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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2-13 (월) 21:01
분 류 사전2
ㆍ조회: 1981      
[국가] 일본 (브리)
일본 日本 Japan 일본어로 '니혼' 또는 '닛폰'이라고도 함.

아시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섬나라.

지도

일본 지도. 브리태니카백과사전 지도

수도는 도쿄[東京]이다. 홋카이도[北海道]·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 등 4개의 큰 섬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구성된다. 면적 377,837㎢, 인구 127,100,000(2001).

자연환경

지질

일본 열도는 세계 최대의 육지인 유라시아 대륙과 최대 해양인 태평양과의 경계에 위치하는 호상(弧狀) 열도로, 환태평양 호상 열도의 주요부분을 구성하며 해구 및 활발한 지진·화산 활동 지역에 속해 있다. 기본적인 지질구조는 특히 고생대 말기에서 중생대에 걸친 몇 차례의 조산운동으로 윤곽이 드러났으며 신생대에 들어와 현재의 지질구조와 지형이 형성되었다.

일본 열도는 혼슈 중부를 가로지르는 이토이가와-시즈오카[絲魚川靜岡] 구조선에 의해 동북일본과 서남일본으로 나누어지며 서남일본은 중앙구조선 및 무스키 야스시로[臼杵八代] 구조선에 의해 내대와 외대로 구분된다. 동북일본은 기타카미[北上]·아부쿠마[阿武] 고지를 포함하는 태평양쪽과 동해쪽 및 폿사 마그나로 나누어진다.

지형

지형적으로는 태평양상의 호상 열도로서의 지리적 위치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진행되었고 현재도 진행중인 지각운동의 지배를 받는 온난다습지역에 있는 조산대의 특징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우선 구릉지를 포함하여 국토의 1/4을 차지하는 산지는 다우다습한 기후조건을 가진 조산대로서 기복이 심하며 급류성 하천에 의한 하방침식으로 V자형 계곡이 발달해 여러 곳에 일본 특유의 계곡미를 형성한다. 또한 대륙지형처럼 안정된 지역이나 건조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차별침식지형도 화산지역을 빼면 거의 드물다. 많은 강수량과 반복되는 지각변동에 의해 산지는 더욱 세분화되었으며 이들 산지 사이에는 소규모의 분지나 퇴적물로 메워진 산간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하천은 일반적으로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하며 유역 면적이 좁다. 본류(本流)의 길이가 300km가 넘는 것은 시나노 강[信濃川]과 데시오 강[天鹽川] 2개뿐이다. 일본의 하천은 조산운동 영향 외에도 태풍·장마전선에 의한 홍수, 산지 붕괴 등이 자주 일어나 산지의 상류부에서는 대량의 사력이 생산된다. 이들 사력은 하천에 의해 운반되어 수력발전이나 홍수조절용 댐을 급속히 매몰시켜 그 효과를 감소시키며, 하상(河床)에 퇴적시켜 천정천을 만들어 수해를 증가시킨다.

평야는 홍적대지를 포함하여 국토의 1/4에 불과하며, 인접 산지에서 반출되는 사력에 의해 형성된 소규모의 것이 대부분으로 하구에 삼각주가 발달되어 있는 것은 이시카리[石狩]· 니가타[新潟]· 간토[關東] 등의 커다란 평야뿐이다. 한편 충적평야에 집중된 공업도시에서 지하수를 대량 퍼내어 씀에 따라 지반이 내려앉아 평지가 평균해수면보다 낮은 제로미터 지대가 생겨나 재해 발생의 위험이 있다. 오늘날의 지각운동을 직접적으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은 해안이다. 해안선은 국토면적에 비해 매우 길어 총 2만 5,600km에 이른다. 해안의 종류도 복잡한 지질을 반영하여 융기 산호초에서 화산체까지 그 종류가 많고 다양하다.

세계적으로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것은 화산지형, 특히 칼데라 지형으로, 가장 단순한 화산 마르(maar)에서 복합화산까지 거의 모든 유형의 화산이 있어 화산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화산은 산릉이나 산정에 석영·안산암의 돔 모양의 기생화산이 있는 안산암질의 원추형 성층화산이며 일본의 상징적 화산인 후지 산[富士山]도 이 유형에 속한다. 규슈에는 아소[阿蘇]· 기리시마[霧島]· 아이라[良] 등 세계 최대급의 칼데라가 분포하며, 시라스라고 불리는 화새류(火碎流) 분출물로 이루어진 붕괴하기 쉬운 대지가 주위에 발달해 있다.

기후

일본은 면적이 좁은데다 남북으로 길고 지형이 복잡하며 또 길고 좁은 국토가 기후경계선에 의해 둘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북부와 남부, 동해 쪽과 태평양 쪽, 고원과 분지 등에 따른 기후 차이가 현저하다. 고도에 따른 기후 차이를 예로 들면 도쿄에서 북서쪽으로 약 150km에 있는 가루이자와[輕井澤:해발 약 1,000m]는 고도가 높아 80km 북쪽의 삿포로[札幌]의 기후와 같다. 일본의 기온은 대륙의 서안(西岸)과 비교해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동안(東岸) 기후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해안의 영향을 받아 대륙 내부보다 온화하다.

이는 대륙의 동안에서는, 겨울에는 대륙에서 발달하는 고기압에서 불어나오는 바람이 탁월하며 여름에는 해양상의 고기압에서 불어나오는 바람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안 기후로서의 특징은 계절풍기후의 특징으로 간주되는데, 일반적으로 계절풍기후는 우계·건계의 구별이 뚜렷한 데 비해 일본의 경우는 그 구별이 그렇게 명료하지 않다. 이 점에서 일본의 기후는 온대계절풍기후라 할 수 있다.

한여름인 7~8월에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은 오가사와라[小笠原] 기단에 덮혀 찌는 듯이 무덥다. 남쪽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고온다습한 기류인 남동계절풍이 일본 부근의 저기압, 전선, 태풍 활동과 연결되어 많은 양의 비를 몰고 옴으로써 일본은 세계 유수의 다우(多雨) 국가 중의 하나이다. 북반구 북위 30~40°대의 연평균강수량은 500~600㎜인데, 혼슈· 시코쿠· 규슈의 연평균강수량은 약 1,800㎜로 2~3배나 많으며 위도대의 평균강수량으로 보면 적도 지대의 강수량과 비슷하다. 특히 시코쿠·규슈의 연평균강수량은 2,000㎜를 넘고 지역에 따라서는 3,000~4,000㎜에 달한다.

한편 남양 방면에서 매년 발생하는 평균 26~27개의 태풍중에 2/3인 18개 정도는 일본으로 향하며, 그 1/2인 9개 정도가 일본 부근을 지나고 다시 그 1/2인 4~5개가 일본에 상륙한다. 태풍재해는 일본의 기상재해중 최대 비중을 차지하여 1940~80년 태풍재해는 전국의 수해로 인한 피해의 약 63%, 사망자수의 약 76%에 달한다. 태풍 외에도 온대성 저기압이나 전선에 의한 재해가 있는데, 특히 6~7월에 일어나는 장마(바이우[梅雨]) 전선에 의한 집중호우의 재해가 크다. 1917~80년에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장마전선에 의한 호우가 14회나 있었다.

반면 태풍이나 장마전선은 일본에 풍부한 수자원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겨울에 혼슈는 척량산맥을 경계로 동해 쪽은 큰 눈이 내리는 반면 태평양 쪽은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데, 이는 동해를 건너온 북서계절풍이 동해 쪽 지방에 대설을 내리게 한 다음 기후경계선인 척량산맥을 넘으면서 건조한 강바람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위치하는 아시아 대륙 동안(東岸) 일대는 바다·육지 분포 및 대지형의 영향으로 편서풍이 남으로 비스듬히 흐르는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온대저기압·이동성고기압의 왕래가 심해 기상변화가 복잡하다. 또한 열대처럼 여름이 무더운 반면 겨울에는 대설이 내려 유럽에 비하면 계절 변화가 심하고 복잡하다. 이처럼 일본은 계절 변화가 심한 만큼 설해·냉해·태풍재해 등 기상재해가 빈번해 국민생활·국민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국민

민족

현재의 일본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북방도래설도 있고 남방도래설도 있으나 일정하지 않으며, 신체적 특징에서 보면 몇 개 종족의 복잡한 혼합으로 여겨진다. 기본적으로는 한반도를 거쳐 건너온 퉁구스계 종족에 동남아시아에서 온 종족이나 아이누계 종족 등이 오랫동안 섞이어 일본 민족을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일본에서도 약간 발견되고 있지만 학문적으로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관련을 명백하게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다. 일본은 단일 민족이라는 신화가 오랫동안 유포되어 왔다.

일본 민족 외에 일본에 거주하는 민족으로 우선 한국인을 꼽을 수 있다. 한일기본조약(1965)에 수반하는 협정 규정에 의해 재일한국인(1945년 8월 15일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 및 그 직계비속)에 대해서는 영대(永代) 거주권을 인정했다. 1984년 현재 이들 한국인은 약 69만 명, 일본에 귀화한 사람이 약 12만 명이다. 다음으로는 중국인이 많으며 약 5만 명을 넘는다. 1980년대 이후 동남아시아 등에서 들어오는 비합법 노동자가 점점 많아져 이들에 대한 처우가 과제가 되고 있다.

언어

공용어는 일본어로 1억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는 세계 굴지의 언어이다. 그러나 대외적인 교류가 적으며 국제적 세력도 크지 않다. 일본어의 계통은 언어학적으로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다. 음운구조·문법구조나 다소의 어휘적 유사점으로 인해 한국어, 나아가서 알타이 제어와 친족관계가 있는 것으로 오랫동안 여겨왔으나 증명된 것은 아니다. 남방어 또는 티베트·인도 제어와의 관계, 남방계 언어에 북방계 언어가 융합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 방언은 류큐[琉球] 방언과 본토 방언으로 나누어지며 본토 방언은 다시 동부·서부·규슈 3대 방언으로 나누어지지만 도쿄 방언을 중심으로 한 공통어가 표준어가 되고 있다.

인구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불과 3,000만 명에 지나지 않던 인구는 메이지 시대 중기 이래 산업혁명의 진행에 따라 급격히 증가해 메이지 시대 말기인 1912년에는 5,057만 7,000명으로 5,000만 명 대가 되었다. 1920~35년에는 6~7%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으나 1935~45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군대 소집·출동 등이 많아 1940년에는 3.9%, 1945년에는 불과 1.1%로 떨어졌다.

그러나 종전으로 군관계자의 복귀, 해외교포의 귀국이 이어져 1950년에는 출생률이 급증하여 15.6%의 증가율을 보여 소위 '베이비 붐'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후 출생률이 떨어져 증가율은 1960년에 4.7%로 낮아졌다. 그러나 베이비 붐 시대에 출생한 여자가 출산연령에 달하면서 다시 출생률이 완만히 상승해 인구증가율은 1970년 5.5%, 1975년 7.0%에 달해 1991년에는 1억 2,400만 명을 넘었다. 1990년대 전반기에는 인구증가율이 3%대에서 2% 수준으로 점점 감소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일본 전체의 인구밀도는 1997년 현재 333.8명/㎢으로, 방글라데시·한국·네덜란드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높다. 특히 경지의 단위면적당 인구밀도는 세계 최고이다. 한편 지형상 산지면적이 넓고 전체면적중 저지면적은 불과 13%정도여서 인구는 주로 임해지역의 저지에 밀집해 있으며, 산지 내부에서는 주로 분지나 하곡을 중심으로 분포해 인구밀도의 지역차가 크다.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은 게이힌[京浜]을 중심으로 한 도쿄 도, 가나가와 현[神奈川縣], 사이타마 현[埼玉縣], 지바 현[千葉縣] 등의 간토 지방, 아이치 현[愛知縣] 등의 주쿄[中京] 지방, 오사카 부[大阪府], 효고 현[兵庫縣], 교토 부[京都府] 등의 게이한신[京阪,] 지방과 후쿠오카 현[福岡縣]의 북규슈 지방이다. 이에 대해 홋카이도, 아오모리 현[靑森縣], 이와테 현[岩手縣], 아키타 현[秋田縣] 등의 도호쿠[東北] 지방과, 나가노 현[長野縣] 등을 중심으로 한 중부 산악 등이 저밀도지역이다. 저밀도지역에서는 청·장년층이 대도시로 진출해 농촌에는 주로 노인과 어린이가 남아 기간산업인 농림업 종사자가 적어지고 있는 반면 대도시는 격심한 인구 유입으로 주택·공해·교통 등의 문제가 심각하다.

경제

세계 속의 일본경제

1960년 전세계 국민총생산(GNP)의 2.8%에 불과한 점유율을 차지하던 일본은 1980년 10.1%로 상승하여 20년 동안에 7.3%가 상승하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국민 1인당 GNP도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여, 1965년에는 760달러로 미국(3,240달러)의 1/4에 불과했으나 1984년에 1만 474달러로 미국(1만 5,949달러)의 66%로 신장했다. 그후 1987년에는 1만 9,959달러로 미국(1만 8,714달러)을 앞질렀으며 이와 같은 신장세는 1990년(일본 2만 3,965달러, 미국 2만 2,105달러)까지 계속되었다. 세계 무역에 있어서도 이와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여 1995년 현재 수출·수입액 모두 미국, 독일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일본경제는 양적 성장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호조를 보여 왔다. 1950, 1960년대의 '번영'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 일본 역시 국제통화위기(1971), 제1차 유류파동(1971)에 따른 혼란을 겪었으나 적어도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다른 구미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는 마이크로 전자공학(microelectronics) 혁명이라 불리는 신기술 혁신에 의한 산업구조의 자원절감, 지식 집약화, 낮은 실업률 아래서의 안정된 노사관계와 노동생산성의 상승, 안정된 물가수준, 이들을 바탕으로 한 일본제품의 가격·품질 양면에서의 강한 국제경쟁력 등에 의해 실현되었다.

반면 일본경제의 질적·양적 성장은 무역마찰을 비롯한 국제경제 마찰의 한 원인이 되어 일본에 대한 비판·비난을 불러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자동차·전기·전자제품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상품의 집중호우식 수출은 수입국의 입장에서 보면 해당산업의 부진과 실업 증대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누적되는 무역·경상 수지 흑자는 일본시장의 폐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시장개방 요구가 강화되는 동시에 적자국의 보호무역주의를 대두시켰다. 이들 대외무역마찰에 대한 대응책으로써 대외 질적투자, 즉 일본기업의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으나 일본기업의 다국적화와, 거기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는 일본경제의 또다른 과제이다. 또한 개발도상국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요구가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양적 규모뿐만 아니라 교육·문화·보건·의료와 같은 폭넓은 장기적 시야에 선 경제협력이 추구될 필요가 있다.

산업 구조·조직

산업 구조

제2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하여 전전(戰前) 취업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했던 농림수산 인구는 계속적으로 비중이 떨어져 1984년에는 11%까지 줄어들었다. 이에 대해 2차산업과 3차산업의 취업인구는 전후의 고도성장기까지는 모두 비중이 높아졌으나 유류파동을 거친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2차산업은 축소되기 시작한 반면 3차산업의 비중은 높아졌다.

국내 총생산의 구성비 역시 전후 도시의 파괴와 식량난에 따른 인구의 귀농으로 1차산업의 비중이 높았지만 1955년 이후의 고도성장기 이후에는 취업인구의 구성비와 같은 경향이 전개되었다. 이중 제조업의 추이를 살펴보면 전전에는 면과 생사를 중심으로 하는 섬유공업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 기본적으로 경공업 우위의 구조였으나 전후 고도성장 과정에서 급속하게 중화학 공업화가 이루어졌다.

1970년대 이후에도 중화학 공업화율은 더욱 높아졌으나 2차례에 걸친 유류파동에 의한 자원절약 및 가격·수요구조의 변화와 신흥공업국의 추격에 따라 금속·화학 등 기초소재산업은 정체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가공조립산업인 전기·전자 기계, 자동차, 공작·정밀 기계 산업이 높은 점유율을 차지했다. 또한 마이크로 전자공학 기술의 발전과 그 응용으로 수치제어(NC)공작기계나 로봇의 보급을 통한 생산공정의 자동화와 함께 제품의 경량화·소형화가 촉진되었다.

에너지 문제

일본의 에너지 공급은 전전에는 주로 국산자원인 석탄과 수력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전후 중동유전의 개발과 소비지 정제 전략에 의해 원유가격이 대폭 떨어진 결과 국산 석유에서 수입 원료로의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1973년과 1979년 2차례의 유류파동으로 원유가격이 급등했으며 이를 계기로 석유·에너지 절약과 대체 에너지 개발시대가 개막되었다. 석유에서 석탄, 천연 가스로의 연료전환,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이 급속히 추진되어 1983년도의 1차에너지 공급구성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60.9%로 떨어졌다(1973년 77.6%).

운수·통신

일본의 운수사업은 전전에는 철도·해운이 중심이 되었으나 쇼와 시대[昭和時代]에 들어서 버스·트럭 등의 자동차가 도시근교 수송을 보완하는 형태를 취했으며, 전후 고도성장기 이후 승용차를 포함한 자동차의 비중이 커지고 항공이 새롭게 가담했다. 철도는 1906년 철도 국유화 이래 시가지 및 도시근교 사철(私鐵)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가가 경영했다 (→ 색인:지하철도).

전전 세계 유수의 상선을 자랑하던 해운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타격을 받았으나 전후 정부의 보호정책으로 선박량이 다시 늘어났다. 그러나 세계적인 선박과잉, 유류파동 이후 세계경제의 정체, 개발도상국 해운의 대두로 인해 사양화되고 있다. 육상 교통은 고도성장기 이후 자동차화가 급속히 이루어져 여객·화물 수송이 철도에서 자동차로 대이동함으로써 철도의 수송분담률은 1955~84년 약 30년 동안에 여객에서는 82.1%에서 39.0%로, 화물은 52.9%에서 5.3%로 하락했다. 그결과 국철의 경영은 1964년도 이후 계속 적자를 기록했고, 마침내 1987년 4월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분할·민영화되었다.

통신은 전전에는 우편·전기통신 모두 정부의 직영사업으로 운영되었으나 전후에 우편을 제외하고, 국내통신은 일본전신전화공사(1952), 국제통신은 국책회사인 국제전신전화주식회사(1953)가 운영하게 되었다. 그후 1985년 4월 일본전신전화공사의 민영화와 내외 전기통신사업의 자유화가 실현되었다.

농림수산업

1960년대에 들어와 농촌에서 도시로 젊은 노동력이 유출되어 농업노동력이 열악해짐으로써 농업생산이 정체되고 농업경영이 악화되었다. 1960년 606만여 호였던 농가수는 1985년 438만 호로 감소했다. 그중에 전업농가는 14%에 불과하고, 68%는 농업 이외의 수입이 농업 수입을 웃도는 제2종 겸업농가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1970년대 이후 쌀의 과잉생산과 식량관리 특별회계의 적자누적이 문제시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미국으로부터 쌀의 수입자유화 압력이 강해져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자립경영에 의한 생산성 향상이 급선무가 되고 있다.

임업·수산업에서는 세계적인 자원부족을 배경으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임업은 수입재의존율이 1965년 26.5%, 1984년 64%에 도달했다. 일본은 세계 제1의 수산국이나 고도성장기 이후 연안어업은 남획·매립·공해에 의한 해양오염으로 쇠퇴하고 대신 급성장한 원양어업과 1970년대 이후의 각국의 영해의 확대, '200해리 어업전관구역'의 설정 등의 국제적 조류 속에서 곤란을 겪고 있다.

무역

일본무역의 커다란 특징은 원료·연료 수입, 공업제품 수출이라는 수직분업적 무역구조이다 (→ 색인:국제무역). 전전의 일본무역은 첫째, 대(對)중국·아시아 면제품 수출, 원료 수입, 둘째, 대(對)미국 생사 수출, 셋째, 대(對)구미 중화학공업품 수입을 기축으로 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대(對)아시아 중공업품 수출이 시작되었고 전후에는 산업구조와 국제 정치환경의 변화와 함께 무역구조도 크게 바뀌었다.

품목별로 보면 수출은 섬유를 비롯한 경공업품이 중심이었으나 1960년대에 들어가면서 철강·기계 등 중공업의 비중이 높아졌고 1970년대 이후 자동차·전기·전자를 중심으로 하는 기계류가 압도적 비율을 차지했다. 수입에서는 원료·연료 및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일관되게 높고, 특히 2차례의 유류파동에 의한 원유가격의 폭등으로 1980년대초에는 광물성 연료가 수입의 반을 차지했다.

무역의 지역별 구성을 보면 수출에서는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일관되게 각각 1/3을 차지하고 있는데 유럽의 비중은 1950년대 10% 정도에서 1970년대 후반 이후 20%가 되었다. 수입에서는 1950년대 중반 북아메리카의 비중이 40%, 아시아가 30% 정도를 차지했으나 1970년대 후반 이후 원유가격의 폭등으로 중동의 비중이 커지고, 중국과의 국교회복 영향으로 아시아의 비중이 50%에 달하고 북아메리카의 비중이 20%로 저하되었다.

일본의 수출은 전후에 계속 세계무역의 신장을 웃도는 속도로 증대해서 각지에서 심각한 무역마찰을 불러일으켜왔다. 근래에는 두 국가간의 무역수지에 있어서 일본의 수출초과 자체가 마찰의 원인이 되는 경향이 강해짐과 더불어 무역마찰 회피를 위한 대외 기업진출이 현지 자본과의 경합에서 투자마찰을 불러 일으키는 등 대외 경제마찰이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

금융·재정 제도

일본의 금융제도는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정점으로 전국은행(도시은행·지방은행·신탁은행·장기신용은행)·중소기업금융기관(상호은행·신용금고·상공조합중앙금고 등)·농림수산금융기관(농림중앙금고, 농협·어협 등의 신용사업)·보험회사(생명보험, 손해보험) 등의 민간금융기관과, 우편저금·간이보험·공적연자금 등 정부 자금을 자원으로 하는 각종 정부금융기관, 그리고 주식이나 회사채에 의한 자금조달을 매개로 하는 증권회사로 이루어져 있다(→ 색인:도쿄 증권거래소).

전전의 재정제도는 메이지[明治] 헌법 아래 의회의 통제력이 약하고 지방재정도 거의 자주제를 갖지 못했다. 전후 신헌법 아래 제정된 재정법은 재정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랐으며 전시 인플레이션에 대한 반성에서 적자국채의 발행과 일본은행의 국채인수를 금지했다. 재정제도는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으로 나뉘며 각각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로 이루어져 있다. 지방재정에서는 특별회계 중 독립채산제를 취하는 공영기업 회계 등을 제외한 것을 일본회계와 합쳐 보통회계라 부른다. 모든 회계에는 각 연도마다 세입·세출에 대한 예산·결산이 있으며 이는 국회 또는 지방의회의 의결사항이다. 연도 도중에 사정 변경으로 추가 수정된 예산을 보정예산이라 하며, 연도 개시전에 예산이 성립되지 못한 경우는 성립될 때까지의 조치로서 잠정예산제도가 있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전전 노동조합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다가 전후 개혁에 의해 노동기본법이 공인되면서 노동운동이 고양되었다. 이때 조합조직이 전시중의 산업보국회(産業報國會) 지부 조직을 사실상 계승한 사업소별·기업별 형태를 취하게 됨으로써 종신고용, 연공임금, 기업별 조합이라는 '일본적 노사관계'의 3가지 특징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초 공산당의 지도를 받은 산별회의(産別會議)가 운동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으며 1950년 7월에 사회당계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좌경화된 총평 주류에 대해 우파가 반발하여 1954년 민간산업별 단일조합을 중심으로 한 전일본노동조합회의(전노회의:1964년 전일본노동총동맹으로 발전)가 결성되었다. 그동안 일본관공청노동조합협의회(관공노)를 중심으로 한 총평은 1955년 이후에는 춘계투쟁(춘투)으로 일본형 임금투쟁의 패턴을 확립하는 한편 당시 중공업 및 사양산업인 석탄산업에서 빈발하는 해고·합리화에 대한 격렬한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고도성장에 의한 노동력 수급의 부족과 함께 재벌해체 후 일반화된 전문경영인의 합리적 노무정책과 민간노조 지도자의 노사협조 노선이 결합하여 일본적 노사관계의 내실이 다져졌다.

임금인상률 35%의 성과를 올린 1974년 춘투 이후 노동쟁의 건수가 격감하고 노동운동은 침체했다. 저성장에 의한 고용불안으로 '임금보다 고용'이 노사 쌍방의 주요관심사가 되었으며 구미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노동조합이 산업합리화와 감량경영에 대해 협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면에서는 여전히 여유가 없어 노동·노동시간 조건은 개선되지 않은 상태이다.

노동시간은 미국, 프랑스에 비해 과중하다. 거기에다 왕복 2~3시간의 통근시간을 더하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노동형태로는 주부의 시간제, 학생의 아르바이트와 같은 저임금노동이 성행한다. 노동자는 노동조합에서 유리되어 노동전선은 더욱 약화되고 있다. 연구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족이며, 국가나 사회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불과 1%이다.

복지와 사회보장

메이지 시대 이래 구빈정책과 군인·관리에 대한 은급제도가 있었으며 쇼와 시대에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과 후생연금제도가 형성되었다. 전후 신헌법에 생존권 규정이 채택되고 영국의 비버리지 보고서가 소개됨에 따라 국민의 권리, 사회보장의 제도화가 정부의 책임과제가 되었다. 사회보장의 중추를 이루는 의료·연금에 대해서 국민개보험이 확립된 것은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제도가 발족한 1961년이다.

제2차 고도성장 과정에서 공해문제 등 사회문제가 심각해지고 고령화 사회의 도래가 예측됨에 따라 국민의 관심이 복지로 모아졌다. 1973년 국민연금제 실현과 모든 연금에의 물가 슬라이딩제의 도입, 노인복지법 개정에 의한 70세 이상의 의료비 자기부담분의 공채인수제도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석유위기를 계기로 경제가 저성장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비는 팽창하여 재정적자 확대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에 정부는 복지정책을 재검토하여 '자조노력'을 강조한 복지정책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노인의료나 피용자 보험 본인의 일부 자기부담 도입, 연금개시 연령의 인상 외에 특히 공비(公費) 부담 경감을 위해 의료·연금 양 보험을 통해 난립하고 있는 제도의 조정·통일을 꾀하는 시책이 전개되고 있다.

정치·사회

법체제

전전의 일본의 국가체제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는 공식적인 선언에 의해 천황이 바로 정치·권력 조직의 정점에 있었다. 그러나 전후 천황은 헌법이 규정하는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기능을 갖지 않는 상징적인 지위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의 국가체제는 기본적으로는 현재의 헌법(1946 제정)에 입각하여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에 앞선 역사적인 배경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전의 정치적인 제도는 거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으므로, 1889년(明治 22)에 성립된 대일본제국헌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전의 이 메이지 헌법은 대체로 독일·프로이센의 헌법을 모방했으며 그후 영국의 헌법을 모델로 했다. 패전과 더불어 탄생한 일본국헌법은 미합중국헌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특징이다.

헌법체제의 골격 자체는 오히려 구미 선진국의 그것에 준거하여 그들과 공통된 것을 채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다. 즉 메이지 헌법은 천황의 이름으로 신민(臣民)들에게 내린 흠정(欽定)헌법이다. 이와 동시에 황위계승·즉위·황족 등에 관한 황실전범도 공포되었다. 이를테면 메이지 헌법은 서로 모순된 구미 선진국과 일본이라는 두 혼(魂)의 타협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색인:황제).

1946년 공포된 일본국헌법은 그 제정과정에서 점령군이 차지한 역할이 크다.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의 개정이라는 형식을 취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신헌법이다. 그것은 구헌법의 기축이 천황에게 있었던 데 반해 국민주권을 취한 데서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상징적으로 천황제를 존속시킨다는 점에서 구헌법 정신과 타협한 산물이라는 면도 있으나 민주주의적인 원칙에 충실한 정치이념을 근거로 하고 있다.

정치기구

일본국헌법에 따르면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나 그 권력은 대표자에 의해 행사하는 형식(대표민주제)을 취한다. 따라서 국민대표기관인 국회가 정치기구상 '최고기관'의 지위를 차지한다. 국회는 중의원과 참의원 양원으로 구성되는데 둘 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의원으로 조직된다. 국회는 법률 제정, 예산 의결, 조약 승인 등 정치운용의 근거가 되는 국가행위를 담당하는데 그 결정에는 보통 양원의 가결이 필요하다.

내각은 국회가 승인한 법률과 예산에 입각하여 정치·행정을 실제로 행하는 기관이다. 내각은 국회의원의 호선에 의해 지명된 자가 취임하는 내각총리대신 및 내각총리대신이 임명하는 국무대신으로 구성되는 합의체이다. 헌법에는 국무대신 가운데 과반수는 국회의원 중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운용에서 국회의원이 대신에 임명되는 것은 극히 드물고, 국회의원이라해도 압도적 다수는 중의원 의원이다. 사법권을 담당하는 것은 최고재판소 및 법률에서 정해진 하급재판소이다. 최고재판소의 재판관은 내각이 임명하고 그 장관은 내각의 지명에 따라 천황이 임명한다. 하급재판소의 재판관은 최고재판소가 지명한 명부에 의해 내각이 임명한다.

정당

헌법이 취하는 의회주의가 정당을 축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일본은 틀림없이 정당정치를 하는 국가이다. 다만 전후의 짧은 한 시기를 제외하고 보수정당, 특히 1955~93년의 약 40년간 자유민주당이 정권을 독점해 온 것이 특징이다. 집권 그룹인 자민당과 관료들이 일체가 되어 독특한 '권력공유 시스템'을 형성함으로써 정권교체를 더욱 어렵게 했다.

그러나 1993년 7월 18일 조기에 실시된 총선에서 자민당은 223석을 얻어 과반수 의석(256석)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재집권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7개 군소정당은 연합하여 263석을 확보함으로써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1993년 8월 23일 비자민 7개 연합 정당 중 일본신당의 대표적인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총리직에 취임했다. 1994년 6월 29일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 위원장이 총리직에 선출됨으로써 1948년 이후 47년만에 사회당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전후의 정치과정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 수락을 발표한 스즈키[鈴木] 내각이 총사퇴하고 히가시쿠니[東久邇] 내각을 성립하여 패전처리에 임했다. 1947년 새 헌법하에 총선거로 사회당이 제1당이 되었다. 사회당이 주도하는 가타야마[片山] 내각이 성립되었고 아시다[芦田] 내각에 이어 1948년 10월 요시다[吉田] 내각이 성립되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되었고 점령체제는 안보체제로 바뀌었다. 1954년 조선의옥사건(造船疑獄事件)이 원인이 되어 요시다는 7년 동안의 총리 자리를 내놓았다. 그 뒤를 하토야마[鳩山] 내각이 이었다.

그즈음 일본 최대 대외과제였던 구소련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일소 공동선언이 조인되었다. 그 뒤 기시[岸] 내각은 경제외교를 전개하고 헌법개정과 미일안보조약개정을 정치과제로 삼았다. 1960년 6월 19일 항의하는 시민 30여 만 명이 국회주변에서 연좌 데모를 하는 가운데 참의원의 의결을 거치지 않은 채 신안보조약이 성립되었다. 극비리에 비준절차를 마친 23일 기시 내각은 총사퇴했다. 그 뒤를 이어 이케다[池田] 내각이 '경제시대'를 열었다.

그결과 일본은 국제통화기금(IMF) 8개국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 개통, 도쿄 올림픽 대회 개최(1964) 등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케다의 뒤를 이은 사토[佐藤] 내각은 오키나와[沖繩]반환과 한일국교정상화를 중요과제의 하나로 삼아 이를 실현했으나 고도성장의 대가로 섬유부문에서 미일무역마찰을 겪여야만 했다. 결국 일본은 2차례의 닉슨 쇼크를 경험했고 사토는 1972년 5월 오키나와 복귀기념식전을 마치고 은퇴했다.

대중의 인기 아래 1972년 7월 성립된 다나카[田中] 내각은 중국과의 국교회복을 최대 목표로 삼고, 그해 9월 중일공동성명에 조인함으로써 전후 27년 만에 중국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개선했다. 그러나 물가 폭등, 유류파동, 금권선거 등의 문제로 다나카 내각은 무너졌다. 1974년 12월 성립된 미키[三木] 내각 집권기에는 경제성장이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당내 투쟁으로 사직한 미키를 이어 1976년 12월 후쿠다[福田] 내각이 성립했으며 중일 평화우호조약이 조인되었다. 1978년 12월 출범한 오히라[大平] 내각은 미일경제마찰·방위 문제 등으로 진통을 겪었다. 1980년 7월 성립된 스즈키 내각은 재정 재건, 행정개혁을 최대 현안으로 내세웠으나 정책상의 난항으로 퇴진했다. 1982년 11월 성립된 나카소네[中曾根] 내각은 미일군사협력 강화를 다짐하는 적극적인 외교로 '경제대국'에서 '정치대국'을 지향했다.

1983년 국회의원의 전국구제가 폐지되고 참의원 의원선거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나카소네 내각은 세제개혁, 방위비 증강, 교육개혁과 같은 현안 사항에 착수하려 했으나 격렬한 반대여론에 부딪쳐 폐기하고 말았다. 나카소네 내각을 이어 1987년 11월 다케시타[竹下登]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다케시타 내각은 이듬해에 발생한 전후 최대의 정치 스캔들인 리쿠르트 사건에 휩쓸려 1년 반 만에 무너졌다.

자민당 일부 유력자들의 파벌차원에서의 담합에 의해 1989년 6월에 등장한 우노[宇野] 내각은 총리 자신의 '기생 스캔들' 관련과 참의원 선거에서의 자민당 참패로 취임 52일 만에 물러났다. 이어 등장한 가이후[海部] 내각의 탄생 과정도 자민당 특유의 구태의연한 파벌담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정치사에서 1년 사이 내각이 3번 바뀌는 드문 기록을 세웠다.

자기 파벌을 갖지 못한 가이후 약체내각은 정치개혁법안 처리의 실패로 퇴진하고 1991년 11월 미야자와[宮澤] 내각이 출범했다. 자민당 내에서 파벌 순위 3위인 미야자와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당내 최대파벌인 다케시타 파의 지지로 가능했던 것으로, 스스로 '보수본류정권'이라 자처한 바 있다. 미야자와 내각은 출범 직후 난항을 거듭한 끝에 국제연합(UN) 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안을 처리하여 일본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또한 의회 내에 개혁입법을 도입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로 인해 자민당 핵심 의원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1993년 6월 일부 자민당 의원들까지 가세해 내각 불신임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미야자와 내각은 붕괴하게 되었다. 이어 7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자민당은 야당 연합에게 의회 내 과반수 의석을 내어줌으로써 38년의 장기집권 시대를 마감했다.

1993년 7월에 치러진 총선으로 일본의 정치적 변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일본신당과 일본신생당을 포함해 몇몇 신당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본질적으로는 민자당에서 떨어져 나온 분파로서 기존 야당들과 연대해 일본신당 당수인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한 연정을 구성했다. 호소카와 총리는 총선에서 드러난 일본 국민들의 정치개혁 열망을 받아들여 일련의 개혁 정치를 실시했다. 기부금을 제한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1개 선거구에서 의원 5명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300개의 1인 소선거구제로 개혁하는 내용의 선거법 일괄수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의 연정 내에서 세제 개혁에 대한 반대가 심했고 개인적으로도 미야자와 정부 집권 기간중에 있었던 스캔들 관련 혐의로 기소되어 1994년 4월 사임했다. 호소카와의 승계자는 2개월만에 실각했고, 권력 공백기에 사회당과 잔여 자민당 의원들이 연합해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총리로 내세움으로써 1948년 이래 처음으로 사회당 정권이 탄생했다.

대외관계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피점령국이 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고 어떻게든 독립국가로서 국제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1952년 4월 28일 연합국가들의 비준을 얻고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이 발효된 시점부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교관계를 처리하는 지위를 어느 정도 회복했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시발점에서부터 일본의 외교 및 방위는 미국에 대해 종속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일본은 대미외교와 모순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전방위 외교', '등거리 외교'를 취해야만 했다. 일본은 1956년 UN에 가입한 후 UN 중심주의를 외교원칙의 하나로 삼아왔다.

중국과의 관계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2개의 중국' 중 타이완(중화민국 정부)을 선택하고 본토인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을 배제함으로써 성립되었다. 1950년대에는 중일 쌍방의 민간무역단체에 의해 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며 거듭 갱신하는 방식으로 평화공존원칙에 입각한 중일 정상화의 길이 모색되었다. 1958년 타이완파인 기시가 총리로 있을 때 중일관계가 전면 중단되는 사태가 있었으나 1962년 중일무역에 관한 각서가 체결되자 정경분리원칙 아래 교류가 재개되었으며 국교회복을 원하는 요구가 높아졌다.

1971년 7월 15일 닉슨의 중국방문계획이 발표되고 이듬해 2월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일본 정부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9월 다나카 총리는 저우민라이[周恩來]와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양국의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1978년 8월 일본은 중국과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조인했다. 그 이후 중국과의 무역 및 문화 교류가 급격히 증대되어 1990년대초에는 중국이 미국 다음으로 큰 교역대상국이 되었다. 전쟁중에 일본군이 중국인들에게 끼친 "다대한 고난"에 대한 암묵적인 사과 발언이 있었던 1992년 아키히토[明仁] 일본 왕의 중국 방문은 일본이 중국과 경제적인 유대뿐만 아니라 전쟁에 기인한 서로의 간극을 뛰어넘고 문화적인 유대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러시아와의 관계

1953년 소련 마렌코프 총리의 일소관계 정상화 필요성 시사를 계기로 급속히 그 기운이 고조되어 1955년 6월 런던에서 양국간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여름 하토야마 총리가 구소련을 방문하여 '아데나워 방식'(영토문제는 제외하고 국교를 회복하는 방법)을 적용해 일소공동선언에 합의를 보았다. 일본인 포로, 북양어업, UN 가입 등 양국간의 많은 현안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영토귀속문제였다.

이보다 앞서 미국은 소련의 대일강화 참가 가능성을 예견하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는 일본에게 쿠릴 열도를 사할린 및 그 주변의 섬들과 함께 포기하게 했다. 하보마이 제도[齒舞諸島], 시코탄 섬[色丹島] 등의 일본귀속문제를 놓고 미국과 소련은 그 태도에 일관성이 없어 이에 관한한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 1960년에 들어와 일본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게 되자 자원 수입과 기술 협력이라는 양쪽의 이해관계에 의해 경제면에서 일소관계가 긴밀해졌다.

그러나 1970년대말부터 동서관계가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1979년 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동지역에의 보조강화 등 군사·외교 면의 경직화가 두드러지면서 미국은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더욱 강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일본은 미국과 방위체제를 서로 협력하는 동맹관계에 서게 됨으로써 소련은 잠재적인 적국이 되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옐친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러시아와의 관계로 과거의 긴장상태가 해소되었으나 그렇다고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비해 긴밀도가 두드러진 것도 아니다. 즉 대러시아 경제원조도 다른 서방국가의 수준과 비슷하거나 소극적인데, 이는 여전히 북방영토문제 해결에 확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미국과의 관계

일본의 외교정책은 이제까지 대미관계를 축으로 해서 전개되어 왔다. 1950년대까지는 거의 미국의 일방적인 주도하에 형성된 것이었다. 일본은 그 아래서 전후 부흥, 경제 발전, UN 가입 등을 실현했고 1960년대에 고도성장기를 맞게 된다. 1960년대에는 오키나와 반환문제와 일본경제자유화가 대두되었다. 1965년 대미무역이 흑자로 전환되면서 그 수출 품목도 철강·텔레비전·자동차로 바뀌고 미국시장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1969년 섬유수출자유규제를 둘러싼 미일분쟁이 계속된 데 이어 1970년대에는 자동차·전자산업 등 공업전반, 서비스업, 농업 등으로 그 분쟁의 폭이 확대되었다. 1970년대초 닉슨 쇼크, 1971년 닉슨의 신경제정책 발표로 일본정부는 비로소 미일 간의 거리를 통감했고 1973년의 유류파동을 계기로 아랍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여 중동경제원조에 역점을 둠으로써 다원적인 외교로 전환하게 되었다.

일본외교의 다원화 현상은 40년 동안의 본질적인 변화는 보이지 않으나 예상 이상으로 무난히 유류파동을 넘기고 안전성장을 착실히 이룩하여, 일본은 아시아·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의 경제원조의 양적 확대와 질적 전환을 기대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냉전 종식 후 세계의 정치판도가 급속히 변화했지만 양국 관계에 대한 서로의 근본신조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양국은 여전히 상호 방위조약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게 되며 일본 내의 수천 명의 미군이 주둔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미국은 일본 방위력의 증강을 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핵우산'과 같은 미국의 대전략체계 속에 일본자위체제가 포함되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한다. 일본 경제가 성숙하고 일본의 국제적 역할이 증대되면서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무역 마찰이 심각한데, 미국은 일본경제의 자주화를 요구하면서도 미국 시장에 일본상품의 자유로운 유입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또한 서로가 제시하는 해결책들을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데서 갈등이 더 증폭되고 있다.

국방

일본은 패전시 항복의 조건으로 육해공군을 해체시켰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의 발발과 함께 점령당국의 명령으로 일본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경찰예비대를 설치했다. 이는 1952년 보안대로 재편되었다가 1954년 현재의 자위대가 되었다. 일본의 자위대는 육상·해상·항공의 셋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18만 명, 4만 5,000명, 4만 7,000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모두 최신 무기로 무장되어 있고 군사비는 1988년 현재 미국, 소련에 이어 세계 3위이다.

1985년 일본 정부는 중기(中期) 방위력 정비계획을 결정하고 1986년부터 향후 5년 동안 본토방공과 항로방위의 능력 향상, 정보·정찰 능력 향상, 기술·연구 개발 추진, 방위력의 효율화·합리화 등을 역점으로 하여 방위력을 정비하기로 했다. 이 계획의 총경비는 약 18조 4,000억 엔으로 이는 1976년의 각의 결정인 '방위비는 GNP의 1%를 넘지 않는다'는 방침에 어긋난다.

현대의 자위대는 전전의 군대와는 달리 어떠한 의미로도 스스로 특유한 법체제를 갖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 군법회의와 같은 특별재판소도 성립할 여지가 없다. 또 다른 특징은 자위대가 미국의 방위전략의 일환으로 이와 유기적인 결합을 하여 존재한다는 점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자위대의 두드러진 활동양상은 해외파견이다.

즉 해상자위대는 1991년 4월 이라크에 의해 걸프 만에 부설된 기뢰들을 제거하기 위해 6척의 소해함(掃海艦)을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했다. 이들은 고난도의 기뢰처리작업을 마치고 6개월 만에 철수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1992년 6월 자위대의 UN 평화유지활동(PKO) 참여와 자위대의 재외파견 임무를 해외까지 확대하기 위해 국제평화협력법과 국제긴급원조대파견법(개정법)을 성립시켰다.

이에 따라 1992년 10월 육상 자위대의 시설과 부대가 캄보디아에 파견되어 UN 캄보디아 잠정기구 산하에서 활동을 개시해 이듬해 9월까지 1년간 UN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했다. 1993년 4월 내각은 자위대의 제2차 UN 평화유지활동을 승인했고, 5월 파견부대가 모잠비크의 마푸토를 향해 출발해 그곳의 총선이 열릴 때까지 주둔하게 되었다. 한편 국제긴급원조대는 최대 770명을 파견할 수 있도록 병력과 장비를 대기시키고 있으며 파견지역은 아시아, 태평양의 개발도상국으로 설정하고 있다.

사회

메이지 유신과 사회변화

근대 이후 일본사회의 구조변화의 커다란 계기가 된 것은 메이지 유신이다. 그 주요근간은 첫째, 신분제에서 개방계급제로의 이행이라는 계층구조원리의 변혁이며, 둘째, 식산산업정책, 서구적 기술이식에 의한 산업화 개시, 셋째, 거주와 직업선택 자유에 의한 도시화 진전, 넷째, 헌법 발포, 학제·징병제·정치·행정·교육·군사 등 제반에 걸친 제도 확립이었다. 이러한 제도 확립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뒷받침으로 진전되고 선도되었으며, 국민의 사회적 통합 구실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사회변화

참전과 패전을 중요한 계기로 일본사회는 격렬한 변동을 가져왔다. 패전에 의해 국가목표가 해체되고 사회적 통제는 전적으로 힘을 잃었다. 곧 목표상실, 사회적 규범의 무력화 상태가 야기되었으나 폐허와 빈곤 속에서도 산업화·도시화의 진행이 사회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직접 사회적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다. 점령군하에서 추진된 전후 개혁은 신헌법 제정, 천황의 신격성 부정, 농지개혁, 지방자치의 확충 등의 변동을 가져와 개인주의·민주주의에로 가치의식이 변화되었다. 또 하나는 귀족제·지주제 등 신분제의 잔재가 일소된 것이다. 최근의 일본사회는 기본적으로는 고도산업사회, 고도도시사회·대중소비사회 등으로 불리는 단일사회로 변화해가고 있다.

현대사회의 양상

1980년대의 일본사회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국민생활은 안정된 것처럼 보인다. 국민의 의식은 생활보수주의가 현저하며 정치태도는 보수화되었다. 학생운동 역시 저조하며 노동운동은 정치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때그때의 관심에 따라 적당히 이합집산하며 계급이라는 정상점에 서서 집합·행동하는 계급사회의 양상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부터 급속히 국가·국민 간의 상호침투가 진전되었고, 1960년대부터의 일본경제의 성장과 맞물려 1980년대의 일본은 그 존립기반을 대외교류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정부는 '국제국가 일본'을 내세우고 재계는 국제인 육성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런 현상은 국제화로의 진전과 정보화의 침투를 더욱 촉진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와 관계된 생산(가공·해외투자)·유통(수출입·상품·외국환)·관광 등의 업종에 종사하며 그 수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사람의 이동도 활발하여 1985년에 외국으로 나간 일본인은 495만 명이며, 그중 402만 명이 해외관광이었다. 나머지는 직업·생활·유학 때문에 출국했다. 재일외국인은 84만 명(1984)이며 한국·북한·중국인의 순으로 많다. 재일외국인은 납세 의무는 있으나 취직·생활·인권 면에서는 차별된다.

고령화

일본의 커다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고령화 문제이다 (→ 색인:노인문제). 197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그해부터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만이 고령화 사회에 들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UN은 65세 이상의 인구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하여 4% 미만일 때 '젊은 인구', 4~7%를 '성숙한 인구', 7% 이상을 '노화 인구'로 정의한다. 1970년대에 65세 이상의 인구가 7.05%였던 일본은 10년 후인 1980년대에는 9.05%가 되었다.

일본의 인구고령화는 속도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으며 2045년에는 22.09%로 예상하고 있다. 장수하는 것이 사회의 기본목표이기는 하나, 반면 이런 현상에 따른 고령자의 질병·가난·고독 등 사회·경제적 문제와 이들에게 삶의 보람을 주는 대책이 큰 당면과제이다. 그래서 정부·기업·노동조합도 각각 연금제도의 관민격차 시정, 정년제 65세 연장, 연령에 따른 고용차별금지, 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취업기회 창출 등 고령화 사회에의 대응을 서두르고 있다.

교육

일본의 교육은 크게 나누어 대륙문화 의존교육시대, 일본문화 자각교육시대, 서양문화 섭취교육시대를 거쳐 현대의 고학력 교육시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 색인:교육사). 대륙문화 의존교육시대란 고대에서 가마쿠라[鎌倉]시대까지로 생각할 수 있다. 오진[應神] 천황 때 백제의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이 건너갔고, 552년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학술·미술·공예의 진흥을 촉진시켰다. 그후 일본문화 자각교육시대는 가마쿠라에서 에도 시대까지를 포함한다. 화한혼교(和漢混交)가 그 특징이며 가정, 학자의 집, 절 등에서 교육이 성행했다 (→ 색인:데라코야).

서양문화 섭취교육시대는 1872년 학제가 발표되고 국민교육제가 출범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1886년 교과서 검정제도가 제정되고, 1940년에는 '황국민(皇國民)의 단련'이 교육목표가 되었다. 군국주의화가 그 중심적인 시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에 먼저 6·3·3·4학제가 발표되었다. 고학력교육시대의 교육은 첫째, 평생교육의 필요성 통감, 둘째, 풍요로운 사회가 가져온 몇몇 중대한 병리현상, 셋째, 국제 이해의 교육, 평화교육의 필요성 등의 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제는 세계에 공헌하고 발언하기 위한 교육의 방향 검토와 재편성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

일본문화의 특징은 조몬[繩文]·야요이[彌生]시대의 토기, 하니와에서 볼 수 있는 고대미(古代美)를 비롯하여, 아스카[飛鳥]·하쿠호[白鳳] 시대의 건축·조각 또는 〈만요슈 萬葉集〉에서 비롯된 와카[和歌], 하이쿠[俳句]와 같은 독특한 시가(詩歌)가 있다.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諸〉에 이은 문학과 제아미[世阿彌]의 노[能], 정원과 같은 독특한 문화유산이 있다. 일본 문화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동질성과 다양성

250년에 걸친 쇄국은 문화통합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고, 정부가 메이지 초기 이후 의도적으로 추진한 정책, 국어표준화, 신도(神道) 국교화, 천황의 신격화 등이 동질성 높은 문화를 갖게 했다. 그러나 그 문화전통에도 다양성을 산출하는 조건이 존재했다. 4개의 주요섬으로 이루어진 일본은 지역적인 다양성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남쪽에서 들어온 민족집단, 북방에서 들어온 민족집단, 중국대륙에서 도래한 민족집단이 중층적으로 혼혈이 이루어졌는데, 각 계통의 문화요소가 민족의 형성과 함께 중층적인 일본문화의 기반이 되고 있다.

또한 봉건제 전개와 바쿠한[幕藩] 체제의 정비에 의해 지방문화가 각지에서 발달했다. 사농공상의 신분계층적인 부분문화가 각지에서 발달하여 현대 일본문화의 기초가 되고 있다. 황실을 중심으로 한 문화전통도 계층적 부분문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일찍부터 해외로부터 문화요소의 유입·전파가 있었다. 4세기 이전에는 농업·철, 7세기까지는 한자·불교·유교·도교 및 도시계획·정치행정제도가 유입되었고, 16세기에는 그리스도교·총기·서양문물이 유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화도 그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외 문화요소의 적극적인 채용경향을 이유로 일본문화를 모방문화·잡종문화로 보는 설도 대두한다.

종교

일본에서의 주요종교는 신도· 불교· 그리스도교가 있다. 신자수는 신도 9,100만 명, 불교 8,608만 명, 신·구 그리스도교 93만 명, 그리고 기타 종교 831만 명을 합쳐 모두 2억 1,355만 명(1988)으로 실제 일본 인구의 약 1.8배나 된다. 신도는 정령신앙과 조상숭배를 바탕으로 한 신앙계보 위에 발달했는데 이것은 해외에서 전파된 불교·도교의 영향하에 그 이전부터의 토착적인 고유신앙이 반응하여 형성된 것이다. 신도는 메이지의 신분분리정책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체계화되어 전통적인 민속습관에서 떨어져나갔다.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신도는 민속문화전통을 되찾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탄생·결혼 의식은 신도 의식으로 행하고 장례의식은 불교의식을 따른다.

매스커뮤니케이션

일본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매스컴 왕국'을 자처한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이 일본에서 처음 성립된 것은 1922년 아사히[朝日]·마이니치[每日] 양 신문사가 고속윤전기를 도입하고부터이다. 그러나 일본헌법의 탄압으로 언론의 자유가 구속되었다가 1952년 강화조약의 발효로 비로소 법적인 자유를 얻었다. 각종 주간지·텔레비전의 발전으로 매스미디어의 눈부신 진전을 보여 오늘날 세계 1, 2위를 겨루는 나라가 되었다.

일본 신문은 전국을 배포범위로 하는 전국지, 복수 부·현에 걸친 블록지, 1현 1지의 지역지로 나뉜다. 일간 신문의 인구당 발행부수는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일간지 121개지의 총 발행부수는 약 7,192만부(1994)이다. 일본의 신문은 〈아사히 신문 朝日新聞〉·〈마이니치 신문 每日新聞〉· 〈요미우리 신문 讀賣新聞〉·〈니혼케이자이 신문 日本經濟新聞〉·〈산케이 신문 産經新聞〉등 5개 전국지와 〈홋카이도 신문 北海道新聞〉, 〈주니치 신문 中日新聞〉 등 수많은 지방지가 있다.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것은 〈요미우리 신문〉으로 전국에서 조간 950만 부, 석간 489만 부를 발행하고 있다. 일본 신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아사히 신문〉이다.

일간지 외에 이른바 잡지시대라 하여 월간지와 주간지의 새로운 형태가 속출하여 1987년에 발행된 총발행부수는 약 41억 권으로, 월간지 24억 권, 주간지 18억 권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를 기록했다. 또한 서적·출판도 세계 굴지에 들어가나 전집물 형식의 항시적인 간행이 특징이다.

일본의 라디오 방송은 1925년에 시작했고, 사단법인 일본방송협회(NHK)뿐이었다가 민간방송이 병존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보급률이 급증했으나 텔레비전 방송의 대두로 라디오 방송은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텔레비전 음성다중방송의 확충, 디지털 오디오 디스크(DAD) 등장, 방송위성 등 새로운 미디어가 나왔으나 라디오는 주파수변조(FM) 방송을 등장시켜 이에 대처했으며 라디오 매체의 특성인 기동성·속보성·유연성을 살린 프로그램 개발, 지역화·개성화 강화 등이 시도되고 있다.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은 1953년에 NHK가 본 방송을 시작했다. 1960년부터는 컬러 텔레비전이, 1985년에는 다중방송인 문자방송이 시작되었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주역은 역시 텔레비전이다. 일본은 주로 산지인 지형 때문에 전국에 약 3,500개 방송국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위성방송을 시작하여 적도 상공 3만 600km 궤도에 있는 정지(靜止) 위성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하여 하나의 전파로 전국에 동시에 방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 텔레비전은 방송개시 40년을 기록했다. 전국 300만이 넘는 세대에 컬러 텔레비전이 보급되었다. 일부 프로그램들은 음성다중방송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1985년부터 NHK는 문자다중방송을 도쿄와 오사카 지역에서 방송하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는 유선 텔레비전 방송국이 최초로 방송을 시작했다.

한국과의 관계

역사의 시작부터 한국은 일본에 대해 문화전수자적 위치에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한자·불교문화 및 여러 제조기술을 일본에 전수하여 일본의 고대문화 형성에 주요역할을 했다. 그러나 해상교통이 발달하고 일본의 국력 신장과 어지러운 국내정세로 조선해협을 통해 왜구가 출현함으로써 고려와 조선은 큰 피해를 입어왔다.

특히 임진왜란(1592~93)과 정유재란(1596~98)으로 조선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국력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경제적 수혜가 컸는데, 즉 우리의 서적과 활자를 약탈하여 활자인쇄술과 주자학을 보급했으며, 특히 도공(陶工)을 많이 데려가 화려한 도자기 문화를 열기도 했다. 임진왜란 뒤에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가 정권을 잡고 우리나라와 수호하기를 청하여 1607년(선조 40)부터 국교가 재개되어 19세기초에 이르기까지 12회의 통신사가 내왕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의 체결과 함께 오랜 쇄국을 마치고 한국에 앞서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급속하게 근대화의 길로 접어 들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의 단행과 함께 일본은 조선에 개국을 강요했으며, 강압으로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고 치외법권·관세면제 등의 특혜와 이권을 일방적으로 따냄으로써 한국 침략의 발판을 다지기 시작했다. 개국 후 조선은 일본의 값싼 공산품으로 인해 수공업이 몰락하여 자급자족 경제가 붕괴되었고, 무리한 일본식 개혁으로 인해 개혁을 반대하는 보수파의 출현을 초래했다.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한국으로 하여금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을 맺게 하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맺어 통감부를 설치했으며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합병 후 설치된 총독부를 위시하여 식민지 통치를 실시한 일본은 무단정치를 통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했으며 한국을 일본상품의 시장 및 식량·원료 공급지로 개편하기 위해 경제적 침탈을 했다.

이와 같은 식민지 통치에 대해 한국 내에서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의 항일운동이 일어났으며 해외에서는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의 중추 역할을 했다. 이에 일본은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여 한국어 사용금지, 창씨개명 강화 등의 억압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화하면서 온갖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했는데, 한국인 청·장년은 징용·징병으로, 부녀자는 소위 '정신대'라는 이름의 위안부로 끌고 갔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일본의 한국지배는 종식되었으나 한일 양국관계는 파란을 내포한 긴장관계에 있었다.

1952년 4월 28일 미군정이 끝나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으나 한국정부의 '해양주권선언'으로 설정된 평화선(이승만 라인)과, 그로 인한 독도영유권문제, 일본어선 나포문제 등으로 양국관계는 마찰이 지속되었다. 독도는 평화선 설정으로 1954년 이후 한국이 점유해 오고 있다. 한일국교정상화 단계에서 독도문제는 직접적인 해결을 보지 못했고, 일본에 있어서는 여전히 미해결 영토문제로 남아 있다.

1960년 이승만정권이 붕괴되고 장면정권이 등장하면서 서적수입, 어학강습소 설치, 인적 교류 등이 증가했으며 한일관계는 크게 호전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경제적 발전을 위한 일본의 협력이 불가피하여 한일회담을 적극 추진했다.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大平] 메모' 작성 등 양국의 노력이 경주되어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었다 (→ 색인:한일기본조약). 이리하여 1951년 시작된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은 일단락되었다.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경제협력을 축으로 비교적 한일관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한국으로서는 대일경제의존과 만성적인 수입초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67년이후 한일정기각료회의를 발족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으며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1974년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으로 인한 육영수여사 사망사건 등과 1982, 1986년의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한일관계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1년 한국이 제기한 대일차관 교섭은 1983년 양국정상회담에서 40억 달러 규모로 타결되었고, 1984년 9월 히로히토[裕仁] 왕의 유감표명이 있어 관계개선의 기미가 보였으나 재일한국인에 대한 지문날인 강요, 차별대우 등이 문제가 되어 한일간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1990년 5월 양국정상회담에서 기술협력문제, 무역불균형 시정, 재일한국인 처우문제, 원폭피해자 보상문제 등을 논의했으며 현 아키히토 왕의 과거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유감 표명이 있었다.

1994년 7월에는 무라야마 총리가 서울을 방문해 일제의 한반도 통치에 대해 사과를 표명했고, 이 방문을 계기로 일본 사회당은 남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일본은 1990년대에 들어서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지향하여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을 전개해 왔으나, 북한의 핵정책에 막혀 정체 국면에 있다.

참고문헌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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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河川 - 自然と社會史 : 小出博, 東京大學出版會,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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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文化硏究 全9卷 : 新潮社 編·發行, 1958 - 61
日本文化の特質 : 國際文化振興會, 日本評論社, 1941
日本文化の問題 : 西田幾多郞, 岩波書店,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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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B. S. Bibliography of Standard Reference Books for Japanese Studies with Descriptive Notes, vol. 5B : Kokusai Bunka Shinkokai (ed.), Univ of Tokyo Press, 1966
Religion in Japanese History : Joseph M. Kitagawa, Columbia Univ. Press,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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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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