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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5-01-05 (수)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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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569      
[국가] 중국 2=중화인민공화국 (한메)
중화인민공화국 2 중국 2

(앞에서 이음)

[경제·산업]

중국의 경제 성장은 1949년부터 1957년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웠지만 1960년부터 1962년까지는 마오쩌둥의 <대약진>과 <인민공사(人民公社)> 정책이 계획경제라는 명목에 부합되지 않아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였다. 1959년부터 연속 3년 동안의 자연재해와 1960년 소련의 원조단절 등은 중국경제를 더욱 침체시켰다. 1963년부터 개선되기 시작했으나 실리보다 사상을 우선하는 정치체질과 권력투쟁으로 1978년까지 26년 동안의 연평균성장률은 2%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 당시 중국 경제는 고도의 중앙집권체제를 이루며 경제와 행정명령이 우선하였다. 중공업 위주의 경제계획으로 1977년 공업생산액이 국민총생산(GNP)의 44%(그 중 60% 이상이 중공업비율)에 이르고 1983년 사회총노동력의 74.5%가 농촌에 편중되어 노동력 비율이 불균형 상태를 이루고 기업체제를 효율화시킬 내부기구도 없었다. 1952년에 농촌노동력이 사회총노동력의 88%로 압도적인 다수였고 1983년에도 여전히 74.5%였다. 즉 인구의 80%가 오랫동안 농촌에 머물러 이동하지 않았으며, 이는 중국공업의 고도성장이 농촌과 격리된 상태에서 투자를 위한 투자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중국은 지난 십수년간 평균 30% 정도의 높은 저축률을 기록했다. 1978년에는 국민소득의 36.5%가 저축기금이었고 이 가운데 26.2%가 생산적 축적에 소비되었다. 그러나 공업에 대한 투자는 공장증설에 치우쳤고 기존설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중국 기업체제에 효율화를 촉진하는 내적 기구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경제체제의 결함을 감안하여, 1978년 말에 <4대 근대화>라는 경제개혁에 착수하였다. 이 경제개혁은 자영농 육성과 농산물가격 인상을 먼저 꾀하고 중공업의 일방적인 발전을 억제, 농업과 경공업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켰으며 생활필수품과 내구소비재의 생산을 늘렸다. 자주권 인정은 농민에 대한 농산물공급의 증가로 나타나 식량의 자급이 가능해졌다.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가 향상되고 병원과 주택 등 비생산적 축적의 비율이 높아졌으며 소비경향이 현저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이어진 1980년대의 경제는 1985년 3월 자오쯔양[趙紫陽] 총리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그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제발전과정에는 경시할 수 없는 문제가 일부 남아 있다. 에너지·교통·원자재의 공급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사실과, 산업구조와 제품구성이 아직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실, 그리고 예산 외 고정투자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사실 등이다. 이 밖에도 비교적 두드러진 문제로서 1984년 하반기 특히 제4사분기의 대부기금과 소비기금의 관리가 엄격하지 못하여 통화의 발행고가 지나치게 많아졌다는 사실, 무턱대고 물가를 상승시키는 등 부정적 풍조가 만연하여 일부 상품의 가격상승을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국경제에 여전히 사회문제가 발생할 만한 기반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정부가 거시적 경제를 잘 관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원>

중국은 국토의 광활함과 자원의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지대물박(地大物博)>이라는 말이 있듯이 광산물과 에너지자원은 종류도 많고 절대량도 크지만, 인구비율로 나누어 본다면 그렇지도 못하다. 광물자원은 130여 종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이 가운데 텅스텐·주석·안티몬·아연·리튬·프랑슘·티탄·황철석(黃鐵石) 등은 매장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고 석탄·철·동·알루미늄·몰리브덴·납·수은·인(燐)·붕산 등도 세계굴지의 양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광산물에 빈광(貧鑛)이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① 철광은 성분비 30% 정도의 빈광이 전체의 95%를 차지하며 부광(富鑛)은 분산되어 있어 개발에 불리하다. 상하이 바오린제철소[寶林製鐵所]는 성분비 55∼60%의 광석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원광을 수입하거나 비용을 들여 부광처리를 해야만 한다. 동도 함유율이 1%만 되어도 부광에 속하며 자이레와 잠비아산의 3.5∼6%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인·보크사이트 등도 비슷한 상황이다.

② 성분이 복잡한 공생광(共生鑛)이 많아서 얻고자 하는 광물의 야금(冶金)과 제련에 어려움이 많다. ③ 칼륨 등 몇 가지 광물의 매장량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철광자원의 분포는 랴오닝성에 많고 쓰촨성·허베이성·산시성[山西省]·안후이성·후베이성·내몽골자치구·산둥성·윈난성의 순이다. 주요 철광산에는 반드시 제철소가 있다. 석탄의 매장랑은 세계의 1/3을 차지한다.

1991년의 석탄생산량이 10억 6000만t이었으며 매장지역은 화베이에서 전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연간 생산 1000만t 이상의 탄광은 둥베이의 기시[鷄西]·허강[鶴崗]·푸순·푸신[阜新], 화베이의 카이뤄·펑펑·다퉁·양촨[陽泉]·시산[西山], 화둥[華東]의 화이베이·쉬저우, 중난[中南]의 핑딩산 등 12곳이 있다.

500∼1000만t급은 13개소, 그리고 이곳들을 모두 포함한 국영탄광의 총수는 2200개소이며 내몽골자치구의 준가얼탄광과 산시성[山西省] 안타이바오탄광[安太堡炭鑛] 등의 대규모 탄광이 새로 채탄하고 있다. 10만t 이하의 소규모 탄광은 지방에서 경영되며 약 1만 7000개소가 있다. 화베이에서는 석탄이 남아돌지만 화둥·중난·둥베이에서는 부족한 상태이고 고품위탄도 수요에 따르지 못하는 형편이다. 주요 에너지원인 석탄의 수송량이 많으므로 철도수송이 곤란을 겪고 있다.

석유는 1960년 다칭유전에서 생산이 시작되면서 자급에 성공하였다. 그때까지는 위먼·두산쯔·쿠라마이·렁후 등 서북쪽 유전에서 공급되는 것 외의 부족분은 옛 소련으로부터 수입했었다. 현재 22개성과 직할시·자치구에서 새로운 유전과 가스전이 발견되고 있으며 연간 생산 1000만t 이상의 대유전은 둥베이의 다칭, 화베이의 런츄[任丘], 화둥의 성리 등이다. 이 밖에 랴오허[遼河]·쿠라마이·다강·난양 등이 규모가 크다. 한편 쓰촨·헤이룽장·랴오닝·산둥 등의 각 성에 연간 생산 10억m ³급의 가스전이 있다.

1991년의 산유량은 1억 4000만t으로 수출할 여력도 있었다. 1978년 이후 해양석유개발이 시작되었고 보하이·통킹만·하이난섬 해역에서 전망있는 유층이 발견되었으며, 서방의 석유회사와의 공동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서부의 타림·준가얼·차이다무에도 유전이 있으나 동부공업지역으로 수송하는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수자원은 양쯔강수계가 가장 많아서 전체의 50% 이상이며 티베트의 야루짱부강·누장강·란창강 등의 순서이다. 또 황허강은 6%, 주장강이 5.2%이다. 수자원은 서남지방에 풍부하지만 경제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개발이 곤란하다. 전력개발의 중점은 동부연안지방과 양쯔강·황허강 중류에 두어 왔다. 25만kW 이상의 발전소가 18개소, 500kW 이하의 작은 발전소가 8만여 개에 이른다. 그러나 화력발전과 수력발전을 합쳐 전국 6300만kW의 시설용량 가운데 수력발전은 20% 정도를 차지, 개발가능량의 3%를 개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자력발전소는 2000년까지 6개소를 건설할 계획이다.

한편 중국의 땅은 토양유실(土壤流失)이 심한 지역이다. 황허강 중류에 있는 황투고원은, 동쪽의 타이항산맥에서 서쪽의 칭하이 르웨산[日月山]까지, 남쪽의 친링산맥 동부 푸뉴산맥[伏牛山脈]에서 북쪽의 만리장성에 이르는 약 40만㎞²에 인구 약 6000만에 이르는 이 지역에서는 토지 총면적의 80%에서 토사의 유실이 계속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1㎞²당 4000t∼1만t 가량의 토사가 유실된다고 한다. 따라서 황허강 중류의 하상이 매년 10∼20㎝씩 높아지며 정저우의 하류에서는 3∼10m 이상의 천정천(天井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오랫동안 산림의 훼손과 마구잡이식 개간 등 불합리한 토지의 이용으로 생긴 것이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서는 넓은 토지를 개간하고 수년 뒤 황폐해지면 또 다른 땅을 개간했기 때문에, 숲과 초원을 잃게 되고 토양유실이 계속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데 이것을 윤경(輪耕)이라고 한다.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서 먼저 녹화사업을 전개하는 것이 순서지만 숲이 적으므로 농가에서는 땔감이 부족하여 초목 그루터기와 풀뿌리, 짚을 때고 소와 말의 배설물까지 건조시켜 연료로 쓴 결과 농경지에 사용할 비료가 없어져 토질이 황폐해졌다.

양쯔강의 <황허강화>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상류에서 많은 나무를 남벌하여 숲의 피복도(被覆度)가 10여%로 떨어졌고 양쯔강에 토사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강수기에는 수량이 2∼3배로 불어나고 건기(乾期)에는 현저하게 줄어든다. 1980년 이후 쓰촨분지 이하의 유역에서 우기에 흥수의 위험이 늘어났고 수운(水運)에 지장이 생겼다.

내몽골자치구와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도 오랫동안 계획성 없이 초지를 농경지로 바꾸어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 수립 후에도 한족이 목초지로 계속 진출했으므로 양질의 목초지가 농경지로 바뀌면서 가축의 월동기 목초지를 잃게 되었고 그에 따라 목축이 쇠퇴하여 버려진 농경지가 사막화하였다. 타림강 상류지역에서는 오아시스에 농경지를 확대한 결과 염분이 다량으로 함유된 관개폐수(灌漑廢水)가 타림강에 흘러들어 하류에서는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있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면서 생태계의 균형을 중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농림수산·목축업>

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율은 점차 낮아지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농업국이었기 때문에 도시화의 추세 속에서도 농업인구는 여전히 많고, 작물의 다양성과 생산고에 있어서 세계유수의 농업국이다. 그러나 급격한 인구증가에 따른 농민 1인당 경지면적의 협소화는 농업의 근대화와 생산성 향상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중국이 성립된 뒤 농업분야에서 얻은 중요한 성과는 의식부족(衣食不足) 문제를 일단 해결했다는 사실이다.

1984년에는 식량생산이 4억t이라는 높은 벽을 돌파하여 4억 712만t(전년대비 5.1% 증가)에 달했다. 면화는 607.7만t(전년대비 31.1% 증가)로 급증했고 채종·대두 등 착유원료작물(搾油原料作物) 12.3% 증가, 사탕원료작물 18.9% 증가, 육류 8.8% 증가, 수산물 11% 증가 등 엇비슷한 호조를 보였다. 옥수수는 둥베이지방의 풍작과 운반수단의 부족으로 저장할 수 없을 정도의 공급과잉이 초래되어 식품가공공장과 사료공장을 건설하자는 소리가 나왔다.

면화도 저급품의 생산지에서는 거래가 늦어져서 야적한 채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이런 성과로 식량의 1인당 보유량은 쌀(벼)·보리가 265㎏, 면화가 6㎏에 이르는 등 의식에 있어서 최소한의 필요량은 충족되었다. 1949년 중국이 성립했을 때 중국공산당은 인구의 10% 정도인 대지주와 부농이 경작지의 70%를 차지했던 지주제를 폐지하고 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한 토지개혁읕 단행하였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피폐해진 중국을 회복시켰고 1952년 말에는 농공업의 생산량이 혁명 전의 최고수준을 돌파하였다. 1952년부터 사유제적 자주조직인 호조조(互助組)가 새로 생겨났는데 이는 생산협동조합인 초급합작사로 발전하였다. 1955년에 이르러 옛 소련의 콜호스와 비슷한 고급합작사가 조직되고 토지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이미 농민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정적 개입으로 조직을 만드는 지방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958년부터 중국공산당은 고급합작사를 연합한 거대 조직, 즉 인민공사를 만들었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공사는 선전에 의해 미화되었으나, 실제로는 공유의 정도가 지나쳐 작업 배당과 보수 분배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저하시켰다. 과장된 거짓보고가 지방에서 올라와서 1958∼59년 수치상으로는 대풍작이었지만 곳곳에서 기근이 발생했고 군대 또한 동요하였다. 그러자 당중앙은 경영수준을 생산대(生産隊;이전의 초급합작사, 20戶 정도)로 되돌려 놓았고 농민에게는 자영지를 주었으며 인민공사와 생산대대(生産大隊;이전의 고급합작사, 생산대의 연합조직), 그리고 생산대라는 3급소유제를 실시하였다.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인 토지는 생산대의 소유가 되었다. 1965년 중국농촌은 3년 동안의 식량위기에서 겨우 벗어나는 듯했으나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10년 동안 마오쩌둥과 그 측근에 의해서 행해진 문화대혁명으로 도시와 농촌은 대혼란에 빠졌다. 중국공산당 내부의 극좌파는 농민의 자영지와 가내부업을 금지시키고 자유시장과 소매상까지도 <자본주의의 꼬리>라고 하여 제거하였다. 지방에 따라서 식량의 자급과 증산을 요구했고 공예작물과 임산·목축·어업 등이 억압당하거나 경시당해 농학연구와 품종개량·기술보급이 정체되었다.

무상노동에 의한 축적이 장려되었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식량의 소비수준은 1950년대보다 낮았다. 1976년 극좌파가 타도되고 1978년에 정책전환이 분명해지자 농촌은 활기를 되찾았다. 가격과 세금, 금융, 정부의 농산물매입 등이 개선되었고 농가에 자영지가 부활했으며 다각경영이 인정되어 농촌에 자유시장이 서게 되었다. 행정기관이 무상으로 노동력과 물자를 조달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생산대의 경영자주권이 존중되었고 노동의 정도에 따라 분배를 하게 되었다.

<포건도호(包乾到戶)>라는 생산청부제를 취하여 노동력과 가족수에 따라 농가에 분배되었고 농지의 비옥도에 따라 생산을 청부하였다. 농가에서는 식량을 정부에 매도(賣渡)하고 조세의 의무를 다하면 자유로운 생산 및 판매가 가능했으며 필요에 따라 공동작업을 하더라도 농민에게 큰 자영권이 주어졌다. 종래의 자급형 농업은 부정되었고 상품생산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농가의 부업으로서 전에는 금지되던 상업과 운수업·여관업·창고업, 그리고 여러 가지의 서비스업까지도 인정받게 되었다.

또 1979년 식량의 정부매입가격이 20%, 의무매도초과분 50% 등의 할증가격이 실시된 뒤부터는 자영화에 의한 생산비의 하락과 함께 식량생산의 수익률이 30% 가량 되었다. 1984년 농산물의 상품화율이 50%를 초과하게 되자 당국은 <통일매입·통일판매(식량의 국가통제)>를 꾀하여 농민에게 시장의 수요에 따라 생산하게 하도록 통제를 완화하고 가격을 시장원리에 따라 조절하는 방향으로 진행시켰다. 통일매입은 식량·착유원료·면화에 한정하고 할당매입을 18종에서 9종으로 줄였다. 여기에는 농산물의 매입과 판매의 이중 가격에 의한 재정부담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있다.

농산물의 공급증가는 농민의 현금수입을 증가시켰다. 1978년 중국의 생산대와 농민의 현금수입은 580억 위안[元]이었으나 1984년에는 1500억 위안을 초과하여 17.2%의 증가율(1953∼78년은 5.5%)을 보였다. 현금수입의 증가는 국내시장을 확대시켰고 1984년 사회구매력의 50% 이상을 농민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도시의 공업과 농촌의 소공업화를 자극하였다. 농촌에서는 보다 좋은 것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자전거·라디오·시계 등의 보급률이 높아짐과 동시에 세탁기·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제개혁의 혜택은 도시근교에 집중되고 벽지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므로 지역간 격차가 증대되었다. 정부는 20∼40%라는 과잉노동력의 해소를 위해서 농민에게 농촌광공업과 건축업, 운수업과 소매업, 식당과 그 밖의 서비스업에 대한 전업과 겸업을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공업도 농촌의 과잉인구를 받아들일 만큼 급속한 발전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으므로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다. 또 농촌청년은 도시에 나가고 싶어하지만 당국에서는 급속한 도시화가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그들의 이동범위를 현성(縣城)과 진(鎭)을 중심으로 지방 소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방침이다.

1978년 이후의 경제개혁은 소수민족지역에도 파급되었다. 목축도 집단에서 개인경영으로 바뀌었고 전통적인 호조노동(互助勞動)이 부활하였다. 좋은 목야지를 개척하여 농경지로 바꾸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목축업의 보호를 우선하였다. 한족 청년을 오아시스와 유목지대로 대량 이주시키는 정책도 중지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발생한 문화대혁명이 초래한 정체는 목야지의 황폐화, 농경지의 알칼리화, 가축의 개량과 방역의 불비 등 문제점을 낳았다.

수산업은 원양어업은 거의 없고 연안어업이 중심인데, 잦은 남획으로 어종이 치어화되는 등 자연보호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한편 화난을 중심으로 담수어와 해조류의 양식이 확대되어 내륙지방에서도 양식어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공업>

1949년부터 1952년 사이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등으로부터의 회복기였고 1953년부터 대규모 건설이 시작되었다. 1991년의 생산실적은 석탄 10억 6000만t과 석유 1억 4000만t, 발전량 6716억 k W/h의 광업생산으로 조강생산은 7057만t에 달하였다. 이 사이에 면사·면포·시멘트·석탄·화학비료 등은 세계 3위 이내, 철강은 제4위, 발전량과 석유 등도 10위권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문별로 보면 중화학공업의 성장속도가 현저하게 빠른데 그 이유는 중국 성립 전에는 소비재공업에 편중되어 유력한 생산재공업이 없었던 반면 그 뒤의 투자가 생산재생산부문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중화학공업의 과도한 성장이 소비재생산을 압박하여 필요한 소비재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반성으로 한때 투자가 억제되었으나 오늘날에 와서 다시 중화학공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중국의 공업규모는 대부분이 소규모의 공장들이다. 가령 조강의 연간생산량 100만t 이상의 대형철강공장이 총생산량의 85%를 생산하고 있지만 이런 기업은 9군데에 불과하였다. 자동차공장은 9군데의 대·중형공장이 생산의 62%를 차지하고 연간생산 5000대 이하의 소형공장이 전국 25개 성(省)에 분산되어 있다. 1970년대에는 중공업이 급속도로 신장되어 지방에 소공장을 많이 건설하였는데, 자본주의국가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소기업이 반드시 하청공장은 아니다.

작으면 작은대로 부품에서 완성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생산한다. 이것이 생산원가를 높이는 원인이 되어 철강과 화학공업 등의 분야에서는 일부 조업을 중단한 기업도 있어 중소기업의 전문화와 계열화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 대기업과 중형기업은 국가 또는 성에서 경영하고 소기업은 현에서 경영한다. 이 밖에 향진기업(鄕鎭企業)이라고 하는 지방농촌의 영세기업이 있다. 이는 통계상으로는 부업에 들어가지만 농업생산재의 생산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농촌의 과잉인구를 흡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향진기업의 제품은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하여 수요에 따라 생산하고 있다. 가격 상승을 억제하는 공정가격의 석탄·전력·강재(鋼材)를 입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생산원가가 인상되지만 국영상점보다 제품을 비싸게 팔 수 있어서 경영상태가 나쁜 편은 아니다. 공업이 침체했던 1970년대 말에는 조강 생산량이 설비능력의 60%에 머물렀고 기계공업의 조업률도 절반이었으며 제품의 재고도 많았다. 교통·수송·전력에 문제점이 있는 데다가 제품은 목표량만 달성하면 되었고 질은 문제시되지 않았으므로 수요에 부응할 수 없는 조악품도 있었다.

1984년 5월 국무원은 <국영기업의 자주권 확대 문제에 관한 잠정규정>을 시달하였다. 이로써 각 기업은 계획 외 생산과 판매권을 가지게 되었고, 원가상각준비금의 기업 내 유보가 1985년부터 70%로 인상되었으며, 기업 내에서의 공장장의 권한이 커졌다. 행정기관인 기계공업부는 공장에 대한 직접관리를 중단하고 국영기업도 독립채산제로 전환하였다. 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기업경영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의식에도 변화가 왔다. 즉 가격·세금·이율로 기업이 운영되고 경영은 기업주가 책임지며 소비자의 욕구와 생산품의 품질향상을 최우선시하는 시대가 온다.

<무역>

산업 전반과 마찬가지로 1978년을 경계로 크게 모습이 바뀌었다. 그 이전의 구체제 아래에서는 자력갱생이 원칙이었으므로 무역의 규모가 작았고 엄격한 중앙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1978년 이후 적극적인 무역정책으로 전환하여 무역의 권한을 지방에 넘겨 주었으며, 외화획득을 위해서 무역형태의 다양화를 추진하고있다. 그 결과 무역액도 크게 증대되어 수출입총액은 1950년 11억 달러에서 91년 1356억 달러로 매년 10% 이상 증가해 왔다. 수출품목은 농산품이 많았으나 경제건설의 진전과 함께 경공업제품과 광산물·중공업제품 등의 비중이 커졌다.

대약진기에는 오히려 무역이 후퇴했다가 1963년부터 66년의 조정기(調整期)에 회복되었다. 문화대혁명기에는 경공업(특히 방직업)제품이 수위를 차지하였고 중공업제품은 그 뒤를 이었다. 극좌파의 실각 후에는 수출이 급증하여, 1979년 경공업제품이 수출총액의 45%, 중공업제품이 32%, 농산물이 23%를 차지하였다. 수출이 증가된 원인은 원료를 수입해서 가공 수출하는 가공무역의 신장과 석유수출의 증가에 있었다. 반면 1차생산품의 비율도 여전히 높았다.

수입은 1960년 <대약진>의 실패까지는 생산재(원료와 플랜트·기계 등)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1965년 농업 부진을 반영하여 식량 등 소비재의 비율이 40%까지 상승한 것을 고비로 줄고 80년 이후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입이 늘었다. 1990년의 수입은 중화학공업제품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1차생산품도 공업원료와 식품을 합쳐서 20% 이상이었다. 수출은 경공업제품이 36%로 가장 많았고 석유와 석탄이 그 뒤를 이었다. 식량은 수출입을 상쇄하자 1984년부터는 수출초과가 되었으나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은 아직 주류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무역상대국은 1950년대 말까지는 옛 소련과 동유럽권의 비중이 높았지만, 1960년대 초 이후에는 서방측과의 무역증대를 꾀하는 등 수출다변화에 노력하였다. 1991년 현재 수출은 홍콩 45%, 일본 14%, 유럽공동체(EC) 8%, 미국 7%를 차지한다. 수입대상국은 홍콩·일본·유럽공동체·미국의 순서이다. 대만·미국·유럽공동체 등에 대해서는 수입초과이고 홍콩·한국·싱가폴·마카오·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수출초과로, 개발도상국과의 무역이 흑자를 이루고 있다.

1970년대 말에 기술의 낙후성을 극복하려고 했던 중국은 재정능력을 감안하지 않고 대형 플랜트 도입을 꾀했으나 국내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외화 획득과 기술 도입을 위해 1980년 선전·주하이·샤먼·산터우 등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서방측 자본을 유치하는 정책을 추진, 이러한 개방정책은 계속 확대되어 갈 전망이다.

<재정>

중앙재정과 지방재정(省·自治區·直轄市, 市·縣·自治州 등)으로 나뉘며 중국의 재정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91년에 19%로 이른바 <작은 정부>이다. 이것은 국가재정을 통하지 않은 투자로서 예산 외 자금이 있기 때문이다. 예산 외 자금은 지방이나 기업의 관리에 맡겨지는 유동자금 보전(補塡)을 위한 은행융자와 기업의 감가상각비 등이다. 예산 외 자금은 중앙정부가 집권적인 정책을 내세울 때는 작고 반대일 때는 커지는데 너무 커지면 지방이나 기업의 투자가 확대되어 중앙의 조절이 불가능해지는 경향이 있다.

주된 재정수입은 조세수입·기업의 이윤 상납·공채·대외차관·보험수입·감가상각기금 등이다. 주요 국세는 물품세, 집단소유기업으로부터의 소득세·농업세이다. 지방세는 도시토지가옥세, 시장거래세, 차량·선박의 면허세 등이다. 1979년 경제개혁 전에는 지방수입이 중앙으로 집중된 뒤 재분배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국영기업의 고정자산과 운전자금의 70%가 중앙으로부터 지급되었으나 경제개혁 후에는 지방분권적으로 되었고, 국가재정의 비율은 30%대에서 20%대 이하로 급속히 감소하였다.

중앙의 직접적인 행정적 조절이 없어지고 세금·이자·가격의 계획과 그 인허가(認許可) 등의 거시적 수단에 의한 간접적 통제로 바뀌고 있다. 1979년 170억 위안의 재정적자 이래 재정수지는 매년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농산물 매입가격의 인상과 노동자의 임금 인상, 주택 건설, 문화대혁명기 때 경제 효율을 무시한 경제건설로 인한 세입의 부진에 원인이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적자는 30억 위안 정도로 감소되었다. 이것은 재정수입이 호전되었기 때문이지만 물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지출이 그것을 상쇄하였다.

<교통·운수>

철도구간은 1949년의 2만 2000㎞에서 83년 5만 2000㎞로 연장되었으며, 티베트자치구를 제외한 전국에 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자동차도로도 8만 1000㎞에서 91만 5000㎞로 연장되었으며, 향·진의 92%에 자동차도로가 통하고 있다. 주요 항만의 출입량은 1949년의 42배인 5억 600만t에 달하고 있다. 91년 화물 수송량은 전년대비 6.9%가 증가한 2조 8007억t·㎞가 되었는데 해운 46.4%, 철도 39%, 자동차 12%이고, 항공 10억t·㎞를 차지하여 전년과 비교하여 24.4%가 증가하였다.

주요 항만의 출입량도 90년에 비하면 9.4%나 상승하였다. 그러나 운수수단의 확대가 경제발전 속도보다 뒤져 산업이 집중된 동부조차 충분한 철도망이 없다. 철도망이 비교적 조밀한 지역은 둥베이로 크고 작은 70개 철도의 총길이는 1만 5000㎞로서 전국 총 연장의 30%를 차지한다. 철도망이 빈약하기 때문에 양쯔강과 연해안에서는 수운에 의한 수송이 확대되었고, 내륙지방에서는 자동차수송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에 따른 교통사고도 늘고 있다.

석탄수송 등 트럭에 의한 장거리수송이 증가하였다. 무역용항만시설과 철도수송의 허용량이 적어 화물하역이 매우 더디다. 이 밖에도 하역·운반기계의 노후화 등은 경제개혁으로 관리가 국가에서 시로 옮겨진 뒤 개선책이 강구되고 있다. 여객수송은 농촌경제의 호전과 함께 급증하여 91년 전년대비 8%의 증가 추세를 보여 6077억 명/㎞에 달하였다. 여객수는 비율은 철도 46.5%, 자동차는 45.7%, 항공은 전년대비 30.4% 증가하는 반면 수운은 감소하였다.

자동차도로는 포장 안된 간선이 많고 비가 내리면 화물과 승객 수송이 중단되는 곳도 적지 않다. 우편·통신부문은 개방조치 이후 지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으며 1991년 우편·통신업무 총량은 전년에 비하여 32.5% 증가하였고, 팩시밀리·이동전화 등은 2배의 신장률을 보였다. 그러나 전화망의 정비가 추진되고는 있지만 개인전화의 보유율은 아직 낮은 상태이다.

[사회]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온 중국문명은 특유의 정치적 성격을 띠며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천자(天子)> 즉 황제가 군림하는 중앙정부 아래에서 지방을 통괄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사회는 2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법률과 관료가 지배하는 독자적 사회형태를 형성해 왔다. 1949년 중국의 성립으로 과거의 악폐와 인습이 급속하게 배제되고 사회생활면에서도 인민 전체의 신분적 평등과 노동생활권이 처음으로 보장되는 등 전통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중국 사회가 정치노선의 방향에 따라 심하게 영향을 받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실현되었으나 중국의 현실사회에는 여전히 관료제사회의 전통이 이어지고, 1958년 <대약진>정책의 실패, 1966년부터 10년 동안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에 의한 사회·경제적 파탄, 마오쩌둥시대의 종언에 따른 급격한 현대화 경제정책의 추진 등 중국 성립 이후 38년동안 끊임없이 흔들린 정치노선투쟁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계층은 인민이었다. 사회경제적 측면만을 보면 아직 개발도상국 수준에 놓여 있지만, 새로운 중국이 성립된 지 40여 년 밖에 되지 않았고 폭발적인 인구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건설이 쉽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주민>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주민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한족에 의해 역사와 문화가 창조되어왔다. 199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11억 3910만 명(대만·홍콩·마카오는 포함하지않음) 가운데 한족은 10억 1593만 명으로 전체의 92%를 차지한다. 그 밖의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비교적 인구가 많은 민족으로는 좡족·후이족·위구르족·이족·먀오족·만주족·티베트족·몽골족 등이 있다. 거주지역의 면적은 한족과 혼합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포함하면 50%에 이르지만,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동부에서는 한족이 다수를 차지한다.

중국인·중국어·중국요리라는 받은 그대로 한족·한어(漢語)·한족의 요리 등과 동의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것은 동부에 치우친 견해이고, 중국인이란 정확하게는 한족 및 그 밖의 소수민족을 일컫는 말이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도 북쪽과 남쪽 사이에는 체격, 음식·주거의 습관, 풍속, 사용하는 언어에 큰 차이가 있다. 즉 화베이·중위안지방의 한족은 키가 큰 사람이 많고 음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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