘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⑴ 북부 아프리카 인종

함-셈계(系)라고 할 수 있으나 학자에 따라서는 메디테라니데(지중해인) ·베르베리데(베르베르인) ·오리엔탈리데(아랍인) 등으로 분류한다. 고대 이집트인 ·콥트인 ·베르베르족(族) ·모르인 등이 메디테라니데에 속하며, 특히 베르베르족 중 아틀라스 산중에서 사하라에 걸친 지역에 사는 종족이 베르베리데라고 불린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코카소이드(백인종)의 특색을 지닌다.

⑵ 서부 아프리카 인종

이른바 검은 아프리카인은 ‘멜라노 아프리카 인종’이라든지 ‘네그리데’ ‘니그로이드’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고 서부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아인종(亞人種)’으로서는 ‘기니 아인종’ ‘콩고 아인종’과 ‘수단 아인종’ 또는 ‘바레 네그리데’ ‘수다니데’라고 부르는 종족이 있다. 전자는 기니만에서 콩고에 걸쳐 분포하는데 키는 160∼168cm 정도이며 턱이 튀어나오고 코가 낮다.

이들은 중두(中頭) 또는 단두(短頭)이고, 체격이 늠름하며 주로 열대우림 지대에 살고 있다. 후자는 170cm 이상으로 키가 크고 턱이 심하게 튀어나온 데다가 코가 낮다. 이들은 얼굴이 길고 피부는 아주 검다. 이들은 세네갈강 유역에서 차드호(湖)에 걸친 서부 아프리카의 내륙 사바나 지대에 거주한다. 또한 카메룬 남부에서 콩고에 걸친 열대우림에는 ‘네그릴로 인종’ ‘피그미’ 또는 ‘밤부티데’라고 부르는 단신(短身:140cm 내외)에 황갈색 피부와 체모(體毛)가 발달한 인종이 살고 있다.

⑶ 북동 아프리카 인종

‘멜라노 아프리카 인종’ 중 ‘아이르 아인종’ 또는 ‘닐로티데’라 부르는 종족인데 마른 데다가 키가 아주 크고(180∼200cm) 팔다리가 길고 코가 좁으며 얇은 입술, 장두(長頭)를 특징으로 한다. 이 종족들은 나일강 상류에서 잠베지강 상류까지 동아프리카 대지구대 연변을 따라 거주한다. 또 다른 중요한 인종으로는 ‘에티오피아 인종’ 또는 ‘에티오피데’라고 부르는 인종이 있는데 이들은 키가 비교적 크고 피부는 상당히 검으나 머리의 모양이나 얼굴 생김새는 백인종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들은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소말리아에 걸쳐 살고 있으나, 마사이족 등 탄자니아의 내륙에 살고 있는 종족도 있다.

⑷ 동부 ·중부 ·남부 아프리카의 인종

‘멜라노 아프리카 인종’ ‘네그리데’라고 부르는 인종 중 ‘반투 아인종’이라든지 ‘반투이데’ 또는 ‘카프리데’라 부르는 아인종이 거의 적도 부근에서 남쪽 전지역에 걸쳐 분포한다. 키는 167∼169cm 정도이며 턱은 별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얼굴이 길고 피부색은 비교적 밝다. 그 밖에 ‘코이산 인종’이라든지 ‘코이사니데’라고 부르는 호텐토트족과 부시먼이 있다. 이 인종은 키가 작고 피부는 황갈색이며 장두 또는 중두, 둔부(臀部)의 돌출이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또 언어에 ‘클릭’이라는 정지음(停止音)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아프리카너’라고 자칭하는 토착백인(土着白人)이 있는데 ‘아프리칸스(Africaans:네덜란드어 방언의 일종)’를 독자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또 마다가스카르섬에는 ‘몽골로이드’ 혹은 ‘바레몽골리데’라고 하는 말레이 폴리네시아어를 사용하는 인종이 있다.

2. 언어

오늘의 아프리카 제국(諸國)을 언어면에서 분류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영어권 아프리카’라는 분류 방법이 있다. 북부 아프리카의 ‘아랍어권 아프리카’ 중 마그레브 3국(알제리 ·모로코 ·튀니지)과 모리타니는 프랑스어권에 들어가며, 짐바브웨가 영어권에 들어간다.

또 옛 포르투갈 식민지에서는 포르투갈어, 옛 에스파냐 식민지에서는 에스파냐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아랍어권’과 그 밖의 나라에서는 각각 국어를 가지고 있으나 ‘프랑스어권’과 ‘영어권’에서는 국어가 확립되어 있는 나라는 적다.

프랑스어권에서는 마다가스카르의 마다가스카르어, 르완다의 킨야르완다어, 부룬디의 키룬디어 등이 국어로 사용되고 자이르는 주(州)마다 몇 개의 국어를 가지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케냐 ·탄자니아가 스와힐리어를 국어로 할 뿐 그 밖에는 아직 국어가 확립되지 못하였다.

특정 부족의 언어가 공통어화하고 있는 예로서는 말라위의 니안자어가 있다. 남부 아프리카와 남서 아프리카의 백인들 사이에는 독일어가 상당히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옛 독일식민지인 카메룬 ·토고 ·르완다 ·부룬디 ·탄지니아에서는 중 ·노년층(中老年層)의 아프리카인 사이에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남아 있다. 또, 리비아 ·소말리아 ·에리트레아에서는 이탈리아어가 꽤 많이 사용되고 있다.

IV. 역사

1. 선사 ·고대사

1924년 남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두개골(頭蓋骨)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라고 명명되었고, 약 100만 년 전의 ‘사람과 흡사한 원숭이’로 추정되었다. 또 1959년 동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계곡(溪谷)에서 발견된 두개골은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이것은 약 170만 년 전 원인(猿人)의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 말 올두바이 계곡(먼저 두개골이 출토된 부근)에서 12세 가량의 어린아이의 아래턱뼈 ·옆머리뼈가 발견되어 호모 하빌리스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은 약 2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데도 불구하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진잔트로푸스보다 훨씬 인류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발견을 통해서 아프리카 대륙이야말로 인류의 발상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의 시대 이후부터 다시 수십만 년이 지난 다음, 아프리카에서는 구석기시대의 문화가 급속히 발전하여 돌로 만든 아름다운 창끝을 만들어냈다. BC 4000년대에는 나일강 하류를 중심으로 고도의 문화가 일어나 BC 1000년경까지 인류사(人類史)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빛나는 문화가 번영하였다, 그것은 현존하는 유적이나 유물로 미루어보아도 명백한 사실이다.

BC 1000년경 수단 누비아 지방에서는 이집트화(化)한 쿠시 왕국이 일어나 4세기 중엽까지 제철(製鐵) 등의 기술을 바탕으로 높은 문화를 유지하였다. 쿠시 왕국의 문화는 서부 아프리카의 나이저강 유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지만 이 무렵 이미 나이저강 유역에도 농경을 바탕으로 한 전혀 다른 고도의 문화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설(說)도 있다. 나이지리아 북부의 노크라는 마을에서 BC 900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점토로 구워 만든 인형이나 동물상(動物像)이 발굴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대륙의 북동부는 좁은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라비아 반도에 접하기 때문에 아랍 이민이 일찍부터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리스시대의 이집트는 그리스와 인도 무역의 통로가 되었으나 그 무렵 에리트레아 부근에 악숨 왕국이 성립하였다. BC 30년 무렵 이집트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에도 악숨의 아둘리스(지금의 마사와 남쪽의 줄라)는 인도무역의 중계항(中繼港)으로서 번영하였다. 이 지방에 대해서는 l세기 무렵에 쓰여진 《에리트레아 항해지(航海誌):Periplus Maris Erythraei》에 기재되어 있다.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교가 전파된 후 악숨 왕국은 홍해의 무역 루트에서 제외되었으며 점차 아랍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4세기 중엽부터 그리스도교를 믿은 그들은 아프리카적인 성격을 굳히면서 내륙에 고립하였다. 이윽고 자궤 왕조(王朝)가 일어나 13세기까지 계속되다가, 1270년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자손이라는 전설을 지닌 왕조(에티오피아 皇統)로 바뀌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4세기 무렵에 가나제국(帝國)이 일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2. 중세

639년 북부 아프리카를 침입한 아랍은 북부 아프리카를 서진(西進)하여 83년에는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까지 이르렀다. 북부 아프리카의 원주민 베르베르족은 곳에 따라서는 공존(公存)하고 또는 대이동을 하였다. 또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에 걸쳐 아랍의 반주류파(反主流派)가 아라비아 반도를 집단 탈출하여 잔지바르섬 등 동부 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

따라서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부에서 남동부에 걸쳐서 아랍인이 도입(導入)한 이슬람 문화가 보급되고 크고 작은 이슬람 국가가 일어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마그레브 지방에서는 이드리스 왕국(788∼l000) ·알모라비드 왕국(1061∼1149) ·알모하드 왕국(1149∼1307) 등이며,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젠지(잔지)왕국(975년부터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올 때까지가 전성시대)이 전형이었다.

아프리카 서부 내륙 및 동부의 역사나 문화를 알기 위한 사료(史料)로서는 11세기 무렵 이후의 아랍 학자나 여행자들이 남긴 기록이 문자로 쓰여진 최고(最古)의 것으로 보인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11세기에 베드윈의 제2차 침략 이후 아랍의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가나 왕국이 베르베르 지배자의 영향을 벗어나 순수한 소니케족(흑인)의 왕국이 된 것이 770년, 알모라비드 왕국에 정복된 것이 1076년, 완전히 멸망한 것이 1240년이다. 가나 왕국의 속국인 말리가 대서양 연안에서 나이저강 중류까지의 영토를 소유하고 가나 왕국을 대신하여 대제국(大帝國)을 이룬 것은 13∼15세기이다.

말리 제국은 만사무사왕 시대(14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후 말리 제국을 대신하여 송가이족의 제국이 일어나 16세기에는 가오를 수도로 하는 강대한 제국이 되어 동서에 여러 개의 종속국을 거느렸다. 한편 서부 내륙의 제국보다는 소규모였으나 차드호(湖) 주변에서 홍해 사이의 지역에도 하우사족의 여러 왕국, 카넴 ·보르누 ·동골라 왕국 등의 흥망(興亡)이 있었다.

또 기니만 연안의 열대우림 지대에는 작은 소국가군(小國家群)이 많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콩고 분지 주변이나 동부 아프리카 내륙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겠지만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다른 왕국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다.

우간다의 부간다 왕국이나 르완다 왕국, 부룬디 왕국 등은 북방에서 온 지배자에 의해서 16세기 이후에 건국되었다. 짐바브웨에 있는 유명한 석조 건축의 유적은 모노모타파 왕국 수도의 흔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11세기 무렵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노모타파 왕국에 관해서는 16세기 포르투갈 항해자의 기록에도 나타나는데, 이에 따르면 15세기 중엽에 건설된 것이라고도 한다.

1607년 모노모타파 국왕은 포르투갈의 허수아비가 되어 1629년의 포르투갈 모노모타파 조약에서는 모노모타바의 영토를 부당히 광대한 것으로 보이게 해서 희망봉(喜望峰) 근처까지를 그 영토라고 주장함으로써 영국에 대한 포르투갈의 세력권을 주장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콩고강 하구에는 1480년대에 포르투갈인 항해자들이 들어와 많은 반투족의 부족왕국(部族王國), 콩고 ·카콩고 ·로망고 ·은동고 등과 접촉하였으나 이 왕국들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콩고나 앙골라의 지명도 여기서 생겼으나 그들의 국왕은 포르투갈 ·프랑스 ·벨기에의 지배하에서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러나 15∼16세기에 포르투갈의 항해자들과 접촉한 아프리카의 여러 왕국은 모두 유럽의 그리스도교 문화와는 이질적이었으나 훌륭한 정치질서와 뛰어난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국왕은 이를 왕국의 국왕과 대등한 입장에서 외교관계를 가졌다.

3. 유럽인의 내항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내항한 최초의 유럽인은 1364∼65년의 프랑스인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기니라는 지명이 유럽지도에 최초로 기재된 것은 1350년 무렵이었다. 사료(史料)에 의해서 확인된 최초의 항해자는 l434년에 북위 26°의 바하도르곶(串)을 남하한 포르투갈인(人) 질에아네스이다. 교황(敎皇)이 포르투갈에 아프리카 서안의 영토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포르투갈인은 항해를 계속하여 디오고캄이 1471년 적도(赤道)에 도달했고, 1482년에는 콩고강 하구를 발견했으며 1488년 B.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1497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우회해서 나탈에 도달하여 인도양 항로를 발견하였다. 1494년의 에스파냐 ·포르투갈 조약에서 에스파냐는 남북아메리카를,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각각 독점적인 세력범위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6세기의 30년대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덴마크 등 여러 나라의 항해가가 잇달아 아프리카 서해안에 내항하여 무역기지를 개설하였다. 이 항해가들은 처음에는 모두 금을 찾아서 내항하였으나 선적(船積)할 가치가 있는 아프리카의 산물은 상아(象牙)와 노예밖에 없었다. 네덜란드는 아프리카 무역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고, 아시아 항로의 보급기지를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밖의 나라 특히 영국은 남북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유리한 식민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남북아메리카의 부족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노예무역을 세계적인 통상(通商)의 일환으로서 중요시하였다. 포르투갈은 기니 ·앙골라 ·모잠비크에서 노예무역과 그리스도교 포교를 하는 한편 해안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밖의 나라는 1652년 네덜란드가 케이프식민지를 설치하였을 뿐 전혀 영토적인 야심을 갖지 않았다.

17세기 후반부터 성황을 이룬 노예무역 때문에 서아프리카 기니만 연안의 각지에 노예무역을 위한 성새(城塞)가 많이 구축되었으나 군인이나 무역업자가 성내(城內)에 체재하였을 뿐이고 유럽인은 성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아프리카인에게 노예사냥을 시켰다. 유럽인에게 노예를 매매하면 생활할 수 있게 되자 아프리카인들은 노동을 해서 생산을 한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부족 대 부족, 마을 대 마을이 서로 습격하면서 포로(捕虜)로 잡힌 사람을 유럽인에게 팔아 넘기는 생활을 되풀이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문화를 지탱할 수 있는 생산은 할 수 없게 되고, 남아 있는 문화적 유산마저 불태우거나 파괴되어 버렸다. 아프리카인이 호전적(好戰的)이고 미개 ·야만적인 열등인종이라는 이미지는 19세기까지 계속된 노예무역의 효과로서 얻어진 것이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대서양안의 전체뿐만 아니라 인도양까지 파급되었다. 인도양 연안이나 중앙 아프리카 및 서부 아프리카의 내륙에서는 아랍 노예상인에 의한 대규모 노예사냥이 자행되었다.

유럽인의 내항은 다시 유럽상품을 기니만 연안으로 가져오는 대신, 금이나 상아 등을 유럽으로 반출했기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 내륙의 대상(隊商) 루트를 통한 거래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상업에 의존해온 내륙의 부족은 새로운 생활을 찾아 기니만 연안에 영토를 확보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부족전쟁에 따른 파괴가 잇달았다.

4. 탐험 ·분할경쟁시대

미국의 독립, 프랑스혁명에 의해서 노예해방의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한편 그것은 노예의 공급원에 불과한 아프리카 대륙에 구미 자본주의 제국이 영토적 야심을 가지기 시작한 과정이기도 하였다. 노예해방과 함께 영국 ·프랑스 ·미국은 이 대륙 내부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橋頭堡)를 만드는 데 부심하였으며 1787년 M.파크에 의한 나이저강 유역의 탐험을 시초로 내륙 탐방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1787년 시에라리온에 해방노예를 이주시키고 아프리카인에 의한 자유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하고 그 이듬해 런던에 ‘아프리카 협회(Africa Association)’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내륙의 지리적 ·인문적인 조사연구를 준비하였다. 해방 노예의 이주지에 ‘프리타운(자유의 도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1807년 노예무역이 금지된 이후에는 노예선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정착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오래지 않아 포기되고 감비아 ·골드코스트(黃金海岸:지금의 가나) 등은 식민지를 만드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세네갈의 생루이를 전진기지로 삼고 있던 프랑스는 적도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위한 기지를 리브르빌(자유의 도시:1849)이라고 하였으나, 당시 프랑스는 노예무역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영토적 야심도 더 컸다. 미국의 이민 회사가 만든 라이베리아(자유의 나라:1821)만은 1847년 공화국으로서 독립하여 미국의 대(對)아프리카 정책의 기지가 되었다.

한편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하고, 이집트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한 영국이 1801년 카이로를 점령하는 사태를 빚었다. 그것은 영국이 북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 ·미국 ·프랑스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침략하였다.

한편,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1795∼1803) 때 영국이 네덜란드의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하였다가 네덜란드에 되돌려 주었으나 1806년 영국은 아시아 항로(航路)의 보급기지로서 의의(意義)를 가진 케이프타운을 또다시 점령하였다. 이 결과 네덜란드계(系) 백인들은 노예를 해방(1834)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내륙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내륙의 탐험은 망고 파크에 뒤이어 1821∼22년 영국인 탐험대가 지중해를 거쳐 차드호(湖)에 도달하였고 이보다 앞서 1818년 프랑스인들은 세네갈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또한 1850년 독일인 H.바르트는 지중해로부터 차드호, 나이저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1848년 독일인 요하네스 레브만이 킬리만자로를 발견하였고, 1850년대에는 영국인 리빙스턴, 1860∼70년대에는 미국인 H.M.스탠리, 1870∼80년대에는 프랑스인 P.S.de 브라자 등이 동부에서 콩고강 유역을 거쳐 남부 아프리카 등의 내륙을 탐험했다. 이와 같은 탐험과 병행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850년 무렵부터 산업자본이 발전하여 자유무역론이 굳어졌기 때문에 식민지를 획득, 통치를 한다는 데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토를 획득하는 데는 프랑스가 우세하였으며, 리빙스턴이나 스탠리의 탐험 성과는 벨기에의 식민지 획득을 돕는 결과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에 이어 뒤늦게 아프리카 분할 경쟁에 참가한 독일은 벨기에와 손을 잡고 식민지 점령의 실적을 올리면서 1884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당시의 구미열강 대표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여 콩고 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분할문제를 협의하고 ‘콩고분지조약’을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대서양 연안에서 인도양 연안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 대해 식민지 보유의 원칙을 약속 결정하였다.

5. 식민지분할의 완료

콩고분지조약의 발효에 따라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서구 제국은 대(對) 아프리카 정책에서 두 가지 경향을 명백히 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특허회사에 의한 경제적 이익의 추구였고, 둘째는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무력에 의한 분할의 촉진이었다.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주의국(植民地主義國)에 대해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금하고 기회균등과 문호개방의 원칙을 강요하였다. 이 제약을 벗어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 1885∼1900년에 걸쳐 식민지주의 제국은 똑같이 특허회사를 설립하였다.

특허회사는 식민지 내에서 자원이 풍부한 지역에 대한 토지소유권 ·광업권 ·무역의 권리 등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징세권(徵稅權)을 비롯하여 행정 ·사법 ·입법 및 경찰의 권리까지 보유하면서 이 권리를 배타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영국의 특허회사는 산업자본가의 발언권이 강하고 자본주의적인 자원개발을 추진한 데 비해, 프랑스나 벨기에의 특허회사는 상업자본가나 봉건적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경영됨으로써 확대재생산을 꾀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강제 노동이나 강제재배에 의한 약탈적인 착취를 일삼았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종래의 노예무역을 대신하여 원자재 등의 국제 상품과 서구 공업제품의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을 강요당하였다.

한편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 영유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요건(要件)으로서 실질적인 점령과 지배상태를 명시할 것을 식민주의 국가에 요구하였다. 때문에 차드호(湖)를 목표로 한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군대 파견 전쟁이나, 수단을 점령하려는 영국 ·프랑스군의 충돌(파쇼다사건) 등의 분할경쟁이 진행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系) 보어인(지금의 아프리카너) 공화국 내에서 다이아몬드나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침략이 시작되고 1899∼1902년 사이에는 보어전쟁이 계속되었다. 또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통합 지배하려 한 포르투갈, 남서 아프리카와 동부 아프리카(지금의 탄자니아)를 연결하려는 독일, 게다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 식민지를 연속시키려고 하는 영국 등이 대립하여 콩고 분지 이남의 내륙에서 분할경쟁을 벌였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둘러싼 분할경쟁이 1912년에 끝났으며, 리비아는 1911년 이탈리아령으로, 이집트는 1914년 영국보호령이 됨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지배해온 터키의 세력은 일소(一掃)되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아프리카 대륙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라는 두 개의 형식적인 독립국을 남겼을 뿐 식민지 분할경쟁은 완전히 끝나고 식민지 대륙으로 바뀌었다.

6. 세계대전 때의 아프리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집트 ·리비아 및 소말리아에서는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리비아에서는 한때 터키의 원조로 독립국이 성립되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은 전후(戰後) 크게 부각되어 아프리카인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다. 1920년 전후(戰後)의 아프리카에는 3가지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대전 전 독일식민지의 재분할이다. 이들 식민지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이라는 형식으로 카메룬과 토고가 영국 ·프랑스 양국에 분할되고, 동아프리카도 분할되어 탕가니카는 영국의 지배를, 르완다와 우룬디(부룬디)는 벨기에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남서 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둘째는 위임통치제도의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는 ‘팬아프리카회의(會議)’가 국제적인 조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제1회 파리(1919), 제2회 런던 ·파리 ·브뤼셀(1921), 제3회 런던 ·리스본회의(1923) 등 회의를 거듭한 팬아프리카회의는 직접 아프리카의 민중을 조직화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나 아프리카인 의식의 고양(高揚)과 아프리카 해방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셋째 반제국주의적인 민족주의운동이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소말리아의 독립투쟁, 이집트의 독립, 또 모로코에서 아브드엘 크림의 독립투쟁과 ‘리프공화국’ 성립, 나이지리아 ·가나 ·시에라리온에서 민족주의 정당(政黨)의 출현과 선거제도 도입,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일어난 스트라이크 등 많은 사례(事例)를 지적할 수 있다.

1929년에 비롯된 세계공황은 아프리카인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였다. 자본주의적인 개발이 진행되고 있던 식민지의 경제적인 타격이 아프리카인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1930년대에는 노동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세계공황은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에스파냐에 파시즘 정권을 성립시키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식민지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압제를 강화하였다.

이탈리아는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에리트레아 ·소말리아를 합하여 광대한 영역의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1940년대에 들어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戰火)가 북아프리카에도 미치자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리비아와 튀니지는 많은 전쟁피해를 입고 1943년 추축군(樞軸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7. 식민지의 해방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적인 반식민지주의적 여론이 높아지고 아시아에서 민족독립운동이 성공함에 따라 아프리카 각지의 민족해방운동도 급격한 속도로 확대되었다. 이들의 민족해방운동은 이탈리아 식민지의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동서 양진영의 대립에 휘말렸으며, 아시아의 신흥제국과 함께 이른바 제3세계의 권리를 주장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또 이들의 민족독립운동은 1945년 맨체스터에서 열린 제5회 팬아프리카회의의 영향을 받아 팬아프리카니즘 운동을 구심점(求心點)으로 움직였다. K.은크루마가 그 지도자였으나, 당시의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의 정치가도 아프리카 민주집회(民主集會:RDA) 등을 중심으로 행동하였다.

UN의 노력으로 1951년 리비아가 독립함으로써 1922년 이집트가 독립한 이래 30년만에 아프리카의 독립국은 겨우 한 나라가 늘어 5개국이 되었다. 다음해인 1952년 이집트에서 나세르 등의 쿠데타가 성공, 독립을 이루었다. 그리고 반둥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1955)를 거쳐, 격렬한 반(反)프랑스 독립투쟁을 벌인 모로코 및 수단이 독립국이 된 것은 1956년의 일이다.

이 대륙의 민족독립 운동의 물결은 먼저 북아프리카에서 고조되었다. 은크루마의 힘으로 1957년 가나가 독립하면서 서부 아프리카에도 민족독립의 물결이 밀어닥치기 시작하였다. 알제리의 독립을 저지하려던 프랑스 제4공화국이 무너지고, 드골의 프랑스 제5공화국이 성립된 1958년에, 기니가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여 가나와 함께 전아프리카 해방 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1958년 말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열린 전아프리카민족회의는 팬아프리카 회의가 결실을 본 것으로서 역사적인 역할을 맡았다.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민족독립이 절정에 이르러 17개의 신생독립국이 출현함으로써 ‘아프리카의 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독립한 나라의 대부분은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구종주국(舊宗主國)에 의해서 정치적 독립을 인정받은 것으로 민족주의적인 의욕이나 반식민지주의적인 힘은 강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아프리카 제국은 반식민지주의적이고 급진적인 팬아프리카니즘이 강한 ‘카사블랑카 그룹’과 그것에 대립하는 ‘브라자빌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이 두 그룹의 구체적인 쟁점(爭點)은 콩고 동란(動亂)을 둘러싸고 반서구적(反西歐的)인 세력과 친서구적(親西歐的)인 세력 중 어느쪽을 지지하는가, 또 알제리 전쟁에서 FLN(민족해방전선)과 드골의 알제리정책 중 어느 것을 지지하느냐 하는 두 가지 문제였다. 따라서 1962년 7월 알제리가 독립하고 1963년 초 콩고 동란이 일단 해결되었기 때문에 1963년 5월 아디스아바바에서 모든 독립국이 수뇌회의를 열어 ‘아프리카 통일기구헌장’이 조인되고, 아프리카 국가간의 정치적 그룹이나 블록은 해체되었다.

V. 정치

1. 대통령제와 정당

1976년 12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보카사는 스스로 황제 보카사 1세라 칭하고 국명을 중앙아프리카제국(帝國)이라고 고쳤다(1979년 실각과 동시에 국명도 옛 명칭으로 복귀했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도 극히 보기드문 예이며, 아프리카에서는 대통령이라는 위치가 전통적인 부족의 지도자로서의 대추장(大酋長), 즉 국왕의 그것과 실질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말라위의 대통령 반다, 튀니지의 대통령 부르기바, 적도기니의 대통령 응게마(1979년 실각), 케냐의 대통령 케냐타(1978년 사망) 등, 이른바 ‘종신 대통령’이 된 대통령도 세습제(世襲制)가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면 전제군주라고 할 수 있다. 또 종신 대통령은 아닐지라도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행해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종래의 대통령만이 입후보하여 거의 100%의 득표율로 3선 ·4선된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아프리카 제국의 대통령제는 서구적인 의미의 민주적 대통령제에 비하면 극히 이질적이며 절대주의적 군주제(君主制)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종신 대통령이 군림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이른바 공인(公認) 정당이 하나밖에 없는 1당제 국가의 형태가 채택되고 있다. 더구나 1당제의 정치체제는 이데올로기와는 관계가 없다. 예컨대 1970년대의 신생독립국(옛 포르투갈령 국가는 좌익 정당의 1당제)은 제외하더라도, 기니 ·콩고 ·알제리 등 공산주의 노선을 걷는 나라들을 물론 코트디부아르 ·가봉 등 자본주의 노선을 택하고 있는 나라도 1당제 국가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정당은 독립을 전후하여 옛 종주국의 영향으로 복수(複數) 정당 형식을 채택, 여 ·야당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기니나 코트디부아르와 같이 독립과 동시에 1당제 국가로 이행한 나라가 생겼고 독립 후 수년 만에 많은 나라에서 의회제(議會制) 민주주의와 정당정치가 폐지되어 1당제 또는 무정당(無政黨)의 상태로 변해 갔다.

이러한 나라의 지도자의 주장에 따르면 구미자본주의 국가에서 육성된 정당과 의회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인 사회경제가 발달하지 못하고 계급분화(階級分化)가 이루어지지 않은 아프리카에서는 존립할 수 있는 바탕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정치 사회는 부족이나 촌락을 바탕으로 서로 대화에 의한 만장일치로 모든 정책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이른바 다수결 원칙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토착적(土着的) 정치문화에 익숙해진 민중으로서는 다수결원칙에 따른 정치절차는 유해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집권층은 권력쟁탈의 라이벌의 출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도 토착적인 전통적 정치제도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복수정당제의 폐지와 1당제로의 이행(移行)은 가나의 은크루마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나 쿠데타로서 정권을 장악한 군인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쿠데타에 의하여 정권을 장악한 경우에는 의회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정당의 결성이나 활동을 금지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러나, 독립 후 일정한 세월을 경과한 현재는 교육이 현저하게 보급되어 구미(歐美) 각국에 유학하거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사람이 격증한 데다 중앙집권적 정치보다 지방적 ·부족적인 특색을 존중하는 세계적인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아프리카에서도 정치문화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세네갈 ·부르키나파소 ·이집트 등에서는 복수정당의 출현이 공인되었다. 또 1965년 이래 정당을 금지해 왔던 나이지리아, 1972년 이래 정당이 동결된 가나에서 복수정당의 결성이 인정되고 문민(文民) 정권으로 이행하기 위하여 대통령선거와 의회 총선거가 계획되었다.

아프리카에는 여전히 군인이 국가원수가 되는 나라가 많다. 그러나 이들을 이른바 군정국가(軍政國家)로 분류하는 데에는 미묘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집트나 알제리의 경우는 군사 쿠데타에 의해서 성립된 정권이 계속 집권하고 있으나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도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되고 지금은 그의 사망으로 본래 군인인 사람이 후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렇다고 그들 나라를 군정국가라고는 할 수 없다.

현재 아프리카의 정치는 과도기(過渡期)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부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나 나미비아가 흑인국가로서 독립을 하였으나 앞으로 어떠한 국가로 성장하느냐에 따라 아프리카의 정치체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1당제 국가나 아프리카적 대통령제는 팬아프리카 운동에 역행하는 민족주의적 경향을 굳히고 있다.

이것은 또한 인접 국가간의 정치적 대립을 굳히는 결과가 된다. 어느 한 나라의 대통령과 그 정부 ·여당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인접국은 외국의 음모나 내정간섭에 따라 움직이는 대통령이나 정당이 지배하는 나라로서 적대시한다.

2. 국경문제

인접국 상호간의 정치적인 적대관계는 국경분쟁과 결부되어 군사적인 분쟁으로까지 발전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서부, 즉 튀니지 ·알제리 ·니제르 ·나이지리아 ·기니비사우를 포함한 18개국과 옛 에스파냐령 사하라(서부 사하라)는 하천 등 자연적 조건에 따라 국경을 정하지 않고 식민지 분할정책에 따라 자의적(恣意的)으로 정해진 부자연스런 국경이 전체 길이의 46.7%를 차지하고 있어 국경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게다가 니제르와 베냉과 같이 나이저강의 섬을 둘러싸고 국경분쟁을 일으킨 사실로 보아도 서부 아프리카에 국경분쟁이 없는 곳은 없다.

동부 및 남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국경은 서부보다는 자연적 조건을 기초로 한 곳이 많지만,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국경분쟁이 전쟁으로까지 발전한 전형적인 예는 모로코와 알제리,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케냐 사이의 분쟁을 꼽을 수 있다.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의 분쟁에서는 소말리아가 소련의 무기원조로 1977년 여름부터 1978년 3월까지 교전하였다. 알제리와 모로코 분쟁은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옛 에스파냐령 사하라가 모로코와 모리타니에 분합된 것을 계기로(모리타니는 병합된 남부를 1979년에 포기) 서부 사하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계속되었다.

독립국 영토 내에서 이질적 역사나 문화를 가진 지역이 국경분쟁적인 요인에 의하여 전쟁 상태로 발전한 예는, 에티오피아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병합한 에리트레아의 분리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1962년부터 시작된 에리트레아 전쟁이다. 이 결과 에리트레아는 1993년 독립하여 아프리카의 53번째 독립국이 되었다. 또한 국경의 대부분이 인공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부족의 경계가 분쟁의 원인이 되거나 남부 아프리카의 로디지아나 나미비아의 국경을 둘러싸고 흑인해방 게릴라와 백인정부군의 국경침략이 생기는 등 국경문제는 다양한 양상을 띤다.

VI. 경제산업

1. 원조동향

비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아프리카로 제공되는 경제원조 방법과 액수는 매우 다양하다. 미국의 경우 가나 ·나이지리아 ·케냐 등의 국가에 원조를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프랑스와 영국은 옛 식민지국가 지역에 원조의 중점을 두고 있다. 1985년 총 340억 달러를 기록한 원조금액은 1990년 277억 달러로 줄어들었으며 1992년에 이르러서는 232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국가 중 가장 많은 원조를 하고 있던 미국은 예산절감 방안으로 1996년 대아프리카 원조를 20% 삭감하겠다고 발표하고 난 뒤, 다른 서방국가들도 그 뒤를 이어서 원조삭감을 발표했으며 아프리카 원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UN와 세계은행에 대한 각국의 기금액도 동시에 삭감되어 아프리카가 세계은행 등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보조금 역시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 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사회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급격한 유아사망,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및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 인종분쟁 등으로 인해 대외원조가 아니라면 아프리카의 원활한 경제성장 자체가 불가능한 정도에 이르고 있다.

2. 경제개발문제

세계 각국의 원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58년 UN이 설립한 경제협력기구는 ‘아프리카경제위원회(ECA)’가 있다. 이 기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이 유력한 가맹국이었으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벨기에 ·포르투갈 ·이탈리아는 완전히 축출되고,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는 준가맹국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프리카 독립국 49개국이 새로 가입하여 ECA의 운영을 맡고 있다.

ECA에는 역내무역, 통화관리와 역내결제, 산업 ·천연자원, 운수 ·전기통신, 농업, 노동력 및 훈련, 종합경제의 7개 실무회의가 있어, 전 아프리카적인 시점에서 이 대륙의 경제를 개발하기 위한 연락과 조정, 조사와 기회을 추진하고 있다. 또 대륙에 부족한 전문가의 양성과 연수 때문에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본부에 통계가회의 ·기획관회의가 부설되어 있으며 다카르대학에는 아프리카 경제개발 및 계획연구소가 설치되어 있다.

ECA와 표리일체로서 이 대륙의 경제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기관은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의 경제사회위원회 ·운수통신위원회 ·과학기술 조사위원회 등이 있다. 아디스아바바에 본부가 함께 있어 ECA와 OAU 간에는 인적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주관분야를 서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서로 긴밀한 협력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 개발은행(ADB)’의 설립도 ECA와 OAU의 협력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수권자본금 2억 5천만 달러, 한 나라의 최고출자액 3,000만 달러, 최저출자액 100만 달러의 ADB는 아시아개발은행과 같이 역외국의 출자를 인정하지 않고, ECA의 정식가맹국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에 본점을 두고 1965년에 영업을 시작한 이 은행은 ADB협정 조인국 30개국, 비준국 25개국으로 발족하였다.

ECA가 OAU의 협력을 얻어 실행하고 있는 정책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프리카의 독립국을 북부 ·동부 ·중부 ·서부의 4개권역으로 나누어 제각기 ‘공동시장’을 결성한다는 계획이다. 이것은 1967년 5월 가나의 아크라에서 서부 아프리카 12개국 대표가 조인한 ‘서부 아프리카 공동시장 조직협정’을 마침으로써 궤도에 올랐다.

한편, 아프리카 유일의 자본 선진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오랜 분쟁의 씨앗이 되어 온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이 민주화의 물결로 서서히 사라지면서 아프리카 전체의 경제적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구는 전 아프리카 대륙의 6.8%, 면적에서는 17%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나 국민총생산에서는 아프리카 전체의 25%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전력 생산량이나 자본투하면에서는 약 50%, 철강생산량에서는 약 75%를 차지하고 있다.

3. 자원

아프리카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대륙이라는 통설은 지하자원이나 해양자원은 물론 야생동물을 포함한 관광자원면에서도 해당된다. 그러나 농업자원에 관해서만은 적용시키기가 다소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광대한 사막, 라테라이트(열대의 구릉에 발달하는 적색토)가 많은 메마른 토양, 침식작용이 격심한 고원지대 등이 이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다목적댐의 건설에 따라 수자원의 이용이 추진되어 아스완하이댐 ·볼타댐 ·카리바댐 등 세계 최대규모의 수력발전소와 인조호도 조성되었다.

VII. 교통통신

19세기 후반 영국의 탐험가 스탠리는 교통 ·수송로의 건설없이 광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하거나 개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하였다. 더욱이 이 대륙의 모든 하천은 하류나 중류에 급류가 있어 내륙 수로로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은 한정되어 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영국의 아프리카 종관철도(縱貫鐵道)나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철도 건설 구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항만과 광산이나 농업지대를 연결하는 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에는 자동차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공사가 어렵고 민중의 이용도가 낮은 철도 대신 도로정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광산물 수송량이 많은 남부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철도망은 별로 발달하지 못하였다. 최근에는 새로운 철도 건설도 대부분이 광산개발과 관련된 것에 한정되어 있다. 도로망의 발달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정치적 ·군사적 필요성에서 시작되었으며, 경제산업상의 목적은 그 다음이었다.

따라서 독립이 이룩된 현재는 국제적인 도로의 부족이 크게 눈에 띈다. 자동차에 의한 교통은 단거리의 화객(貨客) 겸용 버스가 많고 장거리 화물수송이나 승용차의 이용은 뒤진다. 1940년대 이후 상업용 항공로의 발달도 장거리 육상교통망의 정비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대륙의 화객용 정기항공로는 각 식민지의 주요도시와 식민지주의국을 연결할 목적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최근까지 아프리카 국가 상호간의 항공로는 거의 무시되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독립국이 국영 항공회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결점도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또 ‘에르아프리카’와 같이 경제력이 약한 옛 프랑스령 12개국이 공동운영하는 방식이 주목을 끈다.

해상 항로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집트 등을 비롯하여 상선단(商船團)을 가진 나라도 적지 않으나, 해상수송의 대부분은 구미 제국이나 일본의 해운업자가 장악하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형식상 세계 최대 해운국의 하나이지만 외국 해운회사가 선적(船籍)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얼마 안 되는 선박을 가진 데 불과하다.

통신은 식민지시대에 식민지주의국이 설치한 시설은 많으나 아프리카 국가 상호간의 통신망은 답보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무선 전기통신시설이 발달한 현재는 유선의 전신 ·전화나 우편이 중심인 시대에 비해, 대륙내의 통신망의 정비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VIII. 사회문화

1. 종교

현재의 문화나 사회를 개관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것은 종교와 그것에 관련된 관습법이다. 전통적인 아프리카의 사회적 단위는 혈연적인 요인에 지연적(地緣的) 조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부족사회라고 할 수 있으나, 각 부족은 고유한 신화나 전승(傳承)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신앙이나 관습법을 만들고 부족의 유대을 형성하였다.

이슬람교나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과거 수세기 동안에 많은 부족이 이슬람교화하고, 그리스도교화한 것은 사실이며 실제로 이 두 종교는 지금도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부족의 신앙이나 관습법이 이슬람교나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일소되지는 않았다. 부족 고유의 신앙이나 관습법은 이들 종교와 연관을 이루며 세속적인 부족적 유대로서 오늘날에도 뿌리깊이 남아 있다.

아프리카의 인구를 주요 종교별로 분류하면, 백인은 그리스도교도 속에 포함되며 파키스탄계(系) 주민은 이슬람교도에 포함된다. 이들 외래 인종을 제외한 아프리카인은 전통적인 부족종교를 믿는 사람이 가장 많고 다음이 이슬람교도 ·그리스도교도의 순이다. 이슬람교를 국교(國敎)로 하는 나라는 모리타니 ·소말리아 등을 비롯하여 실질적으로는 아랍계 국가이고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는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다.

이 대륙의 현실을 포착하는 데에는‘피그미족 문화’라든지 ‘초원수렵민 문화’ 등 식민지가 되기 이전의 전통적 문화권은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어권 ·영어권 등 식민지주의의 문화적 유산에 의한 문화권과, 또 종교적 측면에서의 이슬람 문화권이나 그리스도교 문화권 등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권의 개념은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

2. 교육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높은 문맹률이나 학령아동의 낮은 취학률은 세계 각 지역 중에서 가장 뚜렷하다. 동시에 최근 수년 동안 문맹률의 저하나 취학률의 향상 템포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빠른 것도 사실이다. 교육보급의 특징으로는 초등교육의 보급 템포가 빠른 데 비하여 중등교육의 보급이 늦어지고 있다는 점과 고등교육기관의 신설이 활발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고등교육기관의 신설이 활발하다는 것은 식민지시대에 고등교육기관이 적었기 때문에 독립 후 자국의 대학을 가져야겠다는 욕구가 강렬해졌음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옛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는 케냐 ·탄자니아 ·잔지바르(탄자니아에 합병) ·니아살랜드(말라위) ·남북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와 잠비아)가 공동으로 우간다의 마케레레대학을 설립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로디지아 니아살랜드대학이 남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대학으로 신설되었다. 지금은 케냐 ·탄자니아 ·잠비아 ·말라위 각국이 각각 대학을 신설하였다.

독립과 동시에 자국의 대학을 설립하려는 경향은 정치체제나 문화적 전통을 달리하는 자국의 청년을 다른 나라의 정치나 문화의 테두리 속에서 교육시키는 것이 민족지도자의 육성이라는 측면에서 불합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 자국의 대학을 가지지 못한 옛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 ·베냉 ·니제르 등의 청년들이 세네갈의 다카르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대학 당국이나 세네갈정부의 정치현실에 불만을 느껴 소요를 일으키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또 정치체제를 달리하는 나라의 대학을 나온 청년들이 모국에 들아와 반정부활동의 지도자가 되는 예도 많다.

3. 매스커뮤니케이션

아프리카에서의 고등교육의 경우와 비슷한 움직임은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나타난다. 독립 당시에 라디오방송국이 없는 나라는 없었으나, 텔레비전 방송을 하는 나라는 적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텔레비전 방송국을 가지지 않은 나라가 별로 없다. 라디오는 국제방송이 활발하여 각국의 라디오 청취자는 자국의 라디오보다도 국제방송을 듣는 경우가 많다.

문맹자 가운데에는 자기 나라 지도자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모르고 자기 나라 정부의 정책조차도 모르는 일이 많다. 그러기 때문에 경제성을 도외시하고 국영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하여 민중에게 자국의 지도자나 그 정책을 알림으로써 민족의식이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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