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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2-13 (월)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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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일본 2 (두산)
일본 2

(앞에서 이음)

VI. 경제

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 패배한 일본의 경제는 해외 식민지·시장의 상실과 생산설비의 파괴로 인해서 붕괴되었다. 그러나 대전 후에 실시된 농지개혁이 종래의 소작농 중심의 농업을 자작농 중심의 농업으로 바꾸어 농촌시장의 확대를 가져왔고, 또 파업권 획득으로 정치적·경제적 지위가 높아진 노동자들이 도시소비시장의 확대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두 잠재적 소비시장의 확대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 한국의 6·25전쟁이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군사보급기지로서의 일본에 특수경기(特需景氣)를 낳게 하여, 중화학공업·경공업에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반공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국제시장에 복귀하는 속도도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부흥하기 시작한 일본경제는 1974년까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그와 같은 고도성장의 원인은 전반기에는 주로 농업인구의 급속한 도시유입에 의해 구미 제국보다 값싼 노동력을 써서 가격경쟁에 임할 수 있었다는 점과 달러화(貨)와 엔화[円貨]의 환율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후반기의 고도성장의 원인은 산업합리화, 기술혁신, 대형투자 등에 의해 일본제품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서 수출을 신장시켰다는 점에 있었다. 모든 산업에 오토메이션을 중심으로 한 기술혁신이 실시되고 1956~1970년까지의 기간에 주요산업의 시설투자는 7배로 늘었으며, 특히 1965년 이후부터는 국제수준을 상회하는 대형투자가 전개되었다.

수출신장은 특히 1956년 이후의 일본경제의 고도성장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1969년에 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은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로 비약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40년 만에 닥친 세계경제의 경기후퇴의 파동은 일본경제에도 장기적이고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 동안 미국이나 유럽 국가의 심한 인플레이션에 의해 일본제품이 국제적 우위에 설 수 있었으나 오늘날 그들 구미 제국의 관세정책으로 해서 일본은 제품의 생산기지를 일본 국내에서 세계 각국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적인 경기후퇴의 파동 속에서 일본 제품의 국제적 점유율을 더욱 높이겠지만, 일본의 국내시장 확대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경제는 구조적·장기적인 경기침체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1991년부터 후퇴하기 시작한 일본경제는 순환적 경기후퇴에 거품경제의 붕괴에 따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불황이 계속되고 있어 공공부문 투자 확대와 같은 경기 부양책을 실시하고 있다.

2. 산업

일본은 선진공업국으로서 제조업의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최첨단의 기술을 보유하고 생산량에서도 세계1위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⑴ 농업:일본의 농업은 오늘날에도 영세경작·가족경영·미작(米作)중심이라는 등의 점등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나, 생산성이나 경영내용면에서는 크게 변질·발전하였다. 변질·발전의 주된 요인으로는 농지개혁 후의 산업구조의 변화가 농산물시장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과 농업의 기계화에 따라 생산력이 증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동안 농민의 이농이 지속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호당 경지면적 규모가 1ha를 약간 웃도는 선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공업화의 추세에 따라 농경지의 감소가 동시에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세농가의 계속적인 이농과 더불어 근래 대규모 농가의 수가 증가되어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의 일본 농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대다수의 농가가 농업만으로는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전체 농가수의 약 87%가 농외소득(農外所得)을 얻고 있는 겸업(兼業)농가라는 점이다. 특히 그 중 약 60%는 농업소득보다 많은 농외소득을 얻고 있다. 농업생산을 부문별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 전의 농업은 한 마디로 ‘쌀과 누에고치’의 농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현재는 ‘쌀과 원예·축산’의 농업으로 바뀌어 국내시장 상대의 상품생산이 보편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전(戰前)·전후(戰後)를 통하여 미작이 일본농업의 주종이 되고 있는 데는 변함이 없으나, 그 경지면적이 크게 감소되어 재배지가 동북일본을 중심으로 한 양질 쌀산지로 집중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전작부문에서 그 신장이 현저한 것은 과수와 채소이다. 과수 작부면적은 전전의 약 3배에 이르렀는데, 귤은 중부지방 이남의 산사면 지역, 특히 키타큐슈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고, 사과는 아오모리현[靑森縣], 나가노현[長野縣]이 주산지다. 채소는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종래의 근교농지가 한층 바깥쪽으로 확산되어 가는 한편 미나미시코쿠[南四國], 미나미큐슈[南九州], 홋카이도[北海道] 등지에 원교(遠郊) 농업의 발달이 현저하다. 축산은 전전부터 산지형성이 되어 있었던 홋카이도의 젖소사육을 제외하고는, 전후에는 소비시장과의 관계 때문에 대도시 근교에서 집중적으로 사육되고 있다. 낙농업은 홋카이도가 대표적이고 그 외 게이힌[京濱]·한신[阪神] 공업지대의 주변 지역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⑵ 임업:일본은 국토의 약 70%가 삼림으로 덮인 세계 유수의 삼림국이다. 인공림은 전체의 약 33%이고, 수종은 삼나무·노송나무·소나무 등 침엽수와 졸참나무, 너도밤나무, 상수리나무 등 활엽수가 대략 반반을 차지한다. 국내 소재(素材) 생산량은 연간 3800만∼4500만㎡에 달하나 국내수요가 많아 미국, 말레이시아, 러시아 등지로부터의 수입재가 국산재를 웃돌고 있다.

⑶ 수산업:일본은 북태평양 서안어장의 중심어업국으로 세계 제1의 어획량을 올리고 있다. 연안어업은 공해의 격화로 한계점에 도달해 있고, 또 어업가구도 감소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전세계의 해양에 진출한 원양어업에 의해 어획량은 계속 늘고 있다. 한편 일본인은 전통적으로 생선을 많이 먹는 민족으로, 국민 1인당 물고기소비량은 세계 제1위이다.

⑷ 광업·에너지자원:일본에서 산출되는 지하자원은 종류가 많고, 분포도 전국에 걸쳐 있으나 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매장량이 극히 미미하다. 국내에서 자급할 수 있는 것은 석회석과 황화광(黃化鑛) 정도이고, 그 밖에 비교적 산출량이 많은 구리광[銅鑛]의 자급률이 1.3%이며, 철광석은 2%, 석유는 0.3%에 불과하다. 석탄은 일본의 최대자원으로 규슈의 지쿠고[筑後]탄전, 홋카이도의 이시카리[石狩]탄전이 유명하다. 석유는 니가타[新潟]유전, 아키타[秋田]유전이 있으나 생산량이 적어 대부분을 수입한다.

종래 수력을 주로 하던 발전은 경제적으로 유리한 낙차지점의 개발이 거의 완료되자 화력발전으로 전환되었는데, 1962년부터 화력발전량이 수력발전량을 능가하였고, 1980년에는 화력발전량 67.1%, 원자력발전량 17.4%, 수력발전량 15.5%, 1999년에는 화력발전량 58.91%, 원자력발전량 30.31%, 수력발전량 8.35%의 비율이 되었다. 수력발전소는 대부분 혼슈 중앙부의 산지에 댐식 발전소로 건설되어 온 데 대하여, 화력발전소는 임해(臨海) 공업지대에 건설되어 있다. 원자력발전소는 각지에 분산 건설되어 있다.

⑸ 공업:공업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1950년 이후 설비투자의 증대, 기술혁신의 진전에 따라 중화학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신흥품목의 공업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 결과 종래부터 모든 부문의 공업이 현저한 집중률을 보여 온 도쿄[東京], 가와사키[川崎], 요코하마[橫濱] 등지를 중심으로 한 게이힌[京濱] 공업지대를 비롯하여, 나고야[名古屋], 욧카이치[四日市], 도카이[東海] 등지를 중심으로 한 주쿄[中京] 공업지대, 오사카[大阪], 아마가사키[尼崎], 고베[神戶] 등지를 중심으로 한 한신[阪神] 공업지대 등 대공업지대에 공업집중이 진척되는 동시에 그 주변지역에 신흥공업도시들이 확산되어 나갔다.

그 외 대공업은 나가사키[長崎]와 사세보[佐世保]의 조선공업, 노베오카[延岡]와 미나마타의 화학공업, 미이케[三池]탄전과 결부된 오무타[大牟田]의 화학공업, 오이타[大分]의 철강업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위의 공업지대를 연결하는 태평양 쪽의 임해부(臨海部)에는 고도성장기에 석유화학·철강 등을 기간으로 하는 콤비나트가 잇따라 건설되어, 일본 공업생산의 약 80%를 차지하는 이른바 ‘태평양 벨트 지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의 구성을 보면 1955년에는 아직 경공업이 우세하여 전체 공업생산의 55.4%를 차지했는데, 그 후 중화학공업의 신장이 현저하여 중화학공업이 1967년에는 62%, 1974년에는 67%로 계속 그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특히 성장이 두드러진 것은 기계공업으로, 1967~1972년에 걸쳐 14.7%에서 32.3%로 배 이상의 신장률을 보였고, 반대로 섬유공업과 식품공업의 비율저하가 심하였다. 전체 공업제품 출하액은 1970년 이후에도 지속적인 증가를 보여 1974년에는 약 127조 엔을 기록했으나, 1974년의 제품출하액의 상승률은 공업생산자 물가지수를 밑돌아 실질적으로는 마이너스 성장이 되었다.

그것은 1973년의 석유파동 이후의 인플레이션과 불황이 경제의 고도성장에 종지부를 찍고 산업계가 저성장시대에 접어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1980년대의 평균경제성장률은 4%였다. 1992년~1995년 사이 경제는 1980년대의 과잉투자와 버블경제로 인하여 성장률이 떨어졌다. 그러나 1996년대의 낮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3.9%의 경제성장률을 나타냈다. 1997~1998년에는 금융산업과 부동산 시장의 혼란으로 전후 최대의 경기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 1998년에 국내총생산 성장률 0.8%을 나타낸 이후 1999년과 2000년은 1%대로 올라갔으나 2001년에는 다시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다.

기업의 규모별로 일본의 공업을 보면, 한편으로는 세계의 대기업으로서 선진국가의 일류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국외에 많은 자회사(子會社)를 가진 다국적기업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거나 한 대기업이 각 부문에 약간씩 있으나, 대부분의 기업의 공장은 규모가 영세하여 하청(下請)·재하청의 형태로 대기업에 종속되어 있다.

일본의 공업은 서구의 선진국에 비해 중소기업의 비중이 매우 높으면서도 대기업과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므로 고용기회의 확대 및 해외 경쟁력 강화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일본의 공업은 대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과밀하게 집중된 탓으로 해서 대기·수질 오염을 비롯한 각종 공해를 일으키고, 또 교통난, 주택난 등 도시문제도 심각하다. 따라서 지역주민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저항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3. 교통

일본은 철도의 발달이 현저하여 철도망의 밀도는 세계 제4위이고 1996년 현재 철도연장 2만 7318㎞, 여객수송은 제1위이다. 해안을 따라 주요간선이 달리고, 지방선이 간선에서 내륙으로 분기하여 대체로 사다리 모양의 철도망을 형성한다. 한편, 일본 철도는 협궤(狹軌)인데, 1964년 교통량이 많은 도쿄~오사카 간에 표준궤도의 고속철도인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이 개통되었고, 현재 산요[山陽]·도호쿠[東北]·조에쓰[上越] 신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전국을 고속 신칸선으로 연결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대도시 주변에도 철도가 집중적으로 부설되어 여객수송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간선과 지방선의 교통수요의 차가 격심하여 교통의 지역적 격차가 커진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국내 교통은 최근에 사유화된 철도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신간센이라 불리는 고속열차가 도쿄와 오사카 사이의 520㎞를 3시간 정도에 달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동차교통이 급격히 발전하여, 철도와 경쟁하는 관계에 있다. 도메이[東名:東京∼名古屋] 및 메이신[名神:名古屋∼神戶] 두 고속도로를 비롯한 자동차도로가 뒤를 이어 건설되었으나, 반면 도로정비가 자동차의 급증을 뒤따르지 못하여 도시지역의 교통마비가 심화되어가고 있다. 도로연장은 1997년 현재 12만 12013㎞로 포장률은 74.8%이다.

일본의 상선대(商船隊)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거의 괴멸되었으나, 전후 정부의 원조에 의해 계획 조선이 추진되어 세계 제2의 상선국이 되었다. 산업 에너지의 전환에 따라 탱커를 비롯한 전용선(專用船)이 증가하고, 또 항만의 근대화가 진척되어 컨테이너선이 증가하고 있으며, 연안항로에는 자동차교통의 발전을 반영하여 카페리의 취항이 급증하고 있다.

100톤 이상의 상선이 1997년 현재 6,756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완성된 혼슈와 규슈 사이의 간몬[關門]해저 터널을 시작으로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세이칸해저터널(53.8km)과 혼슈와 시코쿠를 연결한 15km의 세토대교[瀨戶大橋]가 1988년 개통되어 4개의 큰 섬을 하나로 연결하는 교통망이 완성되었다.

일본항공(日本航空:JAL)을 주축으로 하는 항공교통은 매년 10% 이상씩 증가하는 국내외 승객들과 함께 발전하고 있다. 1980~1995년 사이에 국제 항공 승객수는 490만 명에서 1450만 명으로 늘었고 일본의 항공 여객수도 4350만 명에 달했다. 1954년 도쿄∼샌프란시스코선을 개설한 이래, 1966년·1967년에는 뉴욕 노선·세계일주 노선을 개설하고, 1967년에는 시베리아 경유 모스크바 노선을 열었으며, 다시 1974년에는 대(對)중국 노선을 열었다.

국내 항공교통의 발달도 현저하여 도쿄∼오사카 간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정기항공로가 열려, 국내 간선에 취항하고 있는 일본항공의 국내·국제노선이 차지하는 비율은 6:4로 국내노선의 비중이 크다.

도쿄의 국제공항으로는 종래 도쿄도[東京都]의 오타구[大田區]에 있는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이 사용되어 왔으나, 국제·국내선 항공기의 폭주로 1978년에 지바현[千葉縣] 나리타시[成田市]에 신도쿄국제공항을 만들었는데 1997년 현재 38개국의 50개 항공사가 매일 2540만 명의 승객과 160만 톤의 수화물을 취급하고 있다. 승객수는 세계에서 6번째이고 수화물의 양은 세계 최고이다. 하네다 공항은 국내선 전용공항으로 바꾸었다. 1994년 오사카 근처 해상에 간사이[關西]신국제공항이 완공되었다.

4. 관광

일본은 화산, 해안 등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온천이 많아서 자연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교토, 나라, 가마쿠라[鎌倉] 및 도쿄 등 옛 정치중심지에는 역사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하며, 그 밖에 전국 각지에 성관(城館)·사적을 비롯하여 사사(社寺:神社·寺刹) 등이 많이 있다. 또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대도시에서는 고층건물·번화가, 공원, 박물관, 미술관 등 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의 도시적인 관광자원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일본인은 근래 대중 관광여행의 시대를 맞게 되어, 관광지·관광시설의 개발이 전국적으로 활발하다. 한편 외국인 관광객의 수도 급속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는 도쿄를 찾는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고, 또한 교토, 오사카, 나라·나고야, 하코네[箱根], 닛코[日光], 가마쿠라, 이세[伊勢], 고베, 히로시마[廣島], 나가사키[長崎] 등지도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국제적인 관광도시이다.

5. 무역

일본의 무역은 주종산업인 공업에 필요한 원자재나 에너지 자원을 수입하고 공업제품을 수출하는 가공무역의 성격이 짙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의 전과 후에는 수출입품목·무역상대국의 양면에 걸쳐 큰 변화가 있다. 즉, 전전(戰前)에는 면직물·생사(生絲)를 중심으로 한 섬유제품이 수출총액의 과반을 차지하고, 목화를 중심으로 한 섬유원료가 수입총액의 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또 당시의 주요 무역상대국은 아시아 제국, 특히 중국이었고, 생사수출과 목화수입이 많은 미국이 그 뒤를 이었다.

전후에는 중화학공업의 현저한 발달로 해서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어, 1998년 수출은 4400억 달러이고 수입은 3190억 달러, 2001년 수출은 4500억 달러, 수입은 3550억 달러이다. 무역상대국으로는 전후의 정치·경제정세를 반영하여 특히 미국과 거래가 많은데, 근래 약간 감소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수출은 30%, 수입은 19% 정도의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2000).

1998년 현재 수출에서는 아시아 37.9%, 유럽 20.4%, 북미 35.6%, 남미 1.9%, 아프리카 1.8% 남태평양국가 2.6% 순이다. 수입에서는 아시아 46.2%, 유럽 16.7%, 북미 27.4%, 남미 2.6%, 아프리카 1.4%, 남태평양국가 5.6%순이다.

품목별로 보면 수출에서는 자동차, 반도체 및 전자장비, 기계류, 광학장비, 철강 순으로 주종을 이루고, 섬유제품은 그 비중이 저하되었다. 수입에서는 원유, 섬유류 기계류, 수산물, 반도체와 전자부품, LNG 순이다. 종래의 섬유공업 중심의 원료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원료로 내용이 변질되고 있다.

무역수지는 오랫동안 순조로이 흑자가 지속되어왔으나,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나 원유가격의 급등 등으로 해서 1980년에는 약 113억 달러의 입초(入超)를 기록하였으나 1992년에는 수출 3396억 달러, 수입 2330억 달러로 1070억 달러의 사상최고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 1999년  이후  미국 및 아시아 경제 침체에 따른 수출부진과 엔 약세에 따른 수입의 수요 증가로 인해 무역수지 흑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VII. 사회

1. 사회보장

일본의 사회보장제도는 유럽 선진제국에 비하면 그 실시가 몹시 늦었고, 또 현행의 제도는 불비한 점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도 부분적으로 관계법이 제정 ·실시되어 오긴 했으나, ‘국민개보험 ·국민개연금’을 목표로 전국민에 대한 사회보장이 추진된 것은 전후의 1961년부터이다. 즉,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과 연금보험의 두 가지 보험에 가입할 것을 규정하였다.

의료보험은 피보험자와 그 가족의 질병 ·출산 ·사망에 대한 의료 서비스 ·요양수당금 ·매장비(埋葬費) 등을 지급하는 것으로, 임금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과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건강보험의 두 가지로 나뉜다. 연금보험은 노령 ·폐질(廢疾) ·사망에 대해 연금 또는 일시금을 지급하여 본인과 가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보험으로, 임금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후생(厚生)연금 ·공제조합 연금 ·은급(恩給)연금 및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연금제 등이 있다.

그 밖에 공무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용노동자를 대상으로 하여, 실직했을 때 지급하는 고용보험이 있다. 국가예산에서 사회보장 관계비가 차지하는 비율도 해마다 증가하여 1980년에는 21.4%에 달하였고, 1994년 국가 수입의 16.25%에 달했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보장제도 운영상태를 보면, 의료보험과 연금보험이 다같이 가입자의 소득수준과 직역에 따라 보험료의 갹출과 지급액수가 다른 것이, 여럿 병립되어 있어서 제도가 정착되지 못한 데서 오는 모순들을 내포한다. 이는 사회의 급속한 노령화와 출생률 하락으로 인한 인구 감소 추세로 사회복지제도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여러 요인들로 인해 국가연금 재정상태가 위험에 이르자 1995년 일본 정부는 7월에 ‘사회복지제도를 위한 새로운 기구’라는 이름의 자문안을 제출하였다. 특별한 권고사항으로는 공익 간호보험제도의 설립과 사회보장 대상을 가구 단위에서 개인으로 변화시키는 것 등이 있다. 이 안건은 21세기 일본 국민생활을 더욱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재건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2. 노동

일본의 실업률은 1974년에서 1980년까지 1.4∼2.4%의 범위를 유지하여 완전고용을 달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완전고용 상태에 있는 일본의 노동력인구는 25년여 정도 기간에 그 분포가 제1차산업에서 제2차·제3차산업으로 크게 바뀌었고, 또 여성 노동력인구의 증가가 현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헌법과 노동조합법에 의해 노동자의 노동 3권(三權)이 보장되었다.

1950년에는 일본노동조합 총평의회(總評議會)가 결성되어 반공민주노조로서 노동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나, 1951년에 좌파가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노동운동은 내부분열과 재편을 되풀이하였다. 그 뒤 1964년에 기존의 3개 우파 조합이 합동하여 전일본노동총동맹(약칭 同盟)이 결성되자 동맹(同盟)과 총평(總評)이 가장 우세한 두 세력을 형성하여 대립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그와 같은 노동조합의 분열·대립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에는 전통적으로 특성 있는 노사관계가 성립되어 왔다.

한번 채용한 종업원을 정년이 되기까지 해고하지 않는 ‘종신고용제’와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서열을 정하는 ‘연공임금제’의 특수한 노사관계가 경제성장을 촉진한 요인이 되었다는 견해가 오늘날 널리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거품경제로 경기가 침체기에 빠지자 기업체들은 종신고용제를 수정하고 많은 회사들이 정년 이전의 근로자들을 해고하고 새로운 사원을 채용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노동력 부족을 배경으로 임금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현재 유럽 선진국의 임금수준에 도달하였으며, 또 주당(週當) 노동시간도 프랑스, 독일, 영국 등과 맞먹거나 오히려 보다 단축되었다. 한편 기업은 노동력 부족에 대처하기 위하여 경영의 합리화나 생력화(省力化)에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런한 변화와 함께 젊은 근로자들의 사고 방식도 변화하고 있어 점차적으로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들고 있으며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찾아 직업을 옮기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1996년 일본의 15세 이상 취업인구는 6480만 명이고, 실업인구는 220만 명으로 그해 전체노동력의 3.4%를 차지하였다.

3. 교육

일본의 학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학제를 본받았기 때문에 한국의 학제와 일치한다. 소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을 기본으로 하고, 의무교육은 중학교까지 9년간으로 되어 있다. 또 수사(修士:碩士) 과정 2년, 박사과정 4년의 대학원제 및 한국의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2년 과정의 단기(短期)대학제도 한국과 흡사하다. 한국에 없는 학제로는 중학교 졸업자가 입학하는 5년제의 고등전문학교가 있는데, 중급기술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이다. 대학에서 고등학교·중학교·소학교에 이르기까지 학교간 격차가 심하여 입시 체제가 강화되어 있는 점도 한국의 경우와 흡사하다.

4. 매스커뮤니케이션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매스커뮤니케이션은 국가권력의 규제에서 벗어나서 전면적으로 활발해진 반면 인권침해나 국민윤리의 저하를 초래하는 사례가 지적되고 있다. 한편, 일본의 매스미디어, 특히 신문들은 그 동안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주 그릇된 편향성을 드러낸 보도를 함으로써, 일본의 국민여론을 오도하고, 양국의 국민감정을 손상시킨 사례가 적지 않았다.

⑴ 신문:일찍이 1880년을 전후하여 ≪아사히신문[朝日新聞]≫·≪마이니치 신문[每日新聞]≫ 등 오사카계[大阪系]의 양대 신문을 중심으로 대중신문의 시대를 맞아 오늘날에 이른다. 일본의 신문계는 중앙의 대신문·광역 블록지(紙)·현(縣)단위 지방지로 성립되어 있으나 대부분, 특히 대신문은 국내문제에 관해서는 공평·중립을 편집방침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 점에서는 전통적으로 당파성이 짙은 구미의 신문과는 다르다. 근래 스포츠·예능 전문지나 정당지·종교지의 진출도 현저하다. 1998년 현재 주요 조간신문의 부수는 요미우리(1400만 부), 아사히(1200만 부), 마이니치(650만 부)이다.

⑵ 방송:전쟁 전에는 공공방송인 일본방송협회(NHK)만이 존재하였으나 1950년부터 민간방송이 실현되었다. 또 1953년부터 방송이 시작된 텔레비전은 곧 전국에 보급되어 사회·문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최근에는 위성중계·다중(多重)방송·방송대학 설립 등 한층 다채로운 기능을 발휘해 가고 있다. 한편 라디오도 일시적인 쇠퇴를 회복하고, FM방송 등 신분야를 개척해서 독자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TV방송은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이 있다. 민영방송국은 신문사와 연계되어 있고 100여개의 VHF채널과 지역별로 UHF채널이 있다. 민영채널의 운영은 광고 수입에 의존하고 TV방송은 NHK를 제외하고 전일 방송한다. 통신사로는 사단법인 교도통신[共同通信]과 주식회사인 지지통신[時事通信]이 있다.

VIII. 문화

일본에는 3대 주요 전통극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이 '노'로서 14세기에 탄생했다. 무대 장치는 간단한데, 배우는 가면을 쓰고 전통 의상을 입는다. 배우들은 대사를 읊조리며 매우 천천히 움직인다. 두번째로 가부키는 17세기에 생겨났다. 가부키는 극적인 장면과 동작이 많고 의상은 정교하며 화려하다. 가부키는 관중 가까이에서 연기를 하기 위한 통로(하나미치)를 포함해 무대 장치가 복잡하다. 마지막으로 분라쿠는 인형극의 일종이다. 이는 16세기에 최초로 공연되었다. 인형은 사람의 절반 크기로 거의 실제 사람과 같다. 각 인형은 3사람이 조종하며 이들을 무대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전통 민속 음악 또한 활발하다.

민요, 민속악기연주 및 민속춤 모두가 오늘날 인기를 얻고 있다. 축제에서 민속악기 연주(특히 큰북) 및 민속춤은 관중의 눈길을 끈다. 목판화는 수많은 일본 회화 형태 중 하나이다. 잘 알려진 목판화 형태의 우키요에는 17세기에 탄생했다. 우키요에는 사람 및 자연 풍경, 일상 생활 및 극장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목판화는 지금까지도 매우 인기가 있어 학생들은 간단한 목판화 만들기를 배우며, 더러는 이 방법으로 자기만의 연하장을 만들기도 하다. 일본의 공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도자기, 제지, 직물, 칠기, 그리고 목각이다. 질기고 아름다운 일본 종이(와시)는 손으로 만든다. 이 일본 종이는 예술적이거나 실용적인 용도에 쓰인다. 오늘날 직물에 행해지는 특수 염색 및 직조 기술은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 무늬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칠기는 아름다울뿐더러 잘만 간수하면 몇 해고 보존된다. 가장 인기 있는 색상은 붉은색과 검은색이다. 일본의 도자기 공예는 12,0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도기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일본의 전통 도자기는 수백 년 동안 계승되어왔다. 근대에는 도자기도 그림, 조각과 함께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목각술 또한 전통 일본 예술의 하나다. 정교한 목각술로 사찰 및 신사를 장식하며, 많은 가정에서는 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접시, 나무인형(고케시)등의 작은 장신구를 가지고 있다.

일본 학생들은 학교에서 만요슈와 같은 고대 시집, 겐지이야기와 같은 고대 영웅 소설 및 세이쇼나곤의 옛날이야기와 같은 일기 형식의 에세이 등 일본의 전 문학을 배우고 있다. 현대 문학은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94년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받음으로써 인정받고 있다. 이 밖에도 국제적 명성을 지닌 20세기 작가로는 나쓰메 소세키, 미시마 유키오, 아니자키 존이치로 및 아베 고보 등을 들수 있다.

현대 작품의 인기 있는 또 다른 형태가 만화다. 만화는 일반적으로 각 책마다 새로운 내용을 담은 시리즈물이나, 사회 정보, 역사 또는 기타 논픽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때로 만화영화로 제작되어 극장 및 텔레비전에서 인기리에 상영되기도 한다. 일본의 만화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것에서부터 국제적인 종목에 이르기까지 널리 스포츠가 보급되어 있다. 축구, 전통무술, 겨울스포츠, 야구, 수상 스포츠등이 특히 대중화되어 있다. 외국에 잘 알려진 또 다른 전통 일본 스포츠로는 스모가 있다. 면이나 비단으로 만든 두껍고 무거운 샅바(마와시)만을 두른 거구의 두선수가 서로 쓰러뜨리거나 동아줄을 둘러친 원형의 씨름판 밖으로 밀어내는 경기다. 경기 시간은 보통 1분 미만으로 매우 짧으며, 눈깜짝할 새에 끝나기도 한다. 모든 경기는 정화의 표시로 씨름판에 한줌의 소금을 뿌리는 의식으로 시작된다. 스모 선수들은 열광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10대 중반에 시작하여 수년간 훈련한다.

일본에서는 야구와 축구가 특히 인기 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유명 선수들로 구성된 프로축구팀에 대한 일본 축구팬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프로축구는 1992년 출발과 동시에 성공적인 J리그를 이루게 된다. 또 다른 열렬한 팬들을 가지고 있는 스포츠가 야구다. 전국 고교 야구대회는 매년 봄과 여름에 2회 열린다.

IX. 과학기술

일본은 우정성(MPT)이 통신 및 우정 부문의 규제기관으로 통신시장과 기술정책, 면허발부, 요금 및 번호계획 승인, 무선주파수 관리감독 등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52년 일본전신전화사(NTT)가 독점 기업으로 설립되었고, 1953년 KDD가 민영기업으로 설립되어 국제 통신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97년부터는 국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1985년부터 통신시장의 자유로운 참여로 인하여 독점사업을 해오던 NTT와 KDD는 새로운 경쟁시대를 맞이하였다. 1998년 현재 자사 전송설비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1종 사업자가 142개 있고, 제1종 사업자에게 전송설비를 임대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제2종 사업자는 5,870여 개가 있다. 교환망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NTT의 교환망은 1998년 100% 디지털화되었다.

셀룰러 전화서비스는 2000년 현재 이동전화 가입자 6388만 명에게 제공되고 있으며, 데이터 통신은 전용회선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인터넷과 기업의 근거리통신망(LAN)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1997년 7월 현재 인터넷 접속 사업자수는 1종 통신 사업자 8개를 포함하여 2,000여 개에 이르고 있으며, 인터넷 가입자수는 2000년 현재 2706만 명을 넘었다.

1997년 현재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방송사는 아사히 신문사가 소유하고 있는 민영방송사로 아사이 내셔널 브로드캐스팅과 후지 텔레비전 네트워크, 공영방송사인 NHK와 니폰 텔레비전 네트워크(NTV), 도쿄 브로드캐스팅 시스템(TBS)이 있다. 지역 방송사로는 칸사이 텔레캐스팅, 요미우리 텔레캐스팅, 마이니치 브로드캐스0팅 시스템이 있다. 1998년 6월 말 인터넷 접속을 제공하는 30개 사업자를 포함하여 총 41개의 CATV사업자가 제1종사업자로 등록되어 있다.

X. 대한관계

한국과 일본은 예로부터 문화적으로 폭넓게 교류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한국보다 먼저 개국을 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실현한 일본은 근대 열강의 세력이 한국에 밀려들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는 청(淸)·러시아와 더불어 한국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76년 한국은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게 되면서 개국을 하였으며, 그때부터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으로 청·러시아 세력을 물리친 일본은 한국으로 하여금 강제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한일협약(韓日協約)을 맺게 하고,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어 한국에 통감부(統監部)를 설치하였다.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고, 전국에서 의병들의 봉기가 잇따르는 등 거국적인 항일(抗日)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통감부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대체하여 식민지 통치를 실시하였다. 총독부는 무단정치(武斷政治)를 단행하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는 한편, 경제면에서는 한국을 일본의 독점적 상품시장 및 식량·원료 공급지로 개편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먼저 화폐·금융·수송·통신 등의 유통기구를 정비하고, 한국민족자본의 산업자본화를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하에 광대한 토지를 농민으로부터 수탈하였다. 그와 같은 식민지 정치에 대한 항거가 국내외에서 항일의거 및 독립운동으로 계속 나타나다가 1919년 마침내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한편 4월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 후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3·1운동은 일본의 무력 앞에서 수많은 사상자와 투옥자를 낸 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으나, 한국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한편, 일본으로 하여금 종래의 무단정치를 완화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정치의 실시로 언론·출판·결사·집회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허용되어 한글로 된 신문·잡지가 발간되고 각종 단체, 특히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정책전환은 효과적인 식민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비밀결사와 그 운동의 표면화를 노린 계략에 불과하였다. 국내에서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1930년까지 지속되었고, 해외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이 만주 일원 및 시베리아 등지를 거점으로 끈질기게 지속되다가 만주사변 이후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에 통합되었다. 한편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부터 한국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성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력자원 및 값싼 식민지 노동력의 착취를 전제로 일본독점자본의 한국진출이 본격화되었다. 동시에 한국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을 강화하여 한국어교육의 금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의 강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구송(口誦), 신사참배 강요 등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태평양전쟁 중에는 한민족에 대한 탄압과 착취가 한층 심해져서 1938년 ‘지원병제’, 1939년 ‘징용제(徵用制)’가 실시되어 한국 청·장년에게 병역·노역(勞役)이 강요되었고, 1942년에는 지원병제가 ‘징병제’로 바뀌었다. 또 한국학생에게도 일본학생에게 과해진 ‘학병제(學兵制)’가 똑같이 과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각계각층의 한국국민이 농산물 공출, 유기(鍮器)·철물 등 군수물자 공출, 군용기 헌납금 갹출, 송근유(松根油) 채취 등 패색이 완연한 전쟁을 강행하려는 그들의 억지시책에 시달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 한국은 그 동안의 독립운동의 결실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對日)강화조약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여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회담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회담진전을 저해한 주된 요인으로는 1953년 10월 제3차 회담에서의 구보타[久保田]망언사건(일본측의 대표 구보타가 “일본에 의한 1936년 간의 한국통치는 한국에 유익한 것이었다”고 망언한 사건), 1959년 8월 일본과 북한 적십자사 간에 체결된 재일교포 북송협정 및 일본의 독도(獨島) 영유권 주장 등을 들 수 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면서 그 해 11월 최고회의의장 박정희와 일본총리 이케다[池田] 간의 회담,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大平] 메모’ 작성 등 한·일관계의 조속한 타결을 위한 양국의 노력이 경주되어 1965년 6월 22일 ① 기본조약, ② 어업협정, ③ 경제협력협정, ④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협정, ⑤ 문화협정의 5개 협정으로 된 한·일협정이, 이어 1966년 3월에는 무역협정, 1967년 8월에는 항공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후 양국관계는 특히 경제면에서 급속히 진전되어 1967년 이후부터는 한·일정기각료회의를 발족시켜 연례회의를 개최하고 있으며, 1981년 4월 한국측에서 제기한 대일(對日) 차관교섭은 1983년 l월 대통령 전두환과 일본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간의 정상회담에서 최종타결을 보았다.

그 결과 정부개발협력자금 18억 5000만 달러, 수출입은행 차관 21억 5,000만 달러를 합하여 총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연리 6%로 대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일무역적자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시정요구가 있었으나 일본은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가 1993년 11월 대통령 김영삼과 일본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간의 정상회담에서 경제관계의 균형적 발전을 협의하기 위한 ‘한·일신경제협력기구(NIEP)’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국과 일본이 주요 무역상대국이라는 양국 상호간의 인식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미국에 이어 제2위의 수출상대국이면서 동시에 미국을 앞지르는 제1위의 수입상대국이고, 또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미국에 이어 독일과 맞먹는 제2∼3위의 수출상대국이다. 1994년만 하더라도 일본은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이 135억 2285만 달러인 데 비해, 수출은 253억 8998만 달러였다. 1998년에는 수입 122억 4000만 달러, 수출 168억 4000만 달러, 2001년에는 수입 161억 달러, 수출 260억 1000만 달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계속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한·일기본조약을 위배하면서까지 민간차원을 빙자하여 대(對)북한접촉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 정부관계자들의 망언 등으로 한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1994년 5월에는 법무장관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가, 8월에는 환경청장관 사쿠라이 신[櫻井新]이, 10월에는 통산장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가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구미열강으로부터 아시아제국(諸國)을 구하기 위한 방어전쟁이었다”라고 망언을 하는가 하면, 1995년 6월과 10월에는 전(前) 부총리 겸 외무장관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와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한일병탄조약의 합법성을 주장하여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양국이 공동개최하게 되었고 1999년 3월 총리 오부치 총리의 방한 때 한·일문화교류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1998년 10월 대통령 김대중의 국빈 방일시 양국 정상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이에 따른 부속서인 '행동계획'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은 현재 해당 부처별로 후속조치를 추진중이며, 양국 외교부에서 추진상황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2001년 10월과 2002년 3월에는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히치로[小泉 純一郞]가 방한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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