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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7-11-07 (수) 13:22
분 류 사전2
ㆍ조회: 2141      
[근대] 시온주의=시오니즘 (브리)
시온주의 -主義 Zionism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동.

고대에 유대인들의 고향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시온주의의 움직임은 19세기 후반 동부·중부 유럽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으나, 여러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대 예루살렘의 한 언덕, 즉 시온이라는 역사적 지역에 대해 유대민족과 유대교가 옛날부터 지니고 있던 민족주의적 집착의 연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16~17세기에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가라고 설득하는 여러 '메시아'가 나타났으나 18세기말에 하스칼라(계몽) 운동이 일어나 유대인들을 서구의 세속문화에 동화시키려 했으며, 19세기초에는 천년왕국설을 믿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복귀에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하스칼라 운동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서구문화에 동화되지 않았으며, 차르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응하고 유대인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추진하기 위해 호베베이 시온('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성했다.

시온주의에 정치적 전기를 만든 사람은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서구문화에 동화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지만 반(反)유대주의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없다고 보았다 (→ 색인 : 정치적 시온주의). 그는 만일 유대인들이 외부압력 때문에 하나의 국가를 세워야 할 경우, 한 지역에 모여야만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897년 헤르츨은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를 소집했다. 이 대회는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고자 한다"고 선언하고 시온주의 운동의 바젤 강령을 세웠다. 운동 본부는 빈에 세워졌으며, 이곳에서 헤르츨은 공식 주간지 〈벨트 Die Welt〉를 발간했다. 시온주의자 대회는 1901년까지는 매년, 그뒤로는 2년마다 1번씩 열렸다. 헤르츨은 오스만 정부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대신 영국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1903년 영국 정부는 우간다에 있는 3,750㎢의 비거주지역을 정착지로 제의했지만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을 고집했다.

1904년 헤르츨이 죽자 운동의 지도부는 빈에서 쾰른으로, 그후 베를린으로 옮겨갔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온주의 운동은 소수의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데 불과했다. 여기에 참여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러시아 출신이었지만, 운동을 이끈 지도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출신이었다. 이들은 구두연설과 소책자를 통해 선전을 확대했고, 여러 나라 말로 신문을 발간했으며, '유대인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문학과 예술의 발전을 촉진했다. 현대 히브리어도 주로 이 기간중에 크게 발전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실패하고 뒤이어 대학살과 탄압의 물결이 일어나자, 더 많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젊은이들이 선구적인 정착민으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1914년경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유대인은 약 9만 명에 이르렀고, 이중 1만 3,000명은 43개의 유대인 농업정착지에서 살았다. 이들은 대부분 프랑스 출신 유대인 박애주의자인 에드몽 드 로트실 남작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정치적 시온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권은 영국에 살고 있던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에게로 넘어갔다. 이들 가운데 바이츠만과 나훔 소콜로프는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나라를 세우는 데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밸푸어 선언(1917. 11. 2)을 영국으로부터 얻어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 선언은 영국이 제의한 국제연맹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 포함되었다(1922). 그후 몇 년 동안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도시와 농업 정착지를 세우고, 자치기구를 만들었으며, 유대식 생활방식과 히브리어 교육을 강화했다. 1925년 3월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은 10만 8,000명 정도였으며, 1933년 무렵 이 숫자는 대략 23만 8,000명(전체주민의 20%)으로 늘어났다.

유럽에서 히틀러주의가 기세를 떨치기 전에는 유대인의 이민이 비교적 천천히 이루어졌지만, 아랍계 주민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들의 나라가 될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시온주의와 이를 지지하는 영국의 정책에 거세게 저항했다. 특히 1929, 1936~39년에 여러 차례 일어난 아랍인 봉기 때문에 영국은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절충하는 안을 짜내야만 했다.

그후 히틀러주의와 대대적인 유럽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도피처로 삼게 되었으며, 그외 지역의 많은 유대인들, 특히 미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도 시온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영·미 회의와 국제연합(UN)에 차례로 제출했다. 1947년 11월 29일에 열린 UN 회의에서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나라로 나누고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으며, 1948~49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을 치르면서 이스라엘은 UN에서 결정했던 것보다 더 많은 지역을 차지했고 이때 80만 명의 아랍인들이 내쫓겨 갈 곳을 찾지 못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이들은 팔레스타인인으로 불리고 있다 (→ 색인 : 팔레스타인 분할).

이렇게 해서 시온주의 운동은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로부터 50년 만에, 그리고 밸포어 선언으로부터 30년 만에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나라를 세우려는 목적을 이루었지만, 이스라엘은 안팎에서 테러 행위에 관여하고 있는 적대적인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둘러싸인 무장병영이 되고 말았다.

그뒤 20년 동안 여러 국가에 흩어져 있던 시온주의 조직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재정지원을 늘리고 유대인들이 이주하도록 권장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유대인은 '포로지'에서 사는 것이며, 이스라엘에서만 유대인이 온전히 살 수 있다는 이스라엘 내의 정통파 유대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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