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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5-01-05 (수) 15:10
분 류 사전2
ㆍ조회: 1218      
[국가] 중국 2 (브리)
중국 2

(앞에서 이음)

문화

중국에는 다양한 인종의 문화가 섞여 있어 생생한 민속유산을 남기고 있다. 공산당이 집권한 1949년 이전에 한족 마을에서는 종교 의례가 많이 행해졌으며, 특히 단오절·음력설 같은 명절의 행사나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 등이 행해졌다. 그리고 관혼상제에 관련된 의례들은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몽골족들은 봄에 환생을 의미하는 '사강사르'라는 명절을 지키며, 음력 12월 23일에는 불의 신에게 대희생제를 올린다.

후이족은 라마단 1개월 동안 해뜰 무렵부터 해질 무렵까지의 단식을 철저히 지킨다. 티베트족들은 티베트력 마지막 달 29일에 악령을 쫓아내는 '구톨'(dgugtor)이라는 축제를 벌인다. 중국의 문화유산 중 중요한 것으로는 문자·음악·무용·연극 등이 있다. 음악 및 그에 관련된 의례는 봉건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위계에서 지배자의 궁전 내 활동의 구조를 제공한다. 옛날 종교무용에서 기원한 연극은 악령을 쫓아내고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을 환기시키고 수확·사냥·전쟁 등을 하러 나가는 준비로서 행해졌다. 현재 상연되는 월극(劇:광둥 극)과 경극은 역사적·현실적 주제들을 기교 어린 노래와 춤으로 구성한 원대(元代)의 가극전통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중국의 중요한 공예는 도자기·보석세공·금속세공(금은 상감과 칠보세공을 포함)·직물·칠기 등이며, 모두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도자기에 바르는 유약은 중국에서 BC 2000년말 이전에 발전했고, 도자기는 6세기 이래로 발전했다. 명대 도자기는 흰 바탕에 청색무늬를 그린 '청화백자'가 특징적인데, 꽃이나 추상적 무늬에서 회화적 무늬로 점차 변했다. 청동주물은 중동지역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BC 1000년경에는 이미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기술은 고대 서구의 기술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 색인 : 청동기).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회화와 서예는 전통적으로 엘리트들의 영역이었다. 6세기 이래 여러 미술가들의 이름이 역사기록과 거듭되는 모사품들에 의해 알려져 있다. 산수화가 활발하게 그려지던 시기는 송대(宋代:960~1279)부터 명대(明代:1368~1644)까지이다. 1949년 이후 중국 화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농촌과 공장의 모습들을 그렸다. 조소와 조각이 시작된 것은 주대(周代:BC 1111경~255) 또는 그 이전부터이다 (→ 색인 : 조각술).

여러 예술 분야 가운데 특히 조소는 한대(漢代)에 불교가 도입되고 육조시대(六朝時代:220~589)와 당대에 널리 확산되면서 크게 진작되었다. 부처와 보살의 상(像)과 벽면 부조가 수천 개씩 만들어져 간쑤 성 둔황[敦煌]과 같은 특출한 유적지의 동굴벽화들과 함께 중국 종교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중국미술).

중국문학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학문적인 유산이다. 이것은 문화접촉을 통해 한국·일본·베트남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문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서체가 전해져 후에 이들 나라의 문자로 변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필가들이 한자를 사용해 많은 글을 짓기도 했다. BC 500년경에 만들어진 시선집인 〈시경〉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고전 중의 하나로서 305개의 구전가요와 의례용 시가들을 싣고 있다. 당대는 한시의 황금기라고 하며, 이때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이 배출되었다. 후대에 중요한 산문작가로는 나관중(羅貫中)·포송령(蒲松齡)·오경재(吳敬梓) 등이 있다. 특출한 20세기 작가로는 여성 문제를 주제로 한 장편소설과 평론들을 지은 딩링[丁玲]과 현실주의 소설가 마오둔[茅盾]이 있다(→ 중국문학).

역사

1927년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저우커우뎬[周口店]의 동굴에서 베이징 원인[北京原人 Homo erectus pekinensis]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중국에 인간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시기가 3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준다. 중국문명의 요람은 황허 강임이 분명하다. 이 지역을 발굴한 결과 최초의 중국문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유물들이 허난[河南]·산둥·산시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명백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 최초의 왕조는 은(殷:또는 商, BC 18~12세기)이라고 할 수 있다. 은은 중국 청동기문화의 기반 위에 선 왕조로, 서쪽으로는 산시[山西], 남쪽으로는 양쯔 강, 북쪽으로는 허베이 남부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다. 은대에 들어와 달력이 사용되었고 문자가 도입되었으며 청동기 제조술이 발달했다.

그 기원이 불분명한 주는 BC 1111년에 은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다. 주는 그뒤 여러 차례의 군사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주는 정복에 의해 획득된 새 영토를 통치하고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요지에 동족 또는 이족 공신들을 제후로 봉했다(봉건제). 제후들에게는 일정한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게 하는 대신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의무를 지웠다.

주의 말기에는 흉작과 천재가 이어져 민심이 불안정해진데다 후계 문제로 내란이 일어난 틈에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BC 771년 수도를 함락당했다. 이로써 서주(西周)는 멸망하고 주 왕실은 동도(東都) 성주(成周)로 도읍을 옮겨 동주(東周)를 다시 일으켰지만 옛날과 같은 위세는 다시 찾을 수 없었고 이때부터 제후들이 독자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동주는 약 500년간 존속했으며,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는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전국시대 이후 우경(牛耕)의 출현으로 농업생산력이 현저히 증대되었다. 또한 상공업도 발달했으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사상과 문화가 꽃피었다. 공자(BC 551~479)는 이 시대에 태어나 그후 중국문명의 규범이 된 사회적인 개념을 제정했다.

주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진(秦)은 BC 221년 중국을 통일했다. 시황제(始皇帝)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했으며(군현제),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도량형, 문자의 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나아가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들의 책을 모아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했다. 장대한 능묘와 궁전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징발했고, BC 214년에는 광둥·광시 지방과 베트남 북부를 정복했으며 흉노를 정벌하기도 했다. 또 조(趙)와 연(燕)의 장성을 수축, 증축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대에 설정된 중국 국경이 후대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신성한 국경으로 여겨졌다. 차이나(China)라는 영어 이름도 진(Chin)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대규모 공사와 정복전쟁으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 불만이 고조되어 시황제 사후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반진(反秦)세력이 봉기하는 등 국운(國運)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등의 연합세력에 패하여 결국 멸망했다(BC 206).

항우를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한 유방(즉 高祖)은 BC 202년 한(漢)을 세웠다. 진이 엄중한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실패했던 것을 감안해, 법제를 늦추고 부분적으로 봉건제를 부활해 군현제와 병용하는 이른바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했다. 한의 제7대 황제 무제(武帝:BC 141~87)는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유교를 관학으로 정해 정치체제의 표본으로 삼았다. 이 체제는 그후 2,000년간 중국 각 왕조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대에는 종이와 지진계의 발명 등 여러 가지 과학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AD 220년 한이 붕괴하자 혼란과 분열의 시기가 뒤따랐는데, 이 시기를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 또는 육조시대라고 일컫는다. 군벌들이 들끓었고 화북지역은 다수의 비한족(非漢族) 침입자들에게 유린당했다. 이 시기에 불교가 중국 남부와 북부에 전파되었다.

수(隋:581~617)에 의해 중국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수는 중요한 행정개혁을 이루었으나 무모한 군사적 원정을 계속하여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단명하게 끝났다. 618년 수를 이어 당이 들어섰다. 당은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전문관료제도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돌궐, 투르판, 철륵(鐵勒), 서돌궐을 차례로 격파하고 토번(吐蕃)을 정복하는 한편, 서역의 요지에 전진기지들을 설치하는 등 한대 이래 보기드문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 환관의 전횡 등으로 국력이 쇠하고, 크고 작은 병란·민란 들이 일어났다.

당이 붕괴되자 또다른 분열기(907~960)가 시작되어 군벌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960년 마침내 송이 70년 만에 전국을 통일했다. 송은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채택하여 문관관료정치기구를 확립했다. 그러나 국초 이래의 문치주의는 한편으로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들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내치(內治)와 외교상에서 폐해가 누적되어 힘이 약해진 송은 1127년 여진족이 세운 금(金)의 침입을 받아 남부로 수도를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쯔 강 이남에 자리잡은 남송은 국토가 북송때보다 반으로 줄었으나 경제력면에서는 북송시대를 능가했다. 남송은 1279년 몽골족이 세운 원에 의해 멸망당했다.

원은 킵차크·차가타이·오고타이·일의 4한국(四汗國)을 포괄하는 몽골 제국의 종주국이고 또 중국 전통을 이은 정통왕조로서 세조 쿠빌라이 칸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황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으나, 중국의 문명·제도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거대한 중국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된 원은 소수의 지배민족이 인구나 생산력면에서 훨씬 우세한 피지배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엄격한 민족차별정책을 취했다. 원은 계속해서 한족을 차별하여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음으로써 한족이 세운 명에게 98년 만에 타도되었다(1368).

명도 원대의 이민족 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적 방침 아래 적극적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이러한 개혁들을 통해 명조는 중국사상 더욱 강화된 중앙집권에 의한 군주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전제적인 명대에 들어와 반외세 감정이 절정에 달했는데 사실상 중국은 세계 각지의 세력들과 담을 쌓는 쇄국정책의 길을 걸었다. 사적인 해외무역과 해외여행은 엄금되었다.

1644년 만주를 근거지로 하는 만주족(옛 이름은 여진족) 왕조인 청이 쳐들어와 중국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비한족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청은 만주와 중국의 문명을 함께 섞어가면서 그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러나 왕조의 힘이 조기에 쇠진한데다 해외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들의 끊임없는 통상압력을 받아 청조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는 중국에게 있어서 비운의 연속이었다. 아편전쟁(1839~42)·태평천국운동(1851~64)·청일전쟁(1894~95)에 이르기까지 청조는 외세의 침략을 그대로 방치하여 점점 더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1898년의 변법자강운동은 청정부에 어떠한 변화의 바람도 가져오지 못했으며, 1900년의 반외세·반그리스도교를 표방한 의화단사건은 열강의 군대가 중국 땅에 진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조는 1911년에 붕괴되고 쑨원[孫文]의 지도 아래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정치적인 배신과 지역 군벌주의에 의해 공화국은 곧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을 재통일하려고 노력했다. 1920년대에는 장제스[蔣介石]의 노력하에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가며 어느 정도 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곧 공산당 세력과 갈라섰고 이들 공산당은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스스로의 군대와 정부를 조직했다.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한편 중국공산당 세력은 남부 허난 성에서 북부 산시 성에 이르는 9,700km의 대장정(1934~35)에 성공하면서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때 마오쩌둥[毛澤東]은 공산혁명의 절대적인 지지자로 등장하게 되었고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마오쩌둥을 대신하는 협상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공산당은 국민당 군대와 연합국 군대와 동맹하여 항일전선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자 공산당은 세력을 재조직하여 일본군의 무기를 탈취하고 장제스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섰다. 그결과 1946~49년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달아났다 (→ 색인 : 국공내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1958년 마오쩌둥의 지휘 아래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가속화하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중국 지도부 내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와 그 운동을 지지하는 과격파와 반대하는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1966년 마오쩌둥은 과격파의 요청을 받아들여 혁명의 열기를 부추기고자 문화대혁명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결과 혼란과 폭력만이 뒤따라 과격파들은 조락하게 되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아내 장칭[江靑]이 이끄는 4인방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저지른 실수라고 비판되었으며, 4인방은 1981년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온건한 지도노선 아래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급진주의와는 영원히 결별하는 새로운 당헌을 제정했다. 이후 중국은 경제 현대화에 진력하여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1989년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이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비극적인 톈안먼[天安門]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덩샤오핑은 당시 총리이던 자오쯔양[趙紫陽]을 퇴진시키고 장쩌민[江澤民]을 등용했다. 장쩌민은 1989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1990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1993년 국가주석직에 차례로 오르는 등 덩샤오핑의 후원 아래 국가 최고지도자로 성장했다.

대외적으로 중국 당국은 톈안먼 사건 이후 악화된 서방국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1990년 6월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반체제인사 팡리즈[方勵之] 교수 부부의 출국을 허용하는 한편, 그 해 9월 제11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개최해 대외 이미지 재고에 힘썼다. 그리고 1992년에 톈안먼 사건을 '반혁명폭란'에서 단순한 '정치풍파'로 재평가하고 이듬해에는 이 사건을 주도했던 학생지도자를 가석방하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중국은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 및 개혁·개방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 등을 기본 원칙으로 삼은 가운데 높은 경제성장 가도를 달렸다.

1997년 2월 덩샤오핑이 사망했으며, 그 해 7월 1일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는 홍콩이 1842년 난징[南京] 조약으로 영국에 할양된 지 155년, 1898년 조차된 지 99년 만의 일이었다. 중국은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초대 행정장관에 퉁치화[董建華]를 임명했다. 1999년 12월 20일에는 마카오가 포르투갈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유럽 국가에게 빼앗긴 땅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다. 중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1년 WTO 가입과 2008년 하계 올림픽 대회 유치를 이루어냄으로써 강대국으로 급속히 발돋움하고 있다(→ 중국사).

Macropaedia

한국과의 관계

역사적 변천

중국은 고조선을 포함하여 그 나라의 동쪽에 있던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했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전국시대(BC 475~221)의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 BC 194년 한의 제후국인 연(燕)의 위만(衛滿)이 조선에서 위만조선을 세웠다. 이 나라는 그후 한 무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무제는 그곳에 4군을 설치했으며, 그중 낙랑군만이 40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중국에서 후한 이후 삼국·남북조를 거쳐 수·당에 이르는 동안,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발전했다. 고구려는 남북조의 나라들과 교류하면서 중국 세력을 견제했으며, 북방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의 세력을 다졌다.

589년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수와 제휴했다. 백제는 왜(倭)와 교류하면서 수와는 표면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삼국은 중국과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수·당의 침략을 받았다. 수 문제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멸망했다. 당 태종은 645년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으나, 고구려는 안시성(安市城)에서 이를 물리쳤다. 그후 고종은 663년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이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삼국통일 후 당이 고구려 옛 땅에 대한 야심을 보이자, 신라는 676년 당의 군사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삼국은 유학생과 유학승을 중국 등지에 파견하여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중국과 신라의 교류가 매우 성하여 중국 산둥 반도 등의 지역에 신라인 거주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생겼으며, 그밖에 신라소(新羅所)·신라원(新羅院)·신라관(新羅館) 등이 세워졌다.

중국이 5대(五代)의 혼란을 거쳐 송·원으로 발전하는 동안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흥기했다. 중국이 5대10국의 혼란을 겪을 당시에 세워진 고려는 문치주의를 표방하고 중국식 관제와 교육제도를 확립했다. 또한 문화의 유입 등을 목적으로 5대의 나라들과 교류했으며, 이러한 관계는 그 이후의 송과도 계속 이어졌다. 고려는 북방에 있는 거란·여진 등의 민족과도 지속적인 교섭을 가졌다. 13세기초에 들어서자 몽골족이 점차 강성해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족은 1231년 1차 침략을 시작으로 1258년 양국이 강화를 맺을 때까지 수차례의 공격을 감행했다.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으며, 변발 등의 풍속이 성행했다. 원은 고려에 무리한 공물과 공녀를 요구했다. 문화적으로는 원으로부터 주자학·화약제조법·인쇄술·목화씨 등이 전래되었다.

중국의 명·청대는 조선시대에 해당된다. 조선 초기에 원만하지 못했던 명과의 관계는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사대주의 경향으로 나타났다. 조선에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이 지원병을 보내면서 숭명사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1616년 여진족인 누르하치[奴兒哈赤]는 후금을 세웠다. 뒤를 이은 태종은 1627년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어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청을 통해 서양의 학술과 문명을 접할 수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가 청을 통해 조선에 전래되었으며, 청의 경세치용(經世致用) 학문은 조선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19세기말 일본은 운요 호[雲揚號]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한편 극동에서의 러시아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청은 조선에게 조미수호조약을 맺게 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켰다. 청은 그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뒤 청일전쟁(1894~95)에서 청이 패배하여 조선은 청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나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 되었다. 결국 청에 이어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 행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본토 및 만주 등지에서 무장독립군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조선독립운동은 쑨원 중심의 광둥 정부 관계 인물들의 지지를 받았다.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중국 혁명지도자들과 조선의 독립운동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쑨원이 죽은 뒤 광둥 정부는 국민정부로 바뀌었다. 국민정부는 그후 좌·우파로 분열되었는데, 조선의 독립운동도 그 영향을 받았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45) 등에서 중국의 반일감정이 조선의 독립운동과 맞물려 중국은 조선의 독립지원을 공개적으로 벌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김구(金九)·김약산(金若山)의 두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김구는 난징[南京]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으며, 김약산 중심의 좌파 단체들은 중일전쟁 때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우익 3당이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요구하여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으로 개편, 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켰다.

한편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연안파[延安派]는 따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을 배경으로 항일전에서 활동하여 그 세력을 넓혔다. 종전 후 한국 광복군은 해산되어 귀국했으며, 조선의용군도 각기 개인적으로 귀국하여 건국 이후 국군으로 개편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중국과 한국

중국은 1949년 10월 정권을 수립한 이후 모든 친미국가를 적대국가로 간주하는 외교정책을 고수해왔다. 그러므로 한국과의 외교는 단절되었으며, 북한 위주로 한반도 정책을 결정했다. 1973년 한국은 대공산권 문호개방을 원칙으로 하는 6·23선언을 발표하여 중국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74년 1월 한일대륙붕협정을 체결하는 등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8년 말 중국 제11기 3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 개혁실용주의 노선과 대외개방정책이 적극 추진되자 중국의 대외정책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어 1979년 1월 덩샤오핑은 한국과의 우호관계조성 가능성을 시사했다. 또한 그해 7월 구체적으로 한국과 체육 교류의 용의가 있음을 나타냈다. 1980년 4월 대한민국 올림픽 위원회(KOC)에 대해 언급했다. 1982년 8월에는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식량위원회(WFP) 세미나에 한국이 참가했다.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최초의 접촉은 1983년 5월 중국의 민항기가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하면서 이루어졌다. 중국은 중국 당국 관계자를 파견하여 사태수습을 위한 교섭을 벌였다. 이는 국제민항기구 또는 제3국을 통한 간접적인 해결방법을 무시한 것으로, 중국측은 이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중국과 한국의 교류는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1990년까지의 접촉은 주로 체육·관광·친척방문 등의 교류가 주류를 이루었다. 1984년 2월 중국 데이비스컵 테니스 대회를 위해 한국 선수가 최초로 중국을 방문했다. 1984년 3월 자오쯔양 총리는 친척상호교류를 허용했다. 그후 두 나라 이산가족들의 초청방문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84년 4월 중국 농구선수단이 한국을 방문했으며, 같은 해 10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한국 선수단이 참가했다.

그후 두 나라는 체육교류를 통해 상호 접촉을 확대시켰다. 중국은 1986년 9월 20일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했으며, 1988년 9월 17일에는 서울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다. 한국은 1990년 9월 22일 베이징 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했다. 경제교류도 활발히 전개되어 1985년 한국은행은 대중국 투자를 허가했으며, 1988년 10월 중국 광저우 교역회는 한국기업을 초청했다. 1989년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으며, 그해 7월에는 베이징 국제박람회에 참가했다. 1988년 10월 한국은 중국 관광금지를 해제했으며, 1989년 6월 한중 해운 정기 직항로가 개통되었다. 같은 해 8월 중국은 한국의 상하이 취항을 허가했으며, 1990년 중국행 우편 직송이 개시되었다. 한국은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90년 중국은 한국 기업의 베이징 사무소 설치를 허가했고, 1990년 10월 20일 한중 무역대표부 상호설치합의서에 조인했다. 1991년에 들어서 두 나라의 관계는 한층 발전했다. 그해 1월부터 중국은 한국 기자에게 비자를 발급해주었으며, 1월 30일 KOTRA는 베이징에 대표부를 개설했다. 그해 4월 2일 중국 류화추[劉華秋]외교부 부부장이 이상옥 외무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같은해 10월 최초로 한중 외무장관회담을 가졌으며, 11월 제2차 외무장관회담이 있었다.

1992년 2월 민간차원의 한중 무역협정이 발효되었으며, 4월 제3차 외무장관회담이 있었다. 그동안 간접교역과 여러 방면에 걸친 교류의 확대는 양국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공식적·정치적인 관계 수립에 있어서는 제약이 많았으며, 중국과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북한이 한국과 중국간의 관계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데 주요방해요인으로 작용했다.

1992년 8월 24일 양국은 베이징에서 한중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 성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양국 국민의 이익과 염원에 부응하여 1992년 8월 24일자로 상호 승인하고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한다. ② UN 헌장의 원칙들과 주권 및 영토보전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불간섭, 평등·호혜·평화공존의 원칙에 입각하여 항구적인 선린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에 합의한다. ③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며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④ 양국간의 수교가 한반도 정세의 완화와 안정 그리고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 ⑥ 1961년의 외교관계에 관한 비협약에 따라 각자의 수도에 상대방의 대사관 개설과 공무수행이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고 빠른 시일 내에 대사를 상호 교환하기로 합의한다.

한국과 중국 양국이 공동 서명해 발효시킨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외교관계수립에 관한 대동성명'은 반세기에 걸친 양국간 반목의 역사를 끝맺는 역사적인 문서로 평가받았다. 실제적으로 한중 수교는 양국간 경제협력이 정상적인 방향으로 확대·발전되는 중대한 전환점으로 작용해 교역·투자·산업협력 등 전 분야에 걸쳐 큰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중국은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의 주요 교역대상국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수교 3일 후인 8월 27일 주중 한국대사관과 주한 중국대사관이 각각 개설되었고, 그해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방문해 양상쿤[楊尙昆]국가주석과 제1차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해 10월 30일 정부간 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2월 4일에 투자보장협정이 이루어졌다. 1993년 6월 26일 해상운송협정이 체결되었고 그해 11월 19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참석을 계기로 김영삼 대통령과 장쩌민 국가주석 간의 제2차 한중 정상회담이 시애틀에서 이루어졌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공식 방중으로 제3차 한중 정상회담과 한중 외무장관회담이 열렸으며, 그해 6월 6일에 한중 산업협력위원회 설치협정이 체결되었다. 11월 14일에는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양국 정상간의 회담이 자카르타에서 열려 북한 핵문제 등 현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1995년 11월 13일 장쩌민 국가주석의 방한으로 한반도 내 긴장완화 및 경제협력 방안 등에 관한 양국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1996년 11월 16일 세계식량정상회의 참석차 로마를 방문한 이수성 총리와 리펑 총리 간 한중 총리회담이 있었다. 그해 11월 24일과 이듬해 11월 24일에는 APEC 참석을 계기로 한 한중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와 밴쿠버에서 각각 열렸다.

경제·기술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진 한국의 대(對)중국 무상원조는 1994년과 1995년에 각각 220만 달러와 394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1997년 12월 현재 대중국 투자 규모는 누계건수 4,629건, 누계금액 55억 5,000달러에 이르고 있다. 한중 산업협력위원회·무역실무위원회·경제공동위원회·환경공동위원회 등이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왔으며, 1997년 12월말 기준 중국 내 한국 상사수는 총 1,349개이다. 1996년 기준 대한수입액은 113억 7,706만 8,000달러이고 대한 수출액은 85억 3,856만 8,000달러를 기록했다. 1997년 현재 교민현황을 보면, 교민수 196만 1,075명에 체류자수 2만 4,428명이다.

중국과 북한

1949년 북한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50년 10월 중국은 6·25전쟁에 참전했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1953년 비밀군사협정을 통해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그후 1950, 1960년대에 상호관계는 때로 멀어지기도 했으나, 기본적인 관계의 틀은 변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중국에서는 마오쩌둥과 화궈펑[華國鋒]에 의해 반소(反蘇) 노선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의 전략적인 지위가 점차 중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북한의 대남전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북한에 대한 정치·군사·경제 분야의 지원을 활발히 전개하여 1971년 8월 무상군사원조협약 등을 체결했다.

중국은 북한의 통일노선을 지지했으며, 주한미군의 철수 및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어 1975년 4월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했으며, 1978년 화궈펑과 덩샤오핑이 각각 북한을 방문했다. 그러나 1978년 말 중국 제11기 3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 개혁실용주의 노선과 개방정책에 따라 중국의 대외정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한국에 대한 기존의 인식변화로 과거에 쌓아온 북한과의 관계가 변화되었다. 중국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남북한 관계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북한의 입장과 상반된 것이었다.

1992년 8월 한국과의 수교로 중국은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한중 수교로 북한과의 마찰이 불가피해지 상황에서, 중국은 한반도 내에서의 계속적인 영향력 유지를 위해 북한과의 관계를 조율해 나갔다. 한중 수교 이후에도 북한·중국 간 교역은 꾸준하게 유지되었으며,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탈퇴를 선언한 북한에 대해 국제적인 제재 움직임이 거세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중국은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하는 등 북한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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