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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2-14 (화)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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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2차세계대전 1 (브리)
제2차 세계대전 第二次世界大戰 World War Ⅱ 제2차 세계대전 1

Second World War라고도 함.

세계 경제공황 후 모든 강대국들이 참여한 전쟁(1939~45).

주요참전국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이상 추축국[樞軸國])과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이상 연합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둔 분쟁이 20년 동안의 불안한 잠복기를 거쳐 다시 폭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이었다. 이 전쟁은 유럽 대륙 전역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섬들,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세계의 바다를 무대로 전개되었다(→ 색인 : 아시아, 아프리카).

제2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지정학적 역사의 분수령으로서, 소련의 세력이 동유럽 여러 나라까지 뻗치는 결과를 낳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000만~5,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인 동시에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추축국의 선제 공격과 연합군의 대응

전쟁의 발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국민의 굴욕감과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 바이마르 공화국을 괴롭힌 사회 혼란 및 정치 불안은 극렬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를 지향하는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초래했다. 1933년에 독재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은밀히 독일을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 강국들이 독일 재무장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기 주저하는 것을 이용하여, 히틀러는 1936년 3월에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라인란트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1936년말 이미 에티오피아에서 침략행위에 들어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로마와 베를린을 잇는 '추축'을 선언했다. 이듬해 이탈리아는 독일과 일본이 1936년에 맺은 반(反)코민테른 협정에 참여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1936년부터 스페인 내란에 개입했다.

1938년 3월 히틀러는 독일군을 보내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오스트리아는 당장 독일에 병합되었다. 1939년초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점령하기로 결심했다. 폴란드는 독일이 공격해올 경우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원조를 보장받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어떻게 해서든 폴란드를 침략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련이 서쪽의 인접국가가 침략당하는 것에 반발할 가능성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는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여, 8월 23~24일에 모스크바에서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동서로 나누어, 폴란드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서부를 독일이 갖고 나머지 2/3에 해당하는 동부를 소련이 접수한다는 데 합의했다. 8월 25일에 영국과 폴란드가 정식으로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며칠 연기했다. 그러나 그를 제지하려는 서양 열강의 외교적 노력을 무시하겠다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1939년 8월 31일 낮 12시 40분, 마침내 히틀러는 이튿날 새벽 4시 45분에 폴란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침공은 명령대로 시작되었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유럽 참전국들의 전투력

1939년 9월 무렵 연합국, 즉 영국·프랑스·폴란드는 산업자원과 인구 및 병력면에서 모두 우세했지만, 독일군은 무기와 훈련, 작전이론, 규율 및 사기 때문에 그 규모에 비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유용한 군대였다. 1939년의 전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군 보병사단의 질적인 우세와 기갑사단수였다. 예를 들어 독일은 1939년 9월에 6개 기갑사단을 갖고 있었지만, 연합군은 탱크를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당시 기갑사단은 하나도 없었다. 독일 공군(Luftwaffe)도 1939년 당시 세계 최고였다.

독일 공군은 육군을 지원하기 위한 지상 협력군이었지만, 독일 공군의 항공기는 연합국이 보유하고 있는 거의 모든 유형의 항공기보다 뛰어났다. 1935~39년에 전투력을 재정비하는 동안, 독일 전투기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났다. 독일 해군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당시보다 훨씬 불리한 상태였다. 1939년 9월의 시점에서 연합국이 독일보다 훨씬 많은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표1. 독일의 연간 항공기 생산표2. 연합군의 공군력(1939.9)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1939~41년의 유럽 전선

독일의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독일이 재무장을 시작하면서 채택한 작전 개념인 고속 기갑전투가 첫선을 보인 무대였다 (→ 색인:기갑사단). 폴란드는 약 5,760km에 이르는 엄청나게 긴 국경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시범을 보이기에 최적격인 나라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폴란드 육군은 100만 명이라는 많은 수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 육군은 애처로울 만큼 시대에 뒤져 있었고, 탱크, 병력 수송용 장갑차, 대전차포, 대공포도 전혀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폴란드군 지도자들은 대부분 기병이 폴란드 육군의 중요한 자산이며 독일의 기계화 부대쯤은 충분히 공격할 수 있다는 2가지 믿음에 매달려 있었다. 또한 이들은 폴란드 공군보다 거의 10배나 강력하고 우수한 독일 공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다. 독일의 공격은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되었다. 9월 중순에 이미 폴란드의 방어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부대는 뿔뿔이 흩어져,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고립된 부대는 저마다 닥치는 대로 분투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9월 17일 소련군이 서쪽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들어왔다. 바르샤바의 폴란드인들은 공포의 폭격과 집중포화를 견디며 9월 28일까지 독일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독일군은 민간인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비오듯 포탄을 퍼부어, 바르샤바 시의 상당 부분을 폐허로 만들었다. 폴란드 육군 중 마지막까지 남은 상당수의 병력이 10월 5일까지 독일군에 저항했다. 독일군은 총 70만 명을 포로로 잡았고, 폴란드 병사 약 8만 명이 국경을 넘어 중립국으로 탈출했다. 폴란드 전체 사상자(사망자·부상자·실종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독일군은 약 4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어 독일군과 소련군이 폴란드에 진군했고 이들은 폴란드를 분할점령했다 (→ 색인:폴란드 전투).

러시아-핀란드 전쟁

독일과 맺은 협정으로 짧은 기간에 쉽게 이익을 얻은 소련은 1939년 10월 10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로 화살을 돌려, 그들의 영토에 소련군 수비대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비슷한 요구를 받은 핀란드는 소련의 요구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소련군은 결국 약 70개 사단(약 100만 명)을 약 1,000대의 탱크를 동원해 파병하고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 공격을 시작했다. 침략군은 핀란드 북쪽 끝에 있는 북극해 연안의 작은 항구 페차모를 고립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이 진격로로 선택한 모든 전선에서 굴욕스럽게 격퇴당했다.

소련의 작전계획수립자들은 핀란드 국민의 투지와, 수많은 호수와 숲이라는 천연장애물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서구 열강은 소련이 맛본 굴욕을 공공연히 기뻐했다. 핀란드가 초기에 거둔 승리로 히틀러의 야욕은 더욱 드높아졌고 또 서구 민주주의국가들은 소련의 군사적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 전략가들은 지난 번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모든 것을 분쇄시킬 만한 맹렬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1940년 3월 마침내 핀란드를 굴복시켰다. 핀란드는 이 전투에서 약 7만 명, 소련은 2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유럽 서부 전선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과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 실패로 대담해진 히틀러는 다른 나라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노르웨이에 약 30만 명의 주둔군을 배치했고, 이 병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노르웨이에 남아 있었다.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점령함으로써 스웨덴에서 독일로 들어오는 철광석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고, 필요할 경우 영국을 공격할 수 있는 해군 및 공군 기지를 얻었다. 독일군은 노르웨이에 진군하는 동시에 4월 9일에는 덴마크를 점령했다.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단숨에 휩쓴 뒤 프랑스로 진격했다. 80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 상비군은 당시에 유럽 최강의 군대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물려받은 수비적 대응자세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네덜란드 육군 역시 현대전 경험이 전혀 없었다. 독일군이 저지대국가들을 맹공하고 있다는 소식은 연합국을 경악시킴과 동시에 연합국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1가지 결과를 낳았다. 즉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 5월 10일 저녁에 사임한 것이다. 전쟁 수행에 열의가 없는 그의 태도는 5월 7~8일 영국 하원에서 열린 노르웨이 파병에 관한 토론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윈스턴 처칠이 후임 총리가 되었고 그는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히틀러의 신속한 공격으로 영국 원정군의 유럽 철수에 이용할 수 있는 항구는 케르크(프랑스) 하나만 남았고, 영국 내각은 마침내 구출 가능한 병력을 최대한 구출하기로 결정했다. 영국 해군부는 병력 철수에 도움이 될 만한 온갖 종류의 소형 선박을 끌어모았다. 영국군과 함께 다른 연합군도 독일군이 됭케르크마저 점령해버리기 전에 병력을 해안으로 철수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철수는 5월 26일에 시작되었고, 철수 작전이 끝난 6월 4일까지 19만 8,000명의 영국군과 14만 명의 프랑스군 및 벨기에군이 구조되었다. 중장비는 사실상 모조리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구조된 병사들은 영국의 경우 대부분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로, 연합국 전력에 귀중한 보탬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참전

무솔리니는 프랑스가 붕괴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이탈리아도 비교전정책(非交戰政策)을 버려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독일과 맺은 협력 관계에서 확고한 이익을 얻으려면, 독일이 혼자 힘으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을 무찌르기 전에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알프스 국경에 약 30개 사단을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상태로 배치한 이탈리아는 프랑스 남동부에 대한 공격을 6월 20일까지 늦추었지만, 이 공격은 프랑스 방위군의 저항에 부딪쳐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독일의 프랑스 점령

독일군은 1940년 6월 14일 파리에 입성했고, 프랑스 서쪽 및 동쪽 변경을 따라 남쪽으로 더욱 깊숙이 진격해 2일 뒤에는 론 강 유역에 이르렀다. 6월 16일 밤 프랑스의 휴전 요청이 히틀러에게 전달되었다. 휴전 조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독일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1940년 6월 22일 마침내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협정이 르통데에서 조인되었다. 르통데는 1918년에도 휴전협정이 조인된 곳이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휴전협정은 6월 24일에 조인되었다. 이 두 휴전협정은 6월 25일 아침부터 효력을 발생했다.

6월 22일의 휴전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두 지역으로 나누어지고, 그중 한 지역은 독일군이 점령하는 대신 다른 한 지역에서는 프랑스가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점령 지역은 프랑스 북부지역 전체였다. 비점령지역인 남동부 지역은 프랑스 영토의 2/5에 불과했고, 정부는 비시에 있었다. 이탈리아는 매우 관대한 조건으로 프랑스와 휴전을 맺었다. 이탈리아가 주장한 프랑스 영토는 이탈리아군이 6월 20일부터 점령하고 있었던 국경 주변의 좁은 지역이었다.

1940년 6월 프랑스의 붕괴는 영국 해군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막강한 프랑스 해군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탈리아 해군도 영국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군함들이 독일 수중에 들어가면 해군력의 균형이 추축국 쪽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에, 독일이 프랑스 군함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전략적으로 영국에 엄청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 군함이 '해상 감시와 기뢰 제거 작업'에만 사용될 것이라는 프랑스 정부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1940년 7월 3일 영국군은 영국이 통제하고 있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모든 프랑스 군함을 압류했다. 프랑스 해군은 저항하는 시늉만 했다.

영국과의 공중전

프랑스 점령으로 히틀러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적인 영국 쪽으로 병력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영국해협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막강한 독일 육군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1940년 7월 16일 히틀러는 영국 침공 계획을 마련하고 필요하다면 그 계획을 실행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영국의 막대한 해군력을 고려하면, 독일이 전투 지역에서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어야만 육해공군이 합동으로 영국을 침공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독일 공군의 총수는 8월 2일에 '독수리의 날'이라는 훈령을 내리고, 공중에서 몇 차례 강력한 공습을 가하여 영국 공군력을 파괴함으로써 영국 상륙 작전의 길을 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공중전은 영국군의 승리로 끝나 히틀러는 영국 침공을 무기한 연기했다. 영국 공군의 승리는 영국이 살아남고 전쟁이 연장됨으로써 결국 나치 독일을 무찌르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영국의 저항 때문에 히틀러는 계획을 바꿨다. 그는 원래 1943년에 소련을 기습할 계획이었으나 1940년 7월 영국이 저항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미국이 독일에 대해 점점 더 비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1941년 5월 소련의 유럽 지역 점령 작전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독일의 막강한 힘을 영국에게 과시하고 미국이 유럽에 개입하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해서였다.

중부 유럽 및 발칸 지역

그러나 그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히틀러는 다시 한번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거쳐 루마니아까지 독일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다. 그는 루마니아의 유전을 소련의 공격에서 지키고 루마니아의 병력을 독일 합동군에 편입시킬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40년 11월 이탈리아가 그리스 침공에 실패한 뒤, 히틀러는 헝가리·루마니아·슬로바키아를 추축국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불가리아는 1941년 3월에 추축국에 가담했다. 4월에 독일은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했다.

1941년 4월 6일 동시에 전개된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공격은 독일이 그때까지 치른 전투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4월 22일 그리스 육군이 항복했고 5월 11일까지 독일군은 그리스 본토 전역과 크레타 섬을 제외한 에게 해의 그리스 섬들을 모조리 점령했다. 그리스에 주둔해 있던 영국군 5만 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탱크를 비롯한 중장비를 모조리 내버린 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황급히 철수했다.

유고슬라비아 전투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육군 34만 명이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리스 전투에서는 22만 명의 그리스군과 2만 명의 영국 및 영연방군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발칸 지역 전투에서 독일군은 통틀어서 2,500명의 사망자와 6,000명의 부상자 및 3,000명의 실종자를 냈다. 그리스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정부는 그들의 군대가 무너지자 망명길에 올랐다. 점령국 처리문제는 추축국들의 뜻에 맡겨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즉 1941년 4월 10일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는 영토가 더 넓어져 대(大)크로아티아가 되었고, 독일인들은 1941년 8월 세르비아에 괴뢰정부를 세웠다.

그밖의 전선(1940~41)

발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영국 지상군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북아프리카에서 거둔 최초의 대승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영국에 선전포고했을 때, 키레나이카(지금의 리비아)에는 거의 30만 명에 이르는 이탈리아군이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중동 지역의 영국군 최고 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경이 이집트에 배치한 3만 6,000명의 영국군과 대치해 있었다. 웨이벌 경은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고, 약 3만 명의 영국군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8만 명의 이탈리아군을 공격했다.

영국군은 병력면에서는 수가 훨씬 적었지만, 이탈리아군이 탱크 120대를 보유한 데 비해 275대의 탱크를 갖고 있었다. 3일 만에 영국군은 4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가 이집트 주둔 영국군을 그리스로 파견하겠다는 처칠의 제의를 받아들이자 조기 진격은 위험해졌다. 이집트 주둔군이 그리스로 빠져나가면 북아프리카의 영국군 전력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병력의 감소가 중대한 결과를 낳은 것은 히틀러가 2월 6일에 젊은 장군 에르빈 로멜을 2개 기계화 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이 기계화 사단은 이탈리아군을 돕기 위해 되도록 빨리 아프리카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로멜은 아프리카에 도착해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크게 줄어든 웨이벌 경의 영국 병력에 맞서 그는 순식간에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 색인:북아프리카 작전).

웨이벌 경이 그전에 북아프리카에서 거두었던 멋진 성공은 독일군에 대항하여 발칸 전선을 형성하겠다는 처칠의 집요한 구상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그리스 때문에 키레나이카를 잃은데다 그런 희생을 치르면서 도와준 그리스마저 아무런 소득 없이 독일군에 빼앗기자, 처칠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1941년 여름에 웨이벌 경을 해임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웨이벌 경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서 거두었던 승리는 수에즈 운하를 남쪽에서 위협하는 요소와 케냐를 북쪽에서 위협하는 요소를 한꺼번에 제거한 중요한 것이었다.

미국의 지원

이탈리아가 독일편에 가담하여 참전하고 프랑스 함락이 임박한 1940년 6월 10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미국의 물자를 폭력과 맞서 싸우는 세력에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가 함락된 뒤, 그는 이 정책에 따라 독일과 싸우는 영국을 도왔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낡은 구축함 50척을 영국의 일부 대서양 기지와 교환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미국의 잉여 전쟁물자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또한 그는 영국이 미국에 군수품을 주문하는 절차를 간편하게 해주었다. 영국은 지불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미국에 의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1940년 12월까지 영국은 끌어모을 수 있는 달러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전쟁물자를 미국에 주문했다. 처칠은 1940년 12월 루스벨트에게 무기 대여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군수 물자와 식료품 및 의류를 민주주의 국가(특히 영국)에 제공해달라고 제의했다.

루스벨트는 동의했고, 미국 의회는 1941년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무기대여법은 어떤 나라의 방위가 미국 안보에 긴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 나라 정부에 방어 물자와 역무(役務) 및 정보를 넘겨줄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도 대통령의 재량에 맡겼다.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이 법률 덕분에 루스벨트는 '폭력과 맞서 싸우는 세력'에 물질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정책을 사실상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었다. 의회는 원조 자금도 너그럽게 인정하여, 1941년 11월까지 총액이 거의 13조 달러에 이르렀다 (→ 색인:무기대여정책).

영국과 독일의 전략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영국 해군의 주요관심사는 우선 영국을 침략에서 지키는 것이었고, 영국에 반드시 필요한 식량 및 원료 공급로를 지키는 동시에 추축국의 교역로를 봉쇄하기 위해 해상 교역로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전함과 항공모함 및 순양함과 그밖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 해군의 역할은 독일 해안을 지키고 독일의 해상수송을 보호하는 한편, 연합국의 해상수송을 공격하고 지상 및 공중 작전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소박한 목표는 우세한 지상군에 바탕을 둔 유럽 대륙의 강대국이라는 독일의 지위와 어울리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해군의 주요무기는 U-보트라는 잠수함이었다. 독일 해군은 잠수함으로 연합국 선박을 공격했고, 수상함대도 연합국의 해상 교역을 좀더 적극적으로 방해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광범위한 권력 정치체계와 그의 인종주의 이념을 염두에 둘 경우에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택한 전략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1920년대부터 히틀러는 우선 독일에서 권력을 잡고, 다음에는 중부 유럽에 대한 독일의 지배권을 강화하며, 그 다음에는 2단계를 거쳐 독일을 세계 강대국의 지위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가 생각한 2단계는 ① 유럽 대륙 전체를 포함하는 대륙 제국을 건설하고, ②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얻고 대서양에 기지를 둔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여 독일을 대영제국과 일본 및 미국과 동등한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다음 세대에는 독일과 미국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것으로 히틀러는 내다보았으며, 이 전쟁에서는 영국이 독일의 동맹국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히틀러의 일정표에 따르면, 독일이 소련의 유럽 지역을 점령하는 시기는 대략 1943~45년으로 잡혀 있었다. 히틀러는 그 전에 우선 유대인 말살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대규모 동방 원정에 대비하여 독일의 후방을 안전하게 하고 전략적 방패를 마련하기 위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단기간의 국지전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국지전은 프랑스 침공이 될 것이다. 이러한 유럽 계획이 완전히 실현될 때까지는 세계전쟁을 피해야만 했다. 독일 제국이 유럽 대륙을 지배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독일은 경제적 기반과 넓은 영토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세계의 해양 강국에 맞서게 될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수적인 선행 조건이었다.

히틀러는 항상 소련 체제의 타도에 골몰했고, 1939년에 맺은 독·소불가침조약을 일종의 편법으로 생각하여 기뻐했지만, 볼셰비즘에 대한 반감은 그의 감정에 가장 깊이 뿌리박힌 확신으로 남아 있었다. 소련이 발트 해 연안국들을 점령하고, 그결과 독일이 의존하고 있는 루마니아 유전에 소련군이 바싹 다가오게 된 것은 소련에 대한 그의 반감을 다시 한번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또한 히틀러는 소련의 지도자 요시프 스탈린의 속셈을 의심하게 되었다.

1941년의 소련 침공

1941년 6월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개시했다. 독일은 300만 명으로 이루어진 150개 사단을 이 원정에 할당했다. 이 가운데에는 기갑사단도 19개나 포함되어 있었고, 원정군은 탱크 3,000여 대와 각종 야포 7,000문 및 항공기 2,5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최강의 침략군이었다. 소련은 독일보다 2~3배나 많은 탱크와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소련 항공기는 대부분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었다. 그러나 소련 탱크는 독일 탱크와 거의 대등했다.

히틀러가 승리할 가능성을 줄인 더 큰 장애물은 스탈린이 깊숙한 후방에서 동원할 수 있는 예비 병력을 독일 정보부가 과소 평가한 것이었다. 그결과 독일군이 처음 만난 소련군을 뛰어난 기술로 분쇄하고 나자, 다시 새로운 부대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초기에 승리를 거둔 뒤 어느 쪽으로 진격할 것인가를 놓고 히틀러와 그의 참모들이 논란을 벌이면서 8월의 대부분을 허송했기 때문에, 정보부의 계산 착오가 낳은 결과는 훨씬 더 확대되었다. 독일의 계산에는 순전히 정치적인 요인도 작용했지만, 이 정치적 계산도 군사적 계산 못지 않게 잘못된 것이었다. 독일은 그들이 침략한 지 3~6개월 안에 소련 정권이 국내의 지지를 얻지 못해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다 (→ 색인:동부전선).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영국의 상황은 당장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때까지 영국인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이 보기에 영국의 장래는 절망적이었다. 영국정부는 프랑스가 함락된 뒤에도 히틀러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고 계속 싸우리라고 결정했지만, 미국이나 소련이 구원하러 오지 않을 경우 이 결정은 서서히 자멸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었다. 그런데 영국을 구해준 것은 엉뚱하게도 히틀러였다. 영국이 견디기 어려운 중압을 느끼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히틀러는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소련을 공격한 것이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루스벨트는 소련을 돕기로 결심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 대중의 의혹 때문에 소련도 미국의 무기 대여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선언을 1941년 11월까지 미루었다. 미국은 루스벨트의 선언이 이루어진 직후에 항공기와 탱크를 비롯한 보급품을 소련에 인도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기습 공격에 소련은 완전히 허를 찔렸고, 독일군은 초기에는 순조로운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고립된 소련군은 프랑스군과는 달리 완강하게 버티며 싸웠고, 독일군이 물밀듯이 휩쓸고 지나간 지 한참 뒤에도 주요도로를 계속 봉쇄함으로써 독일군을 견제했다. 후퇴하는 소련군이 채택한 초토화 정책도 독일군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진격에 직면하면 재빨리 농작물을 불태우고 다리를 파괴하고 공장을 비우면서 후퇴했다. 소련인들은 서쪽 끝에 있는 철강공장과 군수품공장의 생산 설비를 모조리 제거하여 철도를 통해 동부로 운반했고, 동부에서 다시 조립하여 강철과 군수품을 생산했다. 소련인들은 또한 철도 차량을 대부분 파괴하거나 철수시켰다. 또한 소련의 철도 궤도는 독일의 궤도와는 서로 간격이 달랐기 때문에 독일군은 소련의 철도망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7월 중순까지 독일군은 640km를 진격하여, 모스크바에서 32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이르렀다. 독일군은 오랫동안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지만, 곧 초겨울 날씨와 소련군의 반격에 부딪혀 공세를 잠시 늦출 수밖에 없었다. 10월과 11월에는 겨울옷을 아직 지급받지 못한 독일군의 상당수가 동상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얼어붙을 듯한 추위는 독일군의 기계화된 수송 기관과 탱크, 야포 및 항공기를 마비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련군은 두툼한 옷을 입었고, 겨울에는 독일군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투력을 과시했다.

이 무렵 독일군 사상자 수는 이미 프랑스 전투와 발칸 전투에서 생긴 사상자 수를 훨씬 뛰어넘었다. 11월까지 독일군은 약 73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침략군은 장군에서 병졸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의 비참한 모스크바 철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긴급 상황에서 히틀러는 지역에 따라 잠시 물러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걸음도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그의 결정으로 독일군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태평양 전쟁

중국에서 아무 소득도 없이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에 싫증난 일본은 유럽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강탈하기로 결심했다. 네덜란드령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영국이 차지하고 있는 말레이 반도에는 일본의 산업 경제에 필요한 원료(주석·고무·석유)가 있었다. 일본이 이 지역을 빼앗아 일본 제국에 병합할 수 있다면 사실상 경제 자립을 이룩할 수 있고, 그리하여 태평양의 지배세력이 될 수 있었다. 1940년말까지 일본 전략가들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도 일본이 상대할 적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1년이 되자, 영국·네덜란드·미국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연합 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를 주축으로 한 일본 전략가들은 대담한 전쟁 계획을 새로 세웠다. 일본은 태평양 확전(擴戰)의 주된 상대국으로 예측한 미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1년 12월 7~8일에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에 있는 미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했다.

야마모토의 계획에 따라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 타격대는 미국 정찰대에 포착되지 않은 채 하와이 북쪽 440km 지점에 이르렀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이 항공모함에서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雷擊機) 및 약간의 전투기로 이루어진 360여 대의 항공기가 새벽 공기를 뚫고 2패로 나뉘어 날아올랐다. 이 항공기들은 진주만에 있는 거대한 미국 해군 기지로 기수를 돌렸다. 당시 이 기지에는 미국 전투함 70척과 보조함정 24척 및 300여 대의 항공기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완전히 기습당했고, 정박중이던 전함 8척이 모두 공격받았다(그러나 이 가운데 6척은 수리되어 다시 해군에서 활약했음).

순양함 3척과 구축함 3척, 기뢰 부설함 1척을 비롯한 수많은 함정이 파손되었고, 180대가 넘는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며 나머지도 손상되었다. 2,000명이 넘는 장병이 죽었고, 부상자도 1,0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은 1가지 중요한 점에서 실패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당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나가 있어서 피해를 면했고, 이 항공모함들은 그후 미국 해군의 초기 태평양 방위체제에서 핵심이 되었다. 진주만 해안에 있는 군사시설과 유류 저장 설비도 피해를 면했다. 일본이 예고 없이 감행한 진주만 기습공격은 미국국민을 단결시켰고, 미국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말끔히 없앴다. 12월 8일 미국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반대한 의원은 단 1명뿐이었다.

진주만을 공격한 바로 그날, 타이완[臺灣]에 기지를 둔 일본 폭격기들은 필리핀에 있는 클라크 군용비행장과 이바 군용 비행장을 공격했다(현지 시각으로는 12월 8일). 미국 극동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의 50% 이상이 파괴되었다. 2일 뒤, 일본은 다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전투기를 더 많이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역시 필리핀에 있는 카비테 해군기지도 파괴했다. 그러나 미국 아시아 함대의 일부는 11월에 이미 남쪽으로 내려갔고, 살아남은 주요함정과 폭격기는 보호해 줄 전투기가 없어서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후 2주간 더 남쪽에 있는 안전한 기지로 철수했다. 필리핀에는 지상군 이외에 전투기 몇 대와 잠수함 30여 척, 그리고 몇 척의 소형 선박이 필리핀을 방어하기 위해 남았다.

마닐라는 1942년 1월 2일 일본군에 함락되었지만, 그때 이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의 미군과 필리핀군은 바타안 반도(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마닐라와 마주보고 있는 반도)와 코레히도르 섬(마닐라 만에 있는 섬)을 지킬 태세를 갖추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바타안 반도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했지만, 일본은 그후 8주간 계속 병력을 증강했다. 맥아더는 3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로 전속 명령을 받고 떠나면서, 바타안 방어를 조너선 M. 웨인라이트 중장에게 맡겼다. 웨인라이트 중장과 그의 부하들은 4월 9일에 항복했다. 코레히도르 섬은 5월 5~6일 밤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필리핀 남부는 3일 뒤에 항복했다.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양쪽의 전사자는 각각 5,000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일본 폭격기들은 1941년 12월 8일에 이미 홍콩에 있는 영국 공군력을 파괴했고, 영국과 캐나다 수비대는 크리스마스에 광둥 반도[廣東半島]에서 건너온 일본 지상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했다. 일본군은 남쪽의 말레이 반도로 진격하는 동안 측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12월 9일에 방콕을 점령했고 12월 16일에는 미얀마(버마) 남쪽 끝에 있는 빅토리아 곶을 점령했다. 12월 8일부터 일본군은 여느 때처럼 공습과 함께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여, 소규모의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인도군을 압도했다.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와 순양함 리펄스호는 일본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싱가포르를 떠났지만, 12월 10일 일본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1942년 1월말 일본군 2개 사단은 공군과 기갑부대의 지원을 얻어 싱가포르 섬을 제외한 말레이 반도 전체를 점령했다.

일본은 순식간에 필리핀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점령했다. 1942년 2월 25일 일본군에 점령되지 않은 곳은 자바 섬뿐이었다. 연합군은 자바 섬을 침략하는 일본 함대를 차단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2월 27일 자바 해에서 벌어진 7시간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전함 5척을 잃었고, 일본군은 구축함 1척만 약간의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3월 9일 자바 섬에 주둔해 있던 연합군 2만 명이 항복했다.

그 직후 태평양 지역에는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전략 지시를 받는 미국·영국 통합 참모부가 설치되었다. 맥아더는 남서태평양 지역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주요임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잇는 병참선을 지키고, 일본군을 태평양 안에 가두어놓고, 북아메리카 방위를 지원하고, 육해공군 합동 작전에 따른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당초 계획은 자바 섬 점령으로 실현되었지만, 미국 태평양 함대는 1942년 2월 1일에 마셜 제도를 공격했고 2월 23일에는 웨이크 제도를 공격했으며, 3월 1일에는 마커스 섬을 공격했다.

이와 함께 2월 23일에는 라바울을 폭격했고, 오스트레일리아에 기지를 세워 남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병참선을 확립했다. 그러자 일본은 계획을 확대하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어진 연합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누벨칼레도니,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뉴기니 동부도 차지하여 포트모르즈비에 비행기지를 만들면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은 북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고 알류샨 열도에 비행기지를 만들 계획도 세웠다.

1942년 4월 18일에 미군 폭격기 16대가 도쿄[東京]를 공격했다. 이 공습은 일본정부의 위신을 떨어뜨렸을 뿐 진정한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연합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5월 7일 일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이 미군 구축함 1척과 유조선 1척을 격침했다. 그러나 미군 전투기들도 일본군의 소형 항공모함 쇼호호와 순양함 1척을 침몰시켰다. 이튿날 일본 전투기들은 미국 항공모함 렉싱턴호를 격침하고 항공모함 요크타운호에 손상을 주었지만, 일본군의 대형 항공모함 쇼카쿠호는 심한 손상을 입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전투에서 너무 많은 항공기를 잃었기 때문에 포트모르즈비 점령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아마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싸움에 결말을 내기 위해 대형 항공모함 4척과 소형 항공모함 3척, 수상비행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2척, 전함 11척, 순양함 15척, 구축함 44척, 잠수함 15척, 그리고 잡다한 소형 함정들을 집결시켰다. 미국 태평양함대는 대형 항공모함 3척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잠수함 19척만 갖고 있었지만, 함대를 지원해줄 항공기를 115대가량 보유하고 있었다. 6월 3일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기 위해 출발한 일본 전함들이 목표 지점에서 800km 떨어진 곳에 이르자, 미국 폭격기들이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본군은 6월 4일 새벽에 항공기를 보내어 미드웨이 섬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하고, 대형 순양함도 1척 침몰시켰다. 6월 4~5일 밤에 일본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이미 손상을 입었던 미국 항공모함 요크타운호는 6월 6일에 어뢰를 맞고 침몰했지만, 미드웨이 섬은 안전했다.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과 가장 우수한 해군 조종사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연합국이 미드웨이에서 거둔 승리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그후 일본과 연합국의 해군력은 사실상 대등해졌다. 일본은 전략의 주도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벨칼레도니와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의 침략 계획을 취소했다.

일본이 서방 연합국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여한 것은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 1941년 12월 9일 장제스[蔣介石] 정부는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을 뿐만 아니라(이는 오래 지체시킨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음), 독일과 이탈리아에게도 했다. 이것은 군사적 의도보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선전포고였다. 이어서 중국의 3개 야전군은 미얀마 국경으로 몰려갔다. 미얀마 공로(公路)는 서방 연합국이 중국에 보급품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육로였기 때문이다. 1942년 1월 3일 장제스는 중국 전투 지역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인정되었다. 미국의 조지프 W. 스틸웰 장군이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파견되었다. 장제스와 스틸웰은 일본군의 미얀마 진격을 저지하는 일에 몰두했다.

1941년 가을부터 1942년 봄까지

미국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모들은 1940년 11월 이래 '유럽 우선원칙'을 바탕으로 전략계획을 수립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상대로 동시에 참전하게 된다면, 유럽에서 공세를 펴고 있는 동안 태평양에서는 방어작전만 수행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참전으로 미국의 비교전(非交戰) 입장은 끝났다. 루스벨트와 처칠 및 그 참모들은 1941년 12월 22일 워싱턴에서 '아르카디아'라는 이름의 3주간 회담을 열었다.

여기서 미국측은 유럽 우선원칙의 유지를 재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2가지 계획안을 제시했다. '슬레지해머'라는 암호명을 가진 첫번째 시안은 영국이 프랑스에 상륙하기로 결정할 경우 영국의 공격력을 증강하기 위한 계획안이었고, '슈퍼짐내스트'라는 암호명을 가진 2번째 안은 영국이 리비아의 독일군 후방에 상륙하는 작전(이 상륙 작전은 '짐내스트'라는 암호명으로 이미 계획되어 있었음)과 미국이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카사블랑카에 상륙하는 작전을 하나로 묶은 것이었다.

한편 처칠은 소련의 용기를 북돋아줄 만한 일을 찾기에 골몰하고 었었다. 1942년 7월 17일에 이미 그는 독일군이 북극해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 때문에 러시아 북부로 보급품을 보내는 것을 당분간 중지해야겠다고 스탈린에게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43년 이전에는 유럽에 제2전선이 형성되지 않으리라고 스탈린에게 알리는 것은 더욱 난처한 일이었다.

1942년 내내 스탈린은 유럽 제2전선을 형성하라고 계속 압력을 넣었고, 다른 연합국의 공산당과 친소주의자들도 스탈린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미국의 육군 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장군은 1943년에 제2전선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42년 11월초에 처칠과 루스벨트는 영국 해협 건너편의 영국이 아닌 지중해 건너편의 북아프리카가 다음 대규모 작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42년 7월 내내 계속된 제1차 엘알라메인 전투는 이집트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독일군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너무 먼 거리를 너무 빨리 진격해 온 로멜 부대는 기진맥진해 있었고, 그들의 첫번째 공격은 클로드 오킨렉 경(웨이벌의 후임으로 중동 지역을 맡게 된 영국군 최고사령관)이 끌어모은 수비대를 분쇄하지 못했다. 영국군은 기진맥진한 나머지 반격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지만 로멜도 부하들에게 휴식을 주어야 했고, 덕분에 오킨렉 장군은 증원군을 투입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7월말에 이르자, 로멜은 이제 오킨렉이 아니라 자신이 수세에 몰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합국이 거둔 최초의 결정적 승리

태평양 전선(1942. 7~1943. 5)

1942년 7월 2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뉴브리튼 섬과 뉴아일랜드 섬, 솔로몬 제도 및 뉴기니 섬 동부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3단계의 제한공격을 명령했다 (→ 색인:태평양전쟁). 첫번째 단계에서는 툴라기 섬과 산타크루즈 제도를 인접 지역과 함께 점령하고, 2번째 단계에서는 솔로몬 제도 중부와 북부 및 뉴기니 섬의 북동해안을 점령하고, 3번째 단계에서는 비스마르크 제도의 라바울과 그밖의 지점들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미국의 태평양 방면 전략은 해군과 해병대를 이용하여 고리처럼 늘어서 있는 섬들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일본을 향해 진격하는 한편, 그보다 적은 규모의 지상군은 아시아 본토에서 중국군 및 영국군과 합동작전을 편다는 것이었다 (→ 색인:동부솔로몬제도 전투). 1943년 1월 5일 과달카날 섬(솔로몬 제도 남부의 섬)에서는 4만 4,000명에 이르는 연합군 수비대가 일본군 2만 2,500명과 대치해 있었다. 진지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 일본군은 2월초에 대담한 구축함 돌파 작전으로 1만 2,000명의 병력을 넘는 사상자를 냈다.

과달카날 전투의 지상 전투에서 일본군은 2만 4,000명 이상의 인명손실을 냈다. 연합군은 약 1,600명의 사망자와 4,250명의 부상자를 냈다(이 숫자에는 질병에 희생된 더 많은 수의 사상자는 포함되지 않았음). 연합군이 과달카날 섬과 파푸아 섬을 탈환함으로써 일본군의 남진은 끝났고,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까지 이어진 병참선은 이제 안전해졌다. 파푸아 섬에서 일본군은 1만 2,00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고, 350명이 포로로 잡혔다. 연합군 쪽에서는 3,500명이 전사하고 5,500명이 부상했다. 연합군 공군은 일본군 보급로를 차단하고 연합군의 보급품과 증원군을 수송함으로써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달카날 섬을 잃은 일본은 그때부터 수세에 몰리게 되고, 전망은 점점 어두워졌다. 라바울의 거점에서 뉴기니에 있는 라에살라마우아 진지로 증원군을 파견하려는 일본군의 마지막 노력은 바로 하나의 재앙이었다. 1943년 3월 2~4일에 벌어진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일본군은 구축함 4척과 수송선 8척을 잃었으며, 7,000명의 병력 가운데 목적지에 도달한 것은 1,000명뿐이었다. 몇 주일 뒤 연합군은 뉴기니에 있는 진지를 보수했고, 일본군은 공중에서 공격하는 것 말고는 연합군의 활동을 방해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4월말이 되기 전에 일본 해군은 또다시 재난을 당했다. 3월말에 라바울에 기지를 둔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파견된 야마모토가 부건빌 섬으로 날아가다가 연합군 전투기의 습격을 받고 전사했던 것이다.

한편 북태평양에서 미국은 알류샨 열도의 일본군을 쫓아내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일본이 알래스카에 있는 미국군 기지를 넘보지 못하게 하고, 일본인들로 하여금 미국이 알류샨 열도를 통해 일본 본토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오판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1942년 8월에 미국은 알류샨 열도의 에이댁 섬에 병력을 상륙시킨 뒤, 다음달에는 에이댁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키스카 섬과 애투 섬에 대한 공습을 개시하는 한편, 해군은 일본군이 수비대를 증원하지 못하도록 섬을 봉쇄했다. 마지막으로 미국군은 키스카 섬을 우회하여 1943년 5월 11일에 애투 섬을 침공했다. 3주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애투 섬을 지키고 있었던 일본군 2,300명은 거의 전멸했다. 그후 일본군은 키스카 섬에서도 철수했다. 알류샨 열도에 기지를 얻은 연합군은 쿠릴 열도를 폭격하기가 더 수월해졌다.

유럽 및 아프리카 전선(1942~43)

이집트에서는 처칠이 오킨렉의 후임으로 임명한 버너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몇 주일 동안 준비작업을 거친 뒤, 1942년 10월 23~24일 밤에 엘라메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색인:엘알라메인 전투). 10월 중순까지 제8군은 23만 명의 병력과 대포를 장착한 탱크 1,230대가 작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의 병력은 8만 명에 불과했고 비교적 상태가 좋은 탱크는 210대뿐이었다.

공중 지원에서도 항공기 1,500대를 보유한 영국군은 350대밖에 보유하지 못한 적군에 비해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연합군이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추축국의 보급로를 항공기와 잠수함으로 공격했기 때문에, 로멜의 군대는 연료와 탄약 및 식량을 충분히 보급받지 못했다. 그리고 로멜 자신은 오스트리아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로멜이 아프리카로 돌아가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10월 25일 저녁 전선에 도착했을 때, 수비군이 사용할 수 있는 장갑차량은 이미 절반이 파괴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튿날 독일군은 서쪽으로 깊숙이 침투하려는 영국군 기갑부대를 대전차포로 공격하여 맹공을 저지했다. 그러나 1주일 뒤, 로멜은 더이상 몽고메리에게 저항할 힘을 잃고 영국군의 공격을 받으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튀니지로 서서히 쫓겨 들어갔고, 1943년 5월 마침내 항복했다 (→ 색인:북아프리카 작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도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막대한 병력 손실과 과로 및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미 사기가 떨어진 독일군은 붉은 군대의 단호한 저항에 부딪쳐 더욱 쇠약해졌다. G.K. 주코프와 A.M. 바실레프스키 및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로노프 장군이 계획한 소련군의 결정적인 반격은 1942년 11월 19일에 시작되었다. 땅은 첫서리로 단단해져 있었지만, 아직 눈으로 길이 막히지는 않을 무렵이었다.

소련군의 반격은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바로 맞은편에 있는 25만 명의 독일군 2개 야전군을 포위하는 협공 작전의 형태를 취했다. 대세를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었던 1943년 1월초에 히틀러는 카프카스에서 병력을 빼내지 않으면 스탈린그라드 근처에 포위되어 있는 독일군은 더 큰 재난을 당하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독일군은 마침내 소련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해전

독일로서는 전체적으로 우울한 시기였지만, 1가지 밝은 요소는 1942년에 U-보트가 거둔 성공이었다. 미국이 참전했기 때문에 U-보트는 미국의 대서양 연안에 출몰하게 되었다. 연합국이 카리브 해 북쪽 바다에 호송 선단 체계를 도입하여 독일 잠수함의 활동 무대를 브라질과 남아프리카 사이의 바다까지 확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1942년 중엽이었다. 이에 독일은 U-탱커를 개발했다. U-보트를 개조한 대형 U-탱커는 먼 바다에서 작전을 펴고 있는 U-보트에 연료와 어뢰를 비롯한 보급품을 공급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연합국이 호송 선단을 밀착 경호하는 호위함을 보강하기 위해 기동력이 뛰어난 소함대를 '지원부대'로 활용했었는데, 이런 방식마저 소함대를 아프리카 북서부에 배치한 뒤로는 잠시 중단했다. 그래서 1942년에 U-보트는 600만t이 넘는 선박을 격침했고, 같은 시기에 U-보트는 91척에서 212척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매달 80만t의 선박을 격침한다는 목표도 곧 달성할 것처럼 보였다.

1943년 3월은 U-보트가 행운의 절정에 이른 달이었다. U-보트는 240척으로 늘어났고, 3월 1개월 동안 60만t이 넘는 선박을 격침했다. 최대 규모의 호송선단 공방전에서, 20척의 U-보트는 상대편 선박 77척 가운데 21척을 격침시키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반면에 U-보트의 손실은 1척뿐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연합국이 5가지의 대응책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연합국은 '지원부대' 운용을 다시 도입했고, 항공모함을 차츰 호위함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장거리 항공기가 바다에서 호송 선단을 엄호하기 시작했고, 함정들은 U-보트가 포착할 수 없는 초단파 레이더를 장착했으며, U-보트의 통로를 정기적으로 공습하기 시작했다(1943년 4~5월에 U-보트는 56척이 파괴되었음). U-보트는 1943년 4월에 32만 7,943t을 격침했고, 5월에는 26만 4,852t을 격침했으나, 6월에는 9만 5,753t밖에 격침하지 못했다. 그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U-보트가 매달 거둔 전과는 1943년 7월과 9월과 1944년 3월을 제외하고는 10만t을 넘지 못했다.

1944년말에 U-보트는 잠수함 환기장치를 장착하여 물 속에서도 전지를 재충전하는 데 필요한 산소를 공급받게 되었고, 그결과 '잠수할 수 있는' 어뢰정에서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거의 완전한 잠수함으로 바뀌었다. 같은 시기에 잠수시간이 더 길고 잠항 속도가 더 빠른 새로운 양식의 U-보트가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량은 때가 너무 늦었다. 선단을 보호하기 위한 연합국의 호위함과 항공기는 독일을 이미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색인:스노클).

공중전

1942년초에 영국 공군의 폭격기 사령부는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전략적 공습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공장과 철도역, 조선소, 다리와 댐, 그리고 도시를 노린 이 공습에는 독일의 군수 산업 시설을 파괴하려는 의도와 함께 민간인의 가옥을 파괴함으로써 전쟁을 계속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새로운 계획의 특징은 특정 목표물이 아니라 도시의 중심부를 야간 공습의 표적으로 삼는 지역 단위의 폭격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연합국은 1942년 3월에 이미 소이탄을 투하하여 불을 지르는 독일 방식을 이용하여 독일의 몇몇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색인: 전략적 폭격, 집중 폭격). 5월 30~31일 밤에는 1,000개가 넘는 폭탄을 쾰른에 퍼부어, 건물 밀집 지역의 1/3이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야간 전투기 부대가 방어전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작전은 폭격기 사령부에도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게 되었다. 1944년 3월 연합군 폭격기 부대의 1일평균작전 능력은 1942년의 500대에서 974대로 늘어나 있었다.

영국에 기지를 둔 미국 제8공군도 1943년 1월부터 전략적 공습에 참여했다. 제8공군의 폭격기인 ' 하늘의 요새'와 ' 해방자'는 대낮에 산업시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중폭격기들은 전투기의 호위범위를 벗어날 때마다 독일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는 약점을 드러냈다. 공군력의 균형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장거리 전투기인 P-51B(무스탕 Ⅲ)가 제8공군에 배치된 1943년 12월이었다. 한편 독일인들은 항공기 생산을 계속 늘렸고, 특히 실전에서 대성공을 거둔 전투기를 많이 생산했다.

독일의 점령지 정책

전쟁의 형세가 바뀌기 시작했는데도, 독일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인도적인 점령 정책을 계속 수행했다. 나치의 정예군단인 친위대(SS)는 독일이 지배하는 유럽 전역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기 공장에 강제동원하는 정책은 곧 독일이 점령한 유럽 전역에 확대 적용되어, 결국에는 750만 명을 강제노동이나 노예노동으로 혹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책은 히틀러가 명령한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었다. 이 해결책은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물리적으로 멸종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 색인:대량학살).

독일이 '최종적 해결'을 도입한 시기는 소련 원정을 준비하던 때와 같은 무렵이었다. 히틀러는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소련 지배 계급의 '생물학적 토대'라고 믿었고, 공산주의자를 섬멸하려면 소련 지배 계급뿐만 아니라 그 '생물학적 토대'도 뿌리뽑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이 1941년에 소련을 침공하자, 살인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기동대가 소련 점령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손에 죽은 유대인 수는 1941년말까지 약 140만 명에 이르렀다.

한편 1941년에는 유럽 중부와 서부의 유대인을 비슷한 방법으로 말살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졌다. 그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폴란드 동부의 강제수용소로 보낸 다음, 거기서 집단으로 학살하거나 죽을 때까지 노예 노동자로 혹사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1942년 5월부터 1944년 9월까지 4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 같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 '최종적 해결' 과정에서 약 570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제국 안에 있는 유대인들을 멸종시킬 예정이었고 한편으로 슬라브족(주로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을 값싼 노동원으로 이용해야 할 '하등인간'으로 간주했다. 폴란드는 이 목적을 위한 연습장이 되었다. 1939년에 폴란드를 점령하자마자, 히틀러는 친위대에 명령을 내려 많은 폴란드 지식인을 죽이게 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통틀어 300만 명의 폴란드인(300만 명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외에)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히틀러는 소련 점령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슬라브족과 발트인을 독일의 지배에 무조건 복종시키고 경제적으로 착취할 작정이었다.

1941년 7월 독일군이 우크라이나에 처음 들어갔을 때, 많은 우크라이나인은 독일군을 스탈린주의의 공포와 집산주의에서 구출해준 해방군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농장에서 많은 양의 곡식을 징발하고, 독일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을 독일로 강제 이송하고, 저항이나 태업을 이유로 민간인에게 잔인한 보복 행위를 자행하자, 처음의 이 호의는 곧 원한으로 바뀌었다.

독일인의 잔학성에 대항하여 지하저항운동이 일어났다. 1944년에 이르자 소련·폴란드·유고슬라비아·프랑스·그리스 저항운동조직은 상당히 크게 성장하여, 전선에서 시급히 요구되는 많은 독일군 사단 병력들을 후방에 묶어두고 있었다. 독일 점령당국은 저항운동을 뿌리뽑으려고 했지만, 저항운동에 대한 앙갚음으로 민간인에게 무차별보복을 자행함으로써 저항운동을 근절하려는 시도는 타오르는 불길에 오히려 부채질을 했을 뿐이었다.

널리 인정되고 있는 바와 같이, 1944년까지 독일이 점령한 유럽 국가 사람들이 대부분 독일인에게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1943년 9월말에 우크라이나의 독일군은 이미 드네프르 강까지 밀려나 있었다. 독일군은 사상 최대의 탱크전이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2,900대의 탱크와 7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한편 미국 항공기들은 8월 17~18일에 웨와크(뉴기니 섬의 라에 서쪽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여, 200대가 넘는 항공기를 파괴했다.

(뒤에 계속)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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